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8장 12절 / 일방적 구원 / 1511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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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8장 12절(가락-일방적 구원) 151119a-이 근호 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입니다. 12절 이전에 11절에 보면은 간음한 여인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는 말씀에서 ‘이 여인이 다시는 간음죄를 안 지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누구나 하게 되지요. 누구나 하게 돼요.
이 사람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예수님께 용서받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기 때문에 그 여인이 또 다시 간음죄나 다른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예수님의 용서도 무효로 돌아가 가지고 결국 천국 가는데 실패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것은 이 여인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본인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에요. 이 성경을 보는 본인들이 걱정이 되는 거에요.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어겨버리면 용서받은 것도 다 소용없고 무효가 되고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이 막 드는 거에요.
그러면 죄 짓지 마라는 그 말씀에 내가 순종을 한다면 순종하는 그 순간만큼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죄 용서 받았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려요. 그러면 죄 용서 했다는 것을 아예 없애버리고 “앞으로 니가 하는 것을 내가 두고 볼거야.” 이렇게 되어야지요.
죽을 때까지 아무 죄 없으면 천국 보내주고 또 죄 지으면 ‘너는 안 돼. 너는 아이고 안 되겠어.’라고 할 경우에 어떤 문제들이 있느냐 하면은 죄인지 아닌지를 본인이 결정해야 되잖아요. 죄 짓지 말라고 하실 때에 죄 짓지 말라고 하는 최종 판정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어야 되는데, ‘이것은 죄야. 짓지 말라는 죄를 내가 또 지었어.’라고 본인이 심판할 경우에 그 판단이 주님도 동의할 만한 생각이 같은 판단일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어떤 행동을 해놓고 쪼르륵 예수한테 가서 “예수님이 전에 죄 짓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내 행동은 죄 입니까 아닙니까” 또 물어야 돼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은 죄가 아니지.” “후, 살았다.” 그러면 다음에 또 봅시다. 이런 식으로 또 쪼르륵 와야 돼요.
차라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어떤 죄를 지어도 정죄하지 않는다.”로 끝났으면 아무 문제없이 깔끔하게 공사 마무리가 잘 될 건데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마라”고 하셨으니까 여기에 +가 된 거죠.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사함으로 완료가 되어야 되는데 +‘죄 지을거야, 말거야.’가 중간에 붙어버리면 이 죄용서하는 이것이 자칫하면 구원에 이것만으로 미흡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이 질문을 했지요. 그런데 그 답은 의외로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죄사함을 하신 분이 누구냐’는 그 다음 구절의 이야기입니다.
“나도 너를 용서하겠다” 하신 것은 누가 너를 죄 용서했는가를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12절 말씀에 의하면 빛이 되시는 분에 의해서 죄용서(죄사함)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은 죄용서 받는 순간에 빛 안에 포함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빛이 뭐냐? 간단한 예로 조명기구가 여기 있는데 이게 빛이잖아요. 카메라 찍을 때 비추잖아요. 이렇게 빛이 있잖아요. 빛이 이렇게 가로등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조명등 안의 빛이 죄용서를 해줘버리면 이 안에서 계속 용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에 그 여자의 문제는 간음한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곳에 살았던 것이 문제가 된 거에요. 왜냐하면 빛 전체가 비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함까지 포함해서 빛의 효과가 되는 겁니다. “다니지 아니하고”
‘껌을 씹으면 입 안에 있는 찌꺼기까지 없어진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껌을 씹으면 입 안에 찌꺼기가 없어지는 것 뿐만 아니고 입 안에 ‘화~’ 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잖아요. 이게 효과 아닙니까? 효과지요. 입에 입냄새 없애는 것, 가글을 한다든지 뭘 뿌리게 되면 그 효과를 보잖아요. 그렇다면 입은 가글액 안에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이 빛인 것을 아는 순간에 죄의 개념을 개인이 지을 수 있다는 개념에서 장소적, 영역적 개념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죄 지을 때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 짓고 싶어도 죄가 안 되는 상태로 주(빛)와 함께 있다. 내가 뭘 해도 빛 앞에 있다는 말은 혼자서 죄를 지었느냐 아니냐를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빛에서 벗어나면 죄가 되고 빛 안에 있으면 용서함이 계속 작용하는 지점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빛 안에서 벗어나면 죄가 되잖아요? 하는데 빛은 자기 백성을 용서하심을 쓸데없는 것으로 전화시키지 않아요. 효과를 제공하는 결과를 반드시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자식 낳았다는 사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너를 낳아서 클 때까지 계속 자식이잖아요. ‘나는 너를 낳기만 하고 낳았으니까 니가 알아서 해라.’가 아니고 낳은 이상 계속 자식으로 간주하고 살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계속 죄사함의 결과(자식)가 이 여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어두움에 거하지 아니하고’를 주님이 생산하는 거에요. 그 여인을 포함시켜서 생산하는 겁니다.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고.. 이 여인을 봐라. 이 여인이 그런 여인이야.” 라고 하는 겁니다. 왜? 빛이 빛이 되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은 여인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면 할 일은 끝나는 거에요.
어느 정도 빛이 위대하냐 하면은 다시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할 정도로 위대해요. 그렇다면 그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여인은 일방적으로 용서받은 겁니다. 그러면 그 여인은 자신의 옛날 안목이 아니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뀌어야 되겠지요. 새로운 관점으로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어두움에 다닐 수 없는 팔자가 된 거에요. 죄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어요.
자식이 어릴 때, 애가 초등학교 가도 엄마가 전화해서 “지금 어디 가있지? pc방에 가지마.” 늘 감시체제가 되어 있습니다. 걔가 어디 가도 친구집에 가도 이야기하고 가거나 전화해서, “엄마 여기 친구집인데 생일 잔치한다고 왔어.” “그래. 10시 이전에 들어와.”라고 하지요. 걔가 친구집에 가도 엄마 품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 그 엄마와 지식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자식이 전화해서 하는 말이 “엄마, 나 친구집에 와있거든.”이라고 하면 엄마가 하는 말이, “니가 누군데 나한테 전화해? 너 지금 누구한테 전화했어.” 이렇게 되어버리면 자식이 ‘나는 갑자기 고아가 되었구나.’ 라는 느낌이 들겠지요. 그런 부모는 아마 없을 거에요. 고아와 같이 놔두지 아니하고 데려가는 그 능력..
그러면 친구가 있다가 “너는 다 컸는데 왜 자꾸 엄마한테 전화 해?” 하게 되면 “나는 엄마의 자식이거든.”이라고 고백할 때 그게 관계가 유지되면서 죄가 아닌 게 되고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잘하고 못하고 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산다.”를 늘 누구 앞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고 자랑질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빛의 자녀입니다. 이게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이것은 바로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따라오려고 해도 따라올 수 없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는 낯선 어떤 관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개입이 된 겁니다. 아주 특이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뒤에 나옵니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오해를 더 크게 일으키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나 사람이 되었어.”라는 말은 듣는 사람한테 뭡니까? “나 원래 사람이 안 되어도 괜찮은데 사람이 되었어.”라는 그런 뉘앙스지요.
“내가 이 땅에 왔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희들처럼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일부러 왔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볼 때 너나 나나 같은 인간으로 보니까 너희들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를 못 한다.” 그게 바로 죄 안에 있는 겁니다.
간음한 여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유대인 입장에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이나 똑같은 거에요. 그런데 용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용서의 이유를 여인이 추적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여인으로서는 절망적인 것이 아니고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될 이유를 내 쪽에서는 추적이 불가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착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으면 ‘아, 착한 일했다고 복 주는구나.’ 이렇게 되는데 간음하다가 잡혔잖아요. 그런데 죄가 없어지니까 왜 죄가 없어지는지 이것이 희한한 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돼요. 최고의 성도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왜 저를 지옥에 안 보내십니까? 이유가 뭡니까?” 따져야 돼요. 따지고 물어야 돼요.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지옥에 안 갑니까?” 아마 그런 사람이 교회에 오면 교회에서 미쳤다고 할 건데.. 죽어서 천당가려고 다 사람들이 오는데..
교회에 어떤 낯선 사람이 등장해가지고 왜 지옥에 안 보내준다고 데모를 하니, 이게 얼마나 역발상이에요. 상상이 안 가잖아요. “아이, 재수 되게 없네. 내가 지옥 보고 싶었는데 지옥 구경도 못하게 하고 이게 무슨 짓이고..”
