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3 / 세대 / 150105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3 - 세대 15,1,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래서 잠언서의 절반 정도가 "지혜가 무엇이냐?" 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될 것이고,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 어리석은 자, 지혜로운 자 !! 잠언서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것이 '대립관계'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유전자에서는 그것을 대립형질이라고 하는데,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성경자체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니 같이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께서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해서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주님께서는 두부를 자르듯이 그렇게 잘라내시는 칼이 있는데, 그 잘라진 것을 제가 '구조' 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지난 시간에도 강의를 했는데, 아주 매끈하게 잘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We are the world" 라고 하면서 하나가 되고 싶은데, 흑인, 백인, 황인, 그런 인종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고 싶은데, 주님은 다른 종족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제3의 종족' 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천국의 종족과 지옥의 종족으로 나누시면서, 물론 우리는 "그것은 죽어봐야 알겠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죽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나누는 구조가 이미 잠언서에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 그리고 그 반대로는 어리석은 자를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내통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의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없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개입인데, 잠언서의 표현대로 하면 지혜의 개입인데, 즉 지혜가 개입되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 지혜의 개입으로 !! 그러면 이것을 다시 이야기해보겠는데, 칠판에 있는 것을 다 지우고 말이다.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에 무엇인가가 침투했는데, 그게 바로 지혜라는 것이다. 즉 "지혜가 침투하니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지더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혜가 침투하면, 그것을 실천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천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참으로 이상하게 들릴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라고 여기니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만약에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버리면, 즉 "니가 그렇게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고, 너도 내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기면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있어" 라고 하는 가능성이 비춰지게 되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지혜를 주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받는 인간들은 오해를 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래, 지금은 내가 부족하지만, 이제부터는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상은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 !! 이것부터 오해하게 되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12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 중에서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것이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그러면 잃어버린 양이 훌륭한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본인도 잃어버린 양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지혜가 개입하게 되니, "나는 창세 전에 예정된 자가 맞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뭔가 찾아가신다는 것이다.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 편지는 필히 수신자를 찾아가 !! "편지는 필히 수신자를 찾아가게 되어있다" 라는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인가? 수신자가 알아서 편지를 받아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지가 알아서 수신자를 찾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지는 수신자에게 오기 전에는 편지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말이다. 받고 나서 비로소 미지의 어떤 분이 자기에게 편지를 보냈음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전화를 받기 전에는 분명히 다른 짓을 하고 있었을 것인데, 그때 자기에게 전화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안다면 귀신인데, 그러니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전화가 걸려 오니까 비로소 "헬로? 누구세요?" 라고 하면서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내가 생각하기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전화를 했고, 그래서 나는 전화를 받는 사람이고, 그래서 전화를 주고받는 관계는, 옆에 자식이 있던 마누라가 있던 간에 모두들 제3자이고, 나는 직접 그분과 통화가 되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말씀이 너희를 찾아간다 !! 그렇게 편지는 필히 수신자를 찾아가는데, 그것을 잠언서에서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전체로 이야기하게 되면 "말씀이 너희를 찾아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씀을 우리를 찾아가는 것이 언어적인 길이 하나 있다고 하면, 일종의 이론적인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 사이에 이론적인 길이 닦여져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실천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교회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데, 있을 수 없는 일로서,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주장이라는 말이다.
◈ 내가 바로 말씀이다 !! 그러니 그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그 길로 "내가 바로 말씀이다" 라고 하시면서 찾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그러면 우리는 열리게 되어있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 뒤에는 말씀의 성취가 꼬리처럼 달려있음을, 그것을 한꺼번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갇혔느니라 !! 바로 이러한 전체를 두고서 곧 '복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것을 두고 '갇혀있다' 라고 하는데, 마치 어떤 캡슐과 같은 곳에 갇혀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구약 때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씀을 지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고 말았는데, 그러니 망하라고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망하지 않으려고 말씀을 지켰는데, 십계명도 그렇게 해서 지키려고 했고 말이다.
◈ 그들은 왜 망해야만 하는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하는가? "구약의 그들은 율법으로 왜 망해야만 하는가?" 라는, 그것이 농담이 아닌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국가를 하나 조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자칭 거룩한 나라인데, 그리고 그들은 안식을 지키는데 열중했고, 할례를 행하는데 열중했고, 요즘 말로는 세례인데,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드리는데 열중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안식일, 십일조, 할례, 구제를 했는데, 그런데 이것이 요즘 어떻게 되풀이되고 있는가? 교회에서 종교형식으로, 즉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은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과 동일한가? 교회에서 하는 것들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 교회에 나가고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어디에 갇혀있는지, 즉 "나는 어떻게 구원에 실패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같이 실패하라고 교회가 만들어져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왜 구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오늘도 새로운 공식이 하나 등장했는데, 즉 "우리는 왜 구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제직회를 하고, 무엇을 해도 실패라는 말이다. 복음을 이야기하면 기뻐하다가, 제직회를 하면 다시 성질을 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에게 매여야하는데 다른 것에 매여있을 수밖에 없는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처음에는 '아멘'을 했는데, 그런데 그 목사가 어떤 예를 하나 들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숨겨진 사생활과 너무나 유사하니, "목사가 나를 치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에 기쁨이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알고 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하, 복음보다 내 몸이 우선이구나. 내 자존심이 우선이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자존심이 우선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이 우선이고, 주기도문을 백날 해봐야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우회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닌지, 그렇게 또 다시 실패를 느낀다는 것이다. 교회에 모임으로서 말이다. 집에서 혼자 도를 닦으면 실패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무 만나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실패가 있느냐는 것이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실패가 있느냐는 말이다. "복음을 아는 나 같이 착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라고, 그렇게나 하지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떡국도 만들어주면서, "왜 이렇게 싱겁게 했어요?" 라고 하는 잔소리도 들어가면서, 그래서 삐쳐서 "이제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그래야 "아하, 내가 실패한 것을 주님이 성공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그 모든 공로를 주님에게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아멘!)
