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4 / 다라이 / 1501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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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4 - 다라이
오늘은 교재 8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때부터 사람들은 신의 뜻, 곧 자신의 뜻을 위하여 18세기부터 국가적 차원의 복지사상을 펼치게 됩니다. 소위 '복지 국가론' 입니다. 사적으로 실시하던 이웃사랑이 국가적인 법령에 따라서 범국가적으로 시행됩니다. 오늘날의 모든 사회보장제도, 의료보험제도와 같은 것들이 법으로서 규정된 이웃사랑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국가문제와 사회문제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 세상을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제가 나눈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이 세상은 물에 의해서 유지되고, 불에 의해서 유지된다" 라는 것이다.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어항' 속의 물고기 !! 그런데 먼저 이 세상은 물의 심판 위에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도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말이다. 그렇게 물의 기초 위에서 진행이 되다가 위에서 불이 떨어지게 되면, 기존의 구조는 폐기처분이 된다는 것이다. 저는 것을 '어항' 이라고 보고 싶은데, 즉 물 속에 갇혀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자체가 그러한데, 즉 물의 구조 안에서 사람들을 이물질을 양성하도록 하면서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물의 구조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불로서 심판을 한다고 했으니, 물의 구조는 일종의 배양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죄의 애벌레들을 키워내는 말이다. 그래서 불로서 심판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자체로서 괜찮다고 하면 굳이 불로서 심판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물 자체가 무엇을 키워내는데, 그게 무엇인가? 죄악들을 키워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은 대기하고 있다가, 그렇게 죄가 무르익었다고 싶으면 덮치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그렇게 보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거기에 동의를 해야하는데, 즉 물의 구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 79페이지를 보면, 물의 구조 안에서 도대체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어왔는지, 그것이 나와있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는 오래간만에 교재를 읽어보는 식으로 한 번 진행을 해보겠는데, 물론 저만 편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일단 교재 79페이지를 살펴보자. ** 서양철학에서는 중세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기가 죽어지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오컴이나 데카르트를 거치면서 과학에 기대를 걸면서 신을 향한 관심사가 과학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이 과학 행위의 주인공은 신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되면서 '주체 의식'이 힘을 얻게 됩니다. ** '주체=근대시민 사상'은 사회가 왕 제도에서 시민사회 중심으로 바꾸면서 거기에 걸 맞는 인간형으로 변모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권위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할 소리를 다 하는 자율적인 인간형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의 권위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도 달려들게 됩니다. 교회의 권위를 제쳐 버린다는 것은, 곧 신의 권위와 함께 신의 계시, 신의 말씀이라고 간주한 성경의 권위도 함께 제거해버린 겁니다.
◈ 존 듀이 - '나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진리' !! 여기서 말하는 '주체의식' 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체는 '나'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인데, 그러니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은 주체가 아니고, 그것은 '종속'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 주체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주인공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어야 된다" 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자기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다만 중립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에서 뽑아낼 것만 뽑아내면 나에게 이익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현대교육의 기초가 되는데, '존 듀이' 라고 미국의 도구주의이자 실용주의 학자에 의해서 주장된 것인데 말이다. 즉 "이 세상에서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나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진리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용적일 때만 진리라는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궁극적인 진리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모르겠다, 쓸모가 있다 !! 그러면 사람들은 왜 궁극적인 진리를 모르는가? 물론 과학이 앞장서서 알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렇게 밀어 부쳐도 그 끝이 어디인지 스스로 단정짓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진리의 끝에 대해서, 다른 분야에서는 이제 손을 놓고 있고, 과학이 홀로 앞장서서 파헤쳐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과학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답변은 '모르겠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은 다 쓸모가 있다" 라고 하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 가지인데, 첫째는 '모르겠다' 라는 것이고, 둘째는 '쓸모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뭐라고 하겠는가? "알 수 없는 것에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쓸모가 있다'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서 나에게 이익만 된다면, 나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나는 손해볼 것은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의 사고방식은 이미 정해진 것인데, "나는 모르겠다" 라는 것과, "이익만 챙기면 된다" 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진리는 알 수 없는데, 즉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라는 것이다. 왜 알 수 없는고 하니, 최고진리를 찾아내야 할 과학 쪽에서 모르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똑똑한 자들이 모르겠다고 하니,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은 당연히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르면 알 필요가 없고, 또한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엄마, 스마트폰을 사주세요 !! 예를 들어서, 자식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지" 라고 한다면, 그러면 아버지가 묻는데, "아버지다운 것이 무엇인데?" 라고 말이다. 그러면 자식도 모른다고 나오는데, 그러면 아버지도 모르고 자식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답다는 것은 모르니까 일단 치우고, "니가 나에게 얼마나 이익을 줄 수 있고, 나는 너에게 얼마나 이익을 줄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딸이 엄마에게 "엄마, 스마트폰을 사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왜 사주어야하는데?" 라고 하면, 딸은 "그 이유는 묻지 마세요. 진리는 몰라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사주면 내 성적이 오를 것이고, 그러면 엄마는 기쁘고, 나는 스마트폰이 생겨서 좋잖아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 교회도 마찬가지 !! 그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처음에는 순진하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한국 땅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면 대인관계가 넓어지고, 그러면 자기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생기면 정보가 하나 들어오는데, 즉 "어느 집에 피아노 레슨을 시키면 좋을까? 혹시 교회에 그런 분이 있으면 단가가 좀 떨어지지 않을까? 한 달에 15만원을 하는 것은 13만원에 해주지 않을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즉 서로 협조하는 선에서 교회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큰 교회의 경우에는, 영어도 그냥 가르쳐주고, 그리고 어린이집도 같이 하기 때문에, 거기에 보내면 학비도 저렴하게 해주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이익을 보는 선에서 타협을 하는데, 그러니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하게 되고, 교회는 또한 그런 틈새 시장을 노리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사회, 즉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 그러면 소외되는 자는? 그런데 이 민주주의 사회에 문제가 있는데, 그런 혜택을 입기 위해서는 혜택에서 배제가 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 집단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은 남들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협상은 서로 내놓는 것이 있어야 주우면서 되는 것이지, 그런데 배운 것이 전혀 없으니,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만 소외가 되는데, 그렇게 배제가 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80페이지를 보자. ** 생물체의 특징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자신은 보존되어야하고 커져야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말의 어떤 독일학자는 "국가는 하나의 생물체이다" 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겁니다.
