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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9장 22절(가락-출교)160301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9장 22절을 할 차례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라고 되어 있지요.
이 문장에서 두 개를 한 번 연결해봅시다. 출교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가 아니라 출교하는 것이 무서운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출교하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했는데 까짓 것 출교 당하면 되는데 그게 왜 무섭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은 태어난다고 인간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 시대가 사람으로 받아줘야 인간이 돼요. 다른 말로 그 시대에 부합이 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게 됩니다.
“그러면 산 속에 혼자 살지.”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산 속에 혼자 살면서 아무리 본인 스스로 ‘나는 인간입니다.’라고 해도 산 밑에 내려가면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합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까짓 것 뭐 너희들이 사람 취급을 하든 말든 나는 나 스스로 사람이라고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것은 이론상입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고 나는 주님과 함께 살래.” 하고 산 속에 움막을 짓고 올라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딸이 “아버지, 나 이번 토요일에 결혼식 하는데 내 손 잡고 입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라고 화를 내면서 이야기할 거에요, 아니면 웃으면서 “아가씨 누구세요?”라고 이야기하겠어요? 화를 내면서 이야기하겠지요. 그런데 화를 냈다는 말은 마음이 아프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나한테 딸자식이 있다는 것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앙금처럼 남아 있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그냥 나 혼자 살래.”라는 말은 거짓말인 겁니다. 나 혼자 산 게 아니고 ‘누가 뭐래도 저 딸은 내 딸이야.’라는 식으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이상, 그 말은 억지입니다.
억지를 부린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야.’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 거지요. 그리고 화를 낸다는 것은 그냥 몸뚱아리만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 뭔가가 덧붙여져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 거에요.
이 몸을 나를 제외한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간이라고 대접해줄 때 나는 사는 재미와 보람과 희망을 갖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눕시다. 첫째는 벌거벗은 생명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아이가 갓 태어나서부터 한 육 개월까지 그냥 기저귀만 차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그 모습과 유사한데 이것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합시다. 두 번째는 공동체에서 사람다운 사람인데 첫째에서 두 번째로 이동하려면 여기에는 보호자가 필요한 거에요. 키워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키워줄 때 그냥 밥만 먹입니까? 개나 고양이라면 사료만 주면 돼요. 그런데 사람은 젖만 주고 밥만 먹이면 그 사람이 공동체에서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까? 안 되지요. 이 벌거벗은 생명에 플러스(+)가 주어지는 거에요.
이 플러스가 오늘 본문의 주제인데 법이라는 겁니다. 아까 내가 강의 할 때 뭐라고 했어요? 그들이 출교할까봐 무서워하지요. ‘왜 출교하는 게 무섭지? 돌았나? 내가 그냥 밥 먹고 장사하고 농사 짓고 살면 되지 그 출교가 뭔데?’
그 출교가 뭘까요? 옛날에는 폴리스(하나의 정치적인 공동체), 그 마을에서 추방되면 그 사람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취급받는 겁니다. 앞에다가 이 말을 붙이면 더 이해가 되지요. 한낱 아무것도 아닌, 또는 별 볼일 없는 목숨이에요.
‘네가 없어져도 상관 없어.’ 죽든 말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벌거벗은 생명입니다. 어느 정도로 이 생명이 무가치하냐 하면은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감히 너 같은 인간이 교회에 오다니, 하나님의 성전에 올 수 없을 정도의 벌거벗은 생명을 법이 분류해요.
법에 의해 분류당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추방이 되는 겁니다. 추방이 되는 그 반대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는 법 아래 있는 것 맞지? 그지?”라는 자긍심과 자부심이 발생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고대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에요.
그 방식의 핵심은 법입니다. 여기까지 여러분 이해가 되시겠지요? 별로 어려운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하면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분들은 이야기하지요. ‘법은 도대체 어디서 왔습니까?’라고요. 지금 법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릴께요.
혼돈(자연상태)에 법을 주입시키면 여기에서 질서(문화, 문명)가 생기는 겁니다. 두부를 만들 때 콩을 갈아놓고 거기에 간수를 부으면 응고가 되면서 두부가 되지요. 그처럼 법이라고 하는 것을 개입시키면 질서가 되고 문명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쯤해서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혼돈이 옳습니까 질서가 옳습니까? 어느 것이 정의롭고 의롭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에요. 혼돈스럽게 사는 것이 정의롭고 옳은 일입니까 아니면, 질서정연하게 문명(조직체)을 만들어서 사는 것이 옳습니까?
어는 것이 옳습니까? 대답은 둘 중에 하나인데요. 세상에서는 질서가 옳은데 하나님께는 혼돈이 옳아요. 그래서 질서가 혼돈을 무시하고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히브리서 13장 12절에 나와요.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성문 안입니까? 밖입니까? 성문 밖으로 나가지요? 예수님이 추방되신 거에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재판을 받고 예수님이 추방되셨지요?
왜 예수님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해서 추방하는 거에요? 그를 추방해야 반대급부로 본인들의 법질서, 법감정, 본인들에게 현재 확보된 문명, 그리고 공동체가 스스로 자기들끼리 정당화되는 겁니다.
법이라는 것은 적용하기 위함이 아니고 분리시키기 위함이에요. “너는 우리 편이야? 적이야?”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가정에서 그렇잖아요. 자식을 보고 “너 그렇게 부모 말 안 들으려면 나가. 네 호적 판다.”라고 하는데 호적을 팔 때 나는 무엇으로 파는지 모르겠어요.
삽으로 파는지 호미로 파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라면서 내보내고 엄마는 용돈 들고 올라가서 “야, 네 아버지 성질 알지? 그지? 조금만 참아라.”라고 하면서 도와줍니다. 아버지는 또 엄마가 자식 도와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합니다.
이 말은 자식을 내보내겠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쳐놓은 법질서에 동의하게 되면 그제사 내 자식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체가 기저귀를 차고 벌고 벗고 왔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다가 추가해서 뭔가를 덧붙여야 우리집 사람으로 내 자식으로 간주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그 법을 누가 자식에게 뒤집어씌우고 누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겁니까? 부모지요. 그러면 부모가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부모는 어디에서 생긴 부모입니까? 지금 부모가 법을 가지고 자식에게 강요했잖아요. 그러면 강요된 법은 어디에서 생긴 거지요?
부모 위에 또 뭐가 있겠어요? “나는 이런 자식을 우리 집안에 둔 적이 없다.” 갑자기 집안이 되지요. 제 이 말이 어렵습니다. 하나의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법감정이 개인보다 많은 가족의 법에 의해서 점검 받아야 되고 허락 받아야 돼요.
아무리 나는 11시, 12시까지 놀고 싶어도 “우리 집안은 딸자식이 10시가 넘어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 하면 본인이 조정을 해야 돼요. 왜? 조정을 안 하면 용돈도 없어요. 그러면 “아버지 알았어요. 내가 10시까지 들어올께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위에 또 더 넓은 범위에서 다른 전통(법), 예를 들어 아가씨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안 된다든지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옛날 우리 클 때 이야기인데요 이화여대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지도 못하고 결혼한 아가씨는 이화여대를 자퇴했어야 돼요.
지금 이야기하면 정말 무슨 귀신이 나오는 옛날 시대의 일인데 실제 이화여대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대 나온 여자는 화투만 잘 치는 게 아니에요. 진짜 이대는 알아줬고 특히 이대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과가 있었는데 취직도 안 되는 과에요. 가정과요. 우리 시절 이화여대 가정과는 최고로 쳐줬습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이 자기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든 간에 이화여대에 입학을 하면 누구의 법질서를 따라야 돼요? 예. 이화여대 학생이라면 미스코리아 대회에 못 나가는 거에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혼을 유보하고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화여대 나오면 그 나라에서 인정해줍니까? 아니면 더 큰 범위의 집단, 국가지요. 국가의 말을 듣지 않으려면 그 사람은 이민 가든지 교도소에 가든지 해야 되지요. 우리나라는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동성 간에 서로 “당신이 아름다워요.” 해가지고 같은 남자끼리, 여자끼리 둘이 결혼을 했다고 하면 결혼에 대한 모든 법적인 혜택은 하나도 없다 이거에요. 그런데 요새 이것을 인정해주는 나라가 더러 있잖아요. 그러면 이민을 가든지 해야 되지요.
