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7:37 / 결백? / 15100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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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37절 할 차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보통 인간들은 “사람 외에는 안 본다.” 평소에 24시간 관심사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어떤 이벤트를 벌여버려요. 니가 나를 직접 보지 말라는 겁니다. 왜? 직접 봐봐야 목수의 아들밖에 더 되겠어요?
예수님을 본다고 해서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인간이 예수를 봐도 자기가 아는 범주 내에서 예수님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아무리 옆에 같이 따라다녀도 예수님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이한 이벤트를 벌이는 겁니다. 한강 불꽃 축제하는 것 있잖아요.. 이벤트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 이벤트를 보면서 보통 뭐라고 합니까? 오늘 무슨 날인데..? 매일 하는 게 아니니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겠지요..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이벤트를 벌여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이 일으킨 이벤트는 아니고요. 이 초막절 자체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한 것인데, 그 이벤트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의미를 언급해버리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다른 것을 통해서 (초등학교 애들이 줄긋기 하는 것 있지요..?) 예수님의 해석하고 그 벌여진 일과 줄긋기를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생각한 그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하고 전혀 다른 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중간의 것 다 생략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면 당신은 뭐하러 왔습니까?”라고 묻고 싶잖아요? 그게 성경해석의 기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재판관(심판관)이에요. 이 땅에 재판관으로 오셨다니까요. 흔히 아는 재판관이 되죠. 재판한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요. 왜냐하면 재판 자체가 의 아니면 죄고 죄 아니면 의가 되잖아요. 원고 아니면 피고, 피고 아니면 원고, 석방 아니면 구속 되잖아요.
그러니까 재판한다는 것은 “니가 뭔데 감히 나를 재판해..?” 인생이 다 그렇다 이 말이죠. 재판한다는 말은 내가 놀던 동네 위에 있어야 돼요. 같은 범주에 있으면 “네가 뭔데?”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재판해 버린다는 말은 “너는 나한테 판단받아야 될 인물이지 니가 건방지게 나를 판단할 주제는, 그런 입장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재판관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피고가 되어버려요. 판결을 내리는 대로 그게 우리의 운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재판을 벌였다는 말은 “너희들이 나를 함부로 생각하는 그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믿는 예수는 여기에 없다”는 겁니다. “니가 알고 있는 예수는 나 아니거든?” 이런 뜻이에요. 왜 그러냐? 너희들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우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뭐다? 가을이죠. 눈이 오면 겨울이잖아요. 자기 딴에는 안다는 거에요.
그런데 가을을 가을이라고 이야기하고 겨울을 겨울이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그것이 재판에 영향이 있습니까? 가을을 가을이라고 한다고 해서 “너는 의인이구나.” 하고 석방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거든요..
인간은 “3+5=8이다.” 그러니까 석방해달라는 거죠. “화성에 소금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니까 석방해달라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돈을 수 조억 집어넣었잖아요. 노력했다 이 말이죠. 일본 학자가 하도 아프리카에 기생충이 많아가지고 기생충 연구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기생충에서 해방했다는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거든요. 그러면 석방됩니까?
차라리 “노벨상 받는다 할지라도 하늘나라 못 갑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고 “주의 축복으로 이렇게 지혜 주셔서 최고의 상을 받았으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소서.”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런 소리한다고 석방이 되느냐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기준에 대해서 내가 이해되는 식으로 주님도 내 이해 범주 안에 같이 들어와 주소서.” 하는 것밖에 안 돼요.
“구원 그 이후”라는 책을 내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지요? 남포교회에 박영선 목사.. 제가 신학교 때에 직접 강의에 참석하고 그 분 테이프 300개를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하고 그분한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무엇이 문제냐 하면은 내가 이해되는 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게 잘못인 거에요. ‘내가 지금 조금씩 구원이 되고 있지 그지?’ ‘그래 내 구원은 정상적이야.’ 자기가 이해되는 범위 안에서 구원 작업을 시도하게끔 교인들에게 그런 힌트를 준다는 게 근원적으로 잘못되었어요. 복음이 아닌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려면 내 기준, 내 판단이 계속 유지가 되는 조건이 붙는 거에요. 성경에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그러면 적은 사람이 찾는 길이 구원의 길일까요.. 아니에요. 사람 적은 쪽으로 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아무도 몰라요.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님 기준을 적용시켜야 돼요.
그러면 그 기준을 우리가 눈치 채고 알아채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열두 제자가 다 떠나버린 이후에 십자가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의미는 그 누구에게도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여야 됩니다. 만고의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는 넘어지는 걸림돌이어야 십자가 다워요.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그래, 이거였어!’라고 박수치면서 달려들 내용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헬라인, 유대인들이 인간의 대표자인데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신은 살아있어서 우리가 예상 못할 일들이 벌어지면 그것은 신의 흔적이다. 따라서 신의 사건과 흔적을 받으면 우리는 구원된 사람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지만 기적을 원한 그 판단 기준도 십자가와는 매치가 안 됩니다. 헬라인들은 (이것은 상식적이니까 들어두시면 좋습니다.) 신을 자연의 확장으로 보았습니다. 신을 초월자로 보아서 저쪽 노는 세상과 이쪽 노는 세상이 다르다고 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만나를 내린다든지, 홍해를 가른다든지 어떤 기적을 내리면 “아 신은 우리를 찾아왔다.”라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그렇지 않고 “신과 인간이 한 동네에 있다.”는 거에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신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아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가 건너갈 수 없는 위대한 능력 가운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있잖아요.. 또 헬라의 신들이 그래요. 굉장히 능력자라서 폭풍을 일으키고 마음만 먹으면 파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은 납득은 하는데 능력이 없어서 그냥 순복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신을 다루는 방법은 뇌물(공여물)을 바치는 겁니다. 즉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같은 겁니다. 가인이 추수감사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드렸습니다. 제사를 인간이 드릴 때 성의껏, 정성껏 드리기 때문에 신과 자기는 한 동네 사람이죠.
그러니까 안 받는다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생각해 보세요. 신이 뭘 받아서 세상을 만든 게 아니고 신이 원래 우리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잖아요. 신은 안방에 있고 자기는 마당쇠처럼 마당에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살아온 것에 대해서 감사의 표시로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저 생산물(오곡백과)를 바치기 때문에 “양이 적구나. 니가 쩨쩨하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안 받는 것은 아니에요. 신과 인간이 한 동네에 살게 되면 신은 책망하고 나무랄 수는 있어요.
하지만 항상 끝은 용서(용납)가 돼요. “그래 인간이니까 한 번 실수한 게 있어. 그래 한 번 실수할 수 있어. 그런데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두 번 다시 잘못하면 안 돼. 이번에는 봐주지만 다음 번에는 떼찌할거야..?” 같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요게 돼요.
그래서 폭풍이 한 번씩 일 때는 처녀나 애기(뇌물)을 바치면 되는데.. 그게 가짜잖아요. 그 것을 고상한 말로 신이 자연의 일부로서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들이 숫자가 많아요. 폭풍을 관여하는 신, 바다를 관여하는 신, 수요일날 이야기했잖아요. 동양 철학에서 특히 대만 사람들은 해신에 신경을 많이 쓰고.. 오늘날 이사가는 신이 따로 있고 동짓날 떡하는 신이 또 따로 있어요. 또 궁합보는 신 따로 있고.. 다 따로 있잖아요.
이 자연적인 신들은 어쨌든 간에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이에요. 아무리 불러도 저쪽에서 먼저 내비추어야 됩니다. 그것을 “얼굴”이라고 대구 강의에서 했는데 시편에 나와 있죠.. 얼굴이라는 말의 반대 의미는 “시선”입니다. “시선”은 무슨 의미냐 하면 “관찰자”입니다.
관찰자라는 것이 말이 관찰자이지 심사, 회사의 감사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심사의 기준이 있어요. 기준이 뭐냐 하면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언약”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 언약 자체가 초월적이에요. 언약은 이 언약을 만들 때 인간들이 협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계약은 회사끼리 계약할 때 회사 당사자가 다 모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언약”은 “사람은 나가놀아라.” 하고 사람들은 빼버려요. 그리고 누구끼리 만드느냐 하면 “우리들”끼리 만들어요.
