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9:3 / 보내심 / 1601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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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1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9장 2절부터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소경을 가운데에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왜 제자들이 소경인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이 구조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일단 구원 받는 우리한테 하나님이 물어봐야 되지 않습니까? “구원해줄까? 구원해주지 말아?”
그런데 우리는 제쳐 놔두고 다른 분과 의논해가지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그냥 통보하듯 “야, 너는 끝났어. 이미 천국이야.”라고 합니다. 뒤늦게 통지서를 툭 던지는 식이에요. 이게 구원입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천국 가는 데에 대해서 내가 손을 쓸 기회를 주지를 않아요. 기도를 빡세게 하라고 하든지 헌금을 하라든지 하는 기회를 전혀 주지를 않습니다. 당사자인 우리는 빼놓고 자기들(성부 성자)끼리 다 해버려요.
이 소경에게는 구원이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당사자인 소경에게 안 물어보느냐 하면 소경은 소경 본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제자들하고 예수님하고 같은 패란 말이지요.
소경은 그냥 길 가다가 봤습니다. 이 패가 두 패로 나뉜 거에요. “이 소경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라고 물을 때 이미 칸막이가 쳐져서 저쪽은 전혀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소경에 대해서 소경 당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는다는 말은 소경은 처음부터 이쪽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에요.
구원을 받고자 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100% 가짜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천국에 갔다면 그것은 100% 가짜에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공이 될 때 그 천국이 천국입니다. 나부터 시작을 하면 안 됩니다.
시작은 다른 데에서 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고 결정판이고 하나의 결실물이고 주님의 조각품이어야 될 경우에만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조각가의 집에 전시물의 창고나 전시회에 가게 되면 조각물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죽 둘러보면서 조각가는 흐뭇해하잖아요. 바로 그것이 천국입니다. 얘도 내가 구원했고 얘도 내가 구원했고.. 이렇게 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각할 때에 조각이 약간 삐뚤은 것도 조각자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창고에 가봤는데 조각이 처음 만들었을 때와 다르게 되어 있다면 ‘뭐야, 이 조각은.. 도둑이 들었나? 내가 만든 것과 모양새가 왜 다르지? 이것을 부수고 다시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조각품이 모습을 삐뚤게 한 것조차도 조각당한 조각품에게 사전에 절대로 물어보지를 않아요.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의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적대적 관계입니다.
‘이 이단들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쯤 되어서 예수를 만날 것을 예상하지 않았지요? 쉽게 말해서 숙소에 가다가 곰을 만난 셈이에요. 그냥 회색곰을 만났다고 보면 됩니다.
숲속에 가다가 예상하지 않았던 큰 물체를 보았는데 인디언(사람)이 나온 줄 알고 보니까 인디언이 아니라 회색곰이 와가지고 주인공을 반쯤 죽여놓는 그 영화가 최근에 나왔어요. ‘레버넌트’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뜻인데 아카데미상 12개의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것이 있어요.
인디언 숲에 갔다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온 그 이야기인데요 회색곰을 만나가지고 반이 아니고 거의 죽을 뻔한 것이지요. 예상을 못한 겁니다. 자기는 인디언인 줄 알았어요. 아카나카 족인가 그건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곰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것은 그냥 꾸준히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요. 무슨 계획이 있고 오늘 또 애를 돌보고 무슨 적금(곗돈)을 언제 타고 이러는데 갑자기 곰을 만난 셈입니다. 그것을 제가 침범이라고 했습니다.
침범이라는 것은 그냥 방문이 아니고 공격이에요.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올 때 “사도바울아, 잘 있었나?”라고 오신 것이 아니지요.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지요. 전투관계 그리고 다툼관계, 전쟁관계에 있음을 찾아오니까 아는 거에요.
주께서 찾아오니까 내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아는 거에요.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 힘으로 교회에 가고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이 따위 식으로 해봐야 천국은 커녕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존재였구나.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진짜 자기만 지옥가면 되지 나까지 지옥 가도록 질질 끌고 간 셈이되는 거지요. 선교회비 내야 되고, 봉사해야 되고, 꽃꽂이 해야 되고, 예배 참석해야 되고,.. 이런 행함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헛되게 할까 두렵다고 이번 수련회 제일 마지막 시간에 제가 분명히 언급했지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니”에서 소위 “지킨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까? 상대를 알고 나를 알 때 지킨다는 것이 되는데 주님이 등장하는 그때만 나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계속 주님 앞에 있으면 나는 계속 나에 대해서 모르는 자가 됩니다.
‘내가 그 정도였어? 내 죄가 그 정도로 많았었어? 이것도 죄였어?’ 나에 대해서 ‘나는 얼추 이 정도다.’라고 자신감이 있던 내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점점 더 미궁에 빠져요. ‘도대체 내가 누구지?’
그때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도 돼, 왜? 몰라도 괜찮으니까. 네가 안다고 해서 네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몰라야 그것이 구원에 수월타.’입니다. 아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행위로 전환시키려고 나대기 마련입니다. 좀 안다고요.
‘주님 기도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헌금할 때 돈은 다리미질해서 드리면 됩니까? 교회 올 때에 양복을 쫙 빼입고 올까요? 옷은 뭘 입고 가방은 뭘 매야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하면서 자기에 대해서 좀 아는 척을 하고 있어요.
전혀 주님께서는 아는 척하는 사람을 비켜서 다른 길로 새버리십니다. 잡으려고 하면 벌써 저쪽으로 내빼시고 있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져버려요. 따라잡았다 싶으면 벌써 내 손안에서 빠져 있어요.
나를 잡아서 소유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합작한 것도 아니고 하청업자도 아니고..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주께서 이야기하는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되는 존재가 우리 존재에요.
주께서 주시는 그 한계선만 알고 돌아서면 그 뒤에 뭐가 있는지를 또 몰라요. 주께서 또 이끄십니다. 그러면 ‘아, 내가 그런 인간이었었어.’라고 그제서야 또 알게 돼요. 이 말은 -우리 쪽에서 실시하는 게 아니고- 이미 내가 어떤 조각품이어야 되고 어떤 존재여야 되는 것을 저쪽에서 다 알고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실을 풀듯이 풀어주는 겁니다.
그 실이 풀린 기한만큼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끝나면 실을 확 회수해버리지요. 그러면 주와 함께 천국(낙원)에 가있을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증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는 이런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이 땅을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인생(나)는 내가 이렇게 만든(된)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있는데 그 다른 분을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신 거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경이 가는데 소경과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쪽의 사람의 말이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것을 본인한테 물으면 될 텐데 말이에요.
소경 본인한테 물으면 따귀 맞지요. “그래 너 잘 났다. 그래. 내가 소경 된 것이 이렇다저렇다 벌 받은 것이 있어. 어째, 어째, 어째. 그래, 너는 눈 떴으니까 나보다 낫다 그 말이지?” 이것은 싸움만 될 뿐이지요. 일방적으로 이렇게 규정을 지어버렸습니다.
다시 보십시다. 소경이 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에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 소경에게 들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있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무엇이겠느냐는 겁니다.
성부하고 성자하고 “쟤는 우리 하늘나라에 와야 돼.”라고 속닥속닥 이야기를 끝냈으면 이제는 당사자에게 통보해주는 일이 남아있잖아요. 그 통보해주는 방법이 뭐냐고 하는 겁니다. 통보를 그냥 해줘버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냥 통보해줘버리면 기분이 나빠서 도망가 버립니다.
