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8장 5절 / 예외자 / 15110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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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8장 5절(가락-예외자)1511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5절 해봅시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여기에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 앞에 와서 세우면서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모세는 이런 자를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입니다.
이 만남이 왜 중요하냐 하면 신약에서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방문해서 구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요. 그런데 그냥 오는 게 아니에요. 천하의 죄인들을 끌고 오십니다. 강도, 세리, ... 하여튼 예수와 함께 있는 자들은 다 죄인이거든요. 그 사람들을 끌고 온 거에요.
지금도 초등학교 애들, 유치원 애들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놀이하면서 놀 때 혼자 오는 게 아니지요.. 우르르 끌고 오죠.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하면서 죽 밀고~~. 천군천사와 허다한 증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때 성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만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저들과 나와 똑같아요. 그래도 구원받았어요. ‘아 나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같이 구원되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가시화 되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에요. 허다한 천군천사와 함께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면 그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주님과 한 패임을 확인하는 겁니다. 땅에 남겨진 자기 동지를 건지러 온 것 뿐이에요. 처음부터 한 패였습니다. 그러면 한 패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통하는 어떤 암호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말이 하나 붙어요. 이 비밀이 얼마나 비밀인지 “창세 전부터 비밀”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도 몰랐던 거에요. 구원받은 자가 아는 그 순간은 이미 주님이 찾아온 이후라는 뜻이지요. 주님이 찾아왔기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알았습니다. 내가 열심히 성경 봤더니만 알았습니다.’라는 말이 절대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그런 조건이 허용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찾아와 주셨으니까 비로소 아는 방법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바리새인들은 주님 쪽에서 찾아와 주시는 것이 아니라(우리 집에 왜 왔니?) 바리새인들이 자기보다 못한 죄인, 상대적으로 차이가 나는(우리는 간음하지 않았으니까 의인, 저쪽은 간음했으니까 죄인)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가면서 모세의 이름으로 왔다고 되어 있어요.
아까 5절에 보면 “모세에 의하면 이런 자를 돌로 치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은 모세가 누구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자동적으로 모세는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모세가 자기 편인 줄로 알고 있어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지요? 예수님 편인데 이들은 지금 상황 파악도 안 돼요. 모세가 자기 편인 줄 알고 모세와 한 패 먹고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시도한 겁니다. 진짜 자기 주제 파악,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이고 이 사람들은 정말 상황 파악이 안 돼네..’하고 ‘그냥 넘어가고..’ 이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바리새인이 예수님 앞에 이렇게 따지듯이 따지는 이것이 지금 주님 만나기 전에 옛날에 하던 행세였습니다. “나 예수 믿어줄 테니까 얼마 주렵니까?” 이런 식이죠. “내가 예수 믿어줄 테니까 나 부도 난 것 보상해주실 겁니까? 그러면 앞으로 예수 잘 믿겠습니다.”
조금 전에 내가 삼성병원에 갔다 왔는데 위 수술로 위 80% 잘라내고 20%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교회 교인이 있어요. 거기에 갔다 왔는데 병이 들었을 때 “앞으로 잘할 테니까 건강케 해주시옵소서.”그런 기도가 본인도 나올 수 있고 옆에 있는 가족들이, 본인보다 가족들이 더 애타겠지요. 아까 기도할 때 막 울고 하던데.. ‘내가 왜 이렇게 됐는가..’ 그런 거죠.
그런 감정도 있고 안 그러면 좋게 생각해서 ‘내가 주님을 잘못 생각했구나. 잊어버렸구나. 그냥 세상만 따라가다가 이렇게 됐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려울 때 주님이 흥정의 대상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그럼 주님은 어때야 됩니까? 우리가 바리새인을 욕하잖아요. 이 주제 파악도 안 된 사람들..
사실은 우리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빠져야 돼요.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나는 이러한 간음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은 있잖아요. 그런 잘남이 아직 조금은 남아있잖아요. 사실은 예수님 앞에서 ‘그런 작은 잘남도 나에게는 없네요.’가 되어야 돼요. 그러면 그러한 조그마한 잘남도 없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함께 있었지요. 누구지요? 간음한 여인이죠..
그럼 결국 이것은 뭐냐하면은 이제부터 어려운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편해요.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줌마를 가마 태워보내기 위해서 가마꾼으로 바리새인을 동원시켰다.” 조폭을 동원시켜 가지고 정작 자기 백성을 데려 오는 그 현장이 바로 이 현장이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가마꾼들까지 구원시키면 안 되잖아요.. 가마꾼들은 돌려보내고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데리고 온 게 아니고 “내가 너를 불렀다.” 더 심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간음하게끔 일부러 그렇게 내가 너를 몰아세웠다.”
간음하는 것도 일부러 몰래 일본에 가서 같이 밥 먹었다든지 홍콩에 가서 수영했다든지 그런 거 말고, 현장에서 들키도록 아주 주께서 세밀하게 배려를 해주신 거에요. 현장에서 들키지 않으면 그냥 영수증만 줬고 밥값 지불했거든요.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현장에서 들켰으니까 이 간음한 여인이 지옥 갈래도 갈 수가 없이 완전히 체포되듯이 천국 가는 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실제 인물들이죠. 그러면 이 간음한 여인이 이종에 사돈에 팔촌쯤 된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좀 부끄럽죠? 아는 친척 누님이 걸려들었다고 하면 ‘아이고 참 우리 집안도 재수 없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지금 이 대목에 제목(표제)을 붙인다고 하면 “재수 없네.”가 돼요. 앞에다가 뭘 붙인다고 하면 “에이 재수 없네.”가 되지요.
그런데 먼 친척뻘 누님이 걸린 게 아니고 본인이 걸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에이씨(영어로 c) 재수 없네.”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간음한 여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멀었어요. 우리는 걸리면 아까 같은 소리를 한다니까요. ‘몰래한 사랑이 좋았는데.. 에이~’
아직까지 우리는 뭘 잘못 했다? ‘죄 안 지을 수도 있었는데..’ 이게 우리가 욕했던 바리새인들의 보편적 속성입니다. 주님 앞에서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는 것... ‘그때 죄만 안 지었어도..’ 그런데 그때 그 여인이 죄만 안 지었어도 여기에 안 잡혀왔지요? 그러면 그 여인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몰라보겠지요..
이 ‘죄만 안 지었어도..’ 하는 것이 복음에 대한 보편적인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의”가 있는 곳에는 “의”가 없어요. 어디에 있느냐? “죄”가 “죄”로 드러난 그 현장에만 “하나님의 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상한 자리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어요. “아이고 진짜 거기 빠지면 큰일나.” 하는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그 현장에 “주님의 의”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지금까지 훌륭하게 살아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착실하고 얼마나 매사에 용을 쓰고 조심조심 그저 매사에 디디고 디디고 나쁜 길은 절대로 안 가고 곱씹으면서 옳다는 것만 골라서 골라서 바르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온 거기에 누가 우굴거리냐 하면 똑같은 인간들만 우굴거려요. 누굽니까? 가마꾼들.. 이 바리새인들만 우굴거리는 거에요.
주님께서 그 착하디 착한 사람들 품 속에 누가 봐도 나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정작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군에서는 그런 사람을 관심병사라고 함), 그 핵심 부분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주님과의 교통이 되고 주님과 영원히 같이 살아야 될 사람은 바로 너희들이 싫다고 갖다가 버린 그 여인이에요.
이유는 예수님도 여인처럼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야 될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운명에 참여하지 않으면 구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운명에 어떻게 참여해야 됩니까? 간단해요. 그러면 바리새인이 날 잡아가야 됩니까? 아니에요. 어떻해요? 본인이 본인을 버리면 됩니다. 자기 자신을 쓰레기통에다가 날마가 갖다 버리면 됩니다. 여기 커피 마시는 데에 휴지통 있지요? 거기에다가 자기를 갖다 버리면 돼요.
