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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8장 21절 / 아버지 / 151203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21절 / 아버지 / 151203

정인순 2015. 12. 4. 12:27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충성모

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마치 이 말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스케줄에 따라서, 체포하느냐 마느냐 까지도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체포되지 않는다는 투로 이야기하죠.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네가 나를 체포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허락이 있을 경우에만 너희들은 나를 체포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도 내 계획 중 일부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했지요. 그냥 “때”라고 생각한다면 인간들의 때가 됩니다. 그런데 앞에 그의 때가 붙어버리면, 인간들의 “때”로서는 접근하기 곤란해요.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에 있어서 “인간의 때”와 “주님의 때”, 그리고 공간에 있어서도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영역”과 “주님의 영역”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주님께서 지금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녹취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주님 말씀이 더 어렵지요. 같은 “때”라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아하,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제가 알겠습니다.’라고 하겠는데 주께서 “그의 때”로 들어오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주님의 때”는 “인간의 때”를 침입해서 그것에 균열을 일으켜서 그것을 쪼개버려요. 보통 “때”라고 하는 것은 시간 요소이기 때문에 쭉 흘러가죠. 시간은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요소가 침입을 해버리면 이것이 끊어져버리죠. 딱 스톱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때는 밑으로 빠지고 끊어져버린 순간부터 주님의 때는 따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때”라는 그 시점을 통해서 “너희들끼리 갈래? 아니면 나를 따라올래?”가 결정나는 거죠.

내 말을 이해하면 인자의 때에 속하게 되고 너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줄곧 가는 데로 그냥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끊어진 이 지점을 다른 말로 하면 “격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인데 “돌발적인 변화”, “연속이 안 되는”..

 

군인들이 행진할 때 쭉 행진하다가 “발 바꿔 가!”라고 하면 발을 바꾸잖아요. 쭉 가다가 뭔가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가미되면서 잠시 있었는데 다시 원상 복귀가 돼요. “방금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이게 주님의 때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때”는 순간적으로 침입해서 사라지고 나면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무슨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주님의 때”가 그 당시 유대인 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님의 때”가 임해버리면 분명히 뭔가 변화가 있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까 ‘뭐였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의 때”와 “사울의 때”가 만났습니다. 본인은 “격변”인데 주위의 동행자들은 잠시가 우레가 일어난 것뿐이고 아무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울은 갑자기 눈이 멀었고, 그리고 인생관과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때”라는 것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이 뭐냐하면 시간의 격변이지만 사실은 “주체 격변” 또는 “자아 격변”입니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인생이 내가 서술부가 되는 겁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그 주인공이 전부터 (사실은 창세전부터인데) 활동하셨던 거기에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주님의 때”가 임할 그때부터 내가 소속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나는 원래 “주의 때”에 포함이 되어 있어서 주님을 만났어야 하기에 이제야 만났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드라마에 그런 요소가 있어야 돼요. 아버지가 미국에 잠시 다녀왔다고 해놓고는 논팽이가 와서 하는 말이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하면서 등장할 때 “무슨 이런 아버지가 다 있느냐? 이런 논팽이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요.”라고 아들이 격렬하게 대항하죠. ‘조강지처’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요.

 

중간에 자기 인생에 끼어든 거에요. 그러면 그 청년은 “자기 때”에요. 그런데 “자기 때”에 친구가 침범하면 “반갑다. 친구야.”하면 끝나는데 이 분이 아버지니까 자기 존재의 원인자잖아요. 아버지가 아닌 자를 아버지로 불러야 되니까 졸지에 자기는 난데 없이 아들노릇을 해야 되는 거에요.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들노릇을 해야 되니까 위계순서가 자기가 밀리게 되는 거에요. 좋든싫든 “네 아버지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아들은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이런 아버지 나한테는 필요없다.”고.

 

왜? 자기가 주체인데 아버지가 무게있게 들어와 버리면 자기는 주체에서 밀리게 되잖아요. 자기 인생에 없던 아버지가 등장해버리면.. 없던 동생이 왔다고 하면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니에요. 동생은 자기 아래니까 계속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없던 아버지가 나타나버리면 자기는 많은 영토를 아버지의 몫으로 돌려줘야 됩니다. 그리고 특히 아버지가 돈도 있으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되겠는데 이거는 빈대붙이러 왔거든요. 엄마도 자기 엄마도 아닌데..

 

만약에 아버지가 늙었을 때 돌보지 않으면 불효자라는 주위의 나쁜 시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하죠. 하물며 자기 인생에 집 나간 아버지가 돌아와도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데 애초부터 내 인생에 없었다고 일러주신 분이 침입할 때 우리는 격렬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 잠깐 착각했어.’ 할 정도로 사태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사도바울은 부정 정도가 아닙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했는데 남들은 우레가 울었는데 그 짧은 우레 소리 안에 사도바울한테는 모든 게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은 이미 여기에 시간적으로 “그의 때”가 따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 “주님(그)의 때”와 “인간의 때”가 그냥 나란히 평화롭게 가는 것이 아니에요. 둘 중에 한 쪽만 진실이죠.

그러면 “주님의 시간”만 진실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이고 “인간의 때”에 예수님이 잠시 뛰어들었다고 본 사람은 불신자고 그런 겁니다. “자기 때”에 예수님이 잠시 들어왔다고 해버리면 자기 주체가 여전히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본인이 주인공이고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게 되지요. 그러나 “주님의 때”가 침입해버리면 내가 주님을 믿을 수 없고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교회놀이 한 겁니다. 가짜인 겁니다.

믿는 주인공이 내가 되어버리지요. 봉사하는 주인공도 내가 되어버리고요. 내가 없는 내 인생은 생각도 못 하지요. 그러나 “주님의 때”가 침범하게 되면 내가 내 인생을 착각으로 페인트칠한 겁니다. 내가 내 구원을 방해했다가 되지요.

 

주님이 구원했는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그동안 으스대면서 우쭐거리면서 설쳐댔잖아요. 교회 소꿉놀이하면서 그짓했다 이 말이죠. “내 영광 받으옵소서.”라는 놀이를 한 거죠. 주님은 아무것도 받지를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한 번 봅시다. 사도행전 17장 25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네, 그 정도면 됐어요. 섬길 때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주신 것을 받았습니다.”라고 할 때만 영광이 돼요. “날마다 주시니 고맙습니다.”라고 할 때만 영광이 되지, “받아놓고 입 닦냐?” 이런 것을 따지고 묻지 않습니다. 친히 키우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자기를 무는 경우에는 화를 내지만 그냥 강아지가 강아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주인이 결코 화를 내지 않죠. 물론 나중에 강아지가 건방이 늘어져가지고 침대에 올라오고 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강아지보고 돈을 벌어오라고 하거나 이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강아지는 어디까지나 강아지다울 때로 족해요. 강아지가 사람흉내내게 되면은 무서워요. 강아지한테 옷을 입히는데 누구 좋으라고 옷을 입히는지.. 자기 좋으라고 그렇지 강아지 좋으라고? 강아지는 더워서 헤헤 거리는데 뜨개질해가지고 옷을 입힙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부족한 것처럼 받는 게 아니다”에서 이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아무것도 안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해야 돼요. 친히 키우신다는 의미까지 해야 돼요.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했지요.

 

“주신다”는 말은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사람의 운명을 내가 결정한다는 의미에요. 지옥가든 천국가든 입 다물라는 뜻이에요. 내가 만들어놨고 내가 태어나게 했는데 “저는 지옥가면 안 됩니다.”고 반발하게 되면 “너한테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하냐?”라고 나와요.

