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7:1-2 / 성전의 물 본문
이근호
음성 동영상
성전의 물
2015년 6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47:1-2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47: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전을 허락하게 되면, 인간들은 그 성전을 이용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영생을 얻어내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설치지 아니하면 실질적으로 아무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축물로서 성전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기에 분명 그렇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성전이 제 구실을 하려면 어떻게 되었든지 인간들이 소나 염소나 수양 같은 것들을 성전 뜰 안으로 들여놓아야 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제물을 잡아 제단 위에 놓고 불로서 다 태워야하고 피와 기름을 따로 구분지어 짜내어 따로 담아야 하는 작업들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 것도 아니하면 성전은 그냥 놀리는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관에서는 성전 자체에서 물이 꼭 나와야 한다 는 조건이 기이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인간들의 노동으로 채워져야 할 성전의 활동 속에서, 인간의 활동없이 자동적으로 물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성전 안에 인간 말고 따로 어떤 분이 계시는 경우에나 성립될 일입니다.
하지만 성전은 어디까지는 건축물입니다. 유령같은 존재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물이 나올 수원지를 따로 갖추어지지 않는 시설물입니다. 그런데 물이 많이 흘러 나옵니다.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이는 성전을 물질을 이해한다면 인간이 제공하지 않는 물질이 성전 안에서 물이라는 물질로 변하려면 물질적 장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성전 안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제공한 제물이라는 이름의 물질은 기껏 제물 자체내에 품고 있는 살점과 기름과 피 정도입니다. 결코 제물 안에 엄청난 물을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물은 어디서 온 걸까요? ‘물이 나오는 성전’ 개념은 ‘물 나옴을 염두에 두지 못하는 일반적 성전개념’을 생각하는 성전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보여줍니다.
즉 그동안 인간들이 성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신에게 뭔가 드리는 것으로 유지가 가능하고 하나님께 만족이 가능한 그런 성전을 생각했다면 이는 인간들이 성전에 대해서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소통이 원활한 그런 성전관을 염두에 두고 그동안 인간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왔다는 겁니다.
단순히 ‘물 나옴’이라는 그 요소만 누락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던 성전 전체대 한 인식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간주하면서 제사와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에덴동산은 단순히 인간들이 사는 동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의 중심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물리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곧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서 있는 곳입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습니다. 물이 흘러나오는 바로 그곳이 단순히 에덴동산만 살리는 물이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를 살리는 물이 흘러나옵니다. 흔히들, 지구가 중심이 태양이 중심이라고들 하지요. 비록 옛날에는 지구가 마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여겼던 그런 시절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양도, 지구도 중심이 아닙니다. 바로 성전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그 중심은 현재 이 피조 세계는 없습니다. 성전이 만들어지면 그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입니다. 스가랴 14:8에서는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망하고 난 뒤,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계 21:2) 하나님 계신 곳만이 진정한 하늘입니다. 완성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알고, 그 성전 안에서 작업하신 분은 일반적인 인간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창세기 3:19에 보면, ‘흙’(아담)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비롯해서 그 안에서 활약하고 실현되는 모든 내용의 법들은 모두 오직 한 분, 인자(人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율법을 위하여 인간 말고 따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신 한 몸이 계십니다. (히 10:5-7) 그 분은 이스라엘 속에서 나오시고 그동안 이스라엘과 동행은 하셨지만 일반적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동행해 오신 분입니다. 곧 인자이십니다.
이 인자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유일하게 언약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그냥 ‘뼈’, 혹은 ‘바짝 마른 뼈들’에 불과합니다. 성전의 유지와 효력은 하나님과 인자되시는 분 사이에 성사될 사항입니다. 흙이요 뼈에 불과한 인간들이 채워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물이 나오는 데 있어 특정 방향을 보입니다. 동에서 나왔다가 남으로 갔다가 다시 동으로 스며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 쪽에서 볼 때 ‘우측’이 됩니다. 이는 성전을 바라보는 인간의 서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이는 방향이 아닙니다. 곧 성전을 운영하시는 주인공은 따로 계셨던 것입니다.
