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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a-이 근호 목사
10장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절도, 강도, 아니하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세 가지가 다 부정적 용어입니다. 부정적 용어라는 말은 흔히 상식적으로 말해서 정답을 말하기 위해서 아닌 것을 옆에다가 배치를 하는 거에요.
“이것이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규명 되지 않아요. “무엇은 아닙니다.”라고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게 아니면 그럼 뭐야?’라는 의문을 유발시키지요. “저 사람은 목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목자가 아니고 도둑입니다.”라고 할 때 “예,”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럼 진짜 목자는 누구야?’라는 궁금증을 유발시키잖아요.
예수님의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을 나란히 대비를 시켜가지고 악(부정적인 것)을 먼저 언급해서 내가 저것을 나쁘다고 이야기하는데 너희가 동의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의할 수도 없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만약에 동의를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적이 되고 동의를 하려고 하면 뭐가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의 기준을 모르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정해놓은 기준을 흔쾌히 나의 기준으로 바로 수용하기가 곤란해요.
왜? 예수님이 어떤 기준에서 “저건 아니야.”라고 했는데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려면 어느 자리에 있어야 됩니까? 예수님이 보는 것처럼 볼 때에만 ‘아, 아니긴 역시 아니네.’가 성립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처럼 기준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아니라고 이야기해버리면 거기에 반발(반항)이 생겨버립니다.
이게 예수님이 노리는 거에요. 반발과 반항을 유도합니다. “이 사람은 절도요 강도요”라고 지적을 할 때에 예수님 편에 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예,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들여다보니까 강도고 절도로 안 보인다는 게 문제거든요. ‘저렇게 착한 사람을 도대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집어넣어서 저런 분도 절도고 저런 분도 강도인가.. 그럼 저 사람들을 빼버리면 진짜 목자는 누구지?’라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여러분한테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대조한다고 했잖아요. 사실은 이것이 정확하지 않아요. 대조하는 게 아니고 겹침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대로라고 하는 것은 영역이 따로 있어요. 선과 악의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그렇게 결정이 나요. 임금님이 왔을 때 오른쪽에는 양이고 왼쪽에는 염소지요.
완전히 심판이 결정이 난 입장에서는 공간(영역)이 따로 있는데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이것이 완전히 구분이 되는 게 아니고 위, 아래로 겹쳐 버려요. 겹치게 되면 인간의 이성에는 겹쳐 보이는 게 아니고 한 통속으로 보이게 되어 있어요. 왜? 인간에게는 역사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걸어가면 ‘저분은 하늘에서 사시던 계신 분인데 잠깐 땅에 왔다.’는 생각을 그 당시 사람들이 할 수가 없어요. ‘목수의 아들이네.’ 아버지도 목수고 예수님 본인도 목수였어요.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목수라는 대목도 나오고 본인이 목수라는 대목도 나와요. ‘저 사람의 친척들과 동생들을 알고 저 사람의 엄마도 아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같은 인간류에 그냥 한 사람일뿐이지요. 여기에 어떤 대조나 겹침이라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서는 파악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겹치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너희들은 땅에서 나서 땅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있는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다”라고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하늘에서 오신 분인 것을 파악해내야 하는 새로운 시선과 안목을 요구받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요구에 직면해서 그 요구를 들어주려면 본인도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의 동기동창생이 되어야 그게 가능해요. 땅에서 나온 사람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건덕지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낳았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러니까 서로 소통이 되고 이 땅에 오신 분인데 훌륭하신 스승이다.’ 열두 제자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두 제자가 결국은 예수님 곁을 다 도망치고 말았지요. 그냥 도망쳤습니까? 예수님을 반대하고 도망쳤지요. 결국 사람들(인간들)에게서는 겹침이 되지 못하고 우리 편은 이쪽이며 예수님은 홀로 저쪽 편에 있었지요. 겹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간을 차지한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베드로 혼자 있었던 공간이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의식해야 될 권력체가 있었습니까? 소녀가 “당신도 예수님과 함께 나사렛 사람이지?”라고 할 때 그 소녀의 말만 듣고 쫄았습니까, 아니면 뭔가를 의식했습니까? 예수님을 체포하는 권력에 대해서 이미 거기에 같이 소속되어 있음을 본인이 직감했지요?
본인이 그걸 인정했다는 말은 한 발자국도 그 권력체에서 자기가 못 벗어난 거에요. 그러면 베드로가 보여준 사고방식은 기존에 있던 사고방식이 그냥 스며든 거에요. 그냥 각인되고 흠뻑 젖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은 자기한테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새롭게 느껴지는 어떤 정보가 계속해서 자기한테 누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 누적된 정보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가게 할 거라고 (우격)다짐을 한 거에요.
심지어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점점 더 거리를 좁혔다고 자부했습니다. 마지막에도 호위무사노릇을 했지요. “주님이 다치도록 우리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디가드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지금 마귀의 권세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마귀는 너를 청구하고 있어.” 그래도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다른 제자들은 다 그럴지라도 제 목숨을 걸고 지킬 분이 누구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주 큰 소리를 치지요.
이것을 저는 이 예수님의 겹침이 공간(영역) 문제로 확대가 되는데 이것은 자리의 문제에요. 예수님이 있는 자리는 숨겨진 하나님(아버지)이 함께 있는 자리이고 인간이 있는 자리는 그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고 충돌되고 대립되는 주의 원수(사탄)가 지배하고 있는 그 자리에요. 그런데 제자들이나 그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본인의 의지와 본인의 이성과 본인의 감성으로 자기가 행동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모든 판단과 결정은 내가 내리지, 내 자리의 힘이 나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어떤 특정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내가 못 벗어난다, 나를 옭아매는 자리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지 못했고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신봉하는, 그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라고 한 거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알아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자리를 제시하는 것이 돼요.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와 전혀 성격이 다른 자리 위에 너희가 지금 놓여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예수님의 모든 멘트와 말씀이 다 쏟아지면서 가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이 자리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그러면 요한복음 10장을 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0장 초반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양, 목자의 개념은 전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양을 언급하고 목자를 언급할 때 비로소 새롭게 양과 목자의 개념이 나오는 거에요. 강도요 절도라는 말을 예수님이 언급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아무도 할 사람이 없는 거에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진짜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을 우리는 자꾸 빠뜨리고 있는데 이 성경에서 하는 모든 말씀은요 우리가 익히 아는 개념이 아니고 전혀 없는 거에요. 하나님은 없는 데에서 창조하신 분이에요. 예수님도 전혀 이런 개념이 없어요. 목자, 양이라는 단어는 있습니다. 그걸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사용하는 목자와 양이라는 개념을 예수님 쪽에서 사용하는 순간, 없는 양과 목자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들은 ‘아, 양, 목자 안다.’라고 하지 말고 ‘이런 양, 목자의 개념은 처음 듣는다.’라고 해야 돼요.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되지요.
예수님이 여기 계셔서 이런 양과 목자의 개념을 이야기한다면 제자들이나 그 당시의 바리새인을 보고 다시 이런 특이한 양과 특이한 목자의 개념을 발설하신 예수님한테 가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없는 거에요. 그들이 주장하는 메시야라는 것은 있지도 않는 메시야에요. 진짜 제 말을 이해하십니까 물을 수밖에 없네요.
