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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8장 44절 / 악마의 정체 / 15121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44절 / 악마의 정체 / 151217

정인순 2015. 12. 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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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

1512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44절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43절부터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그 다음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 대목부터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일단 마귀가 등장하면 우리는 뭘 보고 싶어하는가 하면 마귀에 속한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보고 싶어하죠. “대장 낯짝 한 번 보자.” “봐서 뭐 할 건데?” “보고 체포해버리려고.” 마귀의 대장의 목을 베기 위해서 마귀를 보고 싶어 하는데, 마귀는 얼굴이 없어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보고 싶어한다고 천사가 “여기 있지롱~” 하고 나타나는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천사나 이런 영적 존재는 우리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하고 거래나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천사 같은 경우에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요.

왜 우리 지시를 따르지 않느냐 하면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구원 당한다는 입장이라는 뜻은 구출이잖아요. 이 구출이라는 말은 우리가 놓여있는 이 바닥이 좋은 바닥이 아니고 나쁜 동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나쁜 동네에서 물들은 인간이 그 나쁜 동네의 버릇으로 자기 자신을 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나쁜 것에 속하지 않은 쪽에서 일방적으로 끄집어내는 방식이 되어야 그것이 의의 방식인데 나쁜 동네에 있으면서 본인이 나쁜 줄도 모르고 자기가 자기 식대로 자기가 구원하겠다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자기를 물에서 건져내겠다는 식의 모순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구원받은 성도는 ‘나는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구원자는 내 외부에 따로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힘을 뺍니다. 흥정이나 타협이나 협상을 안 해요.

 

구원 가지고 타협이나 협상을 하는 노래가 작년부터 유행해요. 이애란씨가 불렀던 노래인데 제목은 「백세인생」이에요. 그 내용은 ‘60세에 저 세상에서 나를 데리러 오거든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다오, 못 간다고 전해다오 하는 노래가 있어요.

‘70세에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도 할 일 많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 8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도 쓸만하다고 못 간다고 전해라 90세에 날 데리러 오거든 내가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이건 뭐..

 

‘백세에 저 세상에서 오라고 하거든 날짜는 내가 알아서 정할 테니..’ 내가 간다는 겁니다. 「백세 인생」이라고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히트했는데 지난 트로트 모임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는데 신인상 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50이 넘어갔대요.

이렇게 흥정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하는 식이지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마귀가 어떻게 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이것 하나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돼요.

 

“원인보다 더 큰 결과”,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인을 능가한다.”는 말은 원인을 5개를 집어넣었는데 결과가 7개 나왔다면 그때 2개는 원인에 포함되는 거에요 원인에서 포함이 안 된 겁니까? 원인에 포함이 안 된 거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5개를 집어넣었는데 결과가 7개 나왔다면 2개는 다른 데에서 왔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7개를 다 5개를 집어넣은 곳과 다른 곳에서 나왔다고 봐야 돼요.

 

이쪽 판과 저쪽 판이 다른데 마귀는 이 둘을 교묘하게 이걸 교체시켜서 섞어버린 거에요. 처음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할 때 선악과는 인간 소속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귀가 자꾸 “그것을 따먹으면 하나님의 것이라도 내 것이 된다.”고 부추긴 거에요.

선악과를 따먹는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선악과가 가지고 있다는 그 결과, 선악과가 품고 있다는 그 지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그 지혜가 내가 원인 제공자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결과가 나와 연결이 된다고 보는 거에요. 이게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받으시는 것이 되고 내가 헌금하면 주께서 그 헌금을 받으시고 내가 전도하면 주께서 받으시는 전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귀의 생각이에요.

이 역사가 오늘날 교회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에요.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대인들이 내내 생각했던 그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가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결판난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구원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 시작(시동, 가동)은 지상에 있는 나의 행위로부터 시작이 되고 결과는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엉뚱한 원인과 결과를 연결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들 유대인들 앞에 나타나는 이유는 본인이 원인이기 때문이에요.

유일한 원인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본인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라고 묻는데 그렇게 묻지 말고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해야 돼요.

 

마귀가 하는 일을 중심을 가려버리는 일입니다. 이 중심을 가려버리면 원인을 가린 것이 되지요. 그러면 원초적인 원인(주님)을 가려버리고 원인의 자리는 누가 독차지하겠어요? 원인을 따로 집어넣은 본인이 그 중아에 서있겠지요.

그래서 모든 세상만사를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소속되어 있기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세상은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짜여지고 원활하게 돌아가야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운 거에요.

 

남 좋은 일을 시키면 내가 기분이 나빠요. 그런데 남이 망하든 어쨌든 간에 내가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의외로 마귀가 그렇게 흉측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마귀의 모든 기능은 흉측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고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스럽고 왠지 다정해보이고 마치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줄곧 해왔던 그 생각을 우리한테 그대로 제공을 하기 때문에 마귀의 하는 일을 들어보면 마음이 편하고 정이 가요.

그것을 유대인들은 “화해, 화목”이라고 했고 이것을 우리 현대인으로 번역하면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의 90%가 전쟁역사였거든요.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평화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서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으로 자기들은 족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는 이 화해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평화를 목적으로 하고 또 하나의 화해는 주님의 화해로 불화를 통한 화해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것과 원수지간이 됨으로써 비로소 화해에 도달하는 방법을 씁니다. 기존의 나를 화해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만드는 모든 요소와 불화를 일으키고 다툼을 야기함으로써 비로소 그 결과로 생겨나는 화해를 주께서는 시도하지요.

 

떨어져 나가야 새로운 것과 비로소 붙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떨어져나갈 때 떨어지려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떨어질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했던 평화는 누구의 평화입니까?

안에 누가 있어요? 결국은 나의 평화거든요. 나의 평화, 그것을 내가 스스로 깨부순다는 것은 행동할 분명한 이유가 성립이 되지 않잖아요. 나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과 타협하고 협상을 했는데 그것을 스스로 깬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을 10장에서는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라고 했어요. 그 얘기는 다시 말해서 “너와 너 자신 사이에 다퉈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네가 너를 미워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미워하려면 나 말로 또 하나의 나, 나를 좋게 보지 않고 나쁘게 보는 새로운 내가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나 대신 나 같은 분이 등장해야 되지요.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우리는 아담에 속해 있잖아요. 그러면 아담을 질타하고 아담을 붕괴하는 아담은 어떤 아담입니까? 마지막을 장식할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과 나 사이에 좋은 관계가 아니고 불화해야 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없이는 하나님께는 화해가 없습니다. “십자가로 화해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십자가가 믿어지면 좋은 관계가 되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것과는 정반대지요. 심지어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 받고자 하는 나를 내치고 그것을 마귀적 생각이라고 질책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를 나의 구원의 용도로 쓰려고 끄집어 당기는 그 모든 행위가 결국은 주님 위주가 아니라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인 것을 질책 받고 그것을 지적당하게 하시는 사건이 일어나야지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구원에 대한 기대나 구원에 대한 희망 자체가 마귀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구원에 순서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구원의 순서가 있어요. 모든 인간을 다 버려놓습니다. 다 버림 받게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순서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부활의 순서가 나오는데 제일 먼저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일찍 돌아가신 모세나 엘리야 그렇지요. 이렇게 부활의 순서가 구원의 순서에요. 모든 인간을 다 버려버립니다. 예수님도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지요.

 

제일 첫 번째 순서로 사흘 만에 부활한 분이 예수님이에요. 성경에서는 그 예수님이 구원 받을 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지 않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만 달랑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예수님 외에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처음부터 죽은 자들에 속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은 자들에 속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손을 들어서 “저 먼저 구원해주세요.” “손 내려. 저 먼저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을 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권리가 있다고 여긴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어요.