“근거 있나?” 아무 근거가 없는 거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없는 존재입니다. 없는 존재를 있게 했을 때는 그저 있게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 가미되어서 있는 거거든요. 주님의 뜻이 가미된 상태, 그 상태가 처음부터 모든 게 주님의 시간이고 주님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사람들이 그것을 다 압니까?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24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합니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원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라는 것 때문에 “죽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죄 때문에 죽으신 거냐?”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 않고 “언약”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지요.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언약 때문에 죽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언약 때문에 돌아가신 것”과 “죄 때문에 죽은 것”의 차이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의”와 “죄”를 다 같이 보여주는 죽음이고 인간의 죽음은 그냥 “죄”만 보여주는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의”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셔야 “의”가 나와요. 이걸 신학자들은 모르고 예수님 자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자체가 의로운 분이 아니고 죽으셔야 의로와요. 왜? 언약을 이룰 때에 “의”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가만히 있어서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내뱉을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는 이유가 존재로 생각을 해서 그래요.

언약을 빼버리고 “나 여기 있고 좋으신 분 저기에 있으니까 만나서 우리 좋게 지냅시다.”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에요. 나라는 존재와 저쪽 존재, 두 존재가 만나게 되면 저쪽 존재가 갖고 있는 “의”가 잘해줬으니까 이쪽 존재인 나한테로 전이되고 전달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아니에요. “죽음”과 “죽음”의 만남이거든요. “내가 죽을테니까 너도 죽을 수 있느냐?” 이렇게 만나는 건데요. 그런데 이 세상에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죽음을 언약적 죽음으로 전환시킵니다. 예수님의 자기 죽음 안에 나만을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내 백성을 위해서 죽는다고 함으로써 아직 백성만들기의 여지를 남기면서 혼자 돌아가시지요.

 

그러면서 그 안에 백성만들기의 여지가 남아있고 그 여지는 성령(예수님 자신의 영)을 통해서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으로 전화시키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욕심쟁이에요.

본인의 성깔을 본인의 성깔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백성만들기에다가 그것을 확장시킵니다. 사실은 그게 언약 안에 들어있어요. 출애굽 할 때 그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용사가 되셔가지고, 구약에 보면 우리의 임금이 되시죠.

 

그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단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전제로 한 임금이지요. 왕이 먼저 등장하고 왕에 합당한 백성들이 나중에 왕에 의해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백성은 아무도 없고 임금이 백성만들기에 나서셔요.

그 중앙에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에 보면 새로운 나라가 등장하는데 그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하면 인자의 나라입니다. 인자의 나라. 임금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만들기에 나서시는 나라.

 

그런데 마귀가 자기 백성을 안 빼앗기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나 주께서는 마귀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뺏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근거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신 분이거든요.

마귀가 인간을 지배했던 모든 완력, 손에 쥐는 그 완력에서 유일하게 홀로 빠져나오셨기 때문에 그 빠져나오셨던 능력이 자기 백성에게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 마귀도 그 사람을 쥐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걸 마스터 키라고 이야기합니다. 뭐를 열어도 다 열리게 되어 있어요. 막을 자가 없다는 거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막을 자가 없다.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어요. 달라고 하면 내놓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탈출에 성공한 분의 권세로 달라고 하기 때문에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어요. 마귀의 세력에서 주께서 탈출하면서 거기에 찢어진 구멍이 생겼거든요. 그 구멍 새로 주님의 바람(성령의 바람)이 휙휙 들어오니까 자기 백성은 그 구멍으로 가게 돼요.

 

그러면 내가 주의 백성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빠져나가면서 주께서 빠져나간 그 구멍만 크게 보인다면 주의 백성이고 구원받은 자기 자랑하면 주의 백성이 아니지요.

그런데 성도는 ‘내가 생각한 적이 없는 길인데, 내가 생각도 못한 그런 방식인데...? 나는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이거는 막 살아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세리, 창기도 관계 없고.. 일체 그러한 사회적인 지위고하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만 빠져나와서 주의 공로만 영광 돌리는 이런 길도 있었네.’라고 빠져나가면서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러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를 알려주는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압력을 가해요. 그러면 인간들은 그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성도답게 살기 위해서 온갖 나름대로의 몸부림을 칠 게 아니겠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해가지고 부적을 하든지 안 그러면 명동성당 가가지고 검은 사제 둘을 불러서 명동골목에서 무당 굿을 하든지 성경읽기, 쓰기, 새벽기도 나오기, 나름대로 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면 할수록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옵니까? 점점 더 강도가 심해지는 조건들이 제시됩니다. 전에 기도를 30분 했다면 이번에는 꿇어앉아서 30분 해야지, 전에는 본봉에서 십일조를 했다면 이번에는 보너스에서 십일조까지 해야지 어디서 니가 거짓말로 헌금을 해? 아나니아 삽비라 몰라? 헌금 속이다가 졸지에 하루아침에 사이좋게 죽은 부부..

또 성경에 보면 “거룩하라”고 나오지요,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나오지요, 온천지에 지킬 게 너무 많아요. 성경을 들추면 모조리 다 지켜야 돼요.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죠,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뭐 온갖 것을 하니까 그 “말씀을 준행하라”는 명령법 수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요. 마치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처럼.. 그리고 이미 그것에 성공했다는 그런 가짜 모델들도 찾아다니고,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 삼았다는 손양원 목사와 같은 모델도 생각해보면서.

그리고 그냥 교회만 한 것이 아니고 고아원을 만들어서 많은 전쟁고아를 살렸다는 한경직 목사의 경우도 생각해가면서, 죽기까지 신사참배하지 않았던 주기철 목사부터 해가지고.. 온갖 것을 다 해보는 겁니다.

 

그게 “자기 때”입니다. “주의 때”가 아니고 “자기 때”에요. 그래서 ‘“주의 때”가 되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가 주체로 살아있고 주체가 살아있으면 내가 내 방식으로, 내 행함으로 내가 구원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죄 아래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다.’라고 성경에서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보면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라고 한다면 “그의 때”를 기다리면 될 것 아니에요?”라고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뒤에 보면 “너희들은 죄 속에 갇혀 있다”라고 해요. 중립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의 때”가 아니면 조용한 게 아니고 그냥 죄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또 시달리는, 끊임없이 마귀의 테스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그런 가련한 신세로서 살아가고 있어요. 사실 가련할 것도 없어요. 둘이 단짝이 되었는데 뭘 가련해요.

21절에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찾다가 죽는 거에요. 백날 해봐야 찾지도 못하고 그냥 몸부림치다가 볼일 다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를 썼는데 죽는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죄를 유발하면서 계속 죄를 지으면서 그 죄 가운데서 죽는 겁니다. 자기가 행한 것을 인하여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까운 쪽으로 자기를 자기 행함으로 몰아세우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는 짓거리가 전부다 더욱 더 지옥으로 재촉시키는 행위들만 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겁니다. “주의 때”가 임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러면 “주의 때”가 임하면 그때부터 착하게 사는 겁니까? 아니요. 소급해서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죠. 한꺼번에 한방에 깨끗하게.

 

그러니까 이렇게 볼 때에 산다는 것은 그냥 중립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살려지는 삶이냐 아니면 죄 짓다가 지옥에 가느냐 달랑 두 종류의 삶밖에 없어요. 돈 벌면서 산다? 아닙니다. 죄 지으면서 사는 거에요.