이민을 간다는 말은 이쪽 법질서에서 사람 취급을 못 받고 벌거벗은 생명으로 취급 당하니까 이래서는 못 살겠다고 그 나라로 간다는 거지요. 그러면 산다는 것은 또 뭐에요? “나는 이래서는 못 산다. 죽어도 못 산다.”라고 할 때 그 산다는 의미가 뭡니까?
부부 싸움을 하면서 “나는 당신하고 더는 못 산다.”라고 할 때 그 “못 산다.”는 의미가 뭡니까? 내가 알고 있는 법질서에 대해서 당신과 지금 전혀 소통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사람이 법을 갖는 게 아니고 내 위에 있어서 나를 인간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따로 있는데 그게 법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법은 어떤 개인이 제공한 것이 아니고 혈연관계 내에 있어서 옛날부터 줄곧 우리한테 뒤집어 씌우면서 내려온 겁니다. 그러면 최초의 법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최초의 법이 궁금해요? 궁금하겠지요. 어디 성경을 한 번 봅시다. 상당히 무섭습니다. 아까 출교당하는 것이 무섭다고 했지요.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3~24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로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지금 이것을 이야기하는 게 라멕이지요? 라멕을 북한의 김정은으로 한 번 바꿔봅시다. 그러면 자, 김정은은 이 법에 저촉이 됩니까 저촉이 안 됩니까? 자기가 만든 법에는 본인이 저촉이 안 돼요. 그것을 가지고 예외규정이라고 합니다.
예외규정이 없으면 법이 안 돌아가요. 법의 해석이 다를 때 법에 초월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 사람한테 물어야 됩니다. 법에서 벗어난 유일한 한 사람이 있어서 법이 거기에서 쏟아지는 거에요.
“우리 집은 어떤 애도 10시 이후에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10시 이후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지킬까요 안 지킬까요? 아버지가 그것을 안 지킴으로써 자식이 아버지의 소유 대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자기(본인)가 법을 정해놓고 술을 먹고 11시에 들어왔다면 그때부터 그 법은 개판이 되어 버립니다. ‘씨, 지도 안 지켜놓고..’ 벌을 줄 사람이 없어요. 여기에 벌이 몇 배라고 했습니까? 칠십칠 배지요.
법이라는 것은 말로 끝나면 법이 아니고 징벌이 따라줘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징벌하는 사람에게 “너는 잘 났냐?”라고 하면 징벌 자체가 안 되지요.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고 함으로써 완전히 질서 있는 세상을 혼돈으로 바꿔 버렸어요.
“피고는 사형.” “판사 너는?” 이렇게 되어 버릴 경우에 도대체 어떻게 법대로 하겠습니까? 판사가 피고에게 “나도 매 맞아야 되겠네?”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법은 진리가 아닙니다. 임시땜방이에요. 법은 그 시대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냥 임시적으로 가동시키는 징벌체제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게 되면 출교를 당하는데 “출교 당하면 당하지.”라고 당하는 것이 아니라 출교가 무섭다는 거에요. 그런데 왜 이것을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사람이 있음으로 된 세상이 아니고 사람보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억압하고 지배하고 뿐만 아니고 사람들이 그것을 요청하게 되어 있어요.
그냥 통제와 지배만 하는 게 아니고 “아이 좀 그랬으면 좋겠어.”라고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법이라고 했지요. 법이 있음으로 벌거벗은 생명, 갓난아이도 법이 추가되어서 그 법에 통제를 받는 순간, 그 주변 사람에게 “저 사람은 인간 다운 인간이야.”라는 평을 받겠지요.
그 다음부터 문제가 돼요. 그 평을 못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평을 못 받게 되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그들은 무서워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누가 제일 먼저 시작했느냐를 묻는 거에요.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하면 창세기 4장 23절에 라멕이 그것을 시작한 거에요.
그 최초의 법이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내가 제정한 법에 대해서 이의를 걸고 대들면 맴매한다. 맞아도 많이 맞는다. 이것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시대에 돌입되었다는 겁니다. 그 라멕이 하나님 노선이에요 아니면 마귀의 계열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마귀의 계열이지요.
여기에서 나온 것이 사람은 죽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고 내가 살아 있으면서 사람 대우를 못 받는 것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거라는 거에요. 제가 오늘 낮에 어떤 오피스텔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죽음의 선취(미리 취하는 것)라는 말이 있어요.
죽는 것이 무서울까요. 죽음의 선취가 무서울까요 어느 게 무섭습니까? 죽기 직전이 무서울까요 죽고 난 뒤가 무섭겠습니까? 죽기 직전이 겁나는 거에요. 죽으면 되는데 그 죽기 직전에 오는 고통이 죽는 고통보다 더 심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그 젊은 분들에게 이야기했잖아요. 90이 되고 80이 되어서 죽는 게 아니고 그 죽음이 우리에게 미리 주어진다고 했거든요. 간단해요. 죽음이라는 것을 나 맛보고 싶어. 또는 죽음이 어떤 것일까? 나 죽기 전이라서 모르겠는데 그래도 죽음이 어떤 걸까 맛은 보고 싶어.
라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그래도 궁금해 한다고 치고 제가 알려 드릴께요. 내 뜻대로 안 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 뜻이니까 나의 뜻이잖아요. 나의 뜻은 오늘 강의 시간 내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것은 법이고 이 법은 내가 속해 있는 그 공동체가 나에게 강요한 질서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시겠지요. 이해했다고 치고 아까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법을 원하십니까 혼돈을 원하십니까? 혼돈을 원하지요. 그러면 무엇에 겁을 안 내야 되고 무엇에 겁이 나야 옳습니까?
법질서를 위반하는 것, 혼돈은 겁이 안 나야 되고 법대로 사는 것이 혼돈의 입장에서는 더 겁이 나야 돼요. 제대로 지금 바르게 착하게 사는 것이 겁이 나야 된다는 말이지요. 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이미 내가 갓난 아기 때부터 떨어져 있거든요.
갓난 아기 때부터 내가 만약 20살이라면 20살까지 각양각종 법과 잔소리와 지시와 하달된 명령으로 양육 받고 교육 받은 것으로 가득 차여져 있지요. 나는 10시 이전에 집에 와야 돼. 한 번도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어.가 도리어 나로 하여금 벌벌 떨게 만드는 거에요.
나는 이 정도로 착하고 선해. 나는 어느 집에 가도 쟤 뉘 집 아들이야? 아이구 세상에 저렇게 착할 수가 있어? 이런 칭찬으로 더덕더덕 도배를 한 거에요. 더덕더덕 이야기를 하니까 아까 수제비 먹은 생각이 납니다. 그 수제비 조각처럼 더덕더덕 우리에게 묻어 있는 거에요.
이 묻어 있는 데에 행여나 때가 묻을까봐, 오점이 될까봐.. 때는 묻으면 지우면 되는데 인간의 죄는 안 지워지잖아요. 혹시 아이그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그렇게 살아? 그런 소리가 들릴까봐 길을 가는데 아이그 사람이 뭐 저렇게 해.
당신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했어? 갑자기 화를 내는 거에요. 화를 낸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무섭다는 거에요. 정상이 아니지요. 뭔가를 의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지켜야 된다는 것이 강렬해요.
이것을 지킬 때 나는 나답고 이것을 못 지키면 내가 아니라는 거에요.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요? 내(내 본성)가 아니고 내 주변에 나에게 관심을 두고 나한테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 너는 나한테 보통 자식이 아니거든. 내가 대학까지 키워줬으면은 네가 알아서 취직해가지고 이 부모를 기쁘게 해야 돼.