이제부터 시간이 얼마가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시간이 오래가면 잊어버리니까 짚고 넘어가겠는데 지금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신 그것, 주께서 내 주에게 하신 그 말씀, 시편 110편 말씀을 다 이루어 놓고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든지 알려주든지 해야 되는데 그 방식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식에 대해서 인간이 과연 그것이 수용이 되겠느냐 한다면 수용이 되지를 않아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기 인간이 있잖아요. 소경이라고 해도 되고 누구라고 해도 되는데 인간이 여기 있으면 인간에게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막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방어막이라고도 하고 또는 보호막이라고 합니다. 인간 혹은 어린애가 있는데 어린애를 예를 들면 쉽겠네요. 어린애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보호막, 자기 존재를 인정해줄 보호막, 방어막 같은 것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너 참 예쁘다. 여기 돈 만 원 줄 테니까 가서 맛있는 것 사먹어라.”라고 하면 아이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 엄마가 낯선 사람(아저씨)이 주는 돈은 받지 말래요.”라고 하는 거죠.
뭡니까? 방어지요. 그러면 이 안의 아이는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방어를 한 것이 되는가 하면 부모가 자기한테 지시한 명령과 훈계로 가득차 있는 방어막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태반이죠. 자궁이 되는 겁니다.
자궁에서 벗어나도 여전히 자궁에 있어요. 그러면 이런 정신적인 자궁은 몇 세까지입니까? 죽을 때까지입니다. 아까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서울교대에 강원도 애가 왜 오느냐 이 말이지요. 강원도 애가 와서 사투리를 쓰더라 이 말이지요.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분의 평소의 방어막(태반)은 뭡니까? 절대로 사투리는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방어막이에요. 표준말은 한국의 중류층 서울말로 되어 있는데 왜 반칙을 범하느냐 이거에요. 특히 교사가 될 사람들이 왜 사투리를 쓰느냐 이거에요.
정식으로 FM대로 딱 가야지.. 이 말은 내 방어막에 너희들이 굴복을 하든지 사투리를 쓰려면은 강원도에 있는 교대로 다니고 서울에 오지 말든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아주 멋진 예를 들어서 감사합니다마는..
그 안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긍정할 만한, 자기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요소들로 하나의 태반(자궁),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거에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시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바깥에 어떤 사람이 천국문(門), 또는 선악과를 놔 뒀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자기가 만든 자궁(태반) 안에 있는 이 사람에게 천국문이나 선악과는 없는 세계이지요. 그런데 이 없는 세계, 저 산 너머에 뭐가 있는지가 굉장히 궁금한 겁니다.
선악과를 왜 따먹었는가 하면 선악과 뒤에 뭐가 있는지가 그렇게 궁금한 겁니다. 전에 설교할 때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꼬마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모르지만 옛날에는 시체를 놔두고 평풍을 쳐가지고 함부로 못 들어가고 그 앞에서 성경책을 놓거나 보통 사람 같으면 떡을 놓고 절하잖아요.
애가 “할아버지 어디 갔어?”라고 하니까 “할아버지 천국 갔다.”라고 한 거에요.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어?” “할어버지가 가신 곳이 천국이야.” 이렇게 된 거에요. 그 애가 천국을 보고 싶은 거에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평풍을 확 젖혔어요.
가렸다는 것은 가림 그 뒤에 어떤 세계가 있기 때문에 저쪽 세계를 가렸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미 자기가 아는 세계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할어버지 앞에 친 그 평풍이 자기 세계와 자기가 못 가본 세계의 경계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젖혀버리면 자기의 방어막은 더 넓어지는 거지요. 이제는 천국까지 아는 거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천국이 있던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불똥은 자기가 갖고 있던 이 자궁, 자기 세계 안에 튀면서 이 세계가 저주를 받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저주의 세계였던 거에요. 누구에게만? 인간이 감히 천국을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순간, 천국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우리가 시도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줘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스타트해서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에요.
이사야 6장 5절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이사야가 본 천국입니다. 천국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천국은 있어도 못 가는 세계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처음 알았습니다.
천국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그런데 너무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입장에서는 그곳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나는 너무 더럽고 천국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못 간다고 자기 자신을 알 때 그것은 천국의 능력이 도착했기 때문에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나 종교를 보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천국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지요?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천국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고 난 뒤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이 자궁 밖에 무슨 세계가 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계를 극락이라고 하지요. 150세에 극락에 있다고 전해라. 극락이라고 하고 온갖 것을 다 상상을 하지요.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이게 돼요. 어차피 거짓말이기 때문에 극락이든 뭐든 괜찮아요. 그런데 진짜를 본 사람 같으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해야 되는데 이들은 진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겁니다.
천국에 가면 골프장에 18홀이 있고.. 깨어라 표지책에 보면 나오지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중간에 부르스 흐르고.. 이게 코란(꾸란)책에 보면 천국이 그렇게 묘사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는 강가에 12과실이 심어져있다고 나오는데 그 광경을 보고 싶으면 평양 방송을 틀면 나옵니다. 대동강을 가로수로 그렇게 꾸며 놓았어요.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천국은 전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인 줄을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어느 정도 엉망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내 안의 세계에서는 내가 절대자고 착하고 선하고 날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성실한 존재이지요.
조금 잘못한 것도 있지만 잘못하자마자 곧장 반성도 왜 그리 잘하는지 반성하고 회개도 잘하고 나쁜 짓을 했으면 다시 그 다음에는 착한 일을 가지고 그것을 보충해줄 줄 아는, 칸트가 말하는 윤리적, 도덕적 이성이 있으니까 얼마나 착합니까?
세상에 이 착한 자를 누가 손댈 거에요? 천국에 가도 1등으로 가야 되는데요.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아는데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지금 복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소경이 안 되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소경이 안 된 이유가 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길 가는 소경과 대비를 하고 비교해보니 ‘아이고 인간아 저렇게 살면 뭐 하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차마 그 말은 속으로 하고 겉으로 다른 표현을 합니다.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흔히 누구네 가정이 잘못 되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이야기를 하지요. 심지어 이것은 누구의 가정과 비교할 것도 없어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가 잘못 나오면은 ‘주여 머리 잘못 나온 것이 우리 조상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 죄 때문입니까?’ 몸이 아파도 마찬가지지요. 심지어 추운데 버스가 늦게 와도 마찬가지에요. ‘주여 내 죄 때문입니까 박근혜 대통령 때문입니까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절대로 나는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뭐든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지당스러운데 이것이 삐딱할 때는 ‘이것은 분명히 죄다.’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이 소경과 관계함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제자들을 소경으로 보내고 소경을 예수님의 자리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네가 욕하는 그 자리를 다녀와야 된다는 겁니다. 네가 질타하고 네가 ‘아이고 인간아 왜 사니? 나는 절대 죽으면 죽었지 저런 인간처럼은 안 살거야.’ 하는 자리를 갔다 와야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 무슨 뜻입니까?’ 생각하면서 보는데 그렇게 보지 마시고 ‘내가 어떤 인간입니까?’라는 마음으로 보세요. 자기 주제도 파악 못했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뭐하려구요.. 정보 얻어서 천국 가려고요..
그렇게 안 되거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포함한 타인 전부를 바깥에 세워놓고 있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를 해봅시다. 인간이 중심에 있고 세계관(보호막)으로 둘러쌓여 있다면 그 속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때 그게 내게 없으면 이것이 욕망으로 나에게 들어와 버려요. 예를 들어서 나는 현재 내가 있고 내 세계가 있잖아요.
한 두 살 아이한테 만 원짜리 장난감이 있어요. 그런데 명절날 삼촌이 와서 장난감이 오래됐다고 하면서 낡은 장난감을 가져가고 5만 원을 줬을 때 애가 좋아할까요 아니면 앙 하고 극렬하게 반항할까요?
