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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9:40 / 인간개조 160315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9:40 / 인간개조 160315

정인순 2016. 3. 16. 08:5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충성모

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40~41절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여기에 먼저 소경이라는 말은 언급을 했지요.

그런데 소경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신체 가운데 눈과 관련이 되어 있거든요. 눈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하면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보는 것과 상대방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죠. 적어볼게요. 눈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에요.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은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인데 나한테 눈이 있어야 가능하지 눈이 없으면 모르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안 되었을 때 이 사람이 소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더 얹어버렸어요.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내가 확인하는 것(보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앞의 두 가지는 눈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보여짐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고 해도 눈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신체에 속한 것이라면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은 눈과 관계가 없지만 보는 것은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려워요.) 눈이 없어도 예수님이 보이느냐를 물을 수 있는 그러한 작용이 네 속에 일어나고 있느냐를 말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활하고 떠나버려요. 그러면 주님은 안 보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있을 때 “주님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고 있지요?”라고 하면서 구원이 되어 버리면 열두 제자 외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는 신체적인 눈 말고 다른 방식이 필요하겠지요.

 

그 다른 방식, 예수님께서 일찍이 소경을 가지고 지금, 눈으로 예수님을 봐서 믿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고 주고받고 하는 그런 눈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에서 제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눈과 이것을 비교하는 이유는 본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지금 빤히 쳐다본다고 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보는 게 아니에요. 그것의 이유는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 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라고 했을 때 대번에 우리의 느낌은 ‘그러면 주님, 보여주기는 왜 보여줬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보여줄 것 다 보여줘놓고 “봤냐? 이제 믿어지냐?” “믿어집니다.” “그래, 훌륭해.”라고 해야 말이 간편하게 끝이 나는데 “내 옆구리에 창자국 봐. 손에 못자국 봐. 봤냐?” “봤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라고 한다면 지금 보고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보고 믿는 이것으로 믿음이 다냐, 아니냐 혼동이 일어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수학 시험을 치는데 “잘 쳐.” 하고 선생님이 수학 시험지를 내줬다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학생이 백점을 맞았어요. “선생님, 참 잘했지요.” “응, 백점 맞았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거든.”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면 수학 문제를 왜 냅니까? 그 다가 되는 것을 문제를 내야 되는데 “이것 가지고는 네가 공부 잘했다고 할 수 없거든.”라고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수학 문제를 내지 말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왜 그것(시험)을 집어넣고 하느냐 말이지요.

인간에게 눈이 있는데 그것에는 주님이 보시기에 어떤 기능이 있어요. 보고도 못 믿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속에 장착되어 있음을 눈을 가지고 테스트하는 겁니다. “봤냐?” “봤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지.” 이렇게 봐서 믿어지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다시 한 번 40절을 보게 되면은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했지요.

 

소경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소경이라는 말의 뜻은 자기(바리새인)에게 눈이 있고 나는 지금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의 기능을 두 가지라고 했지요. 하나는 보는 것과 또 하나는 보여지는 것인데 서로가 상호 보고 상호 보여지지요. 이것이 눈이 있을 경우에 전부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거기에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을 하나 더 제시하지요. 이때는 눈이 백 개가 있어도 소용이 없는 거에요. 눈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밖에 더는 없다 이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보여짐을 당한다고 했으니까 보여짐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여기에 소경이 등장하는 겁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신자입니까, 신자가 아닙니까? 신자가 아니지요. 자기는 소경인데 눈을 떴을 뿐이지 신자는 아닌 거에요. 전에 감긴 눈이 떠졌다고 해서 신자입니까? 그래서 눈을 떠가지고 소경이 본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신자입니까? 뜬 눈으로 봤고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에요.

 

36절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말이 나와야 비로소 신자가 돼요.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할 때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시점으로 “이제 너는 신자이고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끝나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한 거에요. 결국 예수님은 제자를 떠나서 부활해서 올라가시지요. 그러면 아무에게도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부활하셔서 12제자한테 보이시고 5백 명에게 보여줬다고 되어 있잖아요. 또 누가복음 마지막에 보면 두 제자에게도 보여주지요. 그런데 온 천하에 다 보여줬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그렇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신자입니까? 신자가 아니란 말이지요. 왜냐하면 자기의 육체인 눈을 가지고 믿음의 종결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 9장을 보면서 ‘예수님을 지금 보여주면 참 좋겠는데..’라면서 꿈에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주여, 꿈에 나타나시면 내가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확인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인간의 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봐도 그 때뿐이고 물러서서 다른 일일 벌어지면 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진짜 믿음은 이제는 보든 안 보든 변치 않는 믿음이어야 하거든요. 그런 변치 않는 믿음을 발생시키는, 그런 내면의 눈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주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중에 눈이 감긴 사람이 없는데 이 눈을 뜬 상태를 소경이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간주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한 것처럼 “우리가 소경이냐?”라고 대들 게 아니고 “소경입니다.”라고 하면 돼요. 그러니까 누가 꿈에서 예수님을 봤거든 ‘아, 내가 소경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타나셨구나.’라고 보시면 돼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기 위해서는 이 보는 것이 방해가 될 수밖에 없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눈이 있는) 신체---> 기호, 언어로 믿음의 내용이 전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체로 오셨는데 성령을 통해서는 말씀으로 오시지요.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데 이 듣는다는 것을 오해하면 안 돼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하기를 보는 부활에서 들리는 부활이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바울에게 나타나고 500명에게 나타났잖아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일체 안 나타나요. 그러면 그 다음 사람들은 다 지옥 갑니까? 부활이 들리는 부활로 바뀌어요. 들리는 부활은 복음의 소식을 전하면 그것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합니다. 기억나지요? 로마서 10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들린다고 하니까 데시벨(소리의 단위)가 얼마냐고 하면 또 마찬가지로 신체에 머물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신체에서 언어의 믿음으로 가려면 그냥 갈 수가 없고 국어 시간처럼 학습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원어(헬라어, 히브리어) 연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양식 비평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체에서 언어의 믿음으로 가는 방법은 간단해요.

 

여기에서 신체가 죽으면 돼요. 그런데 스스로 죽으면 안 되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신체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도 우리의 신체의 무의미함을 이미 언급을 하신 적이 있어요. “네 오른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나머지 신체 가지고 천국 가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계산상 더 낫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잘라버려라 나머지 신체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보 같은 수도사 중에 진짜로 눈을 뺀 사람이 있어요.

하여튼 마음에 믿음이 없으니 자꾸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흉내를 내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쳐서 믿음을 확정받았다고 하니까 심지어 어떤 전도사님은 자기 아들을 기도원에 데려다가 살해했다는 거에요. 요새 같으면 체포감이에요. 그 당시 법은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체포는 안 당했어요. “내 자식 내가 죽이는데 네가 왜?”라고 하면 반론할 수가 없던 옛날 시절이지요. 그 사람은 정신병자에요.

 

돈을 내서 구원을 받는 게 어디 있어요. 시간 맞춰서 교회에 참석한다고 구원 받고 복 받는 게 없단 말이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전기톱을 갖고 다녀야 돼요. 그러면 오른쪽 말고 왼쪽만 있으면 죄를 안 짓습니까? 마져 빼야지요. 그리고 두 눈이 다 빠지면 죄를 안 짓습니까? 머리 속 두뇌가 죄를 지으니까 모가지를 잘라야 돼요. 두뇌 전체, 대뇌 피질을 다 잘라야 돼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은 처음부터 죽도록 되어 있는 신체라는 겁니다. “내가 너를 죽이러 왔어.”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죽이러 온 신체를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잘 지켜서 그나마 내 신체를 보존해가지고 죽어서 영광스럽게 천국을 가느냐?’ 인간들이 지금 그 노림수를 노리는 거에요. 신체에서 신앙의 세계, 주님의 말씀(언어라고 하면 어려우니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예수님이 가신 경로를 따라서 들어가야 돼요.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가실 때는 어떻게 가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말이에요. 십자가에 죽을 때 그냥 자살했어요, 어떻게 죽었습니까?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죽으신 거에요. 누가복음 24장 4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지금 누가 누구를 보고 이야기한 겁니까?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이 분명히 나와 있지요. (그 당시는 구약이지만) 전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한다고 했습니까?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복음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해석을 누구한테 맞추지 말아야 합니까? 나의 포부, 나의 기대, 나의 소망, 나의 행복, 내가 어떻게 잘 될까,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나의 구원으로 연결을 시켜야 돼요, 연결을 시키지 말아야 돼요? 나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에요.

