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6:9-12 / 문 본문
이근호
문
본문 말씀: 에스겔 46:9-1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0강-에스겔 46장 9-12절(문)1505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6장 9절-12절입니다. 구약성경 122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6:9-12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찌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찌며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찌니라 절기와 성회 때에 그 소제는 수송아지 하나에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만일 왕이 자원하여 번제를 갖추거나 혹 자원하여 감사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그를 위하여 동향한 문을 열고 그가 번제와 감사제를 안식일에 드림같이 드리고 밖으로 나갈찌며 나간 후에 문을 닫을찌니라.”
성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볼 때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과 우리의 현실을 연결시키려 하니 그 연결고리가 너무 복잡하고 너무 길게 느껴지거든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동떨어진 이야기. 만약에 사람들이 이것을 구상했다면 구상할 때부터 다 의도가 있기 마련인데 ‘북문으로 들어와서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가고 소제는 수송아지 하나에 밀가루 한 에바’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이 만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겁니다.
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가 일치될 때만 알 수 있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왜 꼭 수송아지 하나에 밀가루 한 에바인가? 둘, 셋은 왜 안 되고 꼭 그래야 하는가? 왜 서쪽에는 문을 내지 않았는가? 그런 모든 의문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시기 위해서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그 문제가 우리에게는 난감하기 짝이 없지요. 우리 쪽에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고 알아채기가 힘들다는 그러한 생각은 오히려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마련하신 천국 가기는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원리대로 진행되는 것이지 우리가 고상한 아이디어를 짜내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 아이디어가 결합해서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일절 우리의 생각은 배척받아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배척을 받다 보니 하나님 하시는 일의 취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이 되어서 우리는 왜 꼭 그래야 하는가, 왜 꼭 그 방식이어야 하는가, 왜 다른 방식은 안 되는가, 왜 인간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가, 그런 문제가 상당히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그러한 이야기의 모든 난감함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통해서 시원한 바람이 불듯이 다 펑,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뚫리는가? 오늘 본문의 등장인물이 바로 성전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성전은 제사하는 곳이죠. 제사가 있고 그 다음에 왕이 여기에 들어온다는 것, 세 번째는 그 모든 제물은 안식일에 드리는 제물과 일치시키라는 것, 결국 안식일과 왕과 제사제도, 이 세 가지가 조합해서 뭐를 생산해 내요. 그 생산하는 방식……, 만약에 인간 같으면 ‘왕이 있다. 안식일이다. 제사했다.’ 그러면 (안식일 + 제사 + 왕 = 안식일에 왕이 제사 드렸다.)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뭐,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런데 하나님 방식은 (안식일 + 왕 + 제사 = 예수님, 십자가) 이렇게 나와 버리거든요. 그래서 신약성도의 어린아이라도 구약의 선지자보다 천국을 더 많이 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성도가 자신의 성경실력 가지고 알아채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되거든요. 성령은 이미 완성된 내용의 일부를 받는 것이 아니고 완성된 내용의 전체가 다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립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표현하기를 ‘바람’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바람이라는 용어를 쓰시면서 특징도 아울러 언급했습니다. “임의로, 마음대로 분다.”
예수님께서 “천국 가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옮기면 “하늘나라 가는 것은 하나님 맘대로 하기에 달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꼭 천국 가겠다고 붙잡을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미꾸라지에요. 잡으면 다 빠져버려요. “어딜 만져? 어딜 들어와?” 다 빼버립니다. “내가 잡았다!” 해서 들어와 버리면, 내가 잡은 것으로 천국 들어가면 그것은 엉터리천국이에요.
왜 인간은 천국을 잡을 수 없느냐 하면, 천국이 낯설어도 너무 낯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낯선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배격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아예 얼굴을 돌릴 정도, 외면할 정도, 그게 천국이에요. 너무 엉뚱해서, 우리 인간들의 예상을 너무 비껴가니까, ‘설마 그렇게까지?’ 하고 놀랄 정도로 천국은 낯설게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그 낯설다는 점을 반기게 되는 겁니다. “제가 갈 수 없는 곳에 넣어주셨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저를, 제가 예상치도 못한 이곳에 저를 데려다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탕자가 아버지 집에 찾아올 때, ‘자신은 아버지 집의 아들로는 감당치 못하니 종으로나 써주면 감사하겠다.’ 기껏 그 정도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준비한 것은 가락지 끼워주고 소 잡았지요. 그게 아마 한우일 가능성이 높은데 소 잡고 양복 해 입히고 잔치 벌였어요. 이것은 탕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예상도 못했어요. 그리고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자기 분수를 아니까요. 나 같은 죄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과분한 혜택을 입은 겁니다.