두 살짜리 아이한테는 5만 원이라는 것이 자기의 보호막 속에 없어요. 장난감이 자기 세계에 중요하지 5만 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은 5만 원을 가지고 장난감 5개를 사면 되는데 절대로 그런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니까요.
그것을 뺏길 때의 저항으로 앙 하고 울지요. 그것이 꼭 우리의 모습 같아요. 갈 수 없는 천국을 줬다는데 우리는 기존의 살던 이 버릇과 이 세상을 뺐겼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실은 사는 게 힘드는 게 아니고 주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느 정도 인간인가를 아는 게 더 힘들어요. 여러분들이 밤중에 검은 옷을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시면 위험하다고 합니다. 안 보이니까요. 그 이야기가 본문 4절에 나오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지금 이 이야기를 할 때가 대낮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밤이라고 했어요. 개념이 정반대입니다.
제자들 생각은 태양이 있으니까 낮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인 거에요. 자기 보호막이 있기 때문에 ‘어, 훤한 대낮이네.’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늘 낮이 아니고 본인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낮이 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너희들 단독적으로는 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들은 개뿔도 모르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이 어두우니까 어두움에서 나오는 말만 하는 거에요.
요새 이벤트 같은 것을 하는 카페들이 있는데 카페 중에 암흑 카페가 있답니다. 카페 문을 싹 닫고 들어가면 깜깜해요. 그래가지고 더듬어서 물을 마시고 더듬어서 테이블에 앉아야 돼요. 그런데 그 깜깜한 데의 묘미가 괜찮다면 괜찮은 겁니다.
여러 가지의 교훈들을 줄 수 있겠지요. “태양이 이만큼 좋은 줄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것도 있고 내가 평소에 마시던 커피가 이렇게 뜨겁고 물은 이렇게 차고 또 컴컴하니까 커플들이 같이 들어가면 무슨 난리가 나겠지요.
평소에 있을 때는 만져도 짜릿한 기분이 없다고 컴컴한 데서 만지면 유난히도 다른 필링이 올 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남편하고 같이 암흑카페에 가보면 또 다른 감동이 있을 수도 있어요. 마치 처음 연애할 때 만졌던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 말이지요.
지금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보시기에 깜깜해요. 암흑 카페에요. 그런데 암흑 카페라서 모른다고 하면 괜찮은데 안다고 또 난리네요. 개뿔도 모르면서 “쟤가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하는 거에요. 안다는 것이 같잖치도 않은 거에요.
그래서 네가 욕하는 그 어두움을 다녀오면서 그 어두움 가운데 있는 소경을 주님 앞에 끌어오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두움의 자리에 내보내는 거에요. ‘잠시나마 나 너희들하고 상대하지 않고 소경하고 상대할거야.’
그래서 소경을 데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는 거에요. 제자들 누구한테도 이렇게 친절을 베푼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데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과 예수님이 다닌 예루살렘을 비교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도시가 많이 확장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예루살렘은 다윗 성이라고 해서 그냥 성채만 있는데 이곳에 민가가 늘어나요. 그래서 하나의 예루살렘 성이 되는데 이 초기의 성 말고 만들어진 성 멀리에 실로암 못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이쪽(초기 예루살렘)에 있다가 저쪽(예루살렘 성)으로 가니까 거리가 뚝 떨어져 있지요. 실로암 못으로 일부러 보내시지요. 실로암이라는 것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소경을 보낸 중심 위치는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평가는 중지가 되고 새로 투입하는 주님의 뜻만 고스란히 남아 있어줘야 그 사람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거에요.
여기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했는데 나타낸다는 것은 증거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이야기를 소경하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소경은 지금 나와 있어요. 제자들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제자라고 하는 것은 늘 붙어있다고 제자가 아니라 어두움의 자리를 왔다갔다, 갔다가 다시 와야 되고 갔다가 다시 와야 돼요.
‘나는 제자인데 쟤는 제자가 아니에요.’라고 하면 제자가 아닌 자리를 제자가 다녀와야 돼요. 그러면 봅시다. 여기 예수님이 계시고 조금 떨어져서 제자들이 있고 바깥에는 소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은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직접 얼굴을 손에 대임을 당하면서 명령도 받는데 제자들은 멀쭉하니 소경 자리에 가야 되잖아요. 제자들의 자리를 소경이 차지했으니까요. 소경의 자리로 가서 원래 있던 자리를 다시 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과 소경의 사이가 어떤 관계인가 하면 보내시고 보냄을 받는 관계이지요. 원래 제자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자들은 제자라고, 이미 합격했다고 옛날의 처음 부르심은 낡아버려서 잊어버린 거지요.
늘 수시로 이렇게 해야 되는데요. 그럼 이 소경의 자리에서 주님께로 다시 와야 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소경이 갔던 제자들의 자리에 주님이 가십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고 나는 절대로 저래서는 안 될 자리에 가보면 거기에 이미 주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사람은 때려 죽여도 자기 부인을 안 해요. 아무리 자기를 학대하고 낮추어도 자기만 크게 보이지 주님이 크게 보이지를 않아요. 오히려 낮추고 낮추고 낮추고 낮추는, 그 낮추기를 열심히 착하게 바르게 하는 잘난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서 증거해요.
‘이 먼 아프리카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하는 나는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거기에 가도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면 선교이고 한국에서 하면 선교가 아닌 게 아니에요. 집구석에 앉아있으면 선교가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도대체 누가 나를 여기에다가 꽂아넣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누구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에 한해서만 주와 관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자적으로 내가 여기에 가고 여기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은 보내는 것이고 그 보냈다고 하는 것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보낸 자를 증거할 경우에만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일로 성사가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소경은 소경이 왜 되었습니까? 1. 조상의 죄 때문이다. 2. 자기의 죄 때문이다. 3. 하나님이 소경이 되라고 보냈기 때문이다. 몇 번입니까? 3번이지요. 문제는 이것을 소경에게만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나한테 적용시키려고 하니까 겁이 나요. 왜 겁이 나느냐? 또 멀쩡한 우리 집에 불이 날 수도 있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뒤집어 질 수도 있는 문제이고요.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뼈가 부러졌는데 빙판길에 미끄러지라는 일을 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자기의 보호막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지켜주는 나의 자궁 같은 아늑한 집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이런 소경을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침범을 하고 있는 거에요. 말씀이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하고 나하고 매일같이 전쟁 중입니다.
그러면 왜 전쟁을 합니까? 나를 향하여 전쟁을 합니까? 아닙니다. 빛이 어두움을 향하여 전면전을 벌인 겁니다. 다만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감을 못 잡고 있었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빛과 어두움이 싸우고 있었다는 감을 잡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감을 잡았기에 진리를 알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진리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거든요. 그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할 테니까 누가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질문이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부분으로써 질병에 의해서 자살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전에 교회의 자매가 우울증이 삼하여 결국 투신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자살을 하면 무조건 지옥인지 아니면 자살자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포함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것이 질문이에요. 여기가 초등학교 교실이라고 생각하고 답변해보세요. 질문 자체가 너무 비정해요. 다른 데로 둘둘 돌릴 여유를 주지 않는 질문이에요.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의 구원의 주안점이 아닙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 구원입니다. 자살한 그 사람이 평소에 무엇을 증거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뭐를 나타내는데 써먹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개인의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이스라엘에 속해 버리면(새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 그 사람은 단체로 구원 받는 일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가 한 답변이에요. 답변이 더 어렵지요. “쟤는 어떻고 나는 이렇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에요. 쟤는 공부를 잘하고 나는 못한다고 해버리면 각자 각자가 자기의 재주를 증거하는 것밖에 안 돼요.
주께서는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함을 통해서 공부를 잘함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잘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나는 공부를 못함을 통해서 주님이 증거된다면 이 둘이 쌤쌤이 되는 겁니다.