◈ 인간의 문제점은, 꿈틀거린다는 것 !! 무슨 말인가? 생물체는 보존해야하기 때문에 커져야하고, 또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돌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돌이 아니라 숨쉬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차리리 죽으면 괜찮은데 말이다. 상대방이 죽으면 자기가 힘들지 않은데, 그래서 어린이집 교사가 그렇게 아이에게 팔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즉 "너 때문에 내가 힘든다" 라는 것이다. 돌이 되면 힘들지 않은데, 여기 식당에 가면 돌을 수집하는 분이 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 돌이 아이들이라고 하면 아마 그 양반이 미치니 싶은데, 하지만 돌이라서 견딜만하다는 말이다. 그게 만약에 돌이 아니라 굼뱅이라면, 그러면 살충제를 뿌리지 싶은데, 그렇게 살충제를 뿌린다는 것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교도소, 정신병원, 군대 !!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놓을 것이 없는 약자들이 돌이 되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그게 꿈틀거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꿈틀거리는 것을 돌로 만들면 사회가 안정이 되는데, 가진 자들이 말이다. 바로 그렇게 돌로 만드는 곳이 어디인고 하니, 그게 바로 교도소라는 것이다. 교도소는 본인의사에 의해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기상시간과 잠자는 시간, 그렇게 모든 게 스케줄에 의해서 통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생명이 있으되, 생명이 아닌 기계로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정신병원, 군대 등도 여기에 속하는데, 이런 곳의 특징은 생명을 삭제시키는데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는 귀한 아들로 자라다가, 머리를 밀고 훈련소에 들어갈 때는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군대에 오기 전에는, 혼자서 TV를 보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책을 보고, 혼자서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시스터가 불렀던 '나 혼자' 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인데(ㅋㅋ), 왜 그렇게 하는가?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 너는 군대에 갔다와야 돼 !! '유자식 상팔자' 라는 드라마를 보면, 제가 그것을 보고 느낀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역시 무자식이 상팔자구나" 라는 것인데 말이다(ㅋㅋ). 어릴 때는 예쁜데, 그런데 크면 모두가 다 꿈틀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매 순간마다 협상을 해야되고 타협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숙제를 하게 되면 피자를 사주어야 하고, 그렇게 엄마는 항상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협상과 타협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아멘!) 그래서 교도소나 정신병원, 혹은 군대와 같은 곳에 보내게 되는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학교에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생명을 잃어버리고 돌로서 다루어지면 인간이 될까 싶었는데, 그게 안 되면 어떻게 하는가? 대안학교에 집어넣는데, 거기는 또 돈이 많이 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모의 소원은 무엇인고 하니, 자식을 빨리 군대에 보내서 기계처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물론 회사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돌이 아니라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생명 본연의 본능이 있는데, 자기는 존재하고 커져야한다는 것이다. 그게 생명의 본래모습이라는 것이다.
◈ 과학은 생명의 실체를 몰라 !! 여기에 대해서 생물학이나 물리학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돌은 가만히 있는데, 왜 굼뱅이는 꿈틀거리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굼뱅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 라고 하면서 야단을 칠 수도 없고 말이다. 만약에 굼뱅이가 그 말을 알아듣는다면, 아마 "저는 돌이 아닌데요"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우리는 그것이 생명이기 꿈틀거린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생명은 과학적으로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드러나는 현상을 두고 생명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 생명을 찾기 위해서 생물을 분해를 했는데, 세포까지 들어가서 일일이 찾아봤지만, 결국 남는 것은 에너지 장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자, 전자, 분자 수준에서, 그리고 나노 수준에서 양자역학까지 들어가도, 아무리 뒤지고 또 뒤져도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즉 "들여다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즉 관찰자가 생명이기 때문에, 즉 찾고자 하는 본인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은 그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이 어둠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어둠이기 때문에 !!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생명은 인간의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타나는데, 즉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인 자체가 어둠이기 때문에, 그 어둠을 아무리 파악하려고 해도,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둠이다" 라고 하는, 그런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함으로서, 즉 "빛에 대해서 너희가 파악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판정은 누가 내린다는 말인가? 그것은 창조주가 하시는 것이지 피조물은 그런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답이 없는데,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말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물의 구조'에 갇혀있기에 !! 그러면 왜 정답이 없는가? 그것을 오늘 강의에서는 '물의 구조' 라고 했는데, 즉 어디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 바깥에서 쳐다보고 있는 시선에 대해서 우리는 알 길이 없다는 말이다. 물의 구조에 갇히게 하신 그 의도에 대해서, 갇힌 자들은 자기 힘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쳐주시는데, "내가 그렇게 물의 구조에 갇히게 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주님을 믿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런데 외부인이 와서 무슨 말을 할 때는, 일단 주인공에게 와서 허락을 받고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하든지 해야지, 그런데 주인공인 자기도 모르는 해서 거부하게 되면, 그 외부인이 제 아무리 군지렁거리면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자기 속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그것도 역시 이야기를 하는데, 즉 "너희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라고, 요한복음 6장과 8장 등에서 예수님께서 계속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희 안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내 말을 거부한다" 라고 말이다. (요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우리 인간은 자기를 탈피해서 나갈 수가 없는데, 그러니 주님이 터치를 해줘야 비로소 진리가 되신 주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얼음 땡'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얼음이 꽁꽁 얼어있는데, '땡' 하고 치면 소리가 울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는 설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다들 돌덩이라고 얼음이라는 말이다.
