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7장 40절 / 거주지 151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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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39절 한 번 봅시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믿는 자에게는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나오지요. 이 말을 사도바울 식으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니는 니가 살아서는 안 된다. 너가 살아서는 안 돼. 너가 살지 말고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살아야 니가 살아. 만약에 니가 니 인생 살면 니는 괴로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좋은 환경, 돈이 수백억 있어도 괴로워요. 그것이 내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니 인생 니가 살지말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바꾸어주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합닌다. 그래서 내 인생을 내가 쥐고 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내가 살아야 돼요. 내가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그럴 재주도 없고요. 누구를 모실 수가 없어요.
하여튼 내가 산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고 실제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살려주는 경우에만 우리가 살 수가 있습니다.(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도 닦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교회에 와서 말씀 지킨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뭐가 와야 됩니까? “니 속(배)에서 성령이 나오리라.”
어디 배를 째든지 해부하든지.. 서양에 이런 동화가 있잖아요. 어떤 닭이 자고 일어나면 금닭을 낳으니까 하나씩 하나씩 받아 모으면 되는데, 그 욕심을 내서 금 있는 줄 알고 째보니까 금이 어딨어요 똑같은 닭인데..
내 안에 예수 있는 줄 알고 째봐야 예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성령은 나와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내 인생이라고 봤을 때 이미 그 인생은 왜곡된 인생입니다. ‘야,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이니까 천국보내야지..’ 이미 시작을 그렇게 했잖아요. 시작을 그렇게 했으면 그 금닭 배 째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째봐야 똑같아요.
베드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구경꾼들이 능력이 나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억울한 거에요. 진짜 능력이 나오는 줄을 조사해 보면 큰 문제에요. 왜? 자기한테는 능력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나오는 거에요. 초반부터 어려운 것 하네요.
교회에서 능력, 능력하는데 그래서 교회가 사기가 되는 이유인 겁니다. 능력에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나오는 겁니다. 능력이 없게 하시는 방식으로서 능력을 베푸시는 거에요.
서양 동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귀족부인이 너무 잘살아서 교만했어요. 남편이 인도에서 무역하는 사람인데 남편이 무역갔다가 인도양에서 배가 파선해서 뒤집어져가지고 남편을 포함해서 다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은행에 저당 잡혀 놓은 것 부도났을 것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하루 아침에 좋은 옷 다 못 입고 원피스 달랑 하나 입고 쫓겨나다시피(자기 집도 아니니까) 나왔지요.
나왔는데 보니까 그 바닷가에 밀이 많은 거에요. 그래서 같이 쫓겨나온 하녀에게 “야, (배고픈데) 밀이 왜 저리 많아?”하고 물어보니까 하녀가 하는 말이 “부인님이 옛날에 버렸던 거에요.”라고 했더랍니다. 밀이 그만큼 고귀하고 좋다는 것을 이 귀족부인이 언제 알았어요? 자기 것, 내 꺼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그딴 밀”이 아니고, 진짜 배고플 때 “정말 중요한 밀”이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존재”라는 것은 “소유가 있을 때만” 존재가 돼요. 내가 가진 것을 테두리 칠 때 이사람이 존재로서, 자아로서, 또는 주체로서 등장이 되는 겁니다. 재산은 얼마고 학력은 이 정도고 애는 몇 명이고 집은 몇 평에 살고.. 내 소유된 것을 울타리 치면 그게 내 존재가 된다는 거에요. “나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런 것이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살하겠지요? 자살까지는 안 가지만 자살 충동이 생기겠지요?
“왜 죽고 싶어요?” “소유가 없는데..” “그럼 소유 없이 굶어죽을 때까지 살면 되잖아요?” 왜 소유가 없다고 앞당겨 죽으려고 했습니까? 전에 있는 버릇이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이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울타리 쳐서 나라고 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재산 다 날라가고 건강도 잃고 다 날라갔을 때 그냥 죽고 싶은 겁니다. 욥처럼.. 인간이 이 소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님으로 가장 확실하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점이 무슨 사건입니까? 예수님이 주 되심으로 자신의 일을 다 이루셨다고 하셨던 그 시점이 어느 시점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다 이루었다”를 어디에서 (말씀)하셨습니까? 십자가지요.. 병 고치고 물 위를 걷고.. 산상수훈에서 끝났다. 이게 다 이루었다가 됩니까?
십자가에서 뭡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의 말씀으로 버림을 당할 때 비로소 예수님은 자기 소유가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일과 결부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일에 의해서 주님(예수님)이 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게 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게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아서 되는 겁니다.
그 성령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라는 거에요. 엄청나지요. 뭐 성경 몇 개, 산상수훈 지킨다고 해서 천당가는 것 아니지요? 인간 자체가 완전히 다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해석할 때에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해석하면 됩니다. 특수성(특수한 사건)을 통해서 보편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특수한 사건이지요. 그 특수한 사건에서 미처 몰랐던 세상의 진리, 감추었던 비밀을 거기에서 다 낼 수가 있어요. 비밀이라는 이야기는 로마서 16장에 나옵니다. “감추었던 비밀”.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창세 전부터 감추었던 비밀” 왜 성경에 사도바울은 “비밀”이라는 말을 했을까요? 비밀이라도 알려주면 비밀이 아닌 것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비밀을 없애기 위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비밀을 비밀 되게 하기 위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들어도 모르고 봐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준 거에요. 이게 이사야 6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무식하다는 것을 너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너희들은 전혀 이쪽 세계에 올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냥 주님께 감추어 있으면 비밀이 아니에요. 이것을 인간에게 폭로를 함으로써 비로소 비밀이 비밀답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비밀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비밀로 이야기하고 싶은 대상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 대상이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본인이 예측하거나 예상한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십자가 알았으면 다 알았네’가 아니에요.
옛날 할머니들이 손자나 손녀 잠재울 때 이야기해주잖아요. 그런데 옛날 이야기 한두 개 하고 끝납니까? 그 다음날 이야기가 또 나오지요? 그래서 손자와 손녀가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우리 할머니 옛날 이야기는 끝이 없어요?”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끝없는 비밀이야기가 나오는 하나의 함으로 사용을 한다니까요. 그 함을 내가 소유하면 안 됩니다. 내가 소유하는 식으로 살면 이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강제로 공출당하는 거에요. 트럭이라든지 경운기라도 전부다 개인 차도 나라에서 전쟁하기 위해서 공출해가지요.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 그전에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공출해가시는 겁니다. 내 안경부터 해가지고 내 옷,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 내 은행 잔고까지 전부다 공출당해요. 그 공출한 것을 어디에다 쓰냐 하면 비밀을 나타내기 위해서 재료로 씁니다.
만약에 주께서 “야, 야. 니 것 쓰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내놓지요.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안 내놓고 대충 쓸데 없는 것을 내놓으면서 “이거 주님 쓰세요.” 할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뭘 내놓으라고 하셨습니까?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놓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공출하셨잖아요. “야, 니가 믿음이 있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잖아요.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번제로 바쳤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창조주기 때문에 피조물을 마음껏 공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병이 나았잖아요. 우리 같으면 ‘메르스도 3개월밖에 안 가던데 왜 나는 도대체 벌써 38동안이나 병 들어있는데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불평 할 만도 한데 38년이든 48년이든 어차피 본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 하는 그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은 38년 동안 병 들어야만 하는 거에요.
세상에 작가들 중에 어떤 여류 작가는 말하기를 ‘신이시여, 내가 왜 남자가 아니고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그것을 누구한테 물을 거에요? 작가가 글을 쓴다고 해서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몰라요. 왜? 그것은 복음 안에서 성령을 받게 되면 비밀에 속하는 거에요. 진짜 성령 받아가지고 “주님, 저는 왜 여자로 태어났습니까?”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내가 너한테만 비밀로 이야기할게. 니가 여자로 태어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거야. 이제 알았지. 이 비밀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 니만 알고 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 나는 내가 남자가 되고 싶은데 여자가 되어서 분하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아까 강의할 때 소유라고 했지요? 소유는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존재가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성령 받은 그 여류작가가 ‘나는 예수님의 비밀을 위해서 여자가 되어야 돼.’라고 하면 그 여류작가는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비밀스러운 인생을 위해서 여성이어야 된다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죠. 그러면 그때부터 그 여자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 그럼 두 번 다시 ‘나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남자로 태어나면 남자라는 것을 자기가 소유해버리고 “나는 남자다.”가 자기 존재가 되어버리니까 이 사람은 주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존재를 증거하게 되어버리죠. 그 사람(피조물)은 주님 보시기에 비밀을 아는 사람답지 않은 겁니다. 속에서 성령이 나온다는 것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께서 하는 일은 매일같이 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고 그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어떤 가수는 말하기를 “다 포기하지마.” 이런 소리를 했다는데 성경은 “다 포기할 만한” 너가 없다는 거에요. 포기할 만한 너를 나는 만들지를 않았다. 애초부터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없는 거에요. 이것이 이해되면 그 다음 말이 이해가 됩니다.