이게 계속해서 잔소리로 들오어는 겁니다. 그 잔소리를 달리 표현하면 이래요. 아까 창세기 4장 23절 말씀을 약간의 버전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라멕에게 대든 사람에게 벌이 77배”라고 했지요. 우리 안에 음성이 나와요. 아버지께 대들면 불효자 중에 불효자야.
이게 그 창세기 4장 23절의 새로운 버전으로 나의 본질을 형성합니다. 나는 어떠한 행동을 해도 아버지의 명예(이름)을 생각해서 조신해야 되고 함부로 행동하거나 까불면 안 돼. 왜? 아버지가 지켜보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너는 나중에 판사가 될 인간이야. 라고 했는데 그만 아버지가 사법고시 준비하는 중에 돌아가셨고 그 아들이 나중에 판사가 되고 난 뒤에 그때 제일 먼저 소주병 들고 오징어 하나 구워서 아버지 무덤에 가가지고, 아버지 이 불효자는 웁니다. 진작 돌아가시기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야 되는데 이제야 아버지 앞에 옵니다. 라고 할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은 “드디어 효자. 효자.” 하면서 박수를 치지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불효자는 웁니다.’입니다. 가사를 한 번 보세요. 애절해요. 이 못난 자식이 이제 돌아왔다는 거에요. 그 동안 효도를 못해서 죄송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요즘 같은 세상에 아버지까지 생각하는 저런 착한 자식이 어디에 있느냐
그 인간 나중에 장가 가게 되면 그 자식은 이제 죽었어요. 나처럼 효자 안 되면 그 자식은 자기 공동체에서 출교 당합니다. 자, 이제 오늘날 교회로 돌아옵시다. 교회법을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들이 만들었지요.
목사나 이런 사람들이 교회법을 만들면서 교회에서 법(질서)을 지킨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할까요 싫어한다고 할까요 그들 교회 내에서 말이에요. 기뻐하신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집사에서 장로가 되는데 재직의 1/3 찬성이라는 법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레미야서나 히브리서에 그런 것이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런데 그들은 장로가 되면 또 감사기도를 한다고요. 자기가 만든, 자기가 기뻐하는 그 질서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지금 십자가가 빠진 거에요.
재직의 1/3이 찬성해서 장로가 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때문에 영광을 받습니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고 빌립보서 2장 11절에 분명히 나와있지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코스는 이미 확정이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확정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확정된 법은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았습니까 배척 받았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출교시키고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버리고 또 예수를 믿는 사람까지 출교한 그 시대상, 그 제자들과 예수님을 출교시키고 그 남은 사람들은 그러한 출교의 조치에 대해서 본인은 아쉬워해요 당당하게 느낍니까? 그 사람들은 당당하게 느끼지요.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자를 단칼에 베었다고 당당하게 느끼지요. 그러면 그들만 당당하고 오늘날 우리들은 당당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사람들을 욕할 수 있느냐고 제가 그것을 묻는 거에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이 사람들이 출교를 할 때 그들이 주장하는 법을 집어넣었어요. 법은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 했지요. 그때 그 법에서 예외된 사람이 있었지요. 그게 지도자잖아요.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말로 해서는 안 돼요. 책벌이 가해져야 되고 벌칙을 가하지 않으면 법은 효력이 없어요.
그런데 벌칙을 내리고 징벌을 하는 그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되요 안 지켜야 돼요? 그 사람은 법을 예외적용하는 겁니다. 어떤 책에서 보면 근친결혼을 못하게 했잖아요. 근친결혼을 못하게 한 최초의 법은 추장들이 제정한 것입니다.
추장들은 마음대로 근친혼인을 하기 때문에 이 추장급과 백성급을 나누기 위해서 법을 따로 조정한 거에요. 그래서 세습제로 피가 다르게 아예 우리는 혈족 자체가 왕질을 해야 될 족속이고 너희는 상놈의 더러운 피가 흘러야 질서가 돼요.
질서는 법의 유효성입니다. 법이 계속 일어나야 질서가 유지 돼요. 집안에 자식이 있는데 어떤 친구를 사귀더니 갑자기 머리를 홀라당 노랗게 물들이고 왔어요. 나는 언제 네가 이렇게 파격적으로 염색을 하는지 기다렸다. 반갑다. 친구야. 이런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걸요.
둘 다 또라이가 아니라면 없을 거에요. 일단 바께스에 물을 담아서 한 번 부어 버리고 가위를 쥐고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갑자가 염색하고 죽음하고 무슨 관계인지 모르지만) 이발소에 가서 염색을 다시 하든지 아니면 내 손에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라. (그래가지고 죽인 아버지는 없지만 하여튼)라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은 그 소리를 듣고 어느 쪽이 나한테 용돈이 많이 들어오는지 계산을 하는 겁니다. 일단 한 번 밀어부쳐서 내가 편하게 되는지 아니면 도저히 아버지가 바뀔 생각이 없으면 일단 물러서고 2년 뒤, 내가 군대 제대하고 보자든지 뭐 이런 계산을 하겠지요.
이게 바로 출교 될까봐 두려워함이에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당당하게 믿는 게 아니고 조심스럽게 믿지요. 그런데 조심스럽게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던 베드로란 말이지요.
그러면 이 말은 뭐에요. 예수를 믿는다고 다 우기는데 실제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게 요한복음의 주제라니까요. 이미 망가져 버린 인간을 자기 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바꿀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아무리 예수를 믿고 뭘 해도 구원이 안 되는 거에요. 우리는 이것을 즐거워해야 돼요. 아무리 해도 구원이 안 되는 것을 즐거워해야 될 이유가 있는데 사람이 망해도 다 망하면 괜찮아요. 속이 시원해요.
누구 하나가 안 망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데 다 망하면 괜찮거든요. 아까 우리 젊은 분들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 영화 제목이 “매드맥스”에요. 미친 인간 맥스라는 시리즈인데 이 세상이 이 영화를 많이 보고 젊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호응이 되는 것은 이 영화의 특징 때문이에요.
그것은 다 망한 거에요. 에잇 이 더러운 세상에서 죽도 밥도 안 될 거면 아예 다 망해버려라. 특히 취직이 안 된 젊은 사람들, ‘에이 이놈의 세상. 취직도 안 하고 결혼도 못할 거며 아예 다 망해버려라.’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이렇게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요.
회사에 오래 다니다가 퇴직을 하게 되면 “그 동안 참 고마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나를 쫓아내? 에이 씨발. 이 회사 문 닫아 버려라.” 교회 다니다가 교회 목사가 나가라고 하면 “에잇, 이 교회 이단 돼라.”라는 식으로요.
갑자기 왜 그런 질투와 투기를 부립니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법에서 추방 되면 자신이 혼돈 상태에 빠지고 이 혼돈 상태는 그쪽에서 봤을 때, 또 그 동안 익숙해진 본인의 법감정에 의하면 자기는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여전히 저쪽을 보는 안목을 유지하면서 그쪽이 가진 그 모든 명성에서 배제되었으니까 화가 나는 거에요.
‘왜 나는 저쪽이 인정하는 사람과 같이 어울리지 못할까?’ 하는 그들로부터 발길이 채였다는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자진해서 발길로 차였잖아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믿을 사람이 없어요. 제자들도 못 믿었어요. 그래서 어떤 강도는 말하기를 “보자, 지금이라도 이 십자가에서 나를 내려오게 해서 나를 구원할 수 있으면 당신을 믿고 나를 내려오지 못하게 하면 당신을 믿을 의사가 없네요.”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그 강도는 구원 받지 못한 강도인데 그 강도는 본인의 혀로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본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껍데기로 사용해서 그 인간 안의 기존의 사고방식을 그 사람이 대표해가지고 자기 입술로 그대로 고백을 하는 거에요.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는 십자가에서 기적적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메시야로 인정해 줄 수가 없습니다.”라고 자기가 사는 세계를 대변해주는 대변자 역할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강도는 뭐하고 합니까?
