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6:16-18 / 기업과 희년 본문
이근호 기업과 희년
본문 말씀: 에스겔 46:16-18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1강-에스겔 46장 16-18절(기업과 희년)1506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6장 16절-18절입니다. 구약성경 122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6:16-1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왕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왕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니라 왕은 백성의 기업을 취하여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찌니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백성으로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왕이 자기 아들에게 자기의 토지를 물려주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요. 하나님 나라 아닌 이방민족의 일상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상속하는 것.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여기서 ‘희년’이라는 용어가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차이 나게 합니다. 보통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나라보다 앞선 데가 이스라엘입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보이지 않는 언약이 구체화된 것이 이스라엘이고 다른 나라는 언약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한 연설내용 그대로에요. 이 세상의 모든 있는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주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그게 이방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의, 언약을 위한, 언약에 의한.’ 곧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의 결과물로 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만 천국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언약이 완성을 볼 때 비로소 나타나는 동네거든요.
천국이라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 완성이 될 때 등장한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자들만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언약의 표를 받아야 된다고 요한계시록에 되어 있습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 14:1) 정해져 있다는 거지요. 숫자로 기록한 것은 이게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정해져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들어갈 자만 들어갈 자로서 따로 이 땅에 출생시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생 이전부터 언약이 작용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것은 언약의 취지에 부합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목사님, 제가 구원 받은 사람입니까? 천국 백성입니까?” 그걸 알려면 여러분들의 출생 이전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출생하기 이전에 출생하게 된 연유가 따로 있음을 우리가 감지한다면 그 사람은 이방사람이 아닙니다. 출생이전의 원리원칙에 종속되는 거지요. 우리가 이론상 그것을 잘 아는데 살다보면 또 성질나잖아요. 세상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따로 있어요. 언약 적 원리기 때문에 자기 성질대로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이라는 것이 뭐냐? 내 성질대로 안 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뜻대로, 내가 기도한대로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 믿음이에요.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믿음으로 기도했음 그 자체로 이미 응답이 끝난 거예요.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기도했으면 그 자체가 응답이에요. 다른 꿍꿍이속은 노리지 마세요. “주어진 일에 대해서 제가 어떤 사태가 일어나든 흔쾌히 제 몸 바치기로 작심하도록 기도시킨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게 기도자체로 응답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 이름으로”하는 것은 내 기도로 시작했다가 주의 기도로 마감된 것을 감사한다는 뜻이에요. 내 이름으로 시작한 기도가 마지막에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뭔가 노리고 하다가 주님의 이름으로, 뭘 주든지 감사히 받음으로 마감될 때 그 때 기도가 끝나지요. 우리가 보통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은 지루하기 때문에 빨리 끝내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얼른 가져다 붙이지만 실제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언약에 있다 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이스라엘의 성전이었고 다른 나라에는 성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전이 있지요. 신전과 성전은 다릅니다. 신전은 인간이 세우는 조형물, 건축물인 반면에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불태워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성전자체가 얼마나 기초공사가 잘 되었느냐에 상관없이 성전이 유지되느냐, 유지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성전 바깥에 퍼져 있는 율법대로 시행했느냐, 안했느냐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성전 바깥, 성전을 통해서 바깥으로 퍼지는데 제사장이 가르쳐서 퍼집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에게 언약을 가르칩니다. 가르친 대로 파급이 되면 그 율법의 가르침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겁니다. “네가 이방신과 여호와를 구별할 줄 아느냐?” 그게 기준이에요. 율법의 모든 핵심은 율법을 주신 여호와와 인간의 선악체제, 윤리적 체제에서 나온 그 내용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네가 아느냐는 겁니다.
그 차이를 찾아내기가 참 힘들어요.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되어 있고 공자나 맹자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으니까 차이가 없어 보이잖아요.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차이를 찾아내라고 하니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 살인죄가 성립한다는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다른 나라에도 있는, 인간들이 다 아는 상식인데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할 경우는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세상은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다.” 얼마나 쉬워요. 이거 아는데 여호와종교, 예수교, 기독교, 이런 것 거론할 필요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것은 무척 어려운 겁니다. 정말 어려운 거예요. “착한 사람은 착한 일 많이 해서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나쁜 일 많이 해서 지옥 간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어요. 사모곡에도 나오고 불교에 다 나옵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전 16:22) 이것은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가족이 아무리 착해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부모 보고 참 하기 힘든 이야기지만 설교 초반에 세상이 내 성질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 성질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지옥으로 가고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인데 천국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내가 꼴 보기 싫은 사람을 천국에서 만났을 때 우리가 천국에서 뛰쳐나갈까요? ‘저 인간하고는 도저히 같이 못산다. 차라리 지옥 가는 것이 낫다.’ 이렇게 뛰쳐나갈까요?
