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5 / 말씀의 전개, 비전체 / 150202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5 - 말씀의 전개, 비전체(非全體) 15,02,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말씀의 자기 전개 !! 오늘은 교재 84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제가 먼저 여러분에게 제목을 드렸는데 '말씀의 전개' 라고 말이다. 왜 그런 제목을 달았는고 하니, 말씀과 말씀 사이에서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물론 말씀은 말씀대로 있지만, 우리 인간 차원에선 우리의 실상을 경유해서 다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이해한다" 라고 하면서 말씀을 실천에 옮겨보게 되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하면서 깨지면서, 다시 말씀을 실상을 다시 경험하도록 혜택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의 자기 전개'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씀이 그렇게 스스로 전개되는데 있어서, 우리가 말씀을 붙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잡았다고 여기지만 막상 살아보면 말씀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있고, 또한 말씀을 실천한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거리의 간격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아예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려고 하면 그 거리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실천에 옮기려고 하면 "아하,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되고, 그러면 자기가 실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이렇게 되니, 그 말씀의 실행자가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 말씀 속에서는, 처음부터 완성이 담겨있어 !!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을 지켜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물론 그것은 타인도 마찬가지인데, 말씀은 스스로 자기 전개를 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의 자기 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자기 스스로 완성을 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처음부터 말씀 속에서는 완성이 담겨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말씀이 스스로 그것을 펼치니, 마치 말린 두루말이를 줄줄 펼치듯이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 시간적인 것이 필요한 것 같고, 그래서 창조 때가 아니라 마지막 때가 되어야 말씀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창조 안에 이미 완성이 들어있는데,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 말이다. 그러면 완성이 들어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창조자가 곧 완성자가 되기 때문인데, 즉 예수님이 안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 우주는, 예수님의 '자기 얼굴 내밀기' !! 그렇다면 우주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자기 얼굴 내밀기' 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숨어있던 예수님이 '깍꿍' 하면서, 그것으로 '끝' 이라는 말이다. 즉 우주는 예수님의 '깍꿍놀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는 여기에 있지롱!" 라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의 얼굴은 그만 소멸이 되어버리고, 즉 해골이 되는데, 그 해골을 뚫고서 '깍꿍'이 된다는 것이다. 즉 거기에서 주님의 얼굴이 나온다는 말이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아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즉 해골들이 나오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는 것이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 지금 저의 얼굴이 주님의 얼굴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주님은 존재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기능적인 얼굴이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의 얼굴은 아담의 얼굴이고, 진짜 주님 얼굴은 기능, 즉 '예수님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라는 기능과 역할로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뒤늦게 날마다 확인할 뿐입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이 강의제목을 '깍꿍' 이라고 했으면 좋지 싶은데, 지난 시간에는 '다라이' 라고 했는데 말이다. 가면 갈수록 단어를 선택하는 강도가 세지는 느낌인데, 너무 이렇게 마구 나가면 안 되는데, 누가 좀 말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ㅋㅋ).
◈ 목사님, 하나님이 그들을 왜 죽였습니까? 오늘아침에 메일을 보니까 오랜만에 질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아나니야와 삽비라' 사건인데 말이다. 그들이 왜 죽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헌금을 반토막으로 속여서 드렸다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질문한 의도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과연 죽임을 당할만한 이유가 되느냐는 것이다.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런데 "왜 죽였습니까?" 라는 것은 잘못된 질문인데, "왜 살려주셨습니까?" 라고 질문이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진작 죽어야 하는데, 왜 살려주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사람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아서 죽였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은 죽지 않았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인데, 간단히 말해서 말이다.
◈ 사도행전 - '예수님은 죽지 않았다' !!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 죽었다가 사신 분이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대통령이 통치하고 새누리당이 통치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통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벌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죽여버리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24시간 주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그러니 우리도 역시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제가 웃는 것이 웃는 게 아니듯이(ㅋㅋ), 그렇게 우리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은 사건인데, 그 사건에서 뭐가 생기는가? 초대교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존재에서 다시 사건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이 존재인데, 그런데 지금 자기가 죽는다면 점이 되는데, 즉 "누가 죽었단다" 라고 하는 사건으로만 기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은 살아있지만 늙어서 죽는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지금은 죽었지만, 그 죽음의 폭을 넓히게 되면, 내가 산 것이 된다. 그러니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맡기신 역할 때문에 살아있다. 그런 존재의 폭을 가졌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 교회는 사건이다 !!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교회는 사건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인데, 모여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반드시 주님의 살아계신 이유가 사건화가 되어서 터져 나오는, 바로 그 현장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교회가 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제가 옛날부터 '생성론적 교회' 라고 했는데, '존재론적 교회'가 아니고 말이다. 이것을 신학교 교수들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알아듣지를 못하고 "그래도 교회가 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 교회가 없다고 하는데, 교회는 분명 있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하지만 제가 말한 것은, "교회가 있다. 없다" 라는 게 아니라, 그것은 존재론적 차원이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 "교회는 생겨납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도 교회가 있잖아" 라고 나오니,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저를 보고 "이러니 말이 통하겠는가?" 라고 했지만 말이다(ㅋㅋ). 이렇게 "교회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왜 잘못인고 하니, 그러면 그만 교회가 소유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교회의 당회장이 누구지? 교인은 몇 명이지? 헌금은 얼마나 나오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소유의 대상이 된다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나 있음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감히 나를 건드려? 죽여버릴 거야. 그게 하나님이라고 해도 나는 밀쳐버릴 거야" 라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런 분노와 울분 같은 것이 우리 인간에게 내재가 되어있는데, 그러니 마귀가 들린 티를 팍팍 낸다는 것이다. --------------------------------------- ◈ 말씀의 자기전개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벌리는 그 시간역사에 자신의 뜻을 그때그때 심어버린다는 것이다. '언약' 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게 심어놓고는 물로 심판하고, 마지막에는 불로서 심판해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로 심판하고 불로 심판한다는 것은 존재가 있다는 뜻이고, 그리고는 그 존재를 사건이 나왔던 출처로 다시 잡아당긴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스파이더맨 !!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스파이더맨이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 몸에서 줄을 뻗어서 다시 잡아당기면 회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로 돌아가는, 하나의 사건 덩어리가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창조자체가 말이다. 