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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
16010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55절에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희와 같지 않기 때문에 진짜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런데 상대방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진짜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는 처음부터 거짓말이잖아 너는 처음부터 거짓말 이외에는 아는 게 없잖아 네가 말하는 것이 전부 다 거짓말이거든 따라서 너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진짜다 라는 뜻이거든요. 이 말의 뜻이.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는 이유는 간단한 겁니다. ‘오류가 있어야 진리가 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오류의 역할을 톡톡히 해야 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상대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유대인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이 처해있는 자리와 그 환경 전체가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라는 전제 하에만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가 있어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진짜”라는 말은 너희는 나와 다르도록 내가 창조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올 그 다음 질문은 간단하지요. “왜 같으면 안 됩니까?”입니다. 여기에서 창조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폐허”가 창조물입니까? “창조물”입니다. 완전히 황폐한 것도 창조물이거든요. 욥에 보면 황무지에 비가 오지요? 인간이 채소밭(텃밭)을 가꾸지 않았는데 비가 오잖아요. 낭비잖아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에는 낭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비를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욥은 ‘나 같은 인간에게는 고난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욥에게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욥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미처 모르는 더 많은 세계가 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 생각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이만큼 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나님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만큼밖에 모르는데 더 많은 것을 알거야.’ 하는 경우에 ‘내가 이만큼 아는 것’이 ‘오류다’, ‘오류가 아니다’가 판정이 나질 않습니다.
쉬운 예가 있어요. 초등학생들이 의견을 이야기할 때 자기 나름대로 아는 지식, 인터넷 본 것을 가지고 자기 자랑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것을 보며 “너는 근본 의도가 틀렸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학생이 아무리 풍성한 정보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을 다 모으더라도 근본적인 의도 자체가 다르다면 그것은 ‘오류’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고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 너희들이 나만큼 정보를 알게 되면 너희들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오류와 진실이 충돌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피조물 속에 오류지점이 있어야 돼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을 위해서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는 창조주를 위해서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면 창조주와 창조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집니까? 중세 철학이나 중세 신학에서는 ‘존재한다’로 이어진다고 본 거에요.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도 존재하고 인간도 존재하고 같이 존재하니까 존재는 존재로 이어진다고 본 거에요.
그걸 ‘존재의 비유’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걸 칼 바르트가 공격했지요. 그런데 칼 바르트가 공격하면서 잘못한 것이 있어요. 창조의 대비로서는 이해해서는 안 되고 진짜 진리는 신앙에 대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전제입니다. 그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하신다가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느냐가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 인간의 이야기는 내가 존재한다고 전제를 깔고 이야기가 나온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가 여기 있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이런 일을 실시할 거야 때문에 일을 벌리시는 거에요.
너희들은 오류가 있다는 말은 앞으로 너희가 오류 있는 인간으로 내가 완전히 밝혀내는 일을 지금 시작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아 포도주 맛있네. 그러면 포도주 마신 사람이 구원 받았어요?
아니지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왜 구원을 못 받았는가 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내가 여기 있음밖에 모르기 때문에 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와 같이 있는 것은 무조건 같이 아는 것으로 보이는 거에요.
물이 있네 포도주가 됐네 그 포도주 마시면 나는 더 오래 사는 식으로 있네 70이고 80이고 90이고 100세까지 나는 살 수 있네 이것이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 자체는 예수님이 더 계심이 위함이 아니고 행하기 위함이에요.
그 행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언약을 행하기 위해서 그 모든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달리 복음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함을 얻기 위해서 그 십자가는 누구하고 계약했는가 하면 바로 아버지하고 계약했지요.
여기 55절 한 번 봅시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일방적입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거든.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서 이사야 45장을 봅시다.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사야 45장 4절에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라고 하였지요. 15절에 봅시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창조 속에는 창조자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채로 창조 되었다는 것이 들어있는 거에요.
그러면 누구만 알아야 됩니까? 하나님하고 창조물 속에 계시는 그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그분만이 아버지를 알아요.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걸 다시 이야기하면 원래 창조(피조)된 모든 세계는 아버지를 몰아야 되고 몰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중간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스톱되어야 돼요. 더 나가면 안 돼요. 그러면 지나간 게 된다고요. 아버지가 여기 계시고 예수님이 그 다음에 계신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타넘고 가든지 건너뛰려고 해요.
예수님한테 스톱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건너뛰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그 사이에는 제사장으로 스톱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제사장이 죄를 가지고 단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가 십일조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 대제사장은 7월 10일날 홀로 지성소에 가서 방울을 달고 소에다가 염소의 피를 갖다 뿌리게 되면 다른 사람이 용서를 받아요. 이걸 가지고 대표자 또는 중보자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중보자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하니님 좋으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더불어 좋아지는 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그래서 하늘나라의 보좌가 이중으로 되어 있지요. 어린양의 보좌기 있고 아버지의 보좌가 있습니다.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왜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세상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부터 영원토록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복음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언급해버리면 내 존재와 하나님 존재를 연결시켜 버려요. 그런데 중간에 예수님이 들어가 버리면 이 존재는 십자가에서 끝이 나요. 십자가부터는 나락입니다.
단절되기 때문에 이 존재를 가지고는 예수님만 가려는 존재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거기까지만 와야 돼요. 거기까지만. 그리고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예수님만이 희생할 메카니즘이지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사도행전 4장 12절) 길이 어디입니까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구원되느냐를 물어야 됩니다. 구원 받고자 하는 내 이름이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방해가 돼요. 주여 언제쯤 내 이름이 탈락이 됩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죠. 언제쯤 내 이름에 희망이 없고 무의미하다는 조치를 내리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언제쯤 저를 아무 의미없는 무의미한 존재로 규정을 지어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참 고맙겠습니다.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에서 그렇게 하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한 것을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의미 없는 곳에서 의미가 나온다. 예수님은 이 의미 없는 곳,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미 있는 자들이 뒤에 오다가 다 되돌아가게 만들어 버려요.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헌금 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선교 했습니다. 내가 예배당 세워서 강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쥐고 있는 사람은 결국은 주님 가신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열두 제자 뒤로 돌아갓. 그 열두 제자가 전부 다 결국은 제자리로 가지요. 그래서 그 열두 제자가 살아온 것을 세 자로 ‘백일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훤한데 꿈을 꾸지요. ‘훤하게 보이는 것이 꿈인 줄을 몰랐어?’ 그런 뜻이지요.
인생의 모든 것, 종교라는 것, 교회다니는 것이 전부 다 백일몽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의미가 생산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창조물 속에 들어있는 오류의 퍼짐, 오류의 확대, 오류의 확산입니다. 오류의 재생산, 오류의 번식, 오류의 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기능으로 그래야만 하기에 외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라는 말씀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고 너희는 처음부터 그분을 몰라야 되는 존재로 내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면 나쁘고 알아야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가 그렇게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은 거에요. 선악과 나무의 법은 “따먹지 마라”입니다. ‘너는 악행을 행하면 안 되고 착한 일을 행해야 돼.’가 아니고 ‘아예 거기에 대해서 네가 몰라야 된다.’는 거지요.