이 과분한 혜택을 입혀준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네 인생에 대해서 더 이상 원망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아프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가, 그렇게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취직도 안 돼, 결혼도 안 돼, 그렇게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네가 원망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장가 못가도 천국 갔잖아. 시집 못가도 천국 갔잖아. 몸 아파도 천국 갔잖아. 망해도 성공했잖아.”
그야말로 성도가 하는 모든 일, 성도가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자기 유죄됨을 증명하는 거예요. 자기 죄 있음을. 그것은 뭐냐? 자기를 거저 구원하는 그 원리, ‘죄인을 구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저쪽에서 죄인을 구원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내가 왜 죄인인가를 아는, 내가 왜 유죄인가를 아는 일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구원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뭘 해도 아무것도 안 한 것이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을 뿐더러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요. 삼송카드에요.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했어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설교 하면서 아무것도 안했고, 헌금 하면서 아무것도 안했고, 전도 하면서 아무것도 안한 거예요. 왜? 전혀 구원과 상관없는 일이기에. 주께서는 그 일을 하게 함으로써, 전도하고 헌금하게 함으로써, 예배드리게 함으로써 그것이 왜 죄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왜 유죄에 포함되는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성전이라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행함과 동떨어집니다. 인간의 행함 말고 인간의 행함을 대신하는 다른 분의 행함과 관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예수님의 유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유서에서 바람이 분다. 그 바람 부는 장소가 바로 ‘문’이에요. 오늘 설교 제목이 ‘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인간이 왜 힘들게 살아야 되느냐에 대해서 에덴의 동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에덴의 동쪽 문이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문’이라는 의미가 그냥 장벽(fence)과는 달라요.
펜스는 그 자체가 막혀 있는 시설물이지만 문이라는 것은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이것은 대체 열겠다는 것인지 닫겠다는 것인지, 그것은 문을 설정한 그 분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니고, 닫혀 있다고 생각하니 열려 있고 열렸다고 생각하고 들어가려 하니 닫혀있고.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는 이 말……, 성전이라 하는 것은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지난 수요설교 마치고 난 뒤에 여기저기서 어렵다고 난리가 났어요. 참 죄송했습니다만 제가 일부러 어렵게 한 것은 아니고 월삭과 안식일을 설명하다 보니 그렇게 복잡하게 된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생각할 때 딱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성전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거주지다. 하나님의 거주지인데 “그게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게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그 거주지에서 무엇이 매일같이 유발되느냐하면, 죽음이 유발되거든요. 따라서 자칭 살아 있다는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가 죽었다고 확정이 될 때 비로소 그 성전은 하나님의 계신 곳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미 죽은 자가 되게 해버려요. 죽은 자는 또 죽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이미 죽었는데 무슨 자살을 해요. 이미 죽은 자인데 하기는 뭘 해요. 살려고 해도 결국은 죽어버렸는데. 똑같아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주님 가는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이 구약에서 모형으로 하나님의 거주지를 보여줬을 때 그 성전 바깥에 있는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의 특징을 이렇게 봤습니다. ‘저기는 매일같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다. 매일 흠 없는 제물들이 타 죽는 곳이다. 저기는 죽음의 곳이다. 왜 죽음의 곳인가? 이스라엘은 왜 죽음의 곳인가? 그것은 거룩한 분이 우리가 드린 제물을 매일 같이 거룩한 심판의 불로서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늘 내가 죽도록 조치하는 방식으로 주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왜 제물이 죽어야 되는가? 제물이 죽을 때마다 우리의 죄는 용서가 되니까.’