인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형상대로”지요. 우리라는 것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하나가 아니고 “한 분 이상”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한 분 이상”에서 누구는 빠져있다? 인간은 빠져있는 거에요. 이 말은 언약의 성취자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따로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지금의 신학계에서는 몰라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어적으로 이것은 “엘로힘”이라는 복수적 개념을 쓰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구라입니다. 하여튼 모르면 아마튜어들 못 알아채게 원어 들고 나오는데 원어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냥 인간의 언어입니다. 고대 언어는 한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다양해요.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세분화되지를 않았습니다. 언어가 세분화된다는 의미는 경제논리가 복잡해질 때, 복잡하다는 말은 경제구조가 분업화되어가지고 도시가 형성되고 국가가 성립될 때 덩달아 법도 같이 확장되고 성문법, 불문법, 등등 법조항이 엄청나게 많아져요.
처음에 법 하나가 통하던 것이 이제는 사기들을 많이 치니까 그 법을 세분화시키고 또 세분화시키고 또 전문화 시켜가지고 법 조항들이 많아져요. 그만큼 문화가 발달하게 되면 법도 많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과 오늘 본문과 사실은 관련이 있음을 제가 언급을 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만든 주체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그것을 과연 사람이 지킬 수가 있느냐 하는 거에요.
내가 내놓치 않은 단어를 상대방이 이해가 될까요? 이해가 안 됩니다. 이야기는요, 자기가 이야기한 사람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무슨 뜻인 줄을 몰라요. 근접하려고 애를 쓰지요.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니가 지금 사랑의 뜻을 알고 지금 내 말에 동의하냐?” “사랑한다니까.” “이렇게 하면 진정성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돼?”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럼 뭐에요..? 믿는다고 해도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그럼 안 믿는다고 할까요? 그럼 “그봐 안 믿잖어.” 꼭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것같이 대화가 안 돼요. 장단을 어디에 맞추어야 마음에 흡족한지..
원래 어떤 것도 딱딱 일치가 되지 않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자신의 요구를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명령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런 뜻입니다. 자식이 엄마한테 “엄마, 만 원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무조건 엄마는 내 말대로 만 원 내놓아야 돼.” 그런 뜻이에요.
그런 강력한 요구조건이 깔려있어요. “어디 쓰려고?” “엄마가 자꾸 물으면 나 이제 엄마한테 돈 달라는 소리를 못 하거든.” “글세, 어디에 쓰려고? 알아야 주지.” “엄마 나 못 믿나?” “믿으니까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알려고 하잖아. 믿으니까.” 이렇게 되면 돈을 줘놓고도 돈 빼앗긴 느낌이 들고 받은 사람은 강탈한 느낌이 들고 돈 주고받고 벌써 안 좋지요..
다시 정리합시다. 예수님은 재판관이기 때문에 인간은 배제됩니다. 그냥 무조건 피고가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제시하는 재판의 기준은 받지 않습니다. 왜 받지 않는가 하면은 처음에 언약을 만들 때 인간은 빼놓고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빼놓고 시작했다는 말은 언약을 지키는 것도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말씀을 못 지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어요.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쳤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바친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그것을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한 것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 되었으니”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행한 것없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공식이에요. 구원받는 자에게 동일한 공통적 요소로 주어진 거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조상을 닮아야 되지 않습니까? 조상이라는 것이 왜 조상입니까? 조상의 속성이 반복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계열에 있다. 같은 노선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잖아요. 항상 그 원칙은 믿는데, 그 믿음이 행함 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어야 돼요.
그러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것”과 “믿습니다!” 믿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믿습니다!”가 완전히 배제되고 추방된 그런 경우를 당했습니까?“ 하고 묻는 거에요. 내가 했는데, 내가 한 것은 언약의 성취에 포함시키지 않고 빼본 경험이 있느냐고 묻는 거에요.
그렇다면 주님의 일은 간단하죠. 주의 일인지 마귀의 일인지 어떻게 아느냐.. 나의 모든 기준(나의 평가 기준, 나의 판단 기준, 세상을 보는 세계관)을 박살내고 묵사발내면서 낯설게 다가올 때 그것이 주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실패했습니까? 초월자 하나님, 기적 기적을 바라던 자기 기준의 뭉개짐을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거에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그 말을 도저히 용납을 못하는 거에요.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말씀대로 했지요.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다가 돌로쳐서 죽이라는 민수기 말씀대로 짱돌 들고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여인을 치는 것을 당신도 동의하라. 그래야 당신도 우리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차마 그 이야기하실 줄을 몰랐죠.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그 간음한 여인이 현미경 속에 하나의 시료(조직)에요. 이것 치기에 바빴지 자기 자신을 치는 것은 못한 거에요. 주님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것(바퀴벌레 같은 존재인 나)을 치자. 나를 쳐야 이 나라의 정의가 회복이 된다.”라고 하신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왜 “정의”가 중요하냐면은 창세기 18장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18장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뮙니까? “ 이 땅에 무엇이 있으면 벌 받지 않는다?” “의인 50명, 45명, ... 10명만 있어도 안 받죠? 그만큼 의인을 많이 생산하게 되면 유대 나라는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마일리지가 많이 쌓이고 의인이 없어져 버리면 위태위태한 거에요.
그래서 오늘날 자칭 건전하고 자칭 개혁주의라고 하는 목사들의 설교가 뭡니까? “이 어두운 세상에 의인 열 명이 없는데 여러분들이 의인 되시렵니까?” 이런 설교하고 있잖아요. 성경 내용도 몰라요. 의인은 원래부터 없었어요. 의인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개입하신 주님이 언약대로 없는 데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죽으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을 지금 만들고 있어요. 어제 집안에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삼형제가 부부간에 다 모여가지고 구룡포에 회 먹으러 갔는데 회를 떠가지고 초장하고 채소가 마련되어 있는 식당을 찾아야 돼요. 거기서 쓰끼다시는 없어도 회만 먹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자들이 우르르 회를 뜨러가고 남자들만 모여 있는데 50분이 지나도 안 와요.
그래서 제 동생 보내고 또 누구 보낼 참에 한 시간이 다 되어서 왔어요. 그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회를 다 떠서 먹는 것이 아니고 지금 거기에서 회를 만들고 있는 거에요. (하도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썰어서 회를 만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다려야 되죠.
왜? 주님은 일하시고 우리는 노니까요. 천국 만들기, 지옥 만들기 우리는 그 과정을 봐야지 결과를 보면 안 됩니다. 왜? 결과 보고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지옥 안 가고 천국 갈래.” 하면서 천국이 아닌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천국을 낼름 가지려고.. 실제로는 언약에서 배제되어서 지금 자체가 지옥인데..
주께서 지옥 만드는 재료로 자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본인은 꿈은 좋다. “나 죽어서 천국 갈래” 그런데 “누구 맘대로? 니가 무슨 자격으로?” 지금 천국이 되어야 그때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어디 갈래? 골라잡아라.” 하는 데가 아닙니다. 은행 알 뽑기 하는 데가 아닙니다. 대학이 있고 “어느 대학 갈래?” 하고 원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서울대학에 간다면 서울대학 벌써 수업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본과가 감당이 되지요. 시험에 합격했어도 과정에 못 따라가면 퇴학당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천국 가기 전에 그 전에 벌써 천국을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알려드릴까요? 이겁니다. “물질” 위주에서 “마음” 위주로 바꿉니다. “물질” 위주라는 것은 과학이거든요. 모든 것이 과학이에요. 사람의 몸을 해체해버리면 신체라는 것이 장기의 총집합체가 되지요. 60조~70조 개의 세포 덩어리가 되지 주께서 말한 그 “몸”은 아니에요.
분석하고 해체한다는 것은 벌써 해체하기 전부터 ‘나는 정육점의 고기덩어리로 보겠나이다.’를 이미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세계에서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인 사람이 스탈린이거든요. 자기 국민부터 해가지고 1500만을 죽였어요. 히틀러는 게임도 안 되고요. 800만밖에 더 죽였습니다. 천 단위와 백 단위의 차이입니다.