왜? 다 같이 한 반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빌리지, 같은 마을, 같은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 그렇게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요. 왜? 주님을 경유하고 오기 때문에 이제는 네 자랑 내 자랑, 네 재주와 내 재주를 비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교회에 수련회를 마치고 마음이 뚫렸다고 하면서 오셔서 등록하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우리 애는 공부를 꼴찌해요. 저는 그래도 사회성이 좋으니까 늘 기분이 좋아요.”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애가 공부를 꼴찌하는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왜? 본인이 공부 꼴찌한다고 전혀 기죽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거에요. 좀 이상하지요. 사회성이 좋다는 겁니다.
제가 뭐 다른 이야기를 하겠어요? 중학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해도 술, 담배는 하지 말라고 하세요.”라는 이야기밖에 못했는데요, 이 소경 이야기, 또 그분 이야기, 아까 그 질문 이야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하면 개인을 지키는 보호막, 거기에서 탈출해야 된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백 날 커져봐야 자기의 잘남의 자랑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해야 될 사람이 가는 그 천국에 못갑니다. 자살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자살하지 않고 그냥 죽어도 전혀 기준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곱게 늙어죽었다고 해도 천국에 못가요. 자살이냐 그냥 죽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평소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해서 본인이 알고 있으면 돼요.
주인공이 달라져야 돼요. 내가 주체가 아니고 다른 분으로 달라져야 돼요. 오늘 늦게 오신 분이 있으니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또 가다가 빠진 부분도 있어서요.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경은 따로 그냥 있었는데 예수님하고 제자들만 이야기하면서 “저 사람은 어떻습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이 말은 뜻은 소경의 구원은 소경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빼놓고 다른 데서 이미 결정을 해놓고 그냥 나중에 통보하는 겁니다.
통보할 때는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가? 보내시는 방법으로 통보가 된다는 거에요. 보내심을 받은 자. 로마서 10장을 한 번 봅시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1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된 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나와서 졸업해서 목사 되어서만이 복음 전파가 아니고 성도 자체가 이미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중입니다.
로마서 10장 18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지 않아도 나로 엮여진 모든 사람들한테 이미 말씀이 나를 타넘고 다 전파되는 거에요.
어릴 때 등목한다고 바께스에 물을 담아가지고 어린애를 엎어놓고 물을 붓잖아요. 그러면 물이 등에만 딱 옵니까? 온 천지에 다 퍼지지요. 그처럼 나한테 퍼부은 말씀은 나를 이용해서 온 천지에 파편이 튀듯이 다 튀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지 내가 성경말씀을 조직신학으로 잘 전했다가 아니에요. 주께서 나를 사용할 때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효과를 아시고 나를 사용한 거에요. 우리는 그 효과를 전부 계산하지 못하지요.
우리는 나랑 친한 사람, 나한테 영향을 입은 그런 사람에게만 은혜 받았느냐고 묻는데 은혜 받고 안 받고는 우리가 계산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이미 우리를 사용했다면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경쓸 이유가 없어요.
진짜 이것은 무지막지 하고 너무 급진적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자살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자살을 해야지요. 내가 이야기하고도 이단법에 안 걸리나 몰라요.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순교였습니다.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지만 죽이기 전에 먼저 스스로 ‘네가 죽이는 칼은 안 받고 내가 알아서 죽겠다.’ 이런 식으로 한 초대교회의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고 실로암에 보내듯이 주께서 보냈다면 이미 그 자리에 와계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십자가를 나보다 먼저 앞서 달려가서 십자가에서 나를 기다리신 분이십니다. 에스더 같은 경우에는 왕비였지만, 미스 바사나라 진이 되신 소감에 대해서 인터뷰하는데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거에요.
그렇게 소감을 밝히는 미스코리아는 없겠지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의 인생을 통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네요.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하게 보이십니다. 애가 셋이네요. 어머나 다복해. 다 키우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죽으면 죽으리라를 매일같이 반복시킴으로써 주만 증거하게 하시는 그 방법에 대해서 남들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모방해서도 되지 않고 흉내낼 필요도 없지요. 같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특수한 개성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것도 주의 보내심을 받은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각자의 자리가 내가 열심히 만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좀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자들은 소경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소경이 안 될 정도로 착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의 자리인 줄로 알았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제자들은 ‘나는 멀쩡한데 저 사람은 소경이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분명히 죄를 더 지었다.’라는 평가기준, 오해가 나와버린 거에요.
그런데 그 소경이 제자들을 제치고 주의 일을 할 줄을 제자들은 몰랐던 겁니다. 소경도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멀쩡한 인간이 주의 일을 안 하고 있고 오히려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공격하고 구박했던 것밖에 되지 않잖아요.
주께서는 자리 바꿈을 통해서 보냄을 입었을 때에는 너희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이 되라고 보냈다는 사실을 9장 초반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9장 3절(가락-보내심)16012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13절에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라고 되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소경 되었다가 눈이 멀쩡해졌으니까 놀란 거에요. 눈을 뜬 것에도 놀랐지만 소경이어야 하는데 왜 소경이 아니냐 하는 것 때문에 놀란 겁니다.
사람은 뭐든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요. 원인을 알면 무섭지 않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처음 만들었거든요. 그전까지 번개 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근거해서 신의 진노라고 여긴 거에요.
그런데 사실은 구름 사이에 음전자와 양전자가 만나서 생긴 전기 입자의 방전 상태가 번개잖아요. 그것을 알고부터는 요한계시록이 별로 무섭지가 않아요. 요한계시록이 거짓말 같아요. 왜?
하나님의 저주를 인간의 힘으로 방비를 했잖아요. 낙뢰를 피뢰침을 해서 다른 데(흙)로 새게 만든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법칙도 과학적으로 풀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의 똑똑함을 믿으면 그만이다 말이죠.
“보다 더 나은 행복과 나은 삶은 우리 힘으로! 우리 손으로!” 그것이 구호가 되어 버린 거지요. 그러니까 사람에게 무섭다는 말은 정체를 모르니까 무서운 거에요. 밤중에 누가 우리 집 담을 넘어서 도둑인 줄로 알고 총으로 쏴죽였는데 보니까 자기 딸이 몰래 들어왔다가 총에 맞아 죽은 거에요. 미국에서.
정체를 모르니까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알면 괜찮은데. 무서워서. 그래서 부부라도 평소에 하던 대로 해야지 갑자기 술을 먹던 사람이 “이제부터 술을 끊는다.”고 하면 아내가 무서워해요. “하던 짓을 그냥 해라. 내가 무섭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원인을 모르면 무조건 무서운 거에요.
이 말은 모든 것이 나에게 납득이 돼야 된다는 거에요. 원인과 결과가 딱 짜야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소경 되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놓으니까 원인을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경 되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하나님)의 계획은 참 치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빛의 세계에서 빛 되신 예수님을 어두움의 세계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이 소경 된 사람을 또 보내버려요. 그러면 이 소경에게 일어나는 그 일은 장차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장차 예수님이 누구한테 잡혀 죽습니까? 바리새인들한테 죽지요. 죽는 이유는 뭡니까?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한테 걸려서 사형당하고 그리고 빛의 세계로 귀환하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어두움의 세계가 더욱 더 어두움이다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착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왜? ‘네가 이 정도 죄인이어서 절대로 내가 아니면 너는 천국에 가지도 못해. 지옥에 가야 마땅함을 네가 동의하지?’ 그것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거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이 오신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주께서 안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기도를 해야 돼요. 기도를 하는 가운데 그 기도에 대해서 평가가 있을 게 아닙니까?