하나님이 십계명 주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이유는 자기들이 그것을 지키면 복 받아서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 중심이라고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겠다는 그 생각이 마귀적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렇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악마적 방식에 대해서 주님의 대응방법은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세요. 5개를 집어넣고 5개를 예상했는데 7개가 나왔다면 5개는 내가 집어넣은 것이고 2개는 주님이 주신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7개 몽땅 주님이 주셨기에 5개를 원인으로 집어넣었다는 그 5개에 대한 고발조치로 7개의 결과가 생긴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5장 말씀대로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입니다. 평소에 조깅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했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조깅 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학생 때에 다들 컨닝해 봤지요? 컨닝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 보여줘서 하는 경우도 있고 합니다. 컨닝하는 것은 나쁜 짓이지요. 그런데 뒤돌아 보니까 조깅하는 것만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컨닝하는 것도 주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원인보다 많은 결과)”를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구약 사사기에 마노아 가정을 아십니까? 삼손의 아버지 가정이에요. 마노아 가정에 자식이 없었는데 어느 날 (자식을 간절히 원하는 것에 관계없이) 자식을 주겠다고 나타난 쪽은 마노아 쪽이 아니고, 천사가 나타나서 제단을 쌓으면서 자식이 있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자식이 있겠다는 결과는 마노아 가정이 그런 천사가 나타나라고 사전에 굿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나타나가지고 “자식을 낳는데 미안하지만 그 자식은 네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께 바쳐야 될 나실인으로 살아야 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조치를 한 거잖아요.

이것은 사무엘도 마찬가지지요. 아들이 없는 한나에게 아들을 줬는데 한나는 그 자식을 누구에게 도로 바칩니까? 하나님께 도로 바치잖아요. 이 예가 그거에요. 내가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사무엘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게 하신 거에요.

 

따라서 ‘내가 기도를 몇 시간 했던 간에 관계없이 “사무엘”이라는 모든 작품과 모든 공로는 내가 가져갈 게 전혀 없고 도로 주님께 바쳐야 될 “주님의 것”으로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학에 성도됨의 표징이 되는 거에요.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10%와 주님 90%가 아니고 100% 전부 다 처음부터 주님께서 계획하신 바 스케줄에 따라서 그때 그랬었어야 하는 거에요. 그때는 절에 갔어야 되고 성당에 갔어야 되고 여호와 증인에 갔어야 되고 신천지에 갔어야 되고 하는 겁니다.

 

그때 그것을 거쳤어야 된다는 것을 성도가 된 후에 한꺼번에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느긋한 마음으로 앞으로 내년 2016년도에 1월, 2월, 3월에 어떤 스케줄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미리 당겨서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요. 제가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요?’라고 했는데 염려를 해요 안 해요? 하잖아요. 이걸 이야기해야 돼요. 이제부터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 할 강의가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 아비는 마귀”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나는 마귀 안 섬길래. 마귀 오기만 해봐 마귀를 만나면 내가 목을 비틀거야. 나는 마귀가 싫어. 그러니까 나는 마귀 안 섬길거야. 나는 주님만 섬길게.’라고 하잖아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에요. 그래서 이 성경이 난해한 겁니다. 마귀가 나쁜 존래라고 하는 것은 다 알지요. 마귀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마귀를 상상해서 그래요.

 

나는 마귀를 싫어한다는 사고방식이 마귀를 나쁜 존재로 몰아세운 겁니다. 그게 마귀의 술책에 걸려든 거에요. 마치 보이스피싱에 걸려든 것처럼 말이에요. ‘나는 사기꾼은 싫어. 하지만 사기꾼을 잡는 경찰은 좋아.’라고 한 그 순간, 경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말려들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나는 마귀가 싫고 주님이 좋아.’라고 한 그 순간, 그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나타난 마귀에게 백발백중 걸리는 겁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마귀를 싫어하고 주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마귀의 꾀임에 빠진 것이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마귀와 주님을 내가 선택해서 그런 겁니다. 내가 누구를 선택할 때는 그냥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선택하겠습니까? 나의 구원에 유리하라고 주님을 선택하고 예수를 선택하지 마귀를 선택하지 않지요.

그게 주님이 알려주는 마귀 선택방법과 완전히 틀어지고 차이가 나는 거에요.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를 버려두고 주님부터 먼저 끄집어내어 구원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다음에 차례대로 뽑아내시잖아요.

 

제가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버렸다는 그 점에 우리 하나하나를 끼워넣기를 우리는 주저하든지 안 그러면 상당히 본능적으로 그것을 원치 않아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버렸다고 할 때에 우리 마음은 주(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심지어 자기 아들을 버리게 만들어놓고 끄집어내는 것을 관람하는, 다른 저쪽에 높은 산에서 그것을 쳐다보는 제 3의 장소를 우리는 정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내 자아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보고 옳은 쪽으로 진리를 내가 선택해야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보고 성경을 해석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평가하려고 덤벼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두 종류가 있잖아요. 구단에 속한 선수가 있는 반면에 FA(자유선수)가 있어요. 구단에 속한 사람은 선수를 저쪽에 넘기려면 본인은 빠져야 돼요. 왜냐하면 구단에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구단주가 주인이 되어가지고 저쪽 구단주하고 의견이 일치해야 돼요.

특히 메시같은 축구선수는 이적료를 선수가 받는 게 아닙니다. 그 선수를 상품으로 삼고 있는 구단끼리의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자유선수가 되면 어떻습니까? 빌라델피아에서 데려간다. 김현수를 얼마에 데려간다고 하는 것은 본인이 자유선수이기 때문에 자기는 제 3의 자리에 앉아가지고 “자, 고액을 제시하는 쪽으로 내가 갑니다.”라고 자기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미 우리의 구단주가 마귀에요. 그러면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는 어떤 생각과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마귀의 생각과 마귀의 선택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마귀의 하수인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무슨 수로 우리가 간파합니까? 어떤 수를 써야 간파해요? 철야를 할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면 간파할 수 있습니까? ‘참, 내가 마귀에 속했지..’ 이것을 어떻게 알아요?

 

인간은 자기 중심이고 자기는 천하에 천사인데 어떻게 자기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스스로 포함시킬 수가 있느냐 말이지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알려드릴까요? 약올려야 돼. 알려드릴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싫어지는 모양새로 다가오면 돼요. 그래야 내가 마귀에 속한 사람인 것이 판정이 납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것을 원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에 대해서 싫어버린 바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좋아했습니까? 좋아한 것처럼 보이는데 끝에 가니까 모닥불 쬐면서 베드로가 뭐라고 했어요? “저 사람하고 나하고 상관없는 사이다.”, 심지어 “저주한다.”라고 분명히 했지요?

베드로로 하여금 “나는 예수님을 저주합니다.”라는 발설이 나오도록 누가 사건을 그런 식으로 몰아넣었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몰아넣었지요? 베드로가 칼을 들고 있을 때는 “칼을 거두어라.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

 

하여튼 제자들이 내뱉는 모든 생각은 전부 다 거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어린애를 데리고 와가지고는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섬기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고 했지요.

제자들은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쓴 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그런 발언을 할 자격이 안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여튼 제자들이 하는 족족 전부 다 거부를 해버려요.

 

그리고 심지어 베드로는 뭐라고 장담했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언정 ‘저’ 모르겠습니까? ‘저’ 베드로입니다. 당신이 이름지어준 ”반석“입니다. 김반석, 최반석,.. 하는 ”반석“입니다. 다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마귀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겁니다.

“네 힘으로 네 자리에서 내 쪽으로 건너올 수가 없다. 네가 그러한 객기를 부리면서 네가 그러한 기대를 하지만 닭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씩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한 것을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것의 원인자가 주님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주님이시지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때는 그 사실을 몰랐어요. 나중에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난 뒤에 베드로는 비로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정한 것도 은혜에 속할 줄이야..’ 죄 지은 것조차도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요.