완전 두 배 이상 죽였는데 왜 죽였느냐.. 과학적, 역사적, 유물 사관론에 의하면 인간은 고기덩어리에요. 고기 안 잡습니까? 소고기 먹잖아요. 혁명에 지장되는 것은 죽여야지요. 사람이 아니고 고기니까. 도킨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안에 들어있는 “DNA”라는 유전자를 보전하는 하나의 사물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유전자”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희미하다.’하면 유전자를 바꿔치기 해서 아이큐(IQ) 150으로 나오게 하면 됩니다. 이런 것을 과학에서 “유전자 조작연구”라고 하고 벌써 많은 단계에 이르렀거든요. 돈만 있으면 그 사람도 새로운 인조인간 로보트로 만들어집니다. 이것도 “물질”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잖아요.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과학에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학교에서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데 이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다른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덕목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물질을 물질문명으로 잘 드러내는 데 지장되지 않는 존재로 바꾸는 데 필요한 법칙을 소시민 만들기.. 이게 윤리에요.
존 듀이의 실용주의입니다. 진리는 없어요. 이렇게 해야 남한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피해를 입히는 사회는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과학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이고 그런 겁니다. 쉽게 말해서 추상적인 진리는 이미 국민교육에서 날라가 버렸어요.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고 그런 것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독도를 위해서 바친다는 것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위해서..라고 하면 초국가적이 되어요. 초국가적인 인간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 인간은 국가에서 필요가 없어요. 이런 사람은 잘못하면 아나키족(무정부주의자)가 될 수가 있어요. 초국가주의는 톨스토이처럼 그렇게 돼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정부주의는 아니에요.
톨스토이는 무정부주의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약간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떤 주장은 없고 다만 바른 종교(기독교)가 되어야 사람이 산다. 그 정도 (이야기)하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에요. 그런데 톨스토이는 이상국가를 생각해요. 이상국가를 하려면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영적인 자유를 보장해주는 국가, 그야말로 “유토피아”지요.
머리에는 있는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그런 국가를 꿈꾼 거에요. 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 얼마나 좋아들 합니까? 왜? 지금 돈 때문에 전부 시달리고 있으니까 도피처라도 있어야지 그런 책이라도 봐가지고 대신 위로해야 되니까..
거기서 나온 것이 바로 공동체운동이잖아요. 야... 이거 위험한 거에요. 공동체운동을 두 자로 줄이면 “밥퍼”!! 이 공동체운동이라는 사기에 넘어가지 마세요. 모든 신부, 성당, 수도원, 수녀원이 공동체운동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 “돈(자금, 자본)”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 돈만 끌어당기는 거에요. “이런 고상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하는데 돈 안 댈 거야?” 마지막에 이것으로 끝나요.
그러면 돈을 모으면 돈을 관리하는 사람(임원진)이 또 따로 있겠지요. 이게 바로 구원파잖아요. 유병언이.. “투자한 만큼 돈 돌려드리겠습니다.” 구원파 신자들한테서 이래가지고 돈 모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다른 교회가 비판을 못 하지요. 왜? 다른 교회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예배당 세웠습니다. 돈 내세요. 이 논리가 똑같은 논리거든요.
언제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요..? 주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없었어요. 왜 주님을 그것을 그렇게 이해를 안 합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나(하나님)는 받는 하나님이 아니고 주시는 하나님이다.”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한테 뭘 받아가지고 복 주고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시편(구약)에도 그런 하나님은 없었어요. “니들이 뭘 바쳐?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내쪽에서 줄 수 있는데 ‘바쳐라, 제사하라. 제물드려라.’ 그것 말고 내쪽에서 너같은 인간 하나를 따로 준비했는데 그 준비된 인간(존재)은 이 두루마리(성경책)에 기록된 것을 홀로 완성하기 위해서 나의 언약의 파트너로 이 땅에 와서 일을 한다.”
주께서 일 하시는데 그러면 구약에 제사드려라. 무엇을 하라. 십계명을 왜 주셨느냐? 실패하라고. 니가 그것을 지키려고 하면서 너의 그 음흉한 의도, 나만 성공하면 돼. 나만 살면 돼. 나만 천당 가면 돼. 이런 사적인 자기를 위한 신을 여호와라고 우기는 그 잘못된 것을 다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요.
옷에 먼지가 묻었을 때 스카치테이프를 가지고 떼면 먼지가 다 떨어지잖아요? 그게 율법이에요. 그게 와야 죄가 드러나요. 나는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인 면이 율법이 와야 다 드러나요. 노아의 아들 세, 며느리 셋이 다 같이 들어가서 홍수에서 살아남았잖아요. 그런데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벌거벗고 누워있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내는 수법인 것을 노아의 아들들은 몰랐어요.
다 방주에 탔기 때문에 다같이 구원받은 줄로 알았지, 설망 우리 가정에 저주가 섞일 줄은 몰랐다는 거에요. 그러나 저주받을 자는 주께서 그때 그때 만들어내요. 그 만들어내는 방법은 납득이 되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체를 내놓고 벌거벗는 방법이 저주를 유발하는 방법이고 또는 천국갈 사람을 골라내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준하고 달라요.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이 얼레리꼴레리 했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이런 존재밖에 안 돼?’ 하고 놀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의 덮어주는 은혜성이 날아가 버린 거에요. 자기 힘으로 구원된 줄 알고 자기가 알아서 배(방주) 타서 구원된 줄로 생각하는 거에요.
믿는다는 것이 은혜가 아니었고 자기 결단이고 자기 기준의 발산이었던 겁니다. 함과 가나안은 내가 아는 기준으로 괜찮은 행동을 한 것으로 인하여 나한테 구원이 주어졌다는 공식을 유지한 거에요.
그런데 야벳과 셈은 아버지의 그 모습을 통해서 자기 모습을 본 겁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자식의 내면의 모습을 대변해서 보여준 거에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아버지께 저주 받을 때 진짜 내가 아버지 앞에 서서 당해야 될 진면목을 다 보여준 거에요. 그 십자가가 사실은 죄인이라면 누구나 당해야 될 십자가거든요.
주님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니까. 죄 앞에서는 깡패에요. 봐주는 것이 없어요. 아까 우리교회 이상민씨가 하나님은 싸이코입니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사실은 우리가 싸이코거든요. 그런데 왜 주님이 싸이코로 보이느냐.. 우리는 항상 우리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주님 앞에 접근(어프로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도리어 주님께서 싸이코로 드러내야 ‘내 판단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암시를 주님께서 마련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망가질게. 내가 망가질게. 사실은 누가 망가져야 돼요? 우리가 망가져야 되는 것을 워낙 우리가 안 망가지고 항상 우리는 뭘 주장하느냐.. “결백”을 빼놓고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이는 죄가 없다. 강도질했다고요? 가정이 불우해서 그렇습니다. 도적질했다고요? 어려서 조실부모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모함했다고요? 사회가 그 사람의 가치를 몰라서 그만큼 사랑을 안 베풀어서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저런 소리 하니까 결론은 모든 이는 죄가 없는 거에요.
죄가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죄에 차이가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계급이 7단계에요. 제일 높은 단계는 사두개인,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 다음에는 서기관들, 제일 낮은 단계가 세리와 창기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에요. 희망이 있다는 거에요. 단계를 밟으면서 율법처럼 살게 되면 나처럼 될 수 있다. 다만 나한테 양육받아야 되고, 지시받아야 돼. 이것이 오늘날 교회 질서입니다.
여러분 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오시면.. 바리새인입니다. 아비는 마귀(악마)에요. 마귀가 교회에서 그 짓하게 만드는 거에요. 성경 마태, 마가, 누가복음 전체가 그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죄 없다고 하니까 죄가 더 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
거기에 누가 또 편승했는가 하면 철딱서니 없게시리 열두 제자가 같은 편이라.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 죄가 있다는 말 자체도 인간 나라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에요. 죄가 있다는 것은 잘만 하면 죄를 줄일 수 있다는 말로 통용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말입니까? 줄일 수 있는 죄는 우리한테 없어요.