◈ 다른 길에 온 사람이 옆구리를 치니 !!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길도 주님 쪽에서 닦아놓고, 주님 쪽에서 말씀으로 다가오시는데, 그런데 가만히 있을 우리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들도 길을 만들어놓는데, 자기 나름대로 신을 상상해서 말이다. 주님은 제대로 된 길을 통해서 오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길이 아닌 다른 길에 온 사람이 자기들의 옆구리를 치니,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길을 고수하다가 발생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닦아놓은 길을, 주님은 그것을 옹호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을 하시면서 오셨는데, 그러니 인간들이 신에게 가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길과, 주님이 오신 길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 인간이 만든 길에는 유대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천주교, 힌두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한 통속이 되어서, "신은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로서 전부가 하나로, 한 통속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 손에 손잡고 !!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혜가 오면 어떻게 된다고 했는가? 하나의 대립형질로서,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종교는 '손에 손잡고' 라는 것이다. 인권문제에 한 목소리를 내면서, 북한이나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전부가 하나라는 말이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이런 것으로 한 통속인데, 그런데 보수진영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교회와 목사에게 세금을 매기지 마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돈 문제로 한 통속인데, 얼마나 저질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는 옆구리를 치면서 다른 길로 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나올 줄 아시지만 말이다. 우리는 엉뚱한 신, 상상의 신을 만들어놓고는, 그쪽으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도 성경말씀을 가지고 말이다.
◈ 아무리 성경구절을 외워도 !! 선교단체와 같은 곳을 보면 성경말씀을 얼마나 많이 외우는지 모르는데, 인사를 하면서도 서로 성경말씀을 암송하면서 한다는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저보다도 더 말씀을 많이 기억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리 성경구절을 많이 외워도 달리 나오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녹취 '구' - 제가 처음 목사님을 뵈었을 때인데, 어떤 분이 저에게 "이근호 목사는 대구의 선교단체에서 악명이 높은데, 알고 있습니까?" 라고 하더군요. 염려하면서 말이죠. 겨우 20여년 전의 일이네요.) 이미 성경책에 다 기록되어있는데, 그렇게 많이 외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그러니 말씀이 하나의 지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 되신 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외우고 있는 자기 몸을 본인이 사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 바나나 껍질 벗기기 !! 그런 것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바나나'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바나나 껍질에 아무리 색칠을 해도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먹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나나 껍질은 벗기는데, 그리고 그것은 먹는 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껍질이 아니라 알맹이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 껍질을 보고 따진다는 것이다. "메시야인가? 메시야가 아닌가?" 라는 것을 말이다. 즉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자기의 부족함을 채울 수는 있는지, 기도하면 응답은 되는지, 그런 실적을 가지고 메시야를 판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즉 껍질을 벗김으로서, "누구든지 나처럼 자기를 부인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 그러니 우리 다같이 껍질을 벗기자" 라는 것이다. 물론 그 껍질에 미끄러지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닌데, 바나나 껍질은 과학적으로도 아주 잘 미끄러지게 되어있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 3년 동안 올인을 해도 !! 어제 예배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즉 "3년 동안 올인을 해도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는 소리를 얼마나 손쉽게 해버리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3년 동안 재산을 바치고 청춘을 다 바쳐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아예 애초부터 우리처럼 그렇게 바치지 않고 자기가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면, 그게 오히려 기쁜 소식처럼 들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괜히 교회에 헌금하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자기 실속을 챙기는 것이 최고라는 말이다.
◈ 죽음을 증거하는 것이, 곧 생명 !! 그런데 나중에 그들에게 성령이 오게 되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에서 추가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이다" 라는 것 앞에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라는 것이 추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을 합쳐서 보여주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말이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부활은 생명인데, 그러니 생명을 증거하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증거하는 것이 도리어 생명이 된다고 하는 새로운 복음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인데 말이다. 어차피 누구나 다 죽는데, 그 죽는 이유를 미리 앞당겨서 알면 구원이고, 그것을 죽어서 알면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 오지 않게 하옵소서 !!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저는 부자의 입장에 굉장히 안타까운데, 왜냐하면 지옥에 가서 알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 동생들이 여기에 오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하는데, 아마 그 부자 집에 가훈이 있었다고 하면, 조폭처럼 "하면 된다" 라는 것이지 싶은데, 그것이 아니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것이 걸려있든지 말이다. 하지만 그 부자가 지옥에서 가훈을 정한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오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은 와서는 안 될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생을 미래에서 본는지, 현재에서 보는지, 바로 그 차이라는 말이다. 인생을 다 겪고 난 뒤에 보는 것과, 그것이 요즘 유행하는 '미생(未生)' 이라는 것인데, 즉 미생으로 보는 것과 완생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생의 모습이 말이다.
◈ 현재 안에서 미래를 봐야 !!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잠언서의 지혜를 깨어보면 그 안에 완생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즉 미래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여러 번 강조했는데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 안에서 미래를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안에 들어있는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찾아낼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이 미래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끝'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주님이 현재에 새겨놓은 끝의 징후를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끝의 징후를 말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반복인데, 이것을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고 하니, 끝의 증상을 찾는다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이다. 먼저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아래에 있게 함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짜고 치는 고스톱 !! 이게 무엇인고 하니, 마지막 심판 때 그 기준을, 즉 미리 시험문제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종의 반칙을 하신 것인데, 문제지와 그 해답을 자기 백성들에게만 미리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의 다니엘에게 꿈과 그 해석을 미리 알려준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데(ㅋㅋ), 그 어떤 말씀도 인간이라도 저주케 하는데, 즉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구원은 '율법 외에 한 의'로, 화목제물로, 즉 피로 되는 것이지, 말씀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말씀을 얼마나 많이 지켰는지, 그 비율을 높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시는데, 그러니 미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반칙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뭐라고 하시는가?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공평인가?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는 미리 다 알려주고, 그리고 시험문제도 전혀 범위는 벗어난 문제들만 골라서 내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빵점을 맞게 만들고 말이다.