이런 소리를 한다는 말은 내가 구원받아야 될 이유는 애초부터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에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것은 나에게는 전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거에요. 그러니까 원초적으로 “내가 나 된 것은 내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내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요.
내 역사, 나의 스토리라는 것이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뒤돌아서 보게 되면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모든 것은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내 것도 아니고 니 것도 아닌) 사실 주님의 것,주님의 인생의 자기 증명입니다.
그것은 일전에 ‘사사기’할 때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라고 했죠. 하나님이 자기 증명으로 피조물을 만드신 거에요. 어제 했던 설교 들었던 사람은 알겁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입을 다물어야 됩니다. 의미, 목적을 아담이 묻는 게 아니에요. 아담은 그냥 지키면 돼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다스리고 그냥 지키기만 할 뿐이에요.
“왜 여기에 만드셨습니까?” 하고 아담은 묻지도 말아야 돼요. 문제는 마귀가 에덴에 갇혀있는 인간을 에덴으로부터 탈출하도록 유혹을 했다는 것, 이게 악마의 유혹이었어요. “언제까지 니가 묶여살래? 에덴 밖이 궁금하지 않느냐? 차고 나갈 수 있을 때 차고 나가자. 그래야 니가 에덴에 갇히지 않고 에덴을 바깥에서 보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갇혀있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인간은 처음 인간이 아니고 이미 악마가 우리 몸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한테 갇혀있는 것을 싫어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간섭받는 것입니다.
군대에 왜 가기 싫어합니까? 간섭받으니까. 군대가 음식이 나빠서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잠자리가 그런 게 아니라 자유가 없어요. 자유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어야 되느냐?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자유”라는 말은 앞에 뭐가 붙어요.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누구에 의한 자유”냐가 앞에 붙어 있는데 “나를 위한 자유”, “나에 의한 자유”라는 게 피조물에게는 필요가 없어요.
필요가 없는데 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한 분만 갖고 계시면 돼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만드시면 우리는 그 결과물로서 있으면 되지, 내 자유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12년 동안 귀신들려서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이 있었지요. 그 여인에게 사적인 자유가 필요할까요? 그 여인이 만약 개인적이 자유를 외쳤다면 예수님을 붙들고 따졌을 겁니다.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 고생해야 됩니까?”라고 해야 될텐데, 그 여인은 자기가 귀신 들린 것조차도 주님의 일방적인 자유로운 선택이고 결정이라고 믿은 거에요. 보통 믿음 아니지요.. 그러니까 특이한 믿음이죠.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을 이제 만났군요.”라고 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옷가를 만진 그 여인에게 “여인아 이제 니가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귀신 들리도록, 귀신한테 매여있는 것처럼 (남 보기에는 ) 보이지만, 주님이 의도적으로 귀신에게 매이도록 주님의 자유로운 조치가 나한테 덥쳤다는 겁니다.
귀신 덥친 것 위에 주님의 자유가 한꺼풀 더 덥친 거에요. 그래서 주께서 놓을 수가 있지요. 왜냐하면 “주의 뜻이라면 12년 동안 매인 귀신도 놓을 수 있는 것이 주님은 귀신보다 한 꺼풀 위에 계시기 때문에 당신만큼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이 12년 동안 있던 병(귀신)에서 놓임을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데리고 12제자들 보란듯이 한 겁니다. 12제자들은 처음부터 실패하기로 작정된 사람들인 거에요. 다만 12제자들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인데 12제자한테 이런 이방 여인, 또는 개 같은 여인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이 여인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개입해야 돼요. 예수님이 개입해야 이 여인처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개입에 있어서 제자들 자체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굴레를 벗을 수가 없어요. 이 뒤집어씌운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자기가 알아서 빼나올 수 없어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자유롭고 하는데요.
천국 가서도 바둑 두고 싶고, 천국 가서도 골프 치고 싶고.. 왜? 평소에 자기가 자유대로 했던 그 행세거든요. 천국 가서도 자기 딸이 잘 있는지 만나보고 싶고.. 나는 천국 가는데 성공했는데 아들 너도 천국 가는데 성공했으면 싶고.. 이런 거에요.
국제시장에서 흥남부두 빠져나가는데 누구 만납니까? 잃어버린 형제들 다시 만나고 엄마 만나고 하지요. 마치 이산가족 헤어졌다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다시 만나는 것처럼 이 땅에서 헤어졌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나봐야 그 천국은 누구의 세계입니까? 본인들의 세계잖아요. 그런 천국이 천국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죽음을 통과해야 되는데 이 죽음을 통과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죽음이 통과가 되지만 구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은 통과하는 곳이 아니고 막히는 곳이에요.
죽음을 통과하겠다고 나설 때 죽음 앞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소지품을 다 내놓아야 됩니다. 나의 체면, 나의 자유, 내가 구원받고 난 뒤에 생각되는 어떤 나의 상상까지 다 포기를 해야 돼요. ‘나 구원받고 난 뒤에 거기에서 골프쳐야지. 골프장 잘 되어있어요?’ 그런 것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돼요.
그것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놓는 과정이 “언약에 의해서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화가 난다. 주님 보시기에는 아직도 자존심이 있구나. 그 소지품 아직 안 내놓았네.. 딸이 공부를 못해서 뿔다구 난다. 아직도 너는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구나. 그것도 끄집어내고..
개척교회 하는데 교인 10명 왔는데 두 명밖에 안 남았다. 나 이렇게 못하겠습니다. 너 나한테 대드는구나. 너의 자아성이 아직도 남아있구나. 그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이죠. 그러면 나는 살 가치도 없잖아요. 그게 바로 니가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죽었다. 죽었다.’ 해놓고 불교 도 닦듯이 맨날 “나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백날 해봐야 그 “부족합니다.”가 누적이 되어 있어요. 그게 자기 의 덩어리가 된다니까요. 백날 부족해도 점점 더 커가는 것이 있어요. 마일리지. 마일리지 쌓아가지고 동네 중국집에서 탕수육 얻어먹을 겁니까? 쿠폰 모아가지고 통닭 한 마리 공짜로 더 얻어먹을 일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백날 해봐야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면 없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어두움의 고수, 그걸 쉽게 말해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니가 어두움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어두움을 장식하는 일부로서 가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담을 어떻게 하는가..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제 수요 설교하고 난 뒤에 (설교 끝나면 설교한 것을 제가 요약해가지고 A4용지 두 장으로 만들지요.) 제가 이런 것을 썼어요.
극단적 임계선에 집착하면서 선을 행해도 죄가 현장에 나타난다.(발생한다.) 이렇게 써놓았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선을 행하지요. 그 순간에 선과 접촉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임계점, 임계점이란 뭡니까?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가면 선이 되고 그것 안 넘어가면 선이 안 되고..’ 하는 그 극단적인 임계점을 찾아요.
그야말로 행동해놓고 뒤돌아설 때 군말없이 ‘이건 누가 봐도 선이다. 하나님이 봐도 이건 선이다.’라고 할 만한 것에 우리는 도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에요. 그 도전을 하는 이유는 내가 평소에 어느 정도로 선한 인간인 것을 스스로 시험치는 거에요. 중간고사 시험치고 기말고사 시험치고 늘 시험치는 거에요.
그러니까 시험치기 이전에 이미 본인을 선하기는 선한데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선함을 발휘하느냐 그걸 측정하고 싶어요. 그걸 극한까지, 극단적으로 끝까지 가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거기에 앞서가신 모델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손양원, 주기철, 테레사 수녀, 그리고 한경직 목사, 유명한 인사들을 모델로 삼아요. 모범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문둥이 있는 곳에 가서 자기는 문둥이가 된 천주교의 데미안 신부, 또는 ‘울지마 톰스’의 주인공으로 남수단에 가서 자기는 대장암에 걸려서 죽어가면서도 아이들에게 노래 가르쳐주고 했던 그 사람들..
이거는 내가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받은 사명 때문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결심으로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어디에 속하는 거에요? 이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어두움에 속한,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나을 수 없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바리새인보다 더 우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한평생 동안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수백년 동안 선배들이 선의 극단을 세칙으로 누적해놓았습니다.