39절 후반부에 “(...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라고 나오는데.. 지금 괄호 안의 말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한테 시험받을 때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무엇을 알면 쉽게 풀리느냐 하면 “산다.”는 거에요. “산다.”는 개념은 떡(돈, 밥)을 원할 때는 말씀 속에 “산다.”가 감추어져 버려요. ‘열심히 떡 먹고 살아서 복음 전할게요.’라고 해버리면 “산다.”의 원래의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떡을 포기하고 ‘나는 말씀 때문에 산다.’라고 했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 “산다.”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안에 살아계시는 분이 계셔요. 그분이 예수님이세요. 그것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그냥 “말씀이 살아있다.”라고 했는데 정확히 말해서 “말씀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 공식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말씀으로 산다고 했잖아요. 그전에 요단강에서 세례(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사신 모든 것이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사셨지요. “산다.”는 표현을 보여주는 분은 예수님 빼놓고는 없어요. 예수님이 사는 것이 사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이 주는 스케줄에 따라서 사셨잖아요.
“말씀이 응하려 함이라” “때가 되매” 항상 표준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가가 표준이지 다른 주기철 목사 이런 사람은 보기 들지 마세요. 지나 내나 죄인인데.. 그 사람은 표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이 뭡니까? 참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은 바로 “예수님뿐”입니다. 그것을 “인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만 말씀대로 살고 나머지는 사는 게 아니고 “죽음”입니다. 전부 죽어버린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까 괄호 안의 말씀에서 성령이 온다고 했는데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하면 예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지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여기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되어있지요.
예수님은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아직 저희는 성령을 안 받았어요. 그러면 예수님 혼자 성령 받았잖아요.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안 받았어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면 예수님께 있던 성령이 어디까지 간다는 말이지요? 저희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택한 백성들에게로 예수님이 가졌던 성령을 그대로 줄 수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이 아니다.” 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거에요. 이 “그리스도의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영의 사람이지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우리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누가 “니가 인간이냐?”라고 하거든 “나 사람 아니야.”라고 하세요. 사람이 되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달라요. 마치 예수님이 보통 인간하고 다르듯이..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사람이 아닙니다. 관리의 주체가 성령이 되기 때문에.. 성령의 반대말이 악령이거든요. 다른 사람은 악령이 주체가 되어서 관리하지만 성도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관리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논리는 아주 간단한 논리에요. 그 악령하고 예수님하고 싸웠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누구하고 싸운다는 말입니까? 악령 받은 보통 사람과 성령 받은 성도하고는 이 땅에서 안 싸울래야 안 싸울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할 일이 없어서 산책하려고 돌아다닙니까? 마귀가 이 마지막 때에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목적은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마귀가 했던 짓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는 일을 훼방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거든요. 그 성질이 어디 가겠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곳이 십자가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무효화시키면 되고 그게 사탄의 꼬봉(종)들이 하는 짓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십자가에 뭔가를 섞어 넣으면 되겠지요.. 이물질을.. 뭘로 섞어 넣으면 됩니까? 행함이죠. 십자가 피로 의로운데 그 의로움이 성에 안 차는 거에요. 내가 의롭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싶은 거에요. 그럴려면 과거에 자기가 주인이면서 느꼈던 그 느낌을 십자가에다가 섞어넣어 버리지요.
아까 어떤 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지하철에서 전도를 30년 동안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자기한테 찾아와서 “교회 다니겠습니다.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아무 소리를 안 했거든요. 그래서 실망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전도했어도 한 명도 전도가 안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니까 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한 자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아서 각기 알아서 교회에 갔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미국에 어떤 사람의 실화를 담은 비디오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것을 보고 어떤 성도님이 목사한테 물었잖아요. “목사님, 왜 그걸 궁금해합니까? 전도해놓고 본인이 왜 그걸 궁금해하지요?” 참 뛰어난 질문이에요. 5년 동안 제일 뛰어난 질문이에요. 정말 뛰어난 질문이에요. 왜 그걸 궁금해합니까? 전도하면서 뭘 기대했어요? 내가 평소에 주인공이었던 그 버릇을 그대로 거기에다가 담은 거지요. 그러니까 누굴 전도하고 누굴 믿은 거에요? 자기의 행위를 믿은 거에요. 그게 극단적인 악마의 모습입니다.
경건의 모습을 띈, 순교자의 모습, 거룩의 모습이 가장 악마적인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보고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신 거에요.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을 막고 본인도 못 들어가는 그 역할을 그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해야 되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이 축구의 골대잖아요. 그렇다면 골대에 열한 명 선수가 다 패널티킥을 막는데 그 역할을 바리새인들이 하는 거에요. 천국에 못 가도록 할 때 그냥 서있습니까 아니면 뭘 뱉어냅니까 그들이 뭘 전파하잖아요 한 명의 교인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바다 끝까지 가잖아요. 그러면서 그들이 전도한 내용이 뭡니까? 율법을 행하는 자만이 복 받아서 천국 간다. 신명기 봐라. 말씀을 지키는 자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다고 성경에 분명히 있잖아. 그리고 십계명을 봐라. 이 말을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말이 분명히 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자 없는 바른 그 소리 그대로 한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겠지요.
따라서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무시하지 마라. “니가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했으니까 “하라.”고 해야 상급받고 의롭게 되고 천국갈 때 인정받는다. 이게 주의 뜻이니까 지켜라. 나는 목사로서 성경 그대로 했기 때문에 나는 하자가 없다. 이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교회 아마츄어들이 알 수가 있나..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성령 받는 사람은 알지요. “성도님은 헌금을 했습니까? 십일조 했습니까?” 성령 받은 성도는 묻습니다. “목사님은 왜 그걸 궁금해하지요? 니(목사님)나 잘하세요.” 왜 남의 일에 궁금해해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제가 의존교회 강의할 때 디모데했잖아요. 가르친다는 말의 내용은 뭐가 되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목사가 가르친다는 이 가르침도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했잖아요. 내가 당신을 가르친다는 것이 절대로 내가 당신을 가르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가르침 속에서 가르친다는 이 행위를 통해서 내 존재가 삭제되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승천해야 성령이 오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된다는 사실을 저는 언급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르침 받는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가르침 천만 번을 받아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떤 행위도 거부당할 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 한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증거하는 거에요. 성령이 임하면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39절 또 해봅시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한가? 지금 제가 질문하는 취지가 뭐냐하면 예수님은 성령 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만 성령 받으면 되지 우리는 왜 (성령을) 받아야 되지요? 성령 받아야 구원받기 때문에...(라고 답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안 주면? 안 줘도 괜찮잖아요. 안 줄 권한이 있잖아요. 꼭 주님께서 누구한테 뭘 줘야 됩니까? 안 주시고 주님 혼자 구원받으시면 되는데 왜 그러셔야 하는가.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37절에 나옵니다. 37절 다시 봅시다. “명절 끝날에”라고 했는데 명절이 초막절이죠. 초막절 끝날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것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예언이죠. 그렇다면 성전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또는 예수님께 성령이 나와야 되는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 성령 받은 사람이 또 성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약속이 있어요. “성전만들기”라고 사전에 약속을 했습니다. 성전을 만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주지를 확정짓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이 뭡니까? 라고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거주지를 만드는 작업”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이유가 하나님이 건져낸 부산물 가운데 성소가 되기 위해서 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앞에 불러다가 애굽에 보낸 것은 그들을 불러다가 이 모리아 산 앞에서 내 앞까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했다. 그러니까 성소가 되기 위해서 한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내용이 뭐냐? “하나님의 성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두 개의 보좌가 나오는데 하나는 어린 양의 보좌가 나오고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지요. 이 보좌가 나온다는 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볼 때 일곱 촛대에 다니지요. 일곱 촛대라는 것이 구약에 보면 성전에 가지가 일곱 개 난 촛대가 나와요. 그러니까 전 우주의 성전화라고 보면 돼요.