우리는 행동으로 죄냐 아니냐를 결정하기 때문에 내 행동이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을 바꿔치기 해버린 거에요. 내 행동과 무관한 원인이 우리 속에 투입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왕 요한계시록 강의도 가까워오는데 미리 풀어야지요. 빨리 풀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세 가지 안목이 있어요. 이것을 교재에 써놓았어요. 사도의 안목, 천사의 안목, 주님의 안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주님을 통해서, 천사를 통해서 사도요한에게 오거든요. 이것이 요한계시록 1장에 제일 먼저 나와요. 내가 앞으로 본 것은 주님의 종에게 온 것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나에게 알려준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은 (미리 다 해도 되는가 모르겠다마는) 역사적 관점이에요. 인간은 역사를 알잖아요.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역사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인간의 관점 아닙니까?

그게 7교회지요. 빌라델비아, 사데, 라오디게아, ... .인간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시작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입니다. 그 뒤에 4장, 5장을 넘어가면 인간의 관점에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해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안 돼요. 인간의 관점만 해석이 되지요. 그러면 위쪽의 관점은 결국 아래쪽 인간의 관점을 부정하고 고발하는데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너희는 땅에서 났는데 어떻게 위의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요한복음 3장)에 그 말씀이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8장 23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위, 아래, 위, 위, 아래”라는 노래가 있지요. 주님은 위에서 났고 우리는 아래에서 났지요. 그러면 주님이 오심으로써 아랫동네의 해석방법, 아랫동네의 사고방식이 드러나겠어요 안 드러나겠어요? 드러나는 거에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을 때에 그 해석은 본인이 위에서 오신 성령을 받게 되기 전까지 아랫동네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인데 그 해석은 마귀가 쳐놓은 그 울타리 밖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물론 예수님을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가두어져 있은 거에요. 그런데 베드로가 ‘이것은 마귀 니들 짓이지.’라는 말을 못 해요. 왜냐하면 역사적 해석에서는 마귀가 없어요.

이 땅에서는 자기를 해꼬지 하는 존재가 마귀인 줄 알고 있어요. 자기를 병들게 하고 자기의 모가지를 비틀면 마귀인 줄로 알고 검은 사제들 불러다가 명동에서 굿하는 거에요. 그런 영화가 나왔지요.

 

자기를 해꼬지 하면 마귀인 줄로 알아요. 자기를 잘 되게 하는 존재가 마귀인 줄 몰라요. 나에게 평화(평온한 인생)를 허락하면 천사가 했는 줄 아는데 그것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내게 강 같은 평화」. 그거 해서 뭐하라고요? 누구 좋으라고요? 나 좋으라고요. 예수도 내게 좋으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왜 왔다고요? 그 “평화”를 “불화”로 만드는 거에요.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곳이 예수님과 통합적으로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개인적으로 주님을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주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좋아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결국 주님은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우리 중 누가 믿었으리요 우리 눈에 기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싫어버린 바 된” 모습으로 모든 개인에게 다 찾아왔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통째로 마귀라는 바구니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 바구니 바깥에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공통된 본성을 보이게 되어 있어요. 천하에 예수라도 내가 싫으면 싫어지는 거에요.

이것이 마귀의 심리인데 “강력한” 저항, “강력한” 밀침입니다. 주께서 주신 그 모든 사항에 대해서 “강력한” 불만과 불평이 있고, 돈이 수천억 있어도 자기 인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었다가도 약간만 시간이 지나버리면 불안해요. 언제 이 상황이 바뀔지 모르잖아요.(바뀐다는 것을 뻔히 다 알잖아요.) 그런데 바뀌어 버리면 괜찮은 곳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 몸이 늙습니다. 늙으면 비가 좀 온다 싶으면 온 천지가 류마치스 관절염 때문에 찌뿌둥해가지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사랑, 성령의 열매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려요.

 

「사사기의 그리스도」 책이 곧(1월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남이 귀찮다가 나중에는 내가 귀찮아요. 그것도 모르고 80세에 찾아오거든 쓸모 있다고 전하라고 하는데 뭘 알아서 갑니까?

다시 돌아갑시다. 인간이 왜 자기가 속한 존재인 것을 모르는가 하면 마귀 바깥에 마귀의 정체와 전혀 이질적인 어떤 분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안에서 자체적인 평화와 평안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인간은 정치적이다.’라고 해요. 가정에도 정치가 있는데 그것은 협상과 타협입니다. 간난애도 본능적으로 협상과 타협을 할 줄 알아요. 어느 정도 울면 젖을 준다는 것을 알아요. 협상력과 타협을 타고 났어요.

그리고 이것이 확장이 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국가라고 하거든요. 국가를 가지고 보편적 조직이다. 개인이 모이면 다수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국가가 되지 않아요.

 

개인이 모이면 보편적이 되어야 돼요. 그 하나의 단일체계가 정신적으로 지지를 받게 되어 있지 개인이 모인다고 해서 단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모인 것을 가지고 그냥 ‘집합’이라고 이야기하고 ‘집합’이 하나의 동호회가 되면 그것을 ‘집단’이라고 이야기해요.

사르트르가 그런 이론을 제시했거든요. 그것이 적절한 이론이에요.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사람 10명이 모여봐야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주구천동 산악회에 갔다면 (이 추운 날 왜 산에 가가지고 사람 2명이나 죽고..) 이때는 동지 의식이 생겨요. 이것은 ‘집합’이 아닙니다. 그쪽 사상에 내가 자발적으로 굴종이 되고 자발적으로 복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사람이 오게 되면 (이것은 ‘집합’입니다.) 이들을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면 자발적 순종이 되는 우리 기업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 훈련을 잘 시켜야 오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요. 요즘 20대가 만만치 않습니다마는 훈련시키기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회사가 일종의 종교단체가 되어버리지요.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충성을 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하거든요. 오늘 것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것은 땅에 있는 인간이 아무리 추적해도 그 출처를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몰라요. 다만 성령을 받으면 마귀적 발상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집합은 압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해도 마귀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면 안 돼요. 마귀 얼굴이 뭐, 뿔 달리고 이렇지 않아요. 자 이제부터 이렇게 대강 알고 지금까지 어려운 것을 하지 않았어요. 이제 어려운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는 그런 마귀가 싫어. 아담은 마귀한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마귀한테 속지 않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마귀를 대적해서 물리칠 거야.‘ 누구나 이 본문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잘못이에요. 어떻게 그것이 잘못이 되는가? 마귀는 우리가 칠 수 있는 대상이 안 됩니다. 마귀가 있고 그의 졸개가 함께 있고 우리는 주님에 속하고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과 함께 따로 있다고 우리는 자꾸 생각을 하거든요.

 

이 놀이가 무슨 놀이인가 하면 ‘우리 집에 왜 왔니?’ 하는 놀이에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가위 바위 보 해가지고 한 명 더 빼앗고 하는 게임 있잖아요. 밀고 당긴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노래가 안 돼요. 전부 다 마귀에 속해서 마귀의 속성을 가진 육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질 때에 어떻게 건지시는가?

 

주께서 성령을 보내서 성령이 옵니다. 오게 되면 전부 다 반발하게 돼요. 물론 성도도 반발해요. 왜? 습성이 마귀적 습성이기 때문에요. 그런데 ‘마귀적 습성’이라는 것은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이것이 공식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내가 기도했다는 원인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헌금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면 내가 내 돈을 냈다는 거에요. 요게 마귀적 발상이에요.

 

내가 성가대에서 찬양을 했다면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셨고 그 다음에 영광 받은 원인을 추적해보니까 거기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마귀적 발상이에요. 원래 어떤 결과가 나왔을 때 원인자는 따로 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만 원인자인데 뱀(악마)이 아담을 잡고 유혹한 거에요. 그걸 주님으로 차단시키고 네가 중간에 끼어들라는 거에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이 말이죠. 여기 이 에덴 동산에 거주하게 된 이유, 선악과와 아름다운 과실, 이젠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무들이 된다고 본 거에요. 마귀가.