◈ 다음 중 살인하지 않은 사람은? 제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다음과 같음 문제를 내고 싶은데, 즉 "다음 중 살인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1번)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사람, (2번)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사람, (3) 사람을 죽여놓고서 회개한 사람, (4) 주님을 사랑한 사람" 이라고 말이다. 정답은 몇 번인가? 그러니 끝을 모르면 전혀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살인을 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사람을 죽이지 않은 사람이 살인하지 않은 사람인데, 그렇게 되면 탈락이라는 것이다. 정답은 4번인데, 그러니 주를 사랑하게 되면, 주 안에서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다 용서한 사랑인데, 그러니 죄를 지어놓고도 용서함을 받았으니, 그 용서함이 의가 되어서 그 사람은 살인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숨겨진 것을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문제를 내고, 그 해답도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 당신이 메시야임을 설명해라 !!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만남에서 제일 웃기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는 "당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봐라"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출제자이다. 그러니 출제자인 내가 맞다고 하면 맞다, 굳이 그것을 너희들에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수능시험은 출제자에게 그런 권위가 없어서 난리를 쳤지만 말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두 번째로 마귀가 뭐라고 했는가? "당신이 메시야라면 여기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다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시험을 쳐야될 자는 따로 있다. 감히 어디 수험생이 출제자에게 시험을 치라고 하는가?"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물론 요즘은 가정교사를 뽑는데 학부모가 시험을 친다고 하는데 말이다. 30분 안에 문제를 다 풀면 합격이고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라는데, 실제로 그런 학부모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과외교사도 보통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알려고 하지 말라 !! 아무튼 우리는 문제지를 받았는데, 사실 해답은 없고, 아니 우리는 해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지를 주었다는 것은 해답도 같이 주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해답은 무엇인가? "너희들은 무엇을 해도 죄인이고, 실패이고, 알지 못한다" 라는, 그 자체가 해답인데, 그러니 알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알려고 했기 때문에, 즉 선악과를 몰랐으면 되는데, 알려고 하다가, 그렇게 까불다가 일이 조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안다는 조건하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조건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피조물의 운명인데, 왜냐하면 은혜로만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에 말이다. 그래서 피조물의 행위로 인한 그 성과가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와 섞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창세 전부터 있던, 즉 예수님을 주 되게 하신 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인간이 알아서, 안다고 하는 티를 또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더 커지는데, 그것을 안다고 해서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서, 그래서 마귀가 정죄하는 자로서 자기 역할을 또 감당한다는 것이다. 즉 "저 사람은 죄를 지었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마귀가 망한 것도 다 알아서 망한 것이고, 인간이 망한 것도 알아서 망했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주시는 것만 받아서 챙기면 되는데, 즉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면류관도 반납하고 주님만 찬양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나대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대지 마라" 라는 유명한 어록이 또 생겼는데 말이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평생 감옥에 살면서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정리하면 !! 여기서 정리하면, 이렇게 잠언서에서 둘로 나눈다는 것인데, 즉 지혜가 투입되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가 투입되어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눠지는데, 그러면 어리석은 자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가 보는 지혜는 무엇인고 하니까, 선악체계에서의 지혜인데, 즉 "선하면 지혜롭고 악하면 어리석다" 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잘못된 것인데, 그러면 무엇인가? 사랑을 받은 자가 지혜로운 자이고, 아무리 착해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게 참된 지혜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 남방 여인은, 초과적인 미래의 증상 !! 구약의 솔로몬 시대에 솔로몬 왕이 지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누가 왔는가? 남방에서 여왕이 왔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또 이것을 상상해서 스캔들로 만들어서 야사를 쓴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서 에디오피아의 조상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남방 여인이 왔다고 하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기존 인간의, 그게 유대인이든 아니든 간에, 즉 이스라엘이라는 경계선을 초월하는 미래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서는 국경이 의미가 없는데,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게 되어서 나라 자체가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그러니 그러니 초과적인 미래의 증상으로서 남방 여인이 왔다는 것이다. 이 왔다는 것이다. (왕상 10:1)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 그들이 바로 내 지혜의 표적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내가 여기에 있다면, 너희 유대인들은 나를 무시하지만, 남방 여인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인식의 틀을 벗어나서 찾아온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을 헛된 것으로 끝나는 것은 없다. 그러니 반드시 성과를 내게 되어있는데, 지혜가 말이다. 그것은 너희들처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들이 온다면 그게 바로 내 지혜의 표적이 된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상당히 어려운 말씀을 하셨는데, 즉 사람들이 병이 낫고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나서, "야, 보통 분이 아니구나. 내가 믿을 가치가 있다" 라고 해서 믿게 되면,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떡을 떼니 계속해서 떡이 나오고, 고기도 계속해서 주니까, 그래서 "야, 이분은 우리가 임금으로 삼아도 되겠다" 라고 하면서 따지면서 오는 사람들은, 그런 자들은 표적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자들이 있어 !!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지성과 이성으로 따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포함이 되게 되면, 그 믿음 속에는 주님의 순순한 은혜가 아니라, "나도 한 몫을 했습니다" 라는 것이 들어가니, 그것은 구원에서 탈락이라는 말이다. 물론 인간들 치고 따지지 않는 놈들은 없는데, 하지만 주님께서 불러내어서 오게 하시는, 즉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님이 뭐라고 그렇게 좋아서 옵니까?" 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내가 분석하고 따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보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둘둘 말아서 회수하기 위한,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서 깔려있는 말씀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거기에 대한 증인으로서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 자들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오는 것 자체가 표적이 되는데, 그들은 무슨 혜택을 입었는지, 그런 것은 아예 관심도 없고 따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보내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왔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메시야니까 메시야지 !! 