갖다 버리고 아침에 눈 뜨면 또 쓰레기장에서 빼꼼이 눈을 떴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굿모닝”입니다. 매일 아침이 행복해요. ‘오늘도 죄인인 나를 살려주시니 매사가 감사합니다.’ 종달새는 “종달 종달” 꽃은 화사하고 이슬은 맺혀있고.. 햇빛은 아침마다 잎사귀에서 아침이슬을 밀어내면서.. 모든 게 그렇게 뷰티풀 썬데이지요. 모든 게 아름답지요. 잃었다가 얻었다는 거에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인가 십자가 마을에 질문한 것이 있지요.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잖아요. 탕자가 되면 된다고.. 탕자가 되면 되고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가 되면 되는데.. 그쪽이 구원의 길이거든요. 왜 우리는 자꾸 탕자가 되기 싫어하고 불의한 청지기가 되기 싫어하느냐 말이죠. 불의한 청지기란 뭡니까? 회사 자금을 조작해가지고 돈 빼돌리는 것 있잖아요. 이런 사람이 되기 싫은 거에요. 실제로는 하고 있으면서.. 오후 네 시쯤에 근무 안 하고 퇴근하는 것도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게임하다가 사장님 오면 후딱 감추는 것도 불의한 청지기거든요. 할 수만 있으면 놀면서도 돈 타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본인은 그런 사람을 저주하는 양.. 마치 그것은 남의 이야기인 양.. 그렇게 하는 거에요.
어린이집에 교사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은 엄마가 못마땅해서 데려다 놓은 애들이잖아요. 그런데 그 교사들 중에는 결혼하지 않은 교사들도 많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애들 둘, 셋도 (물론 네 명 키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잘 못 키우거든요.. 그런데 애는 다섯, 여섯, 열 명까지 키워야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이 사람들이 짜증나겠습니까? 돈(월급여)도 많이 주는 것도도 아니고.. 어린이집 교사들은 초등학교 교사들과 달라요. 속성으로 학원출신들이 많기 때문에 돈을 많이 주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서 쥐어박고 이러는 거에요. 이게 불의한 청지기에요. 따지고 보면 불의한 청지기 아닌 사람이 없고 탕자 아닌 사람이 없어요. 주님께서 ‘이것이 니 모습이다.’라고 일러주게 되면 “아멘.”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극구 아니래. “나는 그러한 불의한 청지기를 저주합니다. 나는 탕자를 저주합니다. 나는 맏아들처럼 옆에서 효도하고 싶은데..(효도 같은 소리하고 있네..돈이 있어야 효도를 하지..)”
인간의 심보는 그렇게 착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착하지 않으면 착해보이려고 힘들게 위장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 시작부터 이제는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은 가마꾼이다. 누가 불렀다? 주님이 그 여자를 불렀다. 어떤 방식으로? 일말의 자기 의가 없게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통나서.. 누가 봐도 “에이, 재수 없네”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현장을 만들고 또 그걸 고소하는 자를 가마꾼으로 세워서 가마 태워가지고 오게 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쪽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방식이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가만히 있으면 찾아올 분이 다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다만 조건이 있어요. 자기 의를 일체 내세울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온천하에 공개하게 합니까? 언론플레이하게 만들고.. 아니아니, 본인이 그런 일 이전에 자기한테 실망스러운 존재인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본인이 싫어하는 방식, 바람을 피울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뭐하면 됩니까?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보게 하시죠. 십자가 앞에서 달려죽은 그분이 그냥 목수의 아들만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니 모습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달리셨어요. 보통 거울은 비추는 내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고 하는 거울은 내가 모르는 진짜 내 모습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볼 때에 ‘저게 나다.’라고 생각하고 보시고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보시는 거울은 ‘위장된 나다.’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짜 나다. 진짜 내가 아니고.. 왜냐하면 그 거울을 보는 순간 (이것을 “상상계”라고 하는데) “상상적 동일시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자아”가 형성됩니다. 인간은 태어난 지 2년 6개월쯤 되면 거울을 보면서 ‘저게 나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자아(주체)”가 처음 생기는 거에요.
그때부터 괜찮고 좋아 보이는 것은 전부 다 “내 것”이 되어요. “동일시”입니다. “요거 이쁘다. 내 꺼해야지..” 동일시는 무조건 내게로 다 가져오는 거에요. 엄마의 사랑, 이것 내가 좋거든요. 동일시니까.. 내가 다 가져옵니다. 그때 동생이 새로 태어났어요. 엄마의 관심사가 동생한테 팍 쏠리니까 누나나 오빠의 입장에서 엄마를 나에게로 다시 돌려놓는, 전의 상태가 되려면 동생을 죽여야 됩니다. 이게 바로 가인의 살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살인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살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국민교육헌장하고 조금 달라요.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살인의 요소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직접 죽일 능력이 없으면 우연히 교통사고라도 일어나서 내 대신 음주운전하는 인간이 죽여줬으면 좋겠어요. 특히 그런 감정이 형제간 사이에 많습니다.
(요한계시록 교재에다 썼거든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희소성”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 욕망을 채우기에 세상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음식을 보고 ‘맛있다.’고 한 순간 그 “맛있는 것”이 늘어나 버렸어요. ‘기껏 이맛이야? 분명히 더 맛있는 게 있을거야.’ 그러니까 아무리 먹을 것 열 개를 줘도 ‘더, 더 맛있는 게 있을거야.’ 그럼 결국 전부 “희소성”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설교에서 공식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욕구에다가 인간이 요구한 것을 빼기하면 그것이 욕망인데 욕망의 특징이 뭐냐하면 내가 뭘 욕망하는지를 본인이 모른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에요. 그냥 계속 헤매는 거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래 이 맛이 다가 아니야.’ 골프를 쳐봅니다. 그런데 골프를 치기 전에는 참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행복이 다가 아니에요.
애가 안 생겨가지고 온갖 것 다 하다가 우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40이 넘어서 애가 하나 생겼다. 이제는 됐어. 그런데 애 하나 낳고 난 뒤에 이게 다가 아니야. 애 하나 더 있어야 돼. 그래서 하나 더 낳았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야. 또 하나 더 낳았어요. 이게 다가 아니야. 넷 낳았어요. 그게 답니까? 넷 낳은 사람이 다섯은 왜 안 낳습니까? 그때는 욕망이 없어진 게 아니고 다섯 번째 애를 대치할 다른 욕망을 찾습니다. 돈 벌기에 나섰다든지 자기 취미 생활을 한다든지..
왜 욕망이 있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으면 내 뒤에 예수님처럼 있는 것을 후광(아우라)라고 합니다. 인간이 있으면 뒤에서 빛 같은 것이 나오는 거에요. 욕망의 빛이에요. 이게 왜 있냐 하면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동일시해서 나온 거잖아요. 욕망은 동일시+α가 돼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끌어모으는 거에요. 추가되는 것(α)을 채우기 위해서.. 계속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 모든 것이 “자아”라고 했잖아요. 제가 지금 “자아”에 대해서 언급을 안 했어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생긴다고 이야기했지 “자아가 뭐냐?”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오늘 강의가 좀 어렵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을 내 것 삼잖아요. 아까 형제간의 이야기한 것 이해되시지요? 엄마의 사랑은 몽땅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태어난 뒤에 엄마의 사랑이 가니깐 ‘동생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에요.