이것이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주님의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때”란 뭐냐? “지옥으로 가는 시간의 나열이었다.”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예수님께서 이 얘기를 하시는 것은 누구를 지적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때”의 의미를 이야기하려면 필히 기존의 때를 설명할 수밖에 없고 지옥이라는 것은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 한 번 해봅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주님의 진리성은 죄 가운데 피어난다.” 주님의 주님됨은 죄하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죄 가운데서 비로소 올라오지요. 피어나는 겁니다. 똑같은 인간형을 가졌으면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주님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주님이 오지 않으면 그냥 더할 나위 없이 점잖고 고상하고 착하고 기본 양심들은 다 있는 사람들인데 주께서 침입한 순간 노선이 지옥이냐 천국이냐 딱 둘로 나뉘어져 버리죠.

고상하고 훌륭하고 인격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건 소급해서 전부다 죄 가운데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시고 난 뒤에 그때부터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그전부터 주님이 이미 인생으로 살아온 거죠. 소급해서 전부다 주의 은혜로 살아온 겁니다.

 

어떤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만났다면 그때부터 아버지가 아니라 그전부터 아버지였었지요. 그때는 아버지가 딴 동네에 살다가 이제사 나타난 거지요. 그래서 소급해서 내가 니가 없을 때부터 너의 아버지였고 이제 내가 아버지로서 너를 길렀다는 것이 그 뒤에 나오는 겁니다.

“내 때”에다가 “주님의 때”를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거에요. “주님의 때”가 오게 되면 “내 때”는 지워져 버립니다. 삭제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죠. 시간이 먼저 있고 그 시간이 확장되게 되면 이 공간이 되는 겁니다.

 

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산 위에서 하셨습니까 저 구름위에서 하셨습니까 어디서 했습니까?

그들이 있는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키가 얼만지 모르지만 눈높이가 비슷하다고 보여져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DNA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키가 고만고만 해요. 인물도 마리아를 닮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을 그들은 납득할 수 없죠. 왜? 같은 세상 바닦에 같이 서서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속한 세상은 어느 세상이냐 말이죠.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에 함께 있는데 네 세상이 따로 있고 내 세상이 따로 있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우리가 평소에 봤던 세상의 개념 자체가 잘못된 틀려먹은 개념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여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렇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고 세상을 둘로 모아져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과 “죄 속”에 있는 곳이 합쳐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둘로 분류가 되잖아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죄 속”에 있지요.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속한 곳은 “하나님의 의” 속에 있는 거에요. “죄”와 “의” 속에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이 바로 언약적 관점입니다. 언약이 오게 되면 축복하면 축복이 되고 저주하면 저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말씀하는 것이 세상을 잘못 사용했다는 뜻이에요. “니가 게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니가 세상을 알아?”라고 하는 것은 니가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저 인간들의 집합이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집어넣고 보는 세상인 반면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빼놓든지 아니면은 예수님을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해놓고 그걸 아울러서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여기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라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피조물입니까? 위에서 났으면? 내가 위에서 왔기 때문에 너희가 아래에 있다고 본 겁니다.

요한복음 3장을 한 번 봅시다.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3장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고 하였고 이왕 찾아본 것 (나는 찾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고..) 이것은 한 번 찾아봐야 돼요.

 

요한일서 4장 4~6절 누가 한 번 읽어주세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성경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너희는 주님께 속했고 우리는 세상에 속한 근거를 대라.”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미혹의 영을 받았으니까 세상에 속했고 우리는 진리(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미혹의 영을 받았다는 근거를 대라.” “너희는 세상에 속했다.” 이것은 제자리를 빙빙 도는 이야기죠. 그걸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몰라도 돼.”라는 뜻이에요. “왜 몰라야 됩니까?” 모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몰라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안 가면 되잖아.”라는 거에요.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모르게 한 거야.”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만 일방적으로 내가 넣어줄거야. 너는 오지 마.”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저쪽에서 듣는 사람이 “화난다. 당신을 죽이겠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죽여라. 그것이 바로 “내 때”다. “너희가 얼마나 죄에 속했으면 죄의 근원적인 본질, 메시야를 반드시 죽이라는 이 특명을 이제사 너희가 실시하는구나. 그래 죽여라. 너희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요한복음 10장)”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우리가 로봇이냐?”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너희가 로봇 근처에도 안 갔다. 너희가 죄에 속했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고 죄의 로봇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쪽에서 “그러면 우리는 왜 태어났습니까?” “죄 지으라고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죄 짓기 싫은데요?” “그러나 너희한테 그런 권한이 없다. 피조물이 자기 인생을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고.. 백화점에 쇼핑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난 대로 살아.”라고 해놓고 주께서 돌아서서 혼잣말로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책임을 누구한테 전가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 모든 것은 딱 하나에요.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꾸 이런 반발을 하는 이유가 아무도 없는 거에요. 아무도 없는데 자기는 특혜를 받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내가 골라서 예수를 선택하고 싶은 거에요. 사실은 그런 방식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보낸 자만 온다는 원칙을 준수하는데 인간은 “자 골라, 천국갈까 지옥갈까?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자꾸 골라잡으려고 한 거에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 때”지요. 그건 “주의 때”가 아니고 “자기 때”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때”가 침범하지 않으니까 역시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주체된 행세께나 하고 있는 겁니다. 그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일괄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나를 믿으라는 말도 아니고 “내 말 잘 알아듣지?”라고 묻는 말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퍼붓는 이야기에요. “나는 위에서 났고 너희는 아래서 났고” 뭘 알든지 말든지 너희들한테는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말씀대로 필히 실현시킨다는 것이죠. 필히.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주님이 하신 것은 다 옳았습니다.”라는 말을 이 말씀에 근거해서 고백하게 되죠. ““너희가 죄 가운데 죽으리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알고 보니까 이게 진실이었습니다.”하고 받아들이죠.

그러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아는 비밀을 그냥 보따리 풀어서 위에서 줄줄 붓는 거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줄줄 부어버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낸 자도 같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상당히 이상해 보이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그것은 당연한 조치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다시 돌아갈 길이 막힌 입장에서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죠.

꼼지락거리면 다 죄가 되고 뭘 해보려고 하는 것은 다 죄가 되니까 안 꼼짝거리면 된다고 하는데 인간은 살아있는 이상 꼼짝거리게 되어 있지 가만히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보면 이 땅에 있는 것은 “인간의 때”인데 “인간의 때”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죄에 속해서 죽어가고 있는 과정”, “죽음의 현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을 해요. 이게 죽 나오는데요 그 반박이 뭐냐? “우리가 죄 속에 있다는 근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죠. 합리적으로 맞잖아요.

 

내가 죄 속에 있다는 근거를 주님이 뭐라고 댑니까? “내가 죄라면 죄야.”가 그 근거에요. 이거는 조폭도 아니고 인격모독도 이런 인격모독이 없어요. 어떤 연극에 「관객모독」이라는 연극도 있다는데..

이거는 정말 인격을 묵사발내는 겁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왜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너는 아버지가 없거든.”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만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근거를 대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은 여기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8장 16~18절에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율법에 맞잖아?” 그러면 저쪽에서 “무슨 개떡같은 해석을 하고 있냐? 니가 그런 소리하면 나도 그런 소리하겠다. 나도 메시야다.”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판정은 어떻게 나느냐?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느냐의 판정이에요.

 

부활하면 이것이 다 맞는 이야기이고 그런 예수님을 보고 욕했던 모든 인간은 죄 속에 있는 것이 맞고,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나 그들이나 다 헛소리를 한 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서 그래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은 딴 영이 아닙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살고 죽고 하는 구원 문제가 내 손에서 떠나버렸어요.

 

이것은 내가 관리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관리하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에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나한테 맡겼겠지요. 내가 안 되는 일을 주께서 하신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건방지게 옛사람이 남아있어가지고 내 구원(일)에 내가 손을 대고 색칠을 하려고 하지요. 지가 뭘 안다고.. 꼭 아는 체하다가 티박맞아요. 주님한테..