주님은 그런 자기 전개에 자기를 포함시켜서 이 땅의 십자가에 육신의 몸으로 오셨고, 그것을 다시 회수를 하심으로 예수님만이 만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언젠가 제가 그런 말을 했는데, "에덴동산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동산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만약에 사람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면 죽는다는 소리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담아, 내가 영원토록 거기서 잘 살게 해줄게. 끝!", 그렇게 되어서 생명나무를 가지고 아예 길에 가로수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죽음의 요건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정신을 차려라. 이곳을 너희들의 세상이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는 내 세상이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집어넣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뱀인데, 마귀를 말이다. 그래서 이제 뱀과 인간은 한 통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을 처벌하면서 인간이 같이 해버리시는데, 그게 곧 지옥이란 것이다. 그러니 제로 차원에서, 즉 묵시 차원에서 1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2가 나온다는 말이다. 이미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고, 거기에서 택한 백성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1을 통해서 0의 차원으로 복귀하는, 다시 돌아서게 하는 작업을 주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의 자기 전개에 있어서, 그 자체가 결단코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닌데,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은 천국에 가는 자기 백성을 모집하셨고, 그 과정에서 잠언서가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84페이지를 보자. **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은 밥이 없어서 못사는 것이 아니라,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못산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잠언서에는 우리의 죽음을 기정사실화를 하면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가름한다는 겁니다. (잠 9:13)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 누가 나와 대화할 사람 없소?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알다시피 엄청 힘들게 살았는데, 그런데 그들이 그런 곳에서도 희망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가? 먹을 것이 있고 잠자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한다는 것, 그게 살아가는 희망을 준다는 말이다. 제가 유럽에 갔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직접 보려고 했는데, 그게 폴란드에 있지 싶은데 말이다. 거기가 안 되면 수용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다른 곳이라도 가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부정적인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내부적인 강력한 지침에 의해서 포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가자고 해서 말이다(ㅋㅋ).
◈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 제가 거기에 대해서 제가 공부를 조금 하고 갔는데, 그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죽이기 이전에도, 국가 사회주의라고 해서, 그들은 여호와 증인들과 장애인들과 정신병자들을 수용소에다 집어넣어서 그만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소위 안락사를 시켰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이 독일에서 히틀러 이전에도 있었다는 말이다. 인간이 안 될 것은 죽여버리자는 것인데, 그게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국민을 자기들이 죽였는데, 여호와 증인의 경우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해서 죽였고 말이다. 독일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니 국가가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그만 죽이고 말았는데, 하지만 이런 모순은 인간 선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도 자식이 속을 썩이면 뭐라고 하는가? "얼른 나가서 죽어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자식들은 "언제 죽노?"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화상대가 되면 살려주고, 상대가 되지 않으면 자기에는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 천국에서는 주님과 어떤 대화를?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우리가 천국에 가서 입을 다물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데, 주님께서는 자기와 대화할 상대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대화를 할 꺼리는 그때그때 주님이 만들어주시는데, 즉 "니가 바로 이렇게 죄를 지었잖아. 그런데 그 죄를 내가 거두었다" 라는 것이 우리와 주님의 대화내용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인간과 인간의 대화를 하다가보니, 그야말로 질이 나쁜 대회를, 즉 자기 자존심과 영광을 챙기는 대화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저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아"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저 사람은 내 자존심을 높이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아"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결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평생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게 좋아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의 조건은, "저 사람과는 대화가 된다" 라는 것인데, 인물도 별로고 돈도 없는데, 그런데 대화를 하면 통하는 데가 있다는 말이다. 왜 작년에 '탕웨이' 라는 유명한 중국의 여배우와 결혼한 우리나라의 영화감독이 있는데, 중국 네티즌들이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결혼을 취소하라고 말이다. 자기들이 너무 손해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 감독의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하면 뭔가 통하는 매력이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여러분도 통하지 싶은데, 통하니 같이 사는데 말이다(ㅋㅋ).
◈ 대화가 되면, 시간가는 줄 몰라 !! 아무튼 통하게 되면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묵시적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통하게 되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벌써 저녁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마 다들 경험이 있지 싶은데, 물론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말이다(ㅋㅋ). 그런데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TV를 켜는데, 왜냐하면 자기와 통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신랑은 옆에서 코를 골면서 자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다. 물론 억지로 대화를 하다가 열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수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독자적인 자기만의 세계구축에 나서는데,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란 것이다. 회사에서 찾고, TV에서 찾고, 라디오에서 찾고, 그렇게 대화할 상대를 찾는다는 것이다. 요즘은 팟캐스트에서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물론 스마트폰이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 기존의 언어를 없애고, 새로운 언어를 !! 이것을 어디서 배웠는고 하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는데, 사실 이 언어는 주님이 인간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서, 즉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주께서 그 언어를 없애버리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새로운 언어를 주신다는 것이다. (창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 그것은 말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즉 'ㄱ,ㄴ,ㄷ'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방언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즉 새로운 묵시세계에서 통하는 내용이 바로 "주님은 살아계신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오십니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타나십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우리가 육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그때는 이 육의 장막을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녹내장 환자이고 백내장 환자인데, 눈에 뭔가가 끼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눈에 낀 것을 벗어버리면, 바로 모든 것이 눈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난로도 피우게 하셨고, 손이 떨리는 것도 방지하셨고, 그렇게 우리의 모든 발걸음과 머리카락을 세시는 것도 주께서 눈앞에서 하셨는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적인 요소가 끼어있으니,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제발 장님 노릇을 그만 하기 위해서 이 육체를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거하고 싶은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얼굴을 맞대면서 "주님이 이렇게 태어나게 하시고 길러주신 것이 맞지요?" 라는 고백을, 그런 대화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다는 말이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 가면 갈수록 예수님과 대화 불가능 !!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실수에 실수를 연발했는데, 아까 말씀의 자기 전개에 있어서, 우리가 실천에 옮긴다고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고 했는데, 그것을 시범조로 제자들이 먼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제자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무엇인고 하니까, 자꾸만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대화로서 말이다. 그런데 갈수록 예수님의 대화가 점점 더 납득이 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가 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는데 말이다.