그들이 아는 양, 목자, 메시야는 애초부터 없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한 사탄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소통을 통해서 만든 권력입니다. 이게 짐승의 나라거든요. 자기들끼이 어떤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데 주님도 똑같은 개념을 사용하면서 생소한 내용을 거기에다 채워서 이야기해버려요. 그것은 예수님만이 숨어있는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 내가 메시야인 줄 알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양, 목자, 메시야가 전부 다 가위표해야 될 허구, 헛방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헛방인 이유는 너희들은 나, 예수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을 들고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은 어디로 가야 돼요? 예수님이 그런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기에 이런 발언이 나오는가,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되지요. 그 자리를 찾아갔다가 와야 되는데 이게 바로 경유에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야, 말씀하셨구나. 지키자.’라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나올 수 없는 개념이 예수님에게서 처음으로 쏟아졌는데 그것이 내가 안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면, 나로 하여금 안다고 느끼게 만든 이 나의 토대, 나의 기본 바탕, 이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문제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를 해줘야 돼요.
특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아들이 아닙니다. 다윗이 죽고 난 뒤에 나온 아들이 다윗의 아들이에요.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나온 아들이 이삭이에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처음부터 이삭이 나올 때까지 계속 애기를 못 낳아요. 그러면 이삭이 나오고 난 뒤에 돌이켜보게 되면 사라는 여자지만 죽은 태를 갖고 있는 여자지요. 계속 태가 죽어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우리가 아는 상식이 그거에요. 애기를 못 낳으면 못 낳은 채로 있으면 돼요. 그런데 애기를 못 낳는 여자에게 이삭이 임신이 되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이 되는가 하면 정녕 이 사라가 애기를 못 낳는 여자냐, 아니면 애기를 낳을 수 있는데 그 동안 대기 상태에 있었는가를 봐야 돼요. 어느 쪽입니까? 애기를 의도적으로 못 낳게 함으로써 사라에게 태어난 아기는 기존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아기를 낳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할 사라가 되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것은 영으로 난 사람이 등장해야 소급해서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논리를 어렵지만 들어보면 쉬워요.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신 그분은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까 왜 그리 쉽습니까?”라고 하거든요. “다 알아듣겠습니다.” 몰라서 알아듣는지, 아니면 진짜 알아듣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혀 어려운 게 없다는 거에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말은 비비꼬아서 어렵게 한 것 같지만 딱 들어보게 되면 느낌에, ‘그렇지, 그거 당연하지.’라고 느껴지기를 제가 원하고 있어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주님께 들은 말을 어떤 새로운 정보로 여기고 현재 있는 나에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첨가하고 그것을 누적시켜서 이 나를, 정보가 이만큼 쌓인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시도한 그 자체가 전부 잘못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잘못된 거에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추가해서 아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몰라야 돼요.
예수님을 모를 뿐만 아니고 누구도 몰라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그 ‘나’ 있잖아요. 내가 생각한 이 ‘나’가 ‘나’가 아니라는 거에요. ‘나를 천국에 보내주세요.’할 때 그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나’를 천국에 보내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새롭게 발견해야 돼요.
‘아, 내가 구원 받는 경우는 없구나.’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나는 천국에 가는데,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나는 애초부터 있을 수도 없고 그런 나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하는 것은 누구의 속임수냐 말이지요. 누가 이렇게 있지도 않은 나를 천국에 간다고 교회에 다니라고 사기를 쳤어요? 마귀가 그렇게 했지요.
“네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요. 이건 사기거든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그런 나는 없어요. 주님에 의해서 믿음이 오게 되면 나라고 있던 나는 거짓으로 유발된 나라는 게 발각 돼요. 주체라는 것은 원래 없어요. 주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나 말고 남(어려운 말로 타자라고 합니다.), 타자 속이 갈라져서(분열되어서) 어떤 욕망이 그 속에서 나올 때 그 욕망을 바라보게 되면 그 욕망에 의해서 ‘나’가 새롭게 생기는 거에요.
내가 있고 남이 있어 버리면 이걸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이라고 합니다. 강박증 알지요? 지하철 손잡이 잡았으면 씻고 집에 들어와서 또 씻고 세균 조사하고 또 씻고..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거에요. ‘내가 깨끗해야 돼. 성화돼야 돼. 거룩해야 돼. 나는 갈수록 주의 형상을 본받아야 돼.’ 이게 히스테리 증상이에요.
나로 나 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는 누구에 의해서 내가 되어야 되는데 엄밀히 말해서 누구의 욕망에 의해서 내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의 소원으로 내가 될 때 그 나만 구원 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소원은 나한테 오는 게 아니고 어디를 경유하느냐 하면 모든 말씀에 “때가 되매”라고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 그대로 실시해서 그 결과로 새생명, 성도가 나온 겁니다. 그게 아버지와 주님의 욕망입니다. 그 욕망 속에서 발생된 것이 구원 받은 주체로 등장하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 받은 나는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되는 거에요. 만약에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 내가 억지로 예수라는 존재를 상상하고 십자가를 상상해서 믿어버리면 이것은 강박증입니다.
결혼 못한 사람을 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 40인데 결혼을 못한 사람이 자기의 성적 욕구가 있어가지고 쇼윈도우에 여자 스타킹만 있어도 거기에서 정욕을 느끼는 것 있잖아요. 그걸 어려운 용어로 페티시즘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데요. 어떤 사물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면 자기가 없어져요, 아니면 자기가 공고히 되고 강화됩니까? 딴딴해지겠지요.
그 페티시즘의 병적인 현상이 교회에 가면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상이 돼요. 나를 빛내고 나의 영광과 미래에 내가 천국에 가서 희희낙락거리는 그 나를 상상하면서 그 예수를 아주 야무지게 붙드는 거에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처럼 심지어 어떤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와도 내가 목숨을 바치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호위무사가 되어서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의 각오?) 라는 말을 하는 그 사람이 정신병자에요.
그럴수록 자기가 과거에 예수를 잘 믿었던 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 믿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축복을 안 주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주께서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에 내가 패배할 내가 아니지. 주여 어려움을 주실수록 나는 더욱 더 노력해서 배나 이 환난을 견디겠습니다.’ 이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다. 정신병자에요.
제가 오죽했으면 사우나 하는 것이 환난이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저 골프치면서 “나이스 샷!” 이게 환난이에요. 베란다에 홈드레스 입고 음악 들으면서 커피 마시는 게 환난이라나까요. 왜 자꾸 환난을 상상합니까? 초대교회처럼 사자에 물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 페트시즘이에요. 어디 어린이공원에 가서 한 번 물려볼래요.
맨날 주기철 목사, 또 아들 죽인 자를 양자 삼은 손양원 목사와 같은 사람들을 추구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 게 얼마나 큰 환난인 줄 알아요? 사우나에 가서 ‘어, 시원하다.’ 이것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성화인데요. 이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내가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가?’ 이런 갈등이 얼마나 힘들다고요. ‘내가 지금 꿇어앉아서 기도해야 되는데 왜 이리 편하지?’ 그걸 이겨 내야하시는 거에요. 그걸요.
사우나에 가나 사우나에서 나오나 이미 구원은 그 자리 때문에 확정된 거에요. ‘너에 대해서 생소하게 보느냐?’ 생소하게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할 때나 가능합니다. 전에 봤던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나를 다시 보세요. 그럼 내가 개판이 되든, 내가 엉망이 되든, 실수투성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다 이루심인 것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게 어떻게 믿어집니까? 개판인데.. 그러니까 주님의 믿음과 내가 근사한 '나‘가 되는 믿음 사이에는 천국과 지옥처럼 건널 수 없는 갭(gap)이 놓여 있는 거에요. 그 갭은 인간의 힘으로는 못 빠져나옵니다. 왜? 기존의 자기 자신의 것을 계속 고집하고 싶고 유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걸 후딱 건너갔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있다는 거에요.