부부가 싸움할 때 나는 엄마편인데 아빠가 술 먹고 와서 엄마를 팰 때 딸의 입장에서는 누가 죽을 차례에요? 아빠는 힘이 없어서 못 죽이니까 아빠가 우연히 길 가다가 차에 받쳐서, 기관차에 받쳐서... (차는 약해서 안 돼, 기관차에 받쳐야 시원하게 갈 수 있어요) 복수하는 방법도 점점 나이가 들면 죽는 방법까지 체계화되고 섬세해져요.
그런 아이들이 커서 어른(adult)이 되고 노인네가 된 겁니다. 노인이 되면 욕망이 죽는다고요? 노인네도 욕망이 안 죽었어요. 모든 사람은 욕망을 위해서 살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저건 내 꺼야’ 하고 자아동일시하는 식으로 상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란 거에요.
그러면 사회에서는 그것을 다 채워줍니까? “어디서 동생 초콜렛을 뺏어먹었어?”하고 자꾸 패지요? “이건 동생 꺼야. 너한테도 줬잖아.”하고 엄마가 패고 때리고 하잖아요. “앞으로 너 조심해. 안 그러면 학교도 안 보내줘!”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양보하지요? 양보한다는 것은 잠시 욕망을 뒤로 지연시키는 겁니다. ‘두고 보자.’ 하고 째려보지요? 이것을 가지고 “상징계”라고 합니다.
‘그래 내가 이 회사에 취직하려면 퇴근시간까지 딴 거 하지 말고 참아야지.’ 참는 거에요. 참는 거지 인간이 된 게 아닙니다. ‘이번에 내가 아버지 유산을 1/M이라도 받으려면 아직 고분고분해야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큰 아들아 수고해라.” 하고 좋은 소리 듣기 위해서 지금 치매 걸린 어머니 돌봐주는 척을 하면서 지금 참고 있는 거에요.
“상징(symbol)”이라고 하는 말이 이상하죠? “상징”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하거든요. “현실”인데 사실은 “현실”이 아니고 “상징계”라고 하니까 결국 “상징계”라는 말은 자체가 “인생헛방”이라는 뜻이에요. “상징”에 불과하고 알맹이가 없다. 그냥 “상징계”에서의 주체가 “헛방”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자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아”는 “껍데기”입니다. 안에는 “비어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비어있어요.”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창세기 2장을 한 번 봅시다. 2장 7절 읽어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맞지요?
“생령”이라고 하는 것은 ‘산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이것에 인간이 관여했습니까 관여하지 않았습니까? 안 했지요. 지금 현대인들이 자기 인생에 자기가 관여하고 생각합니까 안 합니까? 맨날 내 생각만 하고 맨날 관여하지요.. ‘그래, 선택했어.’ 맨날 선택하지요. 관여하지요. 관여한 결과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다 누구 덕이다?’ ‘내가 정신 차린 덕이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때 내가 정신 안 차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 때 인간들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껍데기는 흙으로 만들고 주께서는 풍선에다가 바람 집어넣듯이 코에다가 하나님께서 생기를 집어넣었지요. 풍선과 마찬가지에요. 겉에는 고무로 만든 풍선이고 안에는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있다 말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죄를 짓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뭐라고 했다? “니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흙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간단해요. 풍선에서 헬륨가스 빼듯이 안에서 생기를 빼버리면 뭐만 남아요? 껍데기만 남지요? 결국 인간이 출생했다는 말은 뭐냐하면 생일부터 시작해서 바람빼기 작업이에요. 왜? 죽으면 흙이 되니까.. 바람 빠지는 소리 안 들립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후~~
바람 빠지면 보톡스 맞은 피부에 자꾸 윤기가 없어지고 겹쳐지고 그렇지요. 올린다고 해봐야 나중에 축 늘어지고.. 바람이 빠진다는 말은 ‘처음부터 너는 가운데가 비어있다.’는 거에요. 비어있는 그 자리에 창세기 3장에 다른 기운이 들어가 버렸지요. 다른 힘이 들어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라고 하냐하면은 ‘나는 꽉 찼다.’고 여기는 겁니다. 뭐로 꽉 찼습니까? 선악과 나무로 꽉 찼지요.
선악과 나무는 뭡니까?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뭐가 된다? 신이 된다. 내가 곧 신이에요. 나의 육체는 나의 신을 바깥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껍데기지요. 아바타가 적당하네요. 마네킹이죠.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다. 누가 누구를 잡아온 거에요? 마귀가 주의 백성될 사람을 가마 태워서 모시고 누구한테 왔다? 예수님한테 온 게 돼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땅 위에 쓰신 것은 뭐냐? 그것은 “법”입니다. “법”을 썼어요. 땅에다.
지금 요한복음을 보고 있는데 이전에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껍데기의 집단입니다. 그들은 우리하고 똑같애요. 태어나면서부터 살인자들이고 자기밖에 몰라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아담의 족속이라는 것은 로마서 5장에 나오고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담 이후의 사람도 죄가 지배한 거에요. 마귀가 지배했다고 보면 돼요. 쉽게 해서. 괴물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제일 좋아요.
다른 이방민족은 제껴두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뭐를 넣었지요? 십계명, 법을 집어넣었지요. 법을 집어넣었다는 말은 법을 집어넣기 전에 뭐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미 죄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죄가 있는 곳에 법을 집어넣어주게 되면 그들은 엉터리같은 마음씨로 그 법을 지키려고 하겠지요? 자기한테 하자가 있고 자기한테 문제있는 것도 모르고.. 십계명이 내려오니까 ‘십계명 지키면 나도 이제 의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지요.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하라. 하라.” 할 때 목사님 보고 “우리 이제 죄 지을게요.”라고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것 지키면 요번에 손해본 것 보상되지요?” “기도하라.” “예, 기도하게 되면 우리 애 좋은 대학 갈 수 있겠지요?” 지금 뭔가 요구하기만 하면 그게 법이에요. “기도하라. 철야하라. 성경봐라.” 그러면 “그것 그대로 할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이제부터 빨리 진도나간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아까 제가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고 했지요? 욕망은 안 채워져요. 그런데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말은 창세기에 보면 사실 인간은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비어있는데 지금 주님 말고 다른 것이 들어와 있어요. 그게 죄고, 욕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 죄된 욕망에 십계명이 들어와버리면 이 욕망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 지켜드릴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거에요 안 주실거에요? 하나님?’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필히 그래요.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십자가 믿어라.” “십자가 믿어줄 테니까 이거 해줄래요 안 해줄래요?” “하나님 영접해줄 테니까 이거 해줄래요 안 해줄래요?”
시집 안 가고 간사가 되어가지고 그냥 복음학교에서 나이 들도록 거기에서 결혼할 생각도 없고 취직할 생각도 없고 그냥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만 하는 그런 아가씨들이 순수합니까? 수녀같은 마음이죠. 왜냐하면 나 하나 희생해서 남은 우리 식구들이 다 잘되기를 바라지요. 그걸 제가 광주강의에서 “혈연관계”라고 했잖아요.
인간은 “혈연관계”를 못 벗어나요. 기도를 해도 먼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일순위는 자기하고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식이에요. 그리고 점점 더 넓혀가게 되면 안 믿는 부모와 당회와 그 다음에 주일학교, 자기가 다니는 교회 이렇게 확장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이게 다 누구의 자존심의 가치를 집착하는 모습이에요? 나에게 집착하는 거지요. 즉, 이 말은 ‘하나님이여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암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암을 긁어내야, 다 들어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 들어낸다고 그렇게 욕을 하는 거에요. 이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거부하는 것이.. 왜 내 것을 건드리냐 말이에요. 더 채워주지는 못할 망정..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끄집어내려고 하니까 “내 꺼니까 손 대지 마세요.” 이런 거잖아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했습니까? 예수님 계속 믿다가는 신고들어오고 고발당하고 그러면 자기는 죽겠지요. 그러니까 이 베드로가 보세요.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을 내가 죽기까지 따라간다고 해놓고 막상 예수님께서 저 앞에 있고 자기는 모닥불에 불 쬐고 있으면서 뭐가 두려워요? 죽을까봐 겁이 나죠.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는 것은 객기지요. 그냥 해본 소리지요. 이게 바로 자기가 ‘이렇게 순교하면 내가 더 멋있게 보이겠지..’라고 상상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전부다. 안 되니까 상상이라도 해보는 거에요. 그래서 더 극적이고 험난한 순교도 하고 자기를 비운 사람이 있으면 더 찾아가고 싶고 그 사람을 흠모해요. 왜? 본인은 안 되니까.. 대표적인 사람이 주기철, 손양원..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 얼마나 멋있어 보입니까? 드라마 같잖아요.