◈ 제자들은, 자기들만의 게임을 !! 제자들이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했는데,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들끼리, 즉 제자들끼리 대화를 하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난 다음에 말이다. 그러면 자기들은 한 패를 먹고, 주님은 따로 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엇이었는가? 자기들만의 게임을 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깍꿍 게임을 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실패하세요. 실패하게 하신 분이 찾아오실 겁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듣고 실패해야 하는데, 그 실패하는 방법은 돌이켜보면 막사는 것이었음을, 그래서 감사함으로 인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내용이 잠언서에 나오는 내용의 반복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교재 84페이지를 다시 보자. **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은 밥이 없어서 못사는 것이 아니라,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못산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잠언서에는 우리의 죽음을 기정사실화를 하면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가름한다는 겁니다. (잠 9:13)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여기 잠언서 9장 13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떠들기는 엄청 떠드는데, 그 안에 지혜가, 즉 진리가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는 말이, 모여서 수다를 떤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러니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은 반드시 티를 내게 되어있고, 또한 바깥으로 그것을 방출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방출된 세계를 두고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들은 그것을 현실의 전부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자기들의 어리석음이 방출된 것인데 말이다.
◈ 비전체(非全體) !! 여기에서 이번에 수련회에서 강의한 것 중에서 어려운 것을 하나 뽑아서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물론 이번 시간에 하는 '말씀의 자기 전개'와 관련이 있는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제가 '비전체(非全體)' 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물론 강의를 하면서 이 말을 과연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지, 그런 의구심이 들었지만, 차후에 살다보면 또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비전체' 라는 말은 전체의 반대말이 아니고, 전체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순되는 관계라는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이렇게 컵이 비어있는데, 그러면 "그 컵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라고 하면, 그 질문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인간에게는 앞뒤가 맞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비전체' 라고 어렵게 설명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어렵게 했는고 하니, 사람들은 전체의 반대말을 부분으로 보는데, 즉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된다고 하는데, 그게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전체를 모르는데, 그러면 그 전체에 차츰 다가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는 전체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고, 주님은 전체의 전체를 다 아시기에,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다가가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굳이 '비전체' 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전체가 커진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방종교인데, 성화론이고 말이다. 즉 지금은 부족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나아진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완료인데, 즉 완료된 상태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지금은 몰라도 차츰 알아 가면 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할지 몰라도, 하지만 알아가 봐야, 전체의 울타리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리 넓혀도 그 전체가 늘어질 뿐인데, 즉 전체가 외부에 스며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아는 폭을, 그것만 넓혀갈 뿐이라는 말이다.
◈ 누가 전체이고, 누가 부분인가?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전체 속에서 시시하게 보는, 그 부분으로 잠입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누가 알았으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보기에는 부분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여러 명들 중에서 한 명이기 때문에, 그래서 죽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이라서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우겨서 죽였다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은 죽일 수 없으니 말이다. 즉 "당신도 우리와 같은 하나인데, 그런데 왜 전체 행세를 하는가?" 라고 하면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 인간들이 아는 전체에 귀속되지 않기에, '비(非)전체' !! 그러니 예수님을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 부분이 그만 3일만에 부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전체이고 누가 부분인가?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라고 여기는 인간들이 주님에게 예속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부분을 인간들이 아는 전체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을 '비전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전체는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포함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지금 말을 하면서도 너무 꼬이고 어려워서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드는데 말이죠(ㅋㅋ). 쉬운 말로 하면 '스파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같은 편인 것 같은데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에게 귀속이 되어야 !!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가겠는데,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주세요"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죽은 자'의 범위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기 죽은 자에 너의 아버지는 귀속되어도, 너는 거기에 귀속되면 안 된다" 라는 의미인데, 즉 예수님에게 귀속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죄는 짓는 것이 아니라, 가두어지는 것 !! 쉽게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데, 이와 어려운 것 어렵게 가보자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현실은 어떠하다는 말인가? 죄 아래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여기는데, 그게 잘못이란 말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는데, 죄가 들어와야 죄인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기절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죄를 짓지 못하면 무엇이 성립되지 않는가? 회개가 말이 안 되는데, 자기가 죄를 지어서 죄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부흥사의 스케줄이 어떠한고 하니, 수요일에 회개하고 목요일에 돈을 내는 스케줄이라는 것이다. 수요일까지는 죄를 마구 들추어내어서 돈이 나오도록 해야하는데, 그래야 예배당도 새롭게 짓고, 자기도 좀 챙기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게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러니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설교의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즉 "당신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 너희들 선에서 죄를 규정하지 말라 !! 하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 없는데, 죄도 허락을 받아야만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나야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을 미워해도 그게 살인죄이다" 라고 하시는데, 즉 "너희 선에서 죄를 규정하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다시 말해서, "사람을 칼로 찔러서 피를 내어서 죽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너희가 아는, 즉 너희가 전체라고 여기는 동네에서 통하는 살인죄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에게 적용시키지 말라. 그래서 나는 말한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너희는 이것은 모르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알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알지 못하라고 하신 것인데,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뭐라고 했는가? 부부사이의 성관계도 간음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뭔가 경유를 해야되는데, 주님의 사랑을 경유해야 "나는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담도 나중에 깨닫게 되는데, 즉 "처음에 선악과가 있을 때부터 조짐이 좀 이상하더라. 그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어" 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담은 에덴동산을 잠시 맛보고는, 즉 선악과를 따먹고는 거기에서 쫓겨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도 그렇게 느꼈는데, 따라서 우리가 고생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주님을 증거하라고 이 땅에서 죽으라고 고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 주어진 모든 상황은 주님의 깍꿍 게임 !! 우리교회에 군인부부가 있는데, 그만 완전히 뚝 떨어져서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랑은 제주도에 가있고, 아내는 서울에 있고, 또 아이는 우리교회의 집사님이 키우고 말이다. 그런데 집사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이게 십자가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 집사님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한 것이 아닌데, 자기 딸이 그렇게 빨리 시집을 가서 또 아이를 낳아서 자기에게 맡길 줄을 말이다. 이렇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주님의 깍꿍 게임인데, 즉 주님께서 자기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그림을 하나 하나 그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도화지나 캔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장면을 보여주는 일종의 영화필름이라고 할까, 존로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그 백지에서 내장되어있는 죄가 나와서 얼룩이 지지만 말이다.