기도도 안 하고 평가 받으려고 하지 마시구요. 엉터리 담화라도 해야 빨간펜으로 수정하고 이런 게 있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면 날로 먹고 공짜로 받겠다는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기도하는 가운데 수정이 되어야 되거든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정받을 짓을 하라고 우리보고 하루하루 살게 하고 우리가 예상 못한 사태를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갔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는 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줘야 되겠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전체적인 흐름을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으로 보여준 천국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완성이 되면 천국이 되고요, 그것에 앞당겨서 안식일이 천국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에다가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칠 일마다 찾아오는 안식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참 중요하게 여깁니다. 특히 이사야나 에스겔서 같은 곳에 보면 다른 법은 다 없어져도 안식일 법은 영원하다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안식교에서 그렇게 난리를 하는 겁니다. 자기들은 토요일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잘못은 갈라디아서 4장의 말씀을 모른다는 겁니다. 날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고 준 것이 복음인데 그 사람은 계속 그것을 붙들고 있다는 말은 ‘복음 그딴 것은 씨도 안 먹혀.’라고 내치는 모습이 ‘우리는 지킬 것을 지키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제가 안식교만 욕하는 거에요. 한국교회에서 두 가지는 못 놓지요.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십일조 해서 목돈 챙기고 주일 성수해서 광고가 나갑니다. 예배 시간이 뭐 딴 거 있어요? 광고하려고 예배 시간 엄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보다 광고 시간이 더 중요해요. 눈이 빠르게 돌아가요. “주차위원은 30분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담당 권사님들은 커피 타임에 빠지지 마시고 오세요. 세 번째 주일에는 바자회를 하니까 바자회에 다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거요.
그리고 “우리가 보냈던 선교사가 다음 주일에 드디어 오십니다. 헌신예배 드립니다. 꼭 참석하시되 선교헌금 준비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그렇게 소원했던 옆에 있는 땅이 나왔습니다. 기도해서 주차장 넓히는 것이 주의 뜻이니까 이 참에 하나님의 기적과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 보입시다.” 그것이 광고 시간에요.
장사 한두 번 합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이 동네 다른 동네 남의 장사하는 영업비법을 다 알고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설교고 뭐고 다 없어요. 중요한 것은 광고라니까요. 설교해도 못 알아들어요. 설교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르고 다 몰라요.
그런데 광고 시간만큼은 왜 그리 다 알아들어요? 광고와 십일조가 교회를 유지시킵니다. 딱 두 가지거든요.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할례입니다. 창세기 17장에 “할례 받지 아니하면 거룩한 족보에서 떨어진다”고 나와 있어요.
그것에 초점을 맟추는 이유는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다시 말해서 내 힘으로 내가 나한테 어떤 행위를 가한 것이 나로 하여금 구원을 확정지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줘요. 할례는 병원에 가서 하든지 하면 되잖아요.
그것을 하면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을 받겠다는 데에 어떤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우리는 평생 그것을 놓치지 않지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한테 설교를 듣는 게 주의 말씀을 듣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확정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소리만 하고 다른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에요. 물론 그 이야기만 하지요.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이 성만찬을 하려면 직전 일 주일 동안은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성경책도 좀 보고 마음에 준비를 해서 성만찬에 참석해서 이 살과 이 떡을 먹으면 이 사람은 누가 뭐래도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다.
그것과 또 한 가지는 물을 틱틱 뿌리든지 아니면 침례교처럼 엎어져서 욕조에 들어갔다가 나오든지 해서 세례(침례)를 받으시면 생명책에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일단 기분이 좋거든요.
할 수 있거든요. 할 수 있는 것은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 다음에 목사가 그것을 하고 내뺄 줄을 알기 때문에 또 붙드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시작이고 천국 갈 때까지는 착한 일을 많이 하셔야 됩니다.
시간과 물질로 봉사를 많이 하셔야 됩니다. 나는 물질이라는 말은 화학에서 배우는 말인데 왜 그것이 돈이 되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것이 없이는 구원은 받되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그 봉사를 하시면 높은 자리에 상급을 받아 들어가십니다. 목회가 뭐 있어요. 그것이 목회의 전부인데요.
그것도 재미 없으면 그 다음에 이렇게 해서 잘 되었다는 사람들의 간증 이야기를 하면 설교가 끝나는 거에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을 정리하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을 인하여 내가 구원 받는 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왜?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면서요? 내가 할 수 없는 믿음으로요.
내가 할 수 없는 믿음은 어떻게 하느냐? 내가 믿는 것은 다 좌절시켜주실 때 얼마나 감사한지요. 내가 해서 기대한 모든 것을 어떤 분이 좌절시켜주실 때 나와 너의 관계는 네가 내민 관계가 아니고 내가 내민 관계에 엮여져야 하고 그때 너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해야 된다.
네가 내민 믿음이 믿음이라고? 그것은 치워라. 확 부려뜨려 버릴 테야. 그러면 내가 내민 믿음은 왜 안 됩니까? 그것은 구약을 보아라.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자기 쪽에서 내민 모든 것이 율법에서 나왔어요.
율법에는 틈이 있어가지고 가까이 가면 너무나 멀어져요. 분명히 가까이 갔데게 막상 가보니까 율법의 정신에서 너무 멀어져 있어요. 분명히 육신에 할례를 행했는데 딱 가보니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니요.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졌어요. 갑자기 멀어져 버렸어요. 주님이 손에 잡히는데 가보니까 멀리 가버렸어요. 점점 더 멀어져 버렸어요. 어느 세월에 따라잡습니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분명히 남편이 죽었는데 꿈속에 남편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꿈속에서 “여보!” 하고 붙잡으려고 하니까 남편이 저쪽으로 물러갔어요. 또 붙잡으려고 하니까 “여보보보~~” 하면서 사라져 버렸어요. 그리고 깨보니 식은땀이 나있어요. ‘아이고, 남편이 꿈에 나타났구나. 왜 나타났을까?’ 하고 서랍을 열어봤어요.
그런데 남편이 남겨둔 도장이 있어요. 그리고 밑에 보니 서류가 있어요. 보니까 남편이 죽으면서 남겨둔 땅 문서였어요. ‘아, 이것을 알려주려고 나타났구나.’ 물론 드라마입니다. 바리새인과 그 관계는 그 어떤 징후나 징조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징조와 징후를 찾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쪽에서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완전히 과학수사대처럼 뭔가 주님의 머리카락이라도 찾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거기에 미끼를 던진 거에요.
우리가 찾아서 갈 천국이라면 애초부터 천국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천국을 방해하는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요. 요번 수련회를 하면서 제가 기분이 좋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였어요.
마귀도 주님의 일을 한다는 그 이야기를 했지요. 다시 들어보세요. 자꾸 들어보면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라고 하게 되지요. 마귀도 주의 일을 해요. 이 마귀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가룟 유다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사탄이 없으면 구원이 안 돼요.
그런데 마귀가 주의 일을 하는 방법은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내 행동을 유발하는 짓을 하도록 하는 것이 마귀의 담당입니다. ‘너 이렇게 하면 이번 한 주 동안 복 받는다.’ 그런 것을 자꾸 내 속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해요. 마귀가.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하겠지요. 바리새인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16절에 보니까 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다시 이야기합시다. 안식의 완성이 천국, 메시야 나라인데 그 안식의 완성과 메시야 나라와 지상이 가는 실처럼 시간적으로 엮여진 것이 매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할례와 안식일은 추호도 양보 못하는 유대교의 진리가 되는 겁니다. 최소한 이것은 해야 구원 받는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되려면 딱 두 가지에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은 철통같이 지켜야 되는 겁니다.
