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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에스겔 47:6-12 / 강 가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에스겔

에스겔 47:6-12 / 강 가

정인순 2015. 7. 1. 21:50

 

 

이근호

 

음성                 동영상

 

강 가

2015년 7월 1일                     

 

본문 말씀: 에스겔 47:6-12

(47: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47: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47: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47: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죽은 바다가 삽니다. 생명의 작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히 ‘완전하게 죽었음’에 관한 확인 작업이 선결문제입니다. 즉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효력이 발휘하려면 죽음이 선행적으로 작용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생명이 생명답게 실시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죽음과 생명의 고유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의 오해를 경과하면서 참된 죽음과 생명의 뜻이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겪을 수 없는 진짜 참 죽음을 십자가에서 경험하시고,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참 부활과 생명을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성취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참 성전은 예수님에게 이루어집니다. 보통 인간들에게 성전이란 ‘어디 있는가?’ ‘언제 세워졌는가?’가 관심거리 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시고 난 뒤에는 ‘참된 성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은 ‘죄로 인한 죽음’ 안에서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확정났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부팅(booting)을 새로이 해야 합니다. 즉 바탕환경이 새롭게 바뀌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명강을 이루는 생명수는 오직 성소에서만 흘러나옵니다. 이는 출처가 오직 한 군데라는 말입니다. 이는 이 땅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숱한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진정 하나님의 생명수가 흘러나올 수 있는 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개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언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친히 손수 장만하시는 바탕 환경 위에서만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서 열매 맺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은 자긍심은, 오직 자신의 민족에게만 참 하나님께서 거주지를 삼았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자기네들의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의 성전도 불타버리고 그 민족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참된 죽음에까지 이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참된 심판과 참된 저주와 참된 징벌받은 자가 바로 본인이라는 인식을 그들을 차마 가질 수 없는 무능력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함을 그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말의 가능성이나 소망같은 것을 챙겨도 상관없는 그런 존재라고 자신들을 자부했습니다.

완전한 망가짐을 갖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기존의 세계관과 시공간관을 펼치고서 거기에다 하나님의 약속을 펼치려 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6-7)

하나님 안의 세계는 더 이상 인간의 시공간 의식에 맞추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시공간을 공격하는 식으로 작용하십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죽기 진적은 그는 그 현장에서 곧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천국이,즉 부활의 세계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있던 그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였던 겁니다.

누가복음 23:42에서, 십자가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장래 천국이 도래한다고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공간관입니다.

사도행전 27:23-24에 보면, “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지중해 폭풍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있음에 대해서는, 로마를 경유하나 지금 지중해 한가운데 있으나 주님과 함께 있는 형편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생수가 나오는 성전이 되는 이유는 그 어떤 시간이든 공간이든 상관없이 반복해서 예수님의 시공간이 그 인간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이란 이처럼 참된 생명과 참된 생명에 합당한 새로운 시공간 바탕 위에서 펼쳐집니다. 기존의 성전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정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전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지정된 시공간에 한 장소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성전에서 물이 나와서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성령이 나와서 사람을 살려냅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려냄’의 현상은 인간들이 기존의 풍경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다른 안목, 다른 관점, 다른 시선을 가져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안목은 자신의 경험할 수 없는 죽음, 곧 자신의 사라짐 속에서만 나타나는 경험에서는 파악이 됩니다.

즉 이미 나의 장례식은 주님의 시간관(묵시세계)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치러졌습니다. 동시에 나의 생일은 주님의 시간관(묵시세계)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에게는 참된 생명의 능력이 강처럼 넘쳐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안목이 예수님의 부활세계로 부팅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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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145강-에스겔 47장 6-12절(강가)1507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7장 6절-12절입니다. 구약성경 122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7:6-1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성전에서 나온 이 물이 생명의 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흘러가는 곳이 바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냥 바다가 아니고 사해, 죽은 바다입니다. 죽은 바다는 계속 죽어 있겠지요. 죽은 바다는 여전히 죽어 있는 곳입니다. 그 죽어 있는 바다가 산 바다가 되었다. 살아 있는 바다가 되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했는가? 어떤 효과인가? 본문 12절에 보면 약재료가 된다고 해서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효과가 그 물 속에 있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역대하 5장에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렸는데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니까 깨끗하게 아기 같은 피부로 회복되었습니다.