◈ 가무한(假無限)과 진무한(眞無限) !! 이 '비전체' 라는 용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천천히 다시 해보겠는데, 비전체라는 것은, 전체 바깥에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들은 전체라는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도 전체에 포함을 시키는 전체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전체 바깥에 있는 것이 돌아서면 다시 전체로서 울타리를 치기 때문에, 바깥이라고 백 날을 외쳐도 소용이 없는 바깥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수학에서 '가무한(假無限)' 이라고, 즉 '가짜 무한'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말은 '진무한(眞無限)' 이라는 것인데, 즉 한계가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한계가 있는 사각형이 있다면 이것을 자르면 사각형이 몇 개가 되는가? 2개가 되는데, 그것을 자르면 4개가 되고, 또 자르면 8개가 되고, 그렇게 되면 제한된 사각형 안에 무한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진무한'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 무한에게 시달리는데, 가무한과 진무한에게 말이다. 즉 "저 바깥에 하나님이 계시겠지" 라고 하는 가무한과, 또한 "도대체 내 안에서 죄가 얼마나 나오는가?" 라고 하는 진무한에 말이다. 그렇게 안팎으로 무한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살자. 진리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라고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과학이고 철학이라는 말이다.
◈ 우주의 끝은 어디인가? 천문학자들이 말하기를 "우주의 끝은 어디인가?" 라고 하면서 그 끝을 찾는데,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마지막 별이 보이는 곳이 우주의 끝인데,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별이 뒤에도 뭔가 공간이 있을 것인데, 그러면 마지막 별이 있는 뒤의 공간이라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10년 뒤에 그 공간에서 새로운 별이 나왔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새롭게 나왔을 수도 있지만, 천체 망원경이 발달되지 않아서 우리 눈에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발견되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그 불빛이 이제야 도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새로운 별이 발견되면 우주의 끝은 새로 수정이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방금 우리 인간이 시달리고 있다고 한 '가무한' 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에디슨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우주의 끝은 어디인가?" 라고 말이다. 그것도 소년 에디슨에게 말이다. 그러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되면 다른 소리를 하겠지만 말이다.
◈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그러니 모든 과학과 철학은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은 무엇인가? 그 모든 것이 그만 자기에게 귀환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라고 말이다.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과연 돈벌이가 되겠는가?" 라고 할 것이고 말이다. 음악을 하고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의 변명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대중이 모르는 예술의 깊이를 알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주위의 가족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래서 한 달 수입이 얼마인데?"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들은 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누가 알아주는데?"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대화하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즉 자기를 알아주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러니 자기 음악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보고는 "당신은 산 속에 가서 혼자서 음악을 해라"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연극배우를 아무리 오래해도 소용이 없고, 미생으로 한 번 뜨게 되니, 그렇게 남들이 알아주니 그만 난리라는 것이다. 광고 문의가 쇄도하고 말이다. 그렇게 뭔가 뜨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이다. 아무리 혼자서 생쇼를 해도 말이다. 에디슨은 그것을 진지하게 물었는데, 즉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야 !! 그러면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미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주님께서 자기 얼굴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인생이 의미가 없음을 깊이 느끼도록,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펼치신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의미가 없지? 없을 거야.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지"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게 시편 나오는 말씀인데, 80편에도 있고, 여러 군데에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즉 "우리가 강건하면 80살을 살지만, 그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고, 그것도 신속히 가버린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그렇게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 속에서 무엇이 뛰쳐나오는고 하니, 아까 에디슨은 "선생님,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듯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전체라는 것이다. 이 바깥에 있는 전체는, 사실은 "내가 전체입니다.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전체로 인정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뭔가 꿈지럭거렸다는 것이다.
◈ 그 전체 속에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런데 그런 우리의 전체 속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그 전체 속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발생하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이제 그것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는데, 조금 길지 싶으니 집중해서 들어달라는 것이다. 노아 때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나니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는데, 그래서 산 속에 지은 방주가 뜨고, 그 물이 손에 만져진다는 것이다. 그게 분명한 현실인데, 그렇지요? 제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그게 현실이 아니라 착각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인데,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분명한 현실이 맞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기적이고 심판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하시면서 뭔가 스믈스믈 파고 들어온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주체 안에 파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물 심판이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죄 용서가 최종적인 기적이 된다는 것이다.
