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2 / 언약구조의 속성 / 141215 본문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2 - 언약구조의 속성 14,12,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경전체를 보게 되면, 이 세상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구조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물의 구조'이고, 다른 하나의 '물의 구조'입니다. 두 가지 모두가 이 세상 구조의 파멸, 즉 심판과 관련이 있는 사항입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면서 구조에 대해서 언급을 했고, 물론 그게 사람이 살기 좋게 하기 위해서 만든 구조는 아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구조를 가지고 짜임새 있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 구조를, 체계, 틀, 뼈대, 프레임 등으로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하신 일이 무엇인고 하니,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두 가지의 심판이 나오는데, 먼저 하나는 이미 행하신 심판이고, 그게 곧 '물 심판' 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심판이 있는데, 그게 '불 심판' 이라는 말이다.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심판은, 구조자체를 붕괴시키는 것 !! 심판이란 것이 무엇인가? 구조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창조세계를 심판이라는 명목으로 그 구조를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생각한 구조는 자기 생존을 위한 구조인데, 국가라는 구조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조와 부합되지 않으면 다 무너지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구조도 무너지는 판국에 말이다. 그런 와중에 인간이 자기를 위한 자기 집을 짓겠다는 것이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왜 우리가 어릴 때 백사장에서 하면서 놀았던 놀이가 있는데,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라고 하는 말이다. 아마 두꺼비가 들었으면 열을 받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다들 기억이 나지 싶은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의, 인간들이 나름대로 만든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살아가기에 편하도록 말이다. 그것이 열대지방이라고 하면, 야자수 나뭇잎과 줄기를 가지고 나름대로 얽어서 만들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추운 지방에서는 '이글루' 라고 해서 얼음을 가지고 만들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가족들을 더위와 추위로부터, 그리고 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각자의 작은 집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 여기 저기 캐슬이 !! 그렇게 집을 만들 때 이미 구조가 되는데, 하지만 각자 집만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뭉쳐야한다는 것이다. 그게 성(城), 즉 캐슬이라는 것이다. 여기 대구에도 보면 캐슬이 굉장히 많은데, 롯데캐슬이라고 말이다(ㅋㅋ). 그런 성을 도시라고 하는데, 옛날의 모든 지역은 지명 이름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성곽 이름이라는 것이다. 땅의 지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고 하니, 처음부터 땅은 그 이름을 짓는 사람의 소유지가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 영토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 인디언들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이렇게 미국이 있다고 한다면 드문드문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영토 개념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동네, 그리고 다른 부족들이 사는 다른 동네, 그리고 그 사이는 비어있다는 것이다. 선을 그어서 자기 땅이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텍사스주의 경우에는, 위도와 경도를 아예 직선으로 그어놓았는데 말이다. 인디언들이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은 거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니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 땅이고, 저것은 니 땅이고, 또한 요것은 우리 공동의 땅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요즘도 이런 게 남아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예 지도를 펴놓고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아도 말이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과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싸우고 있는데, 무인도도 자기들 땅이라고 모두 다 선을 그어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독도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살지도 않으면서 자기 땅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땅의 개념이 확대가 되어서 바다 밑으로까지 들어가는데, 지하자원을 노리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 실제적이 아닌, 추상적 국가개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추상적 국가개념 !! 이런 추상적 국가개념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니 별로 의미가 없다고 여길지 몰라도,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추상적 국가개념에 사람들이 휘말려 가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뭔가 알 수 없는데, 실제적인 것이 아닌데, 그런데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추상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게 인간이 식물들이나 다른 동물들보다 더 발달이 되었는데, 물론 동물도 원숭이의 경우에는 약간 그런 것이 있는데, 즉 우두머리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로부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데, 마귀가 영적 존재인데, 인간이 그런 영적 존재에게 고개를 숙이니, 인간도 역시 영적으로 생각해주어야 하는데, 물리적인 생물로 따져서는 인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기(氣)'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이 고개를 숙일 때, 그 사람에게 왜 고개를 숙이는지, 그때 근육이 움직임이 어떻고, 그렇게 아무리 분석을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사람의 추상적인 어떤 기운과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서 고개를 숙이는 것인데, 그러면 그 '기(氣)'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물리적으로 따지면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달리 표현할 수 없어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자가 제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을 연구하고 측정해도, 하지만 그런 물리학자들이 모인 세계는 놀랍게도 정치적 조직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을 한다고 해서 계산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들은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나아가서 그러한 자들의 모임이 보이지 않는 영적 조직이 된다는 말이다.
◈ 악마의 하수인 '국가' !!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해할 때, 우리는 악마가 보고 싶은데, 하지만 악마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 밑에서 움직이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 있는데, 그게 추상적이고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국가' 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서이고, 그리고 구약이나 신약 전체가 다 그러하다는 말이다. 인간은 누군가가 건드리면, "어디를 건드려?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혼자 있을 경우이고, 집단적으로 있으면 자기보다 더 세다고 여기는 사람이 건드리면,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하고 "예, 예" 라고 하면서 고분고분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이를 떠나서, 직장 안에도 그렇고, 물론 비행기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ㅋㅋ).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고 말이다.
◈ 한국사회는 나이사회 !!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상담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너무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그 목사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니, "저보다 나이가 좀 적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런데 왜 말을 하지 못합니까?"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한국사회는 나이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라도 말을 놓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왜 '목사님' 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말을 높여가면서 말이다. 도대체 무슨 기운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다. 저는 우리 집안이라도 저보다 나이가 적으면 '형님' 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사회자체가 나이서열인데, 그것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직급에 관계없이 존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검사나 판사에게 밑에 있는 직원들이 그들을 보고 '영감님' 이라고 했는데, 요즘도 그렇게 한다는 말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웃기지도 않는데, 무슨 그런 새파란 영감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이게 일제시대의 풍토가 그대로 내려오는 것인데, 일제가 근대행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찰이고 뭐고 행정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뭔가 무식하니 시키는 대로 하는데, 그러니 정신적으로 다 굴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취직을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아느냐는 것인데, 그 일에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항상 고개를 숙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중국집을 하더라도, 주인이 음식을 만들 줄 알아야 하는데, 주방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간에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방장에게 휘둘리게 되는데, 나중에는 자기보다 주방장이 월급을 더 가져간다는 것이다.
◈ 베이컨 - '아는 것이 힘이다'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베이컨은 뭐라고 했는가?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유명한 말을 했다는 말이다. 그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카리스마를 차버려라"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귀족적인 것을 다 버리라.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아는 것이 주도권을 쥐는 시대인데, 그러니 출세하고 싶으면 공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라는 것이다. 베이컨이 영국의 유명한 경험주의 철학자인데 말이다.