◈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것으로 움직이는 것 !!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땡' 하고 치면, 그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주님의 것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자유이기 때문에 말이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자유가 되는데, 죽음에서도 3일만에 부활하셨기에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 죽음은 의도적인 실체가 되는데, 즉 "죽음이 있어야 했기에 죽음이 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하시는가? 마치 빵을 만드는 사람이 밀가루 반죽을 주물이듯이, 주님께서 죽음 자체를 그렇게 이러 저리 주물어 버리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희는 죽음 안에 들어가라" 라고 하시고, 또한 "너희는 생명 안에 들어가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식빵 속의 건포도처럼 만들어버리신다는 말이다.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시는데, 그 근거가 바로 3일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인데, 그래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 죽음을, '법'으로 다루시는 주님 !! 그러면 주님은 죽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가? 그게 아니라, 법으로 다루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법은 우리가 알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주님의 법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법은 지킬 수 있기에 만드는 것인데, 지키지 못할 법은 아예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모형과 가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지만 이것은 가짜 법인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등장하는데, 즉 "모형과 가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을 주신 것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법인데 모형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의 구조에서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은, 국가법, 교회법, 동우회법 등등, 그런 것은 가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은 예수님을 처형한 것은 율법이라는 진짜 법으로 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가짜 법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진짜 모세의 율법으로 했다고 주장하는데 비해서 말이다. 여기서 성경을 찾아보겠는데, 요한복음 5장 45절 이하를 보자. (요 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 너희들은 모세를 믿지 않았구나 !!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을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무슨 의미인가? "너희들이 예수인 나를 믿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모세조차도 믿지를 않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모세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독대한 유일한 인물이 곧 모세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직접 만난 사람은 모세밖에 없다는 말이다. 서울에 가본 사람이 서울을 제대로 아는 것이지, 가보지도 않고서 서울을 잘 안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 말에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은 자기들도 하나님과 연결되었다고, 스스로 그렇게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자기를 믿지 않기에 모세도 믿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세를 잘못 믿고 있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다른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인 자기를 통해서 파악해야 된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과정은 복잡하기 때문에 그만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할 때, 우리가 그 하나만 받아들이게 되면, 이 세상의 근심걱정은 마치 쓰레기와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러니 그 중심을 알게 되면, 즉 자기가 아들을 알게 되면 그 순간 그 아들에 포함이 되고, 이미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움직이고 꿈틀거린다고 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면 안 되고,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주인공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분의 모형으로서, 모든 것을 그분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시키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마치 위에서 밧줄을 흔들면 아래에서도 흔들리듯이, 그렇게 위해서 움직이니 우리가 움직이고 숨을 쉬어도 그렇게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만 알면, 이 세상은 아들체제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울고불고 할 이유가 말이다. 예수님만 제대로 알게 되면 모든 근심은 눈 앞에서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니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걱정을 하려고 해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길을 걷다가 죽어도, '탱큐' !! 예를 들어서, 나이가 50에 접어들면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돋보기를 썼다고 하면,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아들이 되신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안경점에는 만원을 하는데, 길거리에서는 중국산 3천원 짜리가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도수를 조절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3천원 짜리를 샀다면, 그것도 역시 주님이 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싸구려 돋보기를 계속해서 사용하다가 그만 눈이 더 나빠져서, 길을 걷다가 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돌팔이 의사를 만나서 골반뼈가 나간 것도 모르고 지체하다가 과다출혈로 인해서 죽고 말았는데, 그것도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주님이 하셨는데, 그러니 걱정할 것이 더 이상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아멘!)
◈ 가짜에게 시달리면서 !!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모형임을 알기까지 가짜에게 시달려야하는데, 복음을 알게 되기 이전까지지 전국의 교회를 다 돌아다니면서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가, 개인적으로 가슴이 아픈 것은 돈을 거기에 다 털리고 온다는 것이다. 교육관을 짓는다고 털리고, 목사 차를 바꾼다고 털리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 144,000명에 들어갈 줄 알고 말이다. 그러다가 장로가 되면 몽땅 털리고 만다는 것이다.
◈ 행함이 없는 구원을 있을 줄이야 !! 그러다가 행함이 없는 구원을 있는 줄 알고, 자기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미쳤구나, 미쳤어"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바쳐야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행함이 없는 구원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 2장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 말씀을 가지고 가짜들을 모두 다 걸러내어 버린다는 말이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인간들은 가짜 법을 좋아해 !! 인간들은 가짜 법을 좋아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율법을 주고 무엇을 줘도 법이 없이는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법을 지킬 때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지키는데, 즉 "나 말고 주인공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인데, 선악체제가 이미 심겨져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어제 오후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둘이 되는데, 즉 선과 악으로 말이다. 그런 두 개의 체제가 우리 속에서 밀고 당기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자기가 주인공으로 폼을 잡기 위해서는, 자기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그러한 법 체제에 자진해서 얽매이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법을 주옵소서. 우리가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계인데, 그러면 지켜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법을 지켜서 자기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다는 것을 스스로 확정하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사라져야하는 대상을 자꾸만 불러낸다는 말이다.