◈ 변하지 않는 인간, 그러나 !! "비가 왔다. 물에 빠져서 죽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죽으면 되지 뭐"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죽으면 되지 뭐" 라고 하는 순간, 하나님이 물을 동원시키고 방주를 동원시키고 유황불을 동원시켜도, 그렇게 해도 인간이 변화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성경에 홍해가 갈라졌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래서 애굽의 바로 왕의 군대가 바다에 빠지고 하는데, 그게 영화로도 나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바로 왕이 개과천선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결코 바로 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이 아무리 깨지고 박살나도, 즉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져도 인간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잠언서에 보면 나오는데, 즉 "성을 빼앗는 것보다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큰 기적이다" 라고 말이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모든 자연은,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려는 과정 !!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에덴동산만큼만 살게 해주신다면, 주님을 위해서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빼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나는 문제가 없는데, 환경이 너무 힘들다보니 할 수 없이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주시는데, 개나 소가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말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니가 바로 뱀과 결탁이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주셔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마귀와 한 통속인지를 살펴보시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시려고 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에 말이다. 뱀이나 소나 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데, 우리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었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의 얼굴을 비롯한 생김새가 말이다.
◈ 형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간을 마지막에 !! 그 형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간을 제일 마지막에 만드셨는데, 다른 것들은 모두 앞에 만들고 나서 말이다. 그러니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앞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있는데, 즉 "하나님의 형상이 너 안에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형상과 인간의 관계성은 선악과와 생명나무로 이어지도록, 그렇게 해서 에덴동산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보면 나무가 두 그루가 있는데, 거기서 물이 나오는데, 그렇게 우리 인간은 그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육체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몸의 70프로가 물인데 말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아닌, 인간을 도와주는 다른 동식물들도 물을 통해서 살아가도록 조치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질과 영의 만남은 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탈레스가 B.C. 6세기에 이미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은 물로 되어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맞는 말인데, 물로 만들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불도 필요한데,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불로서 만들어졌다" 라고 했고, 그 다음에 보니 공기가 또 필요한데, 그래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로 되어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도 어려워서 강의할 때마다 헛갈리는데, 녹취를 할 때는 알아서 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녹취자 - 확인한 결과 이번에 다 맞추셨습니다. ㅋㅋ). 아무튼 그렇게 눈에 보이는 데로 했는데, 그런데 동양에서는 무엇인가? 물과 불과 흙과 공기와 금속, 그렇게 5행도가 나와서, 그게 한의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이 서로 소통해야 건강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또 그것으로 돈을 벌고 한다는 것이다.
◈ 물질 안에 영을 만들어서 !!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물론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영이 어디에 있는가? 물질 바깥에 있는가? 그것이 아니고 물질 안에 영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질 안에 영을 만들어야만,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예수님 때문에 만들었다고 하는, 그러한 창조행위의 반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질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물질이 더럽다는 것도 아니고, 물질이 있어야 영이 나온다는 것인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육신을 입고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 된 몸이 귀하다는 것이다. 이게 앞뒤가 맞지 않고 모순이 되는데, 그래서 이것이 '전체'와 '비전체'의 사이라는 것이다. 이 전체는 우리가 기껏 알 수 있는 한계이고, 우리는 무한의 세계이고 영의 세계가 전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영의 세계가 엉터리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영을 진짜 영이 되시는 분께서 도리어 어떻게 하시는가? 이 영과 반대되는 대비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육인데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물론자라는 것이다.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인데 말이다. 인간은 영과 육을 따로 나누었는데, 2,000년 기독교 신학이 무엇인고 하니까, 즉 "우리는 육이고 영의 세계는 따로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게 기독교 역사라는 말이다. 주님은 그럴 줄 아시고 "내가 육이다"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육과 영을 합쳐서 전체로 보니, 주님은 비전체로 대항을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강의 제목을 할 수 없이 '비전체'로 해야하겠는데 말이다. 우리가 "오 주여, 영이시여!" 라고 하게 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왜, 배고프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주여, 제 탓입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러자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우리 한 잔 꺾으러 가자" 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죄인들과 함께 주막에 가셨다는 말이다.