 

그러니까 마귀는 항상 우리편이에요. 이것이 좋은 말입니다. 마귀는 항상 내가 좋으라고 하는 거에요. ‘너의 마음에 결심하고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똑바로 착하게만 살면 복은, “주시마” 하신 약속대로 주시겠다는데 왜 행동을 똑바로 안 하느냐?’ 이것이 마귀적이라니까요.

그 동안 나를 원인자로 제공하는 데에 쉽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이 논리 방식 외에 우리가 아는 것이 없어요. 태어나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그 방식 외에는 “No!”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내가 무엇을 해서 영광을 내가 차지하겠다는 이 논리가 너무나 맘에 들어요. 내가 무엇을 했는데 남이 영광을 받는다면 이것은 성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죽 쒸서 개 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죽여버립니다. 용서가 안 돼요.

명절날 맏며느리가 반찬을 다 했는데 시어머니가 뒤늦게 와가지고 세 시간 있다가 떠날 둘째 동서한테 맛있는 고구마 튀김을 주면서 “야, 야, 고생했다.”라고 하면 우리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침 해먹여서 자식 다 키워놨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 만나서 바람을 피웠다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요. 저는 설리반 선생을 만나서 소경인데 훌륭한 학자가 된 헬렌켈러라고 있지요? 그 사람이 참 착하다고 하잖아요? 안 믿습니다. 그 사람이 결혼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보세요. 성격이 좋은지..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성질을 건드리기 위해서 왔어요. 그래야 우리의 본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를 안 건드리면 우리는 자체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마귀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요.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안 믿습니다. “그 중에서 나는 좀 빼주세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요. “저는 남편 밑반찬 1000가지 했습니다.”라면서 빼달라는 거에요.

자기는 이렇게 성실하게 살았으니까 빼달라는 거에요. 그 죄인이라는 항목 속에 나를 한꺼번에 도매급으로 넘기지 말아 달라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렇게 우리를 도매급으로 넘깁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너희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그 말씀을 그 당시 제자들이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왜? “나는 빼주세요.”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와서 하는 이야기,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이 제자들입니다.

“주님이여 그러면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부자,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도 구원을 못 받는다면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이거든요. 아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걱정되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 됩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느니라”가 되는 겁니다. 계룡산 도사가 되어서 구원 받아야 돼요. 주께서 주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받습니까? 구원? 아니요. 우리가 엉터리로 살아왔다는 그것이 발각당하는 복을 받습니다. 이게 걸림돌이에요. 주께서 영생을 주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를 줘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걸림돌을 이미 넘어선 이후에 다시 ‘나를 뭐가 넘었지?’ 하고 다시 돌아보게 되면 십자가의 걸림돌을 넘어섰는데 그것은 결코 내 힘이 아니에요. 왜? 나는 결코 나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를 미워해도 나는 나를 사랑해요. 지옥에 가도 나는 나를 존중할 거에요. “힘내, 지옥 가도 사람 다 살고 있고 동창생이 많아.” 이렇게 나에게 격려할 거에요. 그러니까 나를 저주하는 것을 넘어선 것은 그야말로 이것을 가지고 5자 용어로 “수면내시경”이라고 합니다. 그냥 “내시경” 말고..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팔 벌리고 손등 위에 주사를 맞거든요. 멍들지요. 그럼 마취제가 들어갑니다. 눕히는데 옆으로 눕혀요. 그러면 간호사가 와가지고 “입을 벌리세요.”라고 해서 모양새가 우습게 해놓고 호스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누워가지고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 번 구경해 봐야지.’ 하고 9, 8, 7, ... 세다가 깨보면 벌써 회복실로 가 있어요.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지요? 누가 넘어섰어요? 자기는 자고 있었는데 누가 넘어섰어요?

 

나를 데리고 멱살 쥐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 하셨어요. 그래서 이쪽(내시경 검사하는 방)에 있는 나를 회복실로 옮겨놓고 깨게 만들었습니다. 깨면서 우리가 느낀 점은 ‘내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의 고집이고 다 내가 좋으라고 내가 내 식으로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하나의 종교적인 발악(?)이었다.’입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도 믿고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도 믿고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도 하는 그 짓거리가 바로 내가 도저히 구원 될 수 없는 것을 더욱 더 구원이 되지 못 하게 만드는 마귀가 시킨 짓인데 우리는 그것에 충실히 따라온 거지요.

 

교회에 한 주에 몇 번 가면 됩니까? 새벽기도 몇 번 꼭 나와야 돼요? 일 년에 전도 몇 명 해야 돼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따내려고 했던 그 모든 헛짓이 다른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나왔지요.

그래서 내 속에 있는 마귀에게서 나온 원인과 주님의 원인과 결합되면서 구원은 주님의 원인 쪽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 자랑하고 모든 공로는 주님께 돌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필히 성령은 우리를 질책해야 돼요. 질책이 없으면 주님께 공로를 돌리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내 공로로 돌려버려요. 신앙 좋은 내 공로로 돌린다고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항상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을 마귀짓이라고 질책하는 이유는 그것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은 받았기에 회상하는 식으로 보는 거에요.

‘네가 그런 구닥다리 몸을 죽을 때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네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 마귀짓을 네가 즐겨 구경하라. 그리고 그것과 예수 십자가 피 앞에서 그것이 죄인인 것을 들추어주신 그러한 안목이 있는 자리를 허락하신 것을 주께 감사하라.’

 

이 요한복음 8장 이하를 그 당시 제자들은 이해를 못 해요. 그런데 다시 이 말씀을 들으면 ‘그때 그런 뜻이었구나.’를 알지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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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

151217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마귀의 자식라면 그냥 내버려 두지 굳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그들 속에 오신 이유가 뭐냐?

내놓은 자식이라면 상관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것이 ‘말을 건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시발이 말을 건네는 거에요. 창세기 3장에 유명한 말이 있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말을 건네는 겁니다.

 

그런데 말을 건넨다는 말은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인간은 어떤 질문도 소통할 수 있는 질문을 내뱉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교인들이 신앙생활이 안 되는 이유가 질문할 것이 없어서 그래요. 질문을 하면 궁금해서 성경을 찾아보든지 하는데 전혀 뭐를 질문을 해야 되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설교할 때 “여러분 이런 것을 질문하고 싶지 않았습니까?”라는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돼요. “이런 것들이 궁금했지요?”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에 성만찬 같으면, “‘그 성만찬 떡(살)을 잘못 먹어가지고 아픈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 성만찬을 치루면서도 살아남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만찬에 참석해야 합니까?’ 이런 것이 궁금했지요?”라고 묻는 작업부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교회를 안 나오고 말씀을 안 듣게 되면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느냐(질문거리)를 모르는 거에요. 그 궁금거리를 모르게 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만드는 셈이 되어서 큰일이 나는 겁니다.

다른 분이 만들어줘야 되는데 내가 알아서 만들어 봐야 그냥 고만고만한 것이고 그저 남 뒤따라가는 흉내내기에 그칠 뿐이죠. 창조자로부터 질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으면 되지요.

 

그런데 그 질문이 무서운 질문이에요. “너희는 아비 마귀한테 속했고” 이것이 질문이에요. 단정짓는 겁니다. “너는 땅에 속했고 또는 너희는 내게 속하지 않은 세계에 갇혀 있고” 항상 질문 자체가 우리에 대해 부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해대거든요.

그것은 왜 그런가? ‘걸림돌’ 때문에 그렇습니다. ‘걸림돌’을 빼게되면 전국민이 신자가 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중세시대입니다. 392년 데오도시우스가 선언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로마 시민은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 없다. 전 국민이 신지로서 오직 국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콘스탄틴 대제는 종교의 평등은 선언한 것이고 국교는 데오도시우스가 처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국교를 선포했다는 말은 모든 국민은 기독교 신자이고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교회가 들으면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겠습니까! ‘제발 기독교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어가지고 일요일에는 절대로 시험 안 치르고 모든 공무원들은 전부 다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 가지고 이상적인 국가가 되고 싶다.’는 그런 여망이 있잖아요.