성령이 오시니까 그때부터 남아있는 것은 주님이 부활한 입장에서 주님의 말씀인 요한복음 10장을 다시 보는 일이에요. 이것이 요한복음 2장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요한복음 2장을 한 번 봅시다. 2장 20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유대인들이 한 이 말이 맞다니까요. 유대인들의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벽돌 쌓고 기초 쌓고 설계도를 만들어서 몇 년 동안 지었다고요? 46년.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이 오히려 잘못된 거에요. “이 성전을 헐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벽돌 쌓고 해서 만든 이 성전과 똑같은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뉘앙스를 띠고 예수님께서 멘트를 날린 것에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46년 동안 지었는데 이건 요정 한 5000만 마리(천사)가 달라들지 않는 한 도저히 사흘 만에 지을 수 없겠는데..’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21~22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제대로 해석을 했지요? 이 해석이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미친 해석이에요. 말도 안 되는 해석이에요.
왜? 우리가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고 있는 이 인간의 자리에서 벽돌로 만든, 만지면 딱딱한 물체(실체)로 된 이 성전을 분명히 사흘 만에 지어야지, 물컹물컹한 예수님의 부활한 신체를 가지고 그걸 성전이라고 우기는 것은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의 일반적 언어개념에서 그것은 반칙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하시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것을 반칙으로 봤어요, 정답으로 봤습니까? 그걸 정답으로 본 거에요. 그 제자들이 그 말씀을 정답으로 여기는 것을 반박하려면 반박이 됩니까, 안 됩니까? 반박이 안 되겠지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은 자리가 달라서 그래요. 해석하는 자리가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성경말씀이 굉장히 쉽네요.”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것을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듣는다면 그분은 이미 성령을 받은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메시야는 없습니다. 양과 목자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왜? 예수님께서 새로운 목자로 등장하셔야 그 다음에 새로운 양이 발생되어요. 그렇게 될 때 “강도요 절도”라고 하신 주님의 멘트가 납득이 돼요.
‘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가 아니고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강도고 절도에요. 아무리 교인들을 위해서 희생해도 절도에요. 교인들을 위해서 자기 집 안을 내주고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다 바쳐도 강도에요.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 삼아서 아들로 키워도 그 사람이 도적이에요. 손목사, 도적목사에요.
평생을 인도에서 불우이웃을 돕는 테레사 수녀가 절도요 강도고 이렇단 말이에요. 주님은 말합니다. “문이 다르다” 주님이 보낸 메시야만 통과하는 문을 그 사람들은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하면 다 통과한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문을 언급하셨는데 문은 없어요. 예수님께서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 자신이 처음으로 통과에 성공한 최초의 문이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이것보다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대번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런 거에요. “목사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 이야기가 또 튀어나와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뭘요?” “내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럼 저는 또 말해드리지요. “그 내가 어떤 낸데요?” 어느 자리에서 나온 납니까? “우리 부모가 태어나게 한 납니다.” “이삭이 아니구만요. 약속에서 태어난 나라면 되는데 육으로 좇아난 나는 어떻게 해도 그 문에서 튕겨나오게 되어 있어요. 기존의 문을 원하지 주님이 열어놓는 문에 갈 수가 없어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것을 이미 시범조로 예수님께서 보여줬습니다. 십자가에서 육은 죽고 주께서 성령으로 살아났다는 것은 육에 속한 모든 자는 내가 이야기한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이미 확정지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라고 한다면 그 나의 정체를 밝혀야지요. 그건 아마 정신병자의 노릇을 되풀이하는 나일 가능성이 많아요.
정신병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가 욕을 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 정신병자이고 이단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왜곡되어 있고 틀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성경 말씀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것이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전도하시다가 안 들어준다고 삐지지 마세요. 지극히 당연한 것이죠. 알아듣는다고 할 때는 다시 한 번 그 사람에게 되물으세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하고 오히려 다그치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이야기하세요. 안 믿어지지요.” “믿어지는데요.” “아이,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히 이야기하라고요. 분명히 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된다고요.” 이렇게 두 번, 세 번 다짐에 다짐을 하세요. “이럴 수 없나이다”라고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한 사람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말고 분명히 수상해요. 이건 분명히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버리고 끝까지 홀로 가버립니다. 제자들은 자기가 양이라고 하니까 양인 줄 알고 다 따라와요. 그러나 다 돌아가 버려요. 결국 양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내 양을 치라”라고 하면서 목자의 입장에서 다시 찾아올 때 부활하신 목자가 있기에 이 목자의 음성(멘트)을 이제는 알아들어요.
그러면 같은 자리가 마련되어요. 같은 영역이 마련된 거에요. 이제는 양이나 목자는 전부 다 예수님 목자 안에서 목자가 발생된 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양의 특징은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없어요. 왜? 주님이 양을 인도하시기 때문이에요. 어떻게요? 그냥 말씀이 가게 되면 예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 그 사람을 휘잡아서 말씀대로 이끌어가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을 봅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내느니라”라고 했지요. 이러한 행위의 주체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이 말은 양이 알아서 온다는 겁니까, 목자가 인도하는 겁니까? 목자가 인도하지요. 그러면 목자의 할 일은 어디까지 이어져야 돼요? “나는 목자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책임져야 그게 목자다운 겁니다.
끝까지 책임지려면 양과 타협하거나 협상할 일이 없어요. “내가 너한테 성의를 보였으니까 네가 나한테 성의를 보여야지.” 이런 양과 목자의 관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이야기할게요. 15절에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지요. 그러면 그 목숨 안에서 없는 양이 새로 발생이 됩니다.
그런데 그 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무슨 내용으로 가득차 있느냐 하면은 “나는 너를 위해서 이미 죽음으로써 너희에게 속한 모든 문제가 해소되었고 해결되었다.”가 가득 들어있는 덩어리가 양이 되는 거에요. 그 내용이 가득 들어있는 양은 양이 양을 관리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숨(모든 말씀의 응답입니다.)에 의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위력이 계속 양 안에서 부지런히 폭발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양이 자기의 원대로 가고 싶어도 그 말씀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그 양은 그 말씀대로 이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이끌림을 받는 내용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 목자(주님)가 날 대신해서 죽었잖아.’ 주님이 양을 위해서 대신해서 죽었은즉 내가 따로이 양을 위해서 대신할 일이 남아있다, 남아있지 않다?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내가 따로 거룩할 일이 남아있지 않고 내가 따로 기도할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저하고 같이 오면서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기도를 왜 본인이 해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기도는 누가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기도 끝에 붙는 것이 있어요. 뭐가 붙지요? 이거 어려운 문제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이런 기도가 터져나왔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기도케 하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구태여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케 하는 것도 대신 죽으심이라는 말씀의 완성 안에 들어있는 기도이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그 기도가 기도로 끝나는 게 아니고 양(내) 안에 스며들어요. 그러면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도의 해답(응답)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답이에요. 이 답은 또 새로운 질문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은 내가 하는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서 우리가 양답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 부딪히는 상황과 양다움을 통해서 목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유발시킨 질문을 또 내밀게 되는 거에요.
아까 식당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7살 먹은 어린애가 질문을 했어요. 교회에서 들었던 모양이에요. “야곱은 거짓말을 했는데 복을 받았고 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저주를 받았습니다. 엄마, 왜 그래요?” 그 이야기를 엄마가 해결하지 못해서 교회에 오래 다니는 권사님부터 시작해서 장로님까지 다 물었는데 아무도 답변을 못해요. 아무도 답변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건너와서 나한테까지 왔어요. 차를 타고 가면서 그 질문을 하거든요. 물론 그 교회의 전도사, 목사님에게까지 물어봤는데 답변을 못해요. 답변도 못하면서 해온 거에요. 그런데 그 아이에게서 그런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아이의 질문이 아닙니다. 아이의 입을 통해서 주님께서 소위 믿는다는 어른들을 또 다시 질문을 유발시키기 위한 질문으로 찾아온 거에요.
