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6:19-24 / 제사장 부엌 본문
이근호
제사장 부엌
본문 말씀: 에스겔 46:19-2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2강-에스겔 46장 19-24절(제사장의 부엌)1506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6장 19절-24절입니다. 구약성경 122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6:19-24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 곁 통행구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북향한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편에 한 처소가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로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뜰 네 구석에 있는 그 뜰에 담이 둘렸으니 뜰의 장이 사십 척이요 광이 삼십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한 척수며 그 작은 네 뜰 사면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면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전에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마감될 모든 성전의 설계도 안에 들어 있는 것 중에서 부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엌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제물이 제사장 손에서만 이루어져야 되는 성전 안의 안쪽 뜰의 부엌이 있는데 서쪽 제일 끝에 있어요. 제일 서쪽 끝에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에는 속죄제물을 삶는 부엌이 있고 또 다른 종류의 부엌이 있는데 이것은 제사장이 아닌 성전의 일군들이 자기 고기를 삶기 위해서 성전 바깥에 네 모퉁이에 하나씩 설치한 겁니다. 거기 설치된 부엌에서 고기도 삶고 그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한 그 구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왜 이렇게 자세하게 성전구조를 알려주시는가?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거지요. 우리보고 만들라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친히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전설계도를 미리 제시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성전 구조를 에스겔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의 사적인 거주지, 우리의 주택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은 하나님이 거주하기 위한 세상이지 인간들이 거주하려고, 그냥 밥이나 먹고 살라고 만든 세상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이 자연세계 속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보게 되면, 과연 내가 있는 그 곳이 하나님이 거주할 만한 곳인가? 이게 주안점이 되어야 하지,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편리하고 내 육신 하나 사는데 얼마나 따뜻하고 유익한가? 이것은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를 않습니다. 충돌돼요. 노아 때도 분명히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사적인 일에 몰두했는데 갑자기 홍수가 들이닥쳤습니다.
노아홍수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데 홍수를 왜 주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늘의 궁창이 터져서 비가 쏟아지고 밑에서도 샘이 터져서 온 세상 전체를 물바다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가 뭐냐, 하는 거예요. 옛날에 홍수가 나서 사람이 죽었다. 그렇게 하면 지나간 일이 돼버려요. 왜? 홍수가 왜 왔는데? 비를 왜 주셨는데?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을 가지고 멀쩡하다가 생각한 겁니다.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오늘날과 똑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 열심히 사는 것은 아무 문제없어 보입니다.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악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데 그것은 노아 때 사람들과 마찬가지에요. 그들도 자기 자신에게 행복하게 살면 되지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홍수가 들이닥쳐 버리면 인간은 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옛날에는 물이 왔지만 마지막 때는 불이 온다.’는 거예요. 불이 오니 주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게 하는 겁니까? 그 내막을 알아야 돼요. 궁금하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만 거룩하면 되지 인간이 사는 세상이 더럽다는 것은 하나님도 다 알고 계시는데 인간세계까지 거룩을 강요하면 우리는 참 부담되지요. 자식 키워야지요, 밥 먹고 살아야지요, 돈 벌어야지요, 거기에 거룩까지 요건을 갖추려면 힘들다, 라고 생각하시는데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은 우리의 거주지가 아니고 주님의 거주지입니다. 하나님의 거주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주지가 더러워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습니다. 그냥 방치하지 않아요. 처리에 들어갑니다. 손보십니다. 하나님이 거주할 곳은 만드시고 나머지는 다 불로서 처리해버리십니다. 그 하나님의 거주할 곳을 따로 만드는 작업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두 자로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넓게 이야기해서 성전과 성전의 혜택을 입는 영역, 권역, 영향력이 미치는 그 영토, 그렇게 이야기하고 에스겔 48장으로 끝나버립니다.