◈ 장인의 애틋한 사위 사랑 !! 어제 사위와 영상통화를 했는데, 우리나라는 오후지만 거기 독일은 아침인데, 이불에서 나오지도 않고 폼을 잡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아버님에게 물어볼 것이 3가지가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첫째가 "왜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라는 것인데(ㅋㅋ), 사위가 고신 측이라서 그런 질문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지금 하고 있지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 나름대로 계속해서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비록 육이지만 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행함의 전체라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름대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세계에 부딪치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하세요. 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게 한계에 부딪쳐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제가 한 이야기가 그러한데, 그래서 제가 사위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여전히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찢어버리고 바깥으로 나와서 복음에 대해서 묻는 것,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불 속에서는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는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 다음의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집사가 되었는데, 그 교회에 가지 말까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벌써 장인에게 물이 들어서 이상하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지 말고, 가서 부딪쳐라" 라고 했는데, 만약에 나가지 않으면 자기는 도를 닦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즉 "너희들은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 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서 부딪쳐야 하는데,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도 자기 의다" 라고 했는데, 자기 죄를 안다고 하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부딪치면서, 같이 깨지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 나는 쓰레기통에 있겠다 !! 세 가지를 질문하겠다고 해놓고 두 가지만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아무튼 이 세상은 그렇게 몸부림을 쳐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한 영의 세계라는 것을,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만들어내었다고 하는 것, 물론 그것이 잘못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잘한 짓이라고 여기면서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에이 이 더러운 육, 이 더러운 물질, 이런 것을 나는 초월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초월했다고 하면서 버린 물질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짓을 보내고 계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더러움을 버렸다고 하면서 잘난 척을 하고 고상한 척을 하는데, 그래 마구 마구 버려라. 하지만 그 버린 쓰레기통에 내가 있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과 영의 구분, 그런 것은 다 반칙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비전체'는, 먼저 '전체' 라는 게 전제되어야 !! 그러면 '비전체'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먼저 '전체' 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마음껏 전체를 신의 세계라고 착각하게 만들어놓고, 거기에 '찌지직' 하면서 균열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갈라진 틈 사이에서 피가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는 "나는 잘났는데 이 피가 어디에서 나왔지?" 라고 하면서 피를 따라가 보니,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먼저 일을 하게 해놓고, 차후에 십자가 피를 들이댐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듯이, 이미 죄에 갇혀있다는 것을, 즉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입장이란 것을,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이제는 집단에서 거북스러운 존재로 !! 그러면 우리는 이미 주님과 관련된 사람이 되는데, 주님의 생명의 선이 닿았기 때문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 사람은 이 땅에서 어떻게 되는가? 비전체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그만 굉장히 거북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교장 선생님, 저는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제가 목사가 되기 전에 학교의 교사였는데, 교회에 나가니 목사님이 술을 먹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먹지 않았는데, 그런데 학교에서 회식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교장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선생, 한 잔 해라. 나도 장로지만 이렇게 한 잔 하잖아"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제 머리 속은 복잡해지는데, 술을 마시면 어떤 이익이 주어질지, 마시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주어질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누가 빠지게 되는가? 예수님의 비전체가 그만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손해가 되지 않는, 그렇게 해서 이 전체를 자기의 전체로 소유하려는 생각이, 즉 내부에서 그런 발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교장 선생님,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거절했는데, 그리고 나서 집에 오니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느껴졌다는 말이다. 물론 교회에는 다녔지만 복음을 모를 때의 일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랑이 그 다음날에는 근무하면서 불안으로 다가오는데, "어제 그 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생길까? 과도한 업무가 주어지지 않을까? 중요한 정보에서 나를 제외시키고 자기들만 공유해서, 나로 하여금 왕따를 시키지는 않을까?" 라고 말이다. 물론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 때문에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엄청난 손실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복음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말이다. 그것은 역시 똑같은데, 하지만 무엇이 다른고 하니,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 자기의 결정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정답은 간단한데, 너무 간단해서 허무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어떤 불이익은 없는데, 왜냐하면 불이익 자체가 비전체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가 따로 불이익을 계산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이익은 없는데, 자기가 그게 불이익이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이란 말이다. 교장 선생님이 "이 선생, 이리로 와봐요. 오늘 이것을 다 해놓고 퇴근하세요" 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시킨 것인데, 그런데 어제 자기가 한 순교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착각한, 그 착각 때문에 주님이 그 다음으로 주신 업무에 대해서 왜곡된 해석을 자기가 하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 왜 목사의 사기에 넘어가는가? 그래서 목사가 설교하면 교인들이 거기에 다 속아넘어가는데, "여러분, 다윗은 이렇게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이렇게 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다윗처럼 똑바로 하시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하면, 거기에 홀라당 다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목사의 사기에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목사는 또 뭐라고 하는가? "이것은 현실이고 저의 체험입니다. 이것은 팩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현실을 그렇게 다루시는 줄 알고, 도저히 그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깍꿍, 내가 여기에 있었다 !! 하지만 진짜 현실은 주님의 현실이지 우리의 현실이 아닌데, 주님의 목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 전체 속에 들어오신 비전체라는 것이다. 즉 주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감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기는 계시는데, 그런데 어느 곳에, 어느 자리에 계시는지, 그 자리를 찾는데 평생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동안을 죄를 지으면서 주님을 찾다가, 드디어 "주님, 여기에 계셨군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깍꿍, 내가 여기에 있었지롱"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주님, 제가 죄인 중의 괴수인데, 그야말로 나의 나 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창세 전에 예정된 것이 맞군요 !!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즉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 창세 전에 예정된 것이 맞군요" 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시간개념을 창세 전으로 돌리는데, 그러니 물이고 불이고 간에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물론 우리는 그런 물과 불 때문에 놀라고 하지만, 또 생명나무와 에덴동산이 나오면 기분이 좋다가 선악과가 나오면 또 기가 죽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기 위한, 그러니 '내 안'이 주님의 현실인데, 그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비전체인데, 그러니 우리가 이미 비전체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언서는 그런 비전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거론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85페이지를 보자. ** A에서 자기가 바라고 소망하는 모습이 B인데, 이 B에서 B1, B2로 계속해서 축적하고 확산하고 확장되는 것을 노리고 헌금이든 봉사든 전도든 중보기도든 뭐든지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제발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게 해달라' 라고 들이댑니다.