죄라고 하는 것은 니 죄, 내 죄가 다 동일한 죄의 권세(지붕)에 같이 덮여있는 겁니다. 예수님 모르면, 예수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장 22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똑같아요. 도토리 키재기에요. 똑같습니다. 성화된 인간이나 안 된 인간이나 덜 된 인간이나 똑같아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라고 이야기하신 거에요. 또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니까 먼저 되기 위해서 나중에 된다고 하는데 나중 돼봐야 더 나중 온 사람보다 먼저 된 자인데요. 또 “상석에 앉지 마라”고 하니까 당회장 목사는 일부러 겸손을 떤다고 말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나중에 말석이 상석 돼요.
도대체 주의 말을 알아먹지를 못해요. “그냥 살아. 죄인이야.” 이런 뜻인데.. “뭘 하고 살아도 죄인이야.” 그런 뜻을 가지고 “잘하면 죄를 줄일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줄인 폭만큼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에요. 그것을 안 줄이면 영광을 가리고...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 영광을 가려요. 십자가를 사랑하면 교도소에 가도 영광이 되고...
“십자가”가 뭔데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행위의 주체를 주님께 돌리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 아닙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나를 모릅니다. 십자가를 아시는 분에 의해서 십자가만 알면 되지 구태여 내가 나를 알 필요가 없거든요. 어차피 너, 나가 모여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교회가 되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나를 떼내어서 ‘내가 누구냐?’ 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식당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을 때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우리는 한우입니다.’라고 했으면 어디를 잘라도 한우잖아요. 그런데 전체를 잘라가지고 일부를 가지고 ‘이것은 뭘까?’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한우의 육질이 다 통하잖아요. 하나님의 피가 목사님한테 와서 스톱이 되고 그러질 않잖아요?
예수님의 피가 흐르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흐르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보지 행함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마귀도 그것을 알아요. 야고보서 2장 말씀하고 다르게 들립니까? 오리지날 야고보서 2장 말씀을 들려 드릴게요. “하나님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믿으려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된다 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런데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음은 내가 만들고 행함도 내가 붙이는 이런 행함은 애초부터 귀신의 행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행함이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 이야기잖아요. 이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행함을 두 가지 예를 들었어요.
하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때, 평소에 자기 아들 못 죽여서 환장을 했습니까? ‘저 아들 언제 잡나?’ 하고 기다렸습니까? 기다렸으면 주께서 테스트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개고기를 못 먹습니다. 그런데 게고기는 특히, 영덕대게를 좋아하는데 주님께서 ‘네가 영덕대게를 먹는지 보자.’ 이러면 테스트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우리가 못하는 것을 알아요. 우리가 어떤 한계에 잡혀있는 것을 아세요. 미운 자식은 때려죽일 수 있습니다. ‘니 때문에 못 살겠다. 호적파라.’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은 어느 정도냐 하면 “니 살고 내가 죽을게” 부모가 진짜 자식을 사랑하게 되면 늘 마음 자세가 그래요. 자식 시집가는데 “시집 가서 혼자 살아라. 더 이상 혼수도 없다.”라고 말은 하지만 늘 뒤를 살펴가지고 ‘혹시 김치 떨어진 게 아닌가. 젓갈 없지?’ 늘 이렇게 괜히 와서 살펴요.
‘혹시 애기 낳고 애 키울 사람 없지?’ “엄마 못 키운다. 엄마 절대로 안 키운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려우면 나한테 데려와. 내가 키워 줄게.’ 그런 뜻이거든요. 세상에 자식 사랑 안 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그것도 이쁜 자식인데.. 그런데 그 자식을 죽이라는 거에요. 이게 바로 행함입니다. 이 행함은 내가 죽었다가 깨나도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행함입니다. 그 말은 ‘내 몸은 원천적으로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군요. 아, 나 착각했어. 내 인생 내 것인 줄 알고 착각했어. 아,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보니까 내 인생 내 것이 아니네.’라고 하는 겁니다.
자 아까 처음에 이야기할 때 주님은 재판한다고 했지요. 재판할 때 보여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겠지요? 땡, 탈락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재판할 때 우리한테 원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행할 수 없는데 주께서 행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은 것을 도로 회수하는 쪽에서 가져와요. 그것을 성경(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줬잖아. 추석 선물 줬잖아.” 주님께서 주신 것을 회수해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브랜드(상표)가 고급 프랑스 브랜따노 같이 아주 좋은 천국의 상표가 붙었기 때문에 그것만 가져가요. 그러면 안 받았으면 어떤가? 안 받았으면 티가 나요. 자기가 정성을 다하여 충성하면서 예배당 공작 시간에 만들어낸 인공물을 내놓습니다. 안 받습니다.
주께서 안 받는 것 리스트가 있습니다. 십일조 안 받고, 주일성수 안 받습니다. 선교헌금 안 받고 감사헌금 안 받고, 전도 안 받습니다. 방언 안 받고 기도 안 받습니다. 왜? 우리가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빡 세게 하면 요 정도”라고 예상했잖아요. 예상된 것은 안 받습니다. 이것은 뭐냐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에요. 그것은 조작물이고 인공물이에요. 내가 생각해놓은 나의 희망사항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낯선 구석이 튀어나올 겁니다. ‘주님이 이런 식으로 나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시네.’ 그 엉뚱한 것이 삽입되어 들어왔습니다. 박수칩니다. 그 엉뚱한 것이 아주 귀한 거에요. 아까 상민씨가 “목사님 어떤 분들은 착한 일을 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해왔어요. 그래서 답변하기를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고 기분따라 행동해놓고 즉각 돌아서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식으로 포장하면서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거기에다가 집어넣게 되어있어요.” 기분따라 해놓고 “나 참 잘했지?” 이것이 인간이에요. 그래서 나는 잘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엄마 나 그림 그리고 싶어” “너 그러면 미대 가.” 해놓고 “엄마 나 참 잘했지?” 하는 거에요. 그러면 처음에 미대 가고 싶다고 한 것은 그냥 기분상 해보고 싶어서 한 거에요. 정신분석학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충동적, 즉흥적, 돌발적”이라고 합니다.
울릉도에서 어떤 애가 모델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 소식 못 들었어요? 웃는 사람 같으면 TV본 사람입니다. 울릉도에 사는 애가 모델 한다고 하니까 아무도 모델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렸어요. “제발..(보니까 소질 없으니까)” 그런데 부잣집 같으면 “해봐라.”가 되는데 울릉도에 사는 사람이 이혼 하고 혼자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울면서 공개적으로 방송에 나온 거에요.
어떤 애는요 엄마가 목사인데 맨날 드럼만 쳐요. 수요일날 9시에 JTV에 부모가 감당 못하는 애들에 대해서 나오는데 모든 게 즉흥적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막아야 될 것 아니냐.. 막아도 상관 없어요. 막은 상태에서 억지로 어떤 일을 하면 무슨 구실만 달면 “그때 엄마가 막았잖아.” 해가지고 모든 책임을 말렸던 엄마한테 다 돌립니다. 지가 결정해놓고 잘 되면 지 탓이고 못 되면 전부 엄마 책임으로 다 돌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선한 일이라고 우기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주여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벤트를 준비하셨군요.” 이 말은 우리 인생 전체가 나의 이벤트가 아니고 주님의 이벤트입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b-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37절 말씀 할 때 제가 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사람은 사람을 보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만 보고 세상을 형성하거든요. 사람들은 주님을 아무리 봐도 같은 인간을 보는 식으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아, 저기 예수님 있네. 잘 보여야지.’ 그것으로 끝나요. ‘아 저기 목사님 있네. 잘 보여야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가 이상한 일을 벌여버리면 “저 사람 누구야? 우리가 아는 그분 아니네.” 하고 낯설게 다시 보게 되지요. 명절 끝날 오순절날에 실로암에 물을 길어다가 성전에 붓는 행사를 해요. 이 행사는 물질이잖아요. 물동이에 물(H2O)들고 강대상에다가 물을 부어서 흐르게 한다. 이것은 납득이 되지요. 그런데 안 보는데 물이 흐른다. 이것은 납득이 안 되잖아요.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물을 붓는데 이것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물이 나오게 하면 그게 모든 메시야의 완성이 된다.”는 그 대목입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다가 나중에는 넘쳐서 헤엄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옛날에 있던 에스겔 47장 말씀을 물질적으로 쉽게 표현해서 ‘장차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준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 지금 우리가 물을 부어서 나오는 그 물이 성전에서 실제로 자동적으로 물이 흐를 때 그것은 에스겔 37장의 완성이고 그렇게 하신 분이 메시야구나.’라고 하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내 기준에는 하자가 없는 것이 되어요. 내가 무식해서 모른 것이지 처음부터 나쁜 게 아닌 것이 된다니까요. 조금 공부를 덜 해서 그렇지 공부를 매진하고 큐티를 더 오래하게 되면 언젠가는 ‘진리가 손에 잡힌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것은 하나의 꿈이고 가능성을 내보이는 것이므로 절대로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똑똑한 것이잖아요. 하나의 교리가 되고 신학이 되어버리므로 안 돼요.