 

내가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생명나무가 있는 데서 추방하지도 않았습니다. 꺼지라고 내쫓은 것은 이유는 “너 거기에서 구원이야기 하기만 해봐!!” 이런 뜻으로 쫓아낸 거에요. 추방을 당했으면 주께서 으례히 알아서 추방을 했을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야지, “쫓아내다니 분하다. 도로 돌아가자.” 지금 무슨 시위합니까? 청와대에서 피켓 들고 문 열어달라고 시위하는 거에요?

“구원해주세요.”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취지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복 주세요. 구원해주세요. 죽어서 천국 가려면 뭘 하면 됩니까?” 이런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냥 종교성이지요. 집요한 자기 집착과 자기애착이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죠.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보편성을 개인에게 중재하는 겁니다. 이게 메시야에요. 그런데 보편성은 감추어져 있거든요. 그리고 개인은 감추어지지는 않았는데 이게 없는 거에요. 제가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감추어졌다는 말과 없다는 말을 구분해서 썼는데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보편성(아버지의 뜻)을 개인과 연결한다고 할 때 이 개인은 없는 거라니까요. 이 개인이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장차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자기들은 해방을 받고 다시 다윗의 나라처럼 회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호들갑을 떠는 거에요. 호산나요? 호산나 같은 소리하고 있네요. 예수님 죽일 때에 본디오 빌라도가 “옉, 떽.” 하니까 전부 다 “예.”라고 했지요.

 

호산나라고 할 때는 좋았지요. “이 중에서 예수님을 살리고 바라바를 죽일 사람은?”라고 하니까 전부 가만히 있었어요. 물론 그때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했지만 그 국회의원들을 뽑은 것은 누구입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잖아요. 국회의원들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지만요. 이 개인은 없는 개인인데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되는 개인입니다. 이걸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성도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원래 우리에게는 성도라는 자리가 없어요. 성도라는 게 없다 이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자기를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잖아요. 다 망했어요. 이 말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칭(스스로 칭한다)하는 또는 참칭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했다는 것이고 거룩한 백성은 없다는 말이에요. 거룩한 백성은 없는 거에요.

 

거룩한 백성이 되지도 못하는데 왜 자꾸 거룩, 거룩을 이야기합니까?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죽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죽음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기 위해서 인간을 사용한다고 했지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내가 죽으면 죽음이고 내가 살면 산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생명과 죽음은 우리를 경유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죽었다고 그게 죽음이 아니에요.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보여줄 개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어떻게 되리라?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죽었다는 것은 1. 선악과을 따먹었다. 2. 헉, 헉, 억! 한다. 이것이 죽는 거잖아요. 그런데 멀쩡해요. 아담이 얼마나 오래 살았습니까? 독약 먹고 참 오래도 살았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은 셋을 낳은 뒤에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세상에 더 살아도 욕이에요. 정말. 930년 동안 살았어요. 뭐를 먹고요? 선악과 먹고요. 거의 조금만 더 있었으면 천 년 돌파할 뻔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선악과를 얼마나 먹어놓았으면 900살이 뭡니까? 90세도 간당간당한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 삶이 얼마나 인간들끼리 서로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했던 개념이에요? 그리고 그 죽음 뒤에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요. “너는 아니?” “몰라.” “천국 가봤니?” “안 가봤어.” “천국 가봤어?” “안 가봤어.” 둘 다 모르고 있어요.

 

“..있다고 하더라.” “누가?” “예수님이..” “예수님 만나봤나?” “아니.” 만나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연상해가지고 ‘예수님, 그런 뜻 맞지요?’ 자기 혼자 그런 해석을 내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럴 수 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까 누가복음 24장에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라고 했지요?

모든 성경 해석은 인간(나)에게 오지 말고 어디로 가야 된다고요? 예수님의 죽으심. 죽으심이 우선이에요.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경대로 말씀을 따라 죽으신 거에요. 그러면 성경의 모든 해석은 예수님이 죽을 때에 누가 독점해서 딱 품고 있습니까? 죽으신 예수님만이 갖고 있어요.

 

그 다음에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나면서 자기의 완성된 그 의미를 성령을 통해서 나눠줄 때만 (예수님이) 진짜 지닌 의미를 그 사람은 아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은 살면서 “나는 알았다.”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서 의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도착된 사람은 그 의미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결시켜서 증거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모든 성경 해석은 십자가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해놓고는 뒤에 보면 긴 글이 많이 나오잖아요. “여자는 머리에 쓰라, 술 취하지 말라”의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했으니까 술을 끊으세요.”라고 하면 이것은 말씀대로 산 거에요, 안 산 거에요?

 

그러면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거에요. 술을 끊어봤자 오른눈으로 범죄하면 오른눈을 빼야 돼요. “술을 끊었는데?”라고 버틴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술은 끊은 것이고 오른눈은 내가 뽑을란다.”라고 나오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렇지요? 십계명 6개는 지켰는데 4개는 못 지키면 어떻게 합니까? “여섯 개 지킨 것으로 봐 주세요. 하나님은 뭐 이렇게 봐주는 것도 없고..” 이렇게 불평하면 안 돼요.

하나를 어겨도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네가 하나를 어겼구나.”가 아니라 “네 속에 있는 괴물이 어기게 했구나.”가 되기 때문에 ‘이 율법을 어겨서 주님의 이름을 괴롭힌 그 괴물을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하고 주님의 사자가 찾아오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틈이 없이 지키다가도 하나의 틈만 나오면 그것을 통해서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다 까놓고 사세요. 성화한다고 힘쓰지 마세요. 어차피 인간에게는 틈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인간에게 성경 해석이 안 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의 의미를 추구하다가 그 의미를 가지는 순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의미가 또 새롭게 생기게 마련입니다.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하니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나, 당신을 사랑해.”라고 하면 “사랑이 다야?”라고 합니다. “나는 너를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러면 사랑해+기분 좋아가 포함이 되지. 그게 다야?” “그냥 같이 있고 싶어.” “기분은 좋은데 그게 다야?” 도대체 몇 개를 끄집어 내야 돼요?

 

“탁 하면 좀 탁 알아 들어. 그냥 직관적으로 내가 사랑해라고 하면 좀 알아 들어.” 그 직관으로 하다가 바둑에 진 사람이 이세돌입니다. 알파고의 수 계산보다 모자라는 거에요. 직관적으로 저 수가 맞는데 알파고는 여분의 것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내가 이 이야기하면 네가 좀 알아 들어.”라는 것은 내 뜻을 알아달라는 것인데 왜 상대방의 뜻을 알아야 됩니까? 내가 이야기한 것은 아주 조금뿐인데 상대방이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 당신을 사랑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겠어.” “이야기해봐.”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야.” “헤헤, 그런 뜻이 아니고..” 서로가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이 다 틀리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성장 과정이 달라요. 살아오면서 환경이 다르고 거기에서 추슬러진, 융합된 의미가 다 달라요. 뜯어보면 내용이 다 다르다 이 말이지요.