성전이란 내부적으로 죽음의 반복으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표출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유지되기 위해 재료로서 계속 죄가 유입되어야 하는데 그 죄의 생산 장소는 그동안 언약, 곧 율법이 제공된 민족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자되시는 분이 보내었던 선지자나 언약의 사람을 기존의 이스라엘이 부던히도 핍박했고 구박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언약에 의한 죄’가 생산되었습니다. 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를 씻는 것은 어린양 뿐입니다. 바로 이 어린양되시는 예수님께서 죄를 담당해서 씻기 위해 업무에 나서게 되면 바로 그것이 합당한 심판과 합당한 구원을 보장해줄 참된 성전이 됩니다.
물이 나온다는 것은 곧 에덴동산에서 환경 조성이 인간과 각양 피조물을 살리는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 성전은 곧 죄 씻음받은 참 백성을 살려낼 환경 조성도 더불어 장만되었다는 말입니다. 곧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넘쳐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37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것인데 그것이 성령이다”고 하셨습니다.
흙이요 뼈에 불과한 사마리아 여인을 생수의 우물로 만들어내신 것은 그 여인에 예수님이란 새로운 환경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등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살리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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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143강-에스겔 47장 1-2절(성전의 물)1506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7장 1절-2절입니다. 구약성경 122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7: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된다는 생각은 우리 인간들이 요청하고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의 성전은 건물만 지어놓고 거기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가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왔지요.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이 아이디어, 우리 인간세상에서 나올 수 없는 물이 흘러나왔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가 성전에 대해서 많이 미흡하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여, 성전만 있으면 양 끌고 오고 소 끌고 와서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겠지요. 그렇지요?”라고 생각하게 했던 그 성전이 물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성전에 관한 사고방식, ‘양 끌고 오고 소 끌고 와서 제사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그 모든 생각이 잘못되었고 엉터리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고방식은, 예배당 공사하다가 마침 그 지하에 흐르고 있던 상수도관을 건드려서 물이 나오는 경우, 그런 경우 말고는 예배당에서 물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있겠지요. 예배당에 정수기를 가져다놓았는데 애들이 놀다가 정수기를 엎어서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물이 막 흐르는 그런 경우는 있지만 이 물이 영원히 흐른다는 이것은 분명히 상하수도나 칭호나이스정수기 그 물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리면 그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완료된다고 생각했던 그 성전관은 왜 밀쳐버리고 물이 왜 나와야 됩니까? 다시 말해서 물 안 나오는 성전에서 제사 드려봤자 너는 헛수고 했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그러니 왜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되느냐 하는 이 문제에 봉착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물의 방향을 통해서 그걸 지적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른다, 동쪽이 나오죠. 동으로 흐르다가 잠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성전 바깥뜰로 가보니까 남쪽으로 흐르던 그 물이 동쪽을 향하여 다시 방향 잡아서 스며 나오더라. 그런데 그게 뭐냐? 하나님이 성전을 보시기에 우측이었더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렇다면 인간에게 방향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인간에게는 방향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방향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몸뚱이가 하나인데 무슨 방향이 있어요. 좌측, 우측, 이런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몸에서는 동서남북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방향에 따라서 흘러나오거든요. 이 방향을 감안한 쪽이 성전의 의미를 알고 그 외에는 성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성전에서 물이 남쪽으로 갔는데 그게 우측이 될 경우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이 성전을 바라볼 때는 결코 우측이 아니에요. 성전 쪽에서 바라볼 때만 우측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관점을 바꿔야 돼요. 네 관점은 내가 인정치 않겠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성전을 바라보는 관점, ‘저 성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꼬?’라는 그런 시절은 끝나버렸어요. 성전자체에서 동서남북 방향을 잡아서 나오는 겁니다. 성전 물이 방향을 잡을 때 동쪽으로 그냥 가면 되는데 남쪽으로 비틀어서 간다는 말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하겠다는 인간들의 모든 사고방식에 대해서 주께서는 차단시키는 겁니다. 