이것을 수학에서는 미분이라고 하는데요 쪼개고 또 쪼개는 거에요.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킬 때 어떻게 지킵니까? 할 때 우리는 듬성듬성 하는데 이 듬성듬성을 더 세밀하게 쪼개요. 안식일날 노동, “불을 피우지 말라”는 무슨 뜻입니까? “불을 피우지 말라” 하면서 불을 피우지 않게 되는 조건을 더 세밀하게 가져가는 거에요.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킬 때 그 공경 방식에 대해서 온갖 수백년 동안 누적된 아이디어를 내가지고 그야말로 부모를 공경했다는 그 중요한 모델들이 랍비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랍비가 해석하는 그것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져요. 왜냐하면 랍비들이 자기 잘났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중간 매개체로 개입되기 때문에 그 선배들이 했던 그 훌륭한 매개체를 존중함으로써 결국 그것은 주님을 존중하는 하나의 경로(길)이 되기 때문에 그 경로마저 무시하고 바로 주님께 가는 수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감이 안 잡힙니까? “목사님은 왜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까?”라고 물으면 목사들이 뭐라고 해요?
“성경 본문에는 없지만 성경을 여러분들이 잘 지키기 위해서 제가 중간 다리를 놔주는 겁니다. 따라서 이 중간 다리라고 하는 이 취지를 순수하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 여러분 구원(복) 받으라고 하는 일인데 여러분은 성경에 없다고 저한테 시비를 겁니다. 제가 이렇게 십일조를 강조하고 하라 말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지만 여러분 잘 되라고..
제가 누굽니까? 양을 키우는 목자이지 않습니까? 주의 사자잖아요. 으르렁 사자.. (그 사자는 아니지만..) 주의 메신저인데 제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영혼을 걱정해서 사랑해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 제 말을 들어주는 것이 주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그 논리거든요. 그 논리가 천주교 논리입니다. 그것이 누적된 것이 교황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황 스스로 완전하다고 하지 않아요. 다만 그 자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이기 때문에 부족하지만 있는 거에요.
목사들도 같은 논리입니다. 목소리 깔고 “부족합니다.” 중저음 톤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내가 허점이 많지만 여러분들이 세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세운 자리이기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이 감당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제 말에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그걸 아마추어가 알겠어요? 프로가 되어야 이 수법을 알지. 이 수법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바리새인들의 수법이라는 것을 아마추어들이 알겠습니까? 신학을 해도 몰라요. 다 그런 줄 알고 하지요. 목사는 하나님이 친히 때리시고 교인이 목사보고 대드는 게 아니다. 대들다가 다리 부러지고 집안 망한 인간이 한둘이 아니라고 겁을 팍 주지요. 공포심 조성하면서..
완전히 북한의 김정은하고 똑같아요. 교인들도 아닌 줄은 알지만 찝찝한 것은 싫어가지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 나만 입 다물면 그만이지 내가 편하지 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저 주께서 하신다니까 나는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만 해줄 뿐이라고 하는데 본인 기도나 하지 목사 기도는 왜 합니까?
빛의 특징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빛에 다니시면 어두움이 보입니다. 이것이 빛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여러분이 빛에 속합니까? 그리고 교회에 다닙니까? 그러면 교회 자체가 어두움인 것을 새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곳이 어두움인데 이 사람들이 어두움을 신봉하는구나.’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게 돼요.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간음한 여인은 예수님한테 용서받았지 바리새인한테 (그 당시는 바리새인이 교회니까) 용서받은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기분이 되게 나쁜 게 예수님이 직접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지 말고 그 당시에 목회자가 있잖아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자기한테 가서 “그 간음한 여인 있지? 너희들이 가서 세례주어서 용서해줘라.” “알겠습니다.” 이러면 자기 위신도 살고 자기 권위가 정당화되고 좋은 게 좋은데 이건 칠 수도 없이 권위도 없이 직통으로 그 여인을 용서해버리니까 졸지에 층층이 있는 그 영적질서가 빵구가 난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가 결국은 너희들이 모여서 한 게 어두움의 궁전을 건설했다는 거에요. 빛이 없이 어두움의 궁전을 만들다가 보니까 거기는 다니기만 하면 빛이 되는 게 아니고 본인이 행한 여부에 따라서 빛이 되기도 하고 어두움이 되기도 하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죄를 안 짓고 살 거에요?
백날 착하게 살아도 한 순간에 뻥하고 가버리면 지옥 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평소의 버릇이 14시 25분이 되면 이상하게 착한 일을 많이 해요. 그런데 17시 26분,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술 먹고 들어오거나 늦게 오면 기분이 나빠요.
그런데 주께서 재림할 때 14시 26분에 오시면 참 좋겠는데 꼭 남편 퇴근할 때 주님이 구름타고 같이 재림해 버려요. 죄 안 짓다가 죄 짓는 순간에 와버리면 내가 착하게 했던 이 행동, 고귀하게 했던 행동 있잖아요. 홈드레스 입고 우아하게 커피 마시던 이 시간이 날라가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주님 생각했던 그 시간.. 주님 백날 생각하면 뭐 합니까? 퇴근할 때 성질나면 또 성질내는데.. 그러면 주께서 골라잡아야 돼요. “야, 성질내는 니가 니가, 홈드레스 입고 우아하게 커피 마시는 니가 니가?” 하고 물으면 우리는 “저쪽이 나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려고..?
도대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어떤 경우를 자기 모델로 삼습니까? 퍽퍽 성질날 때가 자기 모델입니까? 아니면 사랑을 그냥 베풀고 찬송하면서 눈물나던 그게 나의 진면목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학교 다닐 때는 시험시간이 따로 있잖아요. 주님의 감시카메라는 시도 때도 없어요. 새벽 2시 잠잘 때까지 감시카메라를 가동하고 있으니까.. 꿈속에서 개판칠지 꿈 깨고 나쁜 짓할지 어떻게 압니까?
간음한 여인에게 바리새인들을 1차로 만나게 해준 것은 착하고 착하지 않고를 떠나서 언어(율법 아래)에 속해버리면 이유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저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한번 봅시다.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는데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는 이 말을 딱 듣고 ‘나는 율법 행위에 안 속하면 되지.’라고 할 수 있죠.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라는 영역 아래에 있어서 거기에서 못 빠져 나오니까 율법의 행위에 속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모든 감시체제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육으로 태어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 밑에서 태어난 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율법의 주시와 율법의 처벌의 대상으로 태어난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그런 거에요. 양심이라는 게. 둘 다 아담이거든요.
아담은 죄 지을 때부터 이미 죄(저주) 아래 있어요. 그런데 모양새가 하나는 율법없이 저주 받는 쪽이고 한 쪽은 율법이 있고 저주 받는 쪽이고 어쨌든 저쨋든 간에 저주 받는 사실에서는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 마찬가지입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썼거든요. 그 책이 나오니까 그 당시 기독교계에서 하는 말이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인가?’ 이렇게 대꾸(공격)를 했어요. 그러니까 다윈이 책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가 아니고 인간과 원숭이 둘 다 같은 조상이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의 조상이 같아요. 둘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데에서 같은데 다른 점이 있다면 쉽게 말해서 한 쪽은 율법을 받은 적이 없고 한 쪽은 율법을 받은 적이 있는 쪽이에요. 율법을 받고 저주 받아 죽으나 안 받고 저주 받아 죽으나 소급해보면 둘 다 저주아래 있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왜 저주를 받는가? 죄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가? 누가 저주하는데? 이미 감시체제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은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육체 아래 있다는 겁니다. 몸 안에 있다는 겁니다.
몸이 있냐 없냐? 몸이 있지? 몸이 있다면 그 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 몸은 주인이 따로 있고 그 몸을 제대로 사용 못한 것에 대해서 책임추궁이 들어오는데 그 책임추궁이 뭐냐? 몸이 흙이 되면서 그 죄를 죄로 전부다 발현시키는 거에요.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몸을 가지고 율법대로 지키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나오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답변하기를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always)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기에 지금 볼펜이 있고 매직이 있는데요, 우리 눈에는 두 개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 앞에 있는 문구류를 주워라.”고 하시면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왜? 두 개밖에 없기 때문에 주우면 돼요.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문구류를 한 2646개를 깔아놓고 “1초 안에 주워라.” 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줍고 나머지는 못 줍잖아요. 그리고는 “저 착한 사람이죠? 지키기는 지켰어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면 “(못 주운) 다른 것은 어떡해?” “뭐요?” “다른 것은 내일 살아봐.” 그런데 하루 더 살아보니까 다른 게 나오네. 일년 더 살아보니까 일년 후에 또 튀어나오네. 그냥 기도원에 혼자 살아도 가끔은 장날에 읍내에 나가야 돼요. 왜? 수리할 게 있어가지고. 전기공사도 불러야 되고.