그 선악과 과실을 아예 따먹지 말라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하지 마라가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인간에게 이미 주어졌어요. 이 말은 뭡니까? 네 자리가 따로 있고 네가 그 경계선을 넘어서서는 안 되게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르도록 한 것이 원래부터 피조물을 만들 때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게 보기에 심히 좋은 거에요. 무식한 것이 제일 좋다는 거에요. 유식은 아버지와 나한테 맡기고 피조물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시는 유식함의 효과와 그 혜택만 입으면 되는 겁니다.
“몰랐는데 공짜로 많이 받네요.” 이런 식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될 문제지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채로 오는 게 진짜 구원입니다. 왜? 그게 혜택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서 노동의 댓가로 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상치 못한 혜택으로 받는게 영생이고 구원이에요. 포도원 비유에서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일꾼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한 시간을 일해놓고 하루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은 누가 봐도 혜택이에요. 회사에 가서 6개월 일했는데 3년치 특근 수당을 받았다면 누가 봐도 혜택이에요. 그렇게 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요.
나쁜 짓만 했는데 천국 가는 티겟을 줬다면 이것은 혜택이잖아요. 그러면 그 혜택을 받은 것으로 우리가 이미 승인이 났지만 우리는 확인, 체험이 안 되잖아요. 그것을 확인, 체험하는 방법은 그 동안 나에게 의미가 있던 벽지를 뜯어내는 것밖에 없어요.
‘너는 존재지만 나는 행함이다. 너는 네가 존재함에 최종적으로 모든 의미를 두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그냥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가 된다.’ 실제(fact)가 돼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예를 들어보면 여기에 물컵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에요. 물컵에 물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컵이 있을 때에 주께서 물컵을 주신 메카니즘(과정)을 몰라요. 뭔가가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물컵을 아까 내가 들고 물을 따랐기 때문에 내 행동이 여기에 가미가 되어 있어요. 나의 존재 의미가 포함이 된 물컵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내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너는 네가 하는 짓거리와 네 생각이 모두가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라고 통보해(일러)줄 때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려야 되는 겁니다. “세상에 주님 아니면 원초적으로 이렇게 지적해줄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해야 되는데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고백이고 보통 사람들은 “죽여버릴래.”라고 나오지요.
서로 좋은 의견을 끄집에 내서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아예 초장에 말을 막고 “네가 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뭘 기대하든 그 기대에 반대로 나갈거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이 무슨 의논이 됩니까?
협상이 되어서 무슨 타협이 되고 좋은 관계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쪽에서 주님과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바로 진정한 창조의 중심에 십자가를 집어넣어야 됩니다.
의미 없는 창조 세계의 중심에다가 십자가를 일으키게 되면 그 십자가를 위해서 천지가 창조된 것이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 그 모든 말씀은 결국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유지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에 자료가 되고 근거가 되는 엮어진 거미줄 같은 말씀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의 계시가 되고 예언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한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거에요. 이것이 뭐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들리기를 원합니다. 제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걱정이나 염려나 두려움, 공포, 불안, 죽음에 대한 기죽음, 이러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오류요 죄가 되고 욕심이 되는 겁니다.
요번에 나온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책에 보면 앞에 머리말 글이 하나 나와 있을 거에요. 예수 믿는 것도 물론 죄고 회개하는 것도 죄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해서 그렇게 회개했더니만 그것도 죄에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행동하는 나와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와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일치되지 않아요. 합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이 옳다면 거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주님께서 구원될 자를 찾아가서 그 속에 자신의 십자가를 심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중심으로 보게 되고 그렇게 보다 보면 처음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관계로 그 십자가와 연결이 되겠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의 의미는 로마서에 보면 “죄를 사하기 위한 희생제물”이지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의 자체적인 존재의 의미는 날라가 버리고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돼요.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가 뭐냐하면 우리는 죄인이라는 의미지요.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내가 행동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나보다 먼저 선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행하는 창조의 중심인 십자가의 변두리에 있잖아요. 십자가에서 나온 그 관계가 도달되고 보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십자가가 오기 전에 먼저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언약을 먼저 줬잖아요. 그래서 모든 언약의 개념은 그 당시 사람들을 죄인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만 그러지 말고 실제로 있는 것을 제시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한다면 제가 준비를 하지 않아도 56절에 나와 있네요.
56절을 한 번 봅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아까 이론(방정식)을 거기에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나올 때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었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한 것은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그 언약은 결국 마지막에 성취와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거에요. 북한의 항만이라든지 울산의 현대중공업에 보면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전에 10년 전엔가 예로 든 적이 있어요.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것을 보면 도르레가 왔다갔다 하잖아요. 크레인을 하나만 그려보겠습니다. 이 밑에 무거운 쇳덩어리가 있으면 도르레에 붙은 자석을 가지고 이쪽으로 옮기고 저쪽으로 옮기고 하잖아요. 포항제철에 가면 있거든요.
그러면 크레인 시작인 창조부터 크레인의 마지막인 새언약까지를 언약이라고 하면 여기에 언약이 이동하잖아요. 그런데 언약 이동에 인간이 관여합니까 관여하지 않습니까? 언약의 이동은 인간이 관여를 못해요.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을 이루신 분이 아들이잖아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관여를 못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간단한 논리에요. 아까 얘기했듯이 아버지도 숨어계시고 아버지를 아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동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아브라함이 걸려든 거에요.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몰라도 괜찮아요. 왜? 본인이 생각하듯 자기 존재를 계속 끌고가면 안 됩니다. 자기 존재는 스톱이 되어야 돼요. 십자가에서 자기 존재는 끝나버렸어요.
아까 이론에 의하면 아브라함 속에 장차 올 주님의 새언약이 침투하잖아요. 또 다 잊어버렸습니까? 잊어버릴까봐 내가 걱정이 됩니다. 오류 속에 진리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진리가 들어오는데 그 진리가 십자가를 닮은 거에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정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자기 아들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제사를 드리지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자기 아들을 바친 것 같은 믿음이 아니면 그것은 은혜(아브라함)의 계열로 받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믿음의 계열이 아니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현상이 얼어나야 되는데 내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이 삽입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절대로 행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본인의 행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본인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을 가지고 그러면 본인의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라고 하면 안 돼요. 출발점이 본인에게서 나오면 안 돼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를 긍정하게 되어 있어요. 끝까지 그 존재를 포기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할 때에 존재 속에다가 창조의 중심을 집어넣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아들만 알지 피조물은 몰라야 돼요.