성전이 어떤 가건물이나 부동산 어떤 구역에 있다가 이것을 전 우주로 확대시킨 거에요. 그러니까 성전 만들기에요. 왜 성전을 만드는가? 거주지거든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 거주지가 필요하냐? 여기에서 비로소 사도바울의 그 어려운 개념이 풀리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때가 되매..) 거주지가 될 때 “안과 밖”이 결정됩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지요? 그 “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안”.
“안과 밖”이 되려면 그렇게 결정되게 할 수 있는 그 우리의 주인님께 특정한 거주지가 성립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안과 밖”이 확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예수 안”이 확립될 경우에만 “밖”이 있는 거에요. 따라서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하나님께서는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 이게 맞는 말이에요.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돼요? 천국이 확정되게 되면 그 외(except)는 전부다 지옥이 되는 겁니다. “안과 밖”이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습관이 뭐냐 하면은 자기 거주지가 있잖아요. 이 때 자기 거주지를 house(빌라, 아파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인간은 자기 존재가 거주지에요. 인간은 아버지 집이 거주지가 아닙니다.
만약에 아파트에 방이 다섯 개 있다고 칩시다. (제법 사는 집이지요) 그리고 애가 한 세 명 있다고 합시다. 아빠 서재, 아빠 엄마 같이 쓰는 방, 나머지 방1, 방2, 방3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애의 거주지가 어디입니까? 처음에 태어날 때는 아기겠지요? 그런데 점점 자라나면 자아가 자라납니다. 그래서 한 6살쯤 되게 되면 “엄마 나도 내 방 줘.” 이렇게 됩니다. 그 방이 거주지가 아니에요. 내 방을 달라고 하는 그 “자아의식”, 그 “주체성”이 거주지에요.
여기, 이 시점에서 내가 부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부부가 둘이 한 몸 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각자 거주지가 있는데 무슨 한 몸이 돼요. 평생 살아봐요. 한 몸이 되는지.. 안 돼요. 본격적인 영토 싸움하려고 붙은 거에요. 둘 다. 니가 나한테 붙든지 내가 너한테 붙든지 둘 중에 하나가 붙어야 돼요. 그런데 둘 다 만만치 않아요. 끝까지 자기 영토 양보 없어요. 끝까지 안 돼. 그래서 황혼이혼이 많잖아요.
그래서 니 영토 양보 안 해도 되고, 양보하는 척하면서 둘 사이에 돈이 등장합니다. “집은 내 이름으로 해줘. 땅은 내 이름으로 하고..” “차는 그러면 누구 이름으로..” 그러면 자아를 서로 존중해주고 영토 안 건드리기, 자기 거주지(자아 주체성) 안 건드리기, 그 다음에 돈으로 얼추 정리가 되었습니다. 집은 아내 이름으로 하고 나머지, 유산 받은 땅은 남편 이름으로 정리가 되었어요.
그거 정리되고 난 뒤에 “우리 친구로서 친하게 지내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가 좋으려면 밑에 돈 문제부터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돼요. 그걸 밍기적 미루면 아내가 자꾸 불안해해요. 그걸 정리해주면 아내는 그 다음부터 남편한테 맛있는 낙지볶음도 해주고 잘해줍니다. ‘나 이거 해가지고 나중에 큰아들 줘야지..’ 속으로 온갖 계획, 구직의 꿈을 다 꿉니다. 그것 안 해주면.. 결국 한평생 아내로 그만큼 봉사했으면 반 이상은 가져가야지요. 반 플러스 알파로 가져가야지요. 그것 안 되면 사랑과 전쟁 3편 나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부부들은 이것을 미리 알아서 결혼 하게 되면 통장을 각자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명한지 아니면 바보인지 안 그러면 결혼 왜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각자 하고 있어요. 서로 돈문제 안 건드리면 부부 사이가 좋습니다. 그러나 돈문제 건드리면 “엄마 나 이혼할까?”하고 친정에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인간의 자아라는 거주지는 양보가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부부 간에 양보가 되었어요. 왜냐하면 거지로 갔기 때문에... 밥 먹기 위해서 시집에 하녀로 팔려갔거든요. 밥만 먹여주면 좋아요. 그대신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해요. 왜냐하면 재산을 줘야 되니까. 아들을 낳는 조건 하에 밥만 먹여주게 되면 그집 귀신이 되는 겁니다. 참 옛날 이야기에요. 왜 성경 이야기하다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지...
그런데 이게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하면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남편이 양보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인간은 스스로 양보할 수 없어요. 양보해봤자 양보했다는 그 착함과 의로움이 나의 거주지에 하나의 재료로, 나를 풍족케(경건하게) 만드는 재료로 또다시 나의 존재를 더 강화시키는 이런 낭패를 당해요. 분명히 내 인생은 없어져야 되는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더 고상하게 거룩하게 훌륭하게 내 인생이 위대해져 버려요. 나중에는 정신병자 되어버린다니까요. 성령을 안 받았으면서도 성령 받은 티를 내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는 교회로부터 탈출해야 된다고. 목사가 교회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목사의 게임하는 장소에요. 지 까부는 장소고 교인들은 같이 까불고 놀아나고.. 천하를 모르고 끄집고 까불고 난리나요. 재미나게 놀고 있어요. 왜 교회에서 벗어나야 되는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데 목사가 교회로 살게 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 나가면서 퇴직금 더 챙기려고 하고.. 주는데 받으면 훌륭한 목사에요. 그런데 더 챙기려고 하는 이유가 그 동안 예수 십자가 이야기가 전부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는 그 본색이 다 들통난 겁니다.
목사가 안 그런 척하지요. 그러나 사모는... 사모 등살에 못살아. “내가 니 보고 살았나? 니 가진 재산 보고 왔지..” 사모는 아내 아닙니까? 아까 거주지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분명히 이야기합시다. 이런 자리 아니면 어디서 밝히겠습니까? 거주지 확보하려고 결혼했다고 누가 밝히겠어요?
그러나 그 거주지는 성령이 오게 되면 파쇄, 다 부숴져야 돼요. 두 개의 거주지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두 개를 용납하게 되면 “내 안”과 “내 밖”이 따로 생깁니다. 그런데 따로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 내가 질문을 하지요. “만약에 당신이 천국 갔는데 당신이 사랑하는 딸이 지옥에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서 기분 좋겠습니까?, 당신은 택함 받아서 천국 왔는데 사랑하는 딸(요새 아들은 별로니까)이 지옥에 가 있다면 천국생활이 싱글벙글 신이 나겠어요 안 그러면 슬프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거에요.
이것에 답변은 두 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1. 싱글벙글이다. 2. 속상하다. 몇 번입니까? 평소에 “내 안”에서 “주님 안”으로 마음을 미리 바꿨으면 됐을 것을 가지고.. 그러니까 딸을 그동안 “내 안”에 있는 딸로 본 거에요. 그래서 우리 딸을 줄세워 보냈는데 다른 여자애는 앞에 가는데 지 딸은 삼 등으로 가다가 엎어져 서버리면 “아휴, 내 딸..”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자기 딸이 만약에 이 등하다가 일 등으로 엎어지면 “야, 내 딸!” 이렇게 나오지요. 일 등하니까.. 이 모든 게 뭡니까? 내가 거주지잖아요.
거주지의 특징이 영원불변이에요. 영원함.. 교회 영원한 것 없어요. 자기 영원하라고 교회에 다니지.. 자기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 다니지 교회 영원하라고 교회 다니지는 않거든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이미 거주지에 합세한 거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계속 나온다는 말은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오잖아요. 심지어 그 물은 어느 정도의 물이냐 하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물. 이거는 홍수같애. 박태환이 헤엄쳐가지고 ‘휴, 벗어났다.’ 이렇게도 안 돼요.
그 성령을 받는 게 아니에요. 성령 안에서 헤엄치고 있지. 성령은 우리보다 부피가 커요.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의 물방울 같은 거에요. 성령 안에서 노닙니다. 이게 신약의 특징이에요. 그러나 구약의 특징은 성신 안에 노는 게 아니에요. 성신이 온 사람에게만 일시적으로 기능을 할 뿐입니다. 성신은 일시적이에요. 성령은 완결형입니다. 성신은 개울가고 성령은 큰바다에요.
‘성신’이라는 이름의 가수가 있고 영화배우 중에 ‘성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김성령이 있고 박성신이라고 옛날에 박재란 딸이 있어요. 내가 ‘성신’ 나올 때마다 은혜 받습니다. 그런데 일찍 죽었어요. ‘성신’도 있고 ‘성령’도 있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딸 이름을 그렇게 지었나 몰라요. 그래서 미스코리아 진이 되었나 몰라요.