착하다는 개념에서도 이 집이 착하다고 하는 것하고 저 집에서 착하다고 하는 것의 내용이 달라요. 저 집에서는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다니는 것이 착한 것이고 이 집의 착함은 아버지한테 아무 소리를 못하는 게 착한 것이고요. 저 집에서는 딸래미가 밤 9시 이전에 들어와야 좋은 딸래미이고 이 집에서는 밤새도록 나이트 클럽에서 고고를 춰도 좋은 딸래미에요. 이것은 환경마다 다 달라요.

 

그러니까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내 주장을 네가 무조건 수용해야 되는 억지 부리기입니다. 웃으면서 대화를 해도 속으로는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라고 하는 생각이 북한의 미사일처럼 그냥 막 날아와요. “알아들었지?” “예.” “뭘 어떻게 알아들었는데?”

흔히 아가씨들이 남자를 보고 말하잖아요.“당신 나 잘못 된 거 알지?” 그러면 남자들이 귀찮아가지고 “알아, 알아.” 하면 묻잖아요. “뭔데? 뭐가 잘못 되었는데?”라고 하지요. 말을 하지도 못해요. 잘못 했다고 해도 문제가 돼요. 왜? 내 뜻을 당신이 알아달라는 거에요. 그것은 이세돌뿐 아니고 알파고가 와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고백과 어떤 찬양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됨을 자인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모짜렐라 치즈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지어낸 겁니다. 왜 이것을 모짜렐라 치즈라고 하는지 한 번 봅시다. 오늘 강의 제목을 모짜렐라 치즈라고 해볼까요? 치즈가 비싸긴 비싸요.

햄버거가 있는데 여기에 모차르트가 아니고,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먹습니다. 먹게 되면 조갯살이 나오듯이 치즈가 쭉 나오지요? 선전을 보니까 남자 배우가 좋다고 입을 벌리고 이것을 먹고 있대요. 이게 뭡니까? 치즈지요? 그러면 치즈가 원래 어디에 들어있습니까? 햄버거 안에 들어있지요?

 

햄버거 안에 들어있는 것을 이렇게 길게 늘어뜨리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한테 왔을 때 인간들은 자기 신체를 자기가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사수하고 자기를 좋게 보이기 위해서 온갖 말발을 세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뭘 끄집어냅니까? 속에 들어있는 모짜렐라 치즈를 쭉 끄집어 당기는데 이것의 의미는 너에게 죄가 들어있기 때문에 너는 너 자신을 네가 의롭다고 사수하고 방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끄집어 내주실 때 고맙다고 해야 되는 겁니다. 왜? 이 죄를 끄집어내줘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에 이 죄와 더불어서 만나서 그 의미가 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 한 번 롯데리아에 가서 보세요. 이 모짜렐라 치즈가 얼마나 긴지 쭉 잡아당겨도 끊어지지도 않고 길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중보자입니다. 숨어있는 보편성을 개인에게 연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끄집어내서 연결시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육신에 있는 죄를 위한 것으로 바로 육신에 있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가져간 결과가 십자가의 죽으심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요소가 모짜렐라 치즈 모양으로 이렇게 담겨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오셔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분 앞에서 노출이 되고 발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죄는 햄버거처럼 우리 안에 들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십일조를 하나 전도를 하나 선교를 하나 예배 참석을 해도 뭘 해도 아니, 교회에 안 나와도 가든 안 가든 상관이 없이 우리는 죄인이다 이 말이지요. 우리는 죄인이에요.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다 보면 성경 어디를 봐도 나올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숨겨놓은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 본문이 있고 동시에 그 죄를 주께서 어떻게 이미 처리했는가를 겸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이 성경 말씀이 있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이제는 여러분이 아셨다고 치고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강요할 문제가 아니고) 요한복음 9장 40절을 다시 봅시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물을 때에 4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보세요. “너희”하고 무엇을 이콜시깁니까? 너희라고 하는 것을 햄버거라고 한다고 했을 때 주님은 뭘 지목하십니까? 햄버거 속에 있는 모짜렐라 치즈를 주목하지요.

 

“네가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우리는 눈을 떴으니까 소경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입니까? 죄가 너를 그런 식으로 지금 다루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가 다루는 대로 살 듯이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다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놓고 죄를 지어야 되는 거에요. 그런 거에요. 마음놓고 죄를 지어야 되는 거에요. 조마조마 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죄를 지어야 되는 겁니다. 어떤 죄? 고아원에 구제하는 죄, 전도하는 죄, 찬양하는 죄, ... . 죄를 지라고 하니까 사창가에 가고 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열심히 카메라 봉사하는 죄, 강의하는 죄, 설교하는 죄, 예배 참석해서 은혜받는 죄, 특히 회개하는 죄, 기도하는 죄, 헌금하는 죄(중요한 것임), ... . 헌금하는 의가 아니고 헌금하는 죄에요. 헌금하는 것이 왜 죄이고 의가 되지 못합니까? 의라는 것을 말할 때는 반드시 “예수님만이 의입니다.”라고 해야 이 모짜렐라 치즈를 탁 놓아버리면 도로 튕기듯이 주님이 탁 놓아버리면 주님의 의로 쏙 들어가야 돼요. 주님의 반 먹고 내가 반 먹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도 의롭고 우리도 의로우려면 그 우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된 우리여야 되지 기존의 내가 나를 붙드는 그 의는 아니에요. 이 말의 뜻은 이미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 말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참 쉬운데 설명을 하려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워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내가 뭘 해도 내 안에 모짜렐라 치즈처럼 죄가 있어서 내가 한 행동이 죄가 되는 것처럼 주님의 의가 들어오게 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로 간주해서 그것을 의로 보는 겁니다. 뭘 해도 죄가 되는 것처럼 뭘 해도 의가 되는 거에요.

동일한 나는 아니에요. 동일한 나라면 말이 안 돼요. 동일한 내가 의인도 되고 죄인도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루트가 헷갈려 버렸어요. ‘내가 의인인가, 죄인인가?’ 죄인이라고 하면 의인이 아니라고 하고 의인이라면 죄인이 아니라고 하고.. 곤란해요. 새로운 의에 합당한 새로운 내가 관계하면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41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한 번 물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집사님 잘 보입니까?”라고 하실 때 우리는 잘 보이면서도 이 구절을 알아가지고, “저, 안 보입니다.”라고 하면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 보이면 그냥 보인다고 해.” “예, 보입니다.” “소경인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그걸 참고해가지고 눈을 떴는데도 “소경입니다.”라고 하면 무엇을 붙드는 거에요?

기존의 죄가 있는 이 햄버거(나)를 그저 아껴가지고, 요것이 놓치기 싫어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잘 꼼수를 써가지고, 변화해가지고 이 몸을 가지고 천당에 가려고 하는 그런 겁니다. 그런 수는 쓰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네가 소경이냐?” 하면 “예, 소경 맞습니다.” “왜, 보는데?” “보니까 소경이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된다 이 말이지요.