따라서 성전이란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있는 방식인데 그 방식은 죄가 있어서는 함께 있지를 못하고, 그리고 죄를 없애는 방법은 인간 쪽에서는 어떤 대책도 없고,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죄 때문에 같이 있을 수없는 그 상황을 고려하사 우리의 죄를 하나님 쪽에서 알아서 처리해주시면서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거주지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왔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왔다. = 죽음) 결국은 죽음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왔다는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날 죽여라.” 그래서 제가 “성경은 예수님의 유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했듯이 성전에 의하면 흠 없는, 흠이 있는 것은 안 되고 흠 없는 제물이 죽을 때 거기서 새롭게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용서와 사랑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의’ 같은 말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같은 말, ‘생명’ 같은 말 ‘천국’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생명이 나와요, 생명이.
성전에서 제사로 말미암아 유발된 그 생명을 문을 통해서 바깥으로 확대를 시켜버리면……, 이게 나중에 나옵니다만 에스겔 47장부터 성전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해서 48장에 들어가면 그 주변 물이 있는 곳은 물고기가 퍼덕거리고 뛰면서 다 생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의 열매로서 맺어지는 것이 생명이요 구원이 되는 겁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 정말 생명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내 대신 누가 저주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명을 받지요. 내가 받을 저주를 내 대신 다른 분이 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명을 받기 때문에 받는 사람은 그걸 값없이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십자가 주님 앞에 할 말을 잊지요.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고.
생명을 얻고 생명을 받았으면 이제 사적인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번에 국무총리 후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일요일만 교인이고 평일에는 공무원입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참, 얍삽한 수를 쓰고 있어요. 일요일만 교인이에요? 구원 받는 데만 예수님이 필요하고 다른 때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겁니까? 다른 날에는 뭐할 거예요? 일요일에는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다른 날은 뭐할 거냐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9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찌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찌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가? 저는 아직 놀이공원에 안 가봤는데요, 여름 되면 사람들은 신이 나요. 인공적으로 파도도 만들고 풍덩, 물로 빠지는 미끄럼 놀이기구도 있지요. 파도가 밀려오면 풀 안에서 노는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의 힘을 못 이겨서 파도에 휩쓸리게 되잖아요. 물 미끄럼틀에서 쏜살같이 휩쓸리면서 내려오다 보면, 좋다는 것인지 놀란 건지 악,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풍덩, 빠지잖아요.
그것은 본인이 노를 젓는 게 아니에요. 물결을 그냥 타잖아요. ‘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제사에서 얻어진 생명의 힘을 그냥 타고 가는 거예요. 그 물결에 휩쓸려 가는 것, 거기에 휩쓸려 가는 인간이 그 물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된 다는 것, 사적인 가치를 위해서, ‘내가 주님의 생명을 얻어야지.’ 이런 생각은 안 든다는 겁니다. 북문으로 들어왔다가 도로 북문으로 와 버리면 그것은 본래 자기의 자리, 도로 나에게 귀소하고 귀환되는 의식입니다. ‘내가 북쪽에서 왔지? 우리 집이 북쪽에 있잖아. 그러면 내가 북쪽으로 도로 가야지.’ 이러면 여전히 자기 것을 고수하는 셈이 되어버리지요.
그런데 북쪽으로 왔다가 남쪽으로 가버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출발한 지점과 반대방향으로, 전혀 상관없는 지점으로 간다는 그 말은 휩쓸려 간다는 뜻이지요. 성전을 통과하면서 휩쓸려 가는 거예요, 그냥. 쫙쫙 휩쓸려 가는 거예요. 이쪽에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휩쓸려 가는 거예요. 바람을 타는 겁니다. 공기의 힘, 곧 제사의 효력, 그 힘에 온 몸이 잠기면서 제사의 힘이 이끄는 대로 그냥 가는 거지요.