그러니 소위 간증집회를 하면서, 그런 간증을 끄집어낸다고 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냥 아무런 일이 없어도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안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간증인데 말이다. 그것보다도 더 큰 간증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무엇을 노리고 복음을 듣는가?" 라고 한다면, "노리기는 무엇을 노린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메시야니 오시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야인 이유를 대봐라" 라고 하면,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가? 메시야니까 메시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부르는가? 그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기가 태어났으니 아버지라는 것이다. 어떻게 따지고 분석해서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부르는가? 요즘 드라마처럼 DNA를 분석해서 99.99프로가 일치하면 아버지라고 부르고 형이라고 부르는가? 그러면 0.001프로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 분석하고 따진다는 것 자체가 !! 그러니 일단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고, 그 다음에 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따지고 저것을 따져서, 그래서 "이제 어디 예수님을 믿어볼까?"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런 것은 치매에 걸리면 바로 끝난다는 것이다. 아까 어머님이 오셨는데, 벌써 가셨습니까? 그렇게 인간이 분석하고 따진다고 하는 것은, 심지어 바보나 강도가 따지고 하는 것도, 그렇게 따지는 것을 칸트는 이성이라고 했는데, 그것 자체가 "이미 나는 선하다" 라고, 그렇게 지혜롭다고 티를 내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한 따짐의 극단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바라바 대신에 예수님을 선택해서 죽이라고 한 민중들이고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따진다는 것이다. 그런 따짐의 반대가 무엇인고 하니, '회개' 라는 것인데, 즉 "주여, 우리가 죄인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따진다는 것 자체가 죄인의 티를 팍팍 내는 것인데, 즉 "제가 예수님을 믿고 30년을 교회에 다녔는데 예수님이 저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다. 우리가 햇빛을 공짜로 받고, 공기를 공짜로 마시고 했는데, 거기에 우리가 세금을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러니 인간은 항상 자기를 선한 존재로 몰아놓고는, "예수님도 저처럼 선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동업자로 여기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다니는데, 즉 "내가 어느 정도 선한지 측정하려고 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체지방을 측정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선함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성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지혜가 와서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인데, 그러면 처음에는 구조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없는데, 지혜가 침투하면서 구조가 생기고, 그 구조의 내용은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인데, 그 둘 사이에는 절대로 교류가 없다는 것이다. 한 쪽은 따지고, 다른 쪽은 따지지 않는데, 그러니 무슨 대화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보니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러니까 말이 통하지 않지!" 라고 하는데(ㅋㅋ), 왜 말이 통해야 하는가? 저와 말이 통하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데,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목격자는 조직이 필요가 없는데, 그냥 "새벽 3시에 흰색 소나타가 치고 달아났습니다" 라고 하면 그만이란 것이다. 목격자끼리 모임을 가져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지, 정부예산을 따낼 일이라도 있는가?
◈ 복음은 간단한데, 성경은 왜 그리 복잡한가?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 주님은 어떻게 설명하시는고 하니, 서로 통하지 않는 두 개의 세계가 완전히 단절되게 갈라지는 것, 그게 미래에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징조인데, 성경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은 간단한데, 성경은 왜 그리 복잡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복잡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그 모든 것들의 대립형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죠?
◈ 왜 '남자'와 '여자'로 구분을?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갈라지는데, 그러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으로 나누어지고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 독특한 의미를 주어야하는데, 즉 여자가 남자를 구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고는 남자가 치고, 구원은 여자 쪽에서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하와가 먼저 따먹었지만 말이다. 그것은 여자는 남자의 소속이기 때문에, 즉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남자의 관리소홀로 보는데, 그러면서도 피해를 입은 여자가 남자를 구원한다는 말이다. (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렇게 되면,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그리고 예수님의 남자와 여자를 사용하는 그 차이점이 또 갈라지게 되니, 또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복음이 어렵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따져보면 참 어렵다는 것이다.
◈ 손 때찌, 때찌 !! 왜냐하면, 우리의 선입관, 즉 우리가 사용하던 원칙들을 그대로 꽉 쥐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때려서 떨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손 때찌, 때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용해야하는데, 그런데 자기 잘남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그것을 떨쳐내는 것이 결단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목욕탕에 갈 때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데, 그러면 왜 그렇게 구분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들 때 전부다 남자로 만들든지 아니면 여자로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구분해서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답변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즉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 외에 달린 다른 답변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미래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여자는 남자 속에 !! 다시 말해서, 미래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교회의 성향을 여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먼저 아담이 있어야 했고, 그 아담 속에서 여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속에 장착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바로 "처음부터 예수 안에 교회가 있다" 라는 것을,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이 일부러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서로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 "즉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 사랑해야되고, 또한 여자는 어떻게 남자를 사랑해야지 행복하게 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왜 행복해야 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그러면 "이왕 있는 것, 서로 행복하게 살면 좋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교재 79페이지에 나온다는 것이다.
◈ 있는 존재가 복을 원한다 !!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사람들은 "이왕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인데, 즉 존재는 '있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존재' 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면 "있음이 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이것은 더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존재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그러니 그 있는 존재가 행복을 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세상적인 용어이고, 성경대로 하면, "있는 존재가 복을 원한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 이라는 글자에서, 그 앞에 붙어있는 '행'을 빼면 복이 되는데, 그러니 있는 것들은 복을 원한다는 말이다.