 

“봐도 모릅니다.”라고 이야기하라 말이지요. “내가 봐도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그게 믿음이 있는 거에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주님을 못 믿습니다. 맨날 하는 짓을 보세요. 주님을 안 믿고 나를 믿지요.”라고 하는 것이 믿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믿는 자이기 때문에.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들어오게 밖으로 밀리는 것이 있어요. 주님이 만든 자아가 들어오면 옛날에 행세했던 내 자아가 바깥으로 밀리잖아요. 그것을 우리가 보는 거에요. 보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자아가 생긴 겁니다. 이게 나가니까 옛날에 내가 한 행세가 바로 죽을 수밖에 없던 자아가 하는 행세였다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새로운 자아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늙어죽는 것은 뭡니까? 늙어죽는 것은 언젠가 죽어야 될 육체의 육성을 갖고 있는 몸, 죽어야 될 그 몸을 우리가 지금 보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을 다시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을 안다는 말이지요. 왜? ‘우리가 이런 짓을 하니까 죽어야 마땅하지.’ 평소에 늘 그런 소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뭘 해놓고 잘난 척하니까 이게 바로 늙어죽든지, 굶어죽든지,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이유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 덩어리가 새로운 예수님의 자아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삐져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말로 하니까 어렵지만 믿는 자한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에요. 요즘 우리교회에 새로온 교인인 한 분 계신데 그분이 “목사님 말씀에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요.”라고 해요. 아주 신이 났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분이 사준 거에요. 그래서 생각의 발상이 바뀌지요. 마땅히 내가 한 죄로 인하여 말씀대로 오늘도 내 다리가 부러지고 눈이 뽑혀지고 팔이 부러져야 되는데 아직 멀쩡하거든요.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은혜가 덜렁덜렁 하는 거에요. 내가 평소에 막 살은 혜택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귀하게 여겨지는 거에요. 왜 자꾸 제가 막 살라고 하느냐 하면은 막 살아야 신자인지 신자가 아닌지 거기에서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막 살면 됩니까?”라고 나오면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보고 있는데 왜 소경입니까?”라는 말과 똑같은 거에요. 내가 이 몸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롭게 달라진 다른 몸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몸은 뭘 봐도 소경이 소경을 보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늘 확인하는 거에요. 내가 주님한테 늘 보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거에요.

어려우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게 되면 (눈을 가진) 신체에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이 사람은 비록 죄를 짓는 신체를 갖고 있더라도 (마치 십자가에 달린 강도질을 하더라도) 그 사람 속에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모짜렐라 치즈가 이 죽은 자를 다시 예수님 쪽으로 데려가는 과정에 놓이게 만드는 겁니다.

 

들어보면 하나도 어려운 게 없어요.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이게 안 믿어지니 어려운 거에요. 기존의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악하고 착하면 의롭다는, 자기의 기준으로 출발한 의와 악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 의라고 하는 것이 선악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의라고 하는 것이 사랑의 의가 아니고 양심이라든지 의로운 것, 착한 것, 뭐 테레사 수녀는 성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성녀가 되든 뭐가 되든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에요. 인간이 납득이 되는 기준이라 이 말이지요. 우리가 평생 동안 거기에 말려들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10장으로 넘어가겠는데요, 10장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목자의 이야기가 나와요. 10장부터 목자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기존의 목자와 목자인 예수님 자신과 차이를 두는데 그 차이가 여기 10장 15절에 나와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했지요. 전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찬바람이 부는데 엄마가 다 팔아도 돈 몇 푼 안 되는 시금치를 팔면서 벌벌 떨어요.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아이는 “나이키 사주세요. 스마트폰 바꿔주세요.”라고 할 때, 엄마가 하는 말이 “야야, 스마트폰, 나이키보다 나는 지금 이거 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하는데 아들은 엄마가 죽어가는 소리 그런 거는 귀에 들리지도 않고 ‘왜 교회에 나가는데 월급이 안 오르고 교회에 나가는데 왜 내 인생이 망가지고.. 빨리 보상하란 말이야!’ 이렇게 나올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철이 없어요.

목자가 어떤 목자라고요? 기도하면 응답하는 목자에요? 그런 목사는 많아도 그런 목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딱 하나만 줘요. “나는 너를 위해서 죽는다” 따라서 주님이 죽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죽어버린 자에요. 그러니까 구겨버린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무가치하다.’하고 구겨버렸는데 우리는 구겨버린 그게 아까워가지고 그것을 펴면서 ‘아이고 아까워라. 이건 유치원 다닐 때 상장 받은 거고, 이건 초등학교 때 개근상 받은 거다. 내가 옛날에 얼마나 이뻤는지 그때 길거리에서 모델 되라고 했었는데..’ 지옥에 가서 모델할 겁니까?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주께서 “너는 처음부터 지옥에 갈 존재였어”라고 이야기 하시는 건데 우리는 죽었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하고 자꾸 내 것이 되게 아까운 거에요. 내가 오늘 스포트라이트 영화평을 했는데 거기에다가 써놓았어요. “왜 교회의 권위를 주장합니까?” 그것은 교인들이 원해서 그래요. 마음이 흔들리니까 어떤 절대적인 것이 눈에 보이기를 원하는 거에요.

인간에게 눈이 있잖아요. 자기의 눈으로 보니까 이것이 소경된 눈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못하고 ‘와, 교회 있다. 교회 건물이 점점 더 높아져간다. 교인수가 많네.’ 이것이 전부 다 소경된 눈에서 나온 거거든요. 자기가 보는 대로 보이면 족하다는 거에요. 그게 소경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그걸 모른 거에요.

 

주님께서는 날 위해 죽어버린 거에요. 이 소경된 자가 예수를 믿고자 한다는 말은 드디어 그 소경된 자가 ‘내가 눈을 뜨나 눈을 뜨지 않으나 주님 앞에 소경입니다.’라고 고백한 셈이 되는 겁니다. ‘내가 눈을 떴으니까 소경이 아니고 눈일 감겼으니까 소경이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소경의 기준 말고 주님이 따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그 눈을 나한테 제공하기 위해서 봉사된 나를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게 실로암이에요. ‘보낸 자가 나를 살렸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말씀이 자기의 양이냐 아니면 지옥 갈 인간들이냐를 구별해 내는 겁니다. 제가 페이스북에 보니까 물안계곡 교회 김선주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글을 써놓았어요. 『목사 사용 설명서』라고 교인들에게 전화기 옆에 딱 붙여놓으라고 했는데 꼭 십계명 같아요.

 

1. 보일러가 고장 나면 전화하세요. 자기가 고쳐주겠다는 겁니다. 2. 텔레비전이 안 나오면 전화하세요. 목사 저 부르세요. 3. 냉장고, 전기가 고장 나면 전화하세요. 4. 휴대폰 충전(전화 연결)이 안 되면 전화하세요. 5. 무거운 것을 들다가 힘쓸 일이 있거든 전화하세요. 목사 부르세요. 6. 농번기에 일손이 부족하거든 전화하세요. 절 부르세요. 7.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울 때는 도움을 청하든지 나한테 전화하세요. 8. 몸이 아프면 이것저것 생각 말고 전화하세요. 9. 갑자기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전화하세요. 10. 이것이 가관이에요. 경로당에서 고스톱 치다가 짝이 안 맞으면 전화하세요. 이게 어디 목사가 할 말이에요?

우리교회 앞에 급행 1번이 있거든요. 그 앞에 광고가 있는데 “이사날짜 모르거든 전화하세요.”라고 써있어요. 이사 갈 때, 고부 간에 갈등이 있을 때, 성적이 이유없이 안 오른다든지 애가 심하게 아플 때.. 이게 뭘까요? 고객은 왕이라는 뜻이에요. 자신이 하나님의 중재자라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님 믿지요? 제가 중재자니까 제 빽 믿고 하나님한테 오세요. 구원 받으세요.” 이런 뜻입니다.

 

제가 스포트라이트 평에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왜 교회의 권위를 주장합니까? 거기에 신부들이 있잖아요. 신부들이 그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해왔어요. 왜? 고객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에요. “내 몸을 내가 원하는 괜찮은 몸으로 만들어 주세요.” 내가 죄 중에 태어나서 죄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내 소원대로 해달라고 하면 결국 “사탄의 능력을 키워주세요.”라는 소리밖에 안 돼요.

