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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에스겔 47:3-5 / 성전과 하나님의 형상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에스겔

에스겔 47:3-5 / 성전과 하나님의 형상

정인순 2015. 6. 25. 07:07

 

 

이근호

음성   동영상 유튜브

 

성전과 하나님의 형상

2015년 6월 24일                          

 

본문 말씀: 에스겔 47:3-5

(47: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7: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47: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 생명의 물이 성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곧 성전이 이 세상의 중심점이요 구심점이라는 말이 됩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신의 몸이 세상을 보는 중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즉 세상 현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때, 만족을 갖는 식으로 세상을 평소에 대하고 삽니다.

하지만 과연 대자연 만물이 나 하나의 몸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 말고 다른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 몸이 대만족을 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소에 억지를 부리면서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들통난 것입니다.

분명 세상은 나 중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왠지 우리 마음은 내 뜻대로 되는 조건 하에 행복과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대자연 사이가 관계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힘은 두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수는 두 보좌에서 나옵니다. 바로 세상의 중심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이미 이 지상에 나타난 바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관리하고 보좌하기 위해 출현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러니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의 모든 민족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이점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타민족과의 차이남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스라엘도 망하고 그 성전을 불타버렸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구심점을 두고서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곧 성전 외에 다른 중심점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 나타난 구심점을 하나님 손으로 없애버리는 겁니까? 여기서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의 차이가 납니다.

육의 생각이란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의 사고방식이고 영의 생각이란 처음부터 하나님만이 아시는 생각입니다. 마귀의 생각을 공격하시는 사고방식입니다.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중심점을 고려해서 실시하셨습니다. 그 구심점은 창조, 제일 마지막 날인 7일날 제시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즉 인간을 위한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위한 창조입니다.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 문장의 강조점이 ‘사람’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에게 있습니다.

창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인간입니다. 만약에 세상 정복을 하나님께서 저주로 맞서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단지 ‘흙’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죄를 짓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 죄지은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진짜 창조의 구심점을 등장내는 환경으로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다툼을 통해서 등장하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로새서 1:15) 즉 하나님의 품 속에 계시던 하나님의 형상께서 세상의 구심점으로 인물화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쇄신된 ‘아들의 나라’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게 창조의 목적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는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마저 ‘아들 사랑’에 몰입되십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만물의 주가 되시는 분임을 만물을 통해서 증명하시려는 겁니다. 이 형상되시는 분의 지상 등장은 죄악된 세상에 대해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뜻을 나타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대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곧 하나님의 심정과 감정과 뜻을 나타내는 증거물로서 움직이는 겁니다. 가뭄과 기근과 태풍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와 더불어 바다를 건너갈 때에 바닷물이 예수님이 탄 배를 공격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폭풍을 향하여 ‘꾸짖었습니다’ 바로 어떤 인격자가 인격자를 대하듯이 말입니다.

이는 대자연의 위상은 중심점에 계시는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관되어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때 언약을 통해서 그 내용을 그들의 운명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는데 역시 언약대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이 곧 세상의 중심이 되고 다윗언약을 통해서 그들 한가운데 성전이 만들어졌고 그 성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거주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좌절되었고 이스라엘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즉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인자(人子)되시는 분을 스케너하듯이 동반해서 물의 양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물로서 인자가 새하늘과 새땅에 생명을 주시는 중심되는 분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자연물(물)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들은 이 성전 앞에서 대자연이 멸망되어야 될 이유가 ‘죄’라는 이름으로 적절치 못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곧 인간의 실패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멸망과 만나면서 그 사이에서 예수님의 존재가 부각됩니다. 기존의 대자연은,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실패와 죄와 더불어 같이 망가져야 하지만 그 실패 속에서 생명으로 등장된 분은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이 되는 물을 통해서 죽음에서 새 창조물이 생성됩니다.