 

주님은 음식 드시는 것을 좋아하실 거라고 해서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보니까 싸가지 없는 동생은 주님 발앞에 앉아가지고 말씀을 듣고 있더라 말이죠. “주님 저 싸가지를 좀 나무래주세요.”라고 했다고요.

“지금 니가 싸가지야.” 니가 원하는 내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너이어야 하는데 너는 지금 내가 뭘 원하는지를 모른다 이거에요. 김밥이나 떡볶이를 먹으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더 좋은 것을 하고 있다.”

 

그러면 마리아가 예수님이 더 좋은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본인도 몰랐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점수를 그렇게 매기는 거에요. 주님이 문제를 내도 인간은 그 문제가 무슨 문제인지 몰라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 점수를 매기는 것도 본인의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주신 점수가 내 점수에요. 100점이라면 그냥 100점인 줄 알면 돼요.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주체가 바뀌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활용하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체가 나의 주체를 밀어부쳐서 “나의 때”는 사라지고 “주의 때”로 흡수·통합시키는 겁니다. 그때에 동반해서 드러나는 사실은 “우리의 때”가 아니고 “지옥의 때”고 죄 속에 묻혀있던 그 시절인 것이 주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밝혀진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가 죄 속에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주님을 믿는다면 “맞습니다. 우리가 죄 속에 살고있습니다.” 하고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25절도 같은 취지입니다. 25~27절에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25절에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무슨 말을 했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누가 이야기했어요? 아버지가 이야기하신 거죠. 누구에 대해서? “너희 땅에 아들이 간다.”라고 구약 성경에 이야기하셨죠.

그러면 구약 성경의 해석이 어떻게 돼야 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자기를 일대일로 맞상대하는 거에요. 중간에 말씀을 집어넣고는..

 

“말씀 간다.” “예, 지키겠나이다.” 이것으로 끝났어요. “율법 간다.” “예, 잘 지켜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것으로 끝났어요. 중간에 없어요. 왜?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로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만 그들이 죄 속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주께서 율법을 줬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가림막이 없다고 본 겁니다. 내가 지키면 지키고 안 지키면 안 지키고 꼭 침례교 쪽이에요.

 

말씀을 내가 지키면 지키고 말씀을 내가 지켜서 선이 되고 안 지키면 악이 되고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훤히 막 통하는 모양이죠? 그러면 창세기에 쫓겨났다는 말이 뭡니까? 그냥 몸만 쫓겨난 줄 알아요?

세상의 원리와 모든 죄의 원리에 확고하게 지배를 당하면서 그들은 쫓겨나버려요. 독자적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고 통치할 악마까지 보태서 이 세상에 쫓겨난 거에요. 그래서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에요.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신의 통치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백날 모든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면서 허덕여봐야 악마의 힘에 눌려서 거기서 돌파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째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고 모든 인간이 다 실패하죠.

비록 에녹이 죽지 않고 살아서 가도 죄의 두께는 여전해요. 에녹이든 아브라함이든 불수레 타고 올라가던 엘리야든 누구든지 죄의 두께가 벗겨지지 않으면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주님과 이야기하죠. “주님 언제 죽으시는데요? 언제 죄 많은 내 대신 죽으실 겁니까?” “왜, 너 착하잖아?” “제가 뭐가 착합니까? 죄인이죠.” 엘리야는 불수레 타고 약각 재미있었지만 그게 구원이 아니잖아요.

불수레 탄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지요? 불수레 탄 것을 가지고 자랑질을 못하잖아요. 죽는 모습은 다 다르지만 구원은 한결같이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어요.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더니 “나도 한 번 타보고 싶다.”라고 하는데 “그럴려면 에버랜드 추운데 가서 혼자 타라.” 그걸 타서 뭘 할건데..

그걸 타서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걸 타서 구원이 되면은 엘리야가 메시야게요? 아무도 메시야가 아니에요. 메시야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보통 졸업식 할 때에 졸업생 가운데서 대표해서 상장 받고 대표해서 답사하는 사람이 있죠. “3년 동안 교육해주시고 인간되라고 훈계해주신 교장 선생님 이하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졸업가 부르면서 답사를 하지요.

그렇게 답사한 선지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구원될 수가 없다. 아무리 선지자노릇을 해도 구원될 수가 없다. 인간의 죄는 선지자 했다고 휘둘리는 그렇게 만만한 죄의 지층이 아니다. 오존층보다 더 심하다.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유일한 구멍, 유일한 탈출구는 주님이 뚫었지 예레미야가 뚫은 게 아닙니다. 다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이 뚫어놓은 그 구멍으로 아브라함도 통과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다한 천군 천사들도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이런 모든 신화같은, 만화같은, SF 영화같은 이야기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부터 모든 의미를 새롭게 출발해야 돼요. 내가 잘된다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면 바로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주의 것인 ‘나’가 되죠.

 

새롭게 배급받은 것이 돼요. 시레이션 비슷하게.. 언제? 매일같이 새롭게 내 인생을 배급받습니다. 이 말은 ‘나’라는 껍데기의 내용이 주께서 주신 숙제로써 계속 채워진다는 거에요. 또 하루는 이렇게 살아야 돼. 다음 날은 이렇게 살아야 돼. 주께서 사는 내용을 계속 채워주는 겁니다.

온 가족이 멀쩡하다가 갑자기 둘째 애가 아프다면 아픈 애를 간호해야 할 숙제를 유발하기 위해서 또 채워주시는 거에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얼마 전에. 야고보에 보면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그분의 질문이 이렇습니다.

 

주님이 평소에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기도해야 돼요? 상당히 노골적이고 솔직한 질문입니다. 주님이 기도하고 있는데 내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그러면 주님의 기도가 부실합니까? 내가 기도를 추가하게..

그래서 저는 답변했어요. 병든 사태가 일어날 때는 우리가 평소에 주님의 기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관심이 없이 살아왔다는 우리 자신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병든 사람이나 내가 병드는 경우가 발생되는 거에요.

 

“정신 차려라. 내 기도 덕분에 니가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아멘.” 하고 받아놓고 돌아서면 단지 정보가 되어 버려요. ‘주님은 또 오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나?’가 되어 버리고 실감이 안 나요.

또 답답증이 생기고 또 기도 안 하면 못 배길 일이 벌어질 때에 주께서 그냥 성경의 정보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난처한 상황, 당황스러운 사태가 일어나게 하시죠.

 

이런 일이 일어났다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일으켰다는 거에요.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항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과 내통하는 그 유일한 구멍에 주목하라고, 거기에 관심을 두면서 살라고..

그 관심에서 눈을 돌리면 모든 게 죄 또 다시 죄 속에 있는 생활의 반복이 되어 버려요. 어디 귀한 것 없나 좋은 것 없나 돈 벌 궁리 없나 내가 잘난 체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나 전부다 그런 거에요. 어디 성경읽기 대회 안 하나 우리교회에서? 대회하면 완전히 암기해가지고 할 건데 그래가지고 목걸이 하나 따면 뭐 합니까? 의미가 없는데..

 

우리가 무능력자가 되어야 됩니다. 능력이 있는 게 화근이에요. 오늘 제목을 화근이라고 할까? 좀 이상하지.. 무능력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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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b-이 근호 목사

자, 지금 우리가 8장에서 봤던 내용이 이겁니다. “아버지하고 내가 같이 있는 것을 너희는 모르는데 너희는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나를 못 알아본다.” 그 이야기를 지금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나중에 “때”가 되면 이 사실을 전부다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낸 자만 알고 나머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28~29절 봅시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라고 하니까 ‘아이고 예수님은 좋겠다. 주께서 함께 하시니까..’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성령을 받으면 우리도 이와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돼요.