그 사람을 존중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할 것을 그것으로 땜질하는 겁니다. ‘나는 아니까 저는 사양합니다. 저 알거든요..’ 제가 욕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가 진작에 그래야 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자인해야 된다는 거에요.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 돼요. 우리는 말로는 순교를 백 번이라도 하지요. 막상 손가락이라도 다치면 “호 해주세요. 아야 했어요. 오빠 불어줘.” 혀 짧은 소리해가면서.. 온갖 엄살을 다 떨잖아요.
한겨울 추운 시장 바닦에서 콩나물이나 나물 허접스러운 것 팔면서 자식만 생각하고 자신을 포기한 엉덩이 펌퍼짐한 그 50대 아줌마는 이런 혀 짧은 아양을 안 부리지요. 철도 모르고 17, 20살 애인한테도 “오빠, 오빠” 한다 말이지요. 그만큼 자기가 챙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아줌마는 “자식만 잘 된다면 나는 귀신이라도 좋아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죄 속에 이미 율법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법이 들어왔으면 마중을 누가 하죠? 죄가 하죠. 그 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죄가 이 본문에 나와요. “모세 율법에 이런 자는 돌로 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다.” 그게 바로 가장 궁극적인, 악 중에서 가장 악랄한 최고조(최후)의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공식은 간단해요.
가장 극단적인 악이 뭐냐.. 한 자입니다. “의”입니다. 우리는 일체 의로움이 있으면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의인이 되려고 합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법으로 들어온 거에요. 법으로 들어오니까 우리는 마중을 나온 거에요. ‘그래 나는 의인 되어야, 거룩한 사람 되어야 경건해야 천국 가.’ 하고 우리는 발작을 일으키듯이 우리가 죄가 가만 두지 못하고 의인 되는 것도 주의 뜻인 양 위장해서, (그것을 고린도후서 7장에서는 양의 탈을 썼다고 했습니다.) 양의 탈을 쓴 마귀의 모습으로 (양의 탈을 몇 개나 썼는지 몰라 무거워..) ‘의로운 것이 주의 뜻 맞지요? 순종하면 의롭게 되는 것 맞지요? 제가 순종하겠나이다. 그러니까 절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탕자 비유에서 탕자만 언급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 옆에서 평생동안 탈출하지 않고 유산 생각 안 하고 아버지를 평생 봉양했던 큰 아들 있지요. 그 둘을 대비시킨다는 것을 생각하세요. 결국 그 아들은 탕자 때문에 자기가 그동안 꼬깃꼬깃 숨겨놓은 자기 본색이 그만 들통나고 말았어요. 탕자 때문에..강도와 세리 때문에 소위 착하다고 자위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요즘 같으면 목사와 장로들이죠.) 드디어 자기가 악마의 종인 것을 발각당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똑같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나는 아예 의로울 수 있는 자격도 안 되고 의로울 필요가 없어.’ 라는 사람을 그 교회에 심어가지고 의페스티벌, 다시 말해서 의의 콘테스트를 벌이는 그 현장에서 ‘나 꼴찌할래. 나 꼴찌가 목표야.’ 라는 사람과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렇다면 저쪽에 의 콘테스트의 자랑거리들은 뭐가 되겠어요? 의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성경에 보면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댓가가 있지요. “오른손에는 부귀요, 왼손에는 장수요”라고 나오지요. 잠언서 강의할 때 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뭔가 승진이 되고 장사가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돈 벌고 가정 화목하고 애가 미국의 유명한 아이비리그의 명문대학 들어가고 아들 교회 잘 다니면 복 받은 증거가 되고 하는 족족 부도나고 하는 족족 벌었던 돈 다 날리고 사기당하고 사기 당하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 나가지고 척추 다 날리고 하여튼 빌어먹어도 이렇게 빌어먹을 수가 없는 그런 애는 분명히 나쁜 짓을 한 게 있기 때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거라고 간주하겠지요. 욥기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겠지요.
사람들은 누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부자를 부러워하고 누구를 안 부러워하겠습니까? 거지 나사로를 안 부러워하겠지요. 거지 나사로가 어디 갔어요? 천국 갔지요. 부자는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다. 지옥과 천국 가운데 누가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부자가 거지를 부러워합니다. 그렇게 부러워하거든 거지 한번 해보지... 필름을 다시 돌려가지고 세상에 다시 왔다. 부자는 거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두 번 다시 안 할 겁니다. 또 안 해요.
이미 도착(도달)을 했기에 나사로가 이미 천국에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지옥은 어떻게 형성되고 지옥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우리에게 계시로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곳에는 어떤 사람이 갑니까?”라고 저한테 물으면 “당신 본성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실은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천국을 기대한 그것이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그러한 작업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 작업에서 탈출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냥 주님께서 가마꾼 시켜가지고 우리를 주님 앞에 강제로 끌어오는 “주님의 이끄심”만 있을 뿐이에요. 이것을 저는 주일 오후에 “스토커”라고 했습니다. “집요한 사랑” 그것만 있을 뿐이에요.
지금도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분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속이 사실은 비어있는데 (주님 보시기에 껍데기거든요.) 자기들은 꽉 찼다고 여기는 겁니다. 선과 악의 지식으로 꽉 찼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있을 때 자기는 신이 되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다는 거에요.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에요.
문제가 없으면요 문제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문제 없는 사람을 찾아요. 그러면 이 땅에서 자기한테 욕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부자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장래 희망은? 거지 나사로.. 어지간히 믿음 좋아서는 장래 희망란에 그렇게 안 씁니다. 엔지리어도 가난한 엔지니어? 아니지요. 외교관도 가난한 외교관? 아니지요. 부자 외교관.
사실은 전부다 괄호 앞에 부자가 붙어있어요. 부자라는 것은 너무 천박스러워서 그것을 빼는 거에요. 피아니스트도 그냥 피아니스트 하지 말고 유명한, 돈 잘버는 피아니스트.. 반드시 앞에 붙는 것이 있다고요. 그런 식으로 사실 세뇌를 받는데 세뇌 받은 게 아니고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게 되면 애가 박수치고 그것을 안에다가 집어넣은 거지요. 둘 다 속성이 같으니까 죽이 맞는 거에요. everybody 우리는 전부다 한 마을이고 한 핏줄이고 우리는 죽어도 한 형제에요. We are the world입니다. 우리는 전부다 하나에요. 그 하나에서 주님께서 뭘 하냐? 오늘 강의 제목입니다. “예외자”. 예외로 노선 이탈, 예외자를 뽑아냅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8장 5절(가락-예외자)151105b-이 근호 목사
아까 첫 번째 끝에 “예외”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부다가 그래요. 전부다가 그런데, 전부다가 진짜 전부를 포용을 못 합니다. 꼭 빠져나간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위해서 대신 지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그 “모든”이라는 말이 “everybody(모든)”이거든요. 그런데 그 “모든”은 “예외자”들의 “모든”이 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 전부를 “모든”이라고 하지 않아요.