성전은 거룩하거든요. 거룩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니까. 거룩한 그 성전과 성전의 영향력을 입는 권역에 해당되는 거주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열 두 지파라고 합니다. 열두 지파에 완전한 숫자가 채워지는 것을 14만 4천이라고 해요. 이것은 12×12×1000,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말은 장소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장소에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설교 처음에, 이 땅에서 무심코 밥 먹고 사는 이것은 옛날에는 물로서 심판받고 앞으로는 불로서 심판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물심판과 불 심판만 이야기해 버리면 사람들은 ‘내 한 몸 살리기 위해서 무슨 조치를 해야 하는가?’ 자기 살 궁리를 할 거예요. 그러나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나라라는 것은 내가 살 곳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에 나도 자동적으로 들어가련다는 생각 자체를 먹지 말아야 해요.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거주하기에 거룩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곳에 합류하려면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돼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거룩한 성전도 친히 만든 것처럼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이 친히 만드십니다. 문제가 굉장히 간단하게 되었지요. 천국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들어낸 사람만 거기 갑니다. 그 숫자는 정해져있습니다. 14만 4천으로 정해져 있지요.
14만 4천이라 하는 것은 열 두 지파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총합을 14만 4천이라고 합니다. 1,2,3,4,5,6,7……, 해서 14만 4천이 아니고 나 하나와 너 하나 그래서 둘, 그 다음에 셋, 이렇게 해서 14만 4천이 아니고 14만 4천 하나하나가 하나를 이야기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위에서부터 퍼져버려요. 위에서 확산되니까 14만 4천이 된 것이지 “너 하나 들어가. 너도 우리 교회로 와. 그러면 둘, 셋, 14만 4천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더 채워.” 이것이 14만 4천이 아닙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14만 4천이지 아래서 올라가는 식으로 채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신천지나 여호와증인보고 하라고 하세요.
마치 뭐와 같은가? 예루살렘 성의 특징이 뭐냐? 보통 이방 동네는 낮은 곳에서부터 집이 차서 윗동네까지 올라가지요. 서울도 그렇고 대구고 그렇고 도시가 그래요. 서울의 유명한 봉천동도 마찬가지인데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못사는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 보니까 그렇게 올라간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부산역 앞에 있습니다. 부산에 밤중에 방문한 외국인은 오해해요. 부산에는 100층 이상짜리 빌딩만 있는 줄로 아는데 밤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낮에 보면 전부 다 산동네 집들이에요. 밤에 보니 불 빛 때문에 높아 보이는데 낮에 보면 산동네 집들이에요.
그러나 예루살렘은 희한하게 산지인 위로부터 아래로 집이 채워집니다. 아래로 내려가요. 아브라함 시대의 예루살렘은 모리아 산 따로 있고 작은 예루살렘 성읍이 따로 있었어요. 그러나 다윗시대에 가면 인구가 많아지니까 모리아 산까지 합쳐져 버리고 솔로몬에 이르면 모리아 산에 성전이 만들어집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위에서부터 내려온다면 중요한 것의 답이 나왔지요. 거룩하냐 안하냐의 그 문제가 관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거룩이 뭐냐? 거룩은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곁 통행구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여기에 제사장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얼쩡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사장이에요. 그러면 제사장 아닌 사람은 뭐냐? 제사장 아닌 사람은 성전에 있지를 못하고 바깥에 있지만 성전의 거룩이 바깥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미치는가? 47장에서 어떻게 파급되는가를 보이는가? 성전에서 물이 나와요. 이 물이 성전중심으로 그 바깥에 있는 모든 농경지를 생명으로 가득 차게, 생명으로 펄펄 뛰게 만들어요. 이러한 구조가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도 그대로 나와요.