흔히 하는 질문입니다.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성신’은 한 번 비췸을 얻고 끝났어요. 그러나 ‘성령’은 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풍덩 집어넣어 버려요. 왜냐하면 그게 주님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거주지가 두 평, 세 평이 아니거든요. 넓어요. 성령이 넓잖아요. 그래서 그 안에 빠지면 나갈 구멍이 없어요. 한번 천국 안에 갇혀보실랍니까? 천국은 나갈 길이 없어요. 완전히 막혀있어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했어요. 완전히 죽기 싫어도 거기에 영원히 살아야 됩니다. 천국은 나를 위한 거주지가 아니고 나를 죽여버리고 주님의 거주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내 딸(아들)은 왜 못 오는데?’ 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고 아내도 내 아내가 아니에요. 그때는 천사와 같아서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갑니다. 이 땅에서 처녀인 사람은 죽어서도 처녀입니다. 영원히 결혼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결혼 못 하면 거기에 가도 결혼 못 해요. 그냥 예수님하고 결혼했다 뿐이지 (혼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것은 한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흙(형체)으로 있을 동안만 한시적으로 주의 비밀을 증거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된 거에요. 남자, 여자와 비슷한 개념이 하나님의 오른편, 왼편입니다. 왜 하나님은 오른편으로 구원하지요?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오는데 왜 하나님은 하필 왼손은 안 하고 오른손만 합니까? 한 쪽이 일해서 한 쪽은 혜택을 입은 거에요.
보통 우상은 하나님이 일해서 비는 우리한테 혜택이 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체적으로 혜택을 입을 자를 자체 안에서 생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혜택을 못 입어요. 우리가 죽고 난 뒤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이 혜택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착한 분이니까 혜택 주세요.” 하면 안 줍니다. “너는 죽어야 돼.” 죄인에게는 어떤 혜택도 주지 않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조건 하에 죽고 난 뒤에 부활의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조건이에요.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잖아요. “함께 세례받아서 함께 죽었으니 함께 살리라” 산다는 말은 반드시 전제를 까는데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사는 거에요. “니가 죽은 자라면 살 수 있다.”지, “니가 살아있다면 살 수 있다.”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어 버리면 내가 연이어 사는 것이 되니까.. 내가 사는 식으로 천국가서도 계속 사는 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삶은 아닙니다.
지옥간 사람이야 지 이름으로 계속 살지요. 천국 갈 때는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언약으로 바뀌어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요?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의 혜택을 입어야 천국에 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의 혜택을 완성시킨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서 모든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렇게 보면 돼요. 특수성을 통해서 보편성을 끄집어 내는 거에요. 그 특수성은 어떤 특수성이냐? “다 이루었다.”는 특수성. 그런데 자기 거주지에 있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다 이루었다.”는 것은 망한 거잖아요? 인간 세계에서 늙어죽었다는 것 말고, 죽었다는 것은요, 어떤 말로 해도 그것은 실패한 거에요.
‘아휴, 그 양반 좀 살았으면...’ ‘아휴, 안중근 의사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칭찬받았으면 뭐 하노..’ 안중근 의사 아내가 있었지요. 몰라요? 연구 대상도 아니고.. ‘좀 더 살았으면.. 젊은 나이에.. 40도 못 되어서 죽으면 되겠어? 안 됐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해도 제 명에 못 살고 죽으면 우리는 실패로 간주하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내 거주지 안에 내 소망이 있는데 치매 걸려가지고 온갖 화냥질을 해도 그래도 나는 오래살고 싶다. 남들 다 죽는 것 보고 내가 최후에 유일하게 남은 자(only I)로 살고 싶어요. 나만 살고 싶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우리 나름대로의 거주지가 따로 있다.’ 이 말인 거죠.
자 이제 그러면 설명이 되었습니다. 왜 배에서 성령이 나와야 됩니까? 그것은 에스겔 47장의 예언대로 성전에서만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물이 나와야 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나온 물은 예수님께서 성전이고 그 다음에 성령받은 자가 성전이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들에게 성령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지성전? 아니요. 하나밖에 없는 성령이 사람 성령을 통해서 다 드러나는 거에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가 한 성령이라고 했죠. 내 성령, 니 성령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김 성령, 박 성령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한 성령을 받은 거에요. 그 다음에 한 성령을 마신다고 하지요? 우물 하나에서 물을 마시는 거에요. 여기 생수기가 하나인데 물을 마셨잖아요. 전부다 하나씩 마시는 거에요. 무슨 니 상급이고 내 상급이 있습니까? 같은 상급이죠. 아니, 천국 가서도 상급 자랑, 딱지치기 하려고요? 천국 가서도 가방 자랑(명품 자랑)하려고 합니까? 그게 무슨 천국이겠어요? 한 쪽은 상급 없다고 삐져가지고 울고 있고 한 쪽은 좋다고 하고.. 그게 무슨 천국이에요. 천국에 가서 촛불집회 할 일 있나..
도대체 천국을 몰라요. 왜? 본인이 주인공(거주지의 확장)이 되니까 천국은 내 거주지의 확장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여 따라가겠나이다.” 하니까 니 거주지는 안 된다는 거에요. “처소를 마련해야..” 하니까 “나도 처소에 가면 되지요.” 하니까 “니 처소는 아직 안 만들어졌어.” 니 처소의 확장이 처소가 아니에요. 우리의 처소는 찢어버려요. 내 처소는 찢어버린다고요. 애초부터 우리의 처소는 없었어요.
처음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주의 것, “주 안”에서 태어난 겁니다. 예레미야에게 그런 이야기 하지요. ‘선지자가 된 것은 신학교 갈 때 니가 맹세(결심)해서 된 것이 아니고 나의 맹세이고 니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선지자로 책정을 입었다. 나 너하고 의논하지 않았다.’ 이 말이거든요. 우리가 성도 되는 것도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았어요. 창세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아버지가 의논하고 끝났어요. “재는 사랑 받아야 돼. 재는 미움 받아야 돼.” 이미 끝난 상태를 후차적으로 통보 받은 것뿐입니다. 통보 받은 인생이 이런 인생이에요.
우리 인생을 보게 되면 ‘통보’, ‘통보’.. 이미 주께서 확정하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친히 만들어내시지 내가 성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b-이 근호 목사
거주지이야기 했습니다. 거주지 “안과 밖”을 누가 확장하는가? 주님이 확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경계선은 묵사발 되고 허물어져야 됩니다. 우리의 “안과 밖”은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안과 밖”이 있어버리면 그것이 우리의 소유가 되고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되어요. 내 인생을 내가 살아버리면 이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성령을 가져오려고 억지로 떼를 쓰는 것처럼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 성신처럼 되어버려요.
구약 때 백날 성신 주면 뭐 합니까? 이스라엘이 성신을 많이 줬잖아요. 그렇게 많이 받아서 전쟁에서 승리해서 좋다고 했지요.. 그 결과는 뭐였습니까? 망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은혜를 줬지만 내가 준 은혜가 나쁜 것이 아니고 받을 만한 그릇이 문제가 되니까 은혜를 줘봤자 은혜를 역으로 돌리는 거에요.
그래서 아예 그릇 자체를 깨뜨리든지 없애든지 해가지고 이제는 은혜를 주면 영원불변으로 은혜가 유지될 수 있는 그릇을 줘야되는데 그 그릇은 다윗언약에 의하면 인자가 와서 인자가 그 성령을 받고 인자가 성전이 되고 그 다음에 성전에서부터 물이 나와서 성전 근처에 있는 모든 옥토가 생명수 강가가 되는 그러한 에스겔의 예언대로 그대로 되는 거에요. 이 모든 것은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 안에서(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쉬운 말로 말씀을 뜯어먹어서 내가 산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씀 안에 내가 들어가서 사는 거에요. 그러면 애들이 사법고시 합격되고 장보러 가고 아파트(빌라) 새로 구입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응해서 된 겁니다. 내 소유가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소유입니다.”를 확인시키고 증명하는 거에요. 우리 인생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인생을 뭐라고 하느냐.. 처음에는 세상 끝에는 “안과 밖”이지요? 두 번째는 이것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주인과 종”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일하면서 “안과 밖”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거에요. “안과 밖”은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언급했어요. 이미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을 구분했습니다. 시간이 좀 가긴 했지만 많은 시간이 안 걸립니다. 한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다 아는 이야기니까 우리 한 목사님께서 읽어주세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지금 사도바울이 어디 안에 들어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있지요. 나무 판대기 안에 들어있는 거에요. 그리고 내 안에 예수의 흔적이 들어있다.