가서 뭐 할 건데? 가서 나의 유죄함을 보여주는 삶을 살면 되는 겁니다. 내가 왜 죄인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면 되는 겁니다. 착하라고 하면 힘든데 죄지으라고 하니 이것은 놀이공원보다 더 재미있어요. 바르게 살라고 하니 그게 힘 드는데 그냥 막살라고 하니까 평소에 하던 버릇이 막 사는 것인데 막 사는 것도 못해요? 막 살면 되는데. 막 살아도 상관없는 삶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막 사는 것이 뭔가 위기가 되고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그 사람은 성령 안 받은 사람이에요. 제사의 효력 속에 있지 않습니다. 흉내나 내는 사람이지 성령 안 받은 사람이에요. 불안불안한 사람. ‘내가 너무 막 가는 것이 아닌가?’ 가끔 브레이크 걸고. 노인네가 유모차 미는 것도 아니고 브레이크를 자기가 왜 겁니까? 브레이크를 왜 걸어요. 브레이크를 걸고 안 걸고, 우리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내 인생 아니에요. 그냥 물에, 성령에 쓸려가는 인생이 무슨 브레이크를 걸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찾아와서.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우고 간다.”는데 무슨 브레이크를 겁니까? “주여,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다시 오기 전의 베드로고 이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두 번째 찾아왔을 때는 그냥 브레이크가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무슨 인생을 설계했습니까? 사도바울의 행복, 꿈이라 하는 것은 어서 죽어서 주님 만나는 그것이 꿈이었고, 그것이 행복이었고, 그게 소망이었어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구약에서 사람들이 성전을 바라볼 때 저쪽에서 죽음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성전이 완공되고 난 뒤, 이제는 성령이 임하고, 곧 안식일,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죠, 안식일과 제사, 예수님이 제물이거든요, 안식일과 제사와 왕, 예수님은 기름 부은 자인 왕이잖아요, 이 세 가지 요소가 완성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면서 지상에 있는 성전은 날라 가버립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와요. “이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다고?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동안 짓겠다.”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부활했으면 지상의 성전은 엉터리성전, 지상의 예배당은 엉터리 예배당, 이 세상 교회가 엉터리 교회라는 것이 분명히 다 드러난 거예요. 주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방식도 교회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배해야 되지 11시에 묵도로 예배시작, 그 다음에 사도신경 고백하기, 사도신경은 성경적입니까? 아니지요. 그 다음에 교독문 하기, 교독문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찬송가 부르기, 너무 깁니까? 짧은 것으로 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 예배 끝났습니까? 그게 예배 끝난 거예요?
어떤 교회는 경건한 예배드린답시고 철마다 커튼 색깔을 바꿔요. 천주교도 아니고. 차라리 향 뿌리지. 덜렁덜렁, 흔들면서 향 뿌리고 다니는 게 낫지. 경건한 티낸다고 목사들이 천주교 신부들 복장 흉내 낸다고 로만 칼라 하고 어떤 목사님은 그런 것을 아예 기피한다고 남방 입고 강단에 서는 분도 계시지만. 그렇다면 정치적인 술책을 써서 어중간한 경계선쯤의 복장으로 할까요?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지상에서 하늘로 옮겼습니다. 옮겼으면 그동안 이 지상의 성전에서 했던 모든 의미가 주님 따라가야 돼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다시 쏟아져 내려와야 됩니다. 쏟아져내려오면서 뭐도 같이 바뀌느냐 하면, 이 ‘문’이라는 것, 문의 개념도 바뀌게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성전은 공개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성전이 있었으니까요.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실제로 성전이 있었어요. 미국의 축구장보다 더 적어요. 안식일이나 월삭 때는 일반 평민들이 아닌 제사장이나 왕만 들어오고 일반절기 때에는 일반백성들이 들어와서 제사를 드리는데 어쨌든지 간에 왕이 들어오는 문은 왕만 들어오지 다른 사람은 못 들어와요.
이게 에스겔 44장에 나옵니다. 왕만 들어오고 왕이 들어오기 전에는 문을 닫아두라(겔 44:2,3)고 하지요. 왕이 입성해야 모든 것이 완료가 되거든요. 안식일, 왕, 그 다음에 제사완료. (왕 완료 + 제사완료 + 안식일완료 = 예수님 십자가). 공식이 그렇게 됩니다. 동시에 성전은 공중으로 붕 떠버리지요. 사흘 만에 다시 짓는 식으로 떠버리는 거예요. 뜨면 그 문도 같이 뜨게 되어 있지요.