21장 끝에서부터 22장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물이 나와서 그 사면을 적시게 되면 온 천지가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폴짝폴짝 뛰고 충만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2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항상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요. “목사님, 이게 진짜입니까?” 제 답변은 이렇습니다. “십자가가 진짜라면 진짜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진짜라면 진짜입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나 어떤 집사가 도 닦다가 환상을 봤다든지 하는 그것은 믿지 마세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에서 기적이라 하는 것은 설명 못하는 것이 기적의 핵심이 되지 아름답고 멋있고 빛나는 것은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 뭔가 설명되지 못한 것으로 집어줌으로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으로 제시된 겁니다. 그 설명되지 못한 것의 최종적인 것은 뭐냐? 인간의 능력으로 아무리 해도 설명 안 되는 것이 뭐냐?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 십자가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도 사람의 지혜로도 설명할 수 없는데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이 그것을 확인할 뿐이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십자가가 이렇습니다.”가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은 “주여, 제가 뭔데 이렇게 십자가로 용서해주십니까?”라는 확인, 확인차원의 고백을 내놓게 되지요. “십자가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니까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입니다. 인간이 천국 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피를 흘렸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인가 하면, 성전에 거하는 제사장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게 되면 방금 이야기한 그 설명들이 진짜 기적을 빼먹고 하는 인간적인 설명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3장 12절에 보면 거기에 제사장이 속해 있는 레위지파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열 두 지파가 나왔지만 사실은 열 세지파로 나왔습니다. 요셉 지파가 두 지파로 나뉘었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나눠져서 총 합이 열 셋이 되는 겁니다.
열 셋이 되면서 민수기 3장에 보면 레위지파를 다른 열두 지파와 동떨어져서 독자적으로 높게, 이 차원 말고 위의 차원으로 올려버려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보편적 대표성이라고 이야기해요.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보편적 일자 성, 일자 성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보편적 대표성이라고 합시다. 일자라는 것은 하나라는 말이지요. 여러 것을 대표하는 하나라는 겁니다. 보편적 대표성이라고 하면 되는데 그 대표성의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 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민 3:11-13)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누구나 죽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누구나 죽어요. 왜냐? 하나님은 거룩하고 그 밖에는 누구도 거룩하지 않기에 누구나 죽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이래요. 죽은 자와 동행하고 싶은 거예요. 죽은 자와. 죽은 자와 동행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레위지파는 이미 죽은 자로서 동행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서 살아 있는 게 되는 겁니다.
어렵게 표현해서 죽음이 살아 있어요. 하나님이 죽이시는 죽음이 살아 있어요. 이걸 가지고 ‘출애굽 사건의 살아 있음’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가 물어요. “십자가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늙어 죽는다든지 자살하는 그런 죽음 말고 하나님이 죽이시는 죽음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죽이는 죽음. 그러니 기적이라는 것은 내가 산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큰일 날 뻔 했다. 기적이다. 까딱했다가는 죽을 뻔 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연세 많다든지 병들어 죽는 그 죽음만 있는지 알았는데 하나님이 죽이시는 그 죽음이 감지가 될 때 이것은 산 사람으로서는 설명이 안 되니까 그것이 기적이 돼 버려요.
구약성경에 보면 그런 죽음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요나가 물에 빠졌을 때에 같이 배에 탔던 선장과 선원들은 “이제 죽었다.”고 한 거예요. 바다에 빠지게 되었으니 죽은 거예요. 그냥 잔잔한 바다 같으면 살 수도 있을지 모르는데 이것은 폭풍의 바다입니다. 이것은 죽은 거예요. 남들 보기에 분명히 죽은 겁니다. 그리고 요나 본인도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물 밑 몇 미터쯤에서 물고기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물기기가 삼켜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이 때 요나가 처해 있는 그 자리가 뭐냐? 이미 죽은 자리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던 자리가 자기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새롭게 만들어졌어요. 그 만들어진 장소를 신약에서는 ‘십자가 안’이라고 해요. 십자가 안. 마음 같아서는 저 뒤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떼어서 설명하고 싶은데 십자가는 나무로 교차해서 만들어서 딱딱하잖아요. 안에 별 공간이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십자가 안’이라고 해서 따로 공간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 안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외부에서 볼 때는 죽은 자고 십자가 안에서 볼 때 그 모든 사람은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아가씨가 시집을 가서 자기만 복음을 알고 성령을 받았으면 그 시집에 있는 올케, 시누이, 시동생, 시어머니, 시아버지, 다 죽은 자입니다. 그들, 복음을 모르는 시집식구들은 성령 받은 그 사람을 기적의 사람이라고 불러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기적을 모르지요. 너나 나나 똑같으니까. 그러면 기적을 누가 이야기하느냐? 이미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바깥의 시집을 보면서 “저들은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는데 왜 저는 안에 있습니까?” 할 때 비로소 설명되지 않는 자기의 현상, 현존, 현재 입장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거룩을 만들어낸 겁니다.
