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6 / 거꾸로 신앙 / 150216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6 - 거꾸로 신앙 15,02,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율법과 성령 !! 오늘은 교재 88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거기에 보면 '율법과 영'에 대해서 나와있는데 말이다. 일단 우리는 '영' 이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구약의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신약성경의 순서로, 그렇게 영이 마지막에 온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종말의 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영이 왜 와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도 크지만, 성령을 주셔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왜 처음부터 성령을 보내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성령이 오시게 되면 깔끔하게 문제가 해결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성령을 보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성령의 반대말을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율법으로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를 서로 대비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하나님 속에 그만 서로 반대가 되는 두 가지 속성이 같이 있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서로 충돌되지 않겠는가" 라는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속에 반대되는 두 가지 속성이 같이 들어있으니 말이다.
◈ 성령께서 왜 처음부터 오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성령이 왜 처음부터 오시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율법 때문에 그러한데, 율법이 오게 된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셨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만약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자식아, 의인은 믿음으로 된다" 라고 했을 때, 아들 이삭이 "그것 참 쉽네요. 저도 믿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필요가 없는가? 율법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데, 즉 굳이 율법이 와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믿으면 되는데, 오늘날 교회들처럼 말이다. "여러분, 믿으세요" 라고 하면, "예,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란 것이다. 굳이 성경책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게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되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율법이 와야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서로 구조가 맞지 않는데, 자기가 믿겠다고 하는데 율법이 왜 필요가 하느냐는 것이다. 믿지 않겠다고 하면 몰라도, 믿겠다고 하는데 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되겠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왜 율법이 추가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했는데, 짜장면이 있고 젓가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으려고 하는데 식당주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짜장면을 먼저 드시면 안 됩니다. 군만두부터 먼저 먹고 짜장면을 드세요. 이제 곧 군만두가 나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냥 짜장면을 먹고 싶은데,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왜 먹고 싶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먹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 믿겠다고 하는데, 왜 율법이 왔는가? 이제부터 그 문제를 한 번 풀어보자는 것인데, 왜 군만두를 먼저 먹고 짜장면을 나중에 먹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 "믿겠다고 하는데, 왜 율법이 왔는가?" 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듯이, 430년 이후에 율법이 왜 왔느냐는 말이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 문제를 우리가 생각하게 되면, 오늘날 교회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게 엉터리라는 것이 들통나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나 의, 또한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 언약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면 되는고 하니, 사람이 이렇게 있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의를 줄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선악과와 생명나무 !!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인간이 소유하라고 준 것이 아닌데, 인간은 의를 소유할 수 없는데, 만약에 소유할 수 있다고 하면 진작에 "이런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빨리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치료를 받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으면 안 되니까, 그만 그것을 치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악과를 따먹으면 되지 않는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도 영원히 오래 살면 왜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선악과를 따먹든 말든 오래 살면 되는데, 죽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되는데, 어차피 먹으라고 준 나무이니 말이다. 그런데 뒤늦게 따먹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생명나무를 심지 말면 되는데, 심어놓고는 왜 철거하느냐는 말이다.
◈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생명나무, 왜? 그러니 왜 생명나무가 잠시 나타났다가 그만 사라지고 마느냐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여부에 따라서 있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도대체 생명나무와 인간이 서로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생명나무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뭔가가 분명히 있는데, 사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특히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신약에 와서 다음과 같이 해결하고 있는데 말이다.
◈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 !!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 의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삭이나 야곱을 그것을 오해하기를,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믿기만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그게 아브라함이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결심을 통해서 의롭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역시나 할 수 있기에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가 받아드릴 수 있는 의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단지 아브라함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보고, "아이쿠, 의가 나타났구나.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라고,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율법이 추가적으로 주어져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지고 말기에 말이다.
◈ 끝에서 시작하자 !!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렇다면 이 나타난 의를 모두 깔끔하게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어디로 가야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끝장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끝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데, 끝 지점에서 말이다. 인간이 중간 지점에서 믿어서 의롭게 될 수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야하는고 하니, 그게 끝 지점이라는 것이다. 왜 끝 지점인고 하니까, 거기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다 사라진 지점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행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음이 다 박살이 난 지점에서 다시 시작을 하게 되면, 여기서 의가 생겨나게 시작한다는 것이다.
◈ 성화론은 전혀 방향이 맞지 않아 !! 그래서 성화론은 전혀 방향이 맞지 않는데, 즉 "내가 예수를 믿었다. 성화가 되어야지" 라고 하는 게 말이다. 그 화살표 방향이 잘못되었고, 이제 성화고 뭐고 간에 다 끝났다는 것이다. 저주이고 멸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저주를 받은 데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의가 나오지 시작하고, 하나님의 거룩이 나오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의 일은 인간세계 자체를, 그 전체를 끝판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을 끝장나는 세상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발달시켜 왔다는 말이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한다면, 신앙생활은 끝에서부터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끝까지 가지 않았으면 신앙생활은 개시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완전히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상황에서 이제는 누가 다루시는고 하니, 주님께서 손을 대신다는 것이다.