말만 믿어요? 답변도 못하면서.. 그래서 답변을 해줬지요. “그것은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마귀 때문에 자리가 바뀐 것이다. 원래 야곱이 장자이고 에서가 지옥에 가야 되는데 마귀가 와가지고 육에 속하므로 앞뒤가 바뀐 것을 도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느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자리를 찾겠다 데에는 거짓말이고 뭐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점잖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짓말이고 속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애들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말고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거야. 처음에 야곱이 장자였어. 그런데 마귀 때문에 두 번째에 태어난 거야.” 이렇게만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아까 우리 과장님이 질문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애가 “엄마 기도하는데 왜 응답이 안 돼요?”라고 물었대요. 제가 뭐라고 답했던가요? 그동안 다 잊어버렸지요. 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응답이 안 되느냐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다는 거에요. 있으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응답을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거죠. 엄마는 그때 그때 이야기하면 들어주는데 왜 하나님이 계시면 그때 그때 응답을 안 해주느냔 말이지요.
그것에 대해서 제가 답변을 했는데 그새 또 잊어버렸지요. 기도하지 않아도 그냥 공짜로 준 게 많잖아요.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의 기도로 공짜로 준 게 많은데 그걸 생각해야지, 자기가 고집해가지고 꼭 요걸 달라고 하는데 그건 해롭다고 안 준 거에요.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의 기도 덕분에 받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분들은 그 나이에 전부 머리가 다 허옇게 샜는데 시커멓게 염색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세요. 이것은 기도 제목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아쉬운 것만 골라뽑아서 예수의 이름으로 주 앞에 협상과 타협을 하잖아요. 그런데 평소에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에 대해서 “주여 내일 해뜨게 하옵소서.” 새벽기도 시간에 이런 기도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라고요? 세상에 자동적으로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가 뜨지요. 달과 해는 알고 있어요. 별들은 알고 있어요. 주의 인자하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요. 인간만 몰라요. 왜?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가지고 욕심이 고집이 되어가지고 모든 세상이 자기 중심이 되어야 만족하는 이 짐승과 같은 심정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성질이 어디 갑니까? 이제는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나를 구원해달라고 하지요. “네가 그런 기도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구원했어.” 이것이 우회로 치고 들어오는 주님의 사랑이라고요. 그러려면 바뀌어져야 돼요. 어떻게? 부정적으로요. “강도요, 절도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있는 반발과 반항을 끄집어내게 유도합니다.
“너도 뭐 잘한 것 없어. 너도 같은 인간이야.”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요? “그러면 예수님 저 구원 받았어요? 양이에요, 아니에요?” 꼭 이거 묻는 사람이 천 명도 넘어요. 선택론 이야기하면 꼭 나오는 말이 “저 창세 전에 선택되었어요, 안 되었어요?”라는 말이에요. 그게 도착증입니다. 강박증이고 정신병이에요.
그 이유는 자기가 자기를 가리고 있으니까 그런 거에요. 내가 해야 된다는 그런 나를 놓아버리세요. 그러면 주께서 이렇게 나를 만드시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일 겁니다. 지난 낮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에게는 없었던 과거가 새로 생긴다고 했지요. 없었던 과거가 새로 생깁니다.
지금 이, 내 과거는 옛날에 잘나갔던 과거였다면 십자가 안에 들어가니까 (내 과거가 부정당하니까) 내 과거는 감추어버린 주님의 희생해주신 그 희생으로부터 왔던 그 과거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이만큼 키워왔는데 그동안 내가 남한테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내가 노력한 것, 내가 원인이 되어서 잘 된 것, 그런 과거를 따로 사슬처럼 역사로 만들어서(그걸 연대기라고 하지요.) 그걸 채웠던 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걸 제가 비유하기를 콘크리트 공사를 해놨는데 밤중에 지나가면서 개발자국처럼 완전 엉망을 만들어놓았다고 했지요. 아침이 출근하다가 보니까 발자국이 눈에 띄어서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남겨놓은 거였어요. 돌아보면 주님의 희생을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어요. 평생 사는 동안 자기 잘난 척하느라고요.
하지만 그 엉망진창된 바닥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흔적으로 주께서는 고이고이 간직합니다.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할리우드에 가게 되면 스타들의 손바닥을 찍어놓은 게 있대요. 그것만 찍어놓은 게 아니고 우리도 같이 찍어놓은 거에요. 주님 안에 우리의 모든 행한 것도 다 찍혀져 있습니다. “이랬던 나를 대신해서 처리했고 이랬던 나를 대신해서 처리했다. 따라서 내가 대신해서 처리했기 때문에 따로 네가 나한테 은헤를 갚는다고 별난 짓하지 마라. 나의 대신함으로 메꿔줄 너의 대신함은 더 이상 내가 안 받는다.”
십일조를 하느냐 마는냐고 하는데 원래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율법에 있잖아요. 율법은 원래 없는 거에요. 최고의 율법의 완성은요 율법판을 깨는 것입니다. 깨질 판을 나타낸 거에요. 골로새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공중분해되어서 없어졌다 말이지요.(2장 14절) 없어지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율법을 내놓은 겁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보고 “빨리 너 반응해. 빨리 너 잘난 체 하란 말이야.” 일부러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에요.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입니다. 이게 만약 율법책이라면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란 듯이 “자, 너희 이것 때문에 저주 받았지? 내가 대신해서 (대신하신 것이 제일 중요해요. 대구신학교를 줄여서 대신이라고 합니다.) 이걸 보이는 데서 찢어버려요. 누구든지 날과 절기를 지키는 자는 내가 전한 복음을 헛되이 하는 짓이다.” 부활절, 맥추절 그런 것을 찢어버려요. “자, 찢었다. 없다.” 그러니까 그 뒤에 처음부터 있던 것이 나와요. 그게 사랑입니다.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주체적으로 율법을 지키면 내가 점점 지킨 자가 되지요. 율법을 찢으면서 뭐가 날아가 버려요? 내가 율법을 이만큼 지켰습니다. 하는 나도 같이 찢겨서 나가 버리고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숨겨진 양이 소급해서 과거에 창세 전부터 이미 준비된 사랑의 대상체로서 이 땅에 19○○년도에 태어난 거에요. 전부 다들요.
그것을 주님의 자기 자리에서 언급을 하니, 제자들이 알아먹을 턱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못 알아들어요. 이미 짐승의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못 알아듣지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들으라고 전한 게 아니고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들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뒤에 항상 후렴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지? 모르겠지? 못 알아듣겠지? 못 알아듣겠지?” 이렇게 후렴부분, 추임새가 항상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정답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었더랬습니다.”라고 과거로 이야기하세요.
“내가 똑똑해서 알아들은 것이 아니고 못 알아들은 자를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알아듣게 만들어내셨습니다. 매일같이.”라고 고백되기를 바라는데 이런 고백을 또 기계적으로 할까봐 걱정이에요.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요. 이런 고백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무 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항상 과거의 이야기를 하듯이 “옛날에 내가 이랬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가 아니라 “옛날에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목자입니다.”이런 소리도 하지 말고 “제가 절도요 강도입니다. 제가 문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면서 문에 들어가는 척했습니다. 양이 아니면서도 양인 척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바른 반응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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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절(가락-목자)160405b-이 근호 목사
아까 주체라는 것이 타자의 분열 속에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것의 뜻은 이렇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인간은 예수님 안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인간은 예수님의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보여집니다. 죄인으로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고 사흘 만에 아버지로부터 부활을 당할 때 그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이 그동안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한 인간입니다. 인간은 곧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면 보통 유아들의 성장 단계마다 심리가 달라요. 이것에 대해서 각 단계마다 유아의 정신 세계를 분석한 것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어머니와 육체는 분리되었지만 정신은 딱 달라붙어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욕망과 정신에 호응하듯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육체는 제 삼자가 보기에 떨어져 있지만 정신은 분화가 되지 못해요.