저도 얼마 전에 밤 굽다가 밤 흠집 내가지고 굽다가 실수해가지고 손가락 중앙에 상처가 났는데 십자가 못자국 난 것처럼 칼자국이 났어요. 혼났어요. 그렇게 밤이 먹고 싶더라니.. 이 십자가 말고.. 통째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 들어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아무리 이 사실을 이야기해봤자 다른 사람은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을 보면 웃어요. “니 지금 내 앞에 있지, 어디 있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항상 비밀이 돼요. 말하는 자체가 무슨 말인지 몰라요. 어떤 분은 저한테 이야기해요. “왜 목사님은 어렵게 이야기합니까?” 전혀 어렵게 이야기 안 했거든요. 저는. 어렵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저 좋은 성경 말씀을 내 안에 포크레인 동원하듯이 집어서 내 안에 테두리를 유지한 채로 가져오려니까 어려운 거에요. 들어올 루트가 없네. 저 목사가 이해한 것을 나한테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루트가 없어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하거든요. 당신 것을 챙길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에서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와봅시다.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서 세상과 구분되어 있으면 “십자가 안”에 있잖아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사도바울의 출생지가 어디지요?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났지만 우리는 하늘에서 났다.”고 했지요. 주님이 먼저 이야기했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 요한복음 7장 41절 봅시다. “혹은 그리스도라 하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라고 하지요.
지금 이야기가 조금 어렵다 싶어서 내가 정신을 차렸는데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예수 안과 밖”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전에 무슨 이야기했는가? “주인과 종”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그 전에는 또 무슨 이야기했는가 하면은 “내가 목수의 아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이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지기까지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낱말을 그대로 사용했어요.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을 오해한 거에요. 하늘에서 구름 타고 온다고 했잖아요. 그들이 생각하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 거에요. 이 땅 말고 하늘에 천체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하늘”은 우리가 보는 하늘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가신 곳”이 “하늘”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하늘”이 무너질 “땅”에 속해요. 하늘이고 땅이고 전부다 짜부러져요. 베드로후서에 보면 이게 결합이 되어가지고 하늘이고 땅이고 다 불에 다 녹아져버려요. 그런데 주님께서 또 비겁해요. 인간이 쓰는 용어를 쓰면서 혼자서 십자가로 빠져나가 버렸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아는 환경 가지고 주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덤벼든 겁니다.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그랬죠. 나중에 우리가 쓰는 개념 말고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에 맞추어서 새로운 개념들이 예수 안에서 새롭게 생산된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알게 된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출생지가 어디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했다. 우리는 하늘에서 태어났고 너희의 시민권, 너희의 주민등록지, 너희의 본적, 너희의 호적,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본향은 하늘나라지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너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니라.”고 했는데 이 설교가 어렵다고 하면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그런데 아까 71살 먹은 소머리 국밥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전혀 어렵지 않을 거에요. 왜? 예수 안에 있어버리면 예수 안이 곧 하늘나라기 때문에 전체가 어렵지 않아요. 거기에서 모든 개념을 새롭게 끄집어 내니까. 마치 보자기에서 꺼내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처럼 이 성경 전체가 나오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나오고 십자가에서 십일조가 나와요. 십일조가 뭐냐? “만물”입니다. 제일 먼저 난 것이 십일조거든요. 그것은 제사장에게 바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십일조를 누가 했습니까? 예수 안에서 했으니까 우리가 할 십일조를 예수님이 대신해서 하나님께 다 드린거죠. 율법대로 사셨으니까. 안식일은 누가 지켰습니까? 예수님이 대신 다 하신거죠. 그러니까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남아있는 율법도 없어요.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그것으로 율법이 완성이 되어서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까? 거주지가 “예수 안”이 아니고 내가 죽어서 나의 힘으로 천국 보내는 나의 본거지를 여기서 따로 마련했거든요.
나의 자존심이 살아있고 나의 명예가 살아있고 (남의 딸은 지옥가도 괜찮은데)반드시 천국가야 하는 사랑하는 내 딸이 여기 있고 나의, 나의, 나의 소유가 뭉쳐져서 나의 존재가 된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너 자신을 미워하라. 너 자신을 부인하라. 네 원수는 네 집안 식구니라”인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내 거주지를 포기 못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포기 안 한 그것마저 이미 그리스도의 거주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성령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알게 됩니다. ‘아, 내가 내 인생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을 살았구나. 내가 여자 된 것, 내가 남자 된 것, 나 좋으라고 된 것이 아니고, 내가 결혼한 것, 안 한 것이 다 나 좋으라고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증거하라고 그렇게 하시는구나.’
제가 안양 강의하면서 참 재미나는 답변을 들었어요. “부부 사이에 신앙생활이 가능합니까?”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합니다.”라고 했어요. 맞아요.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가능한 것을 안양에서 풀어줬잖아요. 풀어주니까 “차마 그 일은 안 일어나면 좋겠다.”라고 했던 사례를 제가 들었잖아요.
그렇다면 성령 받았다는 것이 ‘도대체 아내가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가..’ 낮아지지 마세요. (부부 중 한 쪽이) 낮아진다고 부부생활이 행복해질 문제가 아닙니다. 부부는 거주지가 절대로 양보가 안 돼요.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이 낮아짐이 자기 의로 복귀가 됩니다. 헤겔 철학에서 이것을 ‘동일성의 자기 복귀’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봐야 결국 착한 일의 주체는 착한 일을 시작한 동일한 내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양보가 안 됩니다.)
아무리 12월달에 구세군 남비에다가 백날 돈 내고 아무리 기부해도 나는 내가 했다는 자기 양심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게 ‘동일성의 자기 복귀’이고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러한 엉망진창도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그게 의의 재료가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셨거든요. 죄인으로 오셨는데 아버지의 언약 때문에 부활되어서 의인이 되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인인데 성전 안에서 우리가 의인 되는 겁니다. 그 사실을 매일같이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도 주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특수한 사건들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 특수한 사건에서 이미 구원되었다는 보편성을 끄집어내는 그러한 성령의 작업을 우리에게 실시시키지요.
41-42절에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라고 했지요. 이것은 십자가 전에 이야기한 거에요.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지요. 자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오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안 믿지요. 제가 그 이야기를 미처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라는 거주지가 있고 그 거주지에서 개념들을 모아내잖아요. 땅, 본향, 고향.. 지금 여기에서 갈릴리가 나오고 베들레헴이 나왔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주께서 성경 요한복음(계시)에 주님이 거주지가 되어서 이 갈릴리, 베들레헴이라는 단어는 따로 내놓는 단어란 말이지요. 이 같은 갈릴리, 같은 베들레헴 이 단어가 동일하게 해석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있는 거에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게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에요. 하늘에 있어요. 왜 하늘로 올라갔습니까? 이 원래 단어가 “예수 안”에서 본래 의미를 찾아간 거에요. 그러면 예루살렘은 땅에 있잖아? 그것은 니 생각이고.. 우리가 땅에 살고 있으니까 우리의 생각(거주지)에서 우리가 오해한 거에요. 지금도 예루살렘 감람 산에 메시야가 온다고 성지순례한다고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본인이 한국에 살고 있으면 거주지가 한국이니까 빨리 예루살렘으로 비행기 타고 가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메시야가 부산에 오는 게 아니고 말씀대로, 스가랴 예언대로 감람산에 온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예언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예언대로.. 왜냐하면 그것을 유대인들이 추적을 했어요. 당신이 오실 메시야인가를 면밀히 조사를 해보니까 아무리 봐도 메시야 다운 게 하나도 없어요.
구약대로 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구약대로 오질 않은 거에요. 말라기에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게 되어있지요. 엘리야가 왔습니까? 그들 유대인 보기에 안 왔잖아요.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에 왔던 예수님은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엘리야가 왔다는 거에요. 같은 엘리야를 놓고 말라기 4장의 해석이 달라요. 한 쪽은 우리 인간이 거주지이고 한 쪽은 주님이 거주지여서 해석을 달리하는 겁니다. 엘리야가 왔다면 엘리야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세례요한이잖아요.
그런데 엘리야가 세례요한이 아니에요. 십자가 이후에는 예수님이 엘리야입니다. 왜냐? 예수님이 와야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는 기능을 하거든요. 그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가 하는 기능이 나와 있습니다. 그 기능은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거주지가 되면서 어느 하나 완성되지 않은 게 없어요. 다 완성되었어요. 그 완성된 데에서 성도는 뭐 할거냐? 박태환처럼 헤엄치지요. 풀장에.