어떻게 예외가 되느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의 구분이 안 되는 방식으로 예외를 만들어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셨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지요. 그러면 그전에 육신들이 있었지요. 이 육신들은 전부다 껍데기, 가짜 육신들이에요. 진짜 육신이 아니에요.
사람이 죽잖아요. 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안 죽게 되어있어요. 죽어도 주께서 호출하면 다시 살아나니까. 진짜 죽음은 사람이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왜? 진짜 죽음은 예수님 담당이이에요. 진짜 죽음은 ‘헉’ 하고 죽은 것이 아니고 심판자이신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경험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어떤 인간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육신(사람들) 속에 들어와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뭘 구하느냐 하면 유대인들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육신입니다. 어서 메시야께서 구름 타고(다니엘서에 보면 나옵니다) 오시옵소서.’ 이러잖아요. 하늘을 쳐다 보는데 정작 하나님은 바로 자기들 옆에 있는 겁니다. 옆에 있으면서도 거리가 하늘만큼 먼 거에요.
하늘은 멀어서 못 본다 하지만 이거는 보고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방법으로 하는가.. 평소에 니가 하나님 생각하고 하늘 쳐다 보고 기도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니 자체가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뭔가가 망가진 거에요. 얼마나 망가졌으면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있어 보여줘도 못 믿는 겁니다.
심지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눈을 뜨고서도 몰랐어요. 분명히 소경에서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몰랐던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데려갔는데 “저를 눈 뜨게 하신 분을 믿고자 하나이다.”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을 때 “제가 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은 처음으로 눈을 떴어요. 어떤 눈을 떴는가..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게 된 겁니다. 자기 인생 처음으로..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되면 소경이 아닌 거에요.
이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중심도 결국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을 갖다 놓고, 예수님을 중심에다 놓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외자입니다. 최초의 예외자. 처음으로 예외자입니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사실은 껍데기고 흙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넣어주신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요단강에서 비둘기같이 성령 받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고 그분이 자진해서 새로운 혈연관계를 형성합니다. 맏아들이 됨으로써 양자를 뽑게 되는데 그것이 천국의 패밀리, 천부께서 모이는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예외자”라는 그런 어려운 말을 (발음하기도 어려운데) 합니까?’라고 하는데 지난 시간에 인간 속이 텅텅 비어있다고 했잖아요. 그 텅텅 빈 속에 무엇이 들어오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인간의 텅 빈 속에 예외자가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기대한 인생이 아니고 매 인생 하루하루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기대하지 않았던, 자기한테도 점점 더 낯설게 돼요. 본인이 본인한테 낯설게 된다고요. ‘내가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지?’ ‘나 이렇게 하는 것을 내가 기대하지 않았는데..’ ‘누구세요?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사람도 없고.. 이상하게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가느냐 말이죠.
이렇게 가니까 평범하게 가는 보통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운 거에요.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 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요. 이런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자기 빼놓고는 전부다 평범하고 보통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누가 인위적으로 지어내느냐 하면은 본인 빼놓고 남을 볼 때 다들 이렇게 봐요. 자기 혼자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
돈이 수십 억 있어도 관계없어요. 어떤 고관대작이라도 관계없어.. 하여튼 나 빼놓고는 담들이 다 평범하고 보통 사람이에요. 그러면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은 누가 만드는가.. 내가 만들어요. 모든 인간이 각자 다 그걸 만들어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 걸 만드느냐 하면은 아까 본인이 껍데기라고 했지요. 그리고 내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내가 아닌 게 들어있어요. 괴물이 들어있어요. 마귀죠. 그러니까 이 괴물이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겁니다. 나를 보통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 보통 사람에 나를 합류를 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거에요.
그러면 그 정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법은 뭐냐? “법”입니다. 사실 오늘 강의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요. 그 여자를 데려온 것을 아까 설명했지요. 가마 태워서 주께 모셔왔고.. 바리새인들이 모세를 앞장세웠습니다. 모세의 법에 이 사람을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죄라고 했지요?
모세의 율법이 우리 속에 들어온 것(까닭)은 우리 안에 정작 무엇이 들어있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깥의 모세의 그 멋있는 법을 ‘그게 니꺼야.’ 하고 속인 거에요. “성경 몇 독 봤어?” “백 독 봤습니다.” “내용 어때?” “이렇습니다.” “다 니꺼야.” 마귀가 이렇게 속이는 거에요. 성경 보고 읽고 하는 것..
또 예를 들면 특히 20대들이 그런 게 많거든요. 교회 청년회.. “크리스마스 가까운데 우리 청년회에서 한 번 안건 내 봅시다.”라고 할 수 있어요. 이때 “안건 내 봅시다.” 하는 것은 “예산 탑시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번에 고아원 방문하기로 우리 청년회, 20대 대학생 학생들 17명이 고아원 가든지, 아니면 양로원 불쌍한 독거 노인들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하고 담당 장로님한테 결재 올려가지고 예산 따내는데 그 예산 속에는 자기들 짜장면 값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냥 노는 거에요.
그럴 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그들은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함으로써 ‘나는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다’라고 확인하고 증명해 주는 거에요. 그 교회 청년회 회원들은 이렇게 했고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그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고.. 그 차이에요.
‘저 여인을 돌로 쳐죽일 여자입니다.’ 하고 끌고 왔고 지금은 점잖아서 그것까지는 안 하고 고아원 방문하고 하는 겁니다. 물론 유명한 대구의 어느 교회 청년들은 갓바위 폭파 시킨다고 올라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갓바위’ 아십니까? 세 개 빌면 미륵보살이 그 중에 하나는 들어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갓바위는 전국에서 가장 영험합니다.
수능 할 때 전국에서 다 와요. 대구 사람들은 별로 가지 않는데 전국에서 다 와요. 세 가지 빌면 그 중 하나는 이뤄지니까 수능을 위해서 곁다리로 두 가지를 비는 거에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이번에 원피스 하나 샀는데 잘 맞게 하옵소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진짜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은 꼭 돼야 됩니다.’ 하는 거에요. 셋 중에 하나는 맞으니까..
그들이 그렇게 하기까지는 ‘갓바위’를 올라가야 돼요. 700m를..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힘들 때마다 속에서 찬양이 나오겠죠. 부처에 대한 찬양이. 왜? 봐달라는 거에요. 이것 얻기 위해서 이 정도로 고생한 것이 눈에 안 보이냐 이 말이죠. 꿇어앉아가지고.. 특히 추울 때 효험이 있어요. 벌벌 떨 때 장갑끼고 올라가서 남이 하지 않는.. 자기가 최고의 절대적인 존재니까..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데려왔지만 여자한테는 관심이 하나도 없고 예수한테도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확인)받고 싶은 거에요. 그들이 오늘날 교회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법”이 들어왔으니까 “법”이야기를 한 번 해봅시다.
모세를 앞장세워서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지요. 모세법을 위반할거냐 아니면 모세법을 순종할거냐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세 율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세의 율법이 없지요?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무조건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요? 모세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말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모세는 예수님의 사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한 패 먹었잖아요. 그러니까 모세가 있는 쪽은 의의 세계이지 죄가 없는 거에요.
“법”은 “아예 죄 없는 자가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원천을 따진 거에요. “모세는 죄 있나 없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처럼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글로 썼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그 글을 봤겠어요 안 봤겠어요? 그 글을 봤으니까 짱돌 놓고 갔잖아요. 그 글이 어떤 취지인지 그 내용이 9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라고 나오지요.
그리고 로마서 한 번 봅시다. 2장 15절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인간 속의 양심은 송사하고 변명하지요. 그치요? 방금 읽은 것은 로마서 2장 15절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잖아요.