“이 사람아,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까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그래놓고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이지요? 예수님 나라에 가시거든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그러니까 이 구원 받은 강도는 자기의 위치가 그 동안 자기를 강도라고 욕하던 위치가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는 위치에 속한 거에요.
그래서 본인은 신난 거에요. 지금. 주와 함께 낙원에 가는데요. 심지어 강도질까지 했잖아요. 강도질을 했는데 이쪽에서는 안 받아주고 강도라고 차버렸는데 주님께서는 강도질을 했든 세리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받아주는 그런 세계가 우리한테 일찍 들이닥쳤으니까 그 강도는 그 사람이 바로 오실 메시야라고 이미 감을 잡은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메시야라는 겁니다. 이쪽 세계에 통하는 메시야가 아니고 감추어진(숨겨진)세대에 속한 사람만 납득이 되는 메시야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고 양쪽에 두 사람을 데리고 달린 십자가가 됩니다. 그래서 당시에 십자가가 세 였어요. 의미가 있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예수님도 인간이고 양쪽 다 인간인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달랐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나를 풀어주면 당신이 메시야인 줄로 믿겠습니다. 그런 기적을 베풀게 되면 나는 당신이 믿지 말라고 해도 당신을 믿겠습니다.”라고 한 사람은 마귀의 세계에서 마귀의 질서(법)에 의해서 조작된 가짜 인간이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는 쪽은 이쪽 세계와 분리된,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쪽 세계, 법 속에 갇힌 인간이 법을 초월한 주님과 함께 하는 인간으로 자진해서 뚜벅뚜벅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성립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안 되지요. 왜 안 됩니까?
무섭다는 것은 기존의 내 안에 들어있는 평가(평판)를 내가 스스로 포기하기 싫다는 거에요. 이 평판을 유지하면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지 “너는 나쁜 놈, 쓰레기.”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면 본인이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를 어떻게 만드시냐 하면은 견디게 하는 게 아니고 남들이 성도를 보고 쓰레기라고 하잖아요? 주님은 우리를 보고 욕을 더해요. “맞잖아. 너 쓰레기 맞잖아!” 이런 식으로 해결을 합니다. 참 쉽지요. 해결하기가.
“너는 욕을 얻어먹어도 싸. 너, 몰랐어? 너 자신을 그 동안 왜 그리 몰랐어?” 그렇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이 주는 법보다 더 묵직한 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았어, 몰랐어?”
“저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알았는데요.” “에이, 이 쓰레기.” 이렇게 된 거에요. “네가 기도할 때 남들 보란듯이 기도했어, 안 했어?” “기도했는데요.” “에이, 쓰레기네. 이거. 네가 어떤 여자를 볼 때 마음속으로 간음했어, 안 했어?” “안 했는데요.” “그럼 못 생긴 여잔가 보다. 송혜교 지나갈 때 마음속으로 간음했어, 안 했어?” “했는데요.” “에잇, 쓰레기. 간음한 자.”
간음도 하고 “네가 너 싫어하는 자를 미워했어, 안 미워했어?” “미워했는데요.” “그럼 살인자네.” 이건 뭐 온갖 법이 다 적용돼요. 살인자. 간음자. “너 기도하면서 맹세했어, 안 했어?” “맹세했어요.”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저촉이 안 되는 법이 없어요. 제가 이번 주일날 설교에 진짜 어려운 설교를 했어요. 인간의 주체는 조각이 났기 때문에 조각난 것에 대응해서 율법도 조각조각 다 지적한다고 했어요. 이것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것이고 아니면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거에요.
인간은 어슬프게 봉합된 조각들의 봉합이거든요. 그 조각난 어설픈 집합에 불과한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법 조항들을 줘버린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은 지켰는데 저것은 안 지켰다고 계산을 하겠지요. 그것이 본인이 조각났다는 뜻이에요.
나는 온유는 되었는데 아직도 내 처자식은 미워하지 못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어떤 법은 지켰고 어떤 법은 못 지켰다고 여기는 그것 말이에요. 술 취하지 말라고 해서 그것은 잘 지켰는데(원래 술이 안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그 말씀은 지켜요 못 지켜요?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지니까 되는데 겨울철에는 해가 왜 그렇게 빨리 지는지 독일 같은 경우에는 새벽 4시에 해가 진답니다. 새벽 3시 59분이 되면 미워하는 것을 빨리 정리해야 돼요. 4시가 넘으면 이게 죄가 된다고요. 그런 식으로 못 지키잖아요.
그러니까 도대체 인간은 내가 누구냐를 규정하면서 그냥 규정하지 않고 부모, 목사, 이웃 사람들, 내 동창 친구들, 그런 사람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그 요구하는 것을 나는 얼추 지켜줬다는 그 괜찮음을 이만큼 쌓아가지고 자기 내부를 꽉꽉 채운 거에요.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을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구원자(메시야)들이 아니에요. 구원자도 아닌데 그 사람들의 말을 왜 그리도 잘 듣는지요. “그래도 부모 말을 들어야 내 용돈을 줄 건데.” 용돈은 부모만 주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마음을 감동해서 부모의 손과 팔의 관절을 통해서 주게 되어 있어요.
“야, 돈 없지? 줄게.”라고 주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출발점을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지갑에 손을 넣는 아버지와 엄마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그게 습성화 되었습니다. 그럼 목사님의 말이 맞는지 실험해 봅시다.
그럼 아버지, 엄마의 말을 안 듣고 용돈을 주님이 주시는지 제가 실험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실험치 말라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일에는 시험하지 말라고 했어요. 양털에 이슬이 있고 하는 시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거든요.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거든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쓰레기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두 강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쓰레기가 되는 것을 본인이 두려워해요. 세리와 창기, 이런 소리를 듣는 것, 저주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사람은 가짜 자아를 그 동안 꾹 쥐고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척 하면서 지금 평생을 살고 있는 거에요. 죽는 것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 때와 시를 자기가 알아서 정해서 가겠다는 거에요. 90이 넘어서 내가 알아서 가겠다는 거에요.
그 정도로 쓰레기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쓰레기를 부르러 왔어요. 왜? 그 쓰레기가 주님의 의의 재료가 돼요. 바로 이 쓰레기를 내가 의인이 되게 했잖아. 그 가운데에 예수님의 공로와 희생이 들어가지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주님이 보시기에도 쓰레기고 내가 보기에도 쓰레기가 맞는데 이 쓰레기를 예수님의 공로가 가미되어서 하나님의 어엿한 의인으로서 주님과 같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주께서는 이 세상의 법을 가지고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드는 겁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께서 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벌벌 떨면서 살게 하느냐 하면은 벌벌 떤다는 말은 아직도 우리는 이 세상의 평가에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저 그들에게 굴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보이지 않는 왕이 누구냐 하면 마귀에요. 마귀가 법을 만들고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한 겁니다. ‘네가 그렇게 악하면 벌을 받는 거야. 네가 착해야 복을 받아.’ 이러면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말은 마치 우리에게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이미 악마가 나한테 그렇게 조작한 자화상을 집어넣은 거에요.
우리는 악마가 그런 인상을 줘도 모르고 남이 죽든 말든 나는 무조건 착해야 되고 무조건 구원 받아야 된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전부 다 나를 구원하는 쪽으로 내가 복을 받는 쪽으로 다 임의로 해석을 엉터리로 해버린 거에요.
내가 복을 받는 쪽으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성경말씀을 이렇게 보는 거에요. 지난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성경에 어떤 구절도 우리가 잘 되는 구절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쪽으로 가지 우리한테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이 법이 오게 되면 그 동안의 버릇 때문에 ‘잘 지켜야 복을 받고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 되어야 우리 새끼도 복을 받아.’ 참, 이 혈연관계라는 것이 예수님이 분명히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여튼 교회에 오는 부모들은 자식이 잘 된다고 하면 새벽기도가 뭡니까
자식이 기도를 안 하면 내가 알아서 기도할 테니까 그 복은 보험에 드는 식으로 자식몫으로 하라고 열심히 자식 대신에 기도 다 해주고 너는 공부나 해라. 나는 기도만 할게. 어디 한석봉입니까 나는 떡만 썰게.