◈ 구조와 게임 !! 이렇게 구조가 먼저 있으면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이번 강의가 좀 어렵지 싶은데, 어려우면 친절한 이 목사가 또 반복을 해드리는데 말이다. 이 구조 다음이 무엇인고 하니, 게임이라는 것이다. 가정이면 가정, 학교면 학교, 그런 구조가 있는데, 그 다음에 나온 것이 게임인데, 이 게임은 반드시 승부를 염두고 둔다는 것이다. 즉 승부를 결정지음으로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이다. "내가 승자가 될 것인가? 패자가 될 것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 창세기 4장부터 그렇게 인류가 전쟁을 벌이고, 싸우느냐는 것이다. 심심하면 왕들이 백성들을 군인으로 모집해서 "저 나라를 치자" 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구조자체가 어떠한고 하니, 그냥 가만히 있는 구조는 이 세상에 없는데, 나폴레옹도 그렇고, 히틀러도 그렇고, 이성계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뭔가 좀 인정을 받고 나댄다 싶으면,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일본의 풍신수길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러면 왜 가만히 있지를 않은가? 그것은 바로 구조 안에서 그냥 가만히 있게 되면, 그것은 곧 패배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동네 빵집과 빠리바케트 !! 예를 들면, 여기 지묘동에 빵을 만드는 장인이 조그마한 가게를 옛날부터 했는데 말이다. 이런 폐쇄된 동네에서 말이다. 그런데 빠리바케트가 들어오면서, 제가 이사를 올 때쯤에 그게 들어왔는데 말이다. 그 집은 그만 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빠리바케트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대충 빵을 만들어서 팔면서 살았는데, 특별한 서비스도 없었고 말이다. 빵집이 하나밖에 없으니, 그런 식으로 대충 가게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정체된 구조 안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만 빠리바케트의 공격적 마켓팅으로 인해서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공격적 마켓팅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시장조사를 해야되고, 치밀하게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인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좀 설쳐보라는 것이다. 공기업도 그렇고 말이다.
◈ 출렁이는 구조 !! 그러니 구조는 그냥 있다고 해서 구조가 아니라, '출렁이는 구조' 라는 것이다. 물론 제가 만든 신조어인데 말이다. 김밥을 하나 만들어도, 김밥나라가 있고 또 김밥왕국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것인데, 참 김밥왕국이 아니라 김밥천국인데 말이다(ㅋㅋ). 그것을 모방해서 법에 걸리지 않게 요즘 또 무슨 천국이 생겼는데 말이다. 그러니 계속 투자하지 않으면 그 게임에서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초등학교도 그러한데, 엄마가 과거에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은 요즘은 초등학교 3학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숙제는 엄마가 해주어야하는데, 아이는 학원에 가고 말이다. 그런데 그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즘은 학교끼리 계속 성적시합을 벌이다가보니까, 이것은 선행학습이 한 학기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2학년이나 3학년을 앞서가니 말이다. 그러니 그만 출렁이는 구조가 되어서,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만 패배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가인의 후예들의 특징 - '악마적인가?' 그게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예들의 특성이란 말이다. "얼마나 악마적인가?" 라는 것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데, 즉 "얼마나 이 세상적인가?" 라는 것이다.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공통적으로 묻는 것이 있는데, 즉 "니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인간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마귀가 원하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20대나 30대에 예수님을 믿어서, 물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은데 복음까지 알아버려서, 그래서 지금 십자가 마을에 그것 때문에 갈등하는 젊은이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회에 가야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하다가, 그 단계가 지나면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하는데, 거기서 더 들어가면 "가정생활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나오고 말이다. 가락교회의 어느 집사님도 그런 질문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안정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분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일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예정된 것이다. 끝!" 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미 작정된 것이지, 자기가 이 작정을 어떻게 노력한다고 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작정이 되었다는 것은 고정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다른 회사에서 투자하면 자기도 투자해야되는, 그런 것까지도 같이 출렁거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도인처럼 삿갓을 쓰고 세월을 낚는 것에 대해서, 이 세상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마저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사명자는, 아플 자격도 없어 !! 가락교회의 집사님이 내린 결론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된다" 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의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놀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라고 하는 김일성이 좋아했던 구호가 생각하는데 말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승리했기 때문에 더더욱 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그런 세상적인 승리하고 하면, 나는 다른 구조가 있다" 라는 것인데, 다른 게임이 말이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것인데, 즉 "나는 지금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와 씨름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악한 권세와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놀 틈이 없는데, 결코 동양화 속에 있는 병풍에 그려져 있는 선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 병풍 속의 동양화를 보면 !! 우리 집에는 제사가 많아서, 어릴 때 그 귀한 문어다리도 많이 먹고 한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제사 때의 그 탕수국을 참 맛있게 잘 끓이는데, 그런데 제사를 드리면 반드시 병풍을 친다는 것이다. 제사 때마다 저는 그 병풍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어릴 때부터 말이다. 그림을 보면 대자연을 참 멋있게 잘 그려놓았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사람은 너무나 작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보니까, 낚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간에, 자기는 그냥 정지된 상태로 있고 싶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게 하나의 종교처럼 되었는데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깊고 깊은 산중에서, 그야말로 마누라도 자식도 없이 혼자 낚시만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유토피아, 즉 꿈같은 세계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것을 찾아서 전원주택과 같은 것을 짓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하는가?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영적 싸움을 하지 않고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죽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시간을 보내면 보낼 수록 점점 더 심심해지는데 말이다.