신학교 교리가 왜 복음을 가로막는데요.. 삼위일체 교리, 구원교리, 조직신학, 신론, 기독론, 성화론, ... 왜 이것이 복음을 훼손하는데요.. 그것이 납득되는 언어를 동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 이야기 잠시 하겠습니다. 이것이 언어와 관련이 되어 있어요.
에스겔은 문자로 되어 있는 거에요. 문자. 문자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부재(존재하지 않는 것)을 유발시키는 힘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수상해요. ‘이 부재가 진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은 항상 무슨 상상을 하는데 현재 있는 것 플러스 알파(잉여), 지금 있는 것 말고 더 나은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왜 지금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뮙니까?” 답변 못해요. “다들 그렇잖아요.” 이렇게 대답해요. “왜 그래야 되는데요? 지금보다 더 낫고 싶어하지요? 지금 있는 돈보다 더 벌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지요? 그만큼 살았는데 왜 더 살고 싶어하지요? 왜 ‘더, 더’가 들어가지요?” 이유를 몰라요.
그것을 현재 정신분석학에서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계기로 해서 인간의 욕망은 새로운 것을 계속 창조하고 불쌍하게도 인간의 자아는 거기에 빌빌거리면서 새로운 욕망을 마저 채우려고 헉헉거리며 뒤따라가면서 붙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욕망을 못 다루느냐? 모르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왜 내 욕망을 못 다루지요?
“욕심을 버려라.”라는 말은 쉬운데 새로운 신상이 딱 등장하면 왜 그것이 탐이 나지요? 입은 옷은 갑자기 구닥다리가 되고... ‘나는 왜 그런데?’ 이게 왜 그런지 알려드려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기준 만드는 데에 인간이 말려들어서 그래요. 인간이 하나님께 이용당했어요. 세상 전체가 하나님이 자기 언약의 구조를 만드는 데에 인간과 마귀, 모든 천사들의 일을 다 총동원시켜서 주님이 이용해서 그래요.
“나처럼 돼 봐라 이렇게!” 했는데 인간이 헥헥거리면서 못 따라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실패자로 만들어서 스스로 선다는 것, 스스로 살겠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 만든 그 창조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물고기가 물고기인 이유는 물고기를 둘러싼 바깥 환경이 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물고기는 물에서 만들어져야 되고 새는 바깥에 공기층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져야 되듯이, 인간은 기껏 그런 물고기나 새 정도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로써 채워지는 세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놓은 거에요.
그것이 이사야 45장에 있는 거에요. “하늘에서 의가 쏟아진다.” 하늘에서 남자가 쏟아진다는 노래가 있는데 하늘에서 음식이 쏟아진다는 그런 영화도 있고.. 이사야 45장 8절에 하늘에서 의가 쏟아질 때, 모든 것이 주님(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하게 하기 때문에 주님은 재판관이고 심판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렇게 답답하지 않아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는 6자로 표현합니다. “내어버려두사” ‘그래, 니 맘대로 해. 어차피 니 맘대로 하는 것도 내 의를 채우는 데 말려든 거야.’ 하나의 공장 부속품으로 말려든 거에요. ‘그래, 너는 너대로 살아.’ 너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바라는 것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지옥은 절대로 갈 수가 없어요. 죄를 지어도 지옥은 못 갑니다. 지옥은 가야될 사람만 가도록 주께서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요. 천국도 마찬가지이고.. 천국은 가기 싫다고 ‘나 천국 안 갈래.’ 이렇게 떼를 쓴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니는 반드시 천국 가야 돼.’ 하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7장을 통해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물이 성전에서 나와버리면 그것을 물질적으로 쳐다본 사람은 “어, 실로암 물이네.” 다 보이지만, 마음에서 물이 나와버리면 이것은 마음에 물이 나온 사람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물 나오나?” “응, 나 물 나와” “니는 왜 물(생수)이 나오지? 니 미쳤나? 나한테는 안 나오는데 너는 왜 물이 나오나?” “몰라. 나도.” “니는 왜 나를 닮지 않았지?” “글쎄말이야.”
이 세상은 노동을 해야 돈을 주잖아요. 싸워야(노동해야) 돈을 얻어요. 그러면 두 사람이 쟁기를 갈았는데 둘 다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둘 다 지옥갑니까? 아니지요.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두지요.. 그러면 쟁기를 간다는 행위를 통해서 천국, 지옥을 끄집어 내보세요. 이거 수능에 나옵니다. (웃음)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천국갈 행위와 지옥갈 행위를 구분하세요. 이거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사함을 받았으면 죄사함 받는 본인은요, 설명할 수 없어요. 뭘 해야 죄사함을 받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뭐, 철야를 했다든지, 기도원에서 작심하고 40일 금식을 했다든지, 뭐,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쳤다든지, 1년에 백 명씩 전도를 했다든지 뭐가 있어서 그것을 근거로 구원을 받은 것 같으면 그것을 내세우겠는데, 진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아니, 벼락 맞은 이유를 알겠습니까? 벼락 맞은 거에요. 성령 받은 거에요. 그게 바로 여기서 “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물이 나오는 샘터로 우리를 만드는 거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여자는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양동이를 들고 옴으로 해서 물길어서(중력을 이겨서) E=½G²해서 에너지를 이겨가지고 우물에서 낑낑해서 물을 긷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본인이 우물이 된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사전에 없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내 구원이 나에게 납득이 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이해가 안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안 해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나에게 일어나 버리고... 그래서 내가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은근히 안 했더니만 정말 안 되고.. ‘에이, 안 하니까 진짜 안 되네.’ 하고 포기하니까 진짜 되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도 공로가 우리한테 오지 않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인데 그 은혜에 나의 행함, 나의 애씀이 조금이라도 박히는 경우를 일체 용납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이 혼자 노시고 있는 게임(시체놀이)에 말려든 거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목 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거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자, 우리가 이 본문을 모른다 치고, 우리가 금요철야 할 때, “주여, 믿습니다.” 할 때, 주께서 “니가 믿어?” “믿습니다.” “그럼 내가 너한테 뭘 줄까?”라고 할 때,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항목이 있잖아요? 그 항목을 우리가 사전에 생각을 합니까? 안 합니까? 열심히 기도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노림수가 있지요. 기도 안 하고 달라고 하면 너무 뻔뻔스럽고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사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해놓고(불교에서는 업보를 많이 쌓고) 그 다음에 달라고 할 때 좀 덜 미안스럽고 뭔가 내놓은 게 있잖아요.
아까 지하철 8호선 타고 오는데 젊은 아낙같아요. 둘이 이야기하면서 “니 애 돌잔치할 때 뭘 잡았노?” 하고 물어요. 서울말로 물어요. 경상도 사람 아니니까. 공 잡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엄마가 바보에요. 공 잡아서 송종국이 될 일 있습니까? 축구 선수 될 일 있어요? 배구 선수 할랍니까? 아예 돌상 위에 그 공을 치워놓아야지. 사전에..