어떻게?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가 상상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보통 사람이 되어 버려요. 특별하지 않아도 성도, 기적을 베풀지 않아도 충분히 성도, 그냥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삶을 살게 하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하죠. 성도는 무능한 사람이이에요. 성도가 유능해져버리면 그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하고 싸울 때에 무능했어요 유능했어요? 질문이 예리하다. 무능했습니다.

자기의 입으로 얘기했습니다. “이 싸움은 내게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준비할 것을 준비하고 난리났지요 물맷돌 들고 설치고 이겨놓고 칼로 자르고..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일을 하실 때에 남들 보기에는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사자(나)는 “나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내 계획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보는 사람과 다윗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 경우입니다. 성령이 와야 돼요. 그러면 왜 성령이 오면 될 것을 미리 당겨서 알려 주지를 않느냐 그때까지는 아직 인간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야 돼요. 아직 “주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면서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야 돼요.

 

그 죄인이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주장이 살아있습니다. 자기 판단이 있고 자기 선택의지가 살아있고 그런 거죠. 내가 알아서 예수님을 분석해서 믿을 사람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해보겠다는 거에요. 그런 식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긴긴 말씀은 ‘너희는 나를 모른다.’는 거에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이 말씀을 함으로써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졸지에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면 그들이 말한 “여호와”는 뭐냐? 누가 상상해왔습니까? 마귀가 가짜로 여호와를 믿게 한 겁니다. 죄 속에 있는 자는 나올 것이 죄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상하든 삼위일체를 상상하든 예수를 상상하든 그것은 전부다 조작되고 날조된 것이고 마귀가 집어넣어 준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단정하느냐? 처음부터,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주님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어도 좋아요. 분석해서 죄인을 깨닫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을 보게 되면 한꺼번에 내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럴 경우에 내가 내뱉고 있는 모든 것이 죄에 바탕을 둔, 죄의 결과물로 나왔다는 것을 자기가 고백하게 되지요.

내가 무엇을 행하고 안 함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나를 대신 희생하심으로써 구원이 되는 거죠. 따라서 대신 희생이 나에게 침입을 한 이상은 내가 스스로 납득이 되고 내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대신 희생에다가 양보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여호와, 예수님, 신)이 저기에 계시다면 이 중간에 십자가 사태가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내가 이것을 경유하되 슬쩍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졸지에 여기(십자가)에 들어가면서 “죄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까지 인도하는 것은 주님이 인도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처음부터 봤던 이 모든 것은 가짜가 되고 주님만이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 인도하는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이름(주님의 공로)으로 비로소 아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신 아버지가 이제는 나의 아버지로 우리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 의인이고 나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천국 간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입니까?

“너는 뭐 해서 천국 가느냐?”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 좀 이런 자랑질 좀 하세요.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면 소풍 가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사람이 있어요. 얄밉지요. “너는 소풍 가는데 김밥도 없고 사과표 사이다도 없고 말표 사이다도 없고 삶은 계란도 없고 물고구마도 없고 뭐야?” 아무것도 안 가지고 그냥 오는 거에요.

 

“너는 뭔데 아무것도 안 가져와?” “3학년 2반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엄마)거든. 나 거기에서 먹을거야.” 신났어.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거에요. 바리바리 싸는 게 아니고.. 그걸 가지고 32절에 “자유”라고 합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기대(예상)했던 “자유”가 아니고 예수님만 누리던 “자유”를 우리가 공유하게 돼요.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그냥 우리에게 쳐들어온 게 아니고 죄를 경유하거든요. 예수님이 죄를 경유해요.

 

그러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못 벗어났는데 함께 죄 속에 들어오신 분에 의해서 드디어 탈출 구멍이 발생되었잖아요. 그 구멍을 가지고 “자유”라고 합니다. 숨통이 틔인다는 거에요. 후~ 비로소 뭔가 봉창 너머의 맑은 공기가 들어온 기분이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영생을 얻게 된 그 영생의 기운, 영생의 그 바람으로 비로소 호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를 맛보게 되면서 교제가 되지요. 반드시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내가 살았다.”가 되어야 됩니다.

 

그냥 내가 산 것은 내가 기대한 하나님을 사귄다는 것인데 그것은 가짜고 날조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님을 사귄다는 것은 내가 몰랐던 아버지가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로움으로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뒤로 밀려버리고 그 밀려버린 빈 자리에 주님(예수님)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새롭게 그 공간을 자꾸 채우는 겁니다. 그렇게 된 것 중에 하나를 아까 사도행전에서 했지요.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오직 친히 주시는 자다.” 그것도 하나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그 사실을 알기 전에 구약을 보면 “바쳐라. 양 바쳐라. 안식일 지켰냐 안 지켰냐, 안식일날 나무했냐 안 했냐”라고 하는데 안식일에 나무해도 구원 받게 되었는데요?

이제는 안식일에 나무해도 구원 받아요. 십일조 안 해도 구원 받아요. 이런 배짱이 어디 있어요? 창녀도 구원 받는데요? 살인자도 구원 받아요. 네가 이 땅에서 무얼 했느냐를 일체 묻지를 않아요. 왜? 친히 주시는 분이시고 영생까지 주셨으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아버지는 오직 예수님만 알고 계시다.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 아까 긴 이야기의 내용이었고 그 예수님이 혼자 잘난 체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죄인 속에 들어와 버렸지요.

그러면 죄인의 세계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지가 발생된 겁니다. 그렇다면 그 자유케 된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만 알고 있던 그 아버지의 내용이 그들에게도 같이 공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를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일은 예수님 선에서 끝나버려요. 우리가 추가적으로 해야 될 일이 없어요. 흔히 학교에서 그런 경우가 있는데요.

담임선생님이 화가 났어요. “너희들 떠드는 소리가 교무실에까지 다 들렸어. 내가 조용하라고 했지? 전부다 꿇어앉아. 그리고 반장 너 나와. 손바닥 대.” 그리고 10대를 때립니다. 그러면 다른 애들은 상상을 하죠.

 

‘반장이 열 대.. 그러면 우리도 열 대..’라고 생각했는데 “반장이 대신 맞았으니까 끝.” 하고 가버리실 때, 선생님의 일은 어디에서 스톱이 된 거에요? 반장으로 스톱이 된 거에요. 그게 대신 매 맞으심, 채찍 맞으심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채찍 맞으심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채찍 맞으심으로” 그 뒤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우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우리가 나음을 입은 거에요.

 

그러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채찍 맞는 것이 단독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해서 맞은 것으로 나중에 아버지의 생각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이니까 내 쪽에서 아버지를 위해서 할 게 아무것도 (일체 모든 것이 말끔하게 날라가 버리고 소지가 되어서) 없어요. 하지 않아도 돼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은 주님이 회수해서 대신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명령을 하는 겁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는 것은 “네가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예수님)가 이걸 다 이루어서 너희에게 이룬 것을 선물로 줄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사람으로 쳐주는 겁니다. 모든 일은 스톱이 되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됩니까? 아니, 날마다 죽었다가 깨어나야 돼요. 해지도록 분을 품었기 때문에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주님 덕분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죽었다가 깨어나고 죽었다가 깨어나고.. 모든 것(말씀)이. 그것을 사도바울은 (죽었다가 깨어나는 것이 너무 번잡하잖아요.) 아예 내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펌프질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펌프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저 아래쪽에 있는 물이 올라오지요.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구원 받은 내가 나타나면서 주님이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더 해봐야 이해가 안 되겠다.)