이건 자식 사랑이 이런 지독한 게 없어요. 그게 마치 주님이 주시는 사랑인 줄로 알고요. 어머님 기도를 못 잊어서 돌아온 게 아니에요. 성경 히브리서 7장에 주님 기도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가는 거지 어머니 기도 때문에 가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의 기도는 맹세하지 말라는 것에 저촉되는 겁니다. 기도 자체가 맹세잖아요. 주여 제가 이렇게 기도할 테니까 반드시 주시옵소서. 이것은 맹세고 계약이고 흥정이고 장사치가 주님 앞에 지금 노닥거리고 있는 거에요.
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기도할 거 없네요.”라고 하는데 누가 기도하라고 했어요? 꼭 기도해야 됩니까? 기도하려는 그 의도가 뭔데요? 기도한다고 쓰레기가 아닙니까? 기도하려면 이렇게 기도하라 말이죠. “너는 쓰레기다.”라고 하면 “주여, 쓰레기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지요.
왜? 고린도전서 4장에 나오니까요. 하나님께서 너를 마지막 때에 쓰레기로 만들었다.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내가 지금 화가 나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왜 그 본문은 안 보이느냐 말이지요.
고린도전서 4장 이야기는 왜 안 보이느냐 말이에요. 그게 다 자기가 듣기 싫어서 넘겨뛰기 위해서 한 거에요.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도다” 왜 그런 본문은 안 보이는 척하고 있어요?
그래서 10분 쉬기 전에 제가 딱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존의 법에 의하면 쓸레기가 맞아요. 그런데 귀한 쓰레기에요. 버릴 게 없는 쓰레기라고요. 쓰레기니까 좋은 거에요. 아프니까 청춘이잖아요.
그러니까 쓰레기라서 주님 앞에 쓸모가 있는 거에요. 그런데 “십일조 했습니다. 주일 성수 했습니다. 저 어때요?” 자꾸 쓰레기가 쓰레기 아닌 척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안 씁니다. 그리고 “네가 쓰레기가 된 후에 그냥 오너라. 내가 의인으로 만들어 줄게.” 이것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주님이 소경을 눈 뜨게 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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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22절(가락-출교)160301b-이 근호 목사
둘째시간 시작해봅시다. 법을 예수님이 다 가져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23절부터 쭉 보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일방적으로 “네가 인정하는 예수는 우리가 보기에는 죄인인 줄을 몰랐느냐?”라고 기존의 법에서 유대인들이 이야기하지요.
“너 지금 예수님 만났다면서? 그 예수 이단이야. 몰랐어? 우리는 이미 결정했어.”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 출교될까봐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지난 시간에 했는데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출교가 왜 무섭다고 했습니까?
나의 사람됨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주변이 나를 인간으로 대접해줄 때에만 내가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초라한 같으면 “욕해라.”가 되겠는데 사람은 그렇게 대범한 자들이 아니에요.
누가 나를 욕하게 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난리나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뭐?”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그 소경되었다가 눈 뜬 사람이 “나는 모르겠고”라고 피해버립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자, 이제부터 아주 어렵습니다. 이것은 제가 설명을 꼭 하고 싶어요. “내가 아는 것은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눈을 뜨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어떻게 눈을 떴느냐고 묻고 싶겠지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자, 소경이 있고 그 옆에 한 집단, 판사들, 검사들, 변호사들이 우르르 와가지고 “너는 이단이다. 너 죽인다.”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야, 너 예수와 같이 있었다면서? 너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 때문에 네가 소경이 되었다면서?”라고 하니까 “나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는 모르겠고 다만 아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내가 소경이 되었다가 이제는 본다는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결과물이지요. 그러면 원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 예수가 어떤 식으로 해서 네가 눈을 떴느냐를 물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소경은 이 중간에 있는 과정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오늘날 교회에 이게 중요해요. 금식기도를 해서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거든요. 철야를 했다고 해서 성령이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지요. 십일조를 한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주일 성수 한다고 천당에 가는 게 아니거든요.
몸을 바치고 돈 바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왜 십일조를 해야 되고 주일 성수를 해야 되고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겁니까? 구원을 못 받아서 그래요. 구원을 받은 적이 없어서 그래요.
잘 보이면 행여나 두 번째, 세 번째 혹시나 좋은 기회가 오지나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것은 구원을 못 받았다는 그 티를 가리기 위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새로운 법을 자기한테 짊어지운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원합니까? 교인들이 원해요. 교인들이 원하면 목사는 장단을 맞춰주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거 원하지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 받고 복 받습니까? 그 방법을 원하잖아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이거 하시고 철야 하시면 방언 터집니다.”
방언이야 기도 열심히 하면 터지게 되어 있어요. “목사님 이렇게 하니까 성령 받은 거 맞지요?”라고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믿지도 않는 둘이 같은 질서를 이루다 보니까 둘 다 서로 신자라고 치하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젊은 분들에게 술 좀 먹지 말라고 해요. 왜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느냐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지난 주일날 결혼하신 박집사님이라는 분이 오셨길래 그 새댁을 붙들고 남편이 있는 데서 남편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내가 길게 설명했어요.
일단 결혼을 했으면 남편의 경제권을 다 뺏어버려야 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남편의 동선이 파악이 돼요. 용돈을 주게 되면 남편은 있는 용돈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기 때문에 멀리 뛰지를 못해요. 어디서 뭘 하는가가 다 파악이 된다고요.
두 번째는 술을 못 먹게 하라고 했어요. 술을 먹으면 사람이 허풍을 떨게 되어 있어요. “나 이렇게 잘 나가.”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분위기로 봐서 이 사람이 보증을 서게 되어 있어요. 사직서 내고 직장 때려치우고 투자하고 사업하게 되어 있다고요.
‘나 이 정도로 죽을 남자가 아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뿌리라도 잘라야지.’라고 하면서 사기꾼한테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본인 주제 파악을 못하고 사업을 벌여가지고 몽땅 다 날리게 되어 있어요.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어린 자식한테 담배가 안 좋아요. “아버지도 피웠는데?” 이렇게 되면 건강에 안 좋아요. 마약 같아서요. 냄새도 나고 꽁초를 버리게 되면 사회적 공익에 해롭고요.
그래서 그 세 가지를 남편이 옆 방 10cm 거리에 있는데 이야기했거든요. 이야기를 해도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새댁이 벌써 가져갔어요. 경제권을 다 뺏어가 버렸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얘기로 빠졌지요?
구원 받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구원의 모든 방법이 저 소경이 눈 뜨는 데에는 적용이 안 되네요. 그들이 알고 있는 천국에 가는 방법을 그 소경에게 아무리 적용해도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화가 나는 거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메타니즘(절차)에서 벗어나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단인지 아닌지 판정내리는 기준 자체를 자기들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자기 손아귀에 쥘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아는가 하면 소경이 알아요. 당신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질책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나는 모르겠고 다만 나는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 구원(성령) 받았는지 모르겠다.입니다.
왜요? 성령을 바람같이 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내가 오라고 해서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바람아 멈추어다오라고 해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모르겠고”라고만 하면 돼요. 방언을 어떻게 하는지 나는 모르겠고 다만 지금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면 그뿐이에요. 그뿐이에요.
내가 교회를 옮겨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에요. 복음을 들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돼요. 그러니까 이러면 돼요. “내가 복음을 잘 들었기 때문에..”라고 한다면 몇 시간 듣는 것이 잘입니까?
질적인 문제를 양적으로 규정할 수가 없어요. 두부를 한 박스 사는 것은 되는데 사랑 한 박스를 어떻게 삽니까? 요즘 시세가 어느 정도 됩니까? 이게 안 되거든요. 믿음, 의라고 하는 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육체적인, 물질적인 인간의 육으로 행동을 똑바로 한다고 해서 그 질이 양에 담기는 게 아닙니다. 그냥 결과물이에요.