◈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 !! 그렇게 학자들은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진리가 발견되지 않으니, 현대의 철학자들이 나서서 나름대로 진리를 파악해보려고 했는데,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을 통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동물이전에는 무기물인데, 즉 돌이라는 것이다. 돌은 생명이 없고, 인간 쪽인 동물에게는 생명이 있으니, 그렇게 무기물과 유기물로 나눈다는 말이다. 이 유기물은 유기체라고도 하는데, '유기체' 라는 것이 참 어려운 용어인데, 요즘은 너무 남발을 한다는 것이다. 이 '유기체' 라는 것은, 그것까지 설명을 해야한다는 부담을 느끼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서 생명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원래는 탄소 화합물을 유기체라고 하는데, 즉 탄소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탄소는 어디에서 왔는가? 물리학에서 탄소라는 것은 빅뱅을 하고 난 뒤에 몇 백년 뒤에 생기는데, 처음에는 탄소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탄소는 12번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원자번호가 1번이나 2번과 같이 간단한 것만 있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결합이 되어서 12번이 나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이다. 물리학에서 그런 주장은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시간의식이 있어서 역사를 집어넣는데, 해결이 되지 않으면 시간을 자꾸만 길게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135억년이 어떻고 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무슨 수가 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 ◈ 즉자존재, 대자존재 !! 그러니 무기물은 제쳐놓고,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는데, 동물은 자기가 대상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나'가 있고, 그 생각하는 것을 관찰하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내가 나를 관찰한다" 라는 것이다. 관찰대상인 '나'가 있고, 관찰하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 라는 것이 두 개가 되니, 여기서 온갖 정신병이 다 생긴다는 것이다. 정신 분열증, 신경 쇠약증 등, 온갖 것들이 다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이 붕 떠서 있는데, 마치 유령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몸에 붙어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몸을 치고 가면 약간 흔들리는데, 중력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몸도 아닌 '나' 라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나를 치고 가노?" 라고 하는데, 그러면 "실례지만 나가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나를 쳤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몸을 쳤지 당신이 말하는 나를 친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무슨 대화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 도피성 !! 이것이 성경에도 나오는데, 처음에는 세 군데 있었는데, 나중에 세 군데가 더 추가되는데, 그게 바로 '도피성' 이라는 것인데, 이 도피성이 무엇인가? 자기가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냥 무의식 가운데, 즉 아무 감정도 없이 상대방을 죽였을 경우에, 그 사람을 죽은 사람의 가족들의 복수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따로 성을 마련했는데, 그게 바로 '도피성'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피성이 누가 있는고 하니, 그래서 '얼음 땡' 게임인데 말이다. 신명기 19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그만 도끼자루가 부러지면서 도끼가 360도 공중회전을 하면서 그만 사람 머리에 착지해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정이 없이 죽였다고 해도, 그 가족들은 "내 자식을 왜 죽였는가?" 라고 하면서 묻지도 따지도 않고 복수심에 불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사람을 누가 죽였는고 하니, "하나님이 죽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시는데 말이다. 그러니 도끼를 그만 날리게 된 그 사람을 누가 보호주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우하사" 라고 애국가를 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ㅋㅋ), 하나님을 대신해서 제사장이 있는 성으로 도망을 치게 되면,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그만 그곳이 얼음성이 되어서 아무도 건드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제사장이, 즉 하나님이 있기에 말이다.
◈ 얼음성으로 도피하라 !! 그래서 제사장은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새로운 기준으로서 울타리를 쳐놓는데, 즉 "너희들이 말하는 죽고 살아야 될 이유와, 여기 도피성 안에서 죽고 살아야 될 이유가 일치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바깥에서는 너희가 주인공이고 너희 가족들이 주인공이지만,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발생된 모든 것이 내 가족이 된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신 19: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열국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필경 그것을 얻고 그들의 각 성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에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혈육적인 가족이 왔다고 예수님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 새로운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뉴패밀리 !! 그러니 주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새로운 패밀리를 만드시는데, 그 율법의 완성을 두고 '사랑'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1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이 있어도,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새로운 경계선이 !! 그래서 음행의 문제가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나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라고 하면 지킨 것이 되지만, 하지만 예수님에 의하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음행으로 간주되는, 그런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는데, 그러니 주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경계선이 새로 그어진다는 것이다. 간음했던 인간이 미워하고, 미워했던 인간이 도적질하고, 도적질한 인간이 살인하고, 그렇게 욕망은 경계를 넘나든다는 말이다. 율법자체가 쪼개져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쪼개서 보기 때문에, 즉 인간들의 행동의 실천에 근거해서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기 때문에 쪼개지만, 사실은 법과 법 사이에는 그런 경계선이 없다는 것이다. 간음과 살인 사이에는 말이다. 그것을 통합해서 이루면 사랑이고, 이루지 못하면 저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물의 구조에서는 경계가 없는데, 즉 이쪽에서 파도가 치면 저쪽에서도 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같이 흔들리는 '다라이' !! 이것을 일종의 '다라이'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말인데, 금속이나 딱딱한 고무로 만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둥글넓적한 그릇으로, 큰 대야나 대접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 물을 가득 채워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흔들이면 같이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율법의 세계는 이렇게 같이 흔들리는데, 한 쪽이 저주를 받고 다른 쪽은 축복을 받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 죽은데, 거기에 이유가 달린 있는 게 아니고, 죄 때문에 죽는데, 즉 "죄의 값은 사망이다" 라는 것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법에 얽매이지 않는데, 즉 '생명의 출렁거림' 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명의 다라이 속에 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라이를 욕조라고 보면 되는데, 즉 거대한 욕조 속에서 우리가 마음껏 목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무엇인가? 법의 욕조인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저주가 충만한 이곳으로부터 도피를 하면서 "어떻게 내가 계속해서 주인공으로 있도록,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고 하는데, 그것을 여기 교재 82페이지에 보면 '애벌레 자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애벌레 자아인데, 물론 이것은 제가 만든 용어가 아니고, 앤서니 앨리엇의 '자아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 보면 있는데, 거기에 '액체자아' 라는 용어도 나오고 말이다. 흔들리는 자아, 즉 그릇의 모양이 따라서 그때그때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는 그 사람의 소속되어있는 조직에 따라서, 즉 그 조직에 얼마나 아부를 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경에 따라서 다 달라지게 되어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교재 79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자. 여기에 '주체' 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의미인가? 쉽게 말해서 "내가 주인공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그냥 말로만 주인공은 아니니 말이다. 일단 교재 79페이지를 보자. ** 이렇게 주체중심의 인간사회가 발달하면서 몇 가지 원칙과 같은 것이 내부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신은 자율적인 내가 직접 상대한다는 겁니다. 성경이라든지 성직자와 같은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겠다는 겁니다. 두 번째, 신의 뜻을 해석함도 나 자신이 자율적으로 파악하겠다는 겁니다. 세 번째, 그렇게 파악된 신의 뜻은 신 쪽에서 나를 향하여 전개되는 게 아니라, 신은 가만히 계시고 주체인 내 쪽에서 신에게 더듬어 찾아가는 식으로 접근하겠다는 겁니다.