인간이 성전에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이렇게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라는 모든 인간들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을 유지한다는 말은 “하나님, 저의 성전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맞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성전이 있음으로서, 그 성전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그것이 천국 맞지요?”라는 우리의 그 흔한 선입감이 인정받는 것이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은 하나님의 새 성전, 너희들이 기존에 아는 성전 말고……, 우리 인간은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아이디어는 끄집어낼 수 없어요. 물이 나오는 성전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물이 없는 성전이어야 하는 그곳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은 그 물로 인하여 성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모든 관점이 성전중심의 관점으로 전환되기를 요청하는 거예요. 우리 관점이 아니고 성전, 새롭게 시작하는 성전, 완료된 성전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관점이 물처럼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될 이유가 있어요.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될 이유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동안 성전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온 물이 우리를 살린다.” 그것은 거짓말이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잘못된 생각이냐? ‘내가 여기 1차로 있고 그 다음에 성전이 저기에 있고, 저 하나님이 주신 성전에서 여기 있는 나를 아마 살릴 거야.’라는 아이디어, 그런 생각은 필히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입에 발려서 이야기를 해도 나 위주, 나 우선이에요.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비언약적이고 이방종교 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이 제공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2장으로 되돌아가게 만듭니다. 창세기2장에 보면 에덴동산이 있고 에덴동산 한 가운데서 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만 적시는 것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은 그 당시에 창조된 천지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해가 중심이 아니고 달이 중심이 아니에요. 태양중심설, 그거 잘못된 겁니다. 태양중심설, 태양이 있고 지구가 돈다는 이것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이 돈다는 지구중심설, 이것도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뭐가 옳은 것인가? 중심은 이 땅에 없어요. 이 땅의 중심은 없습니다. 이 땅의 중심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돼요. 중심이 없다는 말을 제가 무심코 했는데 중심이 없다는 말은, 내가 있는 곳, 인간들이 사는 곳이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인간중심적으로 약속을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고 신을 생각할 때 항상 자기에게 잘해주는 신, 자기한테 잘해주는 하나님을 내가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하고 성급하게 먼저 자기 쪽에서 손을 내미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그런 것이 없어요. 에덴동산 자체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부터 물이 나오는 겁니다. 물이 인간을 살리지 인간을 위해서 물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을 위해서 물이 있다면 인간에서 물이 나와야 됩니다. 하지만 물이 나오는 장소가 인간이 없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는 동산 한 가운데부터 물이 흐르게 되어 있어요.
물이 처음 출발하는 곳이 생명나무와 선악과라면 인간의 모든 가치와 의미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존재에 종속돼야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만들어낸 것이 환경이라는 거예요. 삶의 터전, 환경, 에덴동산을 비롯한 모든 자연환경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환경이 인간을 살리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환경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환경의존 적이고 환경종속 적이에요. 이것인 개인이 개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환경만 바뀌면, 환경만 되면 인간은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옛날 에덴동산처럼.
‘아, 내가 이번에 실수했어.’ 본인이 실수 했다고 해서 망가지고 ‘난 착해’ 이렇게 착하다고 새로운 환경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 따라서 내가 사는 환경이 그 때 그 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환경은 나 외에 다른 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믿습니까? 믿습니까, 라는 말은 뭐냐? “여러분의 행동은 아예 안 믿을 거지요?”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의 행동의 잘잘못을 이제는 두 번 다시 안 믿을 거지요? ‘나는 욕설을 해서 잘못된 거야. 나는 바른 말을 했으니 착한거야.’ 이제 그런 것은 안 믿을 거지요? 부탁드립니다.
환경은 나 말고 다른 환경에 의해서 된 거예요. 생명나무가 오게 되면 욕을 해도 천국 갑니다. 이게 복음인지 엉터리 같은 소리인지 분간도 안 됩니다만. “남을 보고 ‘새끼’라는 욕을 했는데 무슨 천국을 갑니까?”라고 따지게 되면 ‘새끼’라고 욕을 한 분이 천국을 만들었는데요? ‘독사의 새끼’라고. 하나님의 분노에 같이 동참할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데요? 네가 네 돈 떼먹고 도망친 자한테 분노하지 말고 진짜 주님의 원수에 대해서 나와 같은 분노와 질투심을 갖고 있느냐고 우리한테 묻고 있는데요?