이로서 기존의 모든 인간 중심의 현실관은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전한 복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로 인해 실패한 현실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4강-에스겔 47장 3-5절(성전과 하나님 형상)1506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7장 3절-5절입니다. 구약성경 122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7:3-5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일부러 천사가 그 물 속으로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갔어요. 한 5백여 미터 들어갔는데 물 높이가 발목까지 오르고, 다시 500여 미터 더 가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더 5백여 미터 가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그 다음에는 도저히 걸어서는 갈 수가 없고 헤엄을 쳐야 능히 건널 수 있는 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강의 물이 어디서 나왔는가? 성전에서 나왔고 거기서 나온 물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이 그 원천지가 어디서부터인가 하면, 이미 성전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설치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가 포함이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성전은 어디에 있는가? 성전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안에 있어요.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은 인간 세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대자연속에 있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하면 이 대자연에 구심점, 중심점이 있다는 겁니다.

 

중심점이 있다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동안 인간들이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을 어떻게 정하고 어떻게 경계하는가 하면, 보통 자기 존재를 중심으로 경계를 정합니다. 나는 한국사람, 너는 일본사람, 나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국적이 아닌 사람은 외국인이 되는 거지요. 내가 속해 있고 내가 포함되어 있는 곳이 구심점인양 생각들 하면서 살아갑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네가 진짜 세상의 중심이냐? 네가 보는 현실에서 네가 중심에 있고 싶어?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구성할 물을 내 봐라.” “물이 안 나오는데요?” 안 나오면 그것은 중심이 아닌 거예요.

 

이 더러운 세상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과 솜씨가, 그런 자질이 나한테서 나오지 않는다면 너 자신을 한 번 돌아보라는 거지요. 네가 과연 네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만든 현실에서 정답인지, 그것이 진리에 속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이 세상의 중심이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왜? ‘우리 안에 성전이 있고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주지가 되기에 우리 이스라엘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이것은 정답일 수 있다.’라고 이스라엘이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그 이스라엘 망했는데요? 그 성전은 불타버렸는데요? 그거 참 이상한 일이지요. 방금 제가 이 대자연에는 중심이 있다고 한 겁니다. 이 자연에 중심이 있다는 말도 성경을 통해서나 알지요. 일반 동양철학을 비롯한 상식에서는 자연이라 하는 것은 중심이 없는 것이 자연이에요. 자연에 어떤 중심이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연은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自然) 이라는 한자 말 그대로 스스로 있는 거예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모르는, 스스로 있는 거예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말은 중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는 거예요. “산? 네가 중심해라. 물? 네가 하고 싶으면 네가 해라. 나? 나도 내가 중심이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 너는 너한테 중심이고 나는 나한테 중심이고, 그렇고 그렇게 사는 이것이 인생이다.” 도 다 닦은 사람처럼 머리를 홀딱 밀은 거 같아요. 도 닦아서 머리를 홀랑 밀은 사람처럼, 천하를 초월한 것처럼 생각들을 하는데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이 대자연에 중심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중심이 있다면 그게 나입니까?” 너는 아니고. “그럼 나는요?” 변두리지요. 변두리라는 말 자체가 기분 굉장히 나쁜 거거든요. “저는 뭡니까?” 껍데기. 이 말자체가 상당히 기분 나쁜 거예요. 그러면 알맹이는? 알맹이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수박 먹는데 껍데기 먹을래요, 알맹이 먹을래요? 과일은 알맹이 맛이지 껍데기에 아무리 영양가 많다고 해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껍데기라는 말은 아웃사이더라는 말이에요. 너는 나가놀아라, 너는 있으나마나,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너 하나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너는 주변 사람이고 핵심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입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지요. 없는데서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작업은 중심이 없는 이 대자연에서 중심을 출몰시키는, 출현시키는 작업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우리에게 알려줘야 할 텐데 왜 그 소식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자체 속에 세상의 중심이 있었어요.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이 자기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는 문장을 방금 읽어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속으로 답변해 보시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할 때,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형상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비중,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형상에 강조점이 있지 인간이라는 것에 강조점이 있지 않거든요?