◈ 구조는 곧 영적 전쟁 !! 그러니 이 구조가 영적 전쟁인데, 거기서 우리는 마귀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다. 마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게 베드로후서에 나오는데, "심판은 없다" 라고, 즉 "이 세상은 옛적부터 있는 그대로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 그대로 있는 것을 '자연(自然)' 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NATURE' 라고 하는데, 즉 '스스로 있음'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도가철학에 나오는데, 유위가 아니라 무위, 즉 '있는 그대로' 라는 것인데, 이것은 '없다' 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있는 것은 그 없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양철학에서는 '고요함'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고 보고, 반면에 서양철학은 '카오스' 라고 해서, 혼란 가운데서 나왔다고 본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식의 차이가 있는데, 즉 "혼란에서 질서가 잡히면, 그게 세상이다" 라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처음에는 고요했는데, 거기서 나온 것이 말썽이다" 라고 보았고 말이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의 유교에서는, 사람에게 굳이 죽음이나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만큼 살다가 다시 맥이 빠지면 다시 고요의 세계로 돌아가서 잠자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주는 죽음의 공포를 동양에서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고요하게 자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물론 성경에도 '안식'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니 기독교의 내용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봐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을 십자가와 복음을 경유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런 동양적 느낌으로 보는데,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오면 그것을 자기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서, "죽으면 눈을 꽉 깜으면 그만이겠지"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의료보험도 필요가 없다. 나중에 아프면 그냥 갖다 내다버려라. 눈을 꽉 깜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그렇게 눈을 꽉 깜아버린다고 해서 해결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통이 없고 심판이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동양적인 흐름에 있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 눈에 보이면 분주하고, 죽으면 고요하고 편안한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죽음의 세계가 과연 고요한가? 하지만 거지 나사로의 앞집에 살던 거지를 보라는 것이다. 그가 과연 고요했는가? 먹을 물 한 방울도 없어서 구걸을 하지 않었느냐는 말이다. 지금도 이 겨울에 수도관이 얼어 터져서 그런 집들이 있지 싶은데, 그러면 할 수 없이 물을 얻으러 다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대수의 "물 좀 주소" 라는 노래도 있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하셨는데, 거지 나사로가 간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말씀을 모두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자처럼 말이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이 이 성경말씀을 얼마나 무시하는가? (눅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심판은, 곧 구조의 교체 !! 그러면 이 성경말씀은 무엇인가? 성경은 구조로 되어있는데,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 그 심판은 누가 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데, 왜 심판을 하시는가? 다른 새로운 구조와 교체하기 위해서 기존의 구조를 바꾸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바꿀 것 같으면 이 세상은 왜 만들어놓으셨는가? 기존의 구조 안에서 바꾸어야될, 그 주인공의 속성이 나오기 때문에 말이다. 주인공의 속성이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그러면 주인공의 속성을 바꾼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바꾸어야 될 것은 세상인데, 그 세상에는 주인공의 속성이 들어있다는 겁니까? 그러면 결국 주인공의 속성이 바뀌는 것입니까?) 이렇게 구조가 있으면, 이 구조는 게임인데, 즉 경쟁이고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싸움인가? 속성들의 충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속성이라고 한 것은 고정이 되어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고정이 되어있다는 것은 곧 양보가 없다는 의미이고 말이다. 그러한 속성들끼리 서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그러니 성도가 되었으면 양보가 없다는 것을 외칠 수 있어야, 그게 곧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의 자유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포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간통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실 때, 그 여인은 "앞으로 간통을 하느냐? 마느냐?" 라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즉 "앞으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니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목숨과 자기 인생이 아니라,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주님을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곧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의미인데, 즉 이 여인을 간통을 함으로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간통한 것이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을 계기로 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양보를 할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자유함의 그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양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 사람들이 마귀에게 눌려서 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손에 잡히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향해서 질주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캄보디아에 가고 말이다. 그리고 중남미의 가난한 나라들을 골라서 가는데,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신 앞에서 경건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면서 말이다. 주로 20대에 이런 짓을 하는데, 그리고 10대의 젊은이들은 이슬람 국가, 즉 'IS' 라는 것이 진리인 줄 알고 가는데, 독일이나 프랑스, 그리고 영국의 학생들이 거기에 빠져서 활동을 하는데 말이다.
◈ 젊은이들의, 활활 타는 복수심 !!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20세기초에 프로이드가 이미 잘 지적을 했는데, 인간 속에는 근원적인 것이, 특히 젊은 아이들은 그런 것이 있는데 말이다. 활활 타는 그들의 심성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복수심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은 분노를 억누를 수 있는 자질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복을 하는데, 그런 보복을 하려면 적이 있고 원인이 있어야하는데, 그런데 젊은이들은 적도 모르고, 자기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그 원인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당신이 나를 힘들게 하는 적이요?" 라고 하면서 멱살을 쥐고 흔드는데, 그렇게 해서 아니라고 하면,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다양한 직업을 통해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자기의 한에 대한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그렇게 복수를 함으로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한지, 그것을 뒤늦게 찾아내는 방식을 인간들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을 하다가 보니 상당히 어렵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꿈과 희망을 가져라" 라는 것이다.
◈ 슈바이처와 리빙스턴 !! 아프리카에서 봉사는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보통 어른이 되기 전에 슈바이처와 같은 사람들의 전기를 많이 읽는데, 그런 전기를 읽으면 학생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슈바이처는 참 착하다" 라는 게 아니라,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는데,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의 반응은 무엇인고 하니, "슈바이처라는 훌륭한 사람을 이 세상은 왜 알아주지를 않는가?" 라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자기가 슈바이처처럼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슈바이처가 되지 못하는 그 빈칸을 메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실질적 반응은 무엇이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적대감이었다는 것이다. 리빙스턴에게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 슈바이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빙스턴은 원주민을 존경했고, 반면에 슈바이처는 그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말이다.