자, 문제가 그거에요.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마음의 태도는 되어 있는데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안식일을 지켰다는 레벨(수준)에 도달이 되겠느냐?’ 인데 그것은 그때 그때 달라요. 그게 바로 탈무드라는 겁니다.
탈무드라는 것은 누적된 해설집이에요. 토론의 문집이 탈무드입니다. 영어로 하면 이것을 text라고 해요. 성경 말씀이 있으면 어떤 랍비가 해설을 하면 여기에다가 붙여요. 다음에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면 여기에 붙여요. 붙인 것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 40, 50년, 후대에 지나서 ‘스승님은 이렇게 했고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했는데 요건 그게 아니고 이거에요.’ 이것들을 모아놓은 게 탈무드입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경전이 돼요.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뭘 느끼겠습니까?
내가 식견이 좁아서, 오래 살지 못해서, 제한된 환경 때문에 알게 된 기껏 아는,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이 이런 선배들의 고견을 들음으로써 확장이 되겠지요. 그러면서 내 의견이 좋다는 그것을 꺾고 사람이 겸손해지겠지요.
‘아, 이런 천재적인 발상이 있었구나.’ 그것을 어린애들이 어릴 때부터 배워서 말발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장사를 잘하잖아요. 상대방의 의견을 탈무드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껏 몇 개 문항 가운데서 답변이 튀어나올 것이고 그것을 꺾어버리는 다른 해답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꼼짝도 못하고 기가 눌려서 내 밑에 있겠지요.
그러면 정신적으로 장악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가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어디에 가도 결국 인간의 싸움은 칼이나 힘이 아닌 언어(말)의 싸움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라고 하는 것처럼 ‘아, 세상은 “빛이 있으라” 하는 주님의 외침이 곧 존재가 된 것처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가 있는 것처럼 우주는 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있다.’ 그게 곧 토라, 율법이라고 본 겁니다. 유대인들은.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보통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사두개인이고요. 그런데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전부 다 뭘 잘하는 사람들입니까? 그 당시에 말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신 세계를 장악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을 장악한 사람이 인간의 정신을 장악한 세계가 바로 유대교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 되었던 사람이 갑자기 소경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누구를 데려왔습니까?
진짜 이 지혜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데려왔는데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진짜 대리자라면 할례를 행해야 되고 안식일을 잘 지켜야 되며 병이 낫든 안 낫든 이것은 문제가 아니고 안식일을 지킨 상태에서 병이 나으면 그것은 합격이고 안식일을 어긴 상태에서 병이 나으면 이것은 마귀의 짓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만날 줄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병을 낫게 해버린 거에요. 여기 1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무슨 날에 낫게 해줬다고요? 안식일에 낫게 해준 거에요.
결국 이 소경이 바리새인한테 한 번 당하라고 의도적으로 주께서 미끼를 던진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경 이 사람은 좀 억울하지요. 월요일도 있고 화요일도 있고 그날 눈을 뜨게 해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을 말이에요.
괜히 난 주께서 나 좋으라고 눈을 뜨게 해주신 줄로 알았어요. 주께서는 우리 좋으라고 구원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 자기 좋으라고 우리를 구원해주지 우리가 좋으라고 구원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엉터리로 생각하는 구원은 내가 좋으라고 하는 구원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주님이 좋은 구원을 받아야 돼요. 주님이 좋은 천국을 가야지 내가 좋은 천국에 가면 나의 세계가 되지 주의 세계가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께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구원 받은 우리에게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십니다. 듣기에 좀 슬픈 이야기지만 “구원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의 뜻은 끝났습니다.” 왜? 내가 원하는 세계에 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몰랐던 세계에 가야지 내가 아는 세계에 가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맨날 내가 아는 세계에 가요.
여러분들이 비행기를 타면 안대를 하지요. 우리가 잠시 눈을 감아보게 되면 깜깜합니까 어떻습니까 또 무슨 영상이 떠오릅니까?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깜깜해보이지만 조금 있으면 영상이 막 떠올라요. 내 기억에 있던 상상이 떠오르죠.
그래서 인간은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눈을 뜹시다. 눈을 뜨고 뭘 보잖아요. 그러면 그 사물을 보는 게 아니에요. 내 머리에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그 사물과 대조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지금 여기에 전등이 있잖아요. 전등을 볼 때 (옆에 계신) 목사님은 이것이 전등으로 보이지요? 이쁘다. 그런데 어떤 남자의 경우에는 ‘이 전등을 보니 내가 18살 때 만났던 우리 순이 모습같아.’라고 보는 거에요.
이미 누적된 추억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목사님이 도둑놈들한테 이 전등과 비슷한 것으로 맞았다면 ‘그만, 그만, 그만, 저것을 보니까 내 머리 얻어맞은 것이 생각나.’ 하고 전등을 돌려 꺼버리는 거에요.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현재 자기를 볼 때 그냥 보지 못하고 구축된 자기 세계의 확장을 기대하면서 나를 보게 되어 있어요. 선을 봤는데 아가씨가 안경을 썼는데 그 안경이 김구가 썼던 안경같이 동그래요.
그러면 교회는 몇 년 다녔고 키는 얼마시고 학교는 어디 나오시고 직업은 무엇인지 들을 것도 없어요. 그 안경은 안 돼. 하필이면 그 안경이야.. 그 안경한테 옛날에 내가 차였거든요. 그러니까 동그란 안경만 보면 다 기분이 나빠요.
바리새인들을 붙여준 이유가 바리새인들은 선입관이 있어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천하의 누가 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본 거에요. 왜? 안식일 법은 영원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그 선입관 때문에 실로암 못가에 소경을 보냈지만 사실은 주님이 가신 거에요. 다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 소경은 저쪽에 따로 있었지요. 그리고 소경에게는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소경의 눈에 직접 진흙을 바르시고 소경은 보내심을 받지요. 이번에는 주님 차례에요. 처음에는 소경이 갔던 그 자리에 주님이 먼저 가고 소경이 그 다음에 왔는데 이제는 소경이 간 자리가 마치 주님이 가신 길을 닦는 것 같아요.
소경 된 자가 바리새인한테 수난을 받고 욕을 얻어 먹는 그 자리가 주님이 조금 있다가 가실 길이에요. 그 길을 가야 십자가 사건이 터져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내가 가는 길은 나의 길이 아니고 주님이 가라고 밀어낸 자리입니다.
왜? 우리가 보기에는 내 인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자리가 주님과 통하는 좁은길이고 영생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있어 보입니다마는 없습니다.
여기에 세계 모든 부자들이 앉아 있고 세상에서 제일 이쁜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30대로 보이는 이영애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쭉 앉아 있을 때 “자기의 인생에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환경에 따라서 삶이 다른 것을 대비라고 합니다. 색깔대비에 따라서 멋있는 사람도 갑자기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게 되면 지저분하게 보이거든요. 북한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은 옷 입은 것을 보면 금방 알아요.
자기 딴에는 뽑아 입었는데 명동 같은 데에 우루루 다니는 것을 보면 금방 중국에서 온 사람인 것이 표가 나요. 이상하게 무늬는 베꼈는데 보니까 원단이 별로 안 좋다든지, 화장을 해도 같은 아모레 화장품인데 이상하게 옌변(연변도 아니고) 화장 같이 급조한 느낌이 드는 거에요.
성형을 했는데 새까만 느낌이 들어요. 부작용이 나서 터져가지고 고름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요. 그런데 이것을 그쪽에서는 심각하니 좋아해요. 진짜 최첨단을 걷지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 뜻대로 안 되지만 자꾸 우리를 이 세상에 살도록 우리를 보내신 이유는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기 위한 겁니다.