‘아, 사람 좋다. 성격 좋다.’ 사람 좋고 성격 좋아서는 구원 못 받습니다. 주님의 마음가짐, 주님의 정서, 주님의 감정을 공유해야 됩니다. 성령 받으면 그렇게 돼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사람의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이라 했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받게 되면 분노할 때 분노하고, 기뻐할 때 기뻐하고, 근심할 때 근심해요. 사도바울이 그런 근심과 분노를 토해냈습니다.
“고린도교회 당회장? 저거 사탄의 자식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노골적으로 외쳐버려요. “어떻게 그런 인간이 너희들은 뭘 보고 주의 종이라고 보느냐? 아무리 봐도 주의 종이 아닌데 그의 말을 듣느냐?”하고 노골적으로 대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베드로에게도 화를 냈거든요. 그걸 ‘의로운 울분’이라고 하거든요. 그런 게 있어야 돼요. 그것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환경 안에 있으면 그 환경에 우리가 종속되기 때문에 그 환경이 우리를 살려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 환경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세상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그렇게 살기 좋았던 에덴동산은 창세기 3장만 넘어가면 저주받은 세상이 되고 저주받은 세상에서 아담은 이름 자체가 흙이 되는 겁니다. 흙이라는 말은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에 이 땅에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동으로 나왔다가 남으로 갔다가 동으로 스며나온다는 이 하나님의 성전이 보여주는 방향성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느냐? 없습니다. 왜 없는지를 설명해 드릴게요. 인간은 흙이 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둘로 나눠서 봤어요. ‘영혼 + 신체 = 인간’ 이렇게 본 겁니다. “신체는 살아 있을 동안에 유지되는 것이고 죽으면 그 신체를 그동안 움직여 왔던 나의 자아성은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의 정체성이 유지되면서 다른 곳에 가게 된다.” 플라톤이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헬라철학에서 이미 2분설이니 3분설이니 다 나옵니다. 신체+영혼, 영혼+신체, 또는 영, 육, 혼, 플라톤이 삼분 설을 주장했어요.
영혼, 그리고 기개, 움직이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개(氣槪), 명예와 가치를 높이는 것. 기개라는 말이 어려우면 감정. 그 다음에 욕구. 이렇게 삼분 설을 해서 국가도 세 급으로 나눠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본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지만 인간은 소모되는 물질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 겁니다. 정신 + 물질, 정신은 영혼이고 물질은 신체, 합쳐서 인간이다, 그렇게 본 겁니다.
플라톤의 스승이 되는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네가 신체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정신에 신경 써서 덕을 쌓으면 나중에 천국 간다.”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야기 들어보니 기독교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이들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500년 전의 사람들인데. 그럼 우리가 복음 알고 달라진 게 뭐가 있어요? 똑같잖아요. 달라진 게 없네요. 똑같은데. 차라리 철학을 공부하지요. 복음 듣지 말고. 철학에 다 있는데 뭐하려고 성경 봅니까? 참고로 보는 겁니까? 있는 바탕에다 성경구절만 토핑 하듯이, 피자 위에 치즈 뿌리듯이 하면 그게 영생 되는 거예요?