그걸 주님만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천국 가려면 네 식으로는 안 되고 내 식으로 되는데 그것은 ‘내가 너를 위해 죽어야 된다. 내가 죽는 것이 온 말씀을 다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모든 선지자와 율법책을 어떻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결부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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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40절(가락-인간개조)160315b-이 근호 목사

 

9장에서 10장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저 어때요?”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모짜렐라 치즈처럼 네 죄는?”라고 합니다. 그러면 10장에서 아까 제가 10장 15절을 미리 읽었잖아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이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지요. 그럼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위치에서 양의 위치로 바꾸면서 양은 양일뿐이다가 되어 버리면 구약에 의해서 양이 구원되려면 누가 등장해야 돼요? 목자가 등장해야 되지요.

그동안 인간이 목자도 하고 다 했어요. 저희들이 목자를 정하고 양을 정하고 다 한 거에요. 그 인간이 인정하는 목자를 거짓목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행세했던 거짓목자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은 목자가 아니고”라고 이야기하면서 시작하십니다.

 

“내가 목자거든?”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렇고 그런 목자 중에 하나로 포함이 되어 버리는데 기존의 목자를 치고 들어옴으로써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그 차별하는 기준은 10장에 나와 있는데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양을 잡아먹는 식으로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이 기존의 거짓목자이고 반대로 양을 위해서 죽으시는 분이 유일한 참된 목자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말이 여러분들한테 이해가 되겠지만 사실 더 설명하게 되면 진짜 이게 난해하고도 또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뭐가 빠졌는가 하면은 아까 어느 청년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러면 양의 자유의지는? 나는 그럼 들러리야 뭐야? 모든 율법을 지키라, 지키라고 나를 보고 이야기하잖아요. 십계명을 왜 줬습니까? 지키지를 못할 거라면 아예 주지를 말던지.. 십계명을 준 이유는 ”힘내! 잘해봐!” 아닙니까?“라고 하잖아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때 알파고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에게 가장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사항은 알파고가 5:0으로 이기는 게 아니고 알파고가 한 판을 져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인간은 기분이 굉장히 나쁜 거에요. 5:0보다 기분이 더 나쁜 게 4:1패가 되는 거에요.

이기고 지는 것은 너한테 달린 것이 아니고 나한테 달렸다는 것이 왜 기분이 나쁘냐 하면 내가 죽도록 집중력을 기울여서 바둑을 열심히 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이기려고 해도 저쪽에서 ‘그래, 나는 너하고 잘 놀았다.’라고 하면 내 쪽에서는 상당히 모독감을 느끼게 되지요. 궁예가 드라마에서 한 것처럼 ‘너는 나에게 모독감을 주었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거죠.

 

그렇게 모독감을 느끼게 되면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분노가 일어나지요.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게 되면 모독감을 준 사람을 가만히 두겠어요, 죽여버리겟어요? 죽여버렸잖아요. 그게 뭐지요? 십자가지요. 그런데 십자가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찾아온다는 말은 그때 십자가에서 일아났던 사건의 정황을 그대로 우리에게 되풀이해주는 겁니다.

“예수님 믿었는데 사업은 안 되고.. 예수님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요.” “예수님 믿었는데 애 성적은 안 오르고 대학입시 끝난 다음에 갑자기 갑상선 암에 걸려가지고 있고..” 이런 기분으로 무슨 예수를 믿어요.. 맨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목숨을 주었잖아.”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이고요. 목사들이 다 하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나는 그 딴 소리 듣기 싫어요.’라고 하지요. 죽을 때가 되어 봐야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아직 60이 못 되어서 팔팔한데, 지금 할 일이 많은 70인데, 알아서 가겠다는 80인데, 아직도 이런 나이인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되게 나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야기는 “믿으라”가 아닙니다. “너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해석이 나한테 왔다가 튕겨져 나가서, 인간들에게 튕겨진 모든 해석은 예수님한테 가져가서 너희들(인간들)이 얼마나 되지를 않았으면 너희를 위한 너희의 해석들이 모아져서 나를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그 목사가 교인들에게 전화하라고 했을 때 그 교인들이 목사에게서 뭘 배우겠습니까?

 

‘아,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주려고 오신 분이구나.’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살아가는 주체가 뭡니까? 바로 소경된 이 몸이지요? 그럼 결국 예수는 내가 살고 싶을 때 도와주는 예수밖에 안 되잖아요. 그게 바로 사탄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그런 짓을 한 거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저 거기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이죠.

순복음이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사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 순복음이 원하는, 네 자로 기쁜 소식, 두 자로 줄이면 복음은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것이냐를 주(하나님)의 종으로서 대안을 내놓아라”입니다.

 

대안을 내놓아라는 말을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대안을 내놓으라고 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일이 잘 되고 있는데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일이 못 되어야 대안이지요.” "한국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되는데 당신이 말하는 대안이 뭐냐?"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주께서 일을 잘하고 있잖아요. 온 천지에 이단들이고, 온 천지에 가짜고.. 일을 얼마나 잘하십니까?”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대안이 필요해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요.

3월달인가 4월달에 새로 개봉하는 영화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이태리 영화입니다. 이게 30년인가 40년 전에 나왔던 영화인데 그 영화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영화에 보면 독일군에 잡혀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장난을 치고 있어요. 웃으면서 척척 걷지요. ‘행복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자유함에서 결정된다. 상황이 여러분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백날 해봐야 여러분의 욕망 때문에 그 행복은 곧장 시들해져 버리고 새로이 채워줄 것을 갈급하게 찾게 되어 있다.’ 기존의 인간의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고발하는 거에요.

 

대통령이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국회의원이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하는데 국회의원,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에 가서도 행복해질 수 있어야 돼요. 저는 안 가봤으니까 장담은 못합니다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께서 목자를 언급하는 것은 가짜 양, 가짜 목사끼리 지금 잘하고 있고 잘 돌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훌륭한 목자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라고 내세운 순간,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구약 성경을 다 집대성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목자의 모습은 딱 하나의 접촉점인데 그것은 양을 위해서 죽는 거에요. 그럼 양을 위해서 죽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양이여, 네가 나한테 내놓을(바칠) 것은 일체 없다.” 십일조고 헌금이고 일체 인간이 내놓은 것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뭐가 부족해서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친히 주시는 분이에요. 제가 만약 볼펜을 가지고, “주여 이것이 제 것인데 주를 위해서 드립니다.”라고 하면 주께서는 “처음부터 이것은 네 것이 아니데 왜 네 것이라고 행세하느냐? 이 건방진 인간아!”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기 전에 이미 우리의 것이 전부 다 주의 선물입니다. 천사로 성령을 통해서 택배로 보내온 거에요. 모든 것, 우리의 머리카락, 사지, 두뇌(머리)까지 주께서 주신 거에요. 그걸 새삼스럽게 골라서 “내 것은 빼고 이것을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내 것이라고 빼논 것은 주의 것이 아닙니까?

 

어떤 것을 누구한테 도와주고 교회에 헌금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것을 헌금한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의 것인데 자리를 이동했을 뿐이에요.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합시다. 원래 우리집에 있던 피아노든 돈을 주고 샀든(요새 200만원 넘어요. 한 300만원 주고 사가지고) 교회에 기증을 했다면 주님이 주신 돈으로 주님이 주신 신체를 가지고 차를 타고 가서 말발로 흥정해서 350만원짜리를 300만원 주고 사가지고 교회에 와서 드린 거에요.