그래서 사람 불러서 대인관계를 하면서 돈 문제로 얽히고, 수도세 문제도 얽히고,.. 거기에서 “돈을 사랑함이...” 만나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돈을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까 내 안에 미처 내가 몰랐던 다른 요소들이 팍팍 튀어나오는 거에요.
그러면 전에 두 개(perfact) 주운 것은 소용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이것이 인간의 발악인데요. 문제를 자기가 출제하고 답을 자기가 내면서 ‘나는 착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데, ‘성화론’이라고 합니다. 점차 착해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혼자 스스로 생각했던 구원의 극한적인 임계점을 본인이 설정하고 자기가 최소한도로 접근하기 위해서 Best Do It!,
‘나는 그것을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했으니까 그런 성의를 봐서라도 착하다고 해주시옵소서.’ 이것을 ‘단독자 성향’이라고 하고, 어제 수요일날 이야기한 것처럼 한가운데를 본인이 점령하고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는 인간이 가면 안 돼요.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지요. 인간은 그것의 주변을 지켜야 돼요. 거기에 뱀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되는데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 버렸잖아요. 뱀이 유혹하기를 “따먹어. 따먹어. 중앙을 차지해. 중앙을 차지하게 되면 니가 중앙의 존재가 되고 모든 것은 니 중심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자식이 셋이든 넷이든 관계없어요. 우리는 전부다 부모 이용하기에 바빠요.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울고불고 달라드는 것은 엄마를 위함이 아니고 자기를 위함으로 자기가 엄마한테 빼먹을 것을 빼먹겠다는 거에요.
자식들 개개인마다 전부 다 그래요. 안 그런 인간이 없어요. 중심 부분이 썩었어요. 그렇다고 중심 부분을 바꿔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중심 부분 인간을 새로운 중심으로 이걸 덮어버린다고요.
주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 그 위에 또 하나 겹치게 성령에 의해서 죄를 발생시키고 그 죄를 주님께서 중심에서 죄를 짓게 만들어 놓고 그 중심부에 같이 덮쳐버린 주님의 십자가 피로 이걸 의로 바꿈으로 말미암아 주님 보시기에 의가 생산되는 겁니다. 본인 보기에는 죄가 생산되고..
‘죄가 생산되고 있다.’는 말은 ‘의가 생산되고 있다.’와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는 그 말을 즐거이 할 수 있습니다. 신나게 할 수 있는 거에요. 다른 말로 해서 ‘주께서 죄를 짓게 만든다.’는 말을 즐겁게 하는 겁니다.
왜 죄를 짓게 하는가 하면 죄가 있는 곳에 주님의 숨겨놓은 은혜가 “나 여기 있지.” 하고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내가 준비한 은혜가 있지.’라고 등장하게 하는 계기로 삼는 거에요.
그런 주님과 우리 사이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확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너 이거 내라. 내가 이거 먹을게.” 이거거든요. “팔월 공산 내라.” 그러면 그걸 먹고 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했지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함께 다닌다.”에요. 함께 다니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식으로 한다면 사물놀이의 달인, 김덕수 마당놀이패 있지요? 숙식해가면서 자기들끼리만 살아요.
그게 열두 제자들이에요. 자기들끼리만 마당놀이하고 있는 거에요. 동편제인지 서편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들끼리 패밀리를 이루어서 같이 노는 거에요.
그리고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라”,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우리는 판소리나 하러 가자” 하고 복음의 판소리 하러 저희끼리 또 떠나가는 겁니다.
고정된 교회가 어디 있어요? 부동산?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성경에 아무리 봐도 그런 것 없습니다. 감리교나 침례교는 왜 있습니까? 그런 것은 고정적으로 박아놓은 거에요.
요한계시록에는 아예 일곱 교회 자체가 없다니까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거에요. 일곱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가 된 거에요. 일곱 교회가 모이지요. 그것을 교회 아닌 것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 진짜 교회가 나온 겁니다.
“진짜 교회는 이래서는 안 돼.” 라고 지시를 내리는 그쪽 동네에 진짜 숨어있는 교회가 있기에 가짜 교회가 가짜로 들통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란 뭐냐? 교회 자체가 가짜로 들통난다면, 그리고 그 들통난 것을 서로가 공유한다면 그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가짜를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야지 교회를 믿으면 안 되잖아요. “우리 교회는 가짭니다.” 사실은 이렇게 시작해야 돼요. “이 교회는 가짜니까 조금도 신경쓰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 주님만 바라봅시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이 되어야 돼요.
뭐, 새교인 200명이 왔다구요? 그것 믿지 마세요. 개인주의의 집합체입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야 되죠.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면 우리가 그 동안 어두움에 갇혀있었고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던 그 어두움에 갇힌 것을 주께서 빛 가운데 비로소 그 실체를 보이게 된 겁니다.
아가씨들은 괜찮아요. 그런데 피부가 안 좋은, 여드름이 아직 있는 30대 초반들은 선을 봐도 호텔에 가면 안 되고 어두침침한, 희미한 조명 밑에서 선을 봐야 되죠. 자칫하면 더덕더덕 화장을 너무 많이 한 게 티나게 되면 나중에 민낯 나오면 남자쪽에서 민망해져요. 무서워서 빛에 행하지 않죠.
그런데 진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성경을 여한없이 보게 되죠. 아까 공부하기 전에 우리교회에 질문이 들어왔어요. 엄기덕씨가 질문을 했는데 그분이 “어떻게 용서를 받았는데 왜 또 행해야 됩니까?”라고 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해서 신랑 맞으라고 하니까 예수도 믿어야 되고 또 기름도 준비해야 되고 아까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용서 받아놓고 어떻게 기름을 준비하라고 가르칠 수가 있습니까? 해명해 주세요.
그런 질문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궁금한 질문이에요. 다른 사람은 전부 의롭게 한다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분이 솔직하게 질문을 하는 거에요. 제 답변은 그거에요.
왜 지혜로운 처녀 편에 섭니까? 어리석은 편에 서야지.. 주께서 하신 비유는 안 좋은 쪽에 서야 돼요. 어리석은 처녀여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어리석은 처녀, 지혜로운 처녀를 만드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기껏 해봐야 인간들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기름 준비하면 구원하겠다는 그 결정은 누구의 결정이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 신랑의 결정이잖아요.
신랑의 결정을 전적으로 주님의 결정으로 소급해서 차후적으로 신랑의 결정을 보여주려면 비유 전체가 다 우리 속에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뭘 지키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주님께서 이런 비유적인 내용을 가지고 덮쳐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셨구나.’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우리를 기름을 준비한 사람으로 쳐주는 놀라운 배려가 신랑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왜? 신랑 안에는 비유가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그냥 주는 겁니다. 마치 엄마가 애가 태어나니까 애한테 “너는 왜 기저귀를 준비하지 않았어?”라고 닥달하지 않잖아요.
기저귀는 누가 준비합니까? 그것은 엄마쪽에서 해야지 갓난애가 기어가가지고 베를 잘라가지고 자기가 팬티 만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나중에 구원 받고 보니까 주님께서 준비한 기저귀가 바로 “예수님의 비유”라는 말이죠.
안 되는 걸 되게 하신 거에요. 오른쪽에 양, 왼쪽에 염소. (우리는) 마땅히 염소지요. 그런데 양이 되게 하셨잖아요. 예수님의 비유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만든 기저귀기 때문에 저희가 끼어들 기저귀가 아니고 주님께서 온전하게 이루실 기저귀를 저희들이 차게 해서 이제부터는 우리를 비유의 사람으로 거리를 활보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8장 12절(가락-일방적 구원) 151119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1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2000년 교회, 기독교 역사, 신학을 바리새인들이 대표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바리새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자기하고 같은 인간이에요 인간이 아니에요? 똑같은 인간이죠. 그래서 “네가 너를 위하여”라는 말은 한 겁니다. “내”가 “너”를 “너”라고 지칭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 있다는 겁니다.
과연 이 바리새인이 뭐가 문제입니까? 감히,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했는데 바리새인한테는 그 이사야가 봤던 독생자의 영광이 보이질 않는 거에요. “너나, 나나 똑같지.” 이렇게 된 거에요. “니가 뭐 별론데..” 이렇게 된 거에요.