◈ 복은 팽창하는 것 !! 그렇다면 이 복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1장에 보니 "복은 팽창하는 것이고, 증가하는 것이 복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복을 주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고 채우시고, 또한 땅을 만드시고 채소와 과목들로 채우시고, 바다를 만드시고 물고기로 채우시고 하시는데, 그것이 복인데, 즉 비어있는 공간을 알맹이로 채우는 것이 바로 복이라고 말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있는 세상에 자기가 있으니, 자기와 닮은 인간들을 팽창시키면, 즉 자기 가문과 집안을 팽창시키면, 그게 복을 받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낳으면 복을 받은 것인데, 자기와 같은 유전요소가 많이 팽창했기에 말이다. 그러니 복을 만들기가 참 쉬운데, 불을 끄고 아이를 만들면 되지 말이다. 불을 끄는 것이 귀찮으면 켜놓고 하든지 말이다(ㅋㅋ). 실제로 옛날에는 목사들이 그렇게 해서 자식들이 많았는데, "다 자기가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런데 문제는 에볼라에 걸려서 빨리 죽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5명이 태어나면 4명이 죽는데, 그러면 또 낳으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편리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니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아이가 몇 명이냐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바로 "복을 따내야한다" 라는 것인데, 그 의식이 존재에서 나왔는데, 그러니 존재한다는 것의 방향이 팽창한다는 것은, 그것은 곧 '존재의 팽창' 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말을 사용해서 미안한데, 그 반대말은 '존재의 소멸'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저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 33세에 요절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가수 김광석도 아마 이와 비슷한 나이에 죽었지 싶은데, 요즘 김광석을 추모한다고 난리인데 말이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 접근하다가 그만 하나님으로부터 된통 혼이 나는데, 제대로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 일로 인해서 그 집안에 여자들이 그만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나서서 기도를 해주니 태가 열리면서 비로소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 그러면 그것을 지켜보는 아브라함의 기분은 어떠했겠는가? 아브라함은 싫어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거룩하고 초월적인 것이 멀리 있으면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으면 숨이 막혀서 그만 싫어진다는 것이다. 남자가 조금 떨어져서 "나와 결혼해주겠습니까?" 라고 하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주는데, 그런데 TV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전봇대에 마구 붙여놓고 눈을 흘기면서 "나와 결혼해 줘" 라고 하면, 그것은 일종의 성폭행이지 프로포즈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가치를 지켜줄 때, 그것이 저쪽의 가치로 넘어가면서 자기 가치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 나는 이대 나온 여자야 !! 그러니 거리를 조금은 두어야, "나는 이렇게 잘난 여자야" 라고 하면서 폼을 낼 수가 있는데, 그런데 너무 숨이 막히게 들이닥치게 되면, 자기가 잠식을 당하기 때문에, 그러면 여성으로서의 본인 가치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것이 싫은데, 그래서 거룩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줘야 하는데, 마치 무지개처럼 말이다. 무지개는 멀리서는 아름다운데, 그런데 막상 가보면 어떠한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칙칙할 뿐이라는 말이다. 파랑새도 그러한데, 멀리 있으면 아름다운데, 손에 잡으면 똥을 싸고 냄새만 날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여전히 파랑새라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에게 아름답고 거룩하다는 것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의 아름다움과 거룩을 지켜주는, 그런 개인적인 영역을 보장해주는 조건 아래서 당신을 섬길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악 된 인간들의, 마귀에 속한 인간들의 공통점이라는 말이다. 즉 "나를 숨막히게 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겠는가? 자기가 봐도 자기가 가치가 없어 보일 때, 즉 세리, 강도, 창기, 문둥병자, 유출병자 등등, 이런 저주를 받았다고 소문이 난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자기는 쥐포처럼 바짝 말랐다고 여기니, 주님의 다가오심을 고맙게 여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 간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잘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잘남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역사가 있는데, 바로 그 역사를 지켜줄 때 어떻게 하는가? "나의 자존심을 지켜준다고 하면, 나는 그 신을 나의 동업자로서 여기고 섬길 용의가 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탑'에 얽힌 사연 !! 제가 미국에 강의를 하기 위해서 갔을 때, 기거했던 집이 있었는데, 집이라기보다는 저택인데 말이다. 거기가 '알파인' 이라는 동네인데, 거기에는 그런 커다란 집들만 모두 다 모여있다는 것이다. 옆집은 더 제가 있었던 집보다 더 큰데, 아마 집 건물 길이만 100미터는 족히 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 높은 탑이 있는 집이 있는데, 그 사연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내가 너무 바다를 보고 싶어해서,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바다가 보이게 탑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남편이 자기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미안해서 그 보상심리로서 그 탑을 지어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자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줄 때는 심히 수상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것을 아내가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만 그 탑에서 뛰어내려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었다는 것이다. 꼭 드라마 속의 이야기 같은데, 전설의 고향인가요? 장로님께서 자기 옆집 이야기를 그렇게 해주셨는데, 그래서 그 탑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 집이 제 값에 팔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미국 사람들도 좀 신경이 쓰이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존재가 복을 받겠다는 것은 뒤에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인데, 즉 자기가 그냥 있으면 존재가 소멸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도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 돌은 마구 날아오는데, 그런데 얼굴은 무엇인고 하니, 천사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사도행전 7장에서는 "성령에 충만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라는 존재에 성령이 임하게 되니, 즉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복도 더 이상 기대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미 주님이 주시는 축복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 네 번째 사나이를 주목하라 !!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갔을 때, 네 번째 사나이가 같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은 어떠했는가? 온도를 측정해보니 18도인데, 막상 집어넣은 사람은 뜨거워서 죽었는데 말이다. 만약의 다니엘의 친구들이 "지금 뜨거울까?" 라고 생각한다면 불에 타서 죽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네 번째 사나이를 주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단 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그 원리가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만 보고 땅인지 물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뛰어갔는데, 그것을 다른 제자들이 보니 웃기도 않는다는 것이다. 땅이면 몰라도 물 위를 그렇게 걸어가니 말이다. 이것은 마치 디즈니 만화동산 같은데, 왜 고양이가 쥐를 쫓아가다가 보니, 그만 절벽 위도 그렇게 뛰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깨달은 다음에 곧 바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만 말이다. 그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인데, 그만 자기를 바라보니, 즉 주님의 존재가 아닌 자기 존재를 바라보는 순간 물 속에 빠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 물에 빠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천국에서는 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빠지지 않아야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물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물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도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이 물에 빠진다는 것은, 나는 나를 보는데, 너희들은 너희들만 본다" 라고 하는, 그게 예수님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 마귀는,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서 !! 그러니 처음부터 존재는 없었는데, 그런데 마귀가 그 존재를 부각시킴으로 말미암아서 마귀는 무엇을 지우려고 하는고 하니, "너는 절대로 죽음에 빠져서는 안 돼. 