(우리가) 헤엄치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헤엄치는 나라입니다. 어떤 헤엄? 주님이 주시는 긍휼과 사랑으로 생명수 강가에서.. 물론 수영복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그 문제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수영복이 필요가 없어요. 천사와 같으니까.. 안 입어도 괜찮아요. 옷 같은 것 필요 없어요. 천사의 영광스러운 몸이 곧 옷이니까.. 마음껏 거기서 생명과 따먹고 헤엄치고.. 한 마디로 말해서 “누려~~”
누리는 거에요. 누리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왜? 그 누리는 것 중에 지가 애쓰고 노력하고 기획했던 거, 지가 결재했던 게 하나도 없어요. 창세 전부터 이미 예정된 대로 가다보니 이렇게 된 거에요. 탕자가 아버지 금가락지와 소고기 목살인가(?) 하여튼 맛있는 사태살 먹을 수 있는 자격이 됩니까? 좋은 옷 입을 자격이 돼요? 탕자가 한 게 뭐가 있어요? 돌아왔다고..? 탕자는 두고두고 아버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받아 챙긴 게 있기 때문에.. 받은 성령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것을 받아 챙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거 증거하는 게 교회입니다.
그 다음에 45-46절 합시다.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했는데 말을 잘했다는 말입니까? 알지 못하는 말을 했다는 말입니까? 알지 못하는 말을 했지요. 무슨 말인지 판정을 내려면 그 사람의 의중을 알아서 틀리고 안 틀리고를 결정해야 되는데 알지 못하는 말을 해버리면 자기가 갖고 있는 그 판단기준의 영역을 벗어나버려요. 옳고 그름이 판단이 안 된다니까요.
한국말, 중국말만 아는 사람에게 영어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땅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늘의 일을 말하는데, 못 알아듣는 방언 같은 말이 아니고 같은 땅의 말을 써요. 그런데 그 안에 비밀들이 다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하늘의 말이 되는 겁니다.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너희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구나” 빌립보서 3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해서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거짓 기적을 유포시켰다는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박근혜나 국회의원들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없지요. 왜냐? 자기 거주지에서는 이런 성경말씀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남편한테 이런 성경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웃기잖아요.
“여보, 장인어른이 당신 고생한다고 은행에서 대출해서 한 2억 가지고 왔어.” 이러면 대번에 알아듣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복음에 복종치 않으면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런 말씀은 안 들어온다니까요. 그것은 내가 “내 안과 밖”을 결정하는 그 기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를 못 잡아온 거에요.
그런데 성경말씀에 이것을 보고 “아직 때가 안 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날 이런 예를 들었거든요. 어제 설교니까 그대로 예를 들어볼게요. 자동차 안에 운전자가 들어있고 운전자 손 안에 키가 들어있다. 그러면 키는 어디에 있느냐.. 자동차 안에 들어있다. 왜? 아무리 자동차에 운전자가 앉아있어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 사람 손에 있는 키를 들고 키를 구멍에 넣으면 자동차는 움직이게 되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고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었을 때 하나님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때가 되매 말씀이 응하려 함이라”에요. 모든 때는 하늘의 천사가 춤춘다고 “때”가 아니고 우리가 실제로 모이고 먹고 자고 목욕가고 시장가고 이 모든 것이 다 말씀 안에서 “때가 되매 이루어지는” 발걸음들이에요. 그게.
천국을 어디서 찾아.. 더 먼 데서 찾아.. 하늘나라 쳐다보면 안 돼요. 그러면 천사가 우리보고 “어디 하늘을 보느냐? 성령께서 이 땅에서 일하시는데 당신들은 왜 하늘을 보느냐” 오순절날 천사한테 찐빵 들었잖아요. 초장부터 잔소리 들어. 초장부터.. 왜 쳐다보는가 말이에요. 오신다는데.. 주께서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일한다는데 왜 쳐다보느냐.. 실제 성령이 가 이야기하니까 이디오피아 내시를 사막에서 만났지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지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죽음이라는 것은 실패로 보여도 스데반 집사는 “주여 종을 편히 쉬게 하시나이다” 하나의 멋진 순례를 보낸 거죠. 그러니까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성령 안에서 보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보이고 자기 거주지 안에서 보면 재수가 있니 없니 돈이 되니 안 되니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게다가 목사가 교회를 갖고 있으면 교회 부흥이 되니 안 되니 이것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성경해석이 되겠어요? “교회에 불이 나도 괜찮습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됩니다.” 이렇게 설교를 왜 못해요? “여러분, 저렇게 하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죠.. “공짜로 설교 들으면 교회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남포교회 목사 식으로.. 교인들이 몇 만 명인데 교인들이 헌금을 안 해가지고 “이제 돈 좀 내세요.” 설교 시간에 얼마나 짜증을 냈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 분이 헌금 강요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하도 안 하니까 요사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 모양이라.. 좀 더 참지.. 참을 때 좀 더 참지..
헌금이라는 게 없어요. 그리고 이런 게 전부다 주의 돈이고. 과부의 두 렙돈과 부자의 돈의 차이점이 뭡니까? 질이 달라요. 그런데 양으로 따지면 안 됩니다. 두 렙돈 한다고 교회에다가 이십 원 내고 이러면 안 되고.. 질이 달라요. 과부는 자기 것을 몽땅 바쳤잖아요. 이 말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이 몸 주님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 표시에요. 그게.
그런데 부자는 ‘내 거주지에서 내 소유인데 내가 많이 바줘서 이것을 드립니다.’ 이거거든요. 아나니아, 삽비라도 그랬잖아요. 속이고 드렸다가 ‘니 목숨 원래 내 꺼였어.’ 하고 가져가버리잖아요. 물론 아니니아, 삽비라를 지옥에 갔다고 단정짓지 마세요. 그렇게 단정지을 권한은 없어요. 천국은 그랬어도 갈 수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아버지의 첩하고 바람이 나도 천당에 가요. “육은 죽이고 영은 구원하려 함이라” 하고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뭘 어떻게 종잡아서 천당 가고 지옥 가고를 판정하느냐.. 판정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모르면 지옥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48-49절에 “당국자들이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자, 여기 기준, 이것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이 자기 거주지를 돌보는 기준이 뭐냐하면 “율법”이었죠. 그러면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지금 이 사람들은 제대로 된 성령을 안 받았잖아요. 십자가 지기 전에는 성령을 안 받았잖아요 제자들도.. 그러니까 세 번씩 베드로가 부인했지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방금 후딱 2초만에 정답이 나왔습니다. “거주지 지키기” 오늘날 “교회 지키기” 하고 똑같은 겁니다. “우리 바운드리(나와바리, 영역) 지키기” “내 것 지키기” 목사는 교회를 지키려 하지만 참석하는 교인들은 “자기 집구석 지키기” 남편 바람 안 피우고 집나간 남편 돌아오고 가출한 아들 돌아오고.. “내 집구석 지키기” 돈 떼어먹었던 사기꾼 돌아와서 돈 갚아주고.. 모든 게 “내 영역 지키기” “내 손상된 명예와 체면 지키기”
방법은 “율법 지키기”에요. 그래서 교인들은요 복음 이야기하면 싫어요. ‘어떻게 하면 내 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에 방안을 내놓아야 돼요. 그러니까 성경은 내 것이 없어요. 내 인생을 살면 안 돼요. 지옥 가요. 주님이 생산해야 돼요. 거지나사로가 될 지언정.. “나사로”의 뜻이 “하나님만 바라봄이라”에요. 내 것 아니잖아요. 거지라도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잖아요. 주님을 모자이크해서 주님의 구원의 일부가 거지였기 때문에 거지로 사는 거잖아요. 모든 게 파생되어 있는 주님의 일부를 각각 감당한 거에요. 모자이크 하나(일부)를 반짝반짝 감당한 것처럼..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오늘날 이 어두움의 실상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어떻게 해서 이단이 되었습니까?”라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이단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교단에서 면직 된 겁니다.”라고 했는데 그분은 일평생 이단과 면직의 차이점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왜 면직 되었습니까?”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안 지킨다고 면직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복음을 아는 분이에요. “이상하다. 그게 법인데 그것 안 지켰다고 왜 면직이 됩니까?” “그러니까 목사의 세계가 이런 겁니다.” 재판을 하는데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에 서원했잖아?”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판사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할 말이 있어야지요.. 이방인이 율법지켜서 구원받았습니까? (의롭게 되었어요?) 성령이 임해서 구원받았지요. 성령 안에 율법의 완성이 들어있지요. 십자가를 통해서 왔으니까..