 

인간이 하나의 얇은 고무피막이라면 그 안에 헬륨가스를 집어넣으면 고무풍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공중으로 떠오르겠지요. 인간에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집어넣었을 때 하나님의 헬륨가스가 빠져버리면 그냥 고무막이지 풍선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하나님의 형상 빠져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담겼다? 흙에 담겼다. 형상 빠지면 흙 된다. 그러면 흙은 뭐냐? 대자연의 일부지요. 대자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중심이다. 방정식 간단하게 나오네요. 간단하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왜 죽습니까? 왜 흙이 됩니까? 형상 보여주려고. 어떻게? 형상의 기능. 그 기능이 뭡니까? 죄 짓는 자는 죽이는 기능. 따라서 너는 죽어줘야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죽는 너를 통해서 표현되고 보이거든요. 하나님의 조치에서 별로 실수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자기 아버지 어머니 죽을 때 왜 그렇게 우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하나님의 조치인데 대체 뭘 평소에 생각했기에 우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만족도를 따라서 돌아가야 된다고 우기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겔 47장에서 네 차례에 걸쳐서 물이 나왔고 그 물을 건너게 하실 때 그 물이 발목, 무릎, 허리, 그 다음에 그 물이 온 통 넘치는 네 단계, 이 네 단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여름철에 <여고괴담>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영화 안 보거든요. 인간이 귀신인데 무슨 귀신을 또 찾아요. 잘 생긴 귀신 놔두고 흉측한 귀신을 따로 찾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인간이 멀쩡하게 다 귀신인데요.

 

그런데 그 영화의 한 장면이 뭐냐? 아마 고소영이라는 배우가 처음 나왔을 때인 모양이지요. 학교 복도에서 귀신이 걸어오는데 곱게 사뿐사뿐 걸어온 것이 아니고 퍽, 퍽, 퍽, 퍽, 네 단계로 나눠서 걸어와요. 본문 보니 그게 생각나요. 툭, 툭, 툭, 툭, 단절된 채로. 지금 이 물이 스캔을 하는 거예요. 뭘 비추는가? 물이 인자된 에스겔을 비추는 거예요. 자연의 중심이 성전이라는 건축구조물이냐? 그게 하나님의 일의 다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게 뭘 로 바뀌는가? 인물로 바뀌어요. 그 인물 이름이 ‘인자’입니다.

 

그렇게 바뀌면서 진짜 자연의 중심을 물이라는 자연물을 통해서 스캔을 하는 거예요.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하는 식으로 발목, 무릎, 허리, 전체상, 이것을 물로서 보조를 맞춰가면서 비춰주는 겁니다. 인자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서 인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인자가 있음에 인자를 옹위하는 목적으로, 인자를 둘러싼, 인자를 ‘주’답게 드러내는 필수요건으로서의 물, 새 생명, 새 하늘과 새 땅이 갖춰진다는, 그 장치가 갖춰진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가거든 그 물 한 방울 적실 때마다 그냥 “야, 시원하다.” 하지 마시고 이 물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보세요. 동대구 하수처리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무슨 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요. 이 물이 어디서 나왔느냐를 보라는 거지요. 그 물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온 거예요. 어린양의 성전에서, 보좌에서 동쪽을 향하여 흘러나와서 그게 생명수를 이룬 겁니다.

 

그러면 생명수 따라서 뭐가 피어나는가? 가로수처럼 생명나무도 피어나서 그렇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생명나무는 생명수에서 생명을 공급받아서 그렇게 잘 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생명은 누구의 생명인가? 바로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생명을 어떻게 얻었느냐? 그 생명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생명이기 때문에 죄인을 필요로 해요. 죄인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낸 생명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죄 그따위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죄를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막 사세요. 그 죄가 어디에 소용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생명 만드는데 재료로 다 활용됩니다.