성전의 문은 왕이 들어오는 동쪽 문을, 그 문으로 들어오는 왕을 최종 주목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일반 평민들이 들락거리는 것은 의미 없어요. 왕이 최종적으로 성전을 완성하기 때문에 기름 부은 왕으로서 동쪽으로 들어옵니다. 에덴의 동쪽이니까. 인간이 범죄 했던 그 경로를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거든요. 비천한 출생, 그리고 광야, 광야는 세상의 압축판이고 본보기거든요. 그 본보기에서 사람이 볼 수 없는 사탄을 만납니다. 일반 사람들은 만날 일이 없어요. 사탄이 거주하는 광야에서 사탄을 만남으로서 이 세상은 처음부터 전체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을 예수님이 대표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그리고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셔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동쪽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성전의 그 모든 것이 공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도 공개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이제는 그 성전 자체가 하늘로 올라가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참 큰 문제에요. 천국은 가야겠는데 성전은 보이지도 않고. 어떤 분들은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목사님, 참 성전은 어디에 나타납니까? 감람산이요? 예루살렘이요?” 아니에요.
다시 설교합니다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죽은 것이 아니고 세상이 죽었어요. 개개인이 죽은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함으로써 이미 이 세상 자체가 너나 할 것 없이 다 죽은 자에요. 길에서 누구 만나거든 좀비 만난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죽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이지요. 강도, 사기꾼, 칼 들고 덤벼들어도 그 사람은 나의 영혼을 지옥에까지 멸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내 몸은 죽여도.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그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로 하여금 소원대로 되게 한 거지요. 스데반 집사가 주님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는데 협조가 잘 되어서 스데반 집사는 그날로 주님 만나서 지금껏 잘 살고 있어요. 장례식 설교할 때 천국이 맨션아파트라면서? 그러면 미리 당겨서 좀 보내줘요? “천국 가려면 뭐 일찍 죽으면 되지.” 그게 뭘 모르는 것인가 하면 문의 기능을 몰라서 그래요. 문은 내가 활용할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활용하라고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이 땅에서 문짝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문짝으로.
본체는 없고 문짝만 돌아다니는 거예요. 성도는 성령이 임해서 문짝만 있는 거예요. 우리가 문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 문짝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12절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두 개가 되어버렸어요. 처음 회막에는 문이 동쪽 문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냥 문이 열두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각 방향별로 문이 세 짝이에요. 13절에 보면,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래서 합이 열두 개의 문이에요.
기존의 그 강조되던 동쪽은 따로 어디 있는가? 동쪽은 붕 떠버렸어요. 동쪽은 주님이 승천하면서 붕 떴다니까요. 없고 나머지 이 세상과의 접촉이 되는 곳, 바로 문이지요, 문인데 문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과 접촉이 되는 동시에 경계선이거든요.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다.’는 말은 닫힌 것도 아니고 열린 것도 아니고 주께서 열어주면 들어갈 수 있고 열어주지 않으면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해서 백날 “열어주세요.” 하고 두드려도 안 열립니다. 언제 봤다고?
이 문, 천국문의 특징은 뭐냐? 내 사람인지 아닌지, 생명책명단에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아닌지를 보고 열어줄 자 열어주고 안 열어줄자는 안 열어주는 거예요. 열심히 두드리면 자기 손목만 아파요. 나중에 파스나 붙이겠지요. 그 문을 열자가 누구냐 하면, 다윗의 뿌리, 이기신 분이거든요.(계 5:5) 다윗이 성전 만들 때 문지기가 있었어요. 성전의 문지기가 순번제로 돌아갔습니다. 일곱 순번제로 레위자손 가운데서 고라자손이 담당했습니다.
이 지상에 남겨둔 열두 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공개적입니다. 그 공개적인 것이 뭐냐? 열두 제자들이에요. 열두 제자는 다윗의 열두 지파를 대표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겠다는 하나님의 취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있어줘야 이스라엘 속에 성전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에 회막이 있고 그 다음에 성전을 만들고, 그렇게 했잖아요. 그걸 그대로 밟아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만들고 그 안에서 성전 되시는 예수님 본인이 성전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를 제가 계속 미루고 있어요. 그게 뭐냐? 우리가 이 지상에서 성전의 공개된 문짝이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으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영광중에, 빛 가운데 거하고 만왕의 왕이니까 우리는 감히 볼 수가 없어요. 감히 볼 수가 없고 이 지상에는 성전의 문짝이 있는데 다시 말해서 이 문짝은 뭐냐? 문짝, 문 안에 있었던 제사, 그 죽음의 효력의 바람을 통과시키거나 또는 닫히도록 하는 것이 문짝의 역할이거든요.