 

요단강 물이 깨끗하냐? 그것은 아니죠. 아람나라 강물보다 못했으니까. 인간이 보는 시선 말고 다른 시선으로 요단강과 요단강을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돼요. 인간이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그 안목 말고 다른 시선, 다른 안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을 빼놓고 주변을 돌아다녀봤자 소용없는 거예요. 어제 대전강의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인데 이 비밀은 마치 터널처럼 뚫렸다고 했습니다. 터널처럼 뚫린 그 가운데 주의 생명이 흐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뭐냐? 그 관처럼 생겨버린 터널의 구멍을 외벽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지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을 통과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중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피부에 여드름 생겼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생긴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래요. 속도위반에 걸려서 벌금 3만원 나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돼요. 반드시 거기에 경찰관이 서 있어야 되고, 나는 그 지점을 반드시 통과해야 되고, 그 경찰관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그걸 적발해내야 돼요. 타이밍이 그렇게 맞아야 돼요. 모든 것은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으면 나을 때가 있고, 모든 때는 그리스도의 터널, 이 세상을 예수님이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히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바보가 딴 게 없어요. 이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을 모르면 전부 다 바보입니다. 모두 다 바보들이에요. 박사라는 자들이 전부 다 바보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창조과학회도 바보들이에요. ‘신이 창조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롬 1:21)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것은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 말은 창조과학 하는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다른 시선, 그 비밀을 우리가 찾아가고 발견해야 될 텐데, 비밀 변두리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비밀 속으로,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그 속으로 어떻게 들어가게 하시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모든 물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12절에 보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이 성소가 지점이 여러 군데가 아니에요. 성소는 지점이 딱 한군데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 성전에서 물이 나오지요.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세상의 인구가 65억이 넘거든요. 65억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DNA에서 나오는 조합의 경우의 수가 65억이 아니라 6500억 해도 한참 멀었어요. 다 채울 수 없어요. 이 우주의 역사를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의 400승이나 되는 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요.

 

같은 인간이 없다는 말은 전부 다 자기개성 이야기하고 자기주장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무로 돌려야 돼요. 왜냐? 그래야 하나만 남으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 하나와 그 외의 모든 것이에요. 예수님 하나와 그 외 모든 것.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모든 것은 아담 안, 아담의 족속이라고 전부 다 한울타리에 다 집어넣어 버렸어요. 다양성 안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자기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그거 전부다 죽여야 됩니다. 오직 이 생명의 물이 한 곳에서만 나온다는 것은 ‘너 아니고 나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 이름과 내 이름이 아니라면, 결국 아담의 이름이 아니라면 누구의 이름인가? 아담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이름, 기존의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그 주의 이름이 어디서 나온 이름인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는 자리에만 나오는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죽는 자리에서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갈 2:20)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야만 비로소 등장하는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 예수, 지저스, 두자나 세자 외운다고 해서 주의 이름이 아니에요. 날 끌고 들어가는 능력이 발휘되는 곳에만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답게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기능을 신약 적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인용하면서 신약 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구약 적으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거주지로 삼았던 그 성전, 그 성전이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있다고 그것을 품었던 이스라엘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멸망당해서 없어졌어요. 사라져버린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들 속에 주님이 함께 있다고 하니까 인간들은, 주와 함께 있음으로서 주도 살고 자기도 살고,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계산을 하게 된 거예요.