선악과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야 돼요. 예를 들어봅시다. 물이 있는데 “이 물을 목사님, 먹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 “예, 안 먹을게요.” 말이야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도대체 내 존재가 어떤 존재이기에 이 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왜 내 존재에 담을 수 없을까?’ 이게 굉장히 기분 나쁘게 된 거에요.
인간은 가시적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인데 내 속에 포함이 안 된 영역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성질이 날 이야기입니다. 개한테 뼈다귀를 아예 안 보여주고 “개야, 뼈다귀 먹지마라.”라고 하면 말을 잘 들어요. 뭐 보이는 게 있어야지요.
일단 보여주고 먹지말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보여주지 말든지.. 지금 사람들이 선악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뭡니까? 그렇게 따먹어서 위험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위험한 시한폭탄같은 위험요소를 에덴동산 같은 좋은 동산에다가 집어넣었느냐 말이죠.
차라리 그걸 뽑아내버리면 정말 좋을 건데.. 제가 하는 말은 그게 바로 오류고 그게 왜 오류냐 하면 그게 자기 존재 중심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 중심으로 다시 생각한 피조세계에요.
나를 편하게 하는 분이 좋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요건이 된다고 본 겁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듯이 하나님 좋고 나 좋고.. 사람들이 교회에 왜 갑니까? 자기 망치려고 교회에 가지를 않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단이다 이거에요. 망치려고 가야 돼요.
나는 오류다. 나는 뭐를 해도 잘못이다. 그것 때문에 가야 돼요. 그런데 자기 존재를 건전하게 유지하려고 간다면 그 사람은 지금 절에 간 것입니다. 가봤자 소용 없는 거에요. 교회에 가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아, 교회에 가는 것도 죄구나.’ 이것을 알게 되어야 돼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 그런데 아까 강의하기를 의미라는 것은 무의미(우리가 보기에, 의미 없는 곳)에서 나오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인간에게 전혀 보탬이 되지를 않습니다. 보탬이 안 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에요.
예수님이 괜히 휙 왔다가 휙 갔어요. “뭐가 온 거야? 뭐야 저거? 저 사람 뭐라고 그랬어? 웃기지도 않아. 죽여라.” 이야기가 이렇게 끝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한 때 과대망상증 환자도 아니고 뭔가 한 소리 하다가 대번에 잡혀서 사형당해가지고 가버렸어요. 끝났어요.
다시 예수를 거론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그 의미 없음을 더욱 더 짓밟기 위해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짓밟았고 본인이 하는 일은 옳고 정당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그 계통이 바로 베냐민 계통으로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배설물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자기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내가 뒤돌아보니 살아온 모든 것이 오류요 더러운 배설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 본인이 그 일을 할 때는 절대로 이것은 가장 옳은 일을 하고 있지요. 나쁜(bad) 일이 아니고 좋은(good)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해도 “너는 만났으니까 좋았겠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똑같이 흉내내면은 우리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나귀 타고 한 번 핍박해볼까요? 그러면 혹시 예수님이 또 나타날지.. 그렇게 모방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거에요.
왜 안 됩니까? 주께서 그렇게 묻지 말라는 거에요. “네가 꼭 구원 되어야 될 이유가 뭐지?” 너희들이 보기에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왔다면 이 말의 의미는 너희들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일한 의미는 주께서 우리를 하나둘씩 무의미한 존재로 쳐내는 거에요.
정글 같은 데 갈 때 길이 막혀 있으면 앞에 가는 사람이 잡초를 하나둘씩 쳐내잖아요. 주께서 우리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쳐내는 거에요. 의미 있는 것들을 말이죠. 애 넷 난 것도 의미 없다고 쳐내고 전부 다 쳐내는 거에요.
결국 마지막 남은 이것마저 쳐내지요. 그게 아브라함이라 이 말이죠. 아브라함의 마지막 사랑하는 자가 누굽니까? 자기 아내 아니었죠. 말년에 얻었던, 그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얻었던, 그것도 천사가 와서 예언했던 그 아들마저 무의미한 세계로 가야되는데 이것은 아들 문제입니까 자기의 문제입니까?
자기의 해석 문제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그냥 나라는 것으로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해석이 무한까지 미치는 거에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저 은하계 너머까지 생각할 정도로 나의 무한은 넓게 퍼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무한을 가지고 하나님도 포섭하고 천국도 그 안에다가 집어넣고 예수님도 그 안에 세워넣고 거기에다가 요한계시록까지 다 품고. 그 무한의 지평에.. 무한의 넓은 평지에다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담는 거에요.
그런데 그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나는 의미있다. 나는 의미 있는 존재다. 그게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한은 초월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무한은 초월을 못 따라갑니다. 사고(생각)실험을 해볼 수 있는데요.
여기 지평선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지평선을 바라보고 한 사람이 서 있다고 하면 지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지요. 그리고 지평선과 서 있는 사람의 거리가 5km인 지점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지점에 가보세요.
하늘이 어디 있습니까? 맞닿았습니까? 붕 떠가지고 있는데요. 아무리 무한을 많이 가져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세 인생이 뭡니까 100세 이상 살아도 지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상황입니까 이 상황이..
사람이 좋을 때는 과거 때문에 기뻐요. 과거에 ‘주여 꼭 이것만 이루어주옵소서.’ 하고 과거의 누적된 기대감, 소망, 희망.. 그것이 꽉 차있어 가지고 그것 때문에 마치 변비가 나아서 기쁜 것같이 기쁘지만 그 기쁜 순간은 며칠 가지 않습니다.
당연히 원래부터 이렇게 되어야 되는 걸로 생각되면서 그 기쁨은 날아가 버리고 새로운 희망이 또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희망 때문에 지금은 별로 시시해보이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 감격도 ‘원래 그래야 되는데 뭐.’ 하면서 마치 자기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너희는 알지 못한다”라고 할 때에 이게 우리의 실력이나 기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된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를 보고도 몰라요.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미도 없으면서 의미 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진짜 의미 있는 분이 내뱉는 의미가 뭘로 가려지냐 하면 무의미한 내가 자꾸 예수님을 평가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 버린 겁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합니까? 우리는 내 존재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 영역과 영향력을 넓혀가기 때문에.. 나는 누구하고 안다. 나는 누구하고 친구다. 자꾸 넓히려고 해요. 여러분 갓난애가 자살하는 것 봤습니까?
갓난애는 자살을 해요 안 해요? 이게 나야 라는 망상이 생길 때부터 자살이 이루어져요. 그걸 거울단계라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경직된 거에요. 고정된 것이고요.
남자분보다 여자분들이 아침에 더 많이 볼 텐데 거울을 보고 난 뒤에 거울에 본 내 모습 있지요? 그런데 출근한다고 나설 때 돌아서면 이미 거울의 모습하고 모습이 달라요. 왜냐하면 그 자기의 모습이 아까 5초 전에 봤던 모습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달라요.