그것을 통해서 엄마가 주는 모든 욕망이 아이의 욕망으로 내부에 다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 아이는 자기 몸에 편하면 선이 되고 불편하면 앙앙 울어버려요. 그러면 엄마가 편하게 해주겠지요. 그러다가 12개월이 넘어서 15개월 정도가 되게 되면 이제부터는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제재를 하게 되지요. 만지지 말 것을 만지고 고추장 같은 것을 먹거나 하면 엄마가 “떼찌, 떼찌.”라고 하지요. 그렇게 하면 나쁜 아이가 되지요.
그런데 말로 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감각으로 때려야 돼요. 아프면 울면서 신체가 불편한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예를 들어 쓰다듬어 주어서 편하게 해주는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는 거에요. 인간의 정신이 상당히 쾌락적이에요. 그렇기에 온 몸이 편하면 축복이고 이빨이 아프면 저주 받은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규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서도 부모는 엄마의 욕망이 아이한테 있기 때문에 “너는 훌륭해. 너는 참 착해.”라는 긍정적 마인드를 계속해서 심어주게 되어 있어요. “착하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돼.(크면 스스로 되지요.) 착한 네가 왜 이런 것을 해? 착한 아이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나쁜 아이들만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지요. 거기에 엄마가 등장하면 나중에는 아버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아버지가 개입하면서 부모가 일종의 법의 체제로 어린 애를 둘러쌓아 버려요.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잔소리가 만들어낸 정신세계를 자신의 선악 체계로 그대로 인수를 하게 됩니다. 흔히 이야기하기를 “하여튼 못 배운 집안은 커서 알아.”라고 하잖아요. 식당에서 까불면 “아이고, 저 부모를 봐. 부모를 보면 아이를 안다고..”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아이와 어른 사이의 관계가 법적인 체계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이에게 양심이라는 게 구성되는데 그것은 그 법에 대해 저촉되지 않으려고 하게 되면 자기는 양심이 고운 것으로 생각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어릴 때 있던 육적인 쾌락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니면 억압되겠습니까? ‘나오지 마. 이건 나쁜 거야. 그건 안 돼.’ 라고 하면서 억누르겠지요. 그게 꿈에 나타나는 거에요. 그게 무의식이라는 거에요.
그래도 아이에게 목표는 있어요. ‘나는 우리 엄마로부터 착한 아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도 나는 착한 사람으로서 버텨야 된다.’ 이게 ‘자기 의’이지요. 심지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는, “목사님, 어떤 말씀을 지키면 지금보다 내가 더 착해져서 하나님께 ”너는 정말 착해.“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나오지요.
자기 자신의 긍정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는 하나님한테마저도 칭찬을 받음으로써 죽어서 영원히 하나님과 합세해서 천국에 가서도 자기가 잘난 존재로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을 교회에서 찾는 겁니다. 참 교회가 무서운 데에요. 모든 종교가 그래요. 교회가 개혁을 한다고요? 절이 개혁해봐야 절이 돼요. 절이 백날 개혁해봐야 절이라니까요.
절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그 잘난 나를 계속 잘나게 지켜주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는 곳이 바로 종교단체에요. 기독교고 절이고 천주교고 그런 거에요. 천주교 신자들이 차에다가 뭐라고 해놓았습니까? 내 탓이요.라고 해놓았는데 그것이 겸손이 아니에요. 내 탓이요.라고 겸손을 떪으로써 자기는 업그레이드 되는 겁니다.
“봐라, 남들은 남 탓이요.라고 하잖아.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내 탓이요.라고 해.”라는 거에요. 그런데 내 탓이요.라고 하는 순간 ‘돈 좀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억압되는 거에요. 그래서 꿈에서 부자가 되고 하지요. 계속 억누르는 거에요. 그래도 참다 못하면 그때는 (뇌물 받고 관악산에 올라가서 자살했지요.) 검찰청에 가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용산 재개발 같은 것은 비겁한 정치적 공작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매장할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자살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살했지요.
집에 쌀독에 쌀이 떨어져서 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니고 어릴 때 있던 부모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자기가 잃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유지하는 방책으로써 마포대교 같은 데에서 뛰어내리지요. 양화대교는 드라이브를 많이 다니고 마포대교에서 많이 죽는답니다. 모든 드라마가 착한 어른 되기, 착하게 되기를 다뤄요. 그게 유대교라는 종교가 된 거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은 바로 율법을 생활화(실천)하자입니다. 모토가 그거에요. 율법은 그냥 문자로 지키거나 형식으로 지키지 말고 그냥 생활화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법(탈무드)에는 이런 게 있어요. “남이 싫어하는 것을 네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자의 말에도 있어요. 도올 선생이 맨날 그것을 강조해요. 그게 바로 유대교에요.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를 믿는 것은 특이한 것이고 이상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옮기라고 해도 옮겼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요. 그것보다 더 센 기적이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거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산을 옮긴다는 것보다 더 센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진해서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자인하고 근원적으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능력입니다. (시편 51:17, 상한 심령) “모친에게서 (아예 죄 덩어리 속에서) 내가 나왔습니다. 나는 시커먼 잉크를 뒤집어쓰고 나왔습니다. 나는 시커먼 김밥입니다. 시커먼 죄로 둘둘 말아있습니다.” 다윗이 그 고백을 했지요.
따라서 다윗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방금 다윗이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했는데 성경대로 하게 되면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다.”가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한테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한테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오직 하나님 앞에만 죄를 지은 것이고 사람한테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면 인간들은 나한테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윗을 향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바탕이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이 죄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규정하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도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 선에서 처리가 된다면 인간들 주제에 까짓게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리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주님께서 용서했는데 네가 뭔데 십일조 안 했다고 죄 지었다고 하고 일 년이 되었는데도 왜 청결하게 안 하고 왜 전도를 안 하느냐 하는 식으로 시비를 걸어오느냐 이 말이지요. “이 말씀을 지키든지 안 지키든지 너나 잘하세요. 너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당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윗이 그렇게 고백한 것은 성령을 받아서 그런 거에요.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현재 육에게 성령이 왔다는 뜻이 아니고 창세 전부터 육이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계획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인 것 같은데 아니지요. 십자가마을에 가보면 어떤 전도사님(박정우)이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했어요. 그분이 말하기를 “율법으로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었고 우리는 다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게 문제라고 했지요.
율법은 해도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자는 것은 정신병자에요. 그게 아니고 율법을 지키도록 성령께서 하셨고 처음부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겠지.’라는 엉터리 같은 믿음도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를 믿은 것도 죄고 율법을 지킨 것도 죄인 거에요.
처음부터 죄인으로서 태어나야 한다는 근거는 나를 통해서 파악할 수가 없고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버림을 당하실 때 그 버림의 연장으로써 우리가 포함이 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버림에 우리를 포함시키지요.
그래서 항상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내가 여기에 있고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데 내가 율법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라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것도 안 될 뿐더러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하는데 백날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산이 끄떡도 안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없다는 말은 최소의 믿음도 없다는 말이 되니까 도저히 지킬 수가 없는 거에요.