언약이라는 그 원리를 설명하면서 내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이 멸망 받고 난 뒤에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 에스겔 46장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내가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한편이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적이 되는 내 중심의 기준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용납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해야 될 작업은 뭐냐 하면, 최소차이를 찾아내는 거예요. 틈, 최소차이.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 같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만 결과는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그 최소차이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발견되는가? 그 발견된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띄고 우리에게 발견되는가? 그것이 우리가 이 시간에 생각해야 될 대목이에요.
힌트는 오늘 본문이 주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과 17절에 나오는 ‘희년’ 그리고 16절과 17절에 같이 나오는 ‘왕’ 이런 개념들, 왕, 기업, 희년, 이런 개념들로 인하여 언약과 언약이 아닌 그 사이,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동네와 그렇지 않는 동네사이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이방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언약세계 속에 들어올 수 없고 언약세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지옥갈 수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지옥갈 수 없는데 그것은 우리 힘으로 지옥 가는 계곡을 건너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보다 더 센 힘이 우리로 하여금 확정된 팔자와 운명을 우리에게 덮어씌운 겁니다.
고린도전서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누가 주를 이기겠는가, 주께서 지정한 자리를 누가 이기겠는가?” 그 틈, 그 차이를 저는 처음자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봐요. 처음 자리, 원천의 자리,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던 원천자리. 이방인들은 자기가 출생한 그 후의 기억밖에 없지만 우리의 기억은 출생이전의 기억까지, 처음자리까지 성령을 통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욥이 몰랐던 것은 바로 처음자리였는데 고난을 통해서 욥의 처음 자리가 ‘내가 죽고 난 뒤에 나를 위한 대속자, 하나님 자리가 나의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은 자기 자신 때문에 주어진 고난이 아니라 처음자리가 갖고 있던 고난이 확산되어서 욥에게만 특별히 언약 적 차원으로 덮쳐진 거예요. 성도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가 질 수 없는 십자가를 강제로 지게 하셔서 십자가 진 자만 구원받는다는 그 원리를 주님 쪽에서 일괄되게 우리에게 성취시킨 그 흔적들을 우리의 인생으로 살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깔아놓은 양탄자가 아니에요. 주께서 깔아놓은 양탄자, 그 길을 그대로 가는 겁니다.
좁은 길을 가면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누가 좁은 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좁은 길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좁은 길 자체를, 뭐가 좁은 길인지를 몰라요. 인간이 스스로 고난 받겠다 하는 것은 자기 의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고생고생 해도 그것이 좁은 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괜히 주의 고난을 폼 내는 거예요. 흉내 내기입니다.
사람의 심리가운데는 때리는 즐거움도 있지만 맞는데서 오는 쾌감도 같이 있어요. 매저키스트 적심리라고 하는데 맞는데서 오는 쾌감, 남들처럼 하지 않고 험한 길로 가는 그 즐거움도 굉장히 짜릿합니다. 마약 먹은 것처럼 짜릿할 거예요. 고난 받는데서 오는 우쭐함, 우월성, 이 시험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는데서오는 즐거움, 무슨 수로 그 자리를 피하겠어요? 맛있는 것만 먹는다고 쾌락이 아닙니다. 스스로 학대하는 쾌감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것도 악마의 시험입니다. 오버하지 마세요. 자기학대하지 마세요. 채찍 들고 자기 때리지 마세요. 자기 인생, 우리 인생 저주할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타인의 말이나 나의 말이라도 우리의 운명에 영향력을 줄 수 없어요. 우리 인생의 영향력은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 남들이 나한테 욕한다고 그게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저주한다고 저주되는 것도 아니에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시므이가 아무리 나를 저주한다 해도 주께서는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꾼다고 했어요.(삼하 16:12) 따라서 우리는 이런 원리가 어디서 나오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이게 희년인데 이 희년의 내막을 알려면 두 지점을 찾아야 돼요.