인간은 늘 스스로 변화하거든요. 이것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달라져요. 그래서 연초가 되면 ‘내가 언제 이렇게 늙었지?’ 안 늙는 순간이 없이 째깍째깍 늘 달라지고 있는데 마치 처음에 괜찮게 본 그 이미지를 자기의 고정된 이미지로 확장하다 보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아닌 줄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더 나쁜 점은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지점에서 타인이나 친구나 친척들, 남편이나 아내를 평가했던 그 평가를 계속 쥐고 있는 거에요. 상대방이 늘 달라져도 “너 요즘 많이 변했대이?”라고 자기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해요.
속으로 ‘너는 안 변한 줄 아나?’라고 하지만 “너 왜 이리 변했어? 시집 올 때는 안 그랬는데 왜 그래? 하루 세 끼 밥 다해주더니 왜 요즘은 밥 하기 싫다고.. 변했나?” “너는 안 변했나? 네가 시집 와서 밥 맛있다고 그런 소리 안 했어? 이제 와서 바빠서 밥 안 해주는 것 가지고 밥 세 끼 안 차려준다고.. 너는 안 변했어?”
그런데 변한다는 말은 사실은 정답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변한다는 정답을 삼으려면 어떻게 변해가고 있으며 거기에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되는데 변하기만 하고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모른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맞네요. “너는 너를 모른다.” 주제 파악이라는 주제를 했잖아요. 주제 파악을 해야 되는지를 아는데 주제 파악이 영원히 안 돼요.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존재로 보지 않고 기능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고정된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내 존재는 십자가까지 와가지고 거기에서 죽어줘야 돼요.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는 언약의 완성이 마중을 나옵니다. 요나서 2장을 한 번 보고 첫째 시간을 마칩시다. 요나 1장 12절을 어제 수요일날 이야기했지요.
나를 던져서 나 하나 죽고 너희들이 살아라 그렇게 되면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요나가 죽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죽었고. 2장에 봅시다. 요나가 물속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물고기가 기다렸지요.
요나가 뛰어들기 전에 이것을 알아챘어요 못 알아챘어요? 미리 알고 걱정 안 하거나 하지 않았지요. 그러면 요나의 입장은 죽은 거지요. 그런데 요나의 입장은 죽었는데 살았다가 아니라 2장 2절에 보면 “스올의 뱃속”이지요.
이 말은 죽음 그 이후에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이지요. 이것은 배에 승선한 사람은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요나가 도망치면서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살려내는데 살려내시는 이유는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요나와 본인이 본인을 책임지는 요나가 달라요.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기 전에 내가 끼어들 필요가 뭐있어? 나는 놀러 가야지, 휴가나 갈란다 하고 다시스로 도망치는 그 요나는 요나 스스로의 존재 지평 안에 있는 본인이 중심이 되어 있는 요나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납치당해서 경험하고 싶지도 않은 죽음의 세계를 이 요나로 경험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마중나와서 그런 거에요. 본인이 나 음부 한 번 구경해보고 싶어. 라고 해서 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에요.
언약이 마중나온 세계는 나의 의미가 종식(단절)된 세계입니다. 손털어버려야 돼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세계에요. 요나는 물속에 들어가봤지만 우리는 성령 속에서 이것을 경험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주께서 언약의 칼질을 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미있는 것을 다 털어내는 그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의미. 오늘 좋은 옷 입었다. 가락 모임에서 누구 만나면 하얀 털옷 입었다고 자랑해야지 라고 하는데 낙지볶음이 묻어서 그 의미가 날아간 거죠.
하여튼 이상하게 내가 조금이라도 꿈꾼 것은 이상하게 다 실패로 끝나게 해주시는 이 고마우신 분, 하나님. 그렇다고 꿈이 안 생깁니까? 그래도 계속 튀어나오는 소망. 나오는 족족 야무지게 다 꺾어주시는 고마움. 하여튼 내 뜻대로 절대로 되지 않도록 꺾어주세요.
‘그럴 것 같으면 나 아무것도 안 할래.’ 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하게도 못 하게 또 꺾어주십니다. 아무것도 아 하려고 하면 또 하게 하시고 해볼까? 라고 하면 또 쉬라고 하십니다.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어요.
그럴 때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절로 실현되는 겁니다. 이걸 미리 알아버리면 내 존재가 해석해서 내 미래상을 내가 미리 꾸며내요. ‘내가 은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주께서 얼마나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할까?’라고 되어 버리는데요.
그래서 말씀대로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교회에다가 돈도 사랑하지 않고 재물을 바치면 주께서 얼마나 더 많은 돈으로 채워주실까 이것은 돈 놓고 돈 먹기지 이것은 진짜 꼼수거든요. 전부 다 꺾어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만드는 당사자가 보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56절에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보기를 원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세계, 예수님의 영역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죽어서 가보니까 자기가 간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왜? 자기는 피조물이라는 영역을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라는 영역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피조물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심(핵)으로 꽂혀있었던 겁니다. 그게 에덴 동산에서는 선악과 나무(과실)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아무 일이 없었으면 주님은 살아계시지 않는 거에요. 따먹어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때 진짜 에덴 동산에도 주님이 계셨음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아담은 추방되면서 십자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은 꼬꾸라져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던 나의 존재의 바탕에서 내가 무의미한 바탕으로 추방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반으로 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을 반석으로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일생을 헛살은 거에요. 마지막 심판 날에 껍데기를 벗길 때 인간은 심판의 형태로 허무하게 드러날 거에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자기의 바탕을 미리 당겨서 성령께서 십자가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와 관련이 있는 그런 피조물로서 이미 구원 받은 영역에 속했음을 통보해주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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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
160107b-이 근호 목사
아브라함에게 산다는 것과 우리에게 삶이 마찬가지인데요 산다는 것이 예외적인 거에요. 이게 이상한 거에요. 나타나있다는 것..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타난다면 무의미한 것이 정상이고 의미 있게 살아있는 것은 뭔가 예외적인 것, 특별한 혜택으로 이해를 해야 돼요.
‘뭐 살다 보면 죽겠지.’가 아니라 ‘그렇다면 처음부터 죽었어야 되는데 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지?’라는 의문이 나와야 돼요. ‘죽으면 안 돼.’ 이게 아니고 ‘왜 계속 살고 있는 거지? 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왜 내가 살아야 돼?’ 질문이 그렇게 돼야 돼요.
무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질문이 나와야지 ‘나는 의미 있다. 나는 살아야 돼. 내가 죽는다는 것은 어이 없어.(이것은 유아인이 한 이야기거든요.) 이건 안 돼. 반드시 살아야 돼.’ 이것은 뭔가 적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다른 쪽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생각이죠. 그래서 마귀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밥으로 생각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해서 종노릇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냥 ‘나 아니야.’ 하고 큰소리 치지 말고 우리 심성에 ‘이상하지 왜 자꾸 나는 살지? 또 살았네. 왜 자꾸 사는 거야?’ 오히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가가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어야 돼요.