◈ 하나님,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 여기서 세 번째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는 말은 이미 우리 주체도 파악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자존심도 챙기면서 자기 방식으로 신을 찾아가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조금 있다가 봅시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미로를 헤치면서 신이 계신 곳으로 찾아간다는 것이다. (녹취자 - 요즘 저녁 9시 반에 EBS를 보면 팔공산에 대해서 나오는데, 물론 갓바위도 나오고 말이죠. 그런데 산 정상에 올라가려면 아주 좁은 바위틈을 통과해야 되는 코스가 있는데,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인데, 거기를 통과하니 산 정상이 나오고 경치가 엄청나게 좋네요. 그러면서 그게 바로 극락에 가는 과정이라고 소개를 하는군요. 팔공산, 그야말로 바위들마다 부처 모양이고, 골짜기마다 절인데, 무려 150개라고 하네요. 십여년 전에 십자가 마을 식구들과 등산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인생은, 신을 찾아가는 자아의 모험담 !!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드라마나 연극은 다 신을 찾는 자아의 모험담인데, 그 뿌리가 되는 옛날 이야기도 역시 그러한데, 심청전이나 춘향전, 그리고 백설공주도 그렇고, 동서고금의 모든 이야기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왕자가 공주를 찾아서 숲을 지나고 늪을 지나서 찾아가는, 마치 '마법의 성' 이라는 노래처럼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모험담인데, 자기가 높아지면서 말이다. 이것을 고대의 정신세계에서는 어떻게 규정했는고 하니, "신은 초월적 아름다움이 있고, 그 밑에는 저급함과 더러움이 있다. 이런 늪에서 나온 인간이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착하게, 즉 법에 따라서 바르게 살면, 그게 악마에서 천사로 나가는 여정이고, 그게 곧 인생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로역정인데, 물론 고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계단을 밟고 밟아서, 그 어떤 시련과 역경도 다 이기고 신에게 도달해서 합일하는데, 그러한 모습이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자기마저도 대상으로 삼아서 !! 여기에 비해서 동물은 어떠한가? 개의 경우에, 밥을 주면 좋아하고 주지 않으면 짖는데, 그러니 즉자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동물은 자아는 없고 반응만 할뿐인데, 물론 돌은 반응조차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외부의 대상을 놓고, 그리고 자기마저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서, 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어느 정도 신이 되어서 살아갈 수 있는가?" 라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 몸과 자아를 분리해서, '나' 라는 자아가, 즉 '즉자존재' 라는 자아가 "얼마나 신처럼 위대해질 수 있는가?" 라는 것을 목표로 해서, 주변의 온갖 개념들을 모두 다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삼위일체, 예수, 십자가, 언약, 부처, 자비, 대자대비 등등, 좋다는 것들은 왕창 다 집어넣어서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한가? 정작 정반대로 오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모든 인간들이 가기를 싫어하시는, 저주를 받는, 즉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자리를 골라서 찾아가신다는 말이다.
◈ 하나님 스스로 둘로 깨어지는데 !!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알아주는 자리를 찾아가는 반면에, 예수님은 스스로 저주를 받는 자리를 찾아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 스스로 분리가 생기는데, 즉 하나님 자체가 둘로 깨어져버린다는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니 가인이 드린 제사는 '찾아가는 신' 이라는 것인데, 그 반면에 아벨은 어떻게 되는가? 깨져버리는데, 즉 아벨은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그만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숫자로 표현하면 '0'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사라졌다는 말이다.
◈ 나갈 때는 '십자가' 라는 구멍만 남기고 !! 그렇게 됨으로서, 구조바깥에 있던 인물이 물의 구조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는 십자가라는 구멍만 남기고 '0'이 되어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라는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지 모르는데, 보지 않으면 상상을 해야하는데, 하지만 이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대자존재가 되어서 자기만을 상상하기 때문에,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보지 않는다' 라는 것은 그냥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사라졌는가?"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성령께서 그 구멍을 우리 안으로 !!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 구멍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물의 구조와 외부 세계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을 잡아당겨서 우리 안에 집어넣는데, 즉 우리 몸과 자아 사이에 집어넣게 되면, 그때부터는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도바울 안에 핍박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죽인 자로서 규정이 지어졌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성도는, 늘 얻어터지면서 막 살아 !! 그러니 "예수님을 죽인 자가 산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니 주여, 죽여주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됨으로서 "주님, 저를 잘 죽였습니다. 나는 죽고, 내가 죽였던 주님이 도리어 나를 죽임으로서 비로소 나는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즉 "내가 패배함으로 승리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때린 분이 도리어 나를 때릴 때, 비로소 나는 자유를 얻는데, 내가 때려서 죽였던 그 죄로부터, 그 죄가 있던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내 손에 맞아서 죽었던 것이, 주님에 의해서 살아나서 나를 도로 때려서 죽일 때, 나는 더 이상 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막사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무책임해보일 수도 없는데, 하지만 정말로 이제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늘 얻어터지면서 막 산다는 말이다. 어떤 분이 좋은 질문을 했는데, "선한 싸움과 막 사는 것의 관계성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했는고 하니, "내가 하는 선한 싸움과, 주님이 하시는 선한 싸움의 싸움, 그것이 곧 선한 싸움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잘 되기 위한 것은 선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교재 80페이지를 보자. ** 이때부터 사람들은 신의 뜻, 곧 자신의 뜻을 위하여 18세기부터 국가적 차원의 복지사상을 펼치게 됩니다. 소위 '복지 국가론' 입니다. 사적으로 실시하던 이웃사랑이 국가적인 법령에 따라서 범국가적으로 시행됩니다. 오늘날의 모든 사회보장제도, 의료보험제도와 같은 것들이 법으로서 규정된 이웃사랑입니다.
◈ 복지국가인가? 강도국가인가? 여기에 보면, 18세기, 즉 1700년경부터 국가적 차원의 복지사상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복지는 개인적인 것인데, 그런데 그런 '1' 이라고 하는 각각 개인이 모여서 하나의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다. 국가가 있으면 '우리 사람'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우리' 가운데서 복지정책이 실시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웃사랑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각 개인이 이웃에게 어떻게 용돈을 주는 것보다도,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도록, 그렇게 행정적인 처리를 하게 되면, 자기는 세금만 내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되니, 그 얼마나 간편하고 편리하냐는 말이다.
◈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 그런데 이 국가적 복지사상이 언제 흔들리는고 하니, 20세기에 들어와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서구 유럽에서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비용을, 주로 그것을 어디서 충당했는고 하니, 멀쩡한 다른 나라를 박살내고는 거기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인데 말이다. 쉽게 말해서, 영국이 인도를 박살내면서, 거기서 뽑아 가지고서 복지정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에 유로 가는 창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치변동을 한 것뿐이라는 말이다. 남은 도와준다는 것이, 없는데서 어떻게 새롭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뽑아서 주었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사회생활을 해봐서 알겠지만,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백수 때,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 열심히 다닐 때, 다른 할 일이 없으니 교회에 줄기차게 나온다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직장에 다니게 되면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하는가? 교회충성은 그만 접어야 하는데, 즉 교회의 은퇴시점이 다가온다는 말이다.