그러면 피아노는 어디, 산에 있으나 대리점에 있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주의 것이라 말이지요. 우리는 그냥 심부름했을 뿐이지요. 실제로 우리의 지식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꼬마애가 내가 기증한 피아노 위에서 장난을 친다면 어떨까요? 어른들은 어린애의 행동에 다 화가 나요. ‘제가 뉘 집 애인데 망나니야?’라고 하지만 막상 나를 통해서 드린 피아노 위에서 아이가 장난을 칠 때 내가 느끼는 분노와 그냥 어느 분이 교회에 와서 ‘누가 피아노 기증했네. 어어, 애가 저 피아노 위에 올라가면 안 되지.’라고 하면서 느끼는 분노의 강도가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그냥 보는 사람은 “얘야, 내려오너라.”라고 이야기할거에요. 그런데 나 같으면 “이놈의 자식!!”이라고 해요. 호통 치는 강도가 달라요. 어느 정도 다른 사람보다 애착이 간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론(지식)하고 몸하고 안 맞게 되어 있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했는데 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몰라요.

그걸 통해서 아이가 피아노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미처 알지 못했을 나의 죄(옛날 모짜렐라 치즈)를 다시 한 번 죽어가는 신체를 통해서 알게 하시는 거에요. 내 몸은 어차피 죽어가요. 유지해도 죽어가요. 보톡스를 해도 마찬가지에요. 나의 육체에서 나오는 이런 죄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망나니 애가 피아노 위에 올라간 거에요.

 

그러면 그 개구쟁이가 피아노에 또 올라가겠어요, 안 올라가겠어요? 이제는 안 올라갑니다. 왜? 이미 죄를 알았기 때문에 올라갈 필요가 없어서 안 올라가요. 그 다음에 올라가면 “얘야, 내려오너라.”라고 이야기하지요. 갑자기 착해질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또 다른 죄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다른 방안을 강구하십니다.

그것이 목자가 양을 만드는 방법이에요. 양을 계속 키워나가는 방법입니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제가 쉽게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옛날 골목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10년 전에 여기 허름한 3층 집에 3000만원짜리 집에 전세로 살았다고 칩시다. 아주 후진 동네에요. 이때 내가 15살이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15살 때 살았던 주변 거리를 나중에 기억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오래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기억하겠지요. 그런데 45살이 되어서 30년만에 이 동네를 우연히 지나가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15살 때 이 동네 꼬마들하고 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었겠습니까, 안 갖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요.

그런데 희망의 내용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어우, 나는 앞에 있는 양장점(요새는 없지만)에 가서 저 원피스 한 번 입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30년이 지나서 그 양장점이 아직 있나 하고 가보니까 촌스러워서 줘도 안 입게 생겼어요. 보세요. 똑같은 희망, 똑같은 나라는 인간에게서 나온 희망인데, 어때요? 뭐가 바뀌었습니까? 양장점이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었어요. 내 신체만 바뀐 게 아니에요. 신체와 더불어서 나의 정신도 개조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제목으로 합시다. 인간 개조. 인간이 개조되어요. 그런데 일반 교회의 목사라면 확실한데 어느 촌 아담한 교회에 15년 전에 목사가 갔다고 합시다. 이 촌에서 잠시 목회를 하면서 촌이니까 새벽기도 하면서 자꾸 둘러 봐야 돼요. 혹여 권사님이라도 엎드려 있는데 나가버리면 안 되거든요. ‘저 권사님 언제 가시나?’ 가고 난 뒤에 목사가 난로불 끄고 나가줘야 “역시 목사님은 기도도 오래하고 의인의 기도는 응답하는 능력이 있어.”라고 해야 급할 때 전화해서 나를 찾거든요. 혹시 냉장고가 고장났을 때 부를 수 있거든요.

저를 보고 차를 샀는데 기도를 해달라는 거에요. 기도해줬지요. 아까 십계명에서 하나가 빠졌어요. 11. 차를 사면 고사지내달라고 전화하세요. “주님 다시는 이런 걸 기도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어요. 기회니까요.

 

그런데 목사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이 있을 게 아니냔 말이에요. 그리고 15년 후에 다시 그 예배당에 갔을 때 기도의 내용이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바뀌겠지요. 처음에 촌에 목회할 때의 기도는 이렇지요. ‘이 동네 사람들만 다 와도 30명인데 지금 10명이 뭡니까? 주여 30명만 되어도 내가 더는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30명만 와도 계산해보니까 애 피아노 하나는 가르칠 수 있는 돈은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이것만 해주시면 원이 없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막상 우연히 차를 타고 가다가 그 교회 한 번 가보자 해서 예배당에 가보니까 자기가 새벽기도 했던 데에 방석이 다 밀려서 구석에 가있어요. 여기서 주여, 주여, 할렐루야,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던 내용이 참 유치하고 뻔뻔스러워요. 세상에 그런 걸 기도하다니.. 뭐가 바뀌었어요? 인간이 개조된 거에요.

 

그 목사의 나이가 50세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60세에 다시 예배당에 가게 되면 ‘으이그, 그것도 기도라고..’라면서 자기의 옛날 목회를 지적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나면서 ‘웃기네, 너나 잘하세요. 내가 했던 지적질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고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개조를 해나가시는 겁니다.

개조하시는 절차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지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잖아요. 동방박사가 찾아왔을 때는 어린아이셨지요. 그리고 갈리리와 유다를 왔다갔다 하시면서 했던 모든 흔적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가신 길이 맞아요. 하지만 이 안에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것을 몽땅 복사해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인간 개조가 일어납니다. 병이 들었는데 주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뭘 걱정하느냐 하면 ‘주님이여, 갑상선 암입니다. 낫게 해주세요. 이게 나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네. 전도가 팍팍 될 거니까 병이 낫게 해주세요.’라고 하겠지요?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가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보여주셨다 이 말입니다. 백날 병이 나아도, 심지어 병을 낫게 할 때 같이 능력을 행했던 제자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다 숨어버렸지요. 두더지처럼 다 가버렸어요. 걸음아 나 살려라.라고 했지요. 베드로는 용감하게 모른다고 대표로 이야기했고요. “나 저분 몰라. 나 귀찮게 하지마. 나 저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라고 했어요.

 

60세에 목회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1세에 김정은 원폭을 터뜨려가지고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의 공산당이 내려와서 61살 된 목사를 체포했다고 칩시다. “너 예수를 믿느냐?”라고 하니까 “예수가 누구인데요? 기억 안 나요.”라고 나옵니다. 분명히 그런 소리를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김정은이 미사일을 쏘고 북한군이 내려오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주님이시지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김정은이 안 내려왔으면 나는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얼마나 착오와 착각을 일으켰겠어요? 성령께서는 ‘인간 개조는 내가 주님하고 협의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계속 궁지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자기 의 사수, 그래도 남보다는 착한데, 그래도 남보다 기도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이렇게 애를 썼는데..’라는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게 하시지요.

 

주님한테 “주여, 저 같은 인간을 위해서는 죽을 필요가 없지요. 저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하는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일을 해놓고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 받지, 내가 인간의 일을 조금 줄이고 주의 일로 바꾼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에요. 믿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무슨 준비운동이 필요합니까? 믿는데.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깨어지고 노출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자기가 망나니에 불과하다는 것.. 아까 베드로 이야기할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갑자기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합니까? 어떻게 하면 잘 믿을 수 있습니까? 해석하시면 믿겠나이다.’에 관계없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말씀대로 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쪽으로 해석하라고 했지요. 아까 누가복음 이야기를 하면서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기억나십니까?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이것은 기억해야 돼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이 속에서 사탄은 어디에서 생기느냐가 나옵니다. 내가 최초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알파고는 아니지만요. 사탄은 왜 생겼느냐 하면은 고안된 겁니다. 이런 쪽으로 언제 내가 이야기를 했지만요. 사탄은 고안된 건데 처음에 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사탄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사탄으로 만드신 거에요.