사는 것이 비정상이고 죽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의미가 의미를 알려면 무의미로 가서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한테 무의미가 된 것은 인간들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피하기 위해서에요. 왜냐하면 의미가 있는 오류한테 잡힌 구원자는 100% 오류가 있는 구원자에요. 왜? 납득이 되니까요. 대표적인 것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 분이 우리를 구원해야지.’ 하고 붙든다면 그 붙드는 과정 속에서는 ‘나는 나빠.’가 근원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요. 나는 나쁘니까 잡는다(붙든다)는 말을 하겠지만 잡는 그 행위도 나쁜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쁜 중에 일부라는 생각을 해봐야 돼요.
그렇잖아요? 빨간 물감이 있다고 하면 그 물감을 찍어 가지고 왼쪽, 오른쪽, 중앙, 어디에 발라도 빨간색이 찍혀 나오잖아요. 찍힌 것이 오류라면 어디를 찍어도 이게 오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당시에 일하시는 모든 기능은 ‘너희들은 이런 정도에 갇혀 있다. 그래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다.’는 쪽으로 이야기하시고 인간들이 납득이 가고 인간들이 이해되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피해버립니다.
그 중에 하나 예가 58절입니다. 58절 한 번 봅시다. 57절의 유대인들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 번 비교해봅시다. 57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상당히 노안의 인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답니다. 실제 나이는 33살밖에 안 되었는데 “50도 못되었는데” 세상에 17살이나 늙게 봤으니까 도대체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50도 못되었는데”라고 했어요. 이것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50세, 어떤 사람은 40세, 어떤 사람은 60세, 또 어떤 사람은 70세로 할 일이 많아서 갈 수 없고요. 80세는 알아서 갈 나이고요. 90세는 자기가 알아서 좋은 날짜를 골라서 가겠다고 하고요.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에 50세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한 살부터 50살까지 살았다는 것이잖아요. 여기에 예수님이 중간에 계신니까 “오십도 못되었다”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45~47세 정도로 봤다 이거지요.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을 자기들 속에 예속했다, 또는 전체에 속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했다고 보지 않고 자진해서 포함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속한 것과 포함된 것의 차이를 보여주면 됩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눈에 보이는 것 전체를 다 잡아요. 그걸 영어로 all,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은하계, 은하계에서 더 넘어선 별, 거기다가 별이 하나 또 새로 발견하게 되면 (얼마전에 발견되었거든요.)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전부에다가 +1로 하나 더 보태면 되겠지요.
그것을 아까 제가 초월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갈 때까지 계속 가보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 구약 전도서에 보면 “사람이 책을 봐도 끝이 없다”고 했어요. 지식을 쌓아도 한이 없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헛되다는 이야기는 무한의 끝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초월세계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이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그 초월세계를 우리는 생각하기를 무한 저 너머에 초월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방금 이 그림에 의하면은 초월은 이미 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유한+α (무한), 인간에게 또 미지로 남아있는 그것까지 합해서 전체를 말합니다. 미지의 것이 아직 남아있고 앞으로 점점 과학이 발달할테니까 그걸 무한이라고 한다면 유한(자기가 지금 알고 있는 것)+무한(미지로 남아있는 것)을 전체(all)로 보는 거에요.
그런데 이 전체에 초월이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예속되는 것이 아니고 포함이 되어 버리지요. 인간이 생각하는 전체에, 전체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들어와 버렸으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이해합니까 못합니까?
예수님도 껴안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해서 한 말이 “나는 40이고 나는 60, 70인데 너는 아직 오십도 못되었다”라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님을 자기 전체의 일부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이 납득이 되지 않는 튀는 이야기를 한 거에요.
마치 교회에서 복음이야기를 하면 납득이 안 되듯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교회가 전체에요. 그런데 몇 주 전에 제가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교회를 부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다른 교회에 가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사를 받은 자는 교회를 부수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돈을 내서 건물을 짓고 당회장, 부목사를 세워서 조직을 만든 이 교회를 은사가 부수어 버립니다. 천주교는 성령(은사)이 부수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그런 사실도 몰랐네요. 내가 껴안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나가라.” 이렇게 되지요. 왜냐하면 이 전체라고 하는 것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전체입니까? 그 안에 본인이 있지요.
본인이 납득이 되고 본인이 중심이 되어 있는 전체, 또는 본인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전체, 그 전체와 어울리지 않고 섞이지 않고 튀는 이야기를 해버리면 본인의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추방시켜야 되겠지요.
그 사람을 아웃사이더라고 하잖아요. 추방시켜 버려요. 그래서 벌거벗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희생물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이것은 아간의 이야기입니다.- 자꾸 일이 안 되는 거에요.
조사를 해보니까 거기에 아간 같은 존재가 있었고 그래서 아간을 잡아죽였더니만 다시 일이 잘 풀렸다고 한다면 아간의 존재는 일종의 희생물이 되는 거에요. 그것이 속죄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마리의 새를 잡아가지고 그 문둥병의 죄를 새 한 마리에다가 다 집어넣어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죽은 새의 그 피를 한 마리 남은 새에다가 바르고 난 뒤에 새를 창공을 향하여 훨훨 날려버립니다.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깨끗함을 입은 상태를 두 마리의 새로서 표현한 거지요.
그런데 벌써 모세의 율법에 그런 것이 있으니까 후대의 사람들은 그 방식을 그대로 자기한테 적용을 시키겠지요. 그러면 자기의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 공동체의 의사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제물로 갖다 바칠 때에 우리 공동체가 다시 평화와 안녕을 회복하는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있잖아요. 요한복음 11장에 한 사람이 죽어서 다른 사람이 살겠다는 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잖아요.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전략이었던 겁니다.
인간이 끝까지 악마의 편에 서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되면 우리는 안전보장이 된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거에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소속된 입장입니까 아니면 낯선 분으로서 포함된 입장입니까? 포함된 입장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미리 당겨서 오신 거에요. 오늘날 성령이 올 때에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왜 믿으려고 하는데?”, “구원 받고자 합니다.”, “네가 누군데 구원을 받아? 네 주제를 알아? 네 주제도 모르고 왜 구원을 받아?”, “남들 보니까 예수 믿으면 죽어서 좋은 데 간다고 하는데 저도 죽어서 좋은 데에 가고 싶습니다.”, “그건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그러지요.”, “그러면 그 천국은 네 나라가 되네?”
그럴 때에 제가 늘 써먹는 예화가 있습니다. “천국에 너는 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딸이 만약에 지옥에 간다면 너는 천국에서 마음이 편하겠어 안 편하겠어?” “천국에서도 죽을 맛이지요.” 천국에서도 죽을 맛이면 그것이 천국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지옥이지요.