◈ 나를 좀 알아주세요 !! 한 마디로 말해서 "나를 좀 알아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런 본성을, 물론 나중에는 모든 인간은 자기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리고 그것이 문제라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데, 그래서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을, 그것을 마귀가 쥐고 있어서, 아이들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즉 마귀의 하수인격인데, 그렇게 마귀가 부려먹는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무의식에 의해서 "니는 니가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해. 그게 너 다운 것이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자기를 알아달라는 식으로 치고 박고 하면서, 그렇게 난폭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즉 정리정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릴 때는 그렇게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면서 설치더라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 또 있어서 서로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고개를 숙일 때는 숙인다는 말이다. 난폭하게 까불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상징계와 상상계 !! 프랑스의 정신 분석학자 라캉은 이것을 두고 '상징계' 라고 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반해서 '상상계'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신데렐라와 같은 동화에 나오는 세계, 그 아름다운 세계의 모든 주인공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그래서 자기는 그런 궁전에 살아야 당연하고, 저런 들판에서 뛰놀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을 상상계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상상계라고 하는 것은 어릴 때 동화를 보면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 그런 동화를 보면서 마귀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동화를 보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렇게 되는데 유리한 조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 백설공주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백설공주의 경우에, 자기가 백설공주가 되려면 누가 필요한가? 못된 계모가 필요한데, 그래서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가? "엄마, 엄마가 나를 낳은 것이 맞나?" 라고 하는데, 요즘 드라마에 하도 그런 게 많아서 말이다. 출생의 비밀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육원에서 데려오고 말이다. 그래서 나이 18살이나 먹어서 엄마 몰래 유전자 검사를 해보고 하는데, "언니는 엄마 딸인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엄마의 머리를 빗어주면서 엄마의 머리카락을 챙겨 가지고 가서 검사를 해보는 자식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일단 자기가 주인공인 백설공주가 되려고 하면 먼저 계모가 있어야만 하고, 그리고 자기는 그 계모에게 학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가 주인공인 공주가 되는데, 그런 계모의 학대가 없다고 하면 자기는 백설공주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결국, '나는 나다' !! 사춘기 때는 이렇게 온갖 상상을 다하게 되는데, 그런 상상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나는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한다" 라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게 마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것을 젊은 나이에 복음을 알아서 알았다고 하면, 그야말로 철이 들어도 제대로 든 것인데, 완전히 인간 문화재감이라는 것이다. 젊은 아이들은 그런 게 없는데, 그래서 미얀마의 젊은이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화장품을 사러온다는 것이다. 비행기 값만 해도 화장품을 사고 남는데, 그러니 얼마나 철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더운 나라에서는 한국 화장품의 화장발이 받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게 바로 상상계인데, 이 상상계를 계속해서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돗대라는 것인데, 무조건 최고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상징계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상징계라고 하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래서 '현실계' 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분도 있는데, 하지만 현실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 왜 상징인가? 이 세상은 실체가 없어 !! 그래서 상징계라고 했는데, 그러면 상징계라고 하면 무엇이 빠진 것 같은가? 실체가, 즉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세상인데, 즉 이 세상은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똑같이 상상하는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고 충돌하는 것 자체가, 그 결과물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런데 젊은 아이들은 뭐라고 하는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그런 말을 했는데, 물론 그 양반은 그렇게 전 세계로 엄청 뛰어다녔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든 그 어디를 가도 똑같은 인간들밖에 없는데, 사기꾼들이고 말이다. 한국에 있으니 독일에 가나 미국에 가나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 로마사람들의 하루일과는? 제가 유럽에 가서 제일 먼저 관심이 있게 본 것이 무엇인고 하니, 로마에 가서 그들의 하루일과를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똑같다는 말이다. 그 유적을 보고 착각하는데, 하지만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유적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티는가?" 라는 것만 들어온다는 것이다. 제가 콜로세움, 즉 원형경기장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데, 경찰이 뛰고 난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니까 캄보디아 난민인지 몰라도 머플러를 팔다가 발각이 되어서 도망을 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에게는 관광지이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의 현장이라는 말이다.
◈ 세상은 없고, '나' 자신만 !! 그러니 세상은 없는데, 세상은 없고 자기만 있다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가니 회사가 있는 것 같지만, 하지만 회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어떻게 해서든 회사에 붙어서 월급을 빼먹으려고 하는 본인만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나이가 많아서 이제는 다들 아시겠지만, 그게 국가든 뭐든 간에, 젊었을 때는 그래도 추상적인 관념이 있어서 충성을 한다든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국가든 뭐든 간에 따지고 보면 전부가 다 같은 세상이라는 말이다. 최근에 "경찰이 이렇게 힘이 없을 줄 몰랐다" 라고 하면서 유서를 남기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경찰이 자기를 보호해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경찰은 없다는 것이다. 그냥 경찰짓을 하면서 월급을 타는 본인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은 없고 상상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 라캉 - '이 세상은 니가 조작한 무대이다' !! 프로이드 계통에 있는 이 '라캉' 이라는 학자는, 물론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수용하기는 힘들겠지만,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고, 마치 불교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밥을 먹고 살려고 하는 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은 니가 꾸며낸 것이고, 조작한 연출한 무대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바뀌면 너는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데, 남이 변한 것을 자꾸만 시비를 거는데, 하지만 너는 여기 있을 때 다르고 저기 있을 때 다르고, 그리고 오늘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다. 그런 너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남을 탓하고 또 세상을 탓한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즉 라캉은 정신병의 원인을 무엇을 보았는고 하니, 비현실적인 것과 자기를 동일시한 것을 원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을 낮추면 되는데, 하지만 마음을 낮춘다고 해서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 니 꼬라지를 알아라 !! 그래서 성경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니 주제를 알라" 라는 것인데, 우리의 주제가 무엇인가? 주께서 만들어놓은 구조에 말려들었는데, 죄인으로서 말이다. 그러면 그야말로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주님만 의인이고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이고 뭐고 간에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으로서, 그렇게 주님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갇혀있다. 죄에 갇혀있다. 율법에 갇혀있다. 마귀의 세력에 갇혀있다" 라고 했을 때, 이 4가지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갇혀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를 갇히게 하는 어떤 구조가 있는데, 그런 주님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놀아났다는 것이다.
◈ 자유와 자유로움 !! 그러면 그 구조, 그 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롭게 되는가? 물론 자유는 얻지만 자유롭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선 자유롭게 되는 것과 자유를 구분하는데 말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통을 하다가 잡힌 여인의 경우에, 그 다음부터 그 여인은 예수 안에 갇힌 바가 되고 예수 안에 놓인 바가 되는데, 하지만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게 진정한 자유임에 분명한데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가? 자유롭게 되는 것과 자유를 동일하게 취급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다고 이야기하고, 또한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 목사님, 막 살아도 됩니까? 어제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셨는데, 설교를 듣고 궁금한 것이 있어서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직장에 십자가 마을에서 복음을 듣고 "나는 복음을 안다" 라고 하는 직장선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제 막살아도 주님이 용서하니, 막 살겠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 자기도 같이 막걸리도 먹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나이가 40대 중반의 총각인데, 여자가 한 사람정도는 와서 숟가락을 얹어도 되는, 그런 수입은 되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정말 십자가 마을에서 막 산다고 하는 것이 자기 선배가 이야기한 그것인지, 그게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인간이 되어서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여건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즉 마귀에게 붙잡혀서 살던지, 주님에게 붙잡혀서 살던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이지, 막 사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의 세계에 놓여서 산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마귀에서 붙잡혀서 살았다는 것을, 그것을 그대로 예수님에게로 가지고 와서 예수님에게 붙잡혀서 산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마귀의 방식인데 말이다.