 

율법(하나님의 법)을 세우기 위해서 그 기능을 해야 될 천사를 주께서 만드신 거에요. 천사도 피조물이에요. 범죄하고 타락해야 될 천사를 하나님이 아들을 위해서 일부러 만드신 거라니까요. 사탄이 자기를 죽이도록 그렇게 하신 거에요. 죽이기 전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사탄이 유혹하도록 그렇게 하셨고요. 사탄이 말려들도록 선악과를 심어놓으시고요.

그게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아들(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시작과 더불어서 여자의 후손도 뱀의 후손과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빠져야 돼요. 그냥 사탄과 예수님과의 전쟁에 의해서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을 보고 지금 납득을 시키는 게 아니지요? 아까 9장 4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를 설명할 때 이것이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모짜렐라 치즈(죄)에 관한 문제라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목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뭐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함이십니까?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죄를 권세화시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죄를 누가 짓는다고 합니까? 내가 짓는다고 하지요. 그러나 죄는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죄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이용하고 사용한 거에요. 자기 마음대로 부린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 28~3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권세에 인간들이 매여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 목자와 엉터리 양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개념을 주께서 새롭게 조정하시는 거에요. 여기 구약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짜렐라 치즈 같은 것이 쭉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구약을 문자로 해석해요. 문자로 해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문자는 나의 세계,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이용하지요.

그러면서 자기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나는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내가 알아서 말씀 지켜서 내가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 강렬하지요. 이게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보는 안목이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다 쏠리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바리새인)은 내 배후에 어떤 악마의 세력도 없고 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쁜 짓을 했을 때만 죄가 되고 내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선이 된다, 선이고 악이고 내가 행동하기 나름이다.라는 것이 철저해요. 그것 하라고 (때문에) 말씀을 줬다.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을 안 하면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을 나한테 묻는다는 것은 나한테 책임질 만한 자유의지가 밑에 미리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죄에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한 적이 없어요. 그것은 요한복음 8장 34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죄의 종이다 이 말이지요. 죄가 나왔다는 말은 앞으로 착한 일을 해도 그게 죄다 이 말이거든요. 35절에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하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어떻게 죄가 있느냐”라고 했고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나오셨어요.

 

이것은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해요. 구약의 모든 설명이 예수님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지금 어디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에요. 미쳤다. 사실은 마귀에 미친 것인데 미친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둘 중에 누가 미친 것인지 참, 서로 미쳤대요.

마귀들린 거에요. 그런데 현대인을 보고 “당신은 마귀에 들렸습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까 그 떠났다는 청년처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 자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갖다 붙여서 수동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느냐 말이지요. 캐톨릭, 감리교, 기독교 장로회, 통합측도 마찬가지고요. 교회가 유지가 되고 사람들을 모으고 돈을 들고 오게 하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자존심을 북돋워줄 필요가 있어요.

목회를 할 때 어떤 성경 구절을 총 동원해도 구닥다리 같은 것을 다 들춰보면 남는 게 딱 하나 있어요.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이 하기 나름입니다.” 최진실이 말한 것처럼 “가정은 여자 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한테는 너무 편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스펀지처럼 쏙 스며들어요.

 

‘그래, 착한 일을 했더니만 복이 오는구먼.’ ‘아이고 바빠서 기도를 안 했더니만 애한테 이런 사고가 일어났구먼. 앞으로 내가 정신 차리겠습니다. 주님이여,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내가 벌을 받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너무나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요.

몸이 아파도 그게 복이고 사업이 망해도 복이고 모든 것이 은혜고 주신 선물이라는 것은 전혀 감이 오지를 않아요.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안된 사탄에 의해서 미리( 먼저)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탄이 등장해서 활동한다는 것이 구약 성경에도 보면 나오지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약은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구약적 안목은 어디로 가야됩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위하여 누가 활동해야 된다? 사탄이 활동합니다. 사탄이 욥을 찾아갔잖아요. 결국 해석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해석을 제대로 한다면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욥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라고 했지요. 그래서 제 책마다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라고 했지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나와야 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10장에서 (죄가 있어야 되는데) 죄를 어떻게 끄집어 내는가 그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10절에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양에게 생명이 필요합니까, 풍성한 생명이 필요합니까? 다시 말해서 양이 풍성한 생명을 원합니까, 그냥 생명을 원합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를 원하는 거에요, 늘 나오는 생수를 원하는 겁니까? 그냥 생수를 원하지요. 풍성하다, 늘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사마리아 여인이 요청한 적이 없는 거에요. 이것은 구원하신 쪽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우리한테 퍼주는 거에요. 어떻게? 풍성한 생명으로요.

그러면 생명이 풍성한 방법은 뭡니까? 내가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기가 갈수록 빡빡해야 돼요. 돈이 없어서 빡빡한 게 아니고 돈이 있어도 어느 자식이 보증 서달라고 해서 돈이 다 날아갈지 걱정거리가 빡빡해야 돼요. 돈이 수천 억이 있어도 빡빡해야 돼요. 이맹희라는 분이 돌아가셨지요. 삼성회장님의 형이요.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부자라고 하잖아요. 왜? 중국에서 수십 억짜리 별장에 살았으니까요. 누가 봐도 부자인데 죽을 때 25억인가 빚이 있었어요. 누가 그 빚을 상속받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성경에서 대속이라는 게 뭡니까? 빚진 자의 빚을 갚아주는 거에요. 우리는 남한테 빚진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빚을 진 거에요. 사탄은 우리에게 율법을 갖다 들이대지요. 사탄이 자꾸 우리에게 뭘 합니까? “이거 지켰나, 안 지켰나? 제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맨날 우리한테 책망하고 우리한테 채찍질하고 나무라고 계속해서 그래요, 사탄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래 가지고 복 받겠어? 이렇게 살아가지고 망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너 무섭지도 않아? 제대로 살아.”라고 하면 벌벌 떨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성경 볼게요. 기도할게요.”

사탄하고 우리하고 죽이 잘 맞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사탄의 품성이고 속성이고 성격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탄의 성격이 말씀(법) 앞에서 벌벌 떠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은 모짜렐라 치즈가 이 벌벌 떠는 것 위로 올라갔지요. “네가 벌벌 떠는 것은 다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일부러 시킨 거야.”그 한 마디에 훅 가잖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지옥에 가지 싶다.’라고 하면서 벌벌 떠는 것이 결국 십자가 믿어서 벌벌 떱니까 자기의 행위를 믿어서 벌벌 떱니까? 자기의 행위에 아직도 미련이 있어서 벌벌 떠는 거에요. ‘이렇게 행동했다가는 내가 지옥 가지 싶다.’ 맨날 지옥, 천당을 뭘로 규정해요? 내 행위가 내가 보기에 반듯하냐, 반듯하지 않느냐? 애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그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잖아요.

그런데 그 판단을 주께서는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우리가 그 판단을 하도록 마귀라는 것을 고안해가지고 우리한테 일부러 붙여줘가지고 부축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시기 바랍니다. 제가 장담하건데요, 아까 10장 28절을 다시 봅시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고 맞는 말이지요.

 

자, 우리가 갑자기 간첩에게 납치되어서 이북에 갔다고 합시다. 그래서 북한 tv에 나와서 한국에서 온 목사인데 전도하러 왔다가 이렇게 걸려가지고 조선민주주의가 이렇게 행복한 낙원인 줄을 모르고 내가 위대하신 김정은 위원장님의 심려를 아프게 해서 내가 이제는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김정은 위원장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쓰여진 대로 마이크를 쥐고 해야 될 입장에서 요한복음 10장 28절이 생각난다면 정말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는 말씀과 자기가 지금 하는 행위와 비교할 때 어느 패를 버리고 어느 패를 쥐어야 돼요?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쥐어야 되고 어느 패는 버려야 돼요? 내가 이렇게 배신했으니까 나는 지옥에 갈 것이라는 내 판단의 패를 버려야 돼요.