◈ 방앗간 주인 왈(曰) - '나가 놀아라' !! 명절이 되면 방앗간이 대목을 맞이하는데,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가보면, 떡을 만든다고 하얀 쌀을 가지고 가는데, 그러면 방앗간 주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쌀은 여기에 두고 아주머니는 좀 나가있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쌀을 담은 다라이는 줄을 써있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한 곳에 모여있다는 말이다. 그때 들어가면 안 되는데, 나가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나가있어야 하는가? 쌀을 곱게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쪄서 떡을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앗간 주인의 소관이란 것이다. 즉 신앙생활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보고 "나가 있어라!"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만하게 나가 있을 인간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나가 있을 수 없는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나가 있어라" 라는 것이 바로 성령인데, 그렇게 성령은 끝이 되어야 오시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성령이 오시는가?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닌데,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죽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오신다" 라고 하면 정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말인데,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이 땅에 인간은 없다" 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대표적 인간이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없으니,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인간 만들기에 나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나가 있으세요" 라는 것인데, 쌀을 빻고 떡가루를 빼는 것은 성령의 소관인데, 우리의 소관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끝난 상태이니 말이다. (녹취자 - 저희 가게 옆집이 떡집인데, 명절에 좀 도와달라고 해서 알바를 해봤는데, 너무 힘들었죠. 기계로 곱게 빻아도 손으로 비빌수록 더 좋다고 해서, 그래서 양손이 거의 마비가 될 지경이었는데, 새벽에 서너 시간만 했는데도 말이죠. 그러니 떡집 주인의 손이 곱든지 하면, 초보이거나 떡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ㅋㅋ). 주님의 손은 참 두껍겠지요.)
◈ 중간에서 성령을 받는 법은 없어 !!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는가? 율법으로 하다가 안 되니 그래도 구원은 받아야하겠고 말이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니 그 대체물을 찾는데, 그래서 성령을 주신다고 하니, 성령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아직 끝에 다 오지 않았는데, 중간에 성령을 받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인데, 그렇게 모르는 것에서 나오는 모든 시도를 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그런 구약 중의 하나가 우리가 공부하는 이 '잠언' 이고 말이다. 여기서 교재 89페이지를 보자. ** 잠언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땅에서 장수한다' 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불의 구조에서 보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땅은 옛 땅에 불과해요.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 그렇게 장수가 된다는 말씀도 있고, 또한 부자가 된다고도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장수하는 것과 부자가 된다는 것, 그렇게 양쪽이 다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렇다는 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인데, 그런 자들이 이 땅에서 장수한다는 것이다. 제가 처음에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아브라함의 경우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된다고 하니까, 그의 아들이고 손자이고 간에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그까지 짓 것 내가 믿지 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고 하니, 자기들도 손을 들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땅에서 장수한다" 라고 하니까, "그러면 나도 경외하지 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예 자기 이름을 경숙에서 경외로 바꾸어 버린다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경외해서 장수를 하겠다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앞으로 그러면 안 된다. 알았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그냥 주셔도 되는데, 즉 "이런 선악과를 그만 따먹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살아요. 이게 생명나무이니, 죽어도 사니까, 그러니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서 살아라.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고, 알았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예, 앞으로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이미 선악과를 다 따먹었는데, 그러니 더 이상 실수를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왜 생명나무를 현장에서 그만 치워버리셨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두면 자식 대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그러면 인간의 나라 자체가 천국이 될텐데 말이다. 그런 간단한 방법이 놔두고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치워버림으로서, 하나님도 힘들고 우리 인간도 힘들고, 그렇게 서로 고생을 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 복잡한 회로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느냐는 말이다.
◈ 인간은 끝을 싫어해 !! 그것을 바로 우리 인간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악과적인 인식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셔도 우리 인간이 100프로 오해할 게 뻔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주셔도 말이다. 그래서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런 끝으로 갈 의향도 없고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끝을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끝에서는 결국 자기가 그만 사라지기에 말이다. 사람이 죽은 것을 왜 두려워하는가? 죽으면 자기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싫어한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좋은 것은,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인데, 즉 "내가 없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론' 이라는 것을 파보면, 결국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그 '있음'으로 인해서 의미론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생존과 상관이 없는 몸짓이 !! 어제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이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먼저 하는 생존하려는 몸짓이 있는 반면에, 그런 생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몸짓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호적 표현, 혹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말인데, 반면에 생존하려고 하는 표현은 동물들이나 꽃의 경우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기호적 표현이나 상징적 표현은 인간들만이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는 인간 자신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자기를 분석해도, 왜 그렇게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성 말고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을 욕구, 혹은 욕망이라고 하는데, 이 욕망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이것을 '무의식'에서 나왔다고 한다는 말이다.