이게 구약에서 레위지파한테 그렇게 만든 겁니다. 레위지파 설명 다시 합니다. 열두 지파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럽기 때문에 다 죽어요. 다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었다는 사건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그들이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자라는 것을 누가 대표해서 보여주는가 하면, 레위지파가 대표해서 보여줘야 돼요. 레위지파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마땅히 죽어 있다.’고 느끼는 거지요.
죽어 있다면 꽥, 하고 죽어 있어야지 왜 펄펄 살아 있느냐? 왜 성전에서 일하느냐? 레위지파가운데 제사장이 있고 제사장은 성막에서 일을 하니까, 왜 그들은 성막에서 활동을 하느냐? 그들은 이미 죽었지만 주님이 주신 죽음 안에 죽은 자도 살려내는 능력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 죽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생명이 있어요. 제 말 잘 들으세요. 죽고 난 뒤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안에 생명이 있어요.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십자가 안에 부활이 있어요.
십자가 무효로 돌리고 그 다음차례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부활이 있다는 말이지요. 제사장 그들이 죽음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준 자리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그걸 선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선택된 제사장은 복장 자체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양면 다 보여주는 복장을 하고 있어요. 특히 대제사장 같은 경우에만 기름부음을 받는데 다른 제사장도 기름 부음은 받지 않지만 귀볼 등에 피는 발라요.
이들의 복장 자체가 그 얇은 천안에, 모시옷 같은 그 얇은 옷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죽음과 주께서 주신 생명이 다 들어 있어요. 그 옷을 가져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옵니다. 장차 올 예수님이 옷이라는 인격으로 들어간 거예요. 성전에서 제사장의 특징은 뭐냐? 의식주를 성전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전 바깥에서 출퇴근하면서 일해요. 다윗시대에 보면 24차례 교체되면서 일주일동안 일해요.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근무해요. 잠은 성전 바깥에서 자요. 레위지파에 할당된 지역이 총 48곳인데 그중에 13곳이 제장 구약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그들은 성전 바깥에서 잠을 잔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의식주가 다 해결돼요. 복장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해도 버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죽지만 안 죽을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복장을 주는데 선택된 자에게만 준다는 말이지요. 제사장의 위상이 잘 나타난 곳이 레위기 10장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있었어요. 원래 제단 불을 가져다가 불씨를 교체해야 돼요. 성막에서 제단 불을 가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물로 씻는 물두멍이 있고 약간 더 가면 성소가 있고 성소에서 더 가면 지성소가 나와요.