‘아휴, 그래 어떤 수가 없나?’ ‘옳지, 예수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그래! 믿어주자.’ 이게 바로 침례교 신학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까지 하셨고 믿고 안 믿고는 우리한테 있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자신이 판단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자신이 판단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과 나 사이의 갭이 줄어듭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대신 죽으심은 그냥 대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양으로 이끌어가는 그 능력까지 계속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오신다고 했지요. 옛언약은 그냥 율법과 우리 사이에 마주치는 것이라면 그 마주치는 간격마저 극복하는 것이 새언약이에요. 율법으로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자가 아니라 아예 율법으로 안 되는 것을 십자가가 처음부터 덮쳐온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왜 몰랐느냐 하면은 율법을 지킨다고 정신이 팔려가지고 율법을 지킨다고 애쓰는 것이 주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성령이 뒤집어 씌운 십자가를 바라보니까 비로소 보인 거에요. 주님이 옆에 계셔가지고 십자가라는 우산을 펼쳤는데 우산을 펼친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왜 요새 비를 안 맞지? 내가 착해서 비가 안 오는 모양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착해서 비가 안 오는 게 아니고 큰 우산으로 가리워준 거에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안은 시간 개념이 없어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게 없어요. 창세 전부터 계속 우산을 들고 있었던 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서를 알고 있어요.
마태, 마가에서는 시간적으로 십자가 전과 후가 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서는 십자가 전과 후가 안과 밖으로 바뀌어요. ‘십자가 전이었는데 이제는 십자가 후가 되었구나. 십자가를 알았으니까 이제 바르게 살아야지.’ 이게 마태복음과 마각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생각이었다면 그걸 겹치게 만들어가지고 이제는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게 되면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십자가 밖에서는 어떠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바라보게 되지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는 활동들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만 눈에 보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 십자가 안에서도 현재 육신을 갖고 있는 내가 그들이 보여주는 활동과 똑같은 활동을 하고 있는 거에요. 대구 강의에서도 물었어요. 권사님들 앞에서요. 예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행위를 합니까, 안 합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랬더니 답변들을 안 해요. 지금처럼요. 십자가 안에서도 똑같이 해요.
십자가 안에 있어도 어릴 적 엄마로부터 배운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돼. 우리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하면 안 돼.” 이것이 계속해서 우리의 육신에 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은 모든 성경 말씀을 율법화시켜서 내 잘난 맛에 사는 내 기본적인 성깔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성경을 보게 돼요.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왜 예수님이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충분한 이유들이 돼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할 말이 없어요. 매일같이 나는 착하다,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티내는 식으로 보여주는 그것밖에 할 게 없어요. 치매에 걸려보세요. 그게 더 나오지요. 요새 우리 어머니는 아주 신이 났어요.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진주(목사님 딸) 언제 오냐?” “조금 있다가 올 겁니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가 왜 찾아왔던고~~.” 들었던 유행가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나는 진주에서 서울까지 천리라는 것을 이제 알았어요. 정확히 안 재 봤습니다마는.
자기의 과거, 역사, 연대기가 육이 있는 이상은 계속 뿜어져 나와요. 그래서 성경 가운데에서 자기가 잘난 체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지키지요. “온유하라”, “화평하라”를 자기의 주특기인 양 지켜요. 그런데 형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안 들은 척 귀를 막아 버려요.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고” 특히, “돈을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듣지도 않아요. ‘조금만 참으소서. 돈이 좀 생기고 난 뒤에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귀를 막아요.
지금 혼자서 정리하기 바빠요. 혼자서 비례대표 순서를 다 만들어요. 김종인 같아요. 자기가 셀프 공천 옮기느라 바빠요. 이거 한 뒤에 저거 하고 자기가 비례대표를 다 정해버렸어요. 이거는 남겨놓고 못 지키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놓고요. 야고보서는 어떻게 하려고요. “세상과 짝하는 여인은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은 들은 척도 않아요. 이게 동창회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세상과 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동창회에 가도 페라가모나 비비통을 못 들고 가는 거에요. 세상을 들고 왜 거기에 갑니까? 서문시장에 왜 그걸 들고 가는 거에요?
그건 아마 야고보가 가방이 좋은 줄을 몰라서 그래요. 남자라서 여자의 심정을 몰라서 그래요. “너희는 안개니라”라는 식으로 변명을 때우고 그러잖아요. ‘안개라면 왜 살지? 살려주기 는 왜 살려줘.’ 이런 식으로 반발과 반항이 막 나오는 거에요. 구원을 받았기에 그런 것이 계속 유발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아닌 척하지 말고 마음껏 토해내시고 막 사세요. 오늘 또 나오네요. (막국수 또 나오네요.) 막 사세요. 마음껏 속에 들은 것을 의도적으로 유발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만 지켰으면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걸 부수기 위해서 계속해서 말씀의 깊이를 더해버립니다. “화를 내되 해가 지거든 화를 내지 마라” 그러니까 노을을 바라보면서 해가 질 때를 기다리면서 그때까지만 화를 내고 그 다음부터는 “너, 내일 한 번 더 보자.”라고 하면서 화를 안 내고.. 지금 이렇게 지키거든요.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은 십자가에서 발견된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대표해서 우리가 몰랐던 진짜 인간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숨어있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기, 거룩하기는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참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라고 나오지요. 그 말씀이 옛날 육신을 만나면 또 다시 선한 백성이 되고자 인위적으로 폼을 내게 되어 있어요. “이케요? 요케요?” 나름대로의 선을 만들어내요.
“남편을 공경하라”고 하면 잔소리 두 번 할 것을 한 번으로 줄이지요. 제가 어느 방송에 보니까 남편이 체육교사를 하다가 암에 걸렸어요. 아내가 있는데 (거짓말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해서 이야기하는데 여러분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이야기합니다.) 밑반찬을 천 가지를 만들었어요. 성화론 아니에요? 세상에 도대체 밑반찬을 병에다가 천 가지나 만들었어요. 몸에 좋은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남편을 건강하게 만들었어요. 명령이 아니에요. 천 가지를 만들었어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못 살겠다. 어디 괜찮은 남자 없나?’ 이게 아니고 “당신을 위해서 내 맘을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은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그 여인의 진짜 원형을 예수님께서 보여줬어요. “네가 만든 천 가지 밑반찬이 바로 하나님이 시키신 너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죄덩어리다.” 밑반찬을 250가지 하는 사람은 천 가지를 만드는 이 사람 앞에서 기가 죽습니다. ‘4:1이니까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어.’ 여러분 아직 멀었다는 것 자체가 악마적 발상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멀지 않았습니다. 죄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없앴기 때문에 남아있는 미진한 의는 없어요. 절대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반성하지 마세요.
이것이 마귀적 발상이에요. ‘실수한 것에 대해서 반성하지 말라고 했는데 반성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돼?’라고 하지 마세요. 제 말은 반성한다는 뜻이에요. 제 말을 좀 제대로 알아들으세요. 실수를 반성하지 말라는 것은 틈만 나면 반성해서 반성하게 된 그 결과로서 내가 얻고자 하는 희망을 이번 주 내에 주께서 기적적으로 내놓아 달라는 반대급부와 보상책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어 있는 게 인간이지요. ‘이만큼 반성하는데 그냥 섭섭하게 계시지 않겠지.’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인간의 원형은 어디에서 온다고요? 십자가다. 다시 14절을 봅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이제 여러분들이 알아듣겠지요. 양은 없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목자가 양의 원형을 품고 있지요. 선한 목자가 양을 아는데 어떻게 해야 선한 목자가 생산되는 겁니까? 그 뒤에 나오지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 순간부터 드디어 진짜 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에요. 목자의 입장에서 끝까지 책임을 지는 양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양은 없습니다. 왜냐? 아무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양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모두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왜? 어떤 목사도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합시다. 어떤 목사도 본인이 인간의 원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인간도 모델이 아니에요.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만 모델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만이 사람이에요. 진정한 사람은 인자에요. 인자는 구약에서 언약과 관련이 되어 있는 분을 말합니다.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많이 한다고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양과 목자, 메시야, 인간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자리)이 수상해요. 인간들끼리 알아듣는 용어를 사용한 겁니다. 메시야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가 오기를 기대했지요. 그런데 막상 메시야가 왔을 때 인간들이 쓰는 용어를 쓰는 것 같았다고요. 그러면 알아들어야 되는데 소통이 안 돼요. 보니까 예수님은 다른 구역, 다른 영역, 다른 공간, 다른 자리를 가지고 이쪽에 말을 건네왔어요. 그러면서 “너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누가 진짜 목자입니까?”라는 물음이 유발되겠지요. “그러면 강도가 아닌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묻게 되겠지요. “그러면 누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게 되겠지요. 그러면서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결부되어 버리니까 결국 살아있는 목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어서 죽음 저쪽으로 건너가서 아버지로부터 다시 되살림을 받은 분만이 이쪽에서 다시 목자가 되고 그 목자 안에서 양이 되는 겁니다.