요한복음 8장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에서 그들은 모세처럼 완전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송사하고 변명이잖아요. 한평생 마음이 이 마음 아닙니까? 뭔가 일을 해놓고..
특히 자기 마음속에 변명될 때가 언젠인가 하면은 상견례할 때.. 사돈 만날 때.. 이거는 내내 집에 올 때 찝찝해요. ‘혹시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까?’ ‘주스 따르면서 흘렸는데 그 사돈이 ‘에이 칠칠맞지 못해.. 어미 보면 그 딸을 안다고..’ 혹시, 혹시 이러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이게 사돈 보기에 혹시 천박하게 보이지는 않는지.. 만나기 며칠 전에 머리(이발)해서 자연퍼마가 나와야 되는데 방금 퍼머한 것이 표나가지고 “아이고 천박하기는 수준을 알겠다...’ 이렇게 속으로 욕하면 어떡하지..‘
상견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경우바르기 시합”, “자기 의 자랑” 자녀들 시집 보내봤습니까? 상견례 해봤어요? 아이구 긴장되기를 세상에.. 참 성질 같아서는 마음은 안 만나고 싶은데 말도 못하고.. 게다가 추석이나 명절이면 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요. 괜히 낙지 하나 보내.. 그러면 낙지 하나 계산해야 돼요. 거기에 맞춤 과일 상자 하나 가야 돼요. 또 가만히 지내면 편하잖아요. 이건 뭐 농심도 아니고 (아우 먼저, 형님 먼저 볏단 집어나르는 것처럼)...
그때 고소하면은 행여나 나는 다음에 (상견례) 갈 때 뭐라고 변명하지? “아이고 그때 참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가지고 만나서 누를 끼치지는 않았는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뭐 처음 하는 혼사가 되어가지고 실례가 많았지요..” “아닙니다.” 둘 다 고개를 숙이는데 각도가 0도가 될 정도로 숙여요. 식사가 와도 식사도 안 해. “먼저 드시고..” “먼저 드세요..” 식사는 다 식어가고 있고..
이거 뭐 양심이 있다 말이에요. 양심이 지가 알아서 고소하고 그 고소에 지가 알아서 원고하고 피고하고 변호사, 검사 혼자 다 하고 있어요. 이게 아까 집사님이 말한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소유가 아닙니다. 선악과는 따라와요. 그냥 선악과는 없습니다. 반드시 마귀가 붙어있는 선악과에요. 인간 속에는..
선악과를 소유했다는 말은 ‘이미 마귀가 선악과를 가지고 우리를 자기 종으로 부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고소하는 데 신이 나는 거에요. 로마서 8장을 한 번 볼까요.. 이건 유명하지만 제가 너무 좋아해서 보자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3~34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의로움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거에요. 우리가 죄를 안 지었다고 의를 내 안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의인 만드는 그런 장인이 아닙니다. 의는 따로 준비했어요. 마음껏 죄인 되라는 거에요.
마음껏 죄인이 될 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거든요. 죄를 더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있는 죄로 충분해요. 현재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갖고 있는 죄, 시기, 질투, 형 죽어라.. 동생 죽어라.. 이런 거 있잖아요. 엄마가 부동산에 40억 남겨놓으니 여동생, 오빠, 양자까지 다 끼어들어가지고 먹으려고 하는 것 mbc에 나왔지요? 고소하고 송사하고 난리났어요. 엄마는 40억 남기고 치매 걸리고.. 부동산은 여러 채 있고..
“누가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말을 제가 설명을 해드려야 돼요. 안 그러면 오해가 있어요. 누가 하나님을 송사합니까? 내가 송사하지요. 내가. 송사는 내가 하고 구원은 하나님이 시켜주고.. 지금 이런 판국입니다. 왜 우리가 남 앞에 드러낼 때 우리 행동 조심하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라서 상상하면서 벌벌 떨고 사돈 만나면서 왜 떱니까?
항상 지금 내가 나를 송사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만나보니까 이렇게 편한 사이인 걸 가지고.. 그럼 뭡니까? 송사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리라.. 내가 이렇게 완전히 기 팍 죽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의외로 뭔가 일이 잘 풀릴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나는 완전히 주눅 들었거든요.
“누가 정죄하리요” “내”가 정죄하지요. 내 속에 마귀가.. 34절에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다시 말해서 ‘너희의 송사함과 예수의 십자가 죽으신 피와 늘 만나면서 살아라. 맨날 송사하고 변명이나 늘어놓는 너의 양심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늘 마주쳐라.’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으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이에요. 그림자라는 것이 있잖아요. 보통 생각하는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있고 그림자가 있잖아요. 보통 상식적인 그림자잖아요. 그런데 어떤 소설가는 그림자가 먼저 있고 우리는 뒤따라간다고 보는 겁니다. 소설 제목이 백 개의 ... 인데 생각이 안 납니다. 그림자(욕망)이 먼저 가고 우리는 뒤따라가는 거에요. 이 말이 맞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잖아요.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버렸습니다. 그림자가 먼저 있고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디가 나오냐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신약, 십자가 이후,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그림자이어야 해요. 어떤 그림자? 십자가의 그림자로서 우리가 하루 하루 살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그러면 십자가 이전의 그림자와 이후의 그림자가 같겠지요? 십자가 이전, 요한복음에 간음한 여인이 나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이퀄이라고 했으니까(같으니까)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겁니다.
들키고 안 들키고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지만 그 바리새인이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거에요. 어떻게 아느냐? 바로 그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송사했어요? 구원받을 간음한 여인을 고소했잖아요. 지금 우리를 누가 고소하고 있어요? 나의 양심이 나를 고소하는 거에요.
그러면 현재 주께서 우리에게 일으키는 모든 사태는 결국 주께서 쓰시는 글의 내용과 마찬가지 효과를 유발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이 가책을 받고 우리는 극구 부인하고 변명하고, 그러면서 돌아서서 또 내가 나를 고소하고.. 혼자 하는 게임이에요.
이것은 남편과 자식이 관계 없어요. 씨애틀의 잠 못 드는 밤이에요. 특히 아침에 일어나면 해야 될 중요한 일을 놔두고 잠 못 드는 경우가 있고, 중요한 일을 해놓고 잠이 안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 잘했을까 못 했을까 그때 두 개 틀려야 되는데 세 개 틀려가지고 A(일)등급 못 맞았았네.’ 시험 치고 잠 못 들고 시험 치기 전에 잠 못 들고..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평생에 사실은 한 시도 잠 못 자야 될 인간이에요.
그러나 시편에 보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다른 말로 “죽인다.”는 말이에요. 너의 구원은 네가 잠 못 드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잠들게 하는 거에요. 내가 성냥개비 가지고 눈을 부러 뜬들, 코 골면서 푹 잔들 구원은 나의 행함과 상관이 없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구원은 내가 나를 송사를 하든, 내가 변명을 하든, 내가 자화자찬을 하든 상관이 없는 거에요. 이 양심이 우리를 고소하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기껏 변명하는 그것을 그대로 하세요. 막 사세요. 결론은 간단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오해하가지고 “이제부터는 내가 송사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인간이 없다니까요.” 아니, 우리 몸이 (자아는 껍데기니까) 우리 안에 들어오는 괴물을 우리 껍데기가 어떻게 관리를 못 해요. 다시 정리합시다.
우리 속에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뱀)가 들어왔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모든 성경 말씀”을 쪽쪽 뽑아가지고 마귀가 그걸 우리로 하여금 “양심”으로 만들어가지고 그 말씀을 봤으니까 말씀대로 우리를 고소하고 찌르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구절을 가지고 변명하고..
하여튼 우리 속에 여호와의 증인하고 신천지 두 명 들어있어요. 서로 싸우고 난리라.. 완전히 원탁회의 하고 있어요. 신천지, 안식일,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부터 해가지고, 합동측, 통합측, 감리교, 침례교 앉아가지고... 전혀 구원은 그것하고 상관없어요.