판을 바꿔야지요, 판을, 판을 바꿔야 되잖아요. 지금 플라톤,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잘못된 것은 뭐냐? 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잘못된 거예요. 성경에는 인간이라는 것이 없어요. 창세기 3장 다들 보셨지요? 그냥 흙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어요. 인간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 인간이어야 뜻을 알지요. 인간도 아닌데 무슨 뜻을 압니까? 사람이 그냥 곱게 흙으로 가면 고맙겠는데 이 흙이 뭘 위장하느냐 하면, 마치 인간인양, 마치 처음 창조한 그 인간인양 꾸미면서 나온 게 뭐냐? ‘영혼 + 신체’라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꾸미고 장식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정신분야, 영혼분야에 집어넣었어요. 영혼이 신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행동도 똑바로 나온다.’ 그런 교육학으로 나온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계속 흘러가는 것은 “나는 인간이다, 나도 인간이다. 하나님, 저 인간 맞지요? 괜찮은 인간되어서 천당에서 만납시다.” 계속해서 그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에서 물이 나와 버리면 문제가 돼요. 성전에서 물이 나왔다. 그런데 그 물이 인간을 살린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바르게 살아라, 이웃을 사랑하라.” 하게 되면, 신체와 영혼분야 중에서 영혼분야로 일단 들어가서 그 영혼으로 신체분야를 잘 움직여서 “똑바로 살아. 제대로 행동해.”라는 식으로 한다면 이해되겠는데 물이 인간을 살리잖아요. 물이 흙을 새사람 만든다면, 물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고 성전도 건축구조물인 물질인데 어떻게 물질이 영혼을 살립니까? 예수의 피가 물질인데, 예수의 살이 물질인데, 고깃덩어리인데 어떻게 그걸로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까? 말이 안돼요. 말이 안 된다니까요.
흔히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해 볼게요.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 하거든요. 앞자리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조사를 해보는 거예요. 앞자리에 있는 박테리아 숫자를 조사해 본다든지 앞자리와 뒷자리가 갖고 있는 어떤 차이점에 관한 연구용역을 한 번 넣어보세요. 25년 이상 지나도 결과 안 나올 건데요? 앞자리가 은혜 받는다는 정당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앞자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줍니까? “목사님은 지금 알고 따지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따지는 겁니까? 앞자리는 앞 사람에 방해받지 않고 정신 집중해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은혜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앞자리가 유리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자리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앞자리에 앉아야 되겠다는 본인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자세로 하여금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지 앞자리가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말 그대로 해 봅시다. 성찬식 할 때 “이 잔은 포도주가 아니야. 절대(never!) 아니야. 이것은 예수님의 피야. 피를 받는다. 피! 피다, 피다, 피다, 피! 그래, 피였어!” 자기가 거기에 최면을 거는 거예요. “이것은 피다. 같은 빨간색이고 이것은 피다. ‘피 일거야.’가 아니고 피가 맞아. 그래야 돼. 그래야 은혜가 돼.” 이것은 참선이지요. 이것은 도 닦는 거지요.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생명이 됩니까? 예수님은 물질로 이야기했어요. 그 말은 인간 자체가 영혼과 물질로 되어 있으면 영혼은 절대로 물질화되지를 않습니다. 영혼을 물질화시켜버리면 플러스 물질이라고 더하기 할 것이 필요가 없거든요. ‘영혼 + 물질’이라면 물질분야 따로 있고 영혼분야가 따로 있다는 말이거든요. 따라서 영혼은 물질이 안 되잖아요. 그 다음 두 번째, ‘영혼 + 물질’ 이라고 할 때 이미 물질이 있는데 그걸 물질로 굳히겠다는 말은 내 신체를 물질로 보는 또 다른 나, 제 삼의 나를 상정해야, 보이지 않는 눈으로 봐야 ‘이것은 물질이고 이것은 영혼이야.’라는 구분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 신체가 물질이라고 우겨도 그것을 평가하는 제 삼의 이것은 이상한 거예요.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영혼도 아닌 이상한 것을 먼저 상정을 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하는 이 말이 뭐냐? 이렇게 복잡하게 시비하는 조로 가는 이유가, 인간은 지금 성경을 가지고 정신분야에 집어넣어서 내 정신을 스스로 개조하게 되면 내 육신도 정결하게 될 것이라는 극히 이방종교적인 미신을 미신인지도 모르는채로 본인이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성경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적용시키면 됩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교회 2천년역사가 다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저의 답변은 성경은 인간에게 준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줬다니까요. 이게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을 빼앗아서 “나도 인간이다.” 하고 자기가 개과천선하고 나중에 자기가 영생 얻고 천국가기 위해서 자기를 향한 책으로 빼앗아 온 거예요.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는 거지요, 억지를.