9절을 봅시다. “내가 문이니 (문제인인가?)” 예수님께서 자꾸 부정적으로 말을 해요. 나한테 오라.라고 하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딱 들었을 때 예수님을 빼놓고 나머지 전체를 다 비교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빼놓고 나머지가 가짜라면 예수님과 다른 것의 차이점을 발견하려고 시도하겠지요. 그런데 존재로서는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해요. 예수님도 남자고 다른 목자도 남자니까 안 되겠지요. 그것은 공통점이고 지금 차이점을 말하는 거에요.
차이점을 죽 이이기합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그 죽음을 통해서 다시 10절과 11절을 보게 되면 죽음이 양을 살리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살리는 방법은 삯군 목자로부터 영생을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삯군 목자도 영생을 주기 때문에 간단해요. 예수님을 빼놓고 모든 사람이 삯군 목자가 되어야 되겠지요.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 속한 목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삯군 목자와 대비해서 예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했기 때문에 그 대비관계를 그대로 우리한테 적용을 시켜요. 그러면 우리가 삯군 목자가 되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삯군 목자가 됩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육이 있는 한 뭐든지 삯군 목자일 수밖에 없어요. 팬 관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나한테 호응하느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까 집사님이 그러셨는데 “가락 교회에 이렇게 손님이 많아가지고...” 이게 내가 속한 중심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집사님은 복 받은 거에요. 내가 지금 칭찬하는 게 아닌데요. 그런 이야기가 스스럼 없이 나와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게 바로 여러분이 알아야 될 십자가 안에 있는 죄입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할 때 굉장히 쉬워요. 자기가 하는 목회를 다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 교회를 지어놓고 지금 빚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둘 거에요? 주님은 목숨을 바쳤는데 여러분들은 돈 몇 푼도 안 냅니까? 내세요.”라고 이야기를 다 하세요. “이 교회가 죽으면 옆에 있는 절이 더 커집니다. 이래가지고 하늘나라를 전파하겠습니까? 사탄을 이겨야지요.”라고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 끝에 뭐만 붙이면 돼요? “방금까지 40분 이야기한 게 바로 삯군 목자가 하는 짓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예수 믿으세요.” 이러면 간단하고 깔끔하게 문제가 끝나는 거에요.
그런데 끝의 말을 못 붙이는 거에요. 그리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이런 목사가 있어요. “여러분, 삯군 목자는 교회 키우고 기복 신앙을 가지고 목사가 퇴직금 챙기고 목사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대로 공동 목회하고 우리는 교인들을 섬깁시다. 그래서 ‘세상에 이런 교회가 다 있구나. 말씀이 진짜 현실화되었네.’라고 하게 만드는 교회를 합시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요.
이게 바로 도가 튼 삯군이에요. 교묘한 꼼수에다가 꼼수 곱하기 제곱을 한 거에요. “여러분들, 우리는 선교회비로 70% 내고 돈은 그냥 최소의 운영비로 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 쪽방에 있는 사람을 다 도와줍시다. 주께서는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의인이 없어서 멸망하는데 우리는 의인으로서 온통 우리는 그냥 선교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구제함으로써 바른 교회합시다. 그리고 모든 헌금은 투명하게 공개해가지고 회계한 것을 사회로 환원한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이것은 왕마귀입니다. 아까 왕만두 있지요. 완전히 왕마귀에요. 이거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더 미워요.
끝에 덧붙이기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팬관리해서 내 교회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내가 전형적인 삯군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도 그런 교회를 기대한다면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삯군입니다.”라고 해줘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끝까지 여러분들이 삯군이 되어주셔야 돼요. 왜냐하면 삯군은 선한 목자와 같이 겹쳐서 한꺼번에 우리에게 들이닥치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삯군) 영역을 버리고 선하다고 되는 게 아니고 같이 와요. “나는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렇게 전개해야지 주님의 이름으로 전개되지 주님 덕분에 저 잘났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소위, 개혁이고 사회환원 같은 속임수에 절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다 도둑놈이에요. 그런데 도둑놈인데 왜 그렇게 교인들이 많습니까? 전부 다 양이 아니거든요. 김양, 박양, 최양 있지만 전혀 양이 아닙니다. 그럼 양은 있습니까? 없어요. 어떻게 되느냐? 양은 그때그때 만들어요.
양은 창세 전에 예정된 대로 그때그때 양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양은 어떤 사람입니까?“나는 양이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이 양입니다. 끝까지 어릴 때 부모로부터 “너는 착해. 너는 하나님한테 칭찬 받아야 돼.”라고 하는 말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마귀가 심어놓은(세뇌시킨) 그 상이라는 것을 늙어죽을 때까지 이런 요소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음을 즐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돈밖에 모르고 주님보다 돈이 등장하는 게 더 기뻤고 나는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왠 떡이냐 할렐루야 감사하고 가게에 손님이 안 오면 ‘주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대놓고 주님 앞에 항의했는데 그러한 육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한 평생을 고쳐도 못 고칠 육의 성질을 마귀가 고치라고 해요. 성경 10장 읽고 기도 열심히 더 해서 고쳐라. 이것은 전부 마귀가 십자가를 가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성경을 그냥 보라는 거에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보라는 거지 이걸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이걸 기키는 것은 주님이 다 가져갔어요. 가져간 입장에서 그러한 멘트를 가지고 이것을 다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12절에 봅시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전에 볼 때는 자꾸 누구로 봤습니까? 이걸 한국 교회의 목사가 썩은 것으로 봤잖아요.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왜 죽이지?’라고 하면서 자기는 빼놓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보게 되면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서 그렇구나.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양이 없어서 그렇지 가락교회에 한 200명이 오게 되면은 갑자기 교주 등장하고요 난리납니다. 사람(팬) 관리한다고 바빠요.
영생은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죽으심에서 영생이 오는 방법을 사용하세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영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목사가 나는 아니요 나는 삯군이요라는 말을 해야 하느냐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미식축구 알지요? 한국에는 별로 인기가 없는데요 스크램블을 짜요. 그러면 상대방에서도 스크램블을 짜는 거에요. 공을 차서 상대방의 홀대를 넘어야 점수가 나거든요. 그런데 공을 누가 찰지 몰라요. 마치 자기가 차는 것처럼 하고는 슬쩍 비켜버려요. 그러면 그 덩치 큰 선수 뒤에 숨어있는 작은 선수가 공을 차버려요.
“나는 삯군이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비킬 때 주께서 영생의 공을 차게 하는 거에요. 엄마가 밤잠도 안 자고 열심히 잡채를 만들면 “우리 엄마 최고!”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라고 비켜야 돼요(비키세요). 그걸 또 만 번하게 되면 만 번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또 안 돼요. 항상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비켜야 돼요. 그래서 주께서 킥을 차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영생이 저쪽으로 날아가요.