내가 아침에 거울을 보면 내가 보이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거울로 나를 봤던 그 눈을 가지고 너도 보이니까 “거울에 비친 나나, 내가 보고 있는 너나 둘다 또이또이다, 같은 레벨이다. 똑같다. 다 같은 인간이다. 특별한 게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전에 알던 그 나를 그대로 지속하죠. 예수님을 보고서도 자기 자신이 새롭게 안 보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보고도 주님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거에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보고 있기 때문에 모르고 거에요.
왜냐하면은 바리새인들이 바라는 여호와는 대단하지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가슴을 치고 굴복해야 돼요. 왜? 안 보이기 때문에 그런 연출(연기)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안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한 번 보세요. 하나님이 머리가 좋다는 말이 외람된(잘못된) 말이지만, 깎아내리기 위해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님을 버리신 이유가 “너는 아무리 해도 진짜 너 자신에 대해서 니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니가생각하는 것과 생각에서 나온 모든 행동이 거짓이고 가짜며 외람되고 악마적이다.” 이렇게 단정지을 수가 있는 겁니다. “너는 너에게서 못 빠져나오는 입장이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판단을 본인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춘향전에 보면 그런 게 나오지요. 이도령 장모, 춘향이 엄마가 허름하게 생긴 이도령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자네가 이렇게 망했구나.” 그러면 왜 망했다고 봅니까? 자기가 생각했던 그 사위는 번듯하게 출세해서 나타나는 그런 사위이길 원했지요.
그러면 그 사위상은 본인 생각이죠. 본인 생각에 사위는 이래야 사위답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잘난 사위는 그걸 끌어안아 버리면 그 전체가 모아져서 ‘월매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월매 안’에서의 사위는 이래야 돼요.
그런데 자기가 보는 사위가 거기에 기준을 해서 맞지 않으니까 이 사람은 망했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같은 논리인데 춘향이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죠. 춘향이에게, “춘향아 니가 변사또에게 시중을 들듯이 이 새로 온 신임어사한테도 수청을 들겠느냐?” 할 때에 춘향이가 하는 말이 “어, 똑같구나. 인간이란 이놈 저놈이 똑같구나.”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면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일부종사했고 이미 결혼한 몸이기 때문에 니가 어사가 되었든 나를 구박하던 변사또를 쳐죽이는 정의의 슈퍼맨이 되었든 뭐든 간에 나는 이미 주인이 확정된 상태다. 그런데 오는 남자마다 다 찝적거리고 오는 놈이나 변사또나 전부다 똑같은 놈이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확인했습니까? 어사가 듣고 “춘향아 고개를 들라.”라고 하잖아요. ‘니가 생각했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일치가 되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드라마니까 그런데 그런 좋은 드라마는 여기에 없습니다.
14절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갑자기 같은 인간이라고 한 바구니에 담았는데 이 바구니가 남북으로 휴전선이 깨지듯이 둘로 분단되고 말았어요. 서로 보고 있으면서도 너는 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모른다는 겁니다. 봤는데 왜 모를까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립시다. 말로 하니까 너무 힙듭니다. 바리새인들이 한 바구니를 생긱했고 이게 바리새인들의 현실 전부(all)입니다. 이 전부가 중요해요. 보이는 것은 현실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서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 전부에 속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아는 그 전부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나는 니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니 바깥에 따로 설정되어 있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이 전부가 깨어지지요. 왜? 바깥에 또 여분의 것이 있으니까 이 전부라는 것이 거짓이 되겠지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바깥에서 주시대상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판단과 처벌의 대상이 돼요. 이 전부라고 하는 것이. 처벌의 대상이 인간의 세계, 이 바깥에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바깥에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다른 바깥의 세상이 하늘나라인데 그 하늘나라에 하나님이 계셔서 지금 우리에게 비를 내리고 햇빛 주시고 우리를 살게해주셨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사상이거든요. 바리새인의 사상이나 이방인의 사상이 똑같아요. 종교라는 것이 이생이 있고 저생이 있고 다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고 우리가 죽으면 다른 나라에 간다고 본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도 죽어서 만나야 돼요. 살아서 일찍 만난게 되면 오실 수는 있는데 오게 되면 자기들이 알아보겠지요.
왜냐하면 일찍 오신 분을 알아보게 되면 가서 만날 분이 이분이니까. 일찍 오신 분을 우리가 “주님 맞지요?”라고 알아채면 그 사람은 죽어도 괜찮아요. 왜? 맨 이분을 만나게 되니까. 그런데 오실 분이 왔는데 못 알아본다는 말은 그들이 상상한 모든 것은 다 거짓이고 미신이고 우상이라 이 말이죠.
한국 교회가 왜 이단인 줄 아시겠지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 겁니다. 오는 교인들한테 “예수와 모든 걸 마음껏 상상하세요.” 그러면 진짜 성도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 성도는 사람들 눈에 보입니다. 어떻게 보이는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이여! 왜 저를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고 이것을 이상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런 희한한 인간들의 낯선 고백이 그 교회에서 새어나온다면 그들 안에 주님의 소자, 주님이 보낸 종이 지금 섞여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 사람을 환영할까요? 어떻겠습니까? “니가 미쳤구나. 다른 사람은 죽어서 천국가려고 노력하는데 너는 왜 노력을 하지 않니?” 그러면 성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지금 노력하고 있다. 왜 나는 천국을 가야만 하는지 이유를 몰라서 그것을 알고자 노력하고 있다. 왜 나는 지옥을 안 가야 되는지, 왜 합격통지서를 미리 주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거는 알죠. 하는 것마다 죄가 되기 때문에 통지서를 미리 준 거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하는 것마다 뭐로 판정합니까? 이 볼펜 주웠다고 자기 의를 찾고 성화되었다고 의롭다고 주장하잖아요. 두 개 깔아놓았던 사람은 다음에 네 개 깔아놓고, 다섯 개 깔아놓고 하지요.
제가 주일 오후에 설교했는지, 후포리의 남서방 이야기했지요. 80세난 할머니들 1, 2, 3 산 밑에 모아놓고 남서방이 이야기를 하는데 컵을 놓고 그 속에 구슬을 두고 “덮습니다.” 하면서 테이블 밑에 그 구슬을 떨어뜨려 놓았어요.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눈이 번쩍 해가지고 “여기!” 하는데 “그냥 하지 말고 돈 천 원씩 다 내시오.” 해가지고 뒤집으니까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여기 없으면 저기에 있겠지.’ 해가지고 “저기!” 하니까 “아, 손떼시고 손떼시고.. 다시 하겠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요.
교회가 사기단체에요. 어디에도 진리고, 천국이고 없습니다. 없지만 없으면 교회가 안 되잖아요. 있는 척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본인도 천국 못 가고 천국 가는 사람들도 가로막고 이렇게 돼요. 그리고 “자, 돈 내세요.”라고 하지요. 얼마나 이것이 합당합니까? “자, 십일조 하시고 주일성수 하시고 교회 섬기시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진짜 성도가 있다면 “에이, 이 교회의 형식과 제도와 직분이 다 가짜지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한 어린아이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벌거벗은 임금님’ 알지요? 임금님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벌거벗겨 놓고 “옷 좋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 간신배들이 따라서, “옷 좋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임금님 벌거벘었는데?”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버렸어요. 그애 아마 많이 맞았을 거에요.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어차피 상징적 체계에서는 진실을 말하면 그 공동체에서 쫓겨나야 돼요. 거짓을 다 알거든요. 다 묵인하고 있는 상태에서 진리를 말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우리들끼리 세계에 낯설게 들어왔기 때문에 진리를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까? 기존의 상징체계, 기존의 우리들끼리의 세계에서 자기가 이루어놓은 하나의 구성원으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 중에 남고싶었던 거에요.
왜 그렇겠어요? 평소에 자기 몸을 관리하는 관행과 습성, 그것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어요. 힘센 사람에게 비비는 것 외에는 살 방법이 없다니까요.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을 욕할 수 없는 이유에요.
아무리 주님은 욕해도 제자들은 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권세(권력)’를 가지고 있어요. 교회에 비리가 있다? 그 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누구만 교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권세와 상관없이 구원 받은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교회라는 질서와 상관없이 구원 받은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다구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되 바리새인을 통해서 용서한 것이 아니고 직접 용서하신 것은 그 사람에 의해서 바리새인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게 되는 거에요. 그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를 가로막는 것들이 먼저 선행되어야 돼요. 그래서 지금의 이단들이 있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이단들이 있어 줘야 되기 때문에 주께서 일부러 깔아놓은 거에요.