영혼이니 육체니 그런 걸로 아무리 그럴싸하게 설명해도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자체가 인간이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향한다고 한다면 구약에는 예수님도 없는데 누구한테 준 것인가? 구약은 인자한테 줬어요. 인자. 인자가 어디서 나오는데? 이스라엘 속에서 나왔지요. 언제 나오는데?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나왔지요. 다윗보고 “인자야.” 에스겔 보고 “인자야.” 다니엘 보고 “인자야.”
이스라엘 중에서 택한 특정 백성, 언약 적 백성을 인자라고 부르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하고는 이야기 안하겠다는 거예요. 인간도 아닌 바에야 이야기 안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다윗, 너와 이야기하고, 에스겔, 너와 이야기하고, 다니엘, 너하고 이야기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은 어디로 가야 되는가? 에스겔 37장에 보면 나오지요. 에스겔로 하여금 뼈들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합니다. 에스겔을 “인자야”하고 부르시면서 뼈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해요. 어느 골짜기에 가니 뼈들만 있어요. 그 뼈는 뭐냐? 뼈는 뼈지요, 뭐. 지금 성경대로 하는 겁니다. 뼈는 뼈에요.
지금 우리가 어디서 착각하고 있느냐 하면, 나는 뼈 아니고 인간인데 인간으로서 어떤 뼈들을 구경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우리는 구경하고 있으면 안돼요. 여기 붙어 있는 이 살점 다 발라내고요, 어디 있어야 되느냐? 지금 여호와 하나님과 인자에스겔과 이야기할 때 침이 튀는 바로 그 밑에, 요새 침 튀기는 거 메르스 때문에 조심해야 되지요, 그 침 튀는 바로 밑에 바짝 마른 뼈로 누워 있어야 돼요.
뼈밖에 없는데 무슨 영혼이 있고 신체가 어디 있어요? 바짝 마른 것도 신체입니까? 그냥 뼈로 여기 누워있어야 된다니까요? 귀만 살아 있다고 치면 들릴 거예요. 두 분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자는 척이나 하고 누워 있어요. 누워있는데 여호와께서 이야기해요. “인자야, 저 뼈들이 살겠느냐?” “주께서 아십니다.” 힘줄이 생기고 어쩌고저쩌고, 지금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우리를 완전히 배제한 채 인자라는 분과 여호와 하나님,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성경, 신구약이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그 뼈들이 살았는데 뭐가 되었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인자가 누구냐? 에스겔은 폼만 냈고, 다니엘도 인자의 폼만 냈고, 다윗도 인자의 모형이었고 진짜 인자는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의 말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예수님 자신을 보고 인자라 한 거예요. 그 인자 안에 소복이 에스겔 47장, 에스겔 37장, 신구약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놓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한 몸을 예비했다고 히브리서 10장에 나와요. 한 몸을 따로 예비했어요. 우리 몸 말고, 흙 되는 우리 몸 말고, 영혼 + 신체, 이런 몸 말고 따로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 인간’ 아닙니다. 그냥 ‘인자’에요.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소복이 들어 있어요. 그 언약이 만개되고 완성되어 버리면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군대가 생길 거예요. 피동적으로 생겨난 그들이 천국 갑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이 나왔다는 것은 성전 쪽에 서 있는 사람만이 그 방향성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물이 흘러서 온 땅을 적시게 되면 여기서 에덴동산보다 월등한 새로운 삶의 환경, 바탕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어떻게 인격이 나오는가? 남아 있는 것은 그거 한 문제만 남아 있지요. 성전에서 어떻게 인자라는 인격이 나오는가, 이 문제만 남아 있지요. 그것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이 있어요. 그것은 언약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맞지요? 성전에서는 언약대로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뭐냐 하면, 바로 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죽어나가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져요. 죽어야 될 희생제물은 어린양이 되는데 뭐가 필요하냐 하면, 죄가 필요해요. 죄는 어디서 가져오는가? 성전 바깥에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사람들, 선지자, 아벨 같은 사람들, 고난 받는 종들,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을 미끼로 보내게 되면 저쪽에서 인간도 아닌 것들이 ‘영혼 + 신체’라고 우기면서 “너만 잘 믿나? 나도 잘 믿는다.” 하고 왁 달려들어서 그들을 핍박하게 될 거예요.