 

왜? 버릴 패를 일부러 주께서는 유발시키기 때문이에요. 그게 예수님의 공생애만 쳐다보게 하는 주님의 전략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어렵지 않아요. 지금 4월 초에 자녀분이 결혼식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를 들어 4월 2일날 결혼식을 하는데 3월 30일날 주님이 재림하면 뭐가 무산돼요? 내 딸의 결혼식은 없는 것이 돼요. 그래도 좋습니까? 딸 시집은 보내고 그 다음날 오시면 안 됩니까? 본인 말고도 다른 사람이 결혼식 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예약이 꽉 차 있는데요.

우리의 모짜렐라는 항상 내가 좋고 내가 행복한 쪽으로 대합 조개의 이상한 혓바닥처럼 이미 늘어져 있어요. 그 촉으로 좋은 것은 다 끌어모으면서 내 것으로 세력화시키고 확장시키고 있다 이 말이지요. 내가 좋은 쪽으로 세상을 해석하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문어발인지 이상한 발은 계속 번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짓을 해도 감사한 이유가 놀라운 있는데 그것이 의도된, 주께서 이미 익히 아시는 바라는 말이지요. 왜? 나무라지 않아요. 그런 너를 위해서 내가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뉴질랜드에 어떤 목사님이 계신데 저하고 라인(인터넷)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분은 부교역자에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강사를 초빙하지 못합니다. “용인의 기쁨의 교회 정의호 목사님이 오셔서 전도를 하는데 너희들이 전도하지 않아서 영의 눈이 안 떠졌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전도해야 영의 눈이 떠진다고 하는 말을 듣고 어른들은 좋아하는데 청년들은 가만히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너희 속에 사탄이 들어있어서 가만히 있다고 하면서 기도를 막 시키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는 메일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보냈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소멸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그것을 보고 답답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내가 그 자리에 가서 강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자기의 확장, 44살 때(그분이 지금 44살쯤 되셨음) 기대했던 소망이 표가 난 거에요. 그분이 한 60이 되어가지고 회상한다면 ‘그때 뉴질랜드에서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참 유치하다.’라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게 뭐라고요? 인간 개조에요. 인간 개조라고 하는 것이 결국 강도, 창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 강도와 창녀가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주님은 더 내려갔어요. 십자가에 죽기까지요. 주님은 최고 밑바닦까지 가셨지만 우리는 근처도 못 갔는데 뭐 엄살이 그리 늘어집니까? ‘주여,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주여, 이것은 손대지 마세요. 손대지 마세요.’ 주님은 더 내려갔다고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

진짜 강의 제목을 바꾸고 싶어요. ‘엄살이 많다.’ 하여튼 우리는 왜 그리 엄살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기도했는데 왜 내 아들 성적이 안 오릅니까?” 또 엄살이라니까요. 자기보다 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대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애들이 많아요. ‘이정도 되어야 나답습니다.’라는 게 늘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래요. 도대체 그게 몇 살 때 그래요? 그 몇 살 때 은혜 받아가지고 확 다 깼으면 좋겠어요. ‘아이고 유치해라. 내가 45살 때 그런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하다니..’ 그런 인간 개조가 되었으면 참 고맙겠어요.

 

‘다시 정신 차려야지!’가 아니라 내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탄이 남긴 내가 잘났다는 것을 부추기게 한 유혹거리이고 주께서는 일찍이 십자가로서 그것을 덮어버리니까 이 땅에서 아무리 철난 사람도 철이 없는 사람이 되어요. 마지막에는 뭐만 붙듭니까? 십자가 앞에서 ‘주여,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80세에 저 세상에서 부를 때에 알아서 가겠다고 하지 말고 ‘주여,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고 하란 말이에요.

내가 80이라고 했지요? 내일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해야 돼요.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너무 포사랍게 살아가지고, 너무 은혜를 많이 주셔가지고 당연한 것처럼 마땅히 나는 이 정도가 되어야 되는 것처럼 하게 되면 악마에게서 벗어나는 그 은혜가 자꾸 누락이 되어 버려요. ‘내가 알아서 잘하는데 무슨 악마까지..’라고 하면 네가 빼앗을 수 없다는 그 은혜가 우리한테 자꾸 빠져 버려요.

 

‘열심히 했으니까 복을 받았지.’라는 생각이 강하지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없고 ‘나도 알파고하고 붙어도 얼추 한 판 안 이기겠나.’라고 하지요. 그거 한 판 져준 거에요. 날마다 우리가 이렇게 고집부리면서 살게 하는 것은 주께서 져줘서 그런 거에요. ‘이래도, 흥.’ 봐준 거에요. 봐줘서 이만큼 살았어요. 지금도 가다가 앞차에서 졸음운전해서 박아서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아니고) 일을 하다가 졸음이 와서 박았는데 하필 받힌 사람이 나라서 내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안 받혔잖아요. 주께서 많이 봐준 거에요. 참새도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거든요. 매일같이 은혜로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점을 노리고 “이제는 목자를 알았으니까 제가 알아서 양처럼 잘 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건방을 떨어도 아주 보통 건방을 떤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15살 때 양장점에 가서 ‘저 옷만 있으면 더 이상 두 번 다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철딱서니 없는 신자하고 똑같은 거에요.

 

여러분 20살 때 보면 그때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그냥 기타만 사주면 되는 거였어요. 정말 철없는 소망을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50대라고 산다고 하지만 70이 되어 보세요. 50대에 했던 기도가 유치하기 짝이 없어요. ‘그때 머리만 좀 잘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은근히 기도의 내용으로 잡았다 이 말이지요. 우리 강도사님 경우에는 ‘교인수 50명만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거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목자가 무슨 식으로 이야기했기에 주루룩 거짓목자한테로 다 갔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내가 목자라고 할 때에 우리는 진짜 목자를 찾는 게 아니고 거짓목자에게서 떼어내어서 진짜 목자에게 가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고 그 사이에 예수님의 공생애의 흔적이 우리한테 재탕, 삼탕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우리가 인간 개조가 되어서 그 목자의 그 양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목자와 양의 공통적이 생각은 두 자로 하면 뭡니까? 뭐로 만나지요? 목자와 양 사이에 뭐로 만납니까? 죽음으로 만나지요. 목자는 건강을 주신 분이 아니고 목자는 그냥 살려주시는 분이 아니고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바로 내 목자라고 하고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양이지요.

그래서 내가 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뭘로 압니까? 오직 십자가를 중간에 놓고만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주님 덕분에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증거될 게 못 돼요. 소망교회에 이진우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유력한 장로였고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이진우라고 하면 국회의원 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지요. 이명박이 다녔던 그 소망교회의 장로이지요. 한국을 진짜 좌지우지했던 대단한 장로라고 볼 수 있어요. 손봉호 장로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제적인 권력에 있는 장로인데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괜찮은 교회,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상적인 교회를 채워주는 예수님이 예수님이에요? 아니지요.

 

바로 이 이상적인 교회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가야 했다. 이상적인 교회는 어디에서 나왔다? 마귀(내 죄)가 나로 하여금 거기에 혹하도록 그렇게 하셨고 그 마귀를 고안하신 분이 누구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고안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전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서 마귀까지 다 만들어내시는 이 철저함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는 목자를 위해서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가짜 목자를 미리 깔아놓고 그 목자하고 협상해서 나도 복을 받겠다고 같이 환호성을 불렀던 그 양의 모습, 목자를 섬겨서 이익을 보자는 그 엉터리 같은 양의 품성을 갖고 살아갔던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쪽에서 요한복음 10장을 보시면 10장은 쉽게 이해될 겁니다.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요한복음 10장을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오실 때에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전파하면서 없던 인간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없던 인간을 새로 만들었으면 십자가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