32절에 봅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지요. “진리를 알찌니”라는 말은 마치 명령처럼 들려요. 진리를 아는 사람에 한해서 자유케 된다는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그 조건은 누가 가져온다는 거에요? 조건을 우리한테 부여해도 하나님께서 인간하고는 상대를 안 해요. 오직 우리의 대표자이신 예수님만 상종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을 대표해서 주님이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물을 그냥 받을 뿐이에요. “자유”.

이게 바로 출애굽기에 모세가 개입한 이유입니다. 모세만이 여호와를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런데 그래서 출애굽 실패했습니까? 모세를 보고 성공했잖아요. 그게 “모세언약”이잖아요. 모세를 보고 성공한 거에요.

 

그 산 밑에 있는 사람들 다 죽여야 되는데 모세를 보고 하나님이 살려주지요. 33절에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이니까 좀 여러분이 힘들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경 해석할 때 늘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성경 해석을 할 때 반드시 유대인 쪽에 서서 성경을 다시 봐야 됩니다.”라고 했지요.

 

바리새인이 나오면 우리가 바리새인 쪽에 서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쳐야 될 경로가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도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도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으면 안 돼요. 같은 족속이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이런 언급을 할 때는 이게 다 필요없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주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꿀떡 같을 때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시원하게 대신 주님 앞에 대들고 있는 겁니다. (우리 속에서 대들고 싶을 때, 매는 그들이 맞지만..)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고 했는데 근거가 뭡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저주가 오지 않고 그 자체가 복이 된다고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약속을 스스로 폐기할 리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비록 압제 받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에 매여지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축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은 우리의 축복권 밑에 예속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 중에 주인 되는 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계속 투입이 되게 되면 아브라함 내부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가정에서 저주가 아브라함 말고 다른 민족이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하고요, 아비멜렉 같은 경우에 그랬잖아요.

 

사라를 건드리다가 그 집안이 어떻게 됐습니까? 전부다 불임 여성이 되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해주니까 다시 불임이 풀렸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다른 민족이 저주 받는 것은 당연한 거에요.

그런데 아브라함 가정 내에 과연 저주가 없느냐 하는 겁니다. 노아 가정이 구원 받았잖아요. 그러면 노아 가정에는 저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함과 가나안이 그렇잖아요. 그 사람들이 노아의 식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공식을 만들 수 있어요. ‘언약이 투입되면 새로운 저주가 생긴다.’ 이렇게 공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가? 지금은 언약이 완료되었잖아요. 지금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안 믿으면 저주를 받고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이 확정이 된 상태에요.

그러면 지금에 와서 우리의 행동 여지나 여러 가지 생활 태도, 우리의 습관, 우리의 재산 상태, 인물을 일체 보지 않습니다. 특히 인물을 보지 않고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지요? 일체 그런 것을 보지를 않고 기준이 이미 확정 되었어요.

 

주께서는 아무것도 안 받는다 이 말이죠. 오늘 이것을 꼭 기억하세요. ‘모든 것은 예수님 선에서 마감되었다.’ 이것이 새 언약의 특징이에요. 그러나 그전까지는 왜 우리한테 의논을 안 하고 우리와 협상을 안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십자가까지 계속 이끌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만하면 우리가 남은 자지요?” 하면 그 남은 자 속에 또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어 버리고 그러면 그것도 균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남은 자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설마 구원 받겠지요?” 그것도 깨버려요.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도다”

 

심지어 이렇게 한다구요. “아담의 자손이냐? 다 지금 죄의 종이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없어요. 죄인밖에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모두 다 죄인뿐이에요.

그러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오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죄인이라고 확정짓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이 죄인이 죄인값을 하네..?

 

‘아, 잘만 하면 복 받는다 이거지요?’라고 지가 지 맘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아직도 자기 가능성을 거기에다가 부여하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이유)은 죄인이 없게 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준 이유는 뭡니까?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산 것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십자가 안에 머물러 있어야 되지, 십자가에 있다가 거기에서 기어나오면 안 됩니다. “자, 십자가 알았으니까 바르게 살자. 바르게 삽시다.” 이러면 안 돼요. 십자가로 살면 죽이는 건데 이 사람이 덜 죽었어요.

 

그 말은 십자가가 가짜였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가짜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교인들마다 안 죽고 살아있었어요. 살아있다가 기어나오는 거에요.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지렁이가 밟으면 꿈틀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대로 안 밟아서 그래요. 꽉 밟았으면 돌연사해서 죽을 건데 덜 밟아서 꿈틀꿈틀 하는 거에요. 확 밟아줘야 돼요. 십자가로 확 밟아줘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토”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환경조성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지붕으로 덮친 겁니다.

 

그래서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것이 구약 때는 성립되어요. 구약 때는 언약이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가나안 땅에 오더라도 다시 바벨론 땅으로 포로 잡혀갑니다.

따라서 구약에는 출애굽의 언급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애굽에서의 구원과 바베론에서의 탈출, 두 개의 출애굽이 있는데 둘 다 실패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한 번 매맞는다고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이 때린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박한다고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기만 더 늘어날 뿐이죠. 후 삼년 반 동안 직사하게 고생해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요. 그것은 소수의 휴거를 믿는 소설이지 그런 거 없어요. 오기만 더 나지요. 바락바락만 더 심하게 될 뿐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와서 덮치기 때문에 성도의 특징은 역시 갇혀있다는 거에요. 그 “자유” 안에 갇혀있는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고 “죄” 아래 갇혀 있는 사람을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율법의 종”을 말하고 “저주의 종”이 됩니다.

 

그런데 “아들”은 원형이 있어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렸던 영화를 같이 누리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미스코리아라면, 그 드레스를 우리도 같이 맞춰 입습니다. 예수님이 미스코리아라서 머리를 높다랗게 했다면 우리도 같이 머리를 높다랗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렸던 영화를 우리도 같이 누리는 겁니다. 그렇게 격이 맞아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영광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거에요. 거지가 구원 받기 위해서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이것은 응용문제인데..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그냥 구원 받았지요. 거지여서 구원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구원 받은 거에요. 그러면 부자는 왜 지옥에 갑니까? 그냥 지옥에 간 거에요. 그게 “자유”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이것은 우리는 의논할 상대가 아니고 어르신들, 예수님과 아버지가 의논하지 우리가 그 의논에 눈치없이 끼어들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돼요.

쑥덕쑥덕 알아서 다 건져주십니다. 그게 믿어진다는 거에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나의 미래로 확정되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을 가지고 “약속을 믿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이미 내 운명은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되었다는 것이 믿어지면 구태여 내가 애써서 꾸려갈 내 인생을 따로 마련할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요. 얼마나 귀찮은 일이에요. 할 필요가 없잖아요.

복음 전도는 다른 게 아니에요. 편하게 사는 모습을 그대로 공개하는 게 전도지요. 인간이 자유롭게 사는 것. “아들”이라는 말은 내가 “아들”된다는 것이 아니고 “아들”과 함께 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양자”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함께 있는 분이 “아들”이라는 것은 보통 빽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종은 함께 있을 것이 없어요. 그냥 저주의 종이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의 사항을 충실하게 순종해야 되는데 그것을 순종해봐야 순종은 되지도 않고 저주만 일어날 뿐이죠. “율법의 종”

그래서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는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율법은 행하면 지옥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성도에게는 율법이 없어요. 성도에게는 율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을 예수님이 가져가가지고 전부다 그것을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주시죠. “다 이루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 “왜요?” “다 이루었거든” “술 먹지 마라”“왜요?” “다 이루었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새사람을 입으라” “왜요?” “다 이루었거든” 그런데 우리한테는 “새사람을 입으라”는 명령과 “다 이루었다”는 명령이 충돌되는 것처럼 느껴졌잖아요?