첫 번째 지점은 구약에서 찾아야 되고 마지막 지점은 신약의 희년의 완성에게 찾게 되면 그 중간에 놓인 에스겔의 희년의 의미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레위기 25장 10절에 희년이 나오지요. 8절부터 보게 되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 10절에,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희년이라는 말은 ‘기쁜 해’라는 말입니다. 기쁜 해인데 이 기쁜 해가 누구 좋은 기쁜 해인가 하면, 하나님만 좋아하는 기쁜 해에요. 하나님만 기뻐할 수밖에 없는데 혹시 덤으로 이 희년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재산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희년이 돌아오는 한 해 전에 도박해서 전 재산을 다 날렸는데 그 다음해에 희년의 때라 해서 일괄적으로 전국의 모든 본 재산을 되돌리라는 소식을 들을 때 도박에서 전 재산을 날린 그 사람만이 기뻐요.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또 도박해야지……)
그 사람 빼놓고 99.99퍼센트의 모든 사람은 그동안 이 재산 얻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한 방에 다 날라 갔다는 아쉬움의 해가 되겠지요. 희년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소유권문제입니다. 소유권이 개개인에게 있지 않고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고 너희가 현재 갖고 있는 토지와 모든 재산은 소유권자인 하나님이 너희에게 임대차 계약을 해서 선물로 줬다는 겁니다. 임대차계약에서 그 계약이 바로 언약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50년마다 소유권자가 누구인가 하는 반복적인 절차를 갖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재산을 가져도 자기 것이 아니에요. 빌려온 것이고 선물로 받은 것이에요. 하나님이 유산으로 주신, 상속으로 주신……, 기업이란 말이 어려우면 상속으로 합시다, 상속으로 주신 그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서 소유를 늘이더라도 50년째가 되면 “내가 그동안 열심히 일했더니 재산이 이만큼 많습니다.”를 기뻐하면 안 되고 다시 처음 자리, “아무것도 없어야 마땅한데 이렇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주님의 감사의 질과 양만큼 일치되어야 할 책임이 언약맨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뭐냐? 천국은 희년의 완성인데 천국은 “우리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빈손으로 천국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고 감사할 때 그 감사의 성격이 천국을 만드신 하나님의 취지와 일치됩니다. 천국이 무엇인가? 제가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일거예요. 천국이 무엇인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포도원이 있는데 주인이 일꾼을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데려다 일을 시킵니다. 퇴근시간은 여섯시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제일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니까 좋다고 기뻐하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했어요.
그걸 본 제일 먼저 온 사람이 입이 한 다발 나왔습니다. 자, 천국은 어떤 곳인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식으로 반전을 주시는 천국의 비유를 하시는가 하면, 인간의 현재 통용되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전혀 합당치 않기 때문에 이걸 뒤집으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뒤집는 거예요. 뒤집히지 않으면 내 인생은 그냥 내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뒤집히면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고 그렇게 뒤집혀야 돼요.
희년이라는 것은 레위기 25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희년이 그냥 희년이 아니고 “안식년의 일곱 번”이라고 했어요. 안식일도 7인데 안식년도 7년이거든요.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그 다음에 안식년입니다. 나는 교수들이 안식년을 왜 지키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들이 안식년 왜 지킵니까? 지가 뭐 했다고? 지금은 안식년이 없어요. 무슨 안식년을 지켜요? 큰 교회에서 “목사님, 안식년 지키세요.” 하는 그 말은 그 의미를 새겨들어야 됩니다. “나가세요.” 그 뜻이에요.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 그 말이에요. 잘 새겨들어야 됩니다.
안식년이고 뭐고 모든 율법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지 우리보고 흉내 내라고 준 게 아닙니다. 안식일은 없어요. 안식일은 예수님이 안식일이지 무슨 안식일이 있어요? 무슨 주일이 있습니까? 월요일 따로 있고 주일이 따로 있고. 미쳤어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월요일도 주일이고, 화요일도 주일이고, 목요일도 주일인데 무슨 주일이 따로 있고 월요일과 화요일이 따로 있습니까? 주일에는 오줌 안 눕니까? 화요일에는 밥 안 먹어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흉내 내기를 합니까? 성경 흉내 내면 비슷하게 봐줄 줄 알아요?