 

이거 듣고 발작 일으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거예요. 기절할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복음 듣고 발작을 일으키는 반응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의를 행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 로마서 3장이나 6장에서 그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제대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고 그 복음은 뭐냐?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을 화나게 만들고 발작을 일으키게 하지만 내가 만든 복음 말고 마귀가 만든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라는 거예요. 분노와 발작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화남, 분통, 그거 통과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어요.

 

죽지 않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야구장에 와서 표 내고 구경하게 되면 영생 얻는 줄 알아요? 그런 것 없습니다. 구경하는 인간 죄인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이 땅에서 고생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교만이에요. 주님이 죽었던 그 죽음의 세계를 지가 뭔데 안 죽으려고 발버둥을 칩니까? 주님이 가시면류관유니폼을 입었으면 우리도 가시면류관유니폼을 입어야 돼요. 주님은 죄도 없으면서 죄수복을 입고 땡볕에 덥게 지냈는데 우리는 죄지어놓은 주제에 에어컨 틀고 앉아 있으니, 죄인 주제도 모르고. 시원하게 천당 가려고.

 

공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불가능한 지점에 있을 때 비로소 공짜라는 의미가 제대로 다가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져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자연을 만든 목적입니다. 자연을 만든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형상답게 빛내기 위해서. 끝! 그게 창세기 1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걸로 세상을 끝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따로 남겨둔 하나님의 어떤 복안이 있었어요. 이 형상을 주님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물로 만드는 작업, 주님으로 만드는 작업,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 1장에 나옵니다. 13절부터 보게 되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여기서 ‘그’라고 되어 있는데 그 앞의 구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진짜 목적되는 나라, 그 나라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바뀌어야 돼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라 하는 것은 죄지은 티를 내는 것이고 정작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께서 정작 이야기했던 그 ‘하나님나라’라는 것은 ‘아들의 나라’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에서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로 바뀌어야 돼요. 이름 하나 바꾸는 그것이 뭐가 어렵나?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아들이 없어요.

 

예수님이 유대인한테 죽었는데 유대인에게는 ‘아들의 나라’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나라에요. 왜 아들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고집하는가 하면, 아들만을 위한 나라이지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어려운 수렁에 빠지니까 제가 겁이 나는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만들 때 인간들은 ‘에덴동산이 좋았던 것처럼 나중에 하나님 나라도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교회에서 2천년동안 신학을 정립했는데 그 2천년동안 정립해서 교회가 내놓은 신학이 뭐냐? ‘하나님나라’신학입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하나님의 왕 되심’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마귀나라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인간을 위해서 영원히 함께 살도록 나라를 만들었는데 그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거든요. 용어를 쓸 때 ‘하나님나라’라고 해 놓고는 실제로는 예수님이 가까이 온 거예요. 누굴 빼놓고? 하나님 나라 기다리는 사람 다 빼놓고. 말이 너무나 이상하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하늘나라가 아니네요.” 하니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죽어! 물속에 빠져 죽어! 나는 물속에 빠져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는 회개를 물속에 들어가서 해. 회개하는 자에게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보일 것이다.” 해놓고 물속에 들어가니까 그 물속에 누가 뛰어들었느냐 하면, 예수님도 함께 뛰어들었어요.

 

인간이 생각하던 하나님 나라에서 인간이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이 상상도 못한, 인간이 죽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못 들어가는 나라, 바로 아들의 나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하늘나라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 사람 옆에다가 예수님을 보내서 그 하나님나라를 간절히 찾는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어버리는 불상사를 유발시켜서 어느 인간도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격은 하나도 없고 오직 아들만을 위한, 만물보다 먼저 계신 아드님을 위한 세계만이 정작 하나님이 원했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살아서는 못 간다니까요? 그게 복음이에요. “살고 싶으냐? 너는 천국 다 갔어.” 이게 복음이에요. “죽어 마땅해. 그러면 천국이네.” 이게 복음입니다. 17절에 보면,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물을 만든 목적이 만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주님으로 전환시키는 그것을 위해서 세상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 1장 28절에서 형상을 만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28절에 아주 유명한 말이거든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구절입니다.