페이스북에 보게 되면은 소위 신학생,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국정반대 논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예외자”에요. 인간이 알 수 있는 그 바깥에 (있어요.) 그 바깥이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문제인데.. 국정교과서는 누가 들어도 알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외자라니까요. 그런 데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 ‘교회가 부패했다.’ 이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허나 주님은 교회가 부패해도 건질 자를 건져요. 교회 부패하고 주님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헌금을 해야 되는데 미처 몰라서 안 가져왔다. 십일조를 해야 되는데 이번 달은 빠졌다. 선교헌금 도장 찍어야 되는데 도장을 못 받았다.’ 그것하고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애들 참석해야 되는데 못 참석했다.’ 그것하고 구원하고 상관이 없다니까요.
다만 ‘예배 참석 못했다. 찝찝하다.’ 하는 것은 여러분의 양심이 그렇게 가책을 받아서 그런 것이고.. ‘지난 번에 교회에 가려고 했는데 차가 빵구 나가지고 때우느라 예배 시간에 늦어서 못 갔다.’ 하는 사태를 만들어서 찝찝하게 하게 하신 것은 바로 오늘날 이 시대에 주께서 준비한 바리새인, 가마꾼들입니다.
‘그때 빵구 있잖아.. 내가 빵구냈어. 니가 차 타려고 할 때 내가 못 뿌렸거든.. 못 때문에 투당탕탕 소리 났지? 그것 내가 한 거야. 왜? 교회에 못 오도록..’ 15일 동안 출석하다가 교회 한 번 안 와 보세요. 얼마나 찝찝하다고.. 사람들이 십일조, 이십에 일조 하다가 한 번 빠져 보세요. 바들바들 떱니다. ‘요번 주에 나 벼락 맞지 않을까..’ 싶어서 벌벌 떨어요.
그래서 한 번 지나갔잖아요. 두 번 빠져도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일이 더 잘 되네. 세 번째 십일조 안 하니까 땅값이 올라가고 네 번째 십일조 안 하니까 애 성적이 올라가버렸네. 다섯 번째 안 하니까 가정이 화목해져 버렸어요. 그런데 잘 되면 잘 될수록 인간은 더 불안해요. ‘이것 언제 풍선에 바늘 톡 건드리면 한 번에 날아갈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 양심의 구조입니다.
‘아이고 불쌍해 죽겠다.’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해도 우리는 불쌍해요. 왜냐? 아무리 복음을 얘기해도 복음은 남의 일 같고 양심은 현실이고.. 이 성경 말씀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제 강의가 잠 자는 데 좋답니다. 틀어놓고 한 10분만 들으시면 잠이 잘 온대요. 왜? 현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니까.. 뭐 이런 좋은 용도로 써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데..
주께서 글을 쓰시듯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매일같이 우리 주위에 글씨를 쓰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괴물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양심에 가책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변명하죠. 그 변명 중에서 제일 대담한 변명이 뭐냐.. “주님이여 제가 제 죄를 알고 회개했나이다.” “회개 왜 하는데..?” “회개하면 혹시 오던 액운이 떠날까 싶어서..”
그런데 성도한테는 액운이 없습니다. 액운도 없고 저주도 없어요. 왜?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끌어오게 한 하나의 절차요 순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윷놀이 할 줄 아시잖아요. 윷이요 던져가지고 걸이 나오면 한 칸, 두 칸, 세 칸.. 꼭 이렇게 해요. 옛날 사람들은..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바로 세 칸 가잖아요.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다는 거에요. 특히 모 나왔을 때는 더욱 천천히 가요. 하나, 둘, 셋, 넷, 잡았고.. 꼭 잡았다는 것을 강조해요.
간음했고, 살인했고, 부모공경 안 하고, 거짓말했고, 난 지옥가고.. 이런 절차.. 나는 간음한 여인이고.. 이런 절차가 필요해요. 또박또박.. 특히 십계명에서 9계명이 “거짓말하지 말라” 잖아요. 여러분 거짓말이 어떻게 생긴 줄 압니까? “언어”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언어는 어떤 것도 그대로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간단한 두 자인데 “사.람.”을 표현하려면 길어져요. 길다고 정답에 가깝습니까? 아니에요. 그것도 다 채우지를 못해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시인들이 말로도 다 채울 수 없는 사랑.. “언어”는 뭐냐 하면은 끼리끼리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약속인데 문제는 그 약속이라도 인간 속에 양심과 가책과 변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순간, 각자 느끼는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심에 따라서 다 달라요.
양심은 진화합니다. 양심은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제가 요새 (때우는)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 치과 의사가 불도를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내 고등학교 후배인데.. 내가 교사했던 것을 아는데 계산을 해보니 내가 퇴직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나를 불교로 전도할 요량으로 “아이고 선배님 시간이 나면 같이 차라도 하시죠.” 하고 금강경 펴놓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주께서 복음 전하라는 기회를 주셨구나.’ 해가지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요. (전에) 내가 “금강경 내용이 뭐냐?” 스님한테 물어보니까 “‘자기 마음을 낮추라.’는 것이 금강경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래서 내가 질문을 했지요. “지금 마음 낮춰도 5년 뒤에 마음 높아질 건데.. 지금 낮출 때는 낮추는 기준이 있을 거고 그 기준을 지금은 적용시켜서 낮췄다고 판정을 내리더라도 5년 뒤에, 또 6개월 뒤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서 그것이 높은 것으로 드러날 때는 어떡하면 돼죠?” 할 말이 없어요.
윤리, 도덕이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을 몰랐던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지요. “불교에 금강경 말고 화엄경이 있습니다. 화엄경에 의하게 되면 모든 것은 다 인연에 의해서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화엄경이 기껏 해봐야 우리가 아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국 불교는 아무리 해도 현실에서 못 벗어나요.” 하니까 받아적어요. 이제는 전도가 되는 거에요. 전도의 갑을이 역전되었어요.
저는 중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머리 깎습니까?” 아무리 내가 불교를 연구해도 머리깎으라는 이야기는 없어요. 부처가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거든요. 이것은 바로 불교도 문화이기 때문에.. 문화는 왜 문화냐.. 돈이 생기기 때문에.. 머리를 깎는 중과 안 깎는 중의 수입이 달라요.
그 시대에서는 ‘중은 이 시대의 스승이다. 따라서 돈을 드리는 게 마땅하다.’ 그러면 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머리 훌러덩 깎는 것으로 (구분)해.. 머리 더벅해가지고 중이라고 하면 안 알아줍니다. 머리를 다 깎아줘야 (특히 여자까지 다 깎아줘야..) 자기 낮춤, 자기 희생이 강렬하겠는가 이게 신부들 로만 칼라 입는 것과 목사들 뺏지 다는 것과 전부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중들은 답변이 없습니다. 그만큼 문화는 돈 모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돈 모으기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얘기했죠. 목사와 교회는 사기꾼들입니다. 내가 목사니까 이런 소리합니다. 이런 소리를 붙여놔야 “목사니까 욕 얻어먹고 살지..”
예.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절에서 공부만 하는, 진리만 캐는 중하고 그냥 돈만 챙기는 중하고 반반 본다는 거에요. 교회는 백프로입니다. 다 사기꾼들입니다. 그래줘야 그쪽에서는 기독교 욕 못할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야기하잖아요. 사실은 우리 조카가 목사인데 목사님처럼 지금 한창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그것 복입니다. 그냥 넘어가세요. 그 갈등한다는 게 복입니다.