 

정답은 이겁니다. 인간이 사라져줘야 주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은 주의 이름을 소유하고 붙듦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안 사라지려고 애를 쓴 거예요. 주께서 발로 차버린 겁니다. “네가 어느 세계인데 함부로 들어와?” 발로 차버린 거예요. 인간의 세계가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점점 더 멀어져 가요. 점점 더 멀어져서 사라져야 돼요. 주님 붙들고 “우리 같이 천국 갑시다. 천국 만듭시다.” “저리 가! 어딜 기어 붙어? 저리가!” 쳐내시는 작업이에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랑 질했겠습니까? “너희 나라는 성전 없지? 우리나라는 성전 있다. 너희 나라는 기도하면 응답받는 곳이 없지? 우린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 없지? 우리는 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주신 언약궤 없지? 우리는 있다.” 얼마나 자랑 질을 했습니까?

 

이것은 요셉이 “형은 꿈 꿔 봤나? 해와 달이 절하는 꿈 꿔봤어? 볏 집단이 나를 중심에 두고 절하는 꿈 꿔 봤어? 나는 꿈 꿨다.” 그런데 그 소리해서 밉상 받아서 요셉은 죽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요셉 죽여야 꿈도 같이 날라 가고 그 꿈이 살아 있으면 자기가 밀리잖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계속해서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요셉의 꿈에 의하면 65억 인구 각자가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티가 나버리는 계시가 드디어 주어졌으니까 자기가 을이 되고 갑이 되신 분이 따로 계신다면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살아갑니까?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 소설의 주인공, 인생의 주인공, 그것 때문에 악바리같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이 내가 중심이 아니고 어떤 터널을 통과하시는 그 분의 인생이 진짜 인생이고 나는 그분의 인생의 효과로서 덤으로 붙어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글쎄요, 믿음 좋은 사람은 ‘감사합니다.’ 그런 소리 나오겠지만 평소에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 한 인간들은 입이 당나귀처럼 튀어나올 거예요. “30년, 40년 신앙생활 했는데 이게 뭐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주님께서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이 말, 인간들은 그 말을 천번만번 대해도 누구나 곡해하고 있어요. 내가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있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데 그 나라는 것, 기존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를 없애버리면서 내가 없어진 그 자리에 새로 생긴 나인데 우리는 없어진다는 절차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한 게 아니고 죽은 척 하면서 충성하고 있어요. 죽었다 치고 충성해요. 그거, 그거 가짜입니다. 그거 가짜지요. 순교하는 순간까지는 눈 뜨고 “주님,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잘 보세요.” 이러고 있어요. 그거, 자아 안 죽었어요. 죽이는 그 작업에서 내가 기대하는 죽음은 그 말씀에 부합된 죽음이 아닙니다. 전혀 기대치 않았을 때 죽이는 죽음으로 이미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는 거예요. “혹시 네가 죽는 순간이 있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순간이라고 그렇게 이해해야 옳다.”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이지 그걸 우리가 실천에 옮기라는 말씀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 죽는 순간을 자기가 알아서 챙길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선악과 따먹을 때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정녕 죽는다는 그 말은 빈말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꾸 생명, 생명, 영생, 영생, 이야기들 하는데요. 그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죽은 자에 한해서만 생명이라는 것을 알지 죽어보지도 않고 지금 늙어가고 있는 중에서는 생명 몰라요.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요?

 

살아 있다는 다른 개념을 따로 확보해 있으면서 그것을 생명의 같은 지평에서, 같은 토대에 놓으려 하는데 그렇게 옆 동네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아주 쉬운 말로 하게 되면, 컴퓨터를 켰는데 화면이 잘 안 뜬다든지 혹은 화면이 깨져서 나온다 할 때 손대다 안되면 어떻게 하느냐?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지요. 그걸 부팅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켜는 거예요. 다시 켠다는 말은 주님의 개념과 주께서 쓰시는 그 용어가 합당하려면 환경이 새롭게 깔려야 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으면서 내가 손대고 나의 더러운 때가 묻어 있는 그 평지에다가 주님의 성경말씀을 모내기 하는 식으로 심는다고 그 개념이 그 개념 되는 것이 아니에요.