우리 쪽에서 새사람을 입으려고 하도록 주께서 동기부여한 것처럼 오해가 되지요? “새사람이니까 바르게 살으란 말이야.” 이렇게 해석하고픈 마음이 꿀떡 같지요. 그게 아니고 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새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행동을 다시한 번 보게 하는 겁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주께서 원하시는 그 새사람에 일치되지 않지요. ‘술을 끊었는데 그게 새사람인가?’ ‘일찍 퇴근하는 것도 새사람인가?’ ‘퇴근 시간이 6시인데 6시 반까지는 봐주는가?’ 지가 맘대로 새로운 법들을, 세칙들을 만들어 내요.

말은 안 해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는지 모르거든요. 징크스와 비슷한 거에요. ‘오늘 시험 잘 봐야 되는데 저 세 번째 오는 전봇대를 ‘탁’ 치고 가면 오늘 재수가 좋을 거다.’ 이런 징크스를 본인이 만들어 내요.

 

선악과를 폼으로 따먹은 것이 아니거든요. 축구할 때 머리를 안 감는다든지, 아침에 공짜 손님이 오면 재수가 없다든지, 가게 문을 열 때 고양이가 먼저 야옹하고 달려들면 오늘 망했다든지 그런 징크스를 계속 만들어 내요.

그런 징크스를 없앤다고 할지라도 평생 버릇이 내 몸은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평생을 다하도록 우리는 내가 구원이 되기 위한 조치를 뭔가 내가 벌리게 됩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자유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에게 “주의 때”를 심어주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내가 죄인이 맞군요.’ 하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 맞군요.’ 어쨌든 이겁니다. 내 죄에서의 구원은 내가 추가해서 손 댈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손 댈 것이 없으니까 그게 짜증이 나가지고 계속 내가 나한테 손을 대잖아요. 손 댈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 버릇, 평소 생각하고 엄청나게 달라서 실감이 안 나니까 자꾸 뭔가 테스트, 내가 내 능력에 대해서 테스트 해보는 거에요.

 

‘기도를 한 시간 동안 하게 되면 애 성적이 올라가겠습니까?’ 자꾸 테스트 해보는 거에요. 그게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어떤 것도 내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운명을 바꾸지 않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종이 되지 마라 왜냐하면 너는 내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종이라고 도외시하지 않겠다. 너를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겠다.” 아들만이 자유케 되는 겁니다.

 

34-3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종에서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종은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겁니다. 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자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는데 그러면 주체가 바뀌어야 되죠.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관리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가 뭘 기대합니까? 주께서 나를 아들로 만들기를 기대하겠지요? 그 기대가 ‘꽝’입니다. 그 기대성이 죄에서 나오기 때문에 안 돼요.

아들이 우리를 자유케 하든 말든 그것은 아들 소관이지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떻게 부탁하면 종을 아들이 되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백날 해도 어떤 사람은 두 시간 반 했다. 어떤 사람은 세 시간 했다. 어떤 사람은 소나무 뿌리를 뽑았다. 갖가지 이론들, 세칙들이 나와요.

 

종인데 아들이 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거들이라는 갖가지 유언비어라든지 건강상담 비슷한 이론들이 나옵니다. 해독주스를 마셔서 아들이 되었다든지 온갖 것들이 막 나와요. 다 거짓말입니다.

진짜 아들이 된 사람은 그냥 주께서 아들이 되게 해서 100% 아들이 되었을 뿐이지 내가 거든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자기는 그때 뭐했습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갔죠. 그런데 기대했습니까? 갑자기 주님이 쳐들어오기를 기대했습니까? “주의 때”가 침입한 겁니다. “주의 때”는 완료의 때입니다. “인간의 때”는 미완성이지만 완료가 쳐들어오니까 미완성은 쑥 들어가버린 거에요.

아무것도 하지를 않았는데 이미 구원 받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어떻게 나를 굴리든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왜? 주의 일이 시작되었으니까, 내가 뭘 해도 주의 일이 되니까 이래서는 됩니다. 안 됩니다. 내 쪽에서 권리를 주장할 입장이 못 되지요.

 

앞으로 뭘 할지도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이 계획 잡아서 하는 수고가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사노라” 날마다 주께서 일거리를 주시는 대로 살면 되지요. 잠잘 때도 주의 일이고 깨어날 때도 주의 일이고 콩나물 다듬는 것도 주의 일이고..

나중에는 주의 일이 아닌 것이 없지요. 그게 아들이 우리를 자유케 했던 결과물로 우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어요?” “주님이 알아서 했는데요” “주님이 어디 계시는데요?” “내가 변한 것 봐도 모르겠어요?”

 

주님이 보여줘야 봐서 믿으려고 했던 그게 바로 내 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봐서 믿어지는 것이 안 봐도 믿어지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 종에서 아들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주님께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그 아들이 종의 사람을 구원해버리면 그 구원 받은 사람이 “죄의 종이었습니다.” 하고 고백을 터뜨리면서 아들의 품속으로 다 뛰쳐오는 거지요.

 

“나 저사람 보는 것이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해서 구원 받았다는 저 모습이 죄인데, 저게 죄의 종인데.. 헌금을 할 때는 종이가 얼마나 빳빳해야 되고 몇 년도 화폐 이상이어야 되고 다리미질은 얼마나 해야 되고.. 그래야 되거든요.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을 봉양하는데 밑반찬을 천 가지를 해서 암에 걸린 남편을 봉양했어요. 그게 TV에 나왔는데 그 남편이 옛날에 체육 교사였는데 아파서 그만 두고 아내가 돈을 벌어가면서 남편을 봉양했거든요.

 

그 방송을 보는 순간 ‘나도 남편한테 착실한 아내였다.’는 사람들의 입이 다 들어가 버린 거에요. ‘밑반찬 천 가지를 어떻게 해?’ 멀쩡해도 꼴보기 싫은데 간암까지 걸리면 빨리 이혼소속 밟아가지고 도장 찍고 도망치기 바빠요.

‘계속 너한테 매이기가 내가 너무 억울한 청춘이다.’이래가지고 다 헤어지기 마련이거든요. 아내가 그렇게 안 헤어져도 친정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아요. “야야, 아직까지 같이 사나? 빨리 헤어져라. 밥 먹는 것은 내가 먹여줄게. 결혼했다고 안 헤어지는 법 없다. 내가 있잖아.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그 나이에 너 활동할 수 있다. 한 남자한테 매여가지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니가 무슨 순정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빨리 빠져나와라. 그 지옥 같은 데서. 내가 먹여살려 줄게.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줄까? 요새 총각도 많은데 애 있어도 괜찮아. 애기 셋 데리고 시집갔다더라.”

 

순종이 소용이 없어요. 도대체 착한 사람의 기준 자체가 도토리 기재기해가지고 결정이 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무리 착해도 더 착한 사람이 등장해버리면 나는 거기에서 “졌다.” 하고 물러가야 돼요.

여러분 동계 올림픽 할 때에 스피드 스케이팅 보세요. 잘 못 뛰는 사람들이 처음에 뛰지요. 그러면 순위가 나옵니다. ‘37초 2’ 하면서 1등이 돼요. 그러면 다 알지요. 그 다음에 점점 더 물러가서 15등까지 내려가고 마지막 남은 조가 1, 2등을 결정해버려요.