안식일이고, 주일이고, 십일조고 그런 것 없어요.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지키는 그런 법 없습니다. 모든 법은 주께 영광 돌리기 위한 법이고 그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영광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무슨 법을 지키게 되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절기? 크리스마스? 그런 것 없어요. 맥추절, 유월절, 부활절,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희년은 안식일의 반복이지요. 반복이라는 것은 과정을 의미하고 희년은 종결, 반복된 것의 완성을 본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것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나님의 모든 기업, 상속, 땅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따라서 땅도 있고 시간의식도 있는데 문제는 소유권자가 눈에 안 보이네요. 소유권자가 눈에 보이지를 않지요. 시간과 공간은 분명히 있는데 이방민족과 다른 이스라엘민족, 언약민족만의 특이한 안식일, 그리고 기업, 땅, 땅이 그냥 땅이 아니고 선물로서의 땅, 그런데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보이지를 않네요. 그 보이지 않는 분이 지상에 활동하는 방식은 뭐냐? 시간적으로는 안식일과 희년이고 공간적으로는 같은 흙인데 그것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게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언약백성인 자기백성을 다뤄 왔던 겁니다.
레위기 27장 16절에서 18절까지를 제가 읽어볼 테니 무슨 말인지 한 번 헤아려 보세요. 성경에 있는 말이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올 거예요.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찌며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구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년 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무슨 말입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는 말이지요.
언젠가 주일 낮에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값이라는 것은 가치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 가치라 하는 것은 시장에서 결정되지요. 사용가치가 아니고 교환가치라 했습니다. 이 물건에 얼마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매긴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옛날이고 지금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되면 그 가치, 그 값이, 가격이 높게 책정이 되고 아무리 요긴해도 사람들이 별로 안 찾으면 값이 다운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값을 누가 매기는가?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정하는 겁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데 이 레위기 25장에서는 누가 정하는가? 제사장이 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희년을 두고 그 희년이 제사장이 값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희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해서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면 값이 다운되고 많이 남았으면 값을 높게 쳐줘야 된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제사장이 네가 뭔데 함부로 값을 정하느냐가 문제가 되지요.
제사장에 있어서 언약이 없는 다른 이방나라와의 차이점이 뭐냐? 제사장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구체화시킵니다. 제사장이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부의 죄가 용서가 돼요. 아침저녁마다 양이 죽고 속죄일에는 수송아지를 잡아서 언약궤 동쪽을 향하여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일괄 죄를 용서받는 희한한 언약법칙이 적용되는 이스라엘 내부의 원칙을 누가 주관하는가? 제사장이 주관하는 겁니다. 누굴 대신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나오는 모든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주는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작업을 한 덕분에 이번에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농산물의 제일 좋은 것, 맏물은 마땅히 하나님 몫입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제사장에게 드리면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되는 거예요. 그게 임대차계약 한 거예요. “십 분의 구는 우리 것이다.”가 아니고 “십 분의 구까지, 그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것을 표내는 방법이 뭐냐? “십 분의 일을 드림으로서 나머지도 우리 것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화를 내셔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 때 내려주지 않으면 십 분의 구도 그냥 날라 가 버립니다. 이런 특이한 공간 안에, 언약의 공간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하는 고백이 바로 십일조가 되는 거예요.
제사하는 그 모든 날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듯이 전부 다 안식일이 되는 거예요.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중간의 경계선에 있다 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의해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의 내용이 거기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 안식일이 없는 곳은 안 좋아요. 심히 안 좋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반복되는 그 나라는 심히 좋고 하나님이 편히 쉴 정도로, 안식이니까, 하나님이 편히 쉴 정도로 만족스러운 상태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왜 값을 정하는가? 제사장은 그 자체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죽음, 어린양의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하나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임에도 죽은 자의 의로운 희생덕택을 보게 하고 효과를 보게 하는 그 범주를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범주, 언약의 효력이 미치는 그 영역을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렇다면 희년도 그렇고 안식일의 반복, 희년의 완성, 기업도 그렇고 이 전부가 다 대신 죽은 양으로 표현되는 어떤 인격과 인물을 지향하고 있다, 그걸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보면 돼요. 어디에서? 레위기에서.