성소에 들어가면 향단이 있고 좌우에 떡 상과 등대가 있어요. 등불이 떡을 비추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나답과 아비후가 소주를 먹은 모양이라. 술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뒤에 나오니까. 술을 먹었는지 ‘불은 다 똑같은 불이지 뭐.’ 불이라는 것은 공기 중의 산소가 연소되는 작용을 말하거든요. 그 당시에 그런 화학작용은 몰랐겠습니다만. 이 불이나 저 불이나 태우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해서 했더니 그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태워 죽였습니다. 새까맣게 되었지요. 화상으로 죽어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이곳이? 얼마나 거룩이 무섭습니까? 이 두 제사장만 문제가 아니에요. 제사장이 제사 잘못 드리면 그 불이 성소 바깥에 텐트치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거룩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인간은 다 죽어버려요.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거룩을 마련했는데 뭐냐?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죽이고 그 죽은 자기를 살리는 방식의 모델로서 레위지파를 택해서 미리 앞당겨서 그들에게 심어주고 그들을 인도하여서 장차 올 메시아에게 이끄시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너무 빨리 해서 죄송합니다. 천천히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죽이시고,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하나님 속에서 생명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작업을 신약 때 하시기 위해서 구약 때 모형으로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을 세워둔 겁니다. 요점은 거룩이에요. 그리고 그 거룩은 거룩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야 돼요. 택함 입은 사람들, 택함 입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오늘 본문같이 활동을 해요.
그리고 그들이 속건제와 속제죄의 희생물을 삶지요. 어디서? 동쪽의 제일 반대쪽인 서쪽 끝, 문이 없는 그쪽 끝에 부엌이 있는데 거기서 삶습니다. 제사장 복장, 의복, 그리고 식사를 하거든요. 의복과 식사. 그 다음에 그들이 활동하는 거주지. 의식주 세 개가 합치면 뭐냐? 인물이 되고 인격이 돼요. 성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처음 제시했던 것은 어린양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나오는 인격, 의식주가 해결되는 인격, 그 생명은 뭐냐 하면,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했던 제물이 품고 있던, 제물이 표현하고 있는, 제물이 갖고 있던 그 생명이 의인화 되어서, 생명이 인격화된 그 인격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주고 난 뒤에 요단강에서 저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이상 올라가서 갈리리 바다 옆에 있을 그 때 예수님이 합류를 했거든요. 예수님이 유대에 가서 첫 번째 성전청결, 총 두 번인데, 그 첫 번째 성전청결하고 난 뒤에 다시 고향 갈릴리로 합류했을 때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사람보고 양이라고 했으니까 이게 설명이 되어야 할 텐데 설명 될 수 없을 때 이걸 기적이라 합니다.
왜 자꾸 설명될 수 없다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서 나왔으면 설명이 되는데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설명이 안 돼요.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 설명 자체가 다 거짓말이고 엉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설명은 반드시 자기이익을 바탕으로 설명이 시작되거든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어서 나에게 구원, 영생이라는 이익이 돌아온다. 내가 이렇게 되면 천국 간다는 이익이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마치 자기는 마땅히 구원 받아야 될 사람처럼 시작을 하게 돼요. 인간의 모든 언어와 개념들이.
그렇게 보면 모든 설교는 다 거짓말이에요. 사도바울은 그걸 방지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내가 말한 것은 세상 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혜로 들었어요? 잘못 들었네. 여러분이 지혜로 들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엉터리로 이해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가 전한 것은 지혜가 아니고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해돼요? 그럼 성령을 받았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가 아니라 “성령 받은 것 맞네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 받은 것과 이해되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령은 내 이익과 상관없다는 거예요. 일방적인 조치지 이익과는 상관없어요.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자기 살 궁리를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앞에서 살 궁리라 하는 것은 용납이 안돼요. 제사장이 먹던 음식, 제사장이 입던 의복, 제사장의 모든 활동영역, 이 모든 것은 본인의 아이디어에서 만든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거예요. 주신 옷을 다시 비춰보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 했잖아요.