지금 주어진 사태가 기어이 ‘우리는 안 가겠다.’는 천국을.. 우리는 그저 내 양심대로 살기를 원하거든요. 내가 알아서 덜 욕 얻어먹고 변명은 멋있게 해서 내가 봐도 진짜 완벽한 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성화” 아닙니까?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사태를 일으켜가지고 우리가 자기 의를 못 버리는 자기 괴물을 못 벗어나는 존재인 것을 완전히 까발린 채로 나오면, 그때는 주님의 십자가가 엄청나게 크게 보이는 거에요. 그대 안의 나는 왜 작아지는가.. 주님은 크게 보이고.. 나는 조그맣게 보이는 거에요.
목성에 갔던 보이저 5호 있지요. 나사에서 보낸 목성 사진을 보면 목성이 있으면 보이저 5호는 (크기가) 아주 작은 점만 해요. 이것을 볼 때마다 나는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나는 작고 주님은 큰 정도가 아니고 (큰 정도보다 더 중요한 말이에요.) 늘 거기 계시고 나는 있다가 파리처럼 날아가 없어지고..
이게 이사야 6장에 나오지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지식으로 알던 주님이 아니라 직접 만나보니까 “화로도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성경책 읽고, 십일조 온갖 것 해가지고 죄인이 안 되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는 나를 기어이 죄인 되게 만들어 내셔서 건져 내시는, 가마꾼까지 보내주시는 주님..
가마꾼이 뭡니까? 나하고 같은 풍조, 나하고 같은 정신, 한 사상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저희들끼리 잘났다고 (또 십자가 마을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저희들끼리 지금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그런 조치를 해서라고 기어이 죄인 되게 하시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나는 미리 당겨서 본 예수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갑자기 노래 생각이 나는데요.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맘대로 막 사시면서 쉬세요. 그 다음에 계속해서 봅시다. 사장님께서 진도 안 나간다고 하니까 진도 한 번 나가봅시다.
10절 봅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 외에 아무도 없지요? 왜 여자 외에 아무도 없겠습니까? 거기에서 2km만 떨어져도 마을이 있고 이것이 다 마을에서 일어난 일인데 왜 없겠습니까? 있지요.. 주님은 지금 뭐만 봅니까? 그 여자만 보지요. 왜 착한 짓도 안 하고 나쁜 짓만 했던 여자를 왜 봅니까?
주님에 의해서 그 짓을 해야 될, 이미 주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용석과 김민아 같은 그런 깊은 관계.. 이미 창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 성도치고 창세 전부터 몰랐던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야곱을 사랑했거든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특수성 있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영원 전까지 꿰뚫어보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창세 전에 예정된 것이 지금 너한테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너는 너를 쉽게 보지 마라. 니가 보기에는 니가 아무런 존재도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고귀한 존재다.’라고 하시는 거에요. 왜? 그 안에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내 행함 (과거의 기억과 미련)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이것을 주께서는 죄로 만들어 버리세요. 없애는 것이 아니고 이걸 시커멓게 먹칠을 해서 죄로 만들어 버려요.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이 죄가 된다. 죄가 되기 때문에 의가 되어버려요. 말도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렇게 하면 어렵지 않아요. 죄가 된다고 고백을 하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의가 되어버려요. 그것을 가지고 “내 안에서 죄가 되고 예수 안에서 모든 게 의가 된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서 의인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죄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이렇게 증거하는 겁니다. 여기에 “여자 외에 아무도 없다.”라는 말은 아까 얘기한 “예외자”입니다. 지금 모인 바리새인과 그 여자만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은 예수님마저 여자와 한 패 먹었으니까 예수님 본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그 간음한 여인을 홀로 두게 만들어서 증거케 하는 거에요.
“혼자냐? 나도 혼자다. 슬프냐? 나도 슬프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에요. 드라마를 안 보시니까..“외로우냐? 나도 외롭다.” 복음을 아는 사람들의 특징들이 “외롭다.”는 거에요. 친구들 다 떠나고 말았어요. 친구 붙들어도 가 버려요. 그 친구들 붙들기 위해서 전에보다 더 돈을 많이 써야 돼. 아양 떨고 해도 가 버려요. 그쪽이 먼저 알아요. 그쪽이 영을 알아봐요.
“너 내가 알던 저의 너하고 달라졌다.” 그러면 “그래 내가 그랬다.”라고 하지 마시고 “나도 미치겠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으로 자꾸 달라져.”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 같아요. 강제로 입원시키는 것 같아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 가사처럼 점점 더 멀어져가요. 그 노래 원래 제목이 “사십 즈음에”라고 해요. 그런데 인기가 없으니까 제목을 바꿨답니다. 그건 관계 없는 이야기이고..
점점 더 멀어져가요. 부부 대화의 핀트가 안 맞아요. “당장 국정교과서 하지 말아야 돼. 촛불집회 해야 돼.” 하면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고 당신은 돈만 벌어오면 되는데 추운데 밖에 나가서 촛불집회 왜 하는데.. 당신하고 대화 안 해. 쓸데없이 오지랖 넓게 하지 마.”
그런데 아무도 없는 이유가 있어요. 10절 말씀에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어요. 내가 분명히 했지요. 지금 십자가 전이기 때문에 우리를 고소하는 그들을 바깥에다, 아줌마를 예수라고 보고 아줌마를 고소하는 자들은 바리새인이고 지금 그것이 작게 우리 안에 다 들어있고 그렇게 보시면 돼요. 양심에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양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켜보는 분이 있었다. 주님이 우리의 양심이 얼마나 율법적인가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주님도 눈이 있겠다.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있는데 왜 묻습니까? 그것은 누구의 말로 이야기하려는 겁니까? 예수님은 알고 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알고 있는 그 세계가 누구의 세계로 바뀌었다는 겁니까? “여자여 너의 세계야.” 쉽게 말해서 남편이 BMW 사주니까 부인이 하는 말. “자동차 잘 타려고 샀지?” 그런데 남편이 “당신 생일이잖아.”해가지고 리모트 해가지고 키를 아내한테 “당신 주려고 샀지.” 이러는 것처럼 예수님이 했던 정죄함이 없음을 이제는 여자 안에다가 집어넣는 거에요. 예수님이 여자 안에 들어온 거에요.
너를 정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너를 정죄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거에요.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 정죄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런데 정죄할 수 있는 그 자격자가 뭐라고 합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게 최종수능시험이에요. 하나님의 시험이에요. 천국이냐 지옥이냐 시험치는 겁니다. 시험 해답은 딱 한 개에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결국 이것은 “여자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자를 이용한 거에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예수님하고 소탈하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멀찍이서 본다면 “저 아줌마하고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는데 나중에 아줌마가 나왔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하는데..? 여자가 뭐라고 하겠어요?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아.” 남들이 너희를 정죄하는 것에 구애받지 말라는 거에요. 왜? 그들은 최종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에..
최종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것은 예수님이 결정하잖아요. 믿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그때 가서 결정하면 안 되고 미리 (심판을) 받아야 돼요.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는다.” 어떤 자에게?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정죄하지 않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흙으로 되어가는 것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지요. 주님 증거하려고 나를 늙고 죽어가게 만들었지요? 내가 안다니까. 다 주께서 했잖아요.”
니가 어떻게 아니?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레미콘에서 콩크리트 나오지요. 타설한다고 하잖아요. 옥상에다가. 줄줄 믿음이 나온다니까요. 예수님의 본 모습이 믿음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우리한테 부어지는데 그 속에 요한복음 8장 11절이 담겨있는 거에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를 내가 믿게 되는 거에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게 아니고, 믿는다는 행위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부어주는 그 속에 요한복음 8장 11절이 포함되어 가지고 정죄함이 없는 존재로서 우리가 살게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예외자로 만들어서 따로 추려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주님 가진 것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부어주니 그것이 우리의 영생이 되었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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