 

부팅해야 돼요. 컴퓨터 꺼질 때 나는 신호음 확인하고 다시 부팅해야 돼요. 내가 눈독을 들이는 한 생명, 영생, 지옥, 천국, 전부 다 우리는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눈독을 들이는 그것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를 눌러서 붕괴시켜 버려요. 이게 바로 부팅입니다. 바탕화면을 다시 짜기 위해서는 주님에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죄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잘난 체하지 아니하시고 죄인 가운데 오시고 죄인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출발점이 어디 있느냐? 나 잘났다, 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 나 죄인 맞습니다.” 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죄인 맞습니다.”부터 출발해서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요. 저주를 받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이 되는 겁니다. 부활이 되어버리면 여기서 어떤 것이 생겨나느냐하면, 죄인이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이 구비가 되어버려요. 단 조건은 개인의 모든 다양성은 다 배제하고 오직 하나의 장소로 집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래서 죽은 사해바다에서도 사는 생명이 나오는데 그것은 오직 한 장소, 방향도 동쪽, 한 방향, 한 장소, 성소에서만 나와요. 그러면 그 성소는 뭐냐? 이미 그 전에 성소가 있었지요. 예루살렘에. 그 예루살렘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불타버리고 그 불타버린 그것을 재료로 해서 거기에서, 이미 없어져버린 성전에서 새로운 성전이 마련됩니다. 그 절차가 필요해요.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은 안돼요. 그러면 자살이 되니까. 죄 때문에 죽었고 의로 말미암아 살아난 그 기능이 다 합류된 장소가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떤 개인도 그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 성전이 하는 그 본래의 임무가 뭐냐 하면, 죄인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임무기 때문에 아무나 와도, 어떤 죄인도 와도 거기에서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환경, 그 바탕을 다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예루살렘성전은 왜 안 되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한 중심, 인간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기의 시간, 자기의 공간을 유지하면서 거기에다가 하나님을 끼어 맞추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난 시간에 봤습니다만,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하지요?

 

이 대목을 하면서 제가 요한복음 7장 37절을 인용을 해드렸는데 오늘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했지요. 나를 믿는 자,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에게 생명이 흐르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같이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겁니다. 캥거루 생각하면 돼요. 캥거루가 새끼 키울 때 주머니 안에 새끼가 들어 있지요. 어미 캥거루가 달리고 움직일 때는 새끼는 가만있어도 장소이동이 되는 겁니다. 왜? 엄마 보자기 안에 들어 있으니까.

 

그게 캥거루 안이라면 신약에서는 ‘예수 안’ 예수님이 캥거루에요. 그 보자기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으로 확정되고 의인으로 확정된 그 의인 안에 우리가 들어 있으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의인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은 왜 있는가? 율법이라는 것은 모든 세상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것, 부팅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미리 뿌려놓은 미끼 같은 거지요. 의인은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말씀은 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둬서 그 다음에 자기 죄를 아는 사람, 성령이 임해서 자기가 죄인일수밖에 없는 사람,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세리처럼 만드는 겁니다.

 

그에 반해서 바리새인들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렇게 하지요. 그건 탈락이지요. 왜냐하면 세리는 주님 바라보는데 바리새인은 옆에 있는 다른 사람 바라보고 있어요. 이것은 캥거루 안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안에 있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유지하려고 할 겁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장차 부활의 세계에서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 맞지 않는, 어울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그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가지 들고 물 뜨러 가렵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어느 곳에 있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기존의 아담의 죄 속에 있는 공간개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예를 들면, 변화 산에 주님 나타났을 때 베드로가 큰 오해를 했지요.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어딘데? 본인이 ‘여기’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탈락이고 잘못이에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바로 하늘나라 가지 않고 40일 동안 계신 이유가 거기 있어요. 그들이 평소에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과 주님의 천국, 부활의 나라의 시간과 공간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40일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예수님, 하늘나라가 마감되는 날이 언제입니까?” 사도행전1장 6절에서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자기 쪽에서 어떤 미래상을 생각하는 거예요. 과거-현재-미래로 계산한 그 시간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때니이까” 할 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알바 아니요” 네가 지금 부활의 세계를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네가 갖고 있는 시간 속에서 부활과 재림을 측정하려는 그 생각 자체가 이게 부팅이 안 된 거예요. 화면, 환경, 주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 바탕, 환경자체가 지금 안 맞는 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 때는 그 때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한다는 겁니다.