◈ 역시 '막 사세요' !! 그러니 그것을 벗어난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인간은 마귀에게 매여 살고, 율법에게 매여 살고, 또한 말씀에게 매여 살고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막 사세요"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말이다. 먼저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이제부터는 나는 술도 마음껏 마시면서 살아갈 거야" 라고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붙잡히지를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오는데, 즉 자기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막 사세요" 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데, 자기는 억지로라도 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또 생겨나는고 하니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과연 막 살아갈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매여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매여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살펴본다는 말이다.
◈ 술을 먹지 않는 것이 곧 막 사는 것 !!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과거에는 술을 먹고 싶어도 "술 취하지 말라" 라는 율법 때문에 먹지를 못하고 참고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는 있는 사람은 이제 스스로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술을 먹지 않는 것이 막 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술을 먹지 마세요" 라고 하면, "만약 제가 술을 먹지 않으면 저에게 무슨 혜택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매인 것과 똑같은 방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는 더 주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이미 다 주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에게 그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술을 마셔봐야 나중에 취해서 바보짓만 골라서 하는데, 그런 것을 왜 마시냐는 것이다. 몸만 박살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생각을 좀 해야하는데, 복음을 안다고 해서 금방 자기 생활이 바꿔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청담동 스캔들을 아세요 !! 예를 들어서, 또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 강의시간에 자꾸 그런 것을 이야기한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ㅋㅋ). 30년 동안이나 엄마인 줄로 알고 살았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엄마는 어릴 때 자기를 유괴한 사람이고, 진짜 엄마는 부잣집 재벌인데, 그렇게 친 엄마는 엄연히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이야기하게 되면, 지금까지 그야말로 정성을 다해서 자기를 키워준 엄마는 졸지에 유괴범이 되어서 감옥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갈등을 하는데, 그러자 남자친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한다" 라고 하니,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는가? "머리는 놓아주었는데, 몸은 아직 놓아주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머리는 놓아주었는데, 몸은 아직 !!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머리로는 십자가 복음이 되는데, 그런데 몸의 행세가 그렇지 못합니다" 라는 것이다. 즉 몸은 아직까지도 "남들이 보면 어떻게 하지? 남들이 나를 얼마나 욕을 하겠는가?" 라고, 혹은 "남들이 얼마나 나를 칭찬을 하겠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몸으로서는 아직까지도 자기 가치, 자기 자존심, 자기 위신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제쯤 그게 포기가 되는고 하니, 그게 포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드는데,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게 평생을 가는데, 이런 위신을 버리면 다른 위신이 등장하고 말이다. 우리가 육을 가지고 있는 이상 온전히 육을, 즉 자기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소원처럼 우리가 이 육을 떠나는 것이 제일 좋은데, 그렇고 자살하라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육을 가지고 이상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나를 얼마나 흉을 보고 무시하겠는가?" 라고 하는데, 특히 사람들은 자기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참지를 못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추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기분이 나빠서 교회에 가지 못하겠다" 라고 하는데, 물론 핑계도 많고 말이다. 그러니 머리를 되었을지 몰라도 몸은 아직 옛날의 습성이 남아있어서, '무엇 무엇인 척'을 하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몸이 육이 죽으면 흙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 줌의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살아온 버릇이라든지 관성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심판과 용서 !! 그 해결책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물로서 심판했다는 것인데, 구조자체를 말이다. 이 구조 안에 게임이고, 게임은 속성이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속성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있는데, 그러면 무엇이 고정되어있는가? 심판과 사랑, 즉 용서라는 말이다. 이 두개를 합쳐서 '하나님의 의(義)'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심판하는 것도 의(義)이고, 용서하는 것도 의(義)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바로 이 용서하시는 의를 받아서 의인이 되었는데, 이게 바로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것이다. 우리가 착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주님의 그 용서 안에, 우리가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의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가 우리 자신이 만든 의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늘 죄인이 되는데, 그것도 죄인 중에서 괴수가 말이다. 그러니 성령만 받게 되면 모순될 것이 전혀 없는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을 하려고 하니, 이게 힘이 든다는 것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애매함'이 활동하는 처소 !! 이것을 이번 주일에 설교하려고 하는데, 즉 '애매함' 이라는 것이다. 이 애매함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이 존재개념이 아니라, 애매함이 활동하는 처소라는 것이다. 즉 "어, 의인인데? 어, 죄인인데?" 라고 하는, 혹은 "예수님에게 속했는데? 아니, 마귀에게 속했는데?" 라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항상 같이 있는데, 왜냐하면 구조이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구조 안에 들어있고, 그 구조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조금 전에 게임이라고 했는데, 성경에서는 전쟁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속성으로서 벌리는 전쟁인데, 누구의 속성인가?
◈ 이 심판과 용서가 결합되면, 곧 예수님의 기능 !!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것을 만드신 분의 계획된 구조가 있고, 그 구조는 만드신 분, 즉 주님의 속성이 들어있고, 이 속성이 바로 심판과 용서라는 것이다. 이 심판과 용서가 결합되면 예수님의 기능이 된다는 것이다. 메시야 기능, 복음적 기능이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즉 그리스도의 속성에 의해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속성이 바로 공의, 즉 심판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는 경휼히 여기겠다" 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제일 무서운 심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너희들이 아무리 긍휼을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부르짖는다고, 달려온다고, 그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로마서 9장 16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16글자인데 말이다. 도대체 이런 무서운 심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주세요. 주세요" 라고, 우리가 그렇게 원한다고 해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마태복음 7장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고 나온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구하게 하실 때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세상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준비를 하셨고, 그 준비된 것을 매치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세상적이 아닌 것을 구하게 되는 구조 속에 말려든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본의 아니게 예수님이 지키신 것을, 구하게 !! 마태복음의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아무도 지킬 수 없는데, 그래서 그것을 누가 지키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뱉은 그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먼저 시켜놓고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지키신 그 내용이 성도에게 임하게 되면, 성도는 본의가 아니게 산상설교의 내용을 구하게 되는, 그런 획기적인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는 것이 기적이 아닌 성령을 달라고 하는,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저는 성령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것은 곧 "주여, 죽여주옵소서"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셨는데, 그러면 이론적으로 하면,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그런 길을 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산상설교에 의하면 그것은 넓은 길이고 멸망의 길인데, 그러면 좁은 길은 어떤 길인가? 예수님이 보이는 길이 곧 좁은 길인데, 고생의 길이 좁은 길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뭐가 하나 제대로 맞는 것이 없는데, 전부다 바꾸어야한다는 것이다.