 

그러려면 방법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방법은 ‘걸림돌’을 빼는 겁니다. 어떻게 빼느냐? 주어진 몇 개의 문장만 ‘예.’라고 인정한다면 신자로 간주해서 세례를 주고 성만찬에 참여시켜 버리면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도 구원이 되는 거죠.

그 몇 개의 문장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십자가의 걸림돌을 뺀 대용입니다. 십자가의 언급이 없이 삼위일체를 언급하면 돼요. 그러면 삼위일체의 핵심은 뭐냐? ‘존재론’입니다. 이렇게 묻는 겁니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예 존재합니다.”

 

그러면 “당신을 만든 분은 존재합니까?”라고 물어요. “예 존재합니다.” “누굽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일단은 신자가 될 기미가 보여요. 이미 모든 국교가 기독교인데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 질문이 궁해져 버려요.

“그러면 너는 누가 만들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마귀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자, 그렇다면 일단은 됐어요. 나는 신이 만들었다. 그러면 이미 유신론이 돼요. 신을 인정한 것이 되지요.

 

그러면 남는 것은 ‘신이 인간 존재를 어떤 식으로 창조하느냐?’ 그것만 삼위일체를 가지고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넣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음을 고백하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가 계속 이야기할게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의 국가종교라고 합니다. 국가종교는 종교국가하고 다릅니다. 종교국가는 현재 캐톨릭을 말하지요. 모든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캐톨릭으로 전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수도가 바티칸이죠.

 

국가종교라는 것은 국가 자체가 종교가 되는 겁니다. 민족주의 이전에 중세 때에 나라들이 전부 다 국가종교입니다. 어떤 영주가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그 속에 있는 농노(농민, 백성)들은 그 종교를 따라야 돼요.

1555년 아우스부르크 회담에서 결정했어요. 그 회담에서 이미 결정을 내려버렸어요. 그러니까 마을 이장이 기독교라면 마을 전체가 갓 태어난 아이도 전부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겁니다. 요즘 우리 교인들 같으면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나도 좀 그랬으면 좋겠다.’

 

‘회사 오너가 기독교 신자라면 자동적으로 전부 다 말단 신입사원도 기독교 신자가 되는 그런 것 좀 시행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인간이고 인간의 이성이 있다면, 바보가 아니고 짐승이 아닌 이상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할 때 이것은 일색(동일할 색깔)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겁니다.

아까 전에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답변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면 대안을 제시를 해야 되는데 “누군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신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일단 합격입니다.” 그 다음에 “당신 속에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양심이 있지요.”

 

“착하고 싶어요 나쁘고 싶어요?” “착하고 싶어요.” “그러면 그 마음은 누가 줬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설명해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니(창세기 1장 28절)”이 됩니다. 짝짝 성경대로 지금 맞춰가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약이에요. 신약도 이렇게 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는데 사람이 죄를 지었고 사람의 힘으로는 죄 용서를 할 길이 없어서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성자를 보내서 용서하신 것을 믿습니까?”라고 하면 “안 믿는다.”라고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것을 안 믿는다고 하면 그 다음에 답변이 궁해져요. “그러면 당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씻습니까?”라고 물으면 난처해지거든요. 자기의 나쁜 짓이 계속 발견이 된다면 알고 있는 죄는 착한 것으로 상쇄가 되면 되는데 계속해서 발견이 되는 죄는 계속해서 착해야 되는 부담을 느끼는 거에요.

다들 그런 생각 안 해요? 왜 그렇게 교인들이 열심입니까? 나쁜 짓을 한 것을 대비해서 보험들어놓는 거에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쌓아두면 설사 나쁜 일을 할지라도 착한 일을 모아둔 창고에 가가지고 몇 개 빼가지고 그것으로 이것을 상쇄하면 된다니까요.

 

창고가 있으니까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놓고 급할 때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쓸 수가 있다 말이지요. 천국도. 그걸 정리한 것이 마지막 삼위일체로 마감이 돼요. 성부, 성자, 성령이 있었는데 성자가 죄를 대신하여서 이 땅에 오신 분이고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이시고 성부는 그것을 계획하신 분이고 아버지시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어려운데, 이게.. 뭐가 빠졌지요? 십자가가 빠졌다고 하지 마시고 ‘걸림돌’이 빠졌다고 하세요. ‘걸림돌’이 빠졌어요. 왜냐?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인 전체를 국가종교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살해당했습니까? 이방인 헬라인에게 죽었습니까? 로마 사람한테 당했습니까? 누구한테? 바로 그 유대교라는 국가종교한테 살해당하기 전에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고방식과 행세가 전부 다 마귀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믿을래야 믿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자기 속에 있는 거짓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떠벌리면서 나에 대해서 떠밀고 있고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이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국가종교에서 하는 수법과 유대인의 수법이 동일하다면 똑같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는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요 오늘날 그들이 질타받은 논리가 매일 우리 속에서도 쏟아져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 속에서 그들과 동일한 것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은 늘 십자가라는 걸림돌은 계속해서 빠지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도 살고 있는 겁니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두 가지 용어를 여기에서 사용하겠습니다.

 

하나는 ‘이상적 자아’입니다. 두 가지를 같이 써버리면 너무 어려우니까 한 가지만 먼저 쓸게요. ‘이상적 자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가 따로 있다.’ 이것은 “얘야 니 꿈이 뭐니?” 어릴 때부터 전부 받은 질문이잖아요. “너 커서 뭐 할래?” 이것이 ‘이상적 자아’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진짜 어렵지 않은지 한 번 보겠습니다. 밑에 쓰겠어요. ‘이상자아’입니다. 그런데 ‘이상적 자아’와 같이 ‘적’자를 사이에 둔 것과 그렇지 않은 ‘이상자아’가 달라요.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뭐냐? 쉽게 갈 걸 괜히 두 가지를 다 써서 어렵게 간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걸림돌이라는 용어를 설명을 못 해요.

 

‘이상적 자아’라는 것은 되고 싶은 거지요. 누가 되고 싶어해요? 내가 ...(미래에) 되고 싶어하는 어떤 이미지나 모델이 ‘이상적 자아’입니다. 그런데 ‘이상자아’는 저쪽(낯선 장소)에서 나한테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내가 되고 싶은 어떤 코스(노선)가 있잖아요. 그 코스 말고 다른 코스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이상자아’입니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지만 설명하기 위해서 쉽게 한다면 ‘자아’가 이상해졌어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상하게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것이 내 인생에 차고 들어오고 칩입해서 들어와요. 뭔가 내 인생을 가로막고 방해공작을 하면서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드는, 내가 원하는 코스가 아니라 다른 코스로 강제로 질질 끌고 가는 그런 힘으로 차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잘나고 잘난 유대인들 앞에 주님이 나타난 겁니다. “목사님 대표적인 예를 들어주세요.”라고 하면 간단합니다. 바로 사도바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지요.

 

만나서 나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할 때 “니가 핍박하는...”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핍박받는 분으로 나타났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까? 사도바울 본인이 예수님을 핍박한다고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이미 죽고 없어졌어요. 누구를 붙들고 멱살을 쥘 입장이 아니에요. 살아있어야 멱살을 쥐지요.

 

이미 예수님은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헛된 소문을 퍼뜨리는 그런 이단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척결하기 위해서 설치는 것이지 지금 예수님 당사자를 붙들고 멱살을 쥐고 “당신을 핍박할거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이상적모델’ 안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이미 죽었잖아요. “이순신 나와.” “죽었는데 뭘 나와?” 사도바울이 기대하는 이상적 모델 코스에 대한 스케줄(절차) 안에는 예수가 없어요.

 

‘나는 젊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그 당시 유대인들한테 종교지도자로서 인정받고 나중에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리라’라는 이상적모델 코스 내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지 않다니까요.