나를 선택해서 이런 일을 시키고, 이런 음식을 먹게 하고, 이런 옷을 입게 하고, 기름 바르고, 피 바르고, 제사장으로서 이 성전에서 일하게 하는 이 모든 것, 나의 이익과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나의 생존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에요. 시키니까 한 일이에요. 이거 하면 영생 얻습니까? 아니에요. 그거 해서 영생 얻는 것 아니에요. 영생은 내가 제사하는 일에 동참한다고 해서 영생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얻는 것은 예수님이 고유권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네 십자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따라서 구원해 달라고 요구를 해 버리면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 이익차원이 돼버려요. “그 능력 주세요.” 주께서는 “왜 달라 하는데?” “제가 구원 받기 위해서요.” “너는 왜 구원 받으려고 하는데?” “제가 구원받으면 저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또 네 이익이잖아. 네 이익이잖아.” 그러니까 그것은 너에게서 나온 거지요. 가짜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속으로 묻고 싶은 거예요. 강의시간도 아니니 노골적으로 물을 수는 없고요. 우리가 이 세상을 대처하면서 살잖아요.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부딪히면서 대처하면서 살잖아요. 대처 왜 하십니까? 여기에 해답이 없어요. 왜 인간은 이 세상에 대처해야 되는가? 그 해답을 모른다니까요. 이게 60, 70산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정답이 뭡니까? 이게 기적이라니까요! 내가 다섯 살 때 오줌 싼 것도 기적이고, 일곱 살 때 초등학교 다닌 것도 기적이고, 군대에서 맞은 것도 기적이고, 전부 다,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기적이다, 라는 생각으로 주께서는 거룩을 확장시키는 그 능력이 이 성전에서 나옵니다.
이 성전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제사장이, 이 거룩의 의식주가 이제는 성전 바깥으로 번집니다. 47장에 가면 물이 나오지요. 성전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성전 바깥에 포진되어 있는 열두 지파 모든 지파가 다 거룩해집니다. 뭐가 거룩한가? 예배가 거룩한가? 아니요. 기도가 거룩해요? 아니요. 헌금이? 아니요. 그들이 태어나서 살고 죽는 인생 전체가 거룩해요.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강도의 강도질이 거룩하고 창기의 창녀 질이 거룩하고 기생 라합의 직업이 거룩하고 모든 것을 화산이 터져서 나오는 마그마로, 페인트처럼 표면을 다 덮어서 발라 버리듯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온 거룩이 분출되어서 그 바깥에 있는 택한 백성의 성읍들을 덮어버릴 때 그것이 바로 에스겔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천국전략, 천국작전입니다.
착해서 거룩이 아니고 그 중심지를 보는 거예요. 그 중심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의 중심부를 후벼 파내버려요. 파내고 거기에 어린양의 죽음과 생명을 탑재시켜 버려요. 장착시켜 버린다고요. 그러면 나는 내 안의 화산의 분출구가 되어 있어요. 거룩의 분출구. 이것을 거룩한 성도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거룩 된 상태에 놓여요. 그 거룩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발라 버려요. 어떤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전에는 죄 아닌 것조차도 죄로 느껴지게 만들어서 이미 거룩했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무심코 육신으로 생각했던 그 모든 것도 이 거룩과 대비해보면 전부 다 더러운 죄가 됨을 깨닫게 될 때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는 주님이 생각해 놓은 택한 백성 만들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참 어지간히 주님 배반 많이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 찾아왔을 때 언급한 것은 이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을 때 베드로가 질문을 바꿔버려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자기중심이 후벼 파져서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이 주님의 생명으로 교체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모든 주체가 주님이고 나는 서술어가 돼버려요. 주님의 종, 주님의 백성, 주님의 사람, 주님의 비빔밥, 주님의 스키니 진, 주님의 카드, 주님의 아파트, 주님의 차, 주님의 자식, 모든 것이 거룩으로 발려지는 이것은 우리가 행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거룩해 졌습니다. 왜요, 라고 묻지 마세요. 기적입니다. 기적은 이유를 묻지를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믿어진 것을, 이미 된 현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의 고백이 저희에게서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확장되고 성전을 타 넘어서 백성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가 항상 우리를 넘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발라버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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