너는 말씀을 지켜서 착하게 되어서 복을 더 받아야만 돼"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계신 죽음의 자리, 저주의 자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자꾸만 앞만 바라보게 해서, 근본적으로 구원을 차단시키는 짓을 마귀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수 인순이가 '거위의 꿈' 이란 노래를 리메이크를 해서 다시 불었는데, 그 가사에 보면 "나는 꿈이 있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제일 싫어하는데(ㅋㅋ), 우리는 그러한 꿈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의 꿈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코리안 드림(?)이 바로 우리 자신인데, 즉 우리는 주님의 꿈으로서 이 낯선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멸망을 당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언제 꿈이 없어서 부도가 나고 망하는가? 영업사원들을 보면, 아침에 출금만 하면 모두가 다 꿈을 가지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일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퇴근시간에 되면 그만 미생이 되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술집에서 한 잔을 하는데, 그리고는 비틀거리면서 집에 들어와서는 "그래도, 꿈은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악마가 존재로서 막아버리는데, 그래서 우리가 "나는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2,000년 기독교 신학이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니 말이다. "우리는 꿈이 있어요!" 라고, 그것을 긍정해달라고 하기에, 그리고 교회는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돈이 되고 유지가 되니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는데, 즉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라고, 그렇게 구라를 쳤다는 것이다. 그런 구라 때문에 김구라가 공황장애가 왔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는데, 하지만 도대체 그게 뭐냐는 것이다. 가봐야 돈에 환장한 사람들밖에 없는데 말이다. 이제 교재 79페이지를 살펴보자. ** 서양철학에서는 중세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기가 죽어지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이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했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이 바리새인들의 죄가 지나간 그들만의 죄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죄도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바리새인들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만 달랑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인간들이 성향을 같이 모아야지 그 사건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그렇게 다같이 모아놓은 것을 두고 '세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어떤 특정한 인물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즉 "빌라도를 본받지 말라. 바리새인들을 본받지 말라" 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분위기가,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분위기인가?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한 것을 가까이 하고 악한 것은 멀리하는, 즉 "선을 챙기면 구원시켜준다" 라는 것이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너는 너의 선으로 돈만 따내라 !!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물은 것도 역시 이러한 방식인데, 즉 "내가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해서, 내 손으로 영생을 따내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너는 너의 선으로 돈만 따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돈만 따냈잖아. 니가 착해서 복을 받았다고 했잖아. 그러니 니가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스스로 철폐시켜라. 너의 모든 부를, 즉 니가 축복의 증거물이라고 여기는 것을 다 치워버리고, '나는 아무런 돈도 없는 자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나를 따라오면 영생이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부자는 그 소리를 듣고 근심하면서 유턴을 하고 말았는데, 제발 유턴을 할 때 깜박이를 좀 켜고 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ㅋㅋ).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니 선을 모으고 모으면, 그게 나중에 영생을 따내는 티켓이 된다는 것인데, 마치 쿠폰처럼 말이다. 모아놓으면 나중에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하나 서비스로 받을 수 있듯이, 그렇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자체가 바로 세대라는 말이다.
◈ 신은 존재한다 !! 그래서 신학자들이 어떻게 하는가?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목사들이 목회를 할 수 있는 정당성을, 그런 이론적인 체제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 어떻게 목회를 하면 됩니까? 신학자들이여, 거기에 필요한 성경구절과 논리적인 구조를 제공해주세요" 라고 해서, 그래서 신학자들이 내놓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은 존재한다" 라고, 그것을 내놓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 인간들은 신의 존재만큼 고상하지도 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신처럼 되고 싶은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꿈이 말이다. 그런 꿈이 되어서 질서체제가 잡히게 되는데, 즉 계급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말이다. 그러니 신의 존재에 접근한 사람은 선비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고, 그리고 개망나니 같은 사람은 육체적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서 신에게로 인도하는 이들을 먹여 살리는 계급으로, 그렇게 정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나라의 유교적 봉건사회와 비슷한 것인데, 즉 양반이 있고 쌍놈이 있다는 것이다. 양반은 관리직에 있어서 시를 읊고 학문을 연구하고, 반면에 쌍놈들은 농경사회이니 농사를 지어서 생계에 필요한 기초재료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목사님, 동양학은 어떻습니까? 가락교회에서 강의를 하고 나면 거기 계시는 김 집사님과 약 한 시간동안을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강의했던 것을 다시 주고받고 하는데, 그분이 "목사님, 동양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묻는다는 것이다. 공자나 노자 등에 대해서 말이다. 동양학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맞지 않고 과거 농경시대에 맞는 것인데, 농경시대에서는 존재이니까, 즉 신의 존재, 즉 최고의 존재에 대해서 합류하기 위해서, 여기에 몰두해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계급이 신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신의 질서, 즉 자연질서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질서에 맞는 문자나 법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국가가 통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통치자를 위해서 신에게서 먼 사람들은, 즉 신의 존재와 먼 망나니와 같은 사람들은 힘들게 노동해서 이들에게 곡식을 제공하는 것, 그게 동양철학의 정당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공자나 맹자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노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주어라" 라고 하는, 그런 소리라는 것이다.
◈ '둔스 스코투스'의 경우에 !! 그런데 이게 바뀌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바뀌는고 하니, 물론 유럽도 처음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봉건사회이니 말이다. 그렇게 신이 존재한다고 하다가, '둔스 스코투스' 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듣는 분들이 짜증을 내는 것을 아는데,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ㅋㅋ). ------------------------------------ 이 양반이 봉건사회가 뒤집어지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데, 신이 존재하면 인간처럼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자이니 말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이 인격자라는 소리를 여러분도 많이 들었지 싶은데,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우리 인간의 인격을 신의 인격에 갖다 붙이느냐는 말이다. 인간이 신을 어떻게 해석해서 하겠다고 하는 것은 따지는 것인데, 하지만 아까 뭐라고 했는가? 따진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리나 창기가 무엇을 따졌는가? 그들은 신학박사 학위가 없어도, 그래도 그들은 낙원에 갔다는 것이다. 반면에 따지는 인간들은 어디로 갔는가? 지옥에 갔다는 말이다.
◈ 지정의(知情意) !! 신에게는 지정의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자주 듣던 이야기이죠? 지정의(知情意), 이 세 개가 모두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세 개나 되니까 복잡한데, 시어머니가 세 분이나 된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도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인데, 그렇게 똑같이 섬겨야 하는데, 그러니 더 복잡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성부를 섬기니 성자가 삐치는 것 같고, 성자를 섬기니 성령이 삐치는 것 같고 말이다. 여기서 '지정의(知情意)' 라는 것은, 먼저 '지' 라는 것은 믿음의 지식이고, '정' 이라는 것은 기도하는 감정이고, 그리고 '의'는 의지인데, 이것은 전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공부를 꾸준히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면 구원을 시켜준다고 하는 일종의 방정식인데,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라라는 말이다.