끼리끼리 좋아하는 사람은 같이 가야 돼요. 자기 혼자 가면 재미가 없어요. 맛있는 것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자기 혼자 맛있는 것을 먹어봐야 며칠 안 가서 맛이 없어요. 그럼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누가 결정한 거에요? 내가 결정한 거에요.
나와 함께 바라볼, 나와 함께 있을 사람을 원하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여러분들이 들어봤을 겁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같이 하지요. 그런데 같이 하는 조건이 있어요.
누구 마음에 들어야 돼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함께 있어야 돼요. 처음에 결혼할 때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했잖아요. 그런데 둘 다 착각하고 있었던 거에요. 서로 너는 내 마음에 들고 나는 내 마음에 들고.. 둘 다 주도권을 쥐고 결혼한 겁니다.
23일날 또 결혼식이 있어서 거기에서 주례해야 돼요. 벌써 다 준비해 놓았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를 망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어떤 경우도 내가 주인공 됨을 스스로 포기할 능력이 나한테는 없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만 잘 되면 좋은 세상이고 세상이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도 내 가치를 잃게 하면 나한테 나쁜 세상이 되는 겁니다. 북한에 살다가 남쪽에 왜 옵니까? 복음 때문에 오는 줄 알아요? 자기 좋으라고 탈북하잖아요.
가족을 놔두고 왔을 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북한에서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가 되고 그런 뜻으로 건너온 거에요. 말로는 그렇게 안 하지요. “내가 가서 다시 불러낼게.”라고 하는데 자기가 먼저 나왔다는 말은 ‘역시 나에게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어.’라는 뜻이 되지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같은 소속이 되었다는 그런 의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푹 잠겨 버려요. 포함이 되어 버린다고요.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 손에 돌아가시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까불다가 맞아죽었지.”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그 죽음마저 그들 전체에 소속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에게는 단절되어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부활은 그들의 소속이 안 되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자기 속에 소속이 되어 있어도 자기 손으로 죽인 사람이 부활되었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래요? 죽여서는 안 될 분은 내가 생각하는 전체가 합세해서 죽인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수님이 부활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이 퍼지는 것을 방지해야 돼요.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는 것, 그 이야기가 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지요.
그래서 본인이 나중에 예수님이 만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자기 중심의 전체가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전체가 될 때 나는 주님을 핍박하기 전, 창세 전부터 주님 앞에 소속된 사람,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데 누가 방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이 생각이 주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이유를 알게 된 거에요. 왜 살아야 됩니까? 주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은 거에요.
못된 짓을 하라고 태어난 거에요. 우리 집에도 그런 효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태어난 것은 엄마한테 불효하라고 태어난 거에요. 이 말은 불효자하고 있는 거에요. 효자하고 있는 거에요? 효자에요. 엄마와 아빠의 모든 수발을 다 들어서 “네가 왜 이 일을 하느냐?”하고 물으면 “이 일을 하라고 내가 자식된 거에요.”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나에게는 내 세계가 없고 아빠의 세계에 나는 예속되어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그러면 그 애가 기특한 거에요? 미친 거지요. 안 되지요.
조선 시대에 효자 랭킹 5위까지가 나왔습니다. 오늘 아침 방송에 보면 나오거든요. 어느 정도로 해야 2등이냐 하면은 엄마가 죽을 즈음이 되어서 힘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손가락을 깨무는 거에요. 고문서에 표기가 되어 있어요.
이 손가락을 깨물 때 나는 소리가 비단이 찢어질 때 나는 소리하고 똑같대요. 비단을 찢는 소리처럼 ‘찍’하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나는 그 피를 멀건 죽에다가 섞어가지고 먹여주니까 엄마가 기운을 차렸다는 거에요. 이것이 2등이었습니다.
1등은 16세 소녀가 아버지에게 밥 몇 끼를 더 대기 위해서 헐값에 자기 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심청이처럼 소원을 빌려는 것이 아니고 몇 끼를 더 먹여서 아버지의 목숨을 연명시키기 위해서 자기 몸을 요새 돈 한 10만원을 주고 팔아서 부자 양반집에 노비로 팔려갔답니다. 그것이 1등을 했습니다.
3등은 자기 엄마가 고기를 먹고 싶은데 고기를 구할 데가 없어서 자기 허벅지를 찢어서 그것을 끓여서 엄마한테 먹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잔혹사인지 도대체 엽기적입니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요번에 수련회 교재에 인간에게 혈연관계보다 더 끈질긴 것은 없다라고 썼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혈연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친 것을 보세요. 이것이 1등 했습니다. 이삭을 자랑하면 안 돼요. 아브라함을 자랑하려 하면 안 돼요. 왜 태어나는가? 아브라함 본인이 도대체 왜 태어나는가?
“왜 내가 아직도 살아야 됩니까? 아, 이 짓을 하라고 살아있어야 되는군요.”라고 해서 한 짓이 아들을 잡아죽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가 되는 것이 예수님만 살이있는 거에요. 예수님만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다 그냥 그대로는 무의미한 거에요.
다만 언약이라고 하는 그 골리앗 크레인, 언약의 이동을 따라서 그냥 이동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연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연적 존재가 있다고 하면 필연적 존재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필연적인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다”라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주의 계시에 의해서 지시를 받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연’이 있다고 하면 ‘필연’이 있다고 했는데 반드시 ‘우연’과 ‘필연’은 연결되어 있어요.
이 둘이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연’은 반드시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지.’라고 ‘필연’으로 자기를 오해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는 것은 우리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우연적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은 핵폭탄으로 날라가도 나는 마지막 살아남은 자로서 무조건 세상이 날라가는 최후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보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요. 최후의 1인자, 마지막 남는 자가 승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고 싶은 거에요.
상식에서 70세에 죽는 사람, 80세에 죽는 사람, 90세에 죽는 사람, 100세에 죽는 사람 중에 누가 최후의 남은 자입니까? 100세에 죽는 사람이죠. 그래서 ‘100세 인생’ 아닙니까? 마치 오래 살면 승자로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밖에 살지 않았어요.
구약의 사울왕, 다윗, 솔로몬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동일하게 40년 통치기간이에요. 솔로몬은 b.c.970~930년, 다윗은 b.c.1050~1010년, 사울은 b.c.1090~1050년 이렇게 그 통치기간이 40년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크레인으로 다룰 때 그 당시가 의미 있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가 40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왕으로 있으면서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에는 기고만장했다가 진짜 왕은 이게 아니구나를 안 것이죠.
여기서 우리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뜻은 내가 아는 나(나의 나)와 언약의 나가 불합치(일치 되지 않음)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나는 죽음으로 끝나지요.
이 죽음으로 언약(십자가)으로 마중을 나오지요. 이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한 죽음으로 엮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창세 전부터 택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증인이 되지요. 이렇게 엮어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실을 내가 불교신자라든지 안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미를 안 두고 꼭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만 의미를 두느냐?” 이렇게 얘기하겠지요. 안 믿는 사람이나 불교신자나.. 교회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네가 아는 전체에 네 손에 잡히지 않는 예외적인 것이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는 왜 몰랐느냐?” 교회에서 자꾸 죽고 난 뒤에 부활된다고 하는 거에요.