◈ 타지 않는 떨기나무 !! 인간은 무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있는가?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분명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런데 그 재료가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데, 분명히 불은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양초가 아닌데, 물론 양초도 타지만 말이다. 나무는 멀쩡한데 불만 타고 있다는 것이다. (출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저는 이런 이미지가 궁금했는데, 이번에 나온 '신들과 왕들'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떨기나무가 있고, 모세는 산사태가 나서 진흙탕에 엎드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떨기나무에서 뭔가 쏘아대듯이 자체적으로 없는데서 불이 생산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있는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자꾸만 나오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제로가 되는 이유가, 즉 보이는 않는 분을 믿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보이는 분을 믿게 되면, 즉 꿈에 보인다고 해서 믿으면, 처음에는 은혜를 받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다 소진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없는 쪽에서 있게 하는 쪽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5년 전에 예수님을 꿈에서 봤는데, 키가 185이고 도포를 입고 나타났다고 하면, 그러면 정작 본인은 힘이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면 잊어야 하는데, 기적을 경험했으면 잊어야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은혜이고 과거의 기적인데, 그렇게 과거에 매달리게 되면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과거처럼 은혜가 오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은혜를 주셔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당신은 나에게 너무 과분한 여자야 !! 당연히 부부도 그러해야 하는데, 날마다 새로운 것이 나와야 부부라는 말이다. 10년 전에 선물을 하고 잘해준 것 말고, 지금 현재에 계속해서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낮아지면 점점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배우자를 대할 때, "저 사람은 나에게 너무 과분하다" 라는 생각이 들면,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낮아지면 배우자가 좋아지는데,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자기 힘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것은 자기가 깨지는 것인데,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진흙탕에서 올라가는 것을, 그 방향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긁고, 긁으면 !! 이것이 바로 복권을 사서 긁을 때와 같은데, 로또 말고 사서 즉석에서 바로 긁는 것이 말이다. 은박으로 그 부위를 덮어놓았는데, 그 가려진 것을 동전으로 긁어낸다는 말이다. 그렇게 긁기만 하면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돌인데, 뭔가 은박으로 덮혀있다" 라는 말이다. 그것을 주님이 긁어내시는데, "너는 죽으면 흙이야"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바로 그 긁어낸 분량만큼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긁히지 않으려고 은박을 25만장이나 위에 덮고 하는데, "어디 긁어봐라. 내 본색이 나오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주님이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시는데,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의 더 많은 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로서는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고, 강도를 통해서,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많은 면이 보인다는 것이다. 많이 보이면 하늘나라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는 말이다.
◈ 접붙임이 반복적으로 !! 왜 나뭇가지를 가지고 접붙임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껍질을 벗겨내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리고 있던 법적인 잘남, 정당함, 훌륭함을 긁어내고 십자가와 십자가로서, 즉 우리는 십자가의 가해자이고 주님은 피해자인데, 그 피해자가 가해자를 도로 침으로서 우리가 가해자임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래서 접붙임이 반복적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사회보장제도나 의료보장제도와 같은 것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난 존재이고, '나' 라는 주인공이 신의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에 잘 옮기는지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개인적 주체를 대신해서 큰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게 교재 80페이지에 나오는데 말이다. 전반전 32분에 이정협 선수가 한 골을 넣고는, 그 다음부터는 그 중계방송을 보는 사람은 내내 조마조마하다는 것이다. "한 골을 지켜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국 선수들은 줄줄이 부상을 당해서 나가고, 그래도 골키퍼에게 기대를 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호주에게 1대0으로 이겼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 !! 이게 무엇인고 하니, '큰 주체' 라는 것인데, 즉 대한민국은 큰 주체라는 말이다. 호주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겨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나'를 대표하는 큰 주체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대한민국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이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스스로 법의 어항을 만들고, 그 안에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신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로, 독자적인 존재로 신 앞에서 신을 관찰자로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물의 구조를 전혀 모르고, 즉 큰 다라이의 출렁거림을 모르고, 즉 저주의 파도를 모르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근사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국가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제목은 이 '다라이'로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ㅋㅋ). 요즘 젊은 아이들이 'IS'에 뛰어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정체성을 대신해서 하나의 전사가 되고, 그리고 순교자가 됨으로서,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IS' 라는 단체가 화끈하게 테러나 전투를 통해서 보여주니, 그래서 젊은 아이들은 거기에 뛰어들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80페이지를 보자. ** 생물체의 특징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자신은 보존되어야하고 커져야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말의 어떤 독일학자는 "국가는 하나의 생물체이다" 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겁니다.