그런데 내가 차버리면 내 팬이 되어버려요. 내가 관리해야 되고요. 내 팬이 되어버리면 그 사람이 나에게 해코지를 하고 나를 비난하게 되면 갑자기 화가 나요. 그러면 주님한테 화풀이를 합니다. 욥의 말처럼 “내 친구들이 왜 이렇게 나를 비난합니까?”라고 하지요.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들이었어요. 욥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요.
16절을 봅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17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절을 제가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8절이 어려워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어렵다고 해도 또 쉽게 해야지요. 예수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편하게 복습합시다. 예수님이라는 없는 목자가 등장했습니다. 양은 없어요. 목자가 양을 만듭니다. 어디서 만드는가 하면 예수님의 배를 째요. 그러면 이 분열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그 분열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 분열과 동반해서 여기 내부에 있는 새로운 양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약속한 거에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스스로 죽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죽는 데에 넘겨줬던 빌라도와 바리새인은 뭐냐 하면 이들은 배치된 거에요. 하나의 서양장기판에서 말을 배치할 때 말을 옮기고 기사는 이렇게 옮기고 배치해서 마치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뒤에서 배후를 조종하면서 몰아간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라고 합니다.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그런 다음에 이단과 악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는 겁니다. 지금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지만 이단과 악마는 설치잖아요. 이단과 악마가 오늘날 어떻게 합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같이 보내서 요리조리 우리를 다루게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예수, 예수!”라고 하지만 또 돈을 주면 입이 헤벌레 하고 벌어지지요.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백날 믿어도 우리는 돈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예수가 좋다고 하지만 자식의 성적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승진했다고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한 번 비교해보세요. 주님이 주시는 기쁨보다 남편이 승진하고 잘 되어서 평생 먹고 산다는 말이 더 기뻐요. 그 이유는 내가 어릴 때 “너는 착하기 때문에 복을 받아도 마땅해.”라는 말이 우리 속에 누적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은 남의 남편이 아니고 내 남편이에요. 내 남편이 승진된 것은 곧 내가 잘 된 거에요. 되게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런데 승진이 되고 난 후에 바람을 피웠다면 미치는 겁니다. 상무 되기 전에는 바람을 안 피웠는데 상무가 되고 난 뒤에 바람을 피운다면 여기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거에요. ‘이걸 공개해서 상무에서 짤리면 돈이 안 들어오고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이걸 하자니 저게 안 되고 저걸 하자니 지금 딸이 시집가야 되는데 이혼해버리면 딸 손 잡고 갈 사람이 없고 나의 어릴 적부터 쌓아놓은 좋은 이미지를 딸 결혼식까지 가지고 가야 되는데.. 그러면 딸이 결혼하고 이혼하려니까 막상 수입이 없어요. 그러면 한 번 질끈 눈 감아줘? 그냥 각서 받고?’
그런데 각서를 받아놓으니 그때부터 마음이 편하지를 않아요. 한 번 샌 바가지는 어디를 가도 또 새거든요. 감시체제에다 cctv까지 해야 되고 비밀번호 걸어야 되고 골치가 아파요. 또 바빠요. 하지만 상무라니까요. 이 흔한 이야기를 어떻게 한 방에 해소할까요? 강의를 지금 두 시간 다 했는데 막상 현실에 응용 문제에 들어가야 돼요. 즉각 해답이 안 나오지요. 현실 문제에 딱 들어가보니 예수 십자가 이야기할 때 두 시간은 좋았지요. 그런데 끝나고 나면 현실이 기다리고 있어요. 전혀 관계가 엮어지지 않아요.
성경 공부를 했으니까 남편이 승진되기를 기다렸는데 승진은 커녕 이상한 소리만 들리고 골치가 아픈 거에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남편을 창세 전에 나에게 예정하사 나에게 붙여주셨어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신병자의 사랑이고 예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어요. 어떤 경우, 남편이 내 말을 잘 들을 때라는 조건 하에 이런 좋은 조건을 주신 나의 이미지에 보탬이 될 그런 나를 유지해 줄 조건 하에서만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렵니다.라는 자기 계약, 자기 언약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십자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는 원형으로 이미 일치시킨 그 일치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죽고싶을 정도로 모든 기대가 일거에 다 날아가게 해버려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마포대교(추울 때는 너무 차가워서 안 돼요. 날씨 좋은 날 낮에 뜨거울 때 뛰어내려야 돼요.) 에 가든지 번개탄을 피우든지 막다른 골목에 가든지 약을 먹든지 엄마는 간다.라고 할 때까지 생각해봐야 돼요. 내가 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죽고자 할 때 그 생명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생명은 처음부터 생명이었습니까, 생명이 아니었습니까?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목숨이었어요. 죽은 목숨인데 오해했어요.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근근히 이 생명을 살려왔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진작에 마포대교에서 죽어야 될 사람인데 오늘도 또 마포대교에서 건져내시고 매일같이 건져내신 것이라는 거에요. 건져내실 때 조건은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고 애가 공부 잘하고 딸은 시집을 잘 가고 돈은 따박따박 통장에 들어오고 이게 마치 내가 잘해서 이만큼 누리는 양 여겼던 그 가짜 자아에게 주께서는 사랑의 힘으로 주사기를 놓는 거였어요.
내 심장만 달랑 끄집어내서 발가벗겨 놓은 게 사랑이에요. 그 사랑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옷을 다시 입히면 이 더러운 심장에 깨끗한 주님의 은혜가 입혀서 매일같이 그 심장이 뛰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몰랐던 주님의 사랑이에요. 죄인을 사랑하는 거에요. 목이 다 쉬려고 합니다. 죄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요. “나쁜 짓하지 않겠습니다.” 죄는 그게 아니고 자살해도 씻을 수 없는 그 죄를 주님이 홀로 아셔가지고 꾸준하게 은혜를 입혀온 거에요. 그런데 그걸 몰랐지요.
주께서는 사랑의 칼로 잠시 우리를 약간(?) 쑤셨는데 우리는 죽겠다고 한풀이를 해대는 거에요. 마포대교 어디에 있느냐고 진짜 가고 말이에요. 약간 쑤셨을 뿐인데 내 이미지를 손상당했다고 그것을 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놈아 과외했는데 영어 성적이 그게 뭐냐? 이러려면 나하고 같이 죽자.” 해가지고 플라시보 효과를 노리면서 “봐라, 엄마가 먹는다. 독약이다.”라고 하면서 사실은 영양제인데 먹는 척하지요. 겁을 주니까 “엄마 용서해주세요.” 하고 눈물을 흘리고 공부를 잘하게 하는 거에요. 이런 연출을 벌이고 하는 모든 것이 결국 어릴 때부터 ‘나는 괜찮은 존재여야 해.’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미지를 매일같이 가짜로 꾸며온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꾸미며 사는 사람에게 애 성적이 내려가고 남편이 말썽을 부리는 그런 장기알들을 배치를 해서 깜짝 놀라게 한 거에요. 사실은 칼이 약간 들어갔는데 철렁 내려앉았지요. ‘주여, 이럴 수 없습니다.’ 하고 본색이 드러난 거에요. 그 본색이 드러난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나의 원형입니다. 주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도 죽을 목숨을 매일같이 그 생명이 계속해서 주입되어서 이제는 내 생명이 아니고 주의 생명으로 대신해서 살려주는데 우리가 그걸 잊어버린다는 사실이에요. 자꾸 내 목숨이라고 하는데 사실 주의 목숨이니까 살 만큼만 사시면 되고 그것을 통해서 더욱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죽는다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천하에 귀한 게 내 목숨이고 남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된다는 그 고집스러움,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준 죄인인 나의 진모습인 것을 또 다시 깨닫게 해주시는 이 감사가 평생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