그들은 십자가를 후딱 지나서 어떻든지 간에 부활의 새생명을 자꾸 누리고 싶은 겁니다. 자꾸 죽으면 좋은 데에 간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에 가지 말고 지금 너희들 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작은 자(소자)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떻게 대우했는가를 따져야 돼요.
그들이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그 사람이 괴롭고 어려울 때에 (그를 위해) 힘들어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고 했거든요.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잖아요. 지금도 복음을 아는 사람과 함께 있어요.
그런데 함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그들은 자기 존재 위주로 그들을 시답지 않는 것(변두리)으로 지금도 핍박하고 있는 거에요. 아까 유목사님이 이야기하셨는데요.. 신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너는 아직도 십자가만 생각하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셨지요.
그럼 물어보세요. “너는 뭘 전하나?” 한 번 물어보지요. “너는 아직도 십자가만..” 그것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언제 모으나?” 그런 뜻이거든요. 그것이요. 그래서 언제 목회하겠느냐 그런 뜻이다 말이지요.
그 말은 내 존재의 의미를 위해서 예수도 있고 복음도 있고 성경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는 뜻이거든요. 나를 위해서 그런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뭡니까? 나는 없어도 돼요.
진작 죽어야 되는데 십자가 때문에 계속 끈질기게 아직도 눈 뜨고(점점 감기고 있습니다마는) 살아있다 그 말이죠. 제발 안 살고 싶은데 자꾸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내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세계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을 내가 내 것으로 만들어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님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우연적 존재에요.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존재에요. 그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당신은 아직 50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왜?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당시로부터 2000년 전 사람이고 너는 나이가 50도 안 되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를 보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신 말이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였습니다. 그냥 성질 같으면 죽여버리든지..(그들의 마음을 표현함) 우리 공동체가 알고 있는 그런 소통, 흔히 요새 인문학에서 하는 소토의 법칙을 네가 뭔데 깨느냐 이 말이지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한테 예속이 되어 있지 않거든.” 결국은 이 말이거든요. 주님은 참기름을 발라놓으셨어요.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 빠져나와요. 붙잡히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물병을 들었지만 59절에 그들은 돌을 들었지요.
그 성질, 그 기능, 그게 바로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 아비는 마귀다”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했으면 마귀의 모습을 드러내지, 꼭 내가 한소리 해야 마귀의 모습을 드러내냐.. 정리합시다.
적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쪽은 이미 마귀 쪽에 모든 것은 다 넘어갔아요.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날 아담과 하와, 남자와 여자와 뱀이 아주 밴드를 만든다고 했지요. 보컬그룹이라 이거에요. 하나의 밴드로 되어 있어요.
셋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선악과 자체에 대해서는 전부 다 모르고 다만 따먹을 만해서 따먹었다는 것에 대해서 전부 다 동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꼬시는데 내가 안 따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뱀이 꼬시는데 안 따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는 그런 뜻이거든요.
전부 다 자기 인생은 변명을 하든지 해서 내가 책임지겠다.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유지하겠다는 그러한 속셈을 드러낸 겁니다. 그게 바로 마귀에 속한 속성이에요. 나를 유지하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나온, 그들이 말한 천국은 자기가 배포나게 한 번 살아보겠다는 천국이기 때문에 100% 가짜입니다. 그 천국은 초월이 아니고 유한의 세계가 끝나면 드디어 시작되는 무한의 세계를 천국, 유토피아로 본 겁니다.
그들은 그 천국에 가도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아는 내가 유지되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그대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강의했듯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만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따라오는 모든 인간들도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거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의 소유가 되는 의(이것을 남한테 빼앗기면 안 돼요.), 수고하고 애써서 내가 만든 나의 의를 저축해야 돼요.
이것이 마귀가 지옥으로 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자기 의를 자기가 계속 채우는 거에요. 요걸 오늘날 교회가 너무 잘하고 있어요. 괜찮아..(박수) 너무 잘하고 있어요. 뭘 하게 되면 이런 혜택이 주어진다. 뭘 하면 착하다고 한다.
그 바닦에는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가 마귀의 숨소리처럼 늘 나오고 있어요. 어쨌든 살아야 돼. 무조건 살아야 돼. 사는 게 남는 거야. 인간은 부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왜? 마중나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미리 앞서서 마중나온 사람이 없으면 부활의 세계는 물건너 간 겁니다. 미리 마중나왔다는 말은 내가 중심이 아니고 나는 우연적 존재, 다시 말해서 곁가지에 불과한 거에요. 주님이 만든 중심에서 그냥 같이 돌고 있는 유성같은 존재인 거에요.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져도 그만인 것입니다.
유대인하고 예수님의 대화가 어긋나지요? 이 어긋난 대화 자체가 계시잖아요. 그렇다면 이 계시가 오늘날 우리 속에 똑같은 현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돼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주님의 응답이 늘 어긋나지요?
나에게 의미를 두고 하는 기도니까요. 그러면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기도를 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나에게 의미가 없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기도를 왜 하는데요?
급해서 기도를 하겠다는 말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뜻으로 기도를 하잖아요.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보고 죽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벌써 나한테 의미가 있잖아요. 기도를 안 하면 된다고 하는데 답답한데 기도를 안 하는 위인이 어디 있습니까? 답답하면 기도하게 되어 있는데요.
‘주여, 어찌 합니까?’ 하게 되어 있는데 왜 기도를 안 해요. 의도적으로는 안 하겠지만 푹 쑤시면 하게 되어 있는데요. “엄마야! 아이고 놀래라.” 하고 기도하게 된다니까요.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 자체가 그리스도의 세계이기 때문에 성도를 가지고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쳐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어지간한 것들은 안 걸린다고 하지만 금방 강도가 센 것이 올 거에요. 기다려 보세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이럴 수가 있는지..’
9장에 봅시다. 1절에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처음에는 눈을 떴다가 사고로 소경된 것이 보기에 흔하겠습니까 처음부터 눈이 감겼는데 눈을 뜨는 것이 흔하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어요? 멀쩡한데 교통사고 나가지고 음주운전하다가 눈이 감긴 것은 흔하지요. 개그맨인데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된 그런 것도 방송에 나왔잖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소경으로 확정이 되었는데 나중에 보이게 된 것은 ‘가역적’이에요. 가역적 현상입니다.
‘불가역적’이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아베 일본 수상 때문에 잘 배웠잖아요. 회담에서 한 번 결정난 것은 번복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모든 시간이 십자가로 도로 돌아간다면 이것은 ‘가역’이 되겠지요.