‘저 사람과 너와의 차이점을 네가 아느냐?’ 이것을 묻는 거에요. ‘저 사람은 못 됐고 나는 착합니다.’라고 하면 땡이지요. 틀렸지요. 둘다 못 되기는 마찬가지인데 나는 내가 못 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모른다는 그 차이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소경 되었고 어두움에 속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지금도 수시로 그 자리가 내 자리이고 그 어두움의 자리, 죄인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매일같이 구원하려면 매일같이 죄인의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돼요.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들으면 기절초풍할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네가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새 형상을 본받으라”고 쫙 도배를 해놓았어요. 예베소서 1,2장에 보면 너는 이렇게 이렇게 구원 받았다고 나오고 3장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어두움의 자식들을 본받지 말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모방한다고 바빠요. 그런데 그렇게 모방하느라고 바쁘면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게 자기의 과거 이야기가 되어야 돼요. ‘아!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지..’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미 그것이 거쳐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야 된다고요.
우리는 미래를 과거에다가 재구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알맹이는 구원 받아서 천사와 같은데 우리의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말씀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함으로 새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과 말을 맞추는 거에요.
‘그래 네 생각이 내 생각이다. 네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내가 했다.’ 이 말이 십자가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에 주름이 진 채 차곡차곡 접혀져 있어요. 이것을 펼쳐버리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주름진 종이가 있어요. 이미 이것은 완료가 된 겁니다. 이 완료가 된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게 되면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이것을 성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예수 안’으로 둘러쌓여 있어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 십자가 안, 또 다른 말로 언약 안, 또 다른 말로 피 안이라고 하는데 다 같은 말이에요. 이렇게 둘러쌓여 있으면 그 안에서 우리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구원 받지 못하고 주의 피, 언약으로 구원 받아야만 되는가?
다시 말해서 주님은 어떤 존재이기에 나하고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원해버리는가? ‘아, 내가 이런 과거, 이런 현재, 이런 미래를 내다봤구나’ 하는 것을 구원 받는 상태에서 쭉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 되었던 우리를 건져내고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하셨다는 설명이 쭉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에 제가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잖아요. 이 복음(사도)의 말을 믿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되어 있는데 믿고 지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고 지키게 된 자가 구원 받는다 이거에요.
저를 공격하려면 뒤의 말을 빼버리고 앞의 말을 면도칼로 오리면 돼요. 드디어 이근호 목사는 성경을 반대로 하더라.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했는데 지키는 자는 지옥 간다고 이야기하더라. 그 말만 오리면 돼요. 내가 방법까지 다 가르쳐 줘요.
뒤에 나오는 지키게 된 자,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자에요. 그게 사도 요한이고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누구한테 절합니까? 천사한테 절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럴 때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저한테 절하시면 안 됩니다. 마치 제가 뭘 한 것같이 대하시는데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주님이 이미 당신에게 이 일을 다 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요. 절한다는 말은 절하면 구원시켜 준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끝내셨군요.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일대금 다 끝나고 막대금 지불한 거에요. “아이고 공사하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절하는 거에요. 천사보고 하면 안 되고 주님보고 하라고 한 거에요.
천사는 일꾼입니다. “저보고 절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뜻이거든요. 주님이 왜 천사를 대동했겠습니까? 우리가 못하니까 대동한 거에요. 그리고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잠자고 있을 때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했지요.
잠자고 있는데 왜 시끄럽게 층간소음을 일으키면서 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옵니까? 내려온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창세기 32장 1절에 보니까 내려온 숫자가 얼마나 많았든지 마하나임이라고 했어요.
이 뜻은 하나님의 군대에요. 데스리에요.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천군천사에요. 마하나임이라고 하니까 청년회 단체 이름 같은데요. 야곱은 한 명인데 하나님의 천사들은 군대처럼 왜 그리 일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총무 계장부터 해가지고 인사 계장까지 왜 그리 많습니까.. 예수님은 한 분이지만 예수님의 일을 거들어야 될 천사들은 한둘이 아니에요. 왜 그리 많은 거에요.. 인간들이 못하니까 그래요. 인간들에게는 자기 구원을 해낼 재주가 없어요.
왜? 워낙 주인이니까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이건 완전히 요양사같아요. 손톱부터 발톱까지 전부 다 씻어줘야 돼요. 등허리를 씻어줘도 정신이 오락가락해가지고 몰라요. 옷을 벗기고 다 씻겨줘야 돼요.
“그리로 가시면 안 됩니다. 이리로 가야 되고 오,,,그리로 가면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로 가셔야 됩니다. 오...그렇게 구하면 안 돼요. 성령을 구해야 돼요.” “성경말씀대로 다해야 돼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하면 안 되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지요.” 말씀을 가지고 다 인도해줘야 돼요.
“술취하지 마시고 성령에 취하셔야 됩니다.” 하셔야 된다는 말은 하라는 말이 아니고 “절대로 못하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써비스해드리겠습니다.” 그런 뜻이라니까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주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용서하라는 말이잖아요.)”
이 말이 천사의 말이고 주의 말씀이라면 이미 주께서 그것을 다 이루었다 이 말입니다. 이루었는데 그 말을 집어넣은 이유는 ‘네 힘으로 되는가 한 번 해봐라. 안 되지? 그러니까 다 이룬거야.’
그게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늘 행해야 될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늘 믿어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에요. 이렇게 설명을 해줘도 우리는 알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기적입니다.
이렇게 해놓고 이제 바리새인을 한 번 봅시다.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 지금 성도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왜 주일(안식일)을 어깁니까?” 성도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성도는 주일을 어길 능력이 없어요. 성도한테는 율법을 어길 능력이 없다니까요. 율법을 지킬 능력도 없고요 위반할 능력도 없어요. 바보같아요. “뭐라는 거야?” 이것으로 끝나는 거에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에게 첫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요. 결혼하고 난 뒤에는 얼마나 깔끔떨고 세밀하고 꼼꼼한지 퇴근하면서 선반에다 손가락을 대서는 훑어가지고 “이거 뭐야? 너는 집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들어 가지고 왔는데 이 먼지는 뭐야?”
군대 인사계도 아니고 뭐에요. 또 국물을 한 번 떠 먹고는 “이것도 국이야?”라고 하는 이런 남편이 한 3년 살다가 남편이 바깥에 담배피러 나가다가 죽어버렸어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다른 남편이 왔는데 “니 맘대로 해.”라고 하네요.
그런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몰라요. 왜? 전에 법대로 했거든요. 전에는 그 남편(율법)한테 그렇게 시달리니까 새로운 남편이 와도 아내가 옛날 버릇이 남아가지고 그냥 벌벌벌벌 떨면서 법대로 하는 거에요.
먼지를 닦고 쓸고 닦은 데 또 보고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이래가지고 열심히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바로 멋대로 사는 거에요. 그걸 고칠 수가 없어요. 왜? 하던 행세이기 때문에 못 고쳐요.
80이 넘은 어머니가 60이 넘은 아들을 보고 “얘야, 밤길 조심해라.” 물론 눈이 어두워서 밤길을 조심하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어릴 때부터 계속 해왔던 것이라 이것을 못 고쳐요.
인간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아담은 변하지 않아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변해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구원 받아서 변했다는 소리도 하지 마세요. 구원이 되어도 안 변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나의 문제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달라지지 않는 죄 짓는 그 인간을 주께서 거저 구원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려면 자기로부터 손을 뗀 사람만 이것이 믿어집니다. 그런데 자기로부터 손을 떼려면 성령이 와가지고 나를 안 보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셔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꽥!입니다. 성질 같으면 오늘 강의 제목을 이것으로 하고 싶은데요.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십자가가 오게 되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십자가에 눌려가지고 꽥!이 돼요.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없어지면 불교가 돼요. 없어지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나를 눌러버려요. 그러면 나는 죄인이 되고 주님은 이런 죄인을 구원한 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없어져가지고 주님이 나를 구원했으니까 주님이 내 안에 있다라고 해버리면 그것을 관찰하는 내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관찰자로 따로 만든 셈이 되어서 내가 나의 잘남을 증거하는 꼴이 되어 버려요.