 

이것만 보면 김우중 회장이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정주영. 칭기스칸도 아니고 나폴레옹도 아니고, 정복욕에 환장한 사람들이 이 대목을 다 좋아해요. “다스리고 정복하라.” 심지어 예배당 터 넓이는 것도 이 대목을 동원해요. 아파트 뺑뺑이 돌면서도 전부 다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거예요. 이 ‘다스리고 정복하라’를 어디까지 연결시키느냐 하면, 하늘나라 확장과 연결시켜요. 한 알의 밀알을 심었는데 온 나무가 가득하다는 식의 것들, 휴~!, 욕심도, 욕심도……, 뭐가 그리 욕심이 많은지. “적은자여 두려워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런 말씀은 귀에 왜 안 들어오는지?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눅 12:32)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마 18:20) 왜 그 말씀은 귀에 안 들어오는지? 두 세 사람도 싫어. 세 사람 빼버리고 두 사람. “두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가 너와 함께 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셋밖에 안되었지만 그들은 네 번째 사나이 때문에 살았어요. 불 속에서도. 왜?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하나님의 형상이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은 이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또는 애굽이 하나님의 형상에 위반되는 짓거리로 나올 때마다 자연세계가 그 하나님의 분노와 분통을 표현하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노아홍수가 그렇게 애굽의 열 재앙이 그런 거예요. 홍해바다가 열렸다가 애굽 군대가 들어서니까 홍해바다를 닫아서 하나님의 분노를 표시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뭄과 기근과 적신, 이 모든 것, 지금도 비 좀 온다더니 비가 안 오잖아요, 이 모든 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과 속성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으로 동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공격하는 바다를 보고 “그냥 잠잠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 대하듯이 혹은 동물 대하듯이 꾸짖으시지요. “예끼!” 이런 식으로 “꾸짖으시매 바다가 잔잔하더라.” 그것은 바로 이 자연물이라 하는 것은 부수적이라는 겁니다.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 자연의 구심점, 중심점은 자연의 일부가 구심점이 아니고 자연의 일부처럼 등장해놓고 그것이 사람으로 바뀌어져요. 그 사람이 그냥 사람이 아니고,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계약관계를 성취할 계약의 대상자, 유일하게 마지막 남은 자, 유일한 계약대상자로서의 ‘인자’라는 호칭을 가지고 이 땅에 등장하시는 분입니다. ‘인자’중심이라니까요.

 

그러면 그 인자중심, 예수님이 나중에 구심점이 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형상을 쥐고 있으니까 뱀이 아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아담 속에 있는 형상을 훼손하기 위해서 하늘의 전쟁을 연장해서 땅의 전쟁으로 이어서 땅에서 한바탕 싸운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라.”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 다시 말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되 선과 악을 가지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줘서 아들의 나라에 살게 하시는데 ‘이것은 너의 잘잘못, 행함과 관계가 없다.’ 해서 마지막 심판은 행위 책 따로 있고 생명책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이것은 창세기 2장을 그대로 반복한 겁니다. ‘행위 아니고 생명’이라는 거예요. 나 말고 다른 분의 생명이 나를 구원하는 위력이 되지 나의 잘잘못으로 내가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청년이 그렇게 오해를 한 거지요. 그래서 근심하며 돌아갔지요. 자기가 잘해서 복 받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가 그동안 인간을 세뇌한 겁니다. 지, 덕, 체, 용기, 이런 것으로 인간의 도시를 이루겠다는 그것이 로마의 표어에요. 오늘날 학급에 걸린 급훈들을 보세요. 전부 다 그 로마, 짐승의 나라를 그대로 이어받았어요. 여학교 급훈에 ‘글자 한 자 더 보면 좋은 신랑 만난다.’는 식이에요.