◈ 국가는 하나의 생물체 !! "국가는 하나의 생물체이다" 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말인데, 즉 국가는 개인을 살생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왕에게 신하나 백성들을 죽일 권한이 있었는데, 완전히 007인데 말이다. 살인면허를 가지고 있는데, 즉 국가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는 말이다. 이 대목만 보면 통진당의 이석기가 좋아하지 싶은데, 대법원에서 10년 구형을 받고 나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압살을 당했다" 라고 외쳤는데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유기체와 같은 국가에게 자기는 억울하게 희생을 당했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사실상 국가는 실제로 그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위태로울 때 누가 보호해주는가? 하지만 국가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으로는 생명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실체가 없는데, 그런데 왜 의존하는가? 1.4후퇴 때 흥남부두에 눈보라가 몰아칠 때, 그때 아가리를 벌린 배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타고 부산으로 오게 되는데, 원래는 미군과 무기를 싣고 오기로 한 배인데 말이다. 그게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가 왜 그곳으로 갔는가? 리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명령을 내렸는데, 즉 국가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국가가 유기체라는 것이 어떻게 여겨지겠는가? 그것이 고맙겠는가? 싫겠는가? 오히려 고맙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 국가는, 악마의 표상 !!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국가는 무엇인가? 짐승, 즉 악마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몸집을 키운다는 말이다.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고, 그 전쟁의 명분은 오직 하나인데, 즉 국가 스스로 생명체이고, 그래서 보존하고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이 백성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이번 전쟁에 너희들은 징병이 되어도 따르고, 또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적극 제공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명분이 서는데,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자기들은 놀고 일은 전쟁에서 잡아온 노예들에게 시킨다는 것이다. 지금도 역시 그러한데, 즉 집안의 시시콜콜한 일들은 동남아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 시키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노예인데, 과거에는 식모라고 했는데, 요즘은 가사 도우미라고 말은 하지만, 그게 그것이란 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국가 자체가 화폐가치에 의해서 구성된 것인데, 즉 돈이 힘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을 더 가난한 자기 나라에 부친다는 말이다. (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바로 이러한 체제, 이것이 하나의 생명체인데 말이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라는 것은 더 큰 생명체 속에 기생해야, 그런 기생물이 되어야 비로소 자기 생명이 보존되는 현실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나도 살고 싶어 !! 베드로가 막판이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보다 더 큰 생명체가 덤벼드니, 자기가 어느 쪽에 붙어야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체포하는 쪽에 붙어서 기생해야 자기가 살지 싶어서, 그래서 예수님을 그만 배신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을 돌맹이를 다루듯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악마가 있다" 라는 것으로 우리 인간을 보신다는 말이다. 즉 악마 속에 인간이 포함된 것으로서, 그러니 인간은 악마의 협박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81페이지를 보자. ** 대한요식협회도 무조건 커져야 되고, 안산 부곡동 D 아파트협의체도 무조건 커져야 하듯이, 역시 교회도 무조건 커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교회는 사랑 대신 법으로 규정되는 힘의 단체가 되는 겁니다. … 축산농가협회, 노래방협의회, 전국편의점연합회, 심지어 각설이협회도 있어요. 여기 각설이협회는 지난번에 대전에서 수련회를 하면서 실제로 가입한 분을 만났는데, 그렇게 개인이 여러 단체에 가입을 하면서 스스로 조종한다는 것이다. 이번 주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교회에 가야되고, 다음 주에는 가야산 등산협회의 소속으로 등산을 가야하고 말이다. 또 평일에는 회사에 가야하고,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조종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미생물이고 하나의 애벌레이니 말이다. 물론 그 이유는 모르고 말이다.
◈ 사르트르의 '던져진 존재' !! 이제 그 점에 대해서 하겠는데, 즉 "구조 안에서는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고 하면 구조 바깥으로 나와서 관찰을 해야하는데, 즉 구조 안에서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사르트르' 라는 철학자는 여기에 대해서, '투기(投企)', 혹은 '투사(投射)' 라고 했는데, 즉 '던져진 존재'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가서 아이가 칭얼거리니 엄마가 "저리로 가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툭' 밀어버리는데, 그러면 아이는 그만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말하기를,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그냥 던져진 존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데, 어차피 자식은 던져진 존재로서 크면 또 자립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 혜민이도 던져진 존재가 되었지 싶은데,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고, 자기가 알아서 애벌레가 되어서 커가야 한다는 말이다.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그렇게 던져진 존재라는 것은, 이미 던져졌기 때문에, 그런 상황 속에 있다는 말이고, 그러니 본인이 얼마나 적응하느냐에 따라서 살아남을지, 아니면 죽을지, 그런 문제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사회가 요구하는 데로 하면 살아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교재에도 나오지만, SBS 방송국 앞에서 가서 데모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보통 이것을 '한기총'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만약 목사가 거기에 같이 동참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그 조직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회가 요구하는 데로, 협회가 요구하는 데로, 조직이 요구하는 데로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물의 구조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거기에서 그냥 애벌레로 빌어 붙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애벌레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물의 구조가 어떠한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조직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고 하니, 그것은 물의 구조의 내막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물의 구조를 몰라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창세기 8장을 살펴보자.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 심판도 모르면서 던져진 존재, 그게 곧 인간 !! 여기에 보면, 노아홍수가 드디어 끝나는데, 하나님의 물 심판이 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물의 심판 구조 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인간은 왜 심판을 받는지도 모르면서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무엇을 보겠는가? 산부인과 분만실이 천장에 달린 그 밝은 불빛을 먼저 보게 되는데, 그 다음에는 산후조리원에 가서 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외할머니 집으로 가서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 얼굴을 익히면서 자라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아하, 노아의 물 심판으로 이렇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아이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렇게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커서 알려주어도 그것을 거부하는데, 그러니까 인간 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다. 심판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아의 심판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나니 제가 속이 다 후련한데, 이것이 바로 '물의 구조' 라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님, 인간은 왜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때찌' 하면서 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 맞아야만 하는데, 실컷 얻어맞고 또 맞아야 하는데,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죽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사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물의 구조를 알아가는 방법인데, 이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애벌레 양성소 !! 여기 창세기 8장 21절에 보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내가 다시는 사람을 만드는가 봐라. 차라리 로봇이나 만들지"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 뒤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악한 자를 만들어서 심판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아예 당장에 심판해버리면 되는데 왜 또 태어나게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심판이 있어줘야 무지개 언약이 은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은혜를 빛내기 위해서 심판을 받을 인간을 고이고이 잘 키워주신다는 것이다. 마치 애벌레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애벌레 양성소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죄인 양성소이고, 죄의 생산공장이라는 것이다. 왜 철판구이를 보면, 거기에 산낙지와 여러 가지 해물을 올려놓는데, 그러면 그것들이 처음에는 펄떡거린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땡기는데(ㅋㅋ),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아직 자기는 죽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런데 점점 불이 더 강해지면서 결국은 다 완전히 익어버리고 마는데, 그게 바로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 내 아들만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 그것을 두고 '파괴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고 하니, 마지막에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앞서서 모형으로 이렇게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아들을 닮은 인간들을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들마저 죽인다는 것은 인간은 당연히 죽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은, 인간을 죽여서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죽이시는 원리를 하나님은 건지려고 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원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릴 수 있는 권한은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즉 "하나님의 아들만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길로 내모신다는 것이다.