누가 누구를 증거하는지 지금 주객이 반대가 되어 버렸어요.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잘남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용당한 것밖에 안 돼요. “나도 신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중 거의 모두가 이런 식이에요.
보통 신자 같으면 “나는 신자입니다.”라는 소리를 안 하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지 “나도 신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볼 것 같으면 대부분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이에요. 자기를 꾸밀 줄은 아는데 자기로부터 탈피할 줄을 몰라요.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보냈다고 자기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를 보낸 거에요.
자기를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보내고 자기는 한국에서,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선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둘로 갈라져가지고요.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우리 둘을 쪼개버립니다. 그 유명한 말씀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너의 왼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너는 둘로 갈라졌잖아. 너를 속일 생각하지 마라. 네가 알고 내가 안다. 너는 둘로 갈라졌어. 너는 맨날 그런 식이다. 네가 하는 것을 네가 관찰하고 잘했다고 혼자서 즐거워하는 그게 너야. 그렇다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번 해봐라. 그런데 오른손이 한 것을 지금 왼손이 다 알고 있잖아. 모르게 한 번 해봐라.’
이것은 미치는 짓입니다. 그래서 왼팔을 잘라내면 오른쪽뇌가 알아요. 그러면 왼쪽뇌를 잘라내면 둘 다 몰라요. 죽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죽어야 돼요. 그래야 말씀이 이루어진 겁니다.
보통 신은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음이 신을 새로 만들어냈어요. 죽음 안에서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죽어버리면 신이 부활한 셈이 돼요. 그렇게 되면 신이 죽었다는 것이 무효가 되어 버립니다.
“죽었네. 나 죽은 줄로 알았는데 어어 살았네.” 그러면 죽은 것은 그냥 일시적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죽음이 신을 부활시켜 버리면 죽음은 취소가 된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죽음의 세계가 이루어지죠.
다시 말해서 우리와 상관이 없는 세계가 따로 마련이 되면서 그 세계가 천국이 되고 천국은 십자가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죽음은 우리 입장에서 살아나버리면 죽는다는 것은 일시적인 에피소드가 되어 버려요.
“아이고 나 깜짝 놀랐잖아.” 이런 식이 된다고요. 그렇게 되면 모든 설교가 “이제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가자.” 이렇게 되어 버린다니까요. “십자가로 구원 받았지요? 그러면 잊으세요. 이제는 우리 부활의 새생명을 마음껏 누립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지요.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런 것이 구약에 나오니까 말이에요. 그러면 안식일이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안식일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보는 거에요.
자,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지킨다는 것을 압니까? 본인도 몰라요. 사람이 어떤 법을 지키면 자기가 법을 지킨 것을 어떻게 압니까?
어떤 애가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했잖아요. 그러면 빨래 끝! 하듯이 숙제 끝! 하잖아요. 그러면 본인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사전에 이러했을 때 숙제 끝! 이라고 본인이 먼저 법을 만들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만들었지만 만들어준 주님은 만들어가지고 가지고 가버리고 인간이 그것을 모방해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안식법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그걸 지켰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만든 법을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그저 막 사는 거에요? 그것은 막 사는 거지요. 왜? 막 살아도 모든 막 산 게 자기한테는 자기가 만든 법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킨 것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가 신인 양 여기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 말은 이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식으로 지켜야 된다고 요구하는데 이것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 본인들도 못 지켜요.
바리새인도 본인이 생각하는 그것만 지켜요. 나는 타인이 아니고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남의 생각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권력에 복종하라는 것만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의 유대교이고 오늘날 교회입니다. “목사의 말은 무조건 들으세요. 이것이 법입니다.” 이것이 갑질하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밑에 교인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 예.”가 안 나오지요.
그러면 장로가 어떻게 나옵니까? “목사야, 이 장로가 지킨 것이 법이야.” 그대로 흉내 냅니다. 그러면 집사는 “장로, 목사야 까불지 마. 내가 지킨 게 법이야.”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처음 나온 청년들은 ‘내가 하는 행동이 법이야.’ 이렇게 나오지요.
교회 참 좋다. 전부 다 자기가 법이 되었어요. 내 법을 지키라고 하면 상대방은 “당신의 법을 지켜줄 테니까 나한테 뭘 해줄래?” 이렇게 나오지요. 뭘 해줄래라고 할 것도 없어요. 돈을 달라고 하든지 취직시켜 달라고 하겠지요.
“내 밑에 복종하게 되면 나는 내 권력으로 너를 보호해줄게.” 마지막에는 결국 보호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내가 지키는 법을 순종치 않으면 내 보호막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고 그러면 너는 이제 죽었어.”
그래서 이 소경을 보고 “너 나한테 맞아 죽을래 아니면 너 나한테 굴복할래?”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소경이 하는 말이 “소경이 된 게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다.”라고 그들에게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24절을 봅시다.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리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26절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30절에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내가 눈을 뜨고 싶어서 뜬 게 아니고 어떤 분을 소개하고 있지요. 그게 바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통점이어야 한다고 이 요한복음 9장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보내심을 받았으면 자기를 증거하지 말고 어떤 분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주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이라는 이 말을 지금 요한복음 9장에서 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바리새인을 깔아놓지요, 그 소경 엄마가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주께서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과거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 우리가 영광을 못 돌리는 이유는 그 동안 권력 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저 사람한테 밉상 받으면 나는 돈 벌고 못 산다.’ 그게 아직도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싶지만 못하는 이유가 ‘그런 소리를 했다가 저 사람이 나를 밉게 보게 되면 나는 이 사회에서 완전히 짤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 같은 게 아직도 남아 있는 거에요.
결국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평소에 내가 주님을 훼방하고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이 취소가 되어서 구원이 안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럴 줄 아시고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거에요.
더 쉽게 말해서 “네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어떤 인간이 구원이 되는 줄을 네가 아느냐?” “모릅니다.” “그럼 알려줄게.” 그래서 한 평생을 살게 하는 거에요. 살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주님은 커녕 오늘은 또 무슨 일?.. 늘 벌벌 떨면서 살지요.
초보 운전자처럼 앞의 핸들에 붙어서 가듯이 우리는 인생을 50, 60을 살아도 벌벌벌 떨어요. 김중우 집사님은 별로 안 떠는 것 같습니다마는요. 당뇨에 걸리고 뭐에 걸리면 벌벌벌 떨어요. 이미 구원 받았고 오늘밤에 가도 낙원에 간다고 해도 ‘오늘이 걱정이다.’ 하면서 벌벌벌 떨지요. 혹시 부도가 날까 싶어서 벌벌벌 떨고요.
인기가 떨어질까봐 벌벌벌 떨고, 자식들이 날 무시할까봐 벌벌벌 떨고 운동 안 해서 살찌고 치매걸려서 요양병원에 갈까봐 벌벌벌 떨고, 취직 안 될까 싶어서 벌벌벌 떨고, 날 추울까 싶어서 벌벌벌 떨고,.. 아이구, 뭐 떠세요. 이미 구원 받았는데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내심을 받은 자 우리 힘으로 증거하지 못합니다. 성령 늘 보내셔서 우리의 원래 자리, 나밖에 모르는 그 자리를 경유하게 하셔서 죄인인데 은혜주신 그 은혜만 어느 자리에서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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