안에 있는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는 죽음이라고 믿어버리면 그것은 생명의 바람이 되고 ‘예수님이 왜 죽었지?’ 하면서 아무 의미 없으면 그것은 저주의 죽음으로 오는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성전에서 늘 불이 타오르잖아요. 제단에서 늘 불이 타오른다는 말이지요. 불탄다는 것은 죄를 태우는 것이고 그 죄가 어디서 왔습니까? 성전 바깥의 세상에서부터 주어진 거거든요. 성전바깥에서 율법에 의해서 죄가 된 것이 제물에 안수하고 그 안수 받은 제물을 불태워버립니다.
그 불태우는 장소와 외부를 문으로서 차단했는데 이제는 성전의 제물자체가 위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전체가 성전의 진노의 불바다가 되기 위한 대기상태에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에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됩니다. 전에는 물로 심판받았듯이 지금은 불로써 심판받아요.
그런데 그 불의 성령, 불의 영을 미리 받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는데 심판 받은 효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영생 얻었기에 심판의 효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심판효과와 더불어서 영생을 이미 받았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없애주거든요. 그러면 죄가 없는 의인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전의 문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글쎄, 우리가 성전의 문짝으로 사는 것은 좋은데 누가 문짝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게 궁금하잖아요.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열 두 제자가운데 누가 있느냐 하면, 가룟유다가 있거든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잖아요. 배신하는 사람 빼놓고 다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배신하는 사람 빼놓고 다 하나님의 문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결국은 배신 때리는가, 배신 안 때리는 가로 결정되는 겁니다. 가룟유다의 심정을 헤아려야 돼요. 청춘을 다 바치고, 가족과 형제를 떠났지요. 예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은 천국 얻을 줄 알고, 예수 믿으면 구원될 줄 알고 열심히 예수 믿었고 심지어 귀신을 추방하는 권세까지 발휘했습니다. 이만하면 누가 봐도 천국백성 맞고 하나님의 문짝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사람은 배신하고 말았어요. 이 사실을 다른 열한제자가 눈치 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배신이라면 베드로도 한 배신했지요. 예수님이 목요일 밤에 체포될 때에 불 쬐고 있으면서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공언하면서, 예수 저주하면서 “나는 예수 모른다.”고 했어요. 베드로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믿으려고 할 때 그 때 주의 사랑이 마중 와서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범죄하고 주님을 저주하는 그 시점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떠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고 말씀을 주신 것은 베드로가 주님 따르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선택을 해서 구원하기로 이미 작정을 하신 겁니다. 열심히 노력했던 그 가룟유다하고 달라요. 따라서 성령을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의 그 구원의 근원을 예수를 자기 믿었던 몇 월 며칠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까지 달려갑니다.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디모데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내가 주님 만날 때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창세전부터 주께서 예정하신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의 문짝이 되게 하려고, 열두 문이 되게 하려고 한 겁니다. 열두 문에 문짝마다 사람 이름이 있으니까. 이 지상과 천상의 경계선이 문이에요. 성전의 문이거든요. 그 문이 되도록 이미 주께서 모든 것을 창세전부터 작정하셨음이 믿어질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노력, 자기 잘남, 자기자랑, 자기 애씀, 자기수고, 자기경건, 이런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거 마음 두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종교에 관심 둔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짓이라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우리들이 평소에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걱정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가리고 있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시간 지나면 ‘아하, 이것도 나의 유죄구나. 또 내가 주님을 가리는 짓을 했구나.’ 하고 항상 성령께서는 소급해서 알게 하는데 우리가 성전의 문짝이기 때문에 바람이 늘 불어요. 나로부터 출발했던 것을 주님 쪽으로 가게 만들어요. 내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되도 않는 인간을 구원했지요?”라고 주님 쪽으로 가버려요. 물론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겠지만요. 성령 받게 되면 항상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람처럼 바람에 실려서, 생명의 물에 실려서 움직이는 성전인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이 죽은 세상, 우리는 산성도가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죽었는데 같이 죽어야 될 우리가 무슨 은혜인지 죽은 세상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을, 그리스도가 문 되심을, 성전의 출입구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 놀라운 능력이 오직 성령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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