사울이 인자되는 다윗을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거기서 뭐가 생산되는가 하면, 죄가 생산돼요. 천상회의에 참석했던 미가야 선지자가 400명 되는 선지자에게 얼마나 핍박을 받았습니까? 귀싸대기 얻어맞았어요. “하나님의 영이 너에게만 임할 리가 있나? 나도 총신 나왔다.” 이런 식으로 귀싸대기 얻어맞았어요. 그렇게 얻어맞도록 조치를 했어요. 그래야 죄가 나오니까요. 율법이 있는 곳에만 죄가 있어요. 언약이 있는 곳에만 죄가 있지 그냥은 죄가 없거든요. 쏙 율법과 언약을 집어넣으면 마귀에 속한 자들이 와락 달려들어서 죄를 만들어요. 선지자를 마구 두들겨 패요.
패버리면 그 만들어진 죄를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성전으로 가지고 가요. 성전으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준비된 어린양의 피, 유월절 어린양과 만납니다. 만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여기서 언약대로 하나님의 죄용서가 이루어져요. 그렇다면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왔던 것은 선지자거든요. 그래서 인자의 예비적 모델이에요.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 오해를 받았던 사람들, 그들 속에도 예수님의 영이 있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도 요한의 증거처럼 예수님이고, 그래서 성전이 완공되면 ‘죄 + 어린양희생제물’이 짠, 하고 등장하게 되면 그 분이 바로 인자에요.
따라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인자에서 뭐가 나오는가? 인자에서 생수가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다시 한 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전이라 하는 것은 기능적으로 언약대로 이루어져야 돼요.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성전은 ‘죄 + 희생제물’입니다. 그게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언약궤에서 완성이 돼요. 언약궤는 가로가 1미터 좀 넘고 세로와 높이가 50센티 좀 넘는데 아카시나 나무로 만든 것을 금박으로 입힌 상자에요.
거기에 피를 발라요. 피를 바르면 거룩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거룩이 완성이 되면 성전안에서 이루어진 거룩이 새로운 환경조성의 원천지가 돼요. 샘물이 됩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있는 그곳이 생수의 원천이 되었잖아요. 예레미야 2장 13절, 그리고 스가랴 14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생수의 원천이라 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서 동으로 서로 간다는 거예요. 그렇게 나온 그 물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것은 그동안 죄 지었던 곳으로 갑니다. 그 죄 지었던 곳의 방향이 에스겔 47장 8절에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아라바로 내려가지요. 사해북쪽이 요단강이거든요. 100킬로 길이의 강이 있어요. 요단강 전체를 아라바라고 해요. 아라바 지역이에요. 따라서 이것은 사해로 가는 거예요.
물이 북쪽에서부터 흘러가면 어디에 모이는가? 염해로 모여요. 소금기 많은 지금의 사해가 이 시대에 사해가 된 것이 아니고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미 염해라는 이름으로 그 당시에 이미 사해가 되어 있어요. 죽음의 바다가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에도 나오고요.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바다, 죽음의 바다에요. 그 죽음의 바다가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창세기 14장에 왕들의 전쟁이 나오지요. 아브라함 때 다섯 왕과 네 왕이 싸웁니다.
그곳으로 물이 흘러가서 분명히 죽은 것이 생명을 얻고 물고기 이만한 것들이 막 텀벙거려요. 지난달에 바다낚시에서 1미터 15센티짜리 고기를 낚았답니다. 한국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죽었던 바다에서 고기가 뛰논다니까요? 에스겔에 나오는 이것을 물질로 봐버리면 ‘야, 우리의 신체부위가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는 신체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영혼을 생각한다든지 신체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자체가 흙이에요. 누가 보기에? 하나님이 보는 관점, 언약 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냥 흙입니다. 언약, 약속에 의하면 우리는 그냥 흙으로 가야 돼요.