◈ 피를 흘리면 죽는다 !! 그리고 나서 창세기 9장에 가면 하나의 법을 만드는데, 이 법은 가짜가 아니고 모형으로서의 법인데, 이 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말이다. 그게 바로 "사람의 피를 흘리면 죽는다" 라는 것이다. 이게 참 재미있는데 말이다. (창 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을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어차피 피가 아닌 행동이 없고 죄가 아닌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죽일 때도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와 부합되는 요소로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사람이 죽이면, 그 사람을 그만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 주님의 주되심의 원리를 드러내면서 죽이시는 하나님 !! 왜냐하면, 그 생명 자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그것을 죽일 권한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즉 우리의 목숨을 부여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서서히 죽이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서서히 죽이면서 주님의 주되심의 원리를 드러내면서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개를 훈련시킬 때, 특히 짖는 것을 훈련을 시키는데 있어서, 개가 자기 주인에게 짖으면 몽둥이로 때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즉 짖을 때는 주인과 주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원리를 끄집어내면서, 그런 식으로 개가 짖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훈련된 '짖는 개'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그게 바로 언약 중심의 존재인데, 즉 인간은 언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언약을 우리가 알거나 소유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오히려 언약이 우리를 소유하고,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언약을 알면서 살아가는 여생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움직이는 언약의 증인, 즉 살아있는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수시로 죽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우리 밑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연결시킬 수 있는,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말이다. 즉 "사람의 생명을 죽이면 죽는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살인을 하면 죽는다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 살인죄가 모세언약으로 오게 되면 확대가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죽은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길흉을 점치는 인간들, 안식일에 나무를 하는 인간들, 또한 부모의 속을 썩이는 자식들은 죽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세우는 들러리 !!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세우는 들러리로 치부해버리는데, 즉 "법이 우선이지 너희가 우선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누가 겁을 내겠는가? 살아남은 자들이 벌벌 떠는데, "나도 언젠가 실수해서 법을 어기면, 내 인생은 저렇게 끝나는구나" 라고 말이다. 아론의 자식들인 나답과 아비후도 역시 제사장들인데, 즉 남을 죽이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만 본인들이 죽고 마는데, 자기보다 더 어른이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만 술에 취해서 향을 피울 때, 그만 자기가 평소에 사용하던 라이터를 쓴 것 같은데, 같은 불이니 발화만 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제단에서 나온 불을 가지고 향을 피워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불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만 죽여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레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 사랑이 올 때까지 벌벌 떨면서 살아야 !! 그러니 제사장이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고,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평소에도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말인가? 율법의 완성되신 분이 오실 때까지 말이다. 즉 사랑이 올 때까지 말이다. 그때까지는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 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주여, 죽여주옵소서" 라고 하면, 즉 "주님 외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리거든 죽여주옵소서"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진짜 니가 죄를 아는가? 안다면 죽이는 것은 내가 알아서 서서히 하겠다. 그러니 너는 이왕 죽은 자라고 여기고 살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되는데, 그 뒤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죽는 문제는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영적인 사람의 특징인데, 성령을 받은 말이다. 그게 구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주여, 예식장을 유황불로 어서 덮치소서 !!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후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든 눈이 내리든 불이 내리든,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즉 자기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그저 소원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들의 소원은 "주님이여, 어서 재림하셔서 박살내주세요" 라고 하는, 그 이외 다른 것이 달리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딸이 아무리 결혼을 하고 해도, 그 예식장에 가서도 역시 "주여, 결혼이고 나발이고 간에 어서 오셔서 유황불로서 박살내소서" 라고 해야하는데, 너무 그러면 하객들이 축의금도 내지 않고 도망을 갈까봐서, 그래서 절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ㅋㅋ).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제 교재 82페이지를 보자. ** 두 번째 구조가 있는데 불의 구조입니다. 물로 싹쓸이를 했던 그 땅을 이제는 물로 싹쓸이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 시범조로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불 심판 사건이 일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엎친 것에 덮친 격인데, 그야말로 넘어진 놈을 다시 밟아버리는 것이다. 전형적인 놀부심보라는 말이다. 왜 판소리에 보면 놀부가 하는 짓들이 많이 나오는데, 호박에 말뚝 박고, 똥 누는 놈 주저앉히고 등등, 잘 모르면 넘어가고 말이다. 그 시범조로 일어난 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 심판 사건이라는 것이다. ----------------------------- ◈ 휴, 시껍했네 !! 그러면 물 심판의 시범조로 일어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아였고, 불 심판의 경우에는 '롯' 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롯을 보고, 그런 불 심판에서도 살아났으니 축하한다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정작 롯 자신은 그야말로 경상도 표준말로 '시껍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도 뒤를 돌아보고 싶어서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했겠느냐는 말이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탈출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산다고 하는 것이, 즉 자기에게 처자식이 있고 사위가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게 마땅히 있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황불, 즉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 위한 재료로서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방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롯이 얼마나 놀랐겠느냐는 것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그야말로 트라우마도 이런 트라우마도 없다는 말이다. 결혼을 해서 평생 같이 살자고 한 아내가, 물론 결혼할 때 상상은 했겠지만, 즉 "내 아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늙어서 죽는다. 그게 아니면 얼음 위를 걸어가다가 빠져서 죽는다. 그게 아니면 치매에 걸려서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바쳐서 죽는다. 그것도 아니면 개에 물려서 죽는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그것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를 비롯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런 교재였음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좋다고 하면, '오케이' !! 그러니 우리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은 없는데, 다만 우리는 주님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하면,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을 보시고 주님께서, "여기 참 좋은 세상이 있네" 라고 하면, 우리도 묻거나 따지지도 말고 "저도 좋습니다" 라고 하자는 말이다. 비록 그 자리에 사랑하는 식구들이 없어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주님의 뜻에 동의를 해드리자는 것이다. 예수님이 만족하신 세상이라고 하면, 우리도 다같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평생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관을 수정하는 작업에 나서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이 하셨다면, 저도 무조건 오케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는 시간들, 그것이 곧 성도의 남은 생애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뜻을 고집하면서 억지로 주님을 끼어 넣지 말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그것을 뒤돌아보면서 주님에게 항상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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