그러니까 이거는 엄마의 선택이지 애의 선택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주님한테 말려들었어요. ‘주님이여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그저 돈 벌게 하소서.’라고 하는데 우리 돌잔치에 돈이 없어요. 나 좋아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영덕대게도 없고, 그저 못 먹는 거, 개고기만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주신다는 게 뭐냐? “니 배에서 생수가 나리라.” 이게 뭐 좋다고. 좋습니까? 호스도 아니고 갑자기 왜 배에서 생수가 나와요. 그것도 납득이 안 되지. 내 몸은 물체고 내 몸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간암 3기나 몸에서 뭐가 빠질 때 피 흘릴 때 그때 같이 물이 흘러나오는 경우를 빼고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니 몸이 물질로 보이냐? 이제부터는 바꿔줄게. 생수가 나올 만한 영적 존재로 바꿔줄게.’ 이게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야..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강의를 한 3년 전인가 에스라 느헤미야 대전 강의할 때 설명하면서 제가 얼마나 어려움을 느꼈는지..
왜냐하면 내 몸이 성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게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어요. 몸은 body(신체)잖아요. 성전은 주님의 거주지에요. 주님이 거하시는 거주지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신체도 부동산이 되어야 되는데 주님은 하나님이라 이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나를 모실 건축 구조물은 없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더 골치 아프게 되어있어요. 주님을 모실 건축 구조물은 없고 우리 몸은 신체, 키 얼마, 몸무게 얼마 이렇게 제한되어 있고.. 제한된 몸에 주님을 어떻게 쑤셔넣고.. 이게 이게 이상하게 매치가 안 되네.. 연결이 안 되잖아요. 그게 왜 연결이 안 될까? 어렵게 말씀드려서 존재론적으로 따지니까 연결이 안 되는 거에요.
“내 몸이 있다. 주님은 거기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있음”과 “있음”이 연결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완전 노는 게 다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친구야, 어젯밤에 니가 내 꿈에 나왔거든. 그런데 너는 내 꿈에 왜 안 나오는데?” 이것이 지금 시빗거리입니까? 막 윽박지를 내용입니까?
“오빠, 귀신 꿈 꿨어.” 하는데 오빠가 귀신 꿈 꾸는데 꿈 속에 들어갑니까? 어쩌라고? 여자친구가 어제 귀신 꿈 꿨다는 거에요. 그런데 오빠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는데 뭘 어쩌라는 거에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꿈꿀 때 귀신 나오면 오빠가 와서 꿈 속에서 보디가드가 되어서 “귀신아 물러가라.” 해야지요. 애교부린다고 그런 용어를 쓰는 모양인데..
지금 예수님 이야기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우리 신체에서 도대체 무슨 물이 나와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보고서 그냥 넘어가자는 거에요. 있다 치고, 믿는다 치고 그냥 넘어가자..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그냥 넘어가자.”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너 문제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문제를 지적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리면, 그 뒤에 나오는 그 다음 말씀도 우리는 곡해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우리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은 “내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지적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시라고 했어요. “나 잘났습니다. 나 이쁘지요? 나 사랑해줘.” 이런 식으로 오지 마시고 “도대체 나한테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으로 지적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와야 돼요. 그래야 그 사람에게 말씀만 담기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한테 적용되는 말씀이 일차적으로 아니고, 이건 예수님 본인이 본인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해석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본인이 본인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니가 지키면 안 돼.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처음에 언약할 때 누구를 빼돌렸다? 인간은 나가있고, 우리라는 집단끼리 했다고 했지요. 우리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지요. 한 분이 아니고 다른 분이 있지요. 그럼 다른 분은 뭐하는 분인데? 한 분은 말씀을 주시고 다른 분은 말씀대로 완성시키시는 분이 인간을 만드는 거에요.
그럼 인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인간을 만듦으로써 인간이 알아서 구원된다는 소리를 일체 못하고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을 통해서 모든 영광과 모든 말씀의 완성은 진짜 인간, 독생자(주님)만이 모든 것을 이루어서 주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재료로서, 거기에 도구로서 끼어든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주의 일에 말려든 겁니다. 이용당한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이용당하세요.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이것이 백부장의 신앙이잖아요. “마음껏 이용해주소서.” 12년 동안 귀신 들린 여자, 우리가 만약에, 여러분들이 12년 동안귀신 들렸다면, (그런 분은 안 계시겠지만) 어떤 사람은 50년 동안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하여간 12년 동안 귀신 들린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모든 사람한테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빨 아파도 3개월만 아픈데 나는 왜 이런 벌을 받아서 12년 동안이나 허리가 펴지지 않습니까?’라고 대들거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된 것도 주님을 주님되게 드러내려고 하신 거지요?”라고 믿으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해서 그 다음부터는 멀쩡해진 거에요.
여자가 멀쩡한 게 아닙니다. 주님이 들어있으면 허리가 안 펴져도 주님 보시기에 멀쩡하고 펴져도 멀쩡하고.. 허리라는 신체가 펴졌느냐 안 펴졌느냐에 관계없이 “네가 나를 믿는다.”는 그것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얼마나 낫게 했습니까? 귀신을 얼마나 내쫓았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실컷 기적을 보여주고 기적을 맛보게 한 그것이 오히려 믿음 없음에 대한 통보에요. 베드로 장모가 열병 들렸다가 나았지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지요? 결국 베드로가 한 소리가 뭡니까? “난 당신은 저주한다.” 그 소리밖에 안 나오잖아요. 차라리 평소에 새벽마다 우는 닭울음소리가 기적으로 느껴져야 돼요.
보이지 않는 언약의 적용이 기적이에요.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봤어요. 교회 올 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훌륭해질 수 있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온 거에요. “왜?” 훌륭해져야 복을 더 따낼 수 있는 당당함이 있으니까.. 그저 복 때문에 훌륭해져야 되고, 훌륭하기 위해서 말씀지켜야 되고.. 이거 준비하려고 교회에 온다 이 말이죠. 영광이라는 것은 빈말이고요. 지 영광이 중요하지 남의 영광이 뭐 중요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이 주의 일을 훼방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제가 정답을 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한테 적용한 것이다? 주님한테 먼저 적용한 것이다. 우리한테는 적용이 안 됩니다. 속 시원하지요? 완전 생수, 우리나라 식혜 한 사발 들이키면 시원하잖아요. ‘아, 우리한테 주신 말씀이 아니구나.’
주님의 신체가 성령이 나오는 몸이 되어버리면 그 성령이 우리가 헤엄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물고기가 어항을 만든 것이 아니고 어항이 만들어진 곳에 물고기가 지 세상인 양 마음껏 헤엄치지요. 사실은 물고기가 수영 솜씨를 부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물이 있으니까 수영이 되지 물이 없는 데서 혼자서 퍼덕거려봐야 지가 발악하는 것밖에 안 되지요.
마음껏 우리가 복음(진리) 안에서 십자가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은 홀로 있다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성령이 헤엄칠 수 없는 그 생수의 강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발목이고 그 다음에는 점점 깊어지지요.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 하면은 처음에는 성령이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성령은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구나.’(를 알게 되지요.)
그냥 바다의 물고기처럼 퍼덕퍼덕 놀기만 하면 되지 ‘오늘도 바다 수위가 25m구나.’ 그런 거 계산하지 마세요. 전체가 푹 잠기면 돼요. 푹 잠기게 되면 내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꿈 있잖아요. 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면 사실은 꿈이 아니에요. 진짜 꿈은 현실하고 동일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이미 벗어난 경계선이라고 할 때는 경계선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상태가 사실은 완전한 상태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에요. 그 말은 정확하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된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영광된 몸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느냐.. 예수님의 그 몸이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아무도 이것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자살하냐? “약속된 죽음”을 죽어야 해요. 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은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역사”가 만들어져요.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만들어진 그들의 의지와 협동으로 역사가 이어졌다. 학교 교과서에 다 이렇게 나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가 있고 주체의 지혜와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사실은 더 정확히 말해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방민족과의 투쟁 속에서 역사, 역사가 다듬어지지요.