◈ 고생 길이 아닌, 그리스도가 보이는 길 !! 예수님이 크게 보이는 길이 좁은 길인데, 200평 짜리 아파트에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 곳에 살아도 예수님이 보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좁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20만평의 과수원이 있고, 7억 짜리 람보르기니를 타도,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데, 그런 최고급 승용차를, 그것도 옆에 예수님을 태우고 달린다고 생각하면 말이다(ㅋㅋ). 그런 차를 타도 예수님만 계시면, 그게 좁은 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고생하는 것은 좁은 길이 아닌데, 그것은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고생이고 말이다. 고난의 길은 고생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이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라고 했는데, 그러니 자기가 부유함에 처했다고 해서 빼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그런 부자에 얽매이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성도는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야하니 말이다. 자기의 부요함이 결코 짐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가난하게 하셔도 괜찮은 하나님 !! 저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운동한다는 것이 별로 마땅치 않은데, 요즘 TV에 광고를 하는 유니세프나, 그리고 적십자 운동도 그렇고 말이다. 그럴 것 같으면 주님이 밀가루 부대를 들고 오셨지, 십자가를 왜 지셨느냐는 것이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면 되는데, 어떻게 피를 흘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경우에,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인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주님은 결코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하게 하셔도 괜찮은 하나님이지 말이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어떠한가? 더욱 더 부자에 대한 집념은 강렬한 법이라는 것이다. 가난에 한이 맺혀서, 거기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장미빛 연인들' 이라는 주말드라마에 나오는 장미 아버지를 보라는 것이다. 공무원이 되어서 뇌물을 얼마나 챙기는지 모르는데, 자기 딸들에게도 돈이 되는 곳에만 시집을 보내려하고 말이다. 그것이 다 자기가 어릴 때 너무나 가난했기에, 거기에 대한 한풀이라는 것이다.
◈ 목사에게 시비를 걸지 마세요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속성은 고정된 것이고 우리가 수정할 수 없는데, 그러니 고정된 진리의 속성을 아는 사람에게는 시비를 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게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전혀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그것은 원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기에, 즉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라는 것이기에, 그래서 그런 말을 목사가 설교시간에 하게 될 때, 그 설교를 듣고 다 가버려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주께서 원하는 자만 구원하십니다" 라고 설교를 해서 나가버리면 말이다. 여기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교회가 많이 있는데, 하지만 제가 단언을 하지만,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원하는 자만 구원을 하십니다" 라고 하는 교회는 말이다. 그렇지요? 다들 한 번쯤 가봤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여보, 고마워 !! 만약에 자기 남편이 구원이 되기로 작정이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주께서는 자기에게 남편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자기는 수동적으로 기도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니 그 주체자는 당연히 자기가 아니라 누구라는 말인가?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남편에게 성령을 붓게 되면, 남편은 성령을 받아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도했기에 구원을 받았어" 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기도로, 예수님이 당신을 나에게 보내서 구원했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고정된 속성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구조에서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티를 내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임을,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해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 고정된 예수님의 속성, 그리고 전쟁 !! 이 속성을 이야기하면서 좀 더 어렵게 나가보면, 구조에서 게임, 즉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전쟁은 속성을 가지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마귀는 무엇이라고 하면서 반대하겠느냐는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속성,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전부를 심판한다. 하지만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는 긍휼을 베푼다" 라고 하는, 그런 자격이 메시야에게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9장에 보면 '남은 자'가 구원을 받는데, 그러면 그 사람을 보고 "당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겠는가?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저를 덮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과거의 에피소드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해서 !!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다" 라고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해서 폼페이에 화산이 터지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다고 하면, 화산이 터지고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순신 장군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기에 말이다. 이 세상의 구조의 중심은 예수님이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아닌데, 그러니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가? 예수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이름으로 기도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중심이 아니니 말이다. 이 구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직 주님의 속성만이 편재되게 하옵소서 !! 우리의 더러운 속성은 통하지 않는데, 그러니 "오직 주님의 속성만이 편재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곧 우리의 기도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다" 라는 것인데, 하늘의 뜻이 말이다. 그러니 "주께서 심판할 자에게는 심판을 하시고, 사랑할 자에게는 사랑을,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우리가 함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게임에 그만 말려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주님의 그 속성대로 하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네"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것은 게임, 즉 영적싸움이란 말이다. 이 세상이 고요한 진공상태가 아니고, 뭔가 이런 주님의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구조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아까 이야기한 상징계, 즉 우리가 조립하면 되고, 그러면 그 구조에 맞는 게임의 법칙은 누가 만든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지혜를 끄집어내면 된다는 것이다.
◈ 역사주의와 칼 마르크스 !! 20세기 초반에 나온 철학사조가 '역사주의' 라는 것인데, 역사와 역사주의는 다른데 말이다. 이 역사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 '칼 마르크스' 라는 것이다. 아마 들어본 적이 있지 싶은데, 제가 여러분을 너무 무시했나요? (ㅋㅋ) 그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언젠가 무너지고 공산사회가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사회주의를 거치는데, 그렇게 해서 공산사회가 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가, 즉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결국은 그 노동자 계급마저도 없어지고, 계급이 없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 공산사회는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회인데, 정수라가 불렀던 '아, 대한민국' 이라는 노래가 그러한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누릴 수 있고 ♬"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일을 많이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 능력에 맞게 조금만 일을 해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지정책의 최고봉인데, 이 얼마나 멋지냐는 것이다. 노약자든 장애인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러시아의 스탈린이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 공산주의는, 적을 잘못 골랐어 !! 그러면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참으로 이상적인 사회인데 말이다. 그것을 바로 적을 잘못 골랐다는 것이다. 공산사회를 방해하는 적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남이 자기와 똑같은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자기 중심의 구조사회이고 조직사회이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가 최고가 되고 자기가 돗대가 되어야만 하는데, 감히 어디 남이 자와 견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게 용납이 되지 않는데, 사업을 해도 동업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몇 개월을 가지 않아서 다 싸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서로 마음이 맞고 사이가 좋다고 해도 말이다. 그게 다 깨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여보, 운전을 똑바로 못해요 !! 부부가 되어서 같은 자동차를 타도, 물론 처음에는 남편이 운전하고 아내가 조수석에 타는데, 그러면 아내가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남편 덕분도 잘 타고 다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불과 일주일밖에 가지 않는데,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가? "여보, 운전을 똑바로 못해요. 깜박이는 왜 켜지 않아요" 라고 하면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누가 갑이고 을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때는 운전을 하다가도 내리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드는데, 실제로 열을 받아서 그냥 길가에 마누라를 내려놓고서 집으로 온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의 맡기겠는데, 그래서 우리 장로님은 차를 사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 인간의 속성과 예수님의 속성 !! 인간에게 동등이라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인간 내부에 마귀가 자리잡고 있는데 무슨 동등이냐는 것이다. 육이 들어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마귀의 행세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무슨 동등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가 최고가 되지 않으면 항상 불안한데, 그래서 인간은 위에서 아래를 보는 것에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주의'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양심적이고 지혜롭고, 그래서 로마제국에서는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 이것을 소위 '4덕'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사람에게 이런 것이 있으면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예수님의 속성은 몇 가지라고 했는가? 심판과 긍휼, 즉 자기가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건져낸다는 것이다. 예정된 자만을 건져낸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두 가지의 속성에 대해서, 여기에 대한 인간들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속성은 무엇인가?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 등등, 이런 것이 해당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강의를 했는데,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한 번 돌아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을 하시고, 또한 불로 심판을 왜 하셔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지 않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속에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 등등, 이런 아름다운 속성들로 다지고 다져왔던 우리 자신의 찬란하고 꿈 같은 역사, 그것을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야야, 준비가 되었지? 이제 무너뜨린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황불로서 내리치셨다는 것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동안 너희들이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서 예수님 중심의 세계에 반발했다" 라는 것이다.