그래야 우리가 이단들 욕하지 말고 한국교회 욕하지 말고 나도 같은 한통속이고 같이 거기에서 벌벌 떨면서 그들이 주는 빵과 그들이 내는 돈이 탐나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진짜 죄된 모습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것으로 결국 위로가 될 수 없는데요, 위로가 되는 말을 한답시고 하는데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주님이 어디에 와 계십니까? 어느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다 보니까 여러분 마음은 졸지에 바리새인의 마음이 된 거에요.
바리새인 속에 주님이 침투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습성은 바리새인 식인데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의로운 것을 장만해서 이것을 밑천으로 하나님의 복을 당당하게 따내고 싶은 이 충동 아닙니까? 그냥 달라고 하니까 너무 낯짝이 두껍잖아요.
수능치는데 그냥 보기가 미안하잖아요. 수능치는 그 전 주간에는 그동안 밀려있던 십일조 한 몫에 딱 내면서 그 다음 주간에는 수능에 집중해서 새벽기도 나와 줘야 마음이 덜 불편하다니까요.
이게 바로 우리에게 바리새인적인 관행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세상 자체가 바리새인화 된 거에요. 서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경쟁화된 사회입니다. 그것을 ‘주체’라고 해요.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면 그물망이 있는데 그물망 속에 교차 지점이 전부 ‘주체’가 돼요.
‘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실제 예로 들게 되면은 ‘어떤 아가씨가 자기 친정에서 태어나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취직해서 있었다거나 회사 신입사원이었다.’고 하면 그때는 회사 사장님과 동생, 엄마만 신경쓰면 돼요. 그게 주체니까..
그런데 시집을 갔어요. 시집가기 전에 남자친구가 미리 자기가 8대 독자고 한 달에 제사가 2번씩 해서 1년에 제사가 24번 있고 제사 지낼 때는 이 식구만 오는 것이 아니고 온 사돈에 팔촌까지 다 모인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 ‘주체’는 사돈의 팔촌까지 다 모이는 거에요. 이상한 거미줄에 걸렸어요.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독자인 줄만 알았지 이런 8대 독자에다가 거기다가 뼈대 있는 안동권씨 독자인 줄을 몰았어요. 제사지낼 때도 저희집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안동까지 가요.
그런데 시집가기 전에는 친구끼리 그냥 놀면 되는데 이제는 사돈의 팔촌이 와가지고 “여자가 제사 지낼 때 복장이 그러면 안 되지. 옷고름은 이렇게 매는 것이 아니고 요렇게 매야 돼.”하고 갑자기 간섭하는 것이 많아지니까 그 사람들이 원하는 욕구에 만족하는 새로운 ‘주체’가 내 안에 내용물로 삽입되어서 이만큼 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경쓸 자리가 사거리가 아니고 오거리, 육거리가 되는 거에요. 신경쓸 자리가 너무 많은 거에요. 그래서 “아이고, 난 못하겠어.” 하고 나자빠지니까 사돈의 팔촌이 와가지고 “니가 이런 가문에 맏며느리인데 그럴 수 있냐?”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너는 탕국까지 잘 끓일 수 있는 자랑스러운 맏며느리가 되어야지.”라고 주체를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해줍니다. 그러면 아가씨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교회 다니거든요.” 그러면 저쪽에서 압력을 가하지요. “너희 며느리 이혼시켜라. 이래가지고 우리 민족 정기가 깨진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이혼 할래? 말래?”라고 하겠지요.
이것은 다른 데에 시집 갔으면 절대로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에요. 저희끼리 마음이 안 맞아서 이혼하느냐 마느냐지 그냥 멀쩡한 며느리에 불과한데 이혼의 압력이 들어온다는 말은 다른 주체망 속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교회 가는 것도 아니고 복음을 알아버리면 어떻습니까? 이제는 그냥 주체가 아니고 (아까 강의했듯이) 예수님이 안동권씨 팔대 종손집에 들어와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슈퍼맨이 들어왔어요. 그러면 이 집은 마귀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이 여인은 뭘 해야 됩니까? 제사를 그만 둬야 됩니까 안 그러면 이혼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탕국 끓이지 말까요? 제사를 그만 둘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해야 됩니다. 잘 들어보세요.
‘나를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여기에다가 몰아주셨군요.’ 그러면 이 여인이 제사를 좀 줄이려고 데모도 해보고 사정도 해보고 온갖 것 해보고 시어머니한테 잘 보이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나 진짜 이혼한다.”고 친정에 가서 울고불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모든 행위를 다 끌어모아 놓으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가 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을 내 자존심, 내 나름대로, 내가 기대했던 ‘기독교 신자는 그저 웃으면서 교회에 가는거야.’
이러한 옛날에 내가 생각했던, 내가 상상한, 그런 잘못된 신앙생활을 위하여 내 편한 것, 내가 원했던, 내 몸에 익숙한, (관행이 된 것이 편하거든요.) 아가씨 때 교회 다니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찬송 부르던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의로운 것이 아니고 내 행복을 위해서, 내 편함을 위해서 하는 하나의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만 두라는 이야기입니까? 이혼하라는 말입니까 그냥 있으라는 말입니까?”라고 물으면 가장 즐겁게, 가장 가볍게 할 수 있는 행동만 하면 돼요. 결국은 온갖 것 해보다가 내가 이혼하는 것이 본인한테 가장 행복하다면,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남편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혼도장을 찍을 수가 있어요.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옵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화평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웃으면서...” 복음전한다고 남편 팽개치는 것, 그것도 아니거든요.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복음전한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여보, 내가 당신 놔줄게. 당신은 맘 놓고 제사놀이 하고 나는 빠질게. 그러니까 탕국 잘 끓이는 여자 만나가지고 자식들 제사 교육 잘 시키고 재미있게 잘 먹고 잘 살아.”를 아주 편하고, “주여 이제 종을 놓아주시나이다” 할 수 있는 때까지는 본인은 죄된 몸부림을 한 번 쳐보세요.
어떻게든 노력하면서 해보세요. 하지만 기쁜 순간이 올 때 기쁘게 행하면 됩니다. 그래서 무슨 행동을 할 때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라고 기쁘게 하게 되면 그것이 주께서 하신 일이 돼요. 전혀 위로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단 한 가지, 어떤 일을 당해도 이미 주께서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빠져나오려고 시도하는 것이 우리의 관행입니다. ‘내 자존심은 내가 지킨다.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간다. 내가 성실하게 임해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구슬 꿰듯이 해서 전체가 찬란한 나의 역사를 만들리라.’ 이것이 죄된 우리의 습성이에요.
실수했으면 ‘아차, 실수했구나.’ 빨리 회개해서 반성이라는 모양으로 다시 선에다가 같이 합류를 시키려는 우리의 시도, ‘주여 반성했잖아요. 그 점은 두 번 다시 이야기하지 마세요. 반성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또 자기 잘난 체하는 그런 요소들.
이러한 시도 자체가 그게 바로 사실은 우리가 욕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들을 해온 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이런 고생을 했습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거에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내가 생산한 상상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내 삶 속에, 바로 내 코 앞에,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태를 유발시키면서 등장해요. 그것을 세 자로 ‘걸림돌’, 잘난 체하다가 자빠지게 만드는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일부러 잘난 체하는 것이 아니고 관행적으로 (잘난 척을) 해야 내 몸이 행복하니까, 편하니까 잘난 체를 하는 거에요. 종교를 떠나서 몸 편하면 최고고 제일 좋은 거에요. 그냥 몸 편하면 돼요. 몸 편하면 되는데 그걸 분석적으로 조사한 사람이 있어요.
정신분석학자가 조사를 해보니까 몸이 편한 것이 다가 아니에요. 임계점을 세밀하게 잘라보니 몸 편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복은 얼마 못 가요. 뭐가 행복이냐.. 자극이 있어야 돼요.
계속 자극이 있어야 되는데 그 자극이 뭐냐? 선과 악 사이에 차이를 만들고 그 속에 뛰어드는 모험을 즐기는 작업, 쉽게 말해서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 잠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죠.