그러면 됐잖아요. 그런데 율법을 왜 거론합니까? 그러니까 의가 어떻게 의가 되느냐? 그 사람(예수님) 때문이 아니고 내 의 때문이다. 이렇게 된 거에요. 결국. 내가 거기에 대한 녹취록에 썼어요. 십자가마을 구석에 찾아보면 있을 거에요. 그때 그 실황을 녹취한 게 있어요. 주고받는 대화를.. 그들이 절 고소한 것이 있어요. 「십자가를 아십니까」책에서 고소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십일조와 안식일 문제”가 있어요. 그 안에..
그러니까 저를 그대로 놔둬버리면 그들이 “십일조 해야 복 받고, 안식일 지켜가지고 구원 받는다”는 그러한 사기를 저 때문에 못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저를 그 자리에서 들어내야 되는 거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시찰회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도 가마 탄 것처럼 그 자리에서 들어내 주니 이제는 시찰회나 노회 안 가도 되잖아요. 구원은 받았고.. 구원받았으면 됐지, 거기 왜 가야 돼요? 목사 왜 해야 돼요?
그러나 그 당시는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열두 제자들은 그게 무서웠던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을 그냥 출당만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아까 사망이라는 것은 어떤 핑계도 실패로 끝난다고 했지요. 그 실패가 겁이 나는 거에요. 죽기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래도 날 안 죽일거야?’ 하고 유발시킨 거에요. ‘이렇게 세게 나와도 안 죽여? 그러면 더 세게 나와 봐?’ 결국 마지막으로 세게 나온 것이 뭐냐? 성전에 들어가가지고 “이곳은 성전도 아니다.” 해가지고 채찍 들고 설쳤잖아요.
그러니까 “안 되겠다. 죽여야되겠다.”하고 죽이는데 또 마지막까지 반전이 있었네.. 이 본디오 빌라도가 그냥 죽이면 될 것을 가지고 또 아내가 꿈자리가 사납다고 해가지고 마지막에 여분을 줬어요. ‘아, 이분은 죽일 분이 아니니까..’ 하고 빼낼 방법을 생각한 게 극악무도한 살인자를 옆에 대조시켜가지고 “얘 죽일래? 예수 죽일래?” 해가지고 ‘설마.. 살인하지는 않았잖아. “예수님을 풀어줘야지”라고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더 형량이 많은 사람을 내세우면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을 살려줄 것이라고 본디오 빌라도는 그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이 사람은 이것이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을 못 한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죄 문제를 다루고, 죄가 더 심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죽여라. 죽여라.” 이렇게 된 거지요. 그렇다면 죽이라고 할 때에 유대인들은 무엇을 포기한 겁니까?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고 하는 자기 기준마저 그들은 찢고 단지 당신이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죽였다. 당신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우리가 납득이 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보낼 리가 없다는 거에요. 왜? 우리의 기준은 완벽하기 때문에..
마치 오늘날 목사들과 신학교 교수들이 예수가 오시면 이렇다고 확정을 해놓았는데 그걸 비켜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분노하겠어요? 그것을 그린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에요. 교단의 지도자가 “메시야는 우리가 판정한다.”는 거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과 모든 구원은 여러분이 판정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십자가로 판정하는 거에요. 왜냐? 십자가는 못 믿는 거에요. “못 믿지? 못 믿지?” 이렇게 와요. “못 믿는데요 믿어지네요.”라고 하면 돼요. 그런데 “한 번 믿어볼게요.” 이러면 이 사람은 가짜에요. “믿어볼게요.”라고 하면 백날 해도 안 믿어져요.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 몇십 년 다니고 십일조 하고 뭘 행했다가 아니고 ‘십자가만 있으면 다 되었잖아. 아무것도 보탤 게 없네.’ 이게 믿어진다면 이 사람은 돌고 돌고 돌 필요가 없어요. 오늘밤에 바로 직행입니다. 돌고~.. 그렇게 안 해도 돼요. 그냥 바로 직행이에요. 그게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사도바울의 말이에요. 십자가만 있으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하냐 이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사람이 자꾸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거주지가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남보다 잘 되기 위해서.. 그런데 49절에 보면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예수와 그 집단)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되어 있지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징벌은 의인으로서 받은 징벌이 아니고 바로 죄인으로서 받은 징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저 사람은 의롭다. 착하다.”라고 하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당한 게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받은 징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가 고난 받아서 의인이 될 생각을 해서는 된다? 안 된다? 그런 생각을 치우세요. ‘하나님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저는 이제 착하지요?’ 이런 보상심리를 기대하지 마세요. ‘내가 예수 믿는다고 남편한테 이렇게 쥐어뜯기고 당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한테 상 주실거야.’ 상을 안 줍니다. 죄인입니다. 더 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괜히 자기 안에서 소설 쓰지 마세요. 모든 드라마는 반드시 선인(선한 자)이 이기게 되어 있어요. 악한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세나가 아무리 설쳐도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어요. ‘이브의 사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설계도 아무리 다 해도 청호나이스 제품 되게 되어있어요. 드라마 보면 나와요. 그런데 왜 그 드라마를 보고 호감이 가느냐 하면 바로 내가 기대한 것을 대신 다 말해주기 때문에 그걸 카타르시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정화)라고 하는데 정화가 돼요.
‘그래 내가 원하는 세상이 바로 저 세상이야.’ 현실에서 안 돼서 답답한데 드라마를 보게 되면 해소를 해주니까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보다 되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드라마의 의인과 하나가 되지요. 그래서 나는 의인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을 빼놓고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어요. 주님 편든다고 내 편이라고 안 봐줍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반했어요. 왜? 결국은 답답하고 돈 없고 배고프면 세상 쪽으로 다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우리가 그때 가서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우리는 처음부터 배신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세요. 이게 마음 편해요. 왜?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되려고 애쓰고 애쓰다가 돌아온 그런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의인이 되려고 아무리 애를 써봐야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를 일괄해서 모두 다 가져갔기 때문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가 되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마귀가 와서 수시로 정죄해요. 내가 키운 내 속의 귀신(마귀)이 나를 정죄하지 주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의 피를 보고 넘어갑니다. 그 그냥 넘어감이 제발 오늘 꿈속에서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51절에 봅시다. 니고데모가 나서지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라고 했는데 이것은 니고데모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율법을 살리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예수님을 몰라요. 제자들도 모르는데 자기가 알 리가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을 했으니까 그 새로운 해석이 뭔가를 일단 들어보고 우리가 잘못된 해석한 것이 있으면 고치는 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합리적 사고였잖아. 옛날부터 그랬잖아.”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무조건 그 사람은 아니라는 거에요. 주일 낮에 메일 편지 왔다고 읽어준 내용에 무조건 나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무조건 그 사람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대할 때에 ‘한번 메시야인가 보자..’ 이게 아니고 무조건 아닌 거에요. 왜 그런가 하면 거주지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한테 거주지의 구조가 이미 일곱개의 계급으로 성립이 되어 있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거주지가 따로 있지만, 개개인의 구조지를 을로 만들고 갑질하는 권력체가 따로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다 그래요. 이 갑질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고 있잖아요. 이 전체가 자기 거주지잖아요. 국회의원이 밥먹는다고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않아요. 국회의원들은 자기 구역의 사람들을 자기가 관리해야 국회의원값을 하지요. 자기 혼자 라면 끓여먹는다고 “나 국회의원 잘 됐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요.. 자기 영역 전체를 통제할 때 자기는 자기 거주지로써 만족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미 이 바리새인을 예수님이 인정했어요, 안 했어요? (바리새인이) 왔을 때 다른 사람 같으면 “바리새인님 오셨습니까? 아이고 위대하시고 높은 분이 오셨네요.” 이렇게 했으면 “자, 예수라는 사람 심사해보자. 일단 우리의 권위는 먹히더라. 우리가 한번 보고 우리한테 잘 보이면 좋은 소리하고 착한 일 했으니까 우리가 봐줄게. 하지만 우리한테 허락받아라.” 이 정도로 끝내려고 했다니까요.