◈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찌리릿' !! 제가 어제 낮 설교시간에 얼른 언급하고 지나간 것이 있는데, 인간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고 하니까,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죄를 용감하게 지어보는 것, 즉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그 영토에 넘어서 가보는 것, 그게 그렇게 기쁘고 신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 그만 시들해지는데, 그러면 그 다음의 경계선을 또 넘어가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기쁘냐는 말이다. 금지는 누가 하는가? 자기 양심이 금지하고 신의 음성이 금지한다고 하면, 그것을 넘어섰다는 것은 누구를 이겼다는 말인가? 게임에서 말이다. 자기가 하나님마저도 이길 때, 그것이 바로 자기의 기쁨이고, 또한 마귀가 심어준, 즉 마귀와 함께 기뻐하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적 임마누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와 함께 마귀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즉 "신은 죽었다" 라는 것인데, 신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신은 없다고 해야, 그 없는 신이 누구라는 말인가?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이다.
◈ 신은 부담스러워 !! '엑소더스' 라는 영화에 보면, 계속해서 바로 왕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여호와와 어디에 있어?" 라고 하는데, 즉 바로 왕, 자기 자신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 영화의 인기도 별로이고 평점도 좋지 않는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선입관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에 관한 영화인데, 즉 인간이 신을 본다는 것은, 그동안 경계선 바깥으로 차버린 신을 다시 모시고 와서 자기가 거기에 굴복하는 방식인데,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신에 관한 이야기는 보기도 전에 이미 싫어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들끼리 나오는 영화가 더 인기인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고 말이다. 거기에는 신의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본영화의 특징이 그러한데, 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 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는 부담스러운데,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머리로서는 십자가인데, 몸은 아직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의 생활을 말이다.
◈ 역시, 결론은 성화론 !! 그리고 자기가 기억하는 그 모든 것은, 그것은 주님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인생을 펼쳐가면서 투자한, 그런 자기의 정성과 노력에서 나온 자기의 건전한 속성, 즉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착함과 선함, 즉 성화론이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성화론이 그렇게 구성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나는 이렇게 아름답다" 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을, 그것을 주님께서는 유황불을 가지고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곱게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벼락을 내리치듯이 말이다. 인간들이 평생동안 쓸데없는 짓을 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
◈ 물 심판, 그리고 불 심판, 왜 그런가?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면 되는데, 왜 불까지 등장시켜서 심판을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물로 심판할 당시는 노아를 살려주기까지 하고 말이다. 그렇게 왜 심판이 두 종류냐는 말이다. 왜 1차는 물이고, 2차는 불이냐는 것이다. 그냥 한 번에 작살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구조가 두 가지인데, 물 심판은 땅의 구조에 관한 것인데, 그리고 유황불은 하늘과 땅을 통합시키는 구조에 의해서 등장한다는 말이다. 옛 구조가 왜 필요한고 하니, 우리에게 필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를 씻어주시려고 하면,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죄로 어두운 세상이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으면 당장 데리고 가도 되는데, 그런데 오늘날 우리를 왜 계속해서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느냐는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채득할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하, 이래도 구원을 시켜주시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 성탄절은 모든 성도의 생일 !!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구원해주시는가? 우리가 구원을 시켜달라고 해서 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신다는 말이다. 즉 "너는 사랑을 받기로 작정한 놈이야. 그래서 너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까지 이 땅에 살아야만 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생년월일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인데, 도저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라도 말이다. 우리가 몇 년도 몇 월 몇 일에 태어나야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굳이 저의 생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는데, 이제는 환갑도 지나가고 해서 더 나올 것도 없고 말이다. 난방 두 개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태어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 곧 성탄절 차원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생일이 곧 성탄절인데, 예수님의 생일이 성탄절이라고 하면서 괜히 케익을 자르지 말고 말이다. 그러면 성탄절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라고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가신 길이 무엇인가? 죄인의 길인데, 그러니 우리는 죄를 짓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되는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니 일곱 귀신이 다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지으면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말이다.
◈ 술을 먹지 않더라도 !! 아까 술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좋아하던 술을 먹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가 술을 먹지 않겠다고 하는, 그것마저도 죄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예수님을 믿고 나서 술을 먹지 않으려고 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재미가 없어서 오지를 않는데, "나는 술을 먹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고 술을 끊었다" 라고 해야 마귀가 일곱 귀신을 몰고 오는데 말이다. 그런데 "술을 끊었는데, 그것도 죄다" 라고 하니, 마귀가 전혀 흥미를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뭔가 쑤시면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즉 어디 한 구석에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허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약점이 없다는 것이다.