◈ 다시, 스코투스가 말하기를 !! 신학교 때는 기껏해야 이런 것을 배웠는데, 중세 때 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스코투스가 하는 말이, 즉 "신이 이렇게 인격적이라고 하면, 신에게는 지정의가 있으니 신도 의지가 있는데, 그렇게 신에게 의지가 있으면 우리 인간도 신의 형상을 입었으니, 우리 안에도 신의 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그러니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곧 신의 의지가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이 말도 안 되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 당시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것인데, 즉 "장사해라. 돈을 벌어라. 왜냐하면, 그것이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무역과 장사를 하는 상공인들이 뜨면서 군주제가 무너지고 의회중심제로 되어버리고, 그러면서 새로운 중간계층인 부르주아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 자체의 질서가 바뀐다는 말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지정해주고 배려해준 위치가 대대로, 그것이 세습제로 내려왔는데, 그것이 신의 질서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는 돈을 가진 사람이 최고로 복을 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가진 사람이 최고라는 말이다.
◈ 돈이 최고 !! 특히 동양에서는 옛날에 장사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물론 자동차 안에서는 차마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못했는데, 마침 그분이 식품공장을 했기에 말이다(ㅋㅋ). 그것이 삼성의 이건희가 되던 누가 되던 간에, 난을 치고 시를 외우고 해야 사람이지, 그런 것을 해서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데, 그리고 보험회사의 경우에도, 보험금도 자기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지급하면서 온갖 생색을 다 내고 말이다. 그렇게 장사를 하는 것은 쌍놈들이 하는 짓인데, 하지만 이제 사회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만 벌면 양반이 되는 시대가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데, 능력도 신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을 버는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런 게 없으면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시대가 바뀌었는데, 그런 상공인들 위주로 먼저 영국이 바뀌고, 제일 마지막에 독일이 바뀌는데,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그 꽃이 미국에서 피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돈이면 다 되는 시대가 왔다는 말이다.
◈ 당연히 돈을 벌게 해주는 신이 최고 !! 그렇다면 이제 신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을 믿으면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돈을 벌어야 사람대접을 받으니, 당연히 돈을 벌게 해주는 신을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신의 말씀대로 살면, 물론 말씀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음으로 양으로 돈을 벌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원래 불교의 경우에, 그것이 인도에서 만들어질 때는, 얼른 죽어서 해탈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잠시동안이고, 본격적인 시작은 죽어서 해탈하는 것부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소유, 즉 무소유로 사는 것이 불교의 정신이란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불교에서 뭐라고 하는가? "이웃에게 구제하세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구제하면 그것이 업이 되고, 그 업이 이 땅에서 현찰로 바뀐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절에 가서 돈을 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돈을 내는 것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나 절이나 모두 똑같은데, 교회에서는 십일조만 제대로 내면 어떻게 된다고 하는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내면, 하나님께서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는 동시에 집에 가서 창고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 하지만 누가복은 12장에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뭐라고 하셨는가?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에는 걱정을 늘어지게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잘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만 누구를 데리고 가는가? 주님께서 그 영혼을 오늘밤에 찾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나나 껍데기를 제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봐야 어떻다는 말인가? 그것은 어차피 버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껍데기를 화려하게 색칠을 하고 포장을 해도, 그것 때문에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 되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은 껍데기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생명이라는 것이다.
◈ 교회가 그만 예수님을 가리는 장애물이 !! 아무튼 중세에서는 신학자들이 "교회가 어떻게 하면 잘 될 것인가?" 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는데, 그러니 교회가 그만 예수님을 가리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번듯한 교회인지를 말이다. "니는 어느 교회 집사이고? 그렇나? 좋겠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는 오자마자 다 권사가 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나는 무슨 교회 집사다. 권사다. 장로다" 라고 되는데, 그게 나중에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신용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은행에서 대출할 때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인형 목조르기 !! 그렇다면 이런 세대에서 가난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가? 사실은 가난하게 사는 인간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서, 즉 자기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서 나중에 자기가 진짜로 노리고 있는 부자반열에 들어설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안 되는데, 참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망가져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인데, 그러니 참기는 무엇을 더 참느냐는 말이다. 참는다는 것은, 일본말로 '요시' 라는 것인데, 즉 '두고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는 것에는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다. 어제 설교를 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았는데, 기도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인형 목조르기' 라고 했는데, 즉 "제가 이렇게 해도 은혜를 주지 않을 겁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심보인데, 새벽마다 인형을 가지고 와서 말이다. 또 금요일에는 밤새도록 목을 조르고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주시고도 욕을 얻어먹는 꼴이라는 것이다. 밤새도록 편안하게 잠을 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이 성적이 내려갔다고 또 목을 조르고 말이다.
◈ 잠언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 !! 그러면 잠언서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해달라고 하면, '자유' 라고 할 수 있는데, 어디서부터 자유인고 하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라는 것이다. 즉 "내 관리는 이미 내 선을 떠났습니다" 라는 것인데, 주님께서 숙제를 알아서 다 주신다는 말이다. 만약 자기가 고기를 잡는다고 하면, 그것은 고기를 잡는 숙제를 주셨다는 말이다. 농사를 지으면 그런 숙제를 주신 것인데, 물론 농사를 지으면서 허리도 박살나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사람은 아이를 키운다고 스트레스를 받고 말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숙제인데, 즉 "니가 그렇게 고생해도 그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다" 라는 것이다.
◈ 욥의 '떨어짐', 그러나 !! 저는 그런 고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욥' 이라고 생각하는데, 욥이 처음부터 가난했으면 고생이 되지 않았을지 모르는데, 그런데 이 양반이 천하에서 부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만 알거지가 되고 말았는데, 그리고 자식이 열 명이었는데, 역시 자식들도 하루아침에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 마누라만 남았는데, 물론 그 마누라도 욥에게 저주를 퍼붓고 말이다. 바로 그 떨어짐, 그 추락이 곧 고생인데, 우리 인간의 고생은 없어서 고생이 아니라, 마음의 고생이 고생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정도로 비참할 이유는 없는데, 내가 이렇게 될 정도로 남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닌데, 그렇데 왜 이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 추락을 영원히 가지고 가는 곳이 어디인고 하니,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면 자기가 추락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 모여있는데, 아예 처음부터 추락한 사람은 다 천국에 있고 말이다. "주여, 이게 웬 은혜입니까?" 라고 하는 사람은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기본적인 이것은 보장해주시고, 이것까지 보장해주시면 보은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기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계속 추락을 하는데, 이 땅에서 다 못하면 지옥에 가서까지 한다는 것이다.