이미 죽었으니까 들어오시고 마시고 할 것도 없지요. 죽은 사람인데 뭘 들어와요. 그런데 갑자기 치고 들어온 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말을 건네면서.. 이게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의 ‘이상적자아’를 버렸겠습니까 그냥 유지했겠습니까? 유지하지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이 자기 몸이 아니고 옛날에 어떤 ‘이상적자아’를 추구하는 모습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사도바울은 압니다.

“내 속에 또 다른 죄가 있는데 죄와 내가 싸워서 죄가 이기고 나는 지더라. 나는 선한 법을 원하지만 그 원치 않고 나를 더 악한 법으로 몰아세우는 그런 자아가 또 있더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본인이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을 건네온 주님이 이미 그 사람을 장악한 것이고 이 사람을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에요.

 

성령이 오면 우리의 본색을 놓치는(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그대로 쥐고 그 본색과 주님을 대비시키면서 이미 너는 건널 수 없는 구원을 건너버린 거에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구원론은 더 이상 날아가고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보이스피싱이에요. 돈 빼먹는 거에요. 여러분 베리칩 문신 하지 말아야 되고 뭐 해야 되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사기꾼들입니다. 십일조, 십계명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온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성령세례 받고 구원되었다고 사도행전에 나와요.

 

뭐가 필요합니까? 놀랍게도 구원 받는 데에 아무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심지어 회개조차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구원 받고 난 뒤에 즐거이 회개를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과 상관없이 회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구원 받은 능력으로 늘 반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반성이에요. 반성한다고 구원이 더 되고 반성한다고 복을 더 받고 반성을 안 한다고 복을 덜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미 저주는 날아가고 없어요. 저주는 없어요. 왜냐하면 저주를 받거나 복을 받을 대상 자체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에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인데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몸을 자기가 복을 준다고 하는데 내가 더 바라고 할 것이 없잖아요.

내 것 같으면 ‘더 주세요.’라고 하겠는데 주님이 주님의 몸을 알아서 만드는데 내가 더 달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소급해서 “내가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만이 나올 뿐입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사도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내가 몸은 매여도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아주 간결한 투로 이야기를 하지요. “몸이 매였느냐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이 방식이 예수님께서 이사야에서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 몸은 죽어도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같은 방식이에요. 그것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로 끝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죄를 지어도 말씀은 그대로 죄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예가 되는 거에요. 고린도후서 한 번 봅시다.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공식 속에 제일 먼저 시작이 ‘약속’이지요. ‘약속’이 오게 되면 그 결과 반응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데 ‘아멘’이 나타났잖아요. ‘아멘’이 나타나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골라잡아서 ‘아멘’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으면 ‘약속’이 알아서 우리로 ‘아멘’을 토하게 만든다 이 말이죠.

 

성적이 내려가도 ‘아멘’, 몸이 아파도 ‘아멘’ 이것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이것을 아까 ‘최초의 원인,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라고 했고 그것이 아멘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따져봐도 ‘아멘’이 아니고 ‘노멘’을 하고 싶은데 말이죠.

약속 안에 내정되어 있으면 분명히 남들 같으면 원망해야 될 일도 주께서는 그것을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게 하시는데 그때가 그 것(일)을 통해서 ‘아, 내가 다룰 수 없는 능력 이상의 분이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순간입니다.

 

분명히 이것이 기뻐해야 하는 현상도 아닌데 이상하게 갑자기 기쁨이 생성되는 것은 약속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속을 쥐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나를 쥐고 이끌기 때문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12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옛날(그때)의 일을 다시 되돌아 보세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이 자기의 소원이었습니까? 평소에 윈드써핑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물 위를 걸었잖아요. 물고기를 잡으면 잡았지 물고기 아가리를 벌려보니까 거기에서 동전이 나왔는데 그 물고기는 한국은행 근처에 있던 물고기입니까? 한국 연못 속에 있던 금붕어에요? 그 물고기에서 동전이 왜 나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물고기처럼, 그 물(주님이 걸으셨던)처럼 주께서 나를 그런 인식으로 다루어 오고 있었다는 거에요. 지금도 다루고 있고요. 놀라기는 남들이 놀라는 거지요. “나는 네가 예수 믿을지 몰랐다. 너 같은 인간, 혜화동에서 술만 먹던 인간이 목사가 될 줄은 몰랐다.”

 

그 목사님은 절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불교에 심취하셨답니다. “네가 목사가 되다니..” 나중에 90이 넘은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옳도다.” 그분 친척분 중에 목사들이 많은데도요. “네가 한 말이 진짜 복음 같아. 다른 것은 다 엉터리 같아.”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면 자랑질할까요? 아니지요, 자랑질을 할 수가 없지요. ‘주님 왜 저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십니까?’라고 혼잣말로 이야기하지요. ‘이것은 제가 원한 인생이 아닌데요.’ 그것이 ‘이상자아’에요.

 

주께서 건너오실 때 이미 원본이 따로 있었어요. 이것은 내가 컨닝할 수 있는 원본이 아닙니다. ‘나는 ‘이상적 자아’에 푹 빠졌어. 나는 꿈이 많은 소녀야. 부푼 가슴을 안고 하여튼 꿈이 많아요.’ 꿈이 많아봤자 전부 다 늙으면 그만이지만요.

그 많은 꿈들이 진짜 개꿈으로 끝나 버려요. 그리고 내가 기대치 않던 다른 인간으로 달라졌는데 내 인생에 대해서 모두(all)가 ‘아멘’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 내용이 흔히 많이 나오는 주기도문의 끝부분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입니다. 재벌이나 대통령이 그런 고백을 하겠어요? 돈을 버는데 무슨 그런 고백을 하겠어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모든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WE)”라는 새로운 집단(집합이 아닌)입니다. 그 중앙에는 예수님에 의해서 소집당한, 호명당한, 호출당한 그런 개개인들이 있는데 그들을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호명하는 관계로써 만들어지는 겁니다.

 

내가 너를 불렀을 때에, 호명했을 때에, 아브라함아, 아무개야 불렀을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에 일어나 나왔잖아요. 그리고 “보기에 답답하구나”라고 하셔서 풀어줬잖아요. 죽은 지 나흘만에 기어나온 거에요.

이것을 나사로가 기대했겠습니까, 마리아가 기대했겠습니까, 마르다가 기대했겠습니까, 12제자 중에 나흘 만에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을 누가 기대했겠습니까? 아무도 기대를 못 하지요.

 

그러면 그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나온 것에 대해서 나사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제가 예수님의 계획대로 되는 그러한 ‘이상자아’였군요. 내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으로 성도가 되어야 되지 내가 요구하는 성도는요 도중에 스톱이 되어 버려요.

‘5년 전에 참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이 사람은 5년에서 스톱 되어 버렸어요. 5년 전에서 제자리 뜀하고 있어요. ‘참 6년 전에 은혜 많이 받았는데..’ 이 사람은 6년 전 자아를 지금까지 계속해서 울궈먹고 있는 거에요.

 

내가 기대하는 성도는 100% 가짜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거든요. 그래서 내가 기대한 ‘이상적 자아’에 의한 성도를 자랑질하지 마시고 그것을 아낌없이 부수어주셔서 볼품없는 자아가 된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보기에는 신자로 보이지? 나는 맨날 불신자야. 그런데 주님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아.” 차라리 주님만 증거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그래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는 것은 말을 건네오는 겁니다. 아예 그 사람들을 내치기 위해서 하시는 말이 아니고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에게 속했다”는 말은 “너만 버림 받은 것이 아니고 나도 버림 받을 거야. 다 같이 버림 받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이상적 자아’로서 구원을 기대하지마.” 그것은 종교 친목회이고 취미생활이거든요.