◈ '시간론'에 대해서 !! 여기서 여러분을 믿고 '시간론'에 대해서 한 번 해보겠는데, 현재가 이렇게 있으면 이 현재 밑에 뭔가가 있는데, 이렇게 층층이 비스듬하게 꽂혀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마치 정상에 이렇게 미끄럼틀이 있다고 하면, 과거A와 과거B와 과거C와 과거D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이다. 과거A를 따라가면 현재 직전의 A이고, 그리고 과거B를 따라가면 약간 먼저 있었던 B이고, 그리고 과거C를 따라가면 바로 C에서 D라는 말이다. 그러니 과거라는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물론 사건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자체에서 과거와 현재가 늘 만들어지기에 말이다. 이 '의미'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의미가 없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세월호 사건의 경우에도 !! 세월호 사건의 경우에도, 물론 유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인데, 그런데 팽목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로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손가락이 문틈에 낀 것이 더 아프지 말이다. 물론 분명히 있기는 있었지만, 자기에게는 희미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어떠한가? 벌써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그게 먼 과거가 아니라 바로 여기 밑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D자리에 가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A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게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즉 어제의 체험과 제법 먼 과거인 세월호 체험이 마구 뒤섞여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의미가 그만 사라지는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의미가 있어야, 즉 기억이 있어야 자아가 정립이 되는데, 그런데 의미가 정돈되지 않으니 자아가 정돈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우울증이 생기고, 또한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야, 정리정돈을 좀 해라 !! 예를 들어서, 서랍에 속옷과 양말들이 가지런히 정리정돈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마구 섞여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뭐가 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양말이든 무엇을 하나 찾으려고 하면 서랍을 온통 다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자아가 정리되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현실도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대처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현실을 대처한다는 것은, 과거에 익히 아는 자기의 기술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온통 마구 뒤죽박죽이 되어있으면, 그게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지금 다쳐서 병원에 간다고 하면, 엄마가 어디 운전이 제대로 되겠는가? 자기 딴에는 제대로 한다고 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아이를 입원시켜놓고 그만 자기도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차리라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과거는 잊어버려라" 라는 것이다.
◈ 매를 들어서 때려라 !!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훈육이, 즉 회초리가 필요한데, 그래서 잠언서를 보면 "자식을 때려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정리정돈이 되지 않은 상태인데, 동화책을 보면 자기가 주인공인 줄 착각하고 말이다. 그때는 매를 들어야 하는데, 즉 "과거는 잊어버려라. 현실을 정리정돈해라" 라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고 말아야 하는지, 그것을 구별하라는 말이다. (잠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 그러면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미래는 없는데, 그런데 왜 미래인가? 과거가 그렇게 갈 것이라고 하는, 즉 미래는 과거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앞으로도 그렇게 간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이것을 점선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러니 희망사항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에서 못다 한 것을 미래에서는 이루겠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내부에 자리잡은 시간의식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냥 자기 게임이고 자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니, 그 소식을 과거에 들었다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바탕을 두니, 그러면 "재림할 때는 어떻게 하시지? 구름을 타고 오시겠지" 라고 하다가, 이번 금요일에 자기 딸이 결혼을 하면 어떻게 나오는가? 그 순간 예수님의 재림을 그만 날아가 버리고, "주여, 딸 결혼식 이후에 오소서"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자기 속의 재림인데, 즉 자기가 조작한 재림이고, 진짜 예수님의 재림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의미에 갇혀있는데, 마치 죄 속에 갇혀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 의미에만 갇혀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다는 것이다.
◈ 믿게 하셨다 !!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참 위험한 말인데, 왜냐하면 믿는다고 하는 순간 조작된 믿음이 쌓이게 되니, 그러니 "내가 믿는다" 라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데, "믿게 하셨다" 라고 수동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게 해서 믿었다고 하면, 자기 시간은 전체가 되고, 믿게 하신 그분은 비전체가 되면서, 비전체가 전체 안에서 전체가 금이 가도록, 그렇게 내재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오시게 되면, 자기 시간이 아닌 누구의 시간이 오겠는가? 주님의 시간이 오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예수님에게만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날마다 주님은 나를 살리시고 죽이십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날마다' 되풀이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묵시의 반복성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영원한 현재 !! 그러니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시는데, 그것을 두고 '영원한 현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묵시세계를 그렇게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데, 물론 그게 철학적 용어라고 비판할 수도 있는데, 아무튼 적당한 용어가 없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해서 꾸겨서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헌금을 했습니다. 전도를 했습니다" 라고 하면 과거사건이 되는데, 그래서 거기에 얽매이는데, 자랑스러워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의 새로운 전체에 포함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노리고 비전체가 다가왔는데, 그렇게 되면 비전체는 "그게 바로 내가 찾았던 죄였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자꾸만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너의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속성이 있구나. 하지만 나는 그 죄마저도 나의 의미에 필요한 재미로 가져오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게 곧 주님의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의미가 없이는 주님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죄인인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죄인인 것을 감사드립니다 !! "죄인인 것을 감사한다" 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모순인데, 하지만 죄인인 것을 의인이 되는 것으로 감사하게 되면 자기 의미로 돌아가 버리는데, 즉 "나는 죄를 지었는데 회개해서 의인이 되어서 기분이 좋다" 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말은 맞는데, 그런데 돌아서면 그 뒤에 무엇이 붙는가? "그러니 나를 좀 알아주세요. 나를 무시하지 마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 의미로 다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죄로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오히려 감사할 일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많아도, 그리고 아무도 오래 살아도 모두가 대동소이한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잘 통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질만을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말로 썰렁 개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86페이지를 보자. ** 잠언을 볼 때, 우리를 어리석고 교만하고 악한 자 쪽에 세워두고서 봐야합니다. 지혜롭다고 간주하는 쪽에서 보지 말고, 악한 자 쪽을 보면 딱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볼 때 이렇게 봐야하는데, 즉 "악한 쪽이 어디야? 야, 이것이 바로 딱 내 모습이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말씀과 자기 모습이 일치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깨닫는 재미인데 말이다.