그래서 이집트는 역사가 없어요. 이집트의 조각이나 그림 같은 것은 무심코 한 지점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왜? 이집트는 관심사가 천상의 하늘나라지 이 지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집트가 사막에 위치하잖아요. 아침에 나가도 사막, 저녁에 나가도 사막.. 똑같은 광경이라 우울증에 걸리면 안 되니까.. 이집트는 딱 떨어져 있어가지고 이방민족과 별로 싸움을 안 했어요. 중세 시대인가 싸운 기록이 있고 그 전 고대 이집트는 그대로 죽 가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백성들)의 희망은 이 사막이 다가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이시스, 오시리스 신이 와가지고 우리의 영혼에다가 맞춤옷을 입듯이 새로운 영혼은 준다는 거에요. 따라서 몸은 미이라로 만들어가지고 잘 보존해놓고 두뇌는 끄집어 내서 거기에다가 영혼을 준다는 겁니다. 결국 역사가 별로 없어요. 피라밋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피라밋은 무덤이에요.
그런데 중동, 이라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맨날 싸우닫보니까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기 민족의 정체성 때문에 역사를 만들어내는데 역사를 만들면서 바알신(우상들)이 등장해요. 우리 민족은 이런 신들이 지켜줬다. 마르둑신 같은 경우에.. 길갈미스 같은 최초의 민족신화들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만 정통민족이라는 거에요. 유목민족이고..
그런데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 사건의 확대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세상의 중심은 인간의 존재함이지요? 그런데 성경 전체의 내용은 뭐냐 한 쪽은 사형시키고 한 쪽은 사형당했다. 이게 우주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이게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범우주적으로 영향을 입혀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별이 있으라!” 하매 별이 있었더라. 지금 우리가 힘을 합해서 “하나 둘, 별이 있으라!” 하면 별이 있어집니까? 아니지요? “바다야 잔잔하라!” 하면 잔잔해집니까? 세월호 탔던 애들 중에 예수님 같은 사람이 없는가 보지요. “파도야 잔잔하라. 배야 바로 서라.” 했으면 바로 섰을 건데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들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안 된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고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우리는 길길이 뛰어봐야 그야말로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찻잔 속에 물결(잔물)에 불과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찻잔 속에 고요가 되어버리고.. 양갱 속에 밤톨이라고 했잖아요. 젤리 속에 있는 하나의 양갱처럼 그냥 흔들리는 거지요. 그런데 자기 진동(행동)의 폭이 좁아요.
그렇게 하다가도 90되어서 죽어버리면 나중에 기억이 나질 않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다큐멘터리를 내고 하는데 그것은 한반도 어느 지방에 있는 한 사람의 몸부림이지 전체 이집트하고 필리핀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더더구나 해와 달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도 조수간만의 차가 있는데 별의 인력(중력)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것을 오바마(미국) 대통령이 “달아 좀 조용히 해!” 하면 갑자기 조수간만의 차가 없어집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이 무능력자라구요. 그저 지가 살려고 애를 쓰는 것뿐이에요.
그럼 교회에서 왜 통성기도 하느냐? 자기 교회 키우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하고 아무 관계 없어요. 완전히 절이에요. 절. 주의 나라에 관계 없어요. 자기 다니는 교회에 그저 부자들 출석해서 헌금해가지고 교육관 새로 지으려고 그러는 거에요. 목사가 시키는데 목사가 왜 시키느냐.. 자기 교회거든요. 자기 노후 대책이 거기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목회가 뭐냐하면 목사 지 혼자 발작하는 거에요.
양이 목자한테 얻어먹고 어디에다가 돈을 내느냐.. 이쪽에다가 내야지.. 이런 식으로.. 그러나 예수님은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언약대로 (그냥 자살하면 안 돼요.) 죽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주를 바꿉니다. 모든 해와 달(우주)을 다 바꿔버려요.
그렇게 되면 기존에 있던 우주(별들)는 떨어지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저는 세 자로 이야기했죠. “도.배.지.” 이 세상은 하나의 도배지에요. 하늘에 있는 별 있잖아요. 그 별이 전부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만 유지되는 도배지라니까요. 그런데 뉴턴의 과학은 갈릴레이 이후에 그 도배지를 뭘로 바꿨느냐 하면은 인간으로, 인간을 위한 도배지로 바꿔버렸어요. 호킹 박사 같은 경우는 이렇게 바꿨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말합니다. 별 하나, 너 하나, 별 하나, 나 하나... 별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달에 가서 토끼가 방아 찧고, 방앗간이 없어가지고 거기에서 방앗간을 만들어서 방아를 찧고 있습니까? 전부다 모든 의미 속에 하나님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인간의 무늬로 다 바뀌었어요. 언제부터? 과학 시대부터..
화성에 소금물 흐른다. 뭘 어쩌라고.. 화성 가서 살란다. 거기 가서 살아도 90살 되면 죽어요. 여기 요양보호원에서 죽으나 거기 요양보호원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니까요. 기껏 피신한 게 노아의 방주도 아니고 소금물입니까? 모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도배지, 자신의 무늬에요. 부산에 가면 등산하고 전부다 바위 위에다가 (김일성도 아니면서) 자기 손가락 찍어서 ‘내가 여기 왔노라. 보았노라.’ 하고 자기 흔적을 찍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절도 아닌데) 교회 벽돌에다가 자기 이름 써가지고 벽돌 바치고.. 무너져야겠네.. 자기 이름 보려면..
주님의 무늬여야 되는데 인간의 무늬로 만든 게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을 누가 만들었는가.. 이스라엘이 만든 거에요. 그런데 시편 103편에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에서 너희들이 예상도 못한 새로운 성전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희들 보기에 그렇게 기이하다는 겁니다.
기이하다는 것의 적절한 예가 뭐냐 하면 뿔이 하나 달린 신화적 동물들있잖아요. 옛날 평풍 보면 나와있잖아요. 희귀(괴귀)한 것, 그런 동물들을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없지요. 만약에 그런 괴물 나오면 때려잡아 죽일 겁니다. 왜? 우리 인간만의 역사 속에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게 있으면 죽여버려요. 그래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외계인이에요. 이질적이에요. 누가 믿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세상의 중심인데 어떻게 합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주님의 죽음에 동참한 자만이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동참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동참한 사람이 있기는 커녕 동참이 뭡니까? 말이 안 되지요. 착한 나를 알아달라고 하는데 무슨 동참이 됩니까? 안 되지요. 예수님도 죽으셨는데 내가 뭔데 우리는 안 죽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주님이 죽으신 것을 믿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안 죽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는데 십자가를 따라갈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이렇게 잘생겼는데(괜찮은데) 왜 죽어야 되지요?
그래서 아무리 언약이라고 해도 내 마음이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면 절대로 남은 다 죽어도 절대로 나는 안 죽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욕망(충동)이에요. 따라서 아무리 해도 말씀대로 못 지킵니다. 결론 끝. 우리는 성전이 될 수가 없어요. 나부터 살자고 하는데 무슨 성전이 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는 살고 싶어요.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아니라고요? 그러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러면 되는데, 우리보고 이러지 말라는 거에요. 우리보고 예수님 흉내내지 말라는 겁니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에요. 부처가 되는 종교에요. 팔정도 지켜서 부처가 되는 겁니다.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태도, ... 불교 이사람들이 얼마나 바보들인지... 바른 행동, 바른 태도라는 것이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환경이 도와줘야 될 문제입니다. 속에는 배고픈데 ‘나쁜 생각, 나쁜 생각’ 백 날 해봐야 진짜 나쁜 생각도 나요. 속에는 배고픈데 억누르고 싶어도 바깥에 유혹을 받아 마음속으로 간음을 하면 간음죄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내가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불교신자 되지요. 그런데 자기가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머리 깍잖아요. 머리부터 깍고 동안거 (겨울에 점 하나 찍고 육 개월 동안 쳐다보기) 하잖아요. 그거 하다가 나오면 뭐합니까? 중들 동안거 하고 나오면 우편함에 뭐 있는 줄 압니까? 전기세 나옵니다. 그거 시주해야 갚을 수 있어요. 이건 바보들인지 위선자들인지.. 아마 위선자들일 거에요. 지 도를 밑천으로 돈 벌려고 하는 인간들이에요. 대신 도닦아줄 테니까 지한테 돈 갖다 내라는 거에요.