지난 주일날 낮에 제가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취미생활에는 고난이 없다고 했지요. 힘든데 왜 나옵니까? 재미나기 위해서 하는 것을 왜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취미생활이에요. 힘 들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힘듬과 쓴잔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 이유는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이상자아’가 있기에 그런 것을 주님만 따로 알고 있고 우리는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자꾸 꿈을 키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적 자아’를 무산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도 ‘이상자아’를 미리 당겨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하는데 그것을 알면 우리는 믿는 자가 아니에요. 내가 나를 소유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내가 나를 믿는 게 돼요. 내가 예수 믿는 나를 믿는 식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안 돼요.

 

주님만 믿으려면 내가 쥐어야 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돼요. 아버지와 아들이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난데없이 아들이 “나는 이제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말은 분명히 이 아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런 겁니다.

남편이 갑자기 생전에 안 하던 “사랑한다.”는 말을(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하거나 선물을 갖고 올 때는 수상한 게, 뭐 잘못한 게 있는 거에요, 유난떨 때는 조심해야 돼요. 수상해요. 뭔가가. 분명히 발 저리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늘 우리의 마귀적 본성이 어느 정도 괜찮다고 하면 그것을 내 소유로 해가지고 남들한테 내자랑을 하고 싶어해요. ‘나 이 정도 되는 신앙인이야.’ 이것이 ‘이상적 자아’잖아요. ‘내가 이런 수준까지 올 줄은 미처 몰랐어. 내가 이렇게 되다니..’

그런데 그런 방법을 주께서는 금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하게 해요. ‘그래, 남들한테 네 자랑하는 것 실패해라. 내일 한 번 보자.’ 그리고 내일은 차마 남들한테 자랑할 수 없는 흉측한 일을 간직해야 되지요.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회상하듯이 주의 일을 하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8장 47절 봅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설명을 수요일날 했기 때문에 빨리 하겠습니다. 주님에게는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계통구원입니다. 주님께서 카펫트를 쭉 깔아버려요. 그런데 카펫트는 한 장입니다. 그 위에 자기 백성을 놓아버려요.

 

그러면 백성들은 각자 ‘주님께서 나를 구원했다.’고 오해해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도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믿는 주님이 진짜 주님이야.’라고 서로 싸워요. 이때 주님이 카펫트를 싹 당겨버리면 구원 받은 자만이 그 위에 실려있기 때문에 그 계통은 딸려오지요.

걸림돌 위를 넘어선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아까 내 자랑했는데 미안합니다. 사실은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딸려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 카펫트 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있는 척(구원 받은 척)을 하는 인간은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줘버리면 다 넘어집니다.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데.. 내가 이 교회 지을 때 집을 팔고 난 월세로 들어가고 집 팔고 남은 돈을 주차장 짓는 데에 다 냈었어.(다 낸 것이 투자한 것이지요.)’라고 하며 나서는 거에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깔아놓은 자기 방석 위에 날이면 날마다 점점 자라나는 거에요. 그것을 자기 스토리, 자기 소설 또는 자기 연대기적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몇 살 때 교회에 왔고 주일학교 어떻게 했고 지금 20대에 무슨 봉사했고 나중에 장로가 되면 봉사할 것이고 아들 죽인 사람까지 아들을 삼았고 이것이 쭉쭉 쌓이는 겁니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는 거죠. 그것은 십자가 앞에 다 넘어가는 겁니다. 신학박사, 교수들 전부 다 넘어가요. 십자가를 전해버리면 그 앞에서 잘난 자도 없고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지, 그런 껍데기는 소용이 없어요.

반석이 중요하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무 소용 없어요. 물론 제가 이것을 카펫트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성경에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 안, 또 다른 말로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과 반대되는 사람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원수(빌립보서 3장 18절)라고 하지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이미 기준이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의 원수냐 아니냐 그것만 보는 거에요.

그래서 설교할 때 마지막으로 십자가만 증거되어야 되지 다른 것, 교회 이런 것이 증거되면 안 돼요. ‘이것을 행하시고’라고 나오면 안 됩니다. ‘선교합시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시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전부 가짭니다.

 

‘이미 구원된 것은 십자가 덕분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그것은 전부 다 가짜에요. 이 사람을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합니다. 개인별로 속한 것이 아니로 단체로 속한 거에요.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하나밖에 없는 단체, 동일한 소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구원된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전자기기의 칩처럼 집어넣으시는데 반도체 회사 작업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공정이 빠른지 로봇이 와서 트랜지스터를 막 집어넣지요. 그런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 키판에다가 꽂아 놓는 겁니다. 동일한, 하나밖에 없는 키판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예수 안, 십자가 안, 언약 안,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에서 너희들은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하나이니라”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성도 밑에 카펫트는 한 장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와도 안 나와도 어디에 있더라도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사업을 망해도 강도가 되어도 세리가 되어도 창녀가 됐다고 할지라도 신자고 전부 다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보고 싶지요. 그러나 만나기까지 기다리세요. 미리 보고 싶어하면 친목이 되니까 그것은 곤란하고 가만히 있으면 우연을 가장해서 또 만나게 됩니다. 우연을 가장했다고 하니까 나훈아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오직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에 다 하나로 집결됩니다. 그 다음에 4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47절이 어렵다는 말은 개인구원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는 집합이 아니고 집단으로 이미 모아놨다는 거에요. 집합해서 집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처음부터 키판에다가 반도체를 집어넣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한다는 거에요.

왜? 계통 자체니까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인 것처럼 한 번 박혔다고 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어요. 내 양이라고 하면 어떤 양도 목자의 완력(손)에서 마귀조차도 빼낼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빠져나오면 되지요. 그래서 일부러 막 죄를 짓는 거에요. ‘나 예수 안 믿을란다.’ 그러면 주께서 ‘네 맘대로 해봐라. 빠져나오는가.’ 실제로 우리 교회에 끈끈이를 갖다놓아 보면 살아있는 생쥐가 달라붙었는데 발을 빼려다가 애를 쓰다가 결국 헥헥 거리다가 죽어요.

쥐를 한두 번 잡아보면 다 압니다. 꼭 성도를 닮았어요. 온갖 나쁜 짓을 다해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이제 내가 예수를 믿으면 개다.’라고 백날 해 보세요. 못 빠져나오지요. 한 번 해보세요. 되는가..

 

우리가 우리의 결심을 가지고 어떤 종교를 선택을 하고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른 것처럼 골랐으면 빠져나오는데 내가 내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줘서 성령이 와버리면 우리 힘으로는 못 뺀다니까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그렇게 환난이 많은 거에요. 주님이 좀 밉지요.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많은 것은 우리를 보고 ‘그래도 발 못 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우리를 그러한 난코스로 데려가는 겁니다.

 

현대차가 나오기 전에 일부러 사하라 사막에 가가지고 자기 차를 굴려가지고 온갖 사막에 돌아다니며 뒤집어쓰고 “이런 작품입니다.”라고 CF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실컷 환난을 당하게 해놓고 ‘햐, 도저히 주님한테는 안 되네요.’ 그런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고생을 해야 됩니까?”라고 묻고 싶을 텐데요 제 대답은 “사는 것 자체가 고생인데 뭘 또 합니까? 더는 고생하지 마세요. 그냥 사시면 그게 고생입니다.”입니다. 그 놈의 ‘이상적 자아’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해요.

 

자기 인생이 마음에 안 들어요. ‘이상자아’가 전혀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낯설기 때문에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것이 ‘이상적 자아’에요. ‘기도했으니까 이제는 집 사주시겠지, 주여!’ 하는 것이 전부 다 ‘이상적 자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것은 해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치고, 그 다음에 나오는 49절에 보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을 설명하면 시간이 맞지 싶은데요. 이것을 꼭 설명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유대인하고 토론을 할 때 “네가 메시야인 것을 증명해보라.”고 하니까 “율법대로 내가 메시야인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뭔데?” “모세 율법에 증인 두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두 사람을 댈게.” “그럼 대봐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증인이고 또 하나는 내 아버지가 내 증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당신이 사기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봐라.” “내 아내가 나를 사기꾼으로 보지 않는 것 하나, 내가 나를 사기꾼으로 보지 않는 것 둘, 끝.” 그 말을 누가 못해요?