◈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 예를 들어서, 잠언서 마지막인 31장을 보면, 잠언서를 하면서 이렇게 성경을 보지 않아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여기 31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이 구절을 보면 어떤 기쁨을 주는고 하니, "고운 것이 전부고, 아름다운 것이 전부다. 끝!" 라고 하는 마음을 우리가 다들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죄 아래에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곱고 아름다운 것, 20대 뿐만이 아니고 30대, 40대에도, 그렇게 부부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 한 집사님, 피로가 쌓이지 않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예쁜 마누라를 평생 곁에서 바라볼 수 있다니!" 라고 말이다. 그런 기분으로 남자가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한 번만 예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예쁘다고 하면, 바깥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 그 피로감이 다 풀린다는 말이다. 한 집사님, 그렇지요? (ㅋㅋ) 따라서 예쁘지 않은 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데, 돈도 좋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용가치만 있지,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쁜 마누라를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횡재라는 말이다. 만약 지루하게 느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리지도 못하고 감당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예 각오를 하게 되는데, 집 바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기로 말이다(ㅋㅋ).
◈ 아하, 내 속에 반발세력이 있구나 !! 그런데 이렇게 잠언서에서 분명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헛되지 않다고 여기는데, 그게 얼마나 좋은데 헛되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속에서 지혜가 그만 튕겨져서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 속에는 또 다른 반발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라고 하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데, 즉 "고운 것도 나쁜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좋으니, 이왕이면 예쁘기도 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라고 말이다. 우리보고 잠언서를 쓰라고 하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잠언서는 분명히 뭐라고 하는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있는 것도 좋고"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것을 좋아하는 니가 헛되고, 거짓된 양상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잠언서를 통해서 우리가 밝혀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 '나'에게서 의미가 떠나는 것이 곧 '여호와 경외' !! 그러면 이 비전체가 우리에게 침투를 했고, 그리고 우리가 잠언서를 봤다고 하면, 그러면 순간적으로 이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겠는가? 그 아내의 모습에서 정말로 여호와 경외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그동안 곱고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곱고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니나 나나 각각 나에게 의미가 있어서 부부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순간적으로 다가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에게서 의미가 떠나는 것을 두고서 '여호와 경외' 라고 하는데, 따라서 아내가 밥을 잘하든 못하든 간에, 얼굴이 예쁘든 말든 간에, 그 아내가 여호와만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자기도 여호와를 좋아한다면, 그러면 당연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부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전혀 부부의 실력이 아니라, 말씀의 자기 전개에 의해서 우리 부부를 말씀에 맞추어서 그렇게 되도록 했다는 것을 깨닫고, 역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어머니가 아직까지도 버티고 계시는데, 그것도 역시 감사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잠언에서 일어나는 이 충돌은, 잠언에 대한 우리의 문자적 해석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해결이 됩니다. 잠언에서 일어나는 이 충돌이라는 것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잠언서에 말하는 '어리석음' 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우리 내부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우리 속에 어리석음이 있는데,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것은 어리석고, 저것은 지혜롭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판정도 내릴 자격이 없는 것들이 그러한 판정을 하는 그 자체를 주님께서는 어리석음으로 폭로를 시킨다는 것이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87페이지를 교재를 보자. ** 이 말은 잠언을 본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잠언을 공부하니, 새 인간이 되겠지" 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마세요.
◈ 성경말씀을 깨달았다고 해서 !! 여기에 보면 "잠언을 본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라고 하는데, 이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그들은 이 잠언서를 통해서 자기들은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 있게 거부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성경말씀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게 곧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의 시간적인 요소에 의하면, 그것조차도 과거가 되어서, 즉 자기가 아는 전체에 포함되어서, 비전체가 그만 자기 안에서 전체로 색깔이 달라지고, 성질이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비전체와 충돌을 일으킬 대상이 되는데, 그러니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왜 멸망을 당했는가? 그들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한 번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되었다"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버티려고 하다가 그만 모두가 다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조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조 안에 놓여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구조 안에 말이다.
◈ 선장이라고 배멀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냐 !! 예를 들어서, 배의 경우에 그 배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선장인데, 그러면 선장은 배멀미를 하지 않는가? 물론 오래 탔으니 적응이 되었으니 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지만, 하지만 선장이라고 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배의 의미에 선장의 의미가 달려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배가 있으매 내가 있다" 라고 하면서, 그 의미의 구조 안에 있다고 해서 그 선장이 배를 몰고 바다에 나가면 멀미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선장의 의미구조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자연구조 속에서 인간은 배멀미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멀미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구 올리고 울고불고 다 한다는 것이다. 씨스타의 '나 혼자' 라는 노래에 보면 '혼자서 울고불고'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데 말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교재를 보자. ** 내가 악마를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악마가 나를 요리하듯 합니다. 위에서 복음이 들리든 뭐가 들리든, 그 들려오는 강도만큼 내 안에서 더 센 강도로 그것을 반발하고 거부하는 것이, 그렇게 내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내가 성경을 10번을 봤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나오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오호라, 나는 저주받을 자로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기는 하지만, 내 속에서 다른 구조, 즉 다른 법이 있어서 이 악함에서 내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에 나오는 내용들을 사도바울의 서신들과 연결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고 하니, 로마서 7장에 있는 우리의 자아성을 이 마지막 종말 때에 까발리려고, 그래서 이 잠언서가 우리에게 미리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잠언서가 어리석다고 하는 쪽에 서면 '오케이' !! 이제 정리하겠는데, 잠언서는 말씀의 자기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말씀이고, 그 말씀에 해당되는 대상이 되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잠언서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 이 잠언서가 어리석다고 하는 쪽에 우리가 서게 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듣고 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어리석다고 하는 쪽에 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우리 속에 와서 닿지를 않는데, 즉 우리가 죽을 때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는가? 자꾸만 새로운 모습으로, 교묘하게 변하고 또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아무리 알아도 또 자기에게 의미가 돌아오는, 우리는 그런 엉터리 전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만이 '1'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작업도 주님에게는 유효한 것이고 의미가 있기에,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있음이 우리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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