 

창조하는 마지막 날에 자연의 그 중심을 보여줬어요. 창조하는 마지막 제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거든요. 그러면 그 앞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형상이 중심점이 되는데 그 형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어떤 자연물이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처음부터 이 세상은 물로 되어 있었고 그 물과 물이 갈라지면서 하늘이 나온 거예요. 창세기 1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이 7일이라는 시간은 인간 편하라고 준 시간이 아니고 예수님의 스케줄에 맞춰서 주어진 7일이에요. 예수님의 스케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완성 때가 되면 시간도 없어지고 묵시가 돼버려요. 모든 시간이 완성이 되는 그것을 가지고 창세기 2장에 보면 안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하면 시간도 필요 없다는 그 말입니다. “안식하는데 무슨 시간이 필요한가? 안식으로 이끌기 위한 시간들이 필요했지.”라는 뜻이거든요. 그 시간 속에서 시간에 얽매인 대 자연물은 안식만 소망하면서 열심히 살아와야 했고 그 안식을 이루는 방법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의 다스림을 받아서 정복당하고 지배당할 때 온 우주는 형상중심으로 재편된다는 것, 형상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문제는 이 뱀이 인간에게 독립선언을 하게 만들었어요.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 이상하지 않지요? 뻔한 이야기인데 성경에서는 그걸 잘못됐다고 보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고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그 뱀과 인간, 남자와 여자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서 그걸 가지고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하나님의 주되심, 주 되게 하는 재료로 만드는데 거기서 나오는 재료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이라 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여자와 뱀이 다 필요했던 거예요. 그 약속을 위해서 두 노선이 필요했고 그 두 노선 따라서 한쪽 노선은 언약을 알려주고 한쪽 노선은 언약을 안 알려줍니다.

 

그 언약에 의해서, 그 언약대로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고 아브라함은 언약에 의해서 이 세상에 왔고, 언약대로 살았고, 그 언약대로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자손이 네 자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있는 것은 전부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없는데서 언약대로 만들어지거든요. 언약대로 만들어지는데 다윗 언약에서는 뭐냐? 성전이 만들어집니다. “성전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성전이 불타버려요. 동시에 이스라엘이 불타버립니다. 성전을 봉헌할 수 있는 합당한 인간은 현재 있는 혈육적인 인간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다. 언약은 인간의 기존의 혈육노선과 상관없이 새로운 혈육, 새로운 몸을 가진 분이 ‘인자’라는 명칭으로 오늘 본문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전이라는 이 자연물, 이 자연물이 인격으로 바뀌면서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어떤 물? 새 창조를 이루는 물, 천지창조때 물이 작용한 것처럼 새로이 작용하는 그 생명의 물이 넘칩니다.

 

아까 요한계시록 22장 봤지요? 물로서 천지를 살리는 원래 창조의 형태대로 갑니다. 그 말은 장차 언약의 완성 자를 따로 등장시킨다는 하나님의 취지를 에스겔 47장을 통해서 공표하신 겁니다. 물은 인자를 조명하고 그 인자를 주로 옹위하면서 그 필요한 모든 새 하늘과 새 땅은 인자의 성품과 속성에 준해서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형상대로 높이기 위해서 천지창조가 있고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만 인간이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예수님에 맞도록 천지를 창조하는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아들의 나라에요. 이름도 아들이 지배한다고 해서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이 단지 계신다고 아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아들이 지배한다는 것, 하나님마저도 아들 보는 재미로,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바로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이 자기 명칭을 아들에게 양보할 그 정도로 아들을 사랑했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변화 산에서 구름사이에서 나는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마음속까지 들어올 때를 가지고 샛별이라고 베드로후서에서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올라라. 내가 변화 산에서 들었던 음성이 네 속에 떠오르면 너는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미 너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들의 나라 티켓을 얻은 거지요.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준 것은 언약대로, 약속대로 다윗에게 성전을 만들라고 준비시켰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만들게 했어요. 만들고 난 뒤에 성전에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성전이 이 우주의, 자연의 구심점이 된 겁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이 아주 기분이 좋았어요. 성전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지요? 심지어 소문 듣고서 “풍문으로 들었소.” 해서 시바여왕이 방문하고요, 온 천지에서 지혜 하나 얻겠다고 모여들었지요. 왜냐하면 자연의 중심에서 나온 지혜기 때문입니다. 내 중심에서 나온 지혜 같은 것은 지혜 값도 못하거든요. 이기주의에 불과하지요. 그것은 지혜 값도 못하고 엉터리잖아요.