그것을 우리는 주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왜?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셨다는 말은 내 쪽에서 새삼스럽게 손댈 것이 있다 없다? 손댈 게 없어요. 공식 하나를 제가 적겠습니다. 용서는 죄를 유발한다. 용서 받고 난 뒤에 죄를 덜 짓는 게 아니고 본격적으로 죄가 나타나기 사작합니다.
용서를 받기 전에는 본인이 본인을 구원해야 돼요.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성화되어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경우에만 구원이 돼요. 본인이 나서야 돼요. 본인이 주체가 되어가지고 말씀을 읽되 그냥 말씀만 읽으면 안 되고 실천에 옮겨야 되고 묵상만 해서는 안 돼요. 묵상해서 그걸 현실적으로 구체화시켜줘야 돼요.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나온 어떤 결실물들이 있어야 돼요. 술을 끊든지 담배를 끊든지 회개를 한다든지 뭔가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 방법은 이미 누구의 레이다에 걸려들었습니까? 예수님을 평가한 유대인들이 이미 다 가르친 것이고 그 동안 구약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던 거에요.
그걸 묻는 거에요. “네가 어떻게 되었느냐?” 소경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나는 모르겠고 다만 눈을 떴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나한테 어떤 작업을 했는지는 나는 모르겠고 주님이 와서 나았다는 그것만 저는 이야기할 뿐입니다.” 하니, 유대인들이 “네가 예수님과 한 패냐?”라고 합니다.
자꾸 한 패냐고 하는데 한 패이기 때문에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아니잖아요. “주님은 저하고 한 패입니다.”라고 하니까 눈을 뜨게 해줬습니까? 아니지요. 한 패도 아닌데 눈을 뜨게 해줬잖아요. 꼭 우리 같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을 지키기 전에 예수님이 우리와 한 패입니까?
한 패가 어딨어요? 자기 편밖에 없지, 무슨 한 패가 있어요. 26절에 봅시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네가 무엇을 하였기에 눈을 떴느냐고 묻는 거에요.
그러니까 거기 27절에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 “내가 이미 일러줬잖아요. 나는 결과물이라고요.” 그렇게 일러도 못 듣는 거에요. 소통이 안 돼요.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니이까” “답답합니다. 직접 당신들이 제자들까지 만나보세요.”
라고 하니까 28절에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라고 하거든요. 이 소경이 속으로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러면 나를 눈 뜨게 하든지..’ 왜? 자기들 원칙에서는 거룩한 안식일을 우회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주어지는 법이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소경은 뭡니까? ‘그것은 네 생각이고 안식일 법을 안 지켜도(안식일 법을 안 지켰다는 것은 모든 법을 안 지킨 거지요.) 성경이 이렇게 두껍고 여기에 나오는 그 많은 법을 하나도 안 지켜도(사실은 하나도 못 지킨 거지요.), 어떤 것도 안 지켜도 구원이 된다는 것을 왜 못 믿습니까? 나를 보고 믿어야지요.’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쪽에서는 ‘법을 안 지키면서 구원을 받는 그런 법은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경이 하는 말이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나는 한 것도 없는데 소경에서 눈을 떴습니다.’ 지금 그 논쟁이에요. 들어보니 굉장히 쉽지요? 그런데 이것을 기존교회에 적용을 시키면 이것이 문제가 되어 버려요.
구원을 받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됩니까? 1.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2. 복을 받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뭘 해야 된다. 몇 번입니까? 맨날 2번만 정답인 것은 아니지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구원을 받을 때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해주겠다는 그 원리가 장착되어 있지요. 그런데 구원 받을 때 법을 안 지켜도 구원이 된다면 구원 받은 자에게는 모든 법을 누가 몽땅 가져갔다는 말이에요?
우리한테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홀로 가져가셔 가지고 홀로 법을 지켜서 그 효력, 효과가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제시된 거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복을 받을 만한 남아있는 그런 계명이 있어요 없어요? 홀라당 다 가져가서 우리에게는 없는 거에요.
뭘 개코나 지켜야 복을 받고 벌을 받는데 이건 뭐 죄를 짓고 싶어도 어길 계명이 없는데 무슨 죄를 지어요? 그러니까 죄를 지어야 저주를 받으므로 저주를 받을 일이 없다 이 말입니다. 또 복을 안 받고 싶어도 이미 주께서 제시한 효력 아래에 복을 주기로 작정된 자이기 때문에 “아이고, 제발 복 그만 주세요.”라고 말린다고 해서 안 올 복이 아니에요.
추석이나 설이 되면 우리 김중우 집사님이 주소를 아는 사람에게 택배를 보내줘요.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우리들끼리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그 택배가 올 때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왜? 요청해서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오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김중우 집사님 선물뿐만이 아니고 구원도 그래요. 이미 하늘의 복이 내 기뻐하는 자에게 내가 기뻐해서 신부에게 드레스를 주겠다는 거에요. 요한계시록 21장에 화려한 신랑의 격에 맞는 신부의 격에 맞춘 화려한 영광을 주겠다는데 우리가 거부할 잽이 됩니까 안 됩니까? 거부할 자격이 안 돼요.
강도가 “오늘 밤에 저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멘트를 안 한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거기에서 주고받고 역할을 한 거에요. ‘아, 구원은 일방적이구나.’ 그리고 일방적으로 구원했을 때 ‘그리스도에게 모든 주도권이 넘어간다는 고백이 입에서 나오는구나.’를 표현한 거지요.
30절에 봅시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쉽게 말해서 “솔직하게 당신 무식하지?”에요. 그리고 이상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무식한 인간이 무식한 주제에 눈을 뜨게 한 우리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했다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아까 반박했지요. “어떤 기적도 안식일을 위반해서 오는 기적은 가짜고 마귀적이다.”라는 식으로 하겠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소경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처음부터 눈을 뜨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왔습니까? 아니지요.
그는 행인1이에요. 길을 가는 중이었는데 붙잡힌 거에요. 그리고 그냥 눈을 뜬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한테 이용을 당한 거지요. 숨겨진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는 그냥 가던 길을 가면 되는데 멱살을 잡혀가지고 그냥 끌려온 거에요. 여기서 하나 정리합시다.
소경은 메시야 기능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무슨 기능이냐 하면은 이 소경은 사회적으로 벌거벗은 생명,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요한복음 9장 2절에서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아예 죄인이라고 단정짓고 한 거에요.
그 말의 뜻은 “예수님 우리는 소경이 아니니까 지금 저주 받지 않고 복 받은 것 맞지요?” 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을 모르기는 똑같아요. 그러면서도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바로 이런 저런 경우를 다 겪고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 9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구원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라는 식으로 다 생각하는 거에요. 31절 봅시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말은 소경이 예수님을 변호하는 거에요.
32~34절에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추방을 통해서 메시야의 증인의 기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 뜨고 그 다음부터는 빠이빠이 했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면 그 역할이 다한 것이 아니라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통해서 주변에서 갑자기 시비를 걸지요. 시비를 거는 상황이 벌어지는 그것이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이 당하는 상황을 선취(미리 앞당김)해서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이 소경은 십자가 이전의 예고편을 보여줬다면 십자가 이후에 구원 받은 사람은 이와 같은 경우처럼 우리를 통해서 이 세대에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 받았다는 이 소리밖에 안 했는데 “네가 아마츄어가 되어가지고 이 총신 나온 나를 가르치느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너 그런 식으로 하면 교회 되겠어? 네가 구원 받은 것은 좋은데 헌금도 안 하고 예배 참석도 안 해버리면 교회는 누가 운영하고 교회 형광등하고 모든 비용, 내 월급과 건물 관리비는 어디에서 나오는데? 너도 머리가 있거든 생각을 해봐라. 구원 받았는데 헌금도 안 하고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교회 꼬라지 좋다. 너 같은 인간들만 있어서 예배 드리고 다 도망가버리면 청소는 누가 하는데? 여럿이 있으면 돈 쓰는데 돈 낸 적 있나?”라고 나올 때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실컷 배워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답변도 못해요. “푼돈 드릴까요.”라고 할까요, “아, 예수 믿었으니까 값은 해야 되겠군요.”라고 이야기할까요,“예수 믿었으니까 티는 내야 되겠군요.”라고 이야기할까요.