엄마가 그냥 사과를 주면 안 먹어요. 그런데 ‘먹지 말라.’고 한다면 애는 사다리 타고 올라가가지고 선반에서 그것 몰래 먹다가 엄마의 혼수까지 다 깨먹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몰래 죄 짓는 재미를 인간은 찾아나서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불경에서는 “주리상서”라고 하고, “향락”이라고 하는데 “도저히 저지할(말릴) 수 없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 칸트는 말하기를 “내가 뭘 하겠다, 안 하겠다는 그것은 주제에 넘는 일이고, 내 속에 내 관리를 벗어나 있는 ”욕망“이, 날마다 나로 하여금 갈급증을 유발해서 새로운 욕망거리를 찾아나서는 그것이 인간이다.”라고 이야기힙니다.
그게 인간인데 무정형이에요. 어떤 형태가 없는데 외부에서 “그러지 마라”라고 하잖아요. 윤리적으로, 성경적으로, 목사님이, 또 집에 어른이 “그러지 마”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안 그럴게요. 조심할게요.”라고 잠시 멈추는 순간, 그것을 가지고 “주체”라고 하는 거에요.
‘나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나 십일조 했어요. 하나님, 나 오늘 교회에 나왔어요.’라고 하면서 잠시 멈추는 거에요. 그런데 교회에 나와도 딴짓하고 있는데? ‘어 저 아줌마 머리 잘 나왔다. 저 사람은 총각일까?’ 그 인심좋은 순간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저 잘났지요?’
16절 봅시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이 뭐냐? 혼자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리새인(사람)을 보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됩니까?
‘아, 혼자 있는 것 맞구나.’ 이렇게 돼요. 주님은 혼자 있는 거에요. 어차피 혼자 있지 않다면 같이 있는 바깥분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게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러니까 혼자 있는 거에요.
그래서 바리새인 보기에는 예수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억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아이구 목사님, 예수님이니까 그럴 만 하잖아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죠? 문제는 이 상태가 오늘날 성도에게도 똑같은 오해를 유발한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못 보내시는 이유에 대해서 계속 알아보는 중이다. 왜 나를 지옥에 못 보내? 이렇게 죄를 짓는데 왜 죄 짓는 나를 지옥에 안 보냅니까?’라고 한다면, “너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있냐?” “지금 나는 주님하고 있거든.” “어, 혼자 있네.” 백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혼자 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받은) 똑같은 곡해(오해)를 우리가 받으면 복이 있는 잡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저한테 짜증을 내는 것이 뭐냐? “목사님 복음 알고부터 왜 그리 외롭습니까?” 속으로 ‘외로우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든지..’
다시 놀러 다니고, 옷이나 보러 다니고, 세상 자식 자랑하는 재미로 모이고 남편 자랑하는 데 한 번 파묻히지, 누가 하지 말라고 했나? 한 번 해보지.. 그게 안 돼요. 주님께서 안 되게 하셨네요. 주님께서 이상하게 대화가 재미없게 만들어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내가 뚫을 수 없는 “걸림돌”과 같이 동행하게 만들어요. 원래 걸림돌은 걸려서 자빠지라고 있는 건데. 그 자빠지는 것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그 돌이 나를 자빠뜨렸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면서 살도록 만들어버려요.
‘나는 박근혜 앞에서는 안 자빠졌는데 이분 앞에서는 자빠졌어.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만들지요. 이걸 “살아있는 계시”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은 없고 당신 속에 요한복음 8장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답이에요. 요한복음 8장이 펄떡펄떡 뛰는 거에요.
양어장이라면 그 중심에 하나하나 키우는 성도들이 있어서 그 안에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이 펄떡펄떡 뛰는 거에요. 말씀이 중앙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변두리에서 중앙 부분을 사수하고 지키고 증거하는 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어떤 일을 할 때에 즐겁지 않고 가볍지 않고 기쁘지 않거든 그 행동을 하지 마세요. 억지가 됩니다. 어떤 행동을 하든.
남편이 국수해 달라고 해서 귀찮은데도 해줄 때, 이게 억지가 되게 되면 하는 사람도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이 남자를 만나서 이 시점에서 국수를 하도록 주께 지시가 내려졌다면 남편 보지 말고, 남편의 행동 따지지 말고 기쁘게 국수를 해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이 오해해가지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구나.”라고 하면 “아니, 이 집 안에 당신만 있는 게 아냐.” “니가 미쳤구나.” 그땐 한 마디 하세요. “그래 미쳤어. 미쳤다고 하려거든 먹지 말고 도로 가져와.” 그 만한 자유가 있어야 돼요. “그래도 먹고 싶으면 먹든지 말든지.. 두 번 다시 안 해줘.” 이러면 꿈쩍도 못 합니다.
16절 끝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이 말은 무서운 말이죠. 너희 안에 그렇게 너희들이 그리워하는 하나님이 사실은 이미 너희와 함께 있다는 거에요.
“너희 눈에는 나밖에 안 보이지, 그런데 나하고 함께 계신 분, 너희들이 찾던 여호와라고 이름한 그분이 있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찾던 하나님이 있어도 너희들은 믿지 아니한다.” 그런 뜻으로 지금 계속 진행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어두움”이라는 실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그 상태”를 가지고 어두움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굉장히 제가 좋아하는데요. 상식이기 때문에 그냥 알아놓으시길 바랍니다.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 )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해놓고 ( ) 항목에 해당되는 사항, 1번 나쁜 짓 많이 한 사람 (성폭행행 한 사람, 가정폭력 일으킨 사람), 2번 주를 믿지 않는 사람, 교회를 믿는 사람, 교회의 권위를 깨는 사람), 3번 주를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 4번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것이 있어요. 몇 번이 답입니까? 4번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성립이 되지 않는 이유가 우리는 이미 사랑의 대상이 확정되어 있어요. 사랑의 대상이 있습니다.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에. 남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내 아들을 사랑하거든요.
나와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내 사랑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식, 또는 나를 아플 때 돌봐준 내 남편, ‘전에 내가 죽어갈 때 나를 돌봐줬으니까 이제는 당신 아플 때는 내 목숨, 내 간을 빼줘서라도 당신을 살리겠소.’라는 그러한 큰소리라고 할까요, 그런 결심은 할 수 있어요.
왜? 이런 게 있어요. 사람은 양심(율법)이 있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 자기 인격의 존엄성을 본인이 지키고 싶어가지고 뭔가 받으면 꼭 해주고 싶어요. 안 해주면 내가 미안해서 못 견뎌요.
그놈의 극단적인 선 때문에 문제가 된다니까 그래. 천국 가도 주님의 구원에 보답해주려고 설치게 되면 그 사람은 엉뚱한 곳에 와있는 거에요. 만약에 거지 나사로가 손에 물방울 쥐고 “여기 접근합니다. 접근합니다.” 하고 지옥에 와서 손에 물방울을 (부자에게) 줬다 칩시다.
부자가 뭐라고 하겠어요? “아이고, 고맙네.” 하잖아요. 그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고맙네.”는 지옥에서 하는 소리지 천국에서 하면 안 돼요. “고맙다.”는 것은 자기의 주체의 그물망을 지탱하겠다는 고집이거든요.
그물망이 여기 있는데 성도의 주체가 이 지점에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나한테 돌아오는 모든 것이 모아서 걸림돌 기능으로 내 자리로 솟구쳐 올라오는 겁니다.
만화에 보면 그런 게 있지요. 고양이에게 쫓기던 제리가 우연히 쫓기다가 로마 시내 광장에 있는 분수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분수가 솟구쳐 올라오게 되면 제리가 분수 위에서 붕붕 뜨겠지요? “나 좀 어떻게 해줘!”
지금 우리가 걸림돌 위에 놓여버린 거에요. 모든 주체, 내 사랑하는 아내(남편)가 나를 위하여 걸림돌 기능을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우리는 이 관계 속에서 아무리 “십자가로 구원 받았습니다.” 고백을 해대도 그들에게 내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이 충동을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타인(자식들)이 엄마를 바라보는 순간, 엄마는 그들 앞에서 엄마다울 때 그것이 나의 향락(쾌락)이 돼요. 나의 즐거움이 된다고. “봐라. 이 엄마는 다른 엄마하고 다르지 봐라.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자기 자랑하고 싶은 꺼리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독자적으로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말죠. ‘봐라. 나는 저들처럼 간통 안 했잖아.’ 간통하지 않았으면 죄 용서 받을 기회도 날아가 버리지 뭐. 간통 안 하는 것은 좋은데 천국은 다 갔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간통하지 않았으니까 저 사람처럼 나는 세리도 아니고 저 사람처럼 나는 나쁜 여자도 아니고 나는 한평생 착한 인간입니다. 아까 동영상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예루살렘 여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울었거든요.