◈ 예수 안 - '너는 주님의 속성의 대변자다. 끝' !! 이것을 두고 바로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그 어려운 말을 구조로서 풀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다" 라는 것은, "너는 주님의 속성의 대변자다. 끝!" 이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독자적인 노선이 없는데, 자기의 독자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순간, 그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자기의 놀라운 결단력이고, 자기의 뛰어난 두뇌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부가 다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 구조 속에 살면 되는데, 그래서 베드로처럼 자기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것은 사도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도바울이 언제 자기를 생각할 틈이 있었느냐는 말이다. 지금 주님의 구조 안에서 일을 한다고 바쁜데, 주님도 일을 하시니 자기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의 속성이란 말인가? 주님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정리하면, "이 세상은 마지막이다. 끝났어. -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 주님이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만 구원을 받아. 끝!",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니는데, 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 터키 등을 말이다. 특히 에베소서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 패스, 패스, 패스 !! 여기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주님의 일에 있어서 전혀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실패도 없고 말이다. 모든 것이 오케이인데, 항상 "패스, 패스, 패스" 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일은 거칠 것이 없는데, 전혀 보수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자연은 아무런 일도 없이 정상인데, 그런데 우리는 왜 길길이 뛰고 난리를 치는가?" 라고 말이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것이다.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 이라는 노래가사에 보면, "산이 나보고 내려가라고 하면 내려가고, 올라가라고 하면 올라간다" 라고 말이다. 여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는 말씀을, 사도바울은 머리가 아니라 발로 복음을 전하면서 실제로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전한 그 내용은 사도행전 13장 38절에 보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라고 하는데,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행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 너희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 !! 쉽게 말해서, "너희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죄사함을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저는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인정하는 작업까지 성령이 오셔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죄는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그러한가? 아니면 구조 안에 있기에 그러한가?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즉 구조 안에서 죄인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예수 안에 구조적으로 놓여있는 것처럼, 그 이전에 아담의 구조 안에서, 즉 죄가 왕 노릇을 하는 구조 안에서 원인도 모르면서 죄를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 누구야, 너?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모텔방에 갇혀서 배달된 중국집 군만두만 먹게 되는데, 무려 15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탈출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누구야, 너?" 라고 하는데, 그동안 얼마나 화가 났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갇혀서 말이다. 그러니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게 성도의 아주 특이한 점이란 말이다. 물론 성령께서 질문을 하도록 하시는데, 전혀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돈벌이도 안 되고, 밥벌이도 안 되고, 출세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질문을 말이다. 물론 올드보이처럼 반말로 질문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작용을 하셨기 때문에, 기존의 육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구조라는 것이다.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 왜 물 심판이 따로, 불 심판이 따로 인가?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왜 물 심판이 따로 있고, 그리고 불 심판이 따로 있는지, 그것을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 교재에도 있는데 말이다. 물의 구조라는 것은, 이것은 좀 학문적인 이야기가 되겠는데 말이다. 물의 구조가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최초 언약은 노아홍수라는 것이다. 그러니 최초의 언약은 그 환경조성이 어떠한고 하니까, 심판이라는 이미 조성된 것을, 심판을 모르는 이 세상에다가 캡슐에 담아서 집어넣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언약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너희들은 심판을 받아도 마땅해" 라는 것을, 그것을 심판했음의 증표를 가지고 언약으로 이 땅에 침투한다는 의미에서 물의 구조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희들을 봐주고 있어" 라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8장과 9장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즉 "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준비한 것은, 너희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 사고방식이 심판을 받아도 마땅할 정도로 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을 위함이지, 심판을 받는 너희들을 위함은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 하나님이 골고루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유는? 여기서 나오는 응용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골고루 그런 것을 다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심장도 그렇게 열심히 뛰게 하시고, 또한 산에서는 새가 그렇게 지저귀고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 언약에는 속성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심판과 사랑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이 지금 이런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을 입어서 햇빛과 공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새언약의 완성자는 누구인가? 그러니 이런 구조 안에서 언약이 속성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게 완성되는 언약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새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새언약의 완성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인데 말이다. 여기서부터 어려운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언약이라는 것은, 그 속성이 심판과 사랑, 혹은 긍휼, 용서인데 말이다.
◈ 심판과 긍휼이 어떻게 살과 피로 !! 그런데 성경을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그 속성을 어떤 인물의 피와 살로 바꿀 수 있는 과정을 한 번 설명해보라는 것이다. 그냥 십자가라고 하면 안 되고(ㅋㅋ), 왜냐하면 심판과 긍휼은 추상적인 것인데, 그것은 어떤 감정에 관한 문제라는 말이다. 그런데 살과 피는 실제적인 신체에 관한 문제인데, 그러니 그게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 이름'의 개입으로 !! 여기 중간에 개입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하나님 이름' 인데,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라고 해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을 이루면서, 그 언약이 적용되는 사람은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벨 계통의 말이다. 즉 고난받는 선지자의 아픔과 희생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바로 이 아벨과 사가랴의 피를 받아서 오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피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 라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피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눅 11: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여, 저는 저주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저는 그런 구조 속에 놓여있는 존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른 구조, 즉 주님의 피 속에 들어있는 용서하심의 속성으로 인해서 받았습니다" 라는,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받아들이는 자가 곧 성도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언약 구조와 주님의 속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이 마귀의 주장처럼, 인간들끼리 모여서 지혜를 짜내어서 유지되는 역사의 세상이 아니라, 이미 창세 이전부터 철저하게 주님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12,23 오전 5시에 마침. 대한민국도 철저히 주님 중심으로 움직이니,
1901년 파리에서 태어난 라깡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언어학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폭을 풍부하게 하였다. 1936년 인간의 발달과정에 관한 거울단계에 이론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이후 언어학을 응용하여 정신분석학을 육체와 관련시켜 신경 생물학적 연구의 한 분야로 간주하려는 경향에 반대하면서 구조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정신분석에 적용하였다.
1) 현실계(실재계) - 현실계는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절대로 직접 인식하거나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로, 상상계와 상징계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부분적으로 마주칠 수는 있지만 그 전체, 본디 모습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세계다. 라캉은 이러한 현실계를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적 사항인 결핍의 배경으로 본다.
3) 상징계 - 아이가 상상계를 떠나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상징계의 보편적 질서체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현실계와 철저한 분리를 마무리 짓는 일이다. 외부 사물과 아무런 연관성 없는 기표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를 끊고 자기 폐쇄적인 영역에 머무르며,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징계로 진입은 희생이 따른다. 관계를 끊는 분리는 자신의 본능에서 소외되는 것이며 소외는 결핍상태가 되며 결핍을 통해 욕망이 형성된다. 현실계의 자연에 대한 흔적은 소멸되거나 최소화되고, 언어영역에 진입한 존재인 주체로 남게 된다. 무의식이 형성되는 지점에서 언어로 소통되는 체계의 질서에 따라 욕망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무의식은 원본인 현실계를 잃어버리고 언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매개되어 존재하는 욕망을 생성한다. 욕망의 세계인 상징계에 진입한 아이는 외부 존재인 아버지(사회)라는 금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상징계로 진입한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아버지의 법으로 전치하게 된다. - 독서신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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