“교회가 있어도 구원이 안 되는데 왜 그런 걸 합니까?”라고 해야 돼요. 교회가 유지되어도 교회가 유지되기 때문에 구원이 생기는 겁니까? 지금 소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아니잖아요. “교회를 만들었더니만 구원이 되더라.” 지금 이게 아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 되었잖아요.
그러면 구원 앞에는 항상 뭐가 있어야 돼요? 어떤 문제도 무엇으로 번역해야 돼요? 이게 아무것도 아님으로 번역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래서 헌금을 안 한다가 아니라 헌금을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담겨서 헌금해야 된다? ‘이 헌금하는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해야 되고 헌금을 받는 교회측도 “여러분이 헌금했는데 이 헌금한 것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도 복잡해요. 이런 이야기까지 붙여야 되니까요. 자식이 어느 날 복음을 듣고 나더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자식이 하는 말이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안 해서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아버지께서 “밥 먹지 마라.”라고 합니까? “그래? 밥 먹어라.” 그런데 자식은 이미 알아요.
내가 밥을 먹는다고 해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젓가락질을 바르게 한다고 해서 구원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저는 60이 넘었는데 아직도 젓가락질을 못하는데 이거 해서 구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온 가족이 화기애애한 거에요.
아버지는 월급을 타도 “얘얘, 월급 좇지 마. 월급으로 네가 구원 받는 게 아니야.” 이러면서 내니까 전부 다 자기 부인이 되는 가정, 참 이상적인 가정이지요. “여보, 철 바뀐다. 나 백화점에서 옷 하나 살게.”라고 하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그래, 옷 사도 구원하고 상관 없으니까 옷 사.” “여보, 이왕에 옷 사는 김에 다른 것도 하나 살게. 이거 사도 구원하고 상관 없으니까 살게.” 얼마나 화기애애합니까?
왜 그렇게 못 살아요. 왜? 전에 이야기하기를 자유란 내 행동에 어떤 선택도 책임지지 않는 게 자유라고 했지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용서 받은 자에게는 뭐가 나오기 때문이에요? 비로서 네가 모르는 네가 모르는 네 자리가 어떠한 자리였다는 것을 용서 받고 난 뒤에 이제는 다시 찾아가는 거에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용서 받고 난 뒤에 이 주전버리를 먹든 안 먹든 상관없이 구원이라는 말은 마음대로 이것을 먹음에 대하여 선택이나 책임을 안 져도 되는 거에요. 여기에 일본 방사능이 있다고 해도 “있어? 그럼 먹고 싶어. 방사능 맛도 한 번 볼까?” 이래가지고 죽어도 괜찮아요. 왜? 죽어도 그것과 구원하고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에요.
내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 받지 않은 상태라면 늘 조마조마 해요. ‘내가 마음속으로 또 잘못된 생각을 했는데 이것 때문에 자식한테 영향이 미쳐서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내가 바보같이 새벽기도할 시간에 다른 짓을 해가지고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기존의 세계에서 이러이러한 존재가 될 때 너는 아버지다워라고 하는 평판이 이미 내 속에 나의 법으로 담겨 있었고 우리는 그 내가 만든 나의 잘남의 법에서 출교될까봐 우리는 날마다 노심초사 두려워하고 있는 거에요.
요한복음 8장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라고 했는데 말뿐이에요. 성경에 단어와 문장만 나왔지 우리는 자유를 구경도 못했어요. 북한 사람이 남쪽으로 오는 게 자유가 아니에요. 북한 사람은 북한에서 그냥 사는 게 자유에요. 북한 사람이 남쪽이 신앙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핑계입니다.
자본의 맛을 보겠다는 자유겠지요. 주님은 33살밖에 안 살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한 40년 살면 됐지 남은 여생을 거기서 살다가 왜 기어내려와가지고 저러나 모르겠어요. 여기 34절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이것을 통해서 이미 그 당시 신학을 우리가 정립할 수 있어요.
소경이 된 것, 특히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분명히 본인의 죄는 아니에요. 이것은 부모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부모의 죄 때문에 죄가 저주를 받아서 온다는 것은 가문의 저주이지요. 가문의 저주는 근거가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버리면 그 죄가 삼사대까지 이른다”라고 했어요.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엘리(아버지)가 한 잘못으로 인하여 자식들에게 죄가 일어나고 그 죄로 인하여 그 뒤에 엘리 가문이 작살이 나버립니다. 아들이 패가망신해버리지요.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나부터 똑바로 해야 내 후손들이 잘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이게 벌벌 떠는 거에요. 이게 아직도 나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에는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저주를 받는 조건부를 뒀지만 신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이 말은 이스라엘이 이미 망한 이유를 찾아봐라 이 말이지요. 잘해보려고 시도했던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네가 몰랐잖아. 죄를 안 짓고자 하는 그것이 죄가 된다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은 알겠지요. 망한 사람은 알겠지요. 망해도 모르지만 하여튼 다른 사람은 그걸 몰랐어요.
잘하겠다는 말은 그 선입견이 뭐에요? 아직도 나는 쓸 만하다는 뜻이에요. 60이 안 되었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쓸 만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죄를 지어도 아주 조상 대대로 죄를 지었다고 우리가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내가 나한테 적용시키는 판정을 그 소경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버리면 내가 본의 아니게 그 사람을 나보다 못한 2급 시민, 나보다 더 저주 받아야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을 바라볼 때에 ‘아이고, 저 소경은 안 되었네.’라고 하지 않고 ‘도대체 저 인간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렇게 소경이 되었는가?’ 하면서 그 사람의 신상털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당신 한 번 털어볼까요?
서울대학에 합격하면 착합니까?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 신상 털고 그냥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의 신상 털면 거기에 차이가 나는 거에요? 경제적으로 말고 질적으로요. 차이없어요. 35절 봅시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이 사람이 증인이 되지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그 소경을 쫓아냈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해서 예수님의 결과물을 그 시대의 공동체에서 추방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실 메시야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것 아까 히브리서 13장에 그분이 성문 밖에 추방당하잖아요. 추방당하는 그 지점이 하늘과 접선(콘택트)되는 지점이지요. 예수님은 추방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내 때가 되었군요. 스케줄 상 성경대로 나는 죽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스케줄이 있고 스케줄대로 쫙쫙 맞추어서 지킬 때만 지키는 거에요. 소득의 1/10을 드린다고 해서 십일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정 지키고 싶으면 억지지만 이렇게 하세요. ‘주여 십일조 낼까요 말까요 낼까요 말까요 때가 되매 냈습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미리 아는 때는 주님만 아시고 성도의 때는요 지나가고 난 뒤에 늘 후회하면서 다시 확인되는 게 때에요. ‘울면서 후회하네.’ 늘 울면서 후회하듯이 ‘아, 내가 잘난 체를 했구나. 내 힘으로 신앙생활 했다고 내가 착각을 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35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좀 힘든데요 힘들어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힘들어요. 35절에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했거든요.
이것에 대해 설명을 필히 해야 됩니다. 인자가 뭐냐? 지난 낮설교인가 제가 정리해드렸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란 구약의 말씀대로 등장해야 될 인물을 말합니다. 구약의 말씀이니까 이것을 두 자로 하면 이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대로 등장해야 될 존재를 인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자라는 말을 누구에게만 씁니까? 예수님 본인만 썼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빼놓고는 인자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빼놓고 아무도 구약을 몽땅 다 완성시킬 위인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자라는 말이 여러 군데에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다니엘 7장에 나오지요.