 

마지막에 오신 때가 “주님의 때”에요. 최후에 남은 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어디서 그 앞에서 의인인 척을 하려고 해요? 죄 속에 있으면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이들은 아들로 마감이 되고 아들과 우리 사이에는 성령이 와서 그냥 주는 법이에요. 손을 내민다고 받는 법이 아니고 재롱을 부린다고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해야 되기에, 아버지하고 약속이 된 바가 있기 때문에, 창세 전에 예정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쳐들어 와서 구원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요?” 할 필요가 없어요. 저 사람이 예정되지 않았으면 그냥 놔두고 가는 거에요. 자기가 걱정하면 안 돼요. 괜히 순정파도 아니면서 구원 받기 미안해가지고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

우리만 구원 받으면 돼요. 남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기주의인가? 그렇다. 주님이 이기주의구나. 우리는 주님이 매몰차게 한다고 해서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구원은 당황스러워야 됩니다. 너무 놀래서 당황스러워야 돼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가 되어야 돼요. 그것도 매일같이 그래야 돼요. ‘세상에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이번 주는 내가 죽었지 싶으다. 벌 받지 싶으다.’ 한 주일 다가도록 벌은 커녕 일만 잘 풀리네..

‘주여 일만 잘 풀립니다.’ “니가 ‘잘 풀렸다 못 풀렸다.’ 하는 것은 어느 기준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옛날에 죄의 종이었을 때 그 버릇이 남아있구나. 나는 니가 잘 하고 못 하고 관계없이 나는 예수님한테 얘기했지 니가 잘 하고 까불고 있는 그런 것 보지도 않아.‘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스럽지요. 나 혼자 뒷짐졌구나. 나 혼자 고민하다가 나 혼자 절망하다가 나 혼자 좋았다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좋았다가 웃었다가 자기 혼자 발작을 일으킨 거에요.

주께서 아예 보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보고 있는 양 여겼던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관찰하는 것은 죄를 더 짓게 하기(끄집어 내기) 위한 관찰밖에 없어요. 왜?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를 통해서 아들을 귀한 아들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더 착하다고 쓰레기가 덜 쓰레기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봅시다.

 

39~40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냥 주께서 혈통을 주장한다고 하면 되는데 더 알기 쉽게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을 오해했어요.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브라함아 당신만 순종할 줄 압니까? 우리도 순종할 줄 압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우리는 한 패 먹었습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너희들이 생각한 것처럼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아브라함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니죠. 아브라함은 그들의 행위의 모델 케이스가 아니라 죄인인데 구원 받은 모델 케이스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헤 주시는 당사자가 지금 유대인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결부를 시키려면 아브라함을 제대로 알고 결부시켜야 되는데 잘못된 아브라함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해야 돼요?

 

아브라함의 죄인된 그 자리로 그들을 데리고 가야 되겠지요. 그렇죠? 그 자리는 ‘행함’의 자리입니다.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행위가 되고 그 행위가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게 목표다.’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했던 아브라함하고는 상관이 없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아브라함은 행위로써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의 아브라함다운 행위를 부여하신 거에요. 아브라함 때도 이미 주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관여를 해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동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관여를 해서 아브라함이 이런 행동을 하게 하셨다가 되야 되죠.

 

또 주체가 나오는 겁니다. 행위의 주체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함께 동행하신 주님을 소개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없이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려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그런 유대인의 자리에 함께 있어야 돼요.

우리의 옛사람의 습관이 뭐냐? 주님의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에요. 배우자끼리 부부사이에 남편이 잔소리를 하거나 아내가 잔소리를 할 때 우리는 모른 척을 합니까 지키려고 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모른 척하는 게 쉬워요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나름대로 성의를 표하지요. 그래야 나중에 뭐라고 했을 때에 당당할 수가 있잖아요. 그 당당함,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도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이스마엘 낳았다고 당당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아브라함을 우습게 만들지요.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이것은 자기의 모든 꿈을 무산시켜 버리는 겁니다.

 

바칠 때 아브라함은 알죠.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라 내 아들이 복의 근원인 것을 내가 착각했다.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은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을 마치 나로서 마감되는 줄로 알았지요.

내 아들이 복의 근원이고 그 아들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에요. 그 아들의 속의 아들이 복의 근원의 마감이고 그게 마감인 줄로 알았더니만 그 아들의 아들이 마감이고 결국 모든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따라서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 되죠.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 분이 오셨는데 그들은 그동안 주님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치면서 막 상대하면서 이렇게 결국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제발 나를 좀 죽여라.”는 거에요. 죽여야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는 거에요. “너희가 죄 속에서 나를 죽였구나. 그래 나는 죽으러 왔다. 너희 행위로 나를 죽여라. 그런데 너희가 나를 죽이는 그 행위마저도 내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반항하는 그것도 우리를 구원하는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우리는 구원 받으려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이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늘 화내고 늘 분노하고 주님한테 대들고 삐지고 ‘나 앞으로 한 달 동안 기도 안 해.’라고 하는데 ‘누가 하라고 했나?’ ‘나 헌금 안 해.’ ‘돈만 좋아하면서 억지로 내면서 좋아서 헌금 한 적 있나?’ 없잖아요.

우리는 맨날 나름대로의 투정을 부리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잘남의 투쟁을 하죠. 참 가련한 투쟁, 배고픈 일을 하는데 이것을 「헝거 게임」이라고 합니다. 배틀(투쟁)을 하는데 사느냐 죽느냐의 게임은 제가 부탁하는데 제발 그만 두세요.

 

그리고 내가 나를 죄인으로 자각하는가 안 그러면 나를 잘난, 의미 있는 존재로 자각하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냐 아니면 나는 소중한 인간이냐 그 게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무능한 자가 되어야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가 유능하게 되면 십자가를 훼방하고 갈라먹습니다. 뭘 해도 우리는 무능의 티를 내라고 그 일을 시킨 겁니다.

 

카메라 맡긴 것도 무능하라고 맡긴 것이고 강의하는 것도 무능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내가 행한 것으로 한 사람도 구원을 못 받은 것을 깨달으라고.. 네가 협조한 것이 전혀 네 구원에 협조가 되지 않았음을 기쁨으로 감사하라고 우리한테 자꾸 무슨 일들(사태)을 일으키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가 달려들어야 해결되는 것처럼 하게 하는 이유는 다시 숨겨놓은 우리의 죄를 바깥으로 구체화시키고 노골화시켜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이것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지요. 그 다음에 봅시다. 41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라고 하였는데 “너희 아비”는 누구냐 하면 44절에 “마귀(악마)”다 이 말이죠. 자,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악마”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로다”(41절)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확정되어 있지요.

 

아버지는 “여호와”고, 아들은 “이스라엘”이고.. 더 뚫고 들어갈 빈 틈이 없어요. 확정되어 있는 교리이고 신학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고 하니까 그게 죄가 된다”고 하셨고 그러니까 그들이 “왜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그게 죄냐?”

“내 아버지만이 아버지인데 내가 알기로는 내 아버지하고 네 아버지하고 다르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같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면 생각이 같아야 되는데 생각이 다르니까 아니, 생각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반대지요.

 

그러면 너희가 만든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를 반대하는 아버지니까 결국 마귀지요. 그러니까 마귀가 그런 논리로 증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논리로 하면 “악마가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가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악마”의 자리에다가 “하나님”을 넣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얘기하십니다. “누가 그렇게 얘기하던고?” “내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악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악마”고 예수님이 믿는 아버지만 “진짜 하나님”이고.. 따라서 내가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하되 그냥 예수님을 경유하면 안 되고 “내가 죽인 예수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내 근원적인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경유할 때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바로 내가 저기 있습니다.” 하면서 손들고 나갈 수가 있겠지요.

 

오늘 제목은 이렇게 정했습니다. “아버지”. 간단합니다. “참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버지”라고 하면 보는 사람 중에 하나는 “마귀”가 “아버지” 하든지 그것은 알아서 하시고 오늘 강의 제목은 “아버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기에 비로소 이제 부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만이 성령 받은 사람이오니 이제는 죄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성령 받은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