 

그러니까 율법에 두 사람만 증인을 대도 합법하다고 하면서 주께서 이야기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너희들이 기대하고 있는 증명법 자체는 나는 일체 사용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납득할 만한 논리적 방법에 대해서는 나는 일체 거기에 끼어들지 않겠다. 내 논리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럼 왜 그러시는가? ‘그래야 너희가 나를 죽일 것이 아니냐?’ 이 요구가 10장에 나오거든요. 아직 안 나왔지만요.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데 그 죽는 것도 아버지와 나와 계약(언약)된 대로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온 것’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적은 어쨌든 유대인들이 악마에 속했고 나쁘다는 것을 증명하면 예수님의 증명을 끝난 겁니다. 아버지께 받은 지시가 그거에요. 저 놈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네가 죽음으로써 증명해줘라.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은 그들의 화를 돋구는, 그들로 하여금 계속 죽이게 만드는 화법을 사용하시는데 이것이 일반적 해석이 아니고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해석입니다. 19절에 주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죽음 문제를 누가 먼저 거론했지요? 예수님이 먼저 거론했지, 유대인들이 거론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 같다 이 말이죠. “물 주세요.” “물 안 줘.” “당신은 날 죽이려 한다.” 이것은 일반적 해석이 아니에요. 삐져도 보통 삐진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당황해서 하는 말이 20절에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미쳤구나라는 소리임)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입니다. ‘우리 중에 당신을 죽이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까?’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반드시 내가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만들도록 그렇게 일을 만들고야 말리라’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 과정이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설교를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들 예수님을 싫어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고 목적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거에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싫어해야 되고 미워해야 되고 저항해야 되고 질타해야 되고 예수님을 밀쳐야 됩니다. 그것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아멘?” 이렇게 물어야 돼요. 아무도 그런 설교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설교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아멘하는 사람은 우리 교회 교인(윤덕희 집사님)밖에 없어요.

아무도 아무 소리 안 해요. 왜냐하면 누구도 자기 일을 회상하듯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이용해먹고 등쳐먹으려고 믿었습니다. 그걸 이제 알려주시니 아멘.’이라고 할 사람은 넉넉하게 한가로이 벌써 구원 받아가지고 느긋한 입장에서 여유롭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우리 인생을 90 평생까지 계속 이어갑니다. ‘야, 살아보니까 이 정도로 제자 죄인 맞군요.’ ‘80세면 쓸모 있다고 전해라. 못간다고 전해라.’라고 자꾸 노래 불러쌌는데 80, 90, 70, 늦게 온 사람은 이 노래를 못 들었구나. 이애란이 불렀던 백세인생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51절에 봅시다.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너희들은 죽었다는 이 말이지요. 죽었다는 것을 모르니까 진짜 죽었잖아요.

 

예수님 말의 논리가 억지도 억지 9단이 아니고 억지 100단이에요. 이것은 억지 정도가 아니고 어거지에요. 결국 유대인을 캔버스로 간주해가지고 주님께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냥 상대방에게 묻지도 않고 그려버려요. 그 사람 얼굴에다가 먹칠을 해버려요.

너희는 나를 죽이게 되어 있어. 너는 죽이게 되어 있고 너는 오른뺨을 때리고.. 그냥 얼굴에 그리는 겁니다. 하나의 도화지로 사용해가지고 말씀을 반영하는 스크린처럼 사용해 버립니다. 언젠가 제가 인간은 두께가 없는 얇은 막이라고 했지요.

 

두께가 없어요. 얇아요. 누가 거기에다가 그림을 그리면 그려진 그림대로 유지할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을 생각하면 습자지인데 혼자 생각하게 되면 어릴 때부터 기억이 많아가지고 너무 두꺼워요. 두꺼워도 너무 두꺼워요.

여기서 노래가 나와야 돼요. ‘너무 길어요.’ 조항조가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남자의 ... 너무 길어요. 우리 남은 인생이 지루해요. 젊은 사람들은 앞일이 너무 남아서 걱정 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심심해서 걱정되고 재미없어서 걱정되고 너무 길어요.

 

그런데 주님이 보기에는 좌우를 바꿔서 보니까 얇은 습자지같이 얇아요. 전부 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우리의 그림이 아니고 ‘주님의 무늬’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종려나무라고 했습니다.

성막에 보면 그룹들(천사들)과 종려나무의 하나님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수를 놓았어요. 여자들이 수를 놓든지 해가지고 성막을 장식하는 무늬가 ‘주님의 무늬’입니다.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라고 하는 것은 최후승리를 했을 때나 들 수 있는 나뭇가지이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와요. 성전의 무늬 자체가 이미 완성된 것을 기정사실화 시키고 왜 이 세상은 깨저야 하는가를 확인해주는 차원에서 주께서는 일하신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나는 구원 되야 되고 왜 구원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를 우리 몸을 가지고 평생토록 주께서 굴리시고 활용하시는 거에요. 저쪽은 뭐를 해도 자기 자랑을 하고 나는 내자랑을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깨져가지고 결국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잖아요.

 

바로 인간 자체가 종류가 다르고 계통이 다르다는 거에요. 언약이 다른 거에요. 그것을 다르게 한 이유가 일방적으로 했던 주님의 말이 계통에 따라서 이제는 납득이 됩니다. ‘야,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의 중심이기에 얼마든지 이러한 어거지 소리가 어거지 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화되도록 주께서 조치하셨구나.’

그리고 그 현실화된 결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어거지를 ‘주여, 아멘.!’ 하고 그 목성이 나온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임해야 됩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은 참 잘 하셨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52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개념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보통 상징적 죽음과 실제적 죽음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간단히 해서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죽음인데 이것은 가짜입니다.

 

왜? 안 죽어봤기 때문에 죽음을 자꾸 인위적으로 상상하는 겁니다. 이미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또는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기로 예고되신 분이 말하는 죽음은 죽음 그 이후에서 바라보는 죽음인 반면에, 살아있는 사람이 죽지도 않으면서 죽음이 무섭네, 어떠네 하면서 벌벌 떠는 것은 가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가짜 죽음이 마귀의 덫입니다. 성도는 그 가짜 죽음마저 넘어서서 진짜 죽은 주님과 합세했다가 다시 오는 거지요. 그러면 그 진짜 죽음을 진짜 경험하고 싶습니까? 경험하고 싶으면 500원.. 경험하고 싶어요? 말씀드려야지요.

 

진짜 죽은 자의 특징은 “나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를 아는 겁니다. 죽어도, 자살해도 이것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죽고 안 죽고는 아무 문제가 안 돼요. 90년을 사느냐, 100년을 사느냐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나는 나쁜 일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날 때부터 그냥 죄인이었어요. 이유는 묻지말고 무조건 죄인어었어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거에요. 그런데 이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를 대신 치름으로써 무조건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 죄와 더불어 의를 함께 알 때에 이미 이 사람은 진짜 죽음, 참된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영이 우리에에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성령을 통해서 죽으면 돼요 안 돼요 입 다물어. 죽음 문제는 걷어치우고 죄인이냐 의인이냐 이것이 관건이지 몇 년 살다가 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안 됩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스데반 집사처럼 주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면 빨리 가야지요. 그러니까 죄 문제에요.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서 의인 되게 하시는 것이지 얼마나 교회 다녀서 복을 받아서 건강해서 버티고 살고 호스 꼽고 링겔 맞고 요양 병원에 오늘 우리 어머니 들어갔구나.

 

그런 식으로 해봐야 그것은 문제를 지연시킬 뿐이지 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된 자를 이유도 없이 그냥 의인이 되게 했는데 그 원인은 내가 예수를 믿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회개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그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로 제가 오늘날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벌리신 일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회상하듯이 봅니다. 주께서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헛말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된 채로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