 

성령 안이라는 세계는 묵시의 세계고 인간이 아는 시간개념은 사라지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시간뿐만이 아닙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지요.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특이한 공간개념이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게 되면, 스데반집사님이 순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대목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했지요. 성령에 충만하다, 묵시의 영에 충만하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세요. 지금 함께 있잖아요. 동시성이고 동일공간이에요. 동일공간이고 동시성이잖아요. 예수님 계신 곳이 어디서나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저기 있다, 여기 있다가 아니고 너희 안에 있다는 거예요. 지금 스데반 집사가 차표 끊어놓고 5킬로 전방 어디에 집합해야 합니까? 아니에요. 스데반집사에게 일어나는 기능이 부활의 주님이 일으킨 기능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스데반 집사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개 들어 보니 주님이 거기 함께 있네요.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아버지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이런 일이 나올 수가 없다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이야기하지요. 아버지와 함께 계신 거예요. 함께 계시는데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제자들, 또 사람들은 자기들 시공간을 생각해서 내가 여기 있고 내 눈에 안 띄면 다른 곳에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늘 저편에.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 7장 55절에서,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몸은 지금 돌에 맞고 있고 그러면서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고,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지금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십자가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사울이 있었거든요. 사울이라는 이 사람이 스데반집사 죽이는 주동자인데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 7장이거든요. 두 장만 살짝 넘기면 사도행전 9장이 나옵니다. 9장에서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갈 때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보세요. 스데반집사가 있던 하늘은 굉장히 가깝지요. 가까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같이 있지요. 사울이라는 이 사람은 스데반 집사와는 반대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 현장에 예수님 계십니다. 바로 가면 되요, 바로. 십자가 달린 강도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여, 주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소서.” 강도는 분명히 주의 나라는 미래에 온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의 시간과 주님의 공간개념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시간과 공간을 바꾼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기능의 나온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는 그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죽어서 딴 데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여기서 우리 배에서 성령이, 주님의 살아계심의 그 기능이 표를 내면서 나오는 거예요. 뭐가 나오는데? 나는 죄인이고 인간들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은 내가 아담의 몸에 있을 때나 저촉되지 나중에 다 폐기처분 되고 사라질 시공간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 그 양쪽 세계를 다 보여주는 그러한 모습이 우리 속에서 나오지요.

 

그 증거가 바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나옵니다. 풍랑이 이는데, 배는 뒤집어지는데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사도바울에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 보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지금 로마 가지도 않았어요. 지금 지중해의 폭풍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알아요. 하늘나라 보기에 지금 지중해냐, 아니면 이탈리아 로마냐, 그 간격은 별 차이 없어요. 어디에 가도 주님 안이에요. 스데반 집사는 바로 주님한테 갔다면 사도바울은 폭풍가운데 로마 갔다가 가는 거예요. 약간 둘러서 가는 거지요. 할 일 때문에.

 

우리는 또 어딜 들렀다 갈지 모르지요. 서울, 대전 찍고 그렇게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갔다, 미국 갔다, 다시 한국 갔다, 왔다 갔다, 어딜 찍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땅에서 어디에 사느냐는 별 문제 아니에요. 어차피 같은 하늘인데요. 그게 시공간인데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날 잊지 마세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저를 잊지 마세요, 제가 버지니아서 설교할 때 이 대목을 했어요. 이해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백 지영의 “잊지 말아요”라는 그 노래는 다 알았겠지만.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그게 나의 장례식이었어요. 두 번 죽을 필요 없잖아요. 그리고 그 장례식의 나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이에요. “생일 언제입니까?” 그것은 시간적으로 묻지 마세요. 묵시적으로는 이미 십자가가 나의 생일이고 나의 장례식장입니다. 그러면 2천 년 전입니까? 아니에요. 그런 인간적인 시간을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장소도 한번이지만 시간도 단 한번이에요. 모든 생명의 물은 하나의 시간대에, 하나의 장소에서 나오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과 전혀 다른, 오직 하나로 집결시키는 그 힘, 그것이 성령의 힘이에요. 성령은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힘입니다. 성령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묵시의 세계를 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서 넘치도록 나오게 할 때 그게 바로 택한 백성만 알아듣는 새로운 시선, 하나의 초점만 알아먹는 생명수가 되는 겁니다.