누가? 중들이.. 누가? 목사들이.. 대신 기도해줄 테니까 당신은 돈이나 내라는 거에요. 내가 기도원에 가서 철야해 줄 테니까.. 왜? 의인은 간구하는 능력이 있는데 지가 의인이거든요. 그 수법을 얼마나 써먹었습니다. “그래 우리 목사님은 주의 사자니까 능력이 있고 우리 같은 회사인들은 잔업하느라고 바빠가지고 기도도 안 하는데 그러면 대신 기도해가지고 우리 가정 좀 지켜주세요.”
이것은 토속종교입니다. 옛날부터 있던 정통 종교(신앙)입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아무도 못 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기에 대한 미련 때문에 안 져요. 그리고 끝까지 주님한테 말씀지키고 순교하면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결국 내세우는 것은 자기 결백입니다. 나만 구원.. ‘주여 아시지요. 제 마음 결백합니다.’ ‘그래, 니 결백해서 니가 구원받아라.’
이 결백하고자 하는 게 이 마귀에요. 내가 그토록 발견할 수 없었던 마귀(괴물)가 이 소리하면서 (주님께 대들면서) 내 속에 들어있었던 거에요. 보편적으로 들어있었던 거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안에 뭘 끄집어낸다? 귀신 끄집어내죠. 그러면 귀신이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까? 떠돌게 되지요. 이게 뭡니까? 인간은 귀신과 합체 되는 거에요. 이 놈의 귀신이 나가봐야 다시 일곱 귀신(친구) 데리고 갈 데 없으면 또 들어오는 거에요.
그런다고 늘 소지할 수도 없고.. 소지해봐야 또 들어와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귀신을 방어할 수 있는 그런 체제(능력)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주님 믿겠다고 아들 바치고 돈 바치고 목사님 섬기고 넥타이 사드리고 교회 열심히.. 그렇게 해도 어느 한 순간에...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연히 설교시간에 말을 실수해가지고 (그런 뜻도 아닌데)“‘아무개 집사는 너무 형식적인 것을...” 이렇게 한 마디 했는데 본인보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목사님 저보고 이야기했지요?” 삐져버렸어요.
이 삐진다는 게 뭐에요? 나는 그런 욕을 들을 만큼 그 정도가 아니고 나는 결백하다. 그 동안 뭘 믿었어요? 자기 결백을 믿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속에 있는 마귀(괴물)를 믿은 겁니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결백하다. 자 이제 주님의 솜씨를 보세요. 결백한 것은 못 고칩니다. 그냥 놔둬요.
그리고 마귀 있음을.. (나는 마귀라고 했지만 성경 로마서에서는 죄라고 합니다.)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더라도 어떤 다른 죄덩어리가 나로 죄 짓게 한다. 그러면 그 죄덩어리를 내 힘으로 추방시키지를 못 합니다. 그냥 놔둬요. 그리고 그 해결을 어떻게 하느냐? 아까 노아 이야기 했지요. 담요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 담요로 그 죄를 덮어주게 되면 그것을 로마서 3장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뜻은 없앤다는 것이 아니고 정확한 말은 덮어주는 거에요.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옛날에 성전에 언약궤 무서운 율법 위에 속죄소가 있는데 그 무거운 뚜껑(카파르라고 하는데)을 덮어줄 때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으면 그 덮음이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중적입니다. 내 괴물이 있고 이 괴물은 들썩들썩거려요. 틈만 나면 ‘나는 결백하다. 나는 결백하다.’ 영화 「700」에 보면 나와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결백하다.’라는 말의 뜻은 ‘모든 잘못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못했습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잘못한 거에요? 강도가 잘못한 거에요? 강도가 잘못했잖아요. 이것은 누가 봐도 강도가 잘못한 거에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도 지나가는 제사장 지문 뜨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누구를 지적합니까? “너 왜 그냥 지나가냐 이 말이죠.” “제사장아 니는 은혜 안 받았나?” “니는 담요 없나?” 이런 뜻이에요. “니는 사랑의 담요 없어?” “니가 강도만난 사람이야.” 이런 뜻이에요. 지금 강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뭐냐 하면 “나는 결백한데 강도가 와서 나쁜 짓을 했기에 강도보고 나무래 주세요. 저는 피해자잖입니다.” 이런 소리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세상에 내가 왔는데 너희들 질고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그러니까 나만 피해자고 나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이 주님의 기준이고 우리는 그 기준에 말려든 겁니다.
그러면 그 강도를 남대문 시장에서 팔아요, 동대문 시장에 가면 팝니까? 아니면 수입품을 어디에서 팝니까? 안 팔아요. 이게 팔게 되면 돈을 주고 사게 되어서 행함이 들어가서 안 돼요. 그러면 기도할까요? 기도하면 행함이 끼어들어서 안 돼요. 그러면 십일조 할까요? 십일조도 안 돼요. 그래서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것들이 주의 일이 아니라고 했지요. 교회 섬겨도 안 돼요. 끼어드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내가 뭘 할까요? 내가 뭘 해야 얻을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궁금하지요? 진짜 이거 모르고 가면 안 돼요. 그러면 내가 뭘 할까요? 여기에 대한 정답은 “내가”를 없애요. “내가”를 없애는데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나(I)를 자리를 바꿔서 목적어 me로 만들어줍니다. 저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바꿔버려요.
‘우리 애 군에 간 거, 전방에 빠지게 된 거, DMZ 간 거,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일주일 전에 운행했던 세월호는 괜찮은데 일주일 후에 운행했던 세월호는 빠져죽었거든요... 그러니까 같은 배가 사람 태우기에 따라서 그렇게 빠진 거에요. ‘그때 주께서 물에 빠뜨렸습니다.’ 라고 안산에 있는 학부모 중에 성도가 있다면 그렇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 말은 ‘우리 애뿐만 아니고 우리 애가 대표가 되어서..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되찾아주는 것의 의미로써, 시범조로 내 애를 먼저 천국에 보냈습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지요.
그러면 노란 리본은 달지 말아야 돼요. 리본을 단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라는 뜻인데 특별한 일은 애가 빠져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잃어버렸던 주님의 성령 안에서 헤엄친다는 것이지요. 성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나는 성전의 구성원, 벽돌이고 성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거든요. 예수님만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전이 되는 것이지 내가 따로 독립적으로 성전이 되면 성전이 한두 개가 아니고 서로 성전 만든다고 난리일 겁니다. 니 성전 몇 평이고..?
그냥 사시면서 내 뜻대로 하지 않게 해주시는 주님의 솜씨를 보시면서 “예, 고맙습니다.” 하지 마시고 “안 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또 저를 죄인 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은혜를 주셨군요.” 이렇게 하셔야 돼요.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인이 안 되게 되면 이미 가진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항상 처음처럼,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 제일 밑바닦처럼, 십자가에서 주님과 같이 죽었던 강도의 자리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나타내야 돼요. 그러면 그것이 이 땅에 나타난 주님의 기준으로써 우리를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써 내보내지요. 그것을 가지고 “가시적 초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목수의 아들이었지요. 누가 봐도 목수의 아들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봐도 보통 대한민국 사람이지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눈에 보이지만 초월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어떤 경우가 그러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원천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에게 죄 지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지으려면 내가 주체가 되어야 되고, 내가 칼을 쥐고 내가 결정해서 죽여야 되는데, 주님께서 내 손에 칼을 쥐게 하시고 원흉을 만나게 하셔서 죽였거든요. 그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희한한 발상, 기이한 발상이죠.
성질나서 죽였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성질나게 하신 것을 곰곰이 따져보니까 주님의 기준 세우는 데에 말려들었어요. 우리는 이용당한 거에요. 이 이용당한 기쁨은 대단한 거지요. 천국 백성이라서 이용당하지, 다른 사람은 이용 안 당하고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잖아요. 저는 독자적으로 사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어디, 어느 행동도 독자적인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의미가 있어서 저를 가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면 그게 바로 주님처럼 이 땅에 살아있는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성전이라는 기능이 있어야 성전인 것처럼 우리는 성전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자꾸 주님(성령)께 이끌려서 주님만 증거하게 하고 주님의 공로만 높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니 참으로 성전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생명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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