인자는 처음에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있다가 파견 근무하듯이 하늘에 있다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지요. 내려오는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내려오실 때 인자로서 내려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의 인자로서 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누가 메시야냐 할 때에 자기 호칭을 뭐라고 붙이느냐를 보고 네가 알아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내가 지어낸 게 아니고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어요. 그러면 구름을 타고 온다는 예언은 어디에 나옵니까? 다니엘 7장에 나오잖아요. 그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내가 구름 타고 온다가 아니라 자기를 뭐라고 합니까?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한다면 너희들이 그렇게 (다니엘 7장에서)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미 구름을 타기 이전부터 먼저 뭐로 온 거에요? 인자로서 온 거에요. 지금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인자라고 온 거에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올라가잖아요. 구름을 타고 올라갈 때 옆에서 멍청히 보니까 천사들이 뭐라고 얘기해요? 왜 자꾸 하늘을 쳐다보느냐?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실 분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이것은 어디와 연결을 시키라는 말입니까? 다니엘 7장과 연결시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다니엘 7장과 연결시킨다는 말은 예수님이 달랑 구름을 타고 오는 게 아니고 다니엘서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전부 다 동반해서 와르르 쏟아지듯이 다시 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오신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원래 지상에 있을 때에 인자 됨을 다 못 보여준 거에요. 어디에 가려있기 때문에요?
육신에 의해서 그 영광됨을 못 보여줬다가 이제는 그 주님께서 다니엘의 예언대로 그 육신의 몸이 영광된 몸으로 바뀌어지게 되면 그때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이 땅에 다시 등장하는 거에요. 그러면 십자가 믿고 또 재림을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바로 그분인 거에요.
십자가 지신 그분이 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복음(구원)의 내용은 재림도 아니고 부활도 아니에요. 뭐냐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바로 인간과 매치되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부활했는데 너는 부활 못했지? 약 오르지? 나는 재림하는데 너는 재림도 안 되지?’ 이게 아니고 ‘나는 너를 대신해서 네 죄를 가져오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바로 모두 다 이루었다.’ 그야말로 요한복음 식으로 다 이루었다의 핵심 부분이 됩니다.
그래서 이게 제 말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복음이란 것은 뭐냐? 그리스도가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십자가 그 다음에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재림이 복음이 아니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는 안다고 집어치워버리고 그냥 재림이 온다고 흰 소복 맞춰가지고 1992년 10월 18일에 온다고 높은 산에 올라가는데 생각해보세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은 우리를 뭘로 본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죽은 자잖아요. 죽은 자는 기다릴 게 없어요. 죽은 자는 왜 기다릴 게 없느냐 하면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물을 마셔야지 이야기가 돼요. 오전에 써먹은 건데 우리 이명직 강도사님 참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컵이 있고 다 먹고 남은 곶감 씨가 있어요. 자꾸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에요. 예수를 믿으면 곶감 씨,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거에요. 왜? 성경말씀에 그게 법이니까요. 예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자꾸 믿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우리는 이미 권력 속에 있다고 했지요. 곶감 씨를 컵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이 사람은 이미 아담의 죄 속에 놓여있다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게 뭐가 돼요? 아담이 벌여놓은(전파한) 또 다른 죄의 양상이에요. 구원 받고자 하는 게 죄에요.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아까 한 것을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묻겠습니다. 소경이 어떻게 해서 눈을 떴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다니까요. ‘나 소경 되어야지 그래서 우리 아버지 팔자를 고쳐야지.’ 이래서 구원 받은 게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한 게 없음을 계속해서 말하기 위해서 구원 된 거에요.
그냥 지나갔다니까요. 내 뜻도 없어요. 그냥 걸려든 거에요. 그런 것처럼 지금은 아담(컵) 안이 아니고 예수님(다른 컵) 안에 들어가버리니까 우리가 보여요 안 보여요? 컵에다가 써야 돼요. 오늘 컵 버렸어요.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거에요. 보고도 몰라요? 보고도 안 믿어지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이 안에서 그 환경 때문에 의가 되어버려요. 환경 때문에요. 그런데 이 사람을 끌어내가지고 백날 착한 일을 해봐야 이미 그리스도 밖은 죄가 되어 버린다니까요.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사를 보내든 죄가 돼요.
그러면 죄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본인은 죄, 의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왜? 안에서는 예수님이 하는 일로 의가 되는 거에요. 예수님 때문에 의가 되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때문에 의가 되는 일은 없어요. 그런 법은 성경에 없어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법은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이 소경처럼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그 결과물임을 내가 믿게 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나한테는 묻지 마세요. 왜 자꾸 나한테 묻습니까 이런 퉁명스러움으로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자꾸 나한테 헌금했다고 하는데 저는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헌금하게 하셨습니다.” “아이구 성도님은 겸손하게도..” ‘겸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겸손한 게 아니고..” “그래도 성도님은 어젯밤에 10만원 봉투에 넣었잖아요.” “글세 봉투에 돈을 넣게 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니까요. 요한복음 9장처럼. 나는 주께서 벌이고 있는 일의 결과물이라니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는 그쪽에서 기분이 나빠서 “주님이 당신 안방에 계셔서 자꾸 귀신처럼 왔다갔다 합니까?” “어느 방에 계시는지 나도 모르는데 다만 내가 주와 함께 있다는 게 믿어지는 결과물로 있을 뿐입니다. 어떤 메카니즘으로 안방에 있다가 부엌에 가셨는지 나는 모르겠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렇게 조져놨다는 것이 안 믿어지는 것이 정상인데 그것이 믿어지는 것을 나에게 따지지 마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37절에 나타납니다.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3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는데 비로소 믿는 게 아니고 “이미 그 동안 믿어왔던 것이 주께서 중심이 되어서 나에게 이런 결과를 야기시킨 것이 맞지요 내가 그것에 동의합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둘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물론 고스톱이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겁니다. 왜? 우리 둘이 역할극을 하고 연극을 했다는 겁니다.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요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그 출교 이야기를 합시다. 그 당시에 법이 가득 차 있는 세상, 유대인 세계에서 소경은 어떻게 소경이 되었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소경이 된 것 맞지요? 그러면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소경은 죄인이고 저주 받은 것이 맞습니다. 맞지요?
그러면 거기에서 눈을 뜬 사람은 누구 때문에 쫓겨났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았고 쫓겨났지요. 그 쫓겨난 공간에 지금 누구와 함께 있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저쪽을 쳐다보고 있지요. 홍해를 건너와 놓고 애굽을 쳐다보는 관점이에요. 홍해를 건너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고 이미 홍해를 건너와 놓고 보지요.
그러면 소경이라는 한 단어가 상황이 다르면 정 반대되는, 대충돌 되는 다른 개념으로 서로 대립이 되겠지요. 같은 소경인데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주님 쪽에서는 뭡니까? 저쪽이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소경이 되게 하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벌을 받으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소경이 된다는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제 질문입니다. 그들의 말에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서 소경이 된다는 말이 맞아요 틀려요? 오늘 강의 허사다. 맞아요 틀려요? 이게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죄를 지으면 저주 받아서 소경이 됩니다. 그런데 소경이라는 그 컨셉이 뭐가 됩니까? 주님이 봐서 눈을 뜬 너희들이 소경이다. 왜냐? 그래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하면 됩니까? “주여 소경이 여기 왔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간단하게 구원을 받아 놓고 “주여 제가 바로 눈 뜬 소경입니다.”라고 하면 돼요. “몰랐었더랬습니다.” 행함으로 십일조 하고 주일을 성수함으로써 그게 예배이고 교회가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어야 되는데 자꾸 한 게 생각이 납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티를 내야 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에베소서에 나온 것처럼 구원 받았느냐 이제는 서로 용서하라 이것 해야 구원이 유지될 줄로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 받지도 못했으면서 구원된 티를 낸 것인데 그 이유는 남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인정하는 신도, 그들이 인정하는 성도로서 계속 지속하려는 나의 이 마귀적 습성 때문에 그들과 한 통속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지요. 오늘 강의 제목은 뭐로 하면 좋겠습니까? 계속 하다 보니 생각이 안 나가지고.. 제가 지어낼 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들은 결과물일 뿐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결과물이기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뭘 해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인 것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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