 

그저 이 몸 하나 편하겠다고 하지 마세요. 이 땅에서는 이 몸 편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편하게 쉬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부합될 때 그런 겁니다. 기존의 몸은 부팅해야 돼요. 부팅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는 겁니다. 부팅한다고. 부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삼송컴퓨터보다 좀 더 오래 걸립니다. 컴퓨터는 1분도 안 걸리지만 우리 몸은 한 70년, 80년, 90년 걸려요. 어차피 지금 부팅 중에 있습니다. 부팅한다고 지지지직, 한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부팅되지 않는 입장에서는 우리의 몸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묵시세계에서는 몸보다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 그 분이 실제,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 원리대로 움직이고 있는 현실 속에, 몸과 영혼을 멸하는 것이 우리 현실에 터널로서 있고 우리는 그 주변에 외벽처럼 배치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터널에서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반면에 불신자들은 그 소리가 들리지를 않아요. 마귀가 그 소리를 막았기 때문에. 세상 학문과 모든 것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뭐 갈 때까지 가 보지. 될 대로 되라지.” 가 봤자 입니다. 의미 없어요. 터널 속을 KTX처럼 주님이 통과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덜커덩, 덜커덩, 지금도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마지막 때까지. 그 소리가 우리 행위가 아니라 스데반집사처럼, 멀쩡한 스데반집사에게 갑자기 돌이 던져지는 것은 주의 그 진동이 스데반집사에까지 전달되게 한 거예요.

 

왜? 스데반 집사는 캥거루 속에 있는 캥거루 새끼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주님이 품고 있는 그 배의 자식이기 때문에 주님이 흔들리니까 그 포대기 안에 있는 새끼 캥거루도 같이 흔들리고 있잖아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이 생명을 증거 합니까?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리면 돼요. 주님께서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걸 알아챕니까? 우리는 알아챌 능력 없습니다. 지진을 미리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진이 일어나야 흔들리잖아요.

 

주께서 늘 흔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늘 흔들리지요. 좀 어지럽지요. 주께서 내 인생을 마구 흔들어대니까 우리가 어지러운데 흔들리시는 그 분이 주님의 자신의 기능, 다시 말해서 우리 몸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흔들어대고 있으니까 맥주 흔들면 거품 나오듯이 우리는 주님의 거품, 주님의 마음이 막 쏟아지는 겁니다.

 

제 아내가 밖에서 지갑을 하나 주웠는데 거기에 성경구절이 있어요. 요한 3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 1:2) 그런데 그 지갑 주인 소매치기 당했는데요? 범사에 잘 되어서 소매치기 당하게 하신 겁니다. 그 지갑에 적힌 말씀대로. 소매치기가 돈은 가져가고 카드는 가져갔는데 그 말씀은 안 가져갔어요. 바보 같아. 바보! 돈을 가져가지 말고 그걸 가져가야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런 것을 가져가야 돼요. 그러면 소매치기는 오늘 밤에 구원 받는데.

 

주께서 다 합력해서, 때로는 소매치기 당하게 하시고, 때로는 사기 당하게도 하시고, 집 사놓은 것 재개발도 다 날라 가게 하시고, 망했다는 소리 나오게도 하시고, 그 모든 것이 “네가 자꾸 단독적으로 산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것은 저 아담에 속한 자들, 지옥 갈 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는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계시는 성전이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우리가 넉넉한 마음,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즐겁게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의 시간과 공간속에 있다 보니 우리도 가짜 현실을 진짜 현실로 착각해서 옆 사람 쳐다보면서 기 안 죽으려고 악바리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존심 챙기려고 얼마나 예수 이름을 도용했습니까? 주여, 이제는 건성으로 예수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내가 사라지는 그 자리에 주님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