그런데 이 갑(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거주지 자체가 완전히 모독당하는 거에요. 교회에는 이런 이상한 법이 있어요. 집사, 장로, 전도사, 부목사까지는 교인들이 건드려도 돼요. 그렇지만 주의 사자(주의 종이 아니고 갑자기..)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다뤄야 되지, 사람이 다루면 안 된다. 왜? 목사 직접 건드려가지고 벌 받은 사례를 꼭 주일 저녁에 헌신 예배에 오는 사람마다(알아서 짜고 오는 사람마다) 새겨 듣다 보니까(이게 사기인 줄 알지만 찝찝하잖아요.) 오야붕을 건드리면 안 되는 줄 알아요. 밑에 사람 건드려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다 오야붕한테 미루는데..
“아니, 부목사님 우리 구역 목사님이 그렇게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이렇게 억울한 것을 우리 당회장 목사님한테 이야기한다고 했잖아요.” “제가 집사님 사정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 아는데 목사님한테 이야기하려고 하니까 목사님이 그러지 마라고 해서 내가 못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것이 부목사의 한계라니까요. “저는 계약직이라 12월 되서 또 당회 열어가지고 종용히 불러서 “나가세요.”라고 하면 나가야 됩니다.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도대체 회사인지.. 교회인지.. 성경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기준 문제입니다. 우리부터 “내가 죽으면 안 돼. 나는 죽으면 안 돼.”를 근거로 깔고 세운 율법적 기준이 쭈욱 층층이 쌓여져 있으니까 마귀들이 와서 “목사 건드렸기 때문에 다리 부러졌다. 목사 건드렸으니까 아이 망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이슬처럼 먹혀들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사도바울한테 그런 이야기들이 먹히겠습니까?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오늘 죽는 게 그의 소원이었잖아요. 그런 사도바울 앞에 목사가 가가지고 “당신 그러면 죽어요.”라고 하면 “할렐루야! 아이고 고마워라. 어서 이 힘든 인생 마감하고 제발 나도 좀 쉬고 싶다. 저 방에 가서 쉬고 싶다.”라고 할 게 아닙니까..
8장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1-4절)라고 했는데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 사람이 간음하다가 잡혀왔는데 지금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게 요한복음 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저희들끼리 율법을 잘 지키면 돼요.
그런데 왜 자기 세력에다가 예수님을 자꾸 손 잡아 끌어당기느냐 이 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그들이 이해하는 범위밖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판정을 해야 될 텐데 판정의 대상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 생각은 뭡니까? 자기들이 생각한 율법 체계는 그들이 만든 게 아니에요.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누적된 거에요. 그 율법이.
「미드라시」라고 해서 탈무드가 그런 거에요. 그 해석 가운데 진리(액기스)만 뽑아서 “이것은 누가 뭐래도 진리다.” 그 액기스만 뽑아서 율법체제를 만들어 왔다 이 말이죠. 그 체제를 다져왔기 때문에 그 체제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 체제 바깥의 일을 행한 겁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걸었잖아요. 오병이어를 행했잖아요.
그러면 그들 내부에 기적을 행한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어요. 그렇지만 그들의 모든 기적 행함은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기적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것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놀라운 기적으로 공론화 되어 있어요. 공식으로 인정을 받은 거에요. “그래, 니가 행하는 기적은 마귀도 이기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러니까 마음껏 해.”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는데 이것은 (구청에) 허가를 안 받은 거에요.
그래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니까 이 사람을 자기 영역에 포함을 시켜가지고 자신의 갑질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하수인으로서 예수님과 합쳐버리면 이 권력질서(율법체제)가 공고히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공고히 하는 게 자기가 권력욕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 유대 나라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을 때 믿을 것은 율법밖에 없어요. 언젠가 이 율법대로 이루어져서 메시야가 오시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메시야 오실 준비만 하면 돼요. 이것은 개인의 영달이라서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고 (물론 그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도 있는데..) 그보다도 전체 우리 민족이 정신을 바짝 차려가지고 옛날 메시야의 영화를 회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되어졌다는 것을 남한테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그들은 율법체제를 공고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특히 율법체제의 하이라이트가 성전유지인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초막절날 그들이 뭐를 했습니까? 이벤트를 벌였지요. 물을 갖다가 성전에 부었잖아요. 그들에게 성전이 없이는 나라가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왜? 언약(약속, 예언)이 그러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성전이 아니라고 했지요. (나중에 이야기했지만).. 그전에 예수님을 포섭하기 위해서 “니 논리가 맞으면 인정해줄게. 하지만 니 논리가 틀리면 니는 내 안에 들어와야 돼.”하는 식으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우리끼리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재판을 내려봅시다. 성경에 보면 “간음한 여인은 현장에서 돌로 쳐라”라고 되어 있어요. 저쪽은 ‘율법 권한밖에 있으면서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예수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는 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재판하면 안 되지요. 그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냥 왔겠습니까? 아니면 예상 문제를 가지고 왔겠습니까? 예상 문제를 가지고 왔겠지요. 그 예상 문제를 한 번 뽑아보자 이 말입니다.
“자, 이 여인을 쳐라.” 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어떤 어떤 종류의 답변이 예상이 됩니까? 1번. 여자가 불쌍하지만 율법은 살아야 되고 죄는 없어야 메시야가 올 만한 거룩한 나라가 되잖아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라도 율법을 지키는 의인을 만들어야 심판을 면제하고 우리가 메시야 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래, 그 여인을 돌로 쳐라.” 돌로 치자. 또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내보세요. 2번.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그 여자를 풀어줘라. 이렇게 예상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구절이 어디 있겠느냐? 없다. 3번. 그런 구절이 있기는 있지만 이제는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그 구절을 여기에다가 바로 적용하면 안 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상한 질문을 딱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뭐 다른 게 없지요. 자 이 세 가지는 뭡니까? 바리새인이 있고 여기 예수님이 있고 율법에 대한 해석이죠. 자기 자신을 주님이 지적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지요. 왜? 자기들은 착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에 왔습니다. 목사가 성경을 폅니다. 그 성경말씀이 나 자신의 거주지를 때려치울 줄을 우리가 참석하면서 상상합니까? 예상 못 하지요. 예상 못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연고(이유)없이 아무 이벤트(사건)도 없이 그냥 교회에 앉아있다가 (설교 내용도 무슨 소린지 몰라. 지 맘대로 하니까 그것도 안 듣고 있는데) 내가 원초적으로 죄인일 수가 있다는 것.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자기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말이 맞을 수가 있다는 그 순간, 내가 원초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내 죄를 내 힘으로 지우려고 시도하는 것도 가져온 원초적 죄 중의 일부겠지요. 그러면 내 죄가 해결이 될까요 안 될까요 논리가.. 안 되지요. 내가 죄 짓는 것을 해결해보겠다고 나서는 이것도 처음부터 죄 중에 포함된 죄 중에 하나잖아요. 전도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내가 착한 일 한 것도 죄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뭘 해도 죄다.
그렇다면 ‘이것의 해결책은 내 쪽이 아니고 그냥 십자가 피흘림의 의미만 담으면 그것이 의다.’라는 생각이 불쑥 들 수가 있어요. 그게 “율법 외에 주께서 주신 의”가 되는 거에요. 그것은 현장에 (그것이 어느 교회든 상관 없어요. 장로교회냐 침례교회냐 관계없어요.) 무조건 주님이 함께 있으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교회에 다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이끌려 온 거지요.
그러면 이 여인은 재수 없는 거에요? 재수 좋은 거에요? 재수 좋은 거에요. 진짜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그냥 죽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질질 끌려가지고 의사 당하면서 좋은 글씨 새겨가면서 예수님한테까지 끌려왔는데 그 여인과 오늘날 우리와 다를 게 뭐냐 말이지요. 우리는 자랑질한다고 교회 갔는데 그 사람이 예수 십자가 앞에 끌려나올 때 그게 가능한 일인 줄 우리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내가 그냥 인간이 아니고 간음한 여인으로서 주님 앞에 서있다는 그 사실을 요한복음 8장은 말해줍니다. “아이고, 고소해라.” 이게 아니라 “주여,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남한테 돌 던지는 그 사람들 미운 데 정신 팔리면 안 돼요. 그들 탓할 새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만 바라봐야 돼요.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무늬가 새겨지는 주님의 도배지군요. 주께서 만들어낸 작품이 저군요. 간음하다가 주 앞에 끌려나온, 그것도 공개적으로 ... 그런데 그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모든 수치를 넘어가게 하시는 분, 주 앞에서는 이런 수치마저도 수치가 아닌 놀라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해석, 내 거주지로 해석하지 말고 주님의 거주지, 십자가 안에서 해석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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