우리를 흙이라는 물질로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흙이라는 물질이에요.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흙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자가 되셨잖아요. 인자,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 되셨다는 말이지요. 인자에서 생명이 나오면 인자 안에 속한, 예수 안에 속한 우리도 우리 몸에서 뭐가 나오는가? 생수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갔던 주의 말씀이잖아요. 정신이 어쩌고 신체가 어쩌고. “예배를 어디서 드릴까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릴까요,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릴까요? “네 배에서 생수가 나올 것이다.”
요새 제가 자주 듣는 질문이 뭐냐 하면, “인터넷 방송 들어도 예배입니까? 교회를 꼭 가야 된다면 어느 교회로 가야 됩니까?” 제 단변은 한결 같아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세요. 이 신체라는 특정 몸이 어떤 특정 장소, 예배당이라는 건물의 어느 자리에 딱 앉아서,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예배가 아니고 딱 앉아서 12시 넘어 정해진 시간 다 갈 때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그 예배, 그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어디 가서 드려야 됩니까?” 그 이야기거든요.
그 말은 “내가 몸을 움직여서, 어느 지점에 가서, 시간을 지켜서 어느 자리에 앉는다는 그것은 내 영혼이 내 신체한테 지시를 내려서 내가 반듯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그 정도 능력은 저에게 있습니다.” 하는 뜻이거든요. 주께서는 “그게 바로 흙이다.” 언약 적 안목에서는 그게 바로 흙이에요. 그게 흙이라니까요? 흙이 ‘내가 뭘 해도 흙이구나.’ 하고 아는 것은 흙 말고 출발점이 인자에요. 인자가 하나님이 원하는 분이지 흙이 원하는 분이 아니에요. 따라서 ‘인자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관점이 나에게 도달되었기에 나는 졸지에 예수님 보시기에 그냥 흙에 불과하구나.’라는 것을 수용하는 순간이 곧 주님의 안목이 나에게 도달한 순간입니다. 이미 생수가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거지요.
왜냐하면 내 안목이 아니고 주님의 안목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니까. 우리는 걸어 다니는 하나의 분수, 우물터, 우리는 그냥 우물터에요. 움직이기만 하면 생수가 막 나와요. 그 생수가 뭡니까? 인자로 인하여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그것, 그것이 계속 나와요. 인자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고 구원 받는다. 그 물이 예수님 말씀하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이라 할 때……,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령이라 할 때, ‘아, 성령은 정신분야이니 내 신체안의 영혼에 성령 받으면 되겠다.’ 이렇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인자만 인간이고 너는 인간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성령이 옴으로써 예수의 영이 오게 되면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 인자에 속한 인자의 지체로서의 우리가 있는 겁니다. “아하, 목사님 말뜻은 인자의 지체로서 영혼이 있고 신체다 있다는 그 말이지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영혼과 신체가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의 지체인데 모양새가 이 모양이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지체인데.
“제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네가 내 지체로서, 인자의 지체로서 움직인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움직이게 한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도 인자의 움직이는 대로 이 자리에 왔고 예배시간에 졸면 주의 은혜로 졸게 하신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예배시간에 휴대폰이 와서 “예, 예! 좀 있다 다시 전화할게요.” 이것도 주께서 하게 하신 겁니다. 하필 전화가 왜 그 때 옵니까? 다 하게 하신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내가 뭘 하더라도 환경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나는 환경 종속적이고 환경 의존적이라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성전을 이용해 볼까, 내가 예수를 이용해 볼까, 내 관점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냥 덮친 거예요. 찾아오셔서 그냥 눌러버린 겁니다. 레슬링 하듯이 매트에 완전히 눌러서 “항복해!” 하는 겁니다. 눌러버렸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고 만 겁니다. 우리는 뼈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 잘 써먹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비켜가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되시는, 인자되시는 주님에게만 하신 말씀이고 주님이 이루었다는 결과물이 오늘날 주님의 관점으로 바뀌어버린 우리 자신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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