그런데 제가 아까 두 지점 이야기를 했지요. 에스겔 이전에는 레위기에서 그 지점을 이야기한다면 에스겔의 말씀과 레위기의 말씀을 완성시킨 신약에 와서의 희년은 어떻게 완성을 보이는가? 누가복음 4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은혜의 해’라는 말이 나오고 ‘자유’가 나오거든요. 18절부터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사야 61장을 인용한 이 말씀은 아까 제가 언급한 레위기 25장 10절의 말씀,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에서 ‘자유’가 나오는데 같은 맥락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라 하는 것은 원래 소유권이 없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소유권이 있는 척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다시 “너희들의 소유권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이 너희의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그 상태를 자유라고 해요. “건드리지 마. 내 소유권은 주님에게 있어. 가진 재산 없다고, 거지 나사로같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날 막 무시했지? 무시하는 이유가 뭐냐? 네 것 가졌다고 너는 우기고 있잖아. 하지만 네 것 가졌다 하는 그것이 이방나라 적이고 지옥 갈 사고방식이야.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 이게 바로 진정한 자유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년 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너의 소유로부터 네가 자유로워라.”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남을 돕고, 사회개혁하고, 세월 호 관련 데모하고, 그런 뜻이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네 자신이 소유로부터, 네 주체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이에요. 마치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종속된 것처럼.
그렇다면 제사장의 어린양이 신약에 와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는 연결이 안돼요. 이스라엘이 외부와 차이를 보일 때 그 차이의 틈바구니에서 인격, 인물이 나오면서 그 인물이 바로 희년의 완성인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외부적으로 만나려면 내부적인 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돼요. 내부적인 우상숭배 때문에 망해야 되고 그들이 외부의 나라에 포위당해야 돼요.
그 대표적인 예가 뭐냐? 에스더라는 성경에 나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사촌지간입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삼촌의 딸이니까. 에스더란 이름의 뜻은 우리말로 ‘별’입니다. 상당히 예뻤던 모양입니다. 미스 바사에요. 미스 바사 진. 요즘 같으면 영화배우로 데뷔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최고의 아름다운 여인이 왕후가 되는 콘테스트에서 우승해서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그 나라의 왕후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같은 바사(페르사)나라에 살게 하면서도 최소의 차이, 틈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냥 평화롭게 사는 게 아니에요. 틈이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 틈이 갈라지게 하면서 틈은 인식한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이렇게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채로 하늘나라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나를 어느 틈, 어느 차이를 건너가야 하는데 건너갈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요. 내 소유권 자체가 날라 가버립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고 난 뒤에 내 것?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주께서 죽이신다면 기꺼이 죽어드려야지요. 어쩌겠어요?”라는 말이에요. 바사나라 인간들, 특히 하만이라는 못된 인간들이 자꾸 핍박을 하게 되는 이 모든 과정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나라에게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유대나라를 다스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이방나라 너희끼리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단절된 차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흉내도 못내는 그 단절된 차이가 바로 유대인과 함께 있는 구별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에스더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죽이고자 했지만 역전되어서 죽이고자 하는 하만과 그 아들 열 명 다 죽는데 그것도 모르드개를 잡아 죽이려고 준비했던 그 장대에 하만과 그의 아들들이 달립니다.(에 9:14)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을 전부 학살하는 그 방식이 바뀌어서 수산성에서만 오백 명, 그리고 각 도시에서 유대인을 몰살하려고 했던 자들이 도리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자에 의해서 도리어 죽임을 당하지요. 그걸 통해서 이것은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장차 오실 언약의 완성자의 승리를 유대인들은 미리 맛보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부림(Purim)절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희년의 날의 자유를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자유라 하는 것은,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서 어떤 인간도 건널 수 없는 그 죽음의 홍해바다를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건너가게 되면 건너간 그 효력으로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심정으로 이 세상의 참된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게 바로 상속분이고 기업이에요. 이런 자만이 땅을 차지하고 이런 자만이 하나님의 심령의 기쁨에 참석할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기업은 바로 하늘에 있는 본향의 땅입니다. 그 땅은 있어요. 문제는 그 곳에 갈 사람은 에스겔 46장의 말씀에 의해서 생산된 사람만이,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예수님의 은혜의 해의 성령의 효과와 성령의 능력을 맛본 사람만이 그 나라의 그 기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왕을 만날 것입니다. 그 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우리 식대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주님의 완성된 그 천국을 위해서 미리 앞당겨 이 땅에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게 하여 주옵소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죽어도 상관없는, 죽음보다 더 큰 능력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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