그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딸들을 위해 울어라” ‘니가 날 위해 우는 울음은 수상한 울음이다. 나는 평온하고 행복하다는 자기 과시에서 나오는 울음이다.’ ‘참 예수님 안 됐다.’ 주님께서 ‘누가 안 됐는데. 내가 보기에는 행복하다고 여기는 너희 집구석이 안 됐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데 아무도 자기가 저주 받아야 될 사람인 것을 지적해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주머니들이 주 예수를 보고도 자기하고 같은 인간인 줄로 알았지 그 예수님 보고도 사실은 내가 십자가에 달릴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할 사람은 그 중에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 보고 울 것이 아니라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할 상황을 가지고 주님을 보고 울었다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니 딸들을 보고 울어라. 참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거에요.
울어줬다고 또 문제라. 주님도 참. 울어줘도 문제라. 그냥 쉽게 넘어가지. 깐깐하게 다 따지는 거에요.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된 자리에서 태어났음을, 너는 그 원천적인 자리를 찾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주일날에 그런 설교를 하겠습니다. (준비했습니다마는) 주께서 하는 것은 그 제리(쥐)를 항상 우리의 원래의 자리로 데려다 놓아요. 그런데 원래의 자리에 가게 되면 또 쪼로록 지 잘난 자리로 오게 됩니다.
지옥에 갈 죄인의 자리가 원래의 자리인데 쪼로록 훌륭한 엄마의 자리로 또 쫓아들어가요. 그게 습관화 되어가지고.. 훌륭한 엄마의 자리로.
그래서 17절에 보면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이 점이 좀 어려운데 신명기 19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율법에 한 사람은 안 되고 두세 사람이 증거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은 인간들은 처음부터 율법을 해석할 능력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했죠. 죄인이 해석한 것은 다 죄를 퍼뜨리는 계기가 될 뿐이에요.
어떤 남자들은 발에서 냄새가 나요. 아무리 위를 잘 씻어도 발이 있는 곳에는 냄새가 나게 되어 있어요. 원인이 발에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세수하고 왔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곳에서 죄악된 냄새를 피웁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백독을 하고 만독을 하고, 신학을 해도 성경해석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까 신학이 문제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법을 줘도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교회에서 끌어모으게 하는 용도로서 신학이 수용되는 겁니다.
어느 신학이 교회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데 유리하냐? 그게 정통신학으로 채택이 됩니다. 삼위일체가 그런 거거든요. 삼위일체가 전국민을 신자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돼요. 왜냐? 전국민이 자기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고 그 뒤는 죽어서 갈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데 그것에 맞춤 신학이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이 땅에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주어지는 낯선 모습으로 온 신학을 그들을 할 줄 몰라요. 그저 깨끗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신학입니다. 왜냐? 모든 인간이 그러고 싶으니까. 이거는 집에 있어도 구원 받아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온 신자가 다 구원을 받는 거에요. 테오도시우스 때 처음으로 국교가 되고 콘스탄티누스 때는 신앙에 자유를 줍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 자체가 될 수 없어요. 어떻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도 그래보고 싶죠.
모든 경찰관과 모든 고위직을 전부다 기독교 신자화시키고 싶지요? 케이블 방송은 tv조선 딱 한 가지로만 고정시키고 다른 것은 다 없애고.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지향한 겁니다. 완벽을 가할 때 메시야가 오기에 수월하다는 겁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이고 오실 때에 “참 잘했다. 충성된 종아. 니가 수고했구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사전 전지작업, 오실 만한 일을 진짜로 했는데 그것이 어두움이었던 거에요. 빛이라고 줄곳 모아두었는데 그게 전부다 어두움이었습니다.
막상 진짜 빛이 왔는데 율법에 대한 해석법이 달랐어요. 그 해석법은 뭐냐? 그 율법이라는 것은 니가 근원적으로 문제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율법의 고유기능이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을 몰랐던 겁니다.
말씀을 주는 것은요, 우리한테 문제있다는 겁니다. 디모데전서하고 디모데후서를 한 번 보겠는데 디모데전서 6장부터 봅시다. 6장 7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라고 했는데 이것은 “뭐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너라는 인간은 아무것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좀 똑바로 알아들으세요. 이 말은 “너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되는 인간이다.”에요. 그런데 현재 가진 것이 뭔가 있다면 수상하다는 겁니다. 휴대폰(스마트폰)이 있다면 수상한 것이고, 내 소유의 부동산이 있다면 이것은 욕심낼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물어야 돼요.
“주님이여, 저한테 집이 있는데 집이 왜 있습니까?” 오히려 물어야 돼요. 자동차 키가 왜 있습니까?“ 이것을 물어야 된다고요. 자동차도 없고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물을 기회가 없는 것는 거지요. 우리게는 물을 기회를 그만큼 많이 주셨고.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똑바로 봐야 돼요. “그 정도는 압니다.”가 아니고 “지금 없애도 너 할 말 없지?” 그런 뜻이에요. “지금 너 빼놓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재산이 다 날라가고 보험증서가 불타버려도 너는 할 말 없지? 너는 ”잘했습니다.“라고 할 사람이지?”라고 묻는 거에요.
말귀를 알아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말씀을 보고 기뻐하려면 주께서 지정한 그 지정 장소에 가있어야 돼요. 분수대 걸림돌 위에 있어야지 자꾸 쪼로록 딴 데로 새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내 이야기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은 내 이야기가 맞네요.’
그리고 8절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돼요. 그 다음에 돈 문제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나온는데 ’이것은 이야기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요. 주님.‘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디모데후서 3장입니다. 1-2절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라고 나오지요. 이것은 이래서 고통이 온다는 말이 아니고 이게 고통이라는 겁니다.
고통이 왔는데 고통의 모양새가 자기를 사랑하는 식으로 피할 길을 찾는 거에요. 너무나 고통스러우니까 결국은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거에요. 누구를 도와주면 부도나버리고 사업하면 다 깨져버리고 사랑해주면 배반당하고 하니까 ‘에이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결국은 우리의 본색으로 돌아오는 거에요.
이게 고통하는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쩌라고? 그러니까 결국 니 수준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하는 자체가 결국 율법을 우리 정당화하는 쪽으로 율법을 잡아당겼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이야기 한 마디하고 마치겠습니다.
20절 봅시다. “이 말씀을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과 예수님과 의견이 일단 안 통하는 겁니다. 주님은 알아듣지만 바리새인은 주님이 있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어요. 자기한테 문제가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알아듣습니다. 그 말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성도와 바리새인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20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그러면 이 이야기를 제자들은 알았을까요? 제자들도 몰라요.
그러나 때가 되매, 성령이 임하매 그들은 무릎을 치면서 ‘내가 바리새인이었네. 주님이 성령을 안 보내주었으면, 눈이 안 열렸으면 나도 이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짓을 지금 했을 것이 아니냐’ 말이죠.
‘하나님 이용해서 자기 잘난 체하는 맛으로 교회 다니기’. 이것은 바로 성령이 없을 때,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했거든요. ‘주님이여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은 안 보이지만 가서 만납시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했을 것 아니냐 말이죠.
내 속에 주님이 나를 지적하는데 우리는 내 안에 주님이 없으니까 훌륭하게 살면 주님께서 두 손 들고 영접할 줄 알았어요. 또 다른 의미로 훌륭하다는 말은 주님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 ‘아이고 착하구나.’ 하고 일으켜 세울 줄 알았지요.
고난 받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나를 지적할 수 있어야 돼요. 내 걸림돌이 내 안에 박혀있어야 돼요. ‘저 같은 죄인을 왜 구원시킵니까?’ ‘니 몸은 니 것이 아니고 너의 중앙에 내가 있거든.’ 그런 혼자만이 아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성령이 올 때는, ‘때가 되지 않았던 그때’가 오늘날 우리한테는 이미 ‘때’로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때’가 작동하는 입장에서 돌아보게 되면 이 말이 이해가 되는 거에요.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제자들이 이렇게 써놓고 본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즐겁게 웃으면서 (아마 웃었을 거에요.) ‘우리도 같은 오해를 했었다.’고 줄줄이 다시 보면서 이것을 복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오해 속에서 진실은 나온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걸림돌을 빼지말고 걸림돌을 품고 얼싸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날마다 오해와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비로소 나오는 우물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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