고무줄을 아무리 당겨봐야 손을 놓으면 ‘탱’하고 다시 원상복귀되잖아요. 낚시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그의 시간에 납작하게 같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거에요. 의미있음에서 의미있음은 다 탈취당하고 우리는 무의미하고 오직 예수님만 의미있는 곳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그리스도로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것을 체험하려고 하면 하수구에 가든지 팔당댐 물 뺄 때에 한 번 들어가보면 빨려들어가지요. 연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시간의 축소(단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7장에 나와요. 고린도전서 7장을 한 번 봅시다. 29~30절에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보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내하고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내가 있든 없든 탈탈 털어라. 모든 나에게 붙어있는 이 곁가지 같은 의미들은 털고 갑시다. 시간이 당겨버리면, 신앙의 원천지, 신앙의 시온으로 가버리면 그동안 이 땅에서 내가 내 소유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무의미한 데로 가버리는 거지요. 이것이 죽음입니다.
올해 오늘로 75세 생일을 맞은 분이 계시지요. 병실에서 생일을 맞이하신 분이 있는데 이건희씨입니다. 이건희가 갖고 있는 것은 달랑 하나였습니다. 병든 몸. 병든 몸밖에 없지요. 그것도 지금 누워있겠지요. 병든 몸밖에 없어요.
누가 되었든 다 그래요. 죽을 때는 다 그렇게 됩니다. “때가 단축(축소)되어진 고로” 주께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시간의 축소를 담아내시는 거에요. 이 의미는 재산을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고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탈탈 털리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강도인가 봐요. 있는 것 다 내놔봐. 우리가 빈손, 아무것도 없는 채로 왔으니 아무것도 없는 채로 돌아가라. 그러니 먹는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소경이 아니었는데 소경이 되는 것이 쉽습니까 소경이었는데 눈을 뜨는 것이 쉽습니까? 소경이 눈을 뜬 것이 희한하지요. 그런데 9장 마지막에 소경이 눈을 떴다는 거에요. 그냥 이 눈만 뜨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에 눈을 떴어요?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알아 맞추는, 당신이 누구인지 이제 알게 되는 눈을 뜬 거에요. 그게 최초의 지점(처음)이라는 거에요. 이 사람이 살다보니까 안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렇게 구원 받아야 될 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었어야 한다는 거에요.
참 잔인한 하나님이에요. 조금 멀쩡해서 천당 보내도 되는데 꼭 소경이 되어서 천당에 가니 말이에요.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으니까 눈을 뜨고 싶은 생각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가 눈을 뜬 예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포기했을 거에요.
그처럼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처음부터 이것을 예상하지 않았어야 되는 겁니다. 부모가 죄인이니까 우라는 마땅히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예수님 앞에 지옥가야 마땅하고 소경으로 살다가 소경으로 죽어야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우리가 눈을 떠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나한테 주어진 인생 역경이나 고생, 고난 같은 것은 고난도 아니에요. 눈 뜨는 것이 중요하지 나머지 것들은 시간이 단축하므로 내가 부자였다 거지였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이 탈탈 털려야 될 것들이고 일시적인 하나의 장식품밖에 안 되잖아요.
사소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여버림으로 탈탈 터시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나는 부자요, 어느 대학 나왔습니다.) 언약으로 마중나가서 딱 한 마디, 언약으로 이야기해요. ‘너는 죄인이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브랜드를 우리는 일찍 달아야 돼요. 롯데마트 같은 데에 가서 물건을 살 때 브랜드를 보잖아요. 우리도 선반 위에 ‘나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라는 브랜드를 달고 꿇어 앉아 있어야 돼요. 그러면 천사가 와가지고 ‘아이고 여기 있네.’하고 사주겠지요.
‘나는 부자입니다.’라고 이건희는 알아서 부자로 하고 ‘나는 전전 대통령입니다.’라고 하면 ‘대통령 많이 해라. 나중에 죽으면 대통령도 같이 다 날아가니까요.’ 없어질 것들을 우리가 영원한 것으로 오인하면 안 됩니다.
이 소경이 자기가 장님이니까 ‘나는 장님이다.’ 이것을 영원한 것으로 봤어요. 인간은 이상스럽게 일단 자기 것이 되면 이것을 전부 다 영원으로 봐버려요. 그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 인간은 유한이기 때문에 무한을 생각한다고 했고 이것이 인간의 상상력이 돼요.
유한이기 때문에 자꾸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거든요. 그 경계선 너머는 무한이지 초월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꾸 무한을 초월로 보는데 그것은 옆에 있는 유한으로 보이는 초월을 못 알아봐서 그래요.
식사할 때 감사기도 하잖아요. 물론 우리 십자가마을은 거의 안 합니다마는.. 그런데 왜 고맙습니까? 주님이 까마귀를 통해서 가져다 준 거거든요. 모든 손길이 주와 함께 있다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잖아요.
뭘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사는 삶이 신앙생활 아닙니까? 함께 사는 것. 신혼이 아니고 동거인가요? 신혼으로 시작했다가 동거로 끝나는 것이 참 아쉬운 거에요. 신혼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동거는 나 때문에 네가 있다는 것이에요.
나 때문에 네가 있다는 말은 나한테 필요가 없으면 네가 알아서 좀 나가줘. 이렇게 할 수도 있고 맘 같으면 바꾸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은근히 비추는 거지요. 우리가 요한복음 9장을 하면서 처음과 끝을 미리 봅시다. 미리 보지 않으면 뒤의 뜻을 몰라요.
정리합시다. 기적이란 시원, 원초로 다시 환원시키는 게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한테 감추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내가 중심이고 나로부터 새로운 무엇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전체로 간주하고 예수님까지 거기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고 하나님마저 거기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에요. 자, 9장 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아까 8장은 유대인하고 대화했지요. 그런데 지금 이 9장에서는 제자들하고 대화하지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대인하고 대화할 때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마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한테는 항상 여지를 남기지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자진해서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택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속에 예수님이 선택한 흔적과 징후를 거기에다가 심어버려요. 이 말은 내가 잘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삽입되어 있는 주님의 것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바로 그거에요.
이 인치심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할 때에 하기 때문에 미리 안 합니다.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은 우리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하고 대화하는 거에요. “오늘 잘 잤나?” “예, 잘 잤지요.”라고 하면 “너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하시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나다.”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하셨지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타인(남)이 없어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갑니다. 알파요 오메가라니까요.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의 뜻이에요.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주님의 모든 대화가 우리한테는 주님 자신에 대한 고백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대화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삼위 하나님의 자기 교제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초기 삼위일체 이론에 보면 나옵니다.
제자들이 이야기할 때는 유대인하고 달라요. 물어요.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혈연관계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여전히 제자들은 자기라는 혈연관계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 안 되는 제자들을 어떻게 하게 하셨는가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했건만 그것이
그냥 정보로만 날라오지 말고 현재 있는 것으로 늘 되새기며 체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