◈ 원래 너의 수준은 그것이야 !! 주님은 "원래 너의 수준은 그것이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여,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가 십자가를 진 것이 기준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내신 출제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십자가를 지라" 라고 하시는 것은, "나처럼 출연하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그러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눅 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제자들이 "천국에 가면 누가 높습니까?" 라고 하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어린아이에게는 누가 높고 말고 하는 게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어른들이 모두 채워주니 말이다. 그렇게 다른 누군가가 채워줄 정도로 어린아이는 낮아진 자인데, 밑바닥에 바짝 엎드린 말이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니가 더 나빠 !! 한 여자가 울면서 주님의 발을 향수를 뿌리면서 씻겨드릴 때,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저 여인이 행실이 나쁜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그래, 저 여자가 행실이 나쁜 것이 맞다. 하지만 저 여자는 저렇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것을 숨겨놓은 니가 더 나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골적으로 주님에게 까이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숨기고 까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서를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고,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 일단, 직장생활을 해봐라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잠언은 이 사회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즉 "집에서 잠언을 공부하지 말고 사회에서 일을 해봐라. 직장생활을 해봐라. 그렇게 일해보면서, 이 사회가 그냥 사회가 아니라 세대인지,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지, 그것을 몸소 뛰면서 체험해봐라. 그리고 거기서 일찌감치 추락해라. '내가 돈을 한 푼 벌기 위해서 이 정도까지 일을 해야하는가? 이렇게 욕을 얻어먹으면서 일을 해야하는가? 미생이란 소리를 들어가면서 말이야' 라고, 그것을 체험해봐라. 그것이 너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보다도 더 심한 모독을 받았는데, 하나님이지만 피조물에게 뺨을 맞으시고, 모든 영광을 다 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가 되시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른 길로 가면 안 되는데, 오직 떨어지고 추락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십상시를 물리쳐야 !!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구원의 실패가 곧 구원의 성공이다" 라고 했는데, 즉 목사가 목회에 실패할 때 비로소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목회에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목사는, 그런 목사는 지옥에 갈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말이다. 목사가 자기를 예뻐해주는 교인들에게 둘러 쌓일 때, 그때 자기는 그만 스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천지가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가는데 말이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것처럼, 마치 착한 짓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령으로 헌금을 한다는 것은? 십자가 마을을 떠난 분들이 참 많은데,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성령으로 헌금을 하면 헌금이 아닌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헌금이 무슨 의가 되느냐는 말이다. 성령으로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오히려 더러워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한다고 해서 거룩한 것이 아닌데, 오히려 거룩한 것이 없음이 티가 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면 말이다. 그러니 "이 헌금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성령으로 헌금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주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것을 !! 헌금을 하면서 벌벌 떨고 있는데, 헌금을 하면서도 아까워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심보, "지금 아이의 레슨비도 내야하는데?" 라고 하면서 아까워서 벌벌 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하면 30배를 채워주시겠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채워주지 않으면 돌려달라고 고소라도 하겠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기대한다는 것이 문제인데,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주님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힘이 모자라서 하지 못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기대 자체의 방향이 잘못되었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한 번 살아봐라. 살아보면서 추락해봐라. 그리고 어리석은 자가 달리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지혜에 의해서 말씀화가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제 마지막으로 !!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우리가 여기에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는 누가 있는가? 점선으로, 이렇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혜는 예수님을 보고 주셨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지혜 그 자체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로 나누셨는데,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지혜를 우리에게 주신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지혜로워지려고 애를 쓰고,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지정의를 동원해서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신이 지혜로운 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은 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동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운 자'가 되는데, 그러니 우리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지혜롭지 않은 우리를 주님이 지혜가 되셔서 우리가 지혜자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주님이 그런 식으로 사용하셨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솔로몬을 찾아온 남방 여인이라는 말이다.
◈ 다시, 남방 여인의 경우에 !! 남방 여인이 찾아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남방 여인이 솔로몬을 찾아왔을 때, 그것은 바로, "내가 찾아온 것은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라는 것은 솔로몬 당신 위에서 통하는, 즉 여호와 하나님과 당신과 내통하는 노선 안에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남방 여인이 그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찾는 우리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그 지혜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것이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 주님의 뜻대로만 사용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란 말이다.
◈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합니까? 강의를 하면서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앞으로 기도를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는 것인데, 기도는 살아보면서 느끼는 체험으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지, 기도문을 작성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살아보면 깨지고 까이는 것이 있는데, 주님에게 말이다. 그것을 모아서 기도하면 되는데, 물론 주님에게 까인 적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까인 적도 없는데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나나 껍질에 색칠하는 것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까였는데, 그렇게 까인 것을 벗겨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죄 많은 여인이 향수를 예수님의 발에 뿌리면서 울 때, 그런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알기에 아낌없이 향수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향수병을 깨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데, 그렇게 한다고 새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사랑을 받았기에 현 생활에서 표현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릇을 깨도, 탱큐 !!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그릇을 깼다고 하면, 그러면 처음에는 "에이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라고 하다가도, "아하, 그게 아니지. 구원을 받은 게 중요하지. 이까짓 그릇이 무슨 대수라고, 그릇을 타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그릇이 깨진 것은, 이 그릇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라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이번에는 더 비싼 그릇 하나를 또 깨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꾸 깨도 괜찮다는 말이다(ㅋㅋ). 그것이 곧 기도내용이 되는데, 그릇도 아무나 깨는 것이 아닌데, 창세 전에 예정된 자만이 그런 혜택을 누린다는 것이다. 주님의 편이기 때문에, 즉 편지는 반드시 수신자를 찾아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알아먹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알아먹는지,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고, 우리는 우리의 일에 대해서 신경을 뚝 끊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매일같이 살려내시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자신을 굳이 살려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도 우리는 그런 숙제를 주님에게 담뿍 받아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이 세상 가운데서 지혜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우리가 그 지혜의 자녀로서 생산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는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의 죄악을 지적해주시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언제가 말씀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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