 

엉터리가 아닌 지혜는 우주의 옴팔로스, 우주의 배꼽에서 나온 지혜에요. 그 지혜가 솔로몬에게서 나오니 그깟 금덩어리 뭐가 아깝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가 기적인가? 남방에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얻으러 왔듯이 바로 이방인들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 나에게 왔는데 너희 유대인들은 왜 나를 배척하느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이야기했거든요. 그래서 돌아서서 보게 되면 예수님이 정말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고 주가 되심을 여러 모양으로 암시와 힌트를 줬어요. 줬지만 도대체 제자들마저 못 알아봤으니까 인간이란 어떻게 생겨먹은 거예요?

 

귀가 있으면 뭐합니까? 들을 귀가 있어야지요. 보청기 하면 되겠네요, 하지만 보청기 해도 소용없어요. 보청기 한다고 들립니까? 확성기를 써도 안 들리지요. 들을 귀 준 것이 뭐냐? 성령께서 오게 되면 들을 귀 있는 거예요. 세상, 주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 못돼먹은 사울,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것이 즐거움이었던 그 사울에게 주께서 들을 귀를 줘버리니까 “주여,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어찌 그리 쉽게 나오는지, 아주 편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오는지. “나는 자유를 얻었도다.” 자유를 얻었어요. 사도바울이 “나는 구애 받는 것이 없다.” 하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우주의 중심이 자기 안에 있으니까. 현실 돌아가는 것이 다 복음을 위해서 돌아가고 그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툭, 건드리면 예수님 중심이 나고 툭, 건드리면 예수님 중심이 나오고.

 

애들 인형에 그런 것이 있답니다. 툭 건드리면 “아이 러브 유!” 건드리면 “아이 러브 유!” 건드리면 그게 나온다는 겁니다. 툭, 건드리면 십자가 나오고, 툭, 건드리면 십자가 나오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자신만만하게 한 것은 이런 내력을 사도바울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이 깨질 때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종말은 곧 인간의 종말이에요. 인간의 종말과 자연의 종말, 그 틈 사이에서 품어져 나오는 것이 뭐냐? 십자가가 나오지요. 십자가가 나올 때 인간은 죽어 마땅하며 인간들이 구원을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사탄의 망발인 것을 드러내지요. 구원받겠다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주시니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중심이 내가 중심이고 내 중심으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마저 포기시키기 위해서 나를 질질 끌고 세상의 중심점으로 가는 그 중심점이 뭐냐? 성전, 곧 십자가에요.

 

그래서 주께서는 나를 죽이고 그 죽은 나에서 장미꽃이 피도록, 생명이 피도록, 나의 죽음을 하나의 거름으로 삼아서, 하나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싹이 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를 하나의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새 생명 나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해 놓고 “네가 바로 성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네 몸에서 생명수가 나올 것이다.”라는 에스겔 47장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니 우리는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 중심으로 보니 욕심만 챙겼는데 주님 십자가 중심으로 보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 올바른 일이었고 주님은 전혀 실수한 바가 없음을 저희들이 왜 미처 몰랐습니까? 내 중심으로 봐서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화나고, 하나님께 원망스러웠던 것을 주님 십자가 중심으로 봐서 모든 것이 감사, 감사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