◈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 무려 90퍼센트 !! 이 무의식은 인간이 모르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은 '의식' 이라는 평지에서만 다루는 것이기에, 무의식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의식은 꿈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그러면 꿈이 무의식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무의식이 꿈에 의식 흉내를 내면서 뒤죽박죽 나온 것으로 봐서, 의식에서 그렇게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으니, 의식의 반대쪽에는 무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무의식이 무려 인간 행동의 90프로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속에 있는 암흑물질이고 블랙홀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 밉다" 라고 하면, 그 이유를 대라고 하면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의식단계에 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언어가 욕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제가 지난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평생을 천심으로 살았는데, 그런데 욕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욕이 어디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욕이 나오고 화가 나고, 그래서 그 이유를 대라고 하면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도 어쩔 수가 없는데, 그것이 90퍼센트라는 말이다.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협회에서 발표한 것인데, 인간행동의 90퍼센트는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 '주체정립' 이라는 변종개념 !! 그래서 사람들은 참지를 못하고 이 무의식을 연구했는데, 무려 인간행동의 90퍼센트가 무의식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래서 그게 밝혀졌는데, 그것이 바로 '주체정립' 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활동이 말이다. "이게 나일까? 아냐, 이게 나야" 라고 하는, 그것이 주체정립인데, 그런데 그것이 확정이 되지 않으니, 그것을 '변종개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종' 이란 것은 그렇게 좋은 이미지가 아닌데, 변종이 되면 주로 사고를 친다는 것이다. 박테리아 변종도 그러한데 말이다. 그러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사람이 아주 작은 행동을 해도, 그것이 주체정립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체정립이 마감이 되겠는가? 5년 뒤에 "이것이 나다" 라고 하면서 정립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안 되는데, 그래서 인간이 변종 박테리아이고 변종 애벌레라고 할 수 있는데, 자꾸만 변한다는 것이다. "아니, 나에게 이런 면이? 이런 잘못이? 내가 이런 인간이었나?" 라고 하면서 자꾸만 바뀐다는 말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인간을 지구의 피부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다(ㅋㅋ).
◈ 엉 엉 엉 !! 그러면 꿈을 꾸지 않고 무의식이 나오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그것이 바로 울음을 터트릴 때라는 것이다. 왜 장례식장에서 보면, 유족들은 울지만 다른 사람들은 울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식은 죽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래도 마음을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제가 지금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렇다고 하면 그런 말조차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언어가 그만 절벽에 부딪치는데, 즉 어떻게 언어로서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제일 약할 때가 언제인고 하니, 여자가 울 때인데, 오빠가 누이동생에게 항상 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누이동생은 틈만 나면 울 준비를 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오빠야, 내 부탁을 좀 들어줘잉!"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오빠는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울음은 생존의 무기 !! 그래서 이러한 울음을 연구한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울음은 생존의 무기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아이들과 여자는 울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논문도 있는데, 즉 울음이 남자의 힘보다 더 강하다고 것이다.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렇게 울어도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미모라는 것이다. 못생긴 사람이 울면 더 구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디서 우노?"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예쁜 것들은 울어도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뜯어고치려고 한다는 말이다.
◈ 하지만 인간은 끝을 모르기에 !! 그러면 인간이 왜 모르는가? 왜 그렇게 주체의 정립이 되지 않고, 변종 박테리아처럼 변하는고 하니,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인간은 끝을 모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가 중간지점에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중간에 있으니, 그 중간에서 해답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방앗간 주인이 열심히 쌀을 빻고 있는데, 그런데 "떡은 언제 나옵니까?" 라고 하면 주인이 뭐라고 하겠는가? "지금 말고, 나중에 떡이 나오면 그때 오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떡은 언제 나옵니까?" 라는 것이, 그것이 바로 자기 성경구절을 좀 지켰다고, "구원은 언제 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입에서 구원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사람은 아직 끝 지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질에 급해서 그런지 몰라도, 끝으로 가기 이전에 어서 천당으로 서둘러 가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럴 것 같으면 진작에 주님이 생명나무를 주셨지, 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셨느냐는 것이다. 끝을 모르는 자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끝에 가야만, 생명나무를 !! 그러니 "생명나무를 줄 게.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끝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니 끝으로 가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끝에 가서 생명나무를 주겠다는 것인데,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끝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것은 거꾸로 시작하면 되는데,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말이다. 즉 "나가 있어라!" 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피어나고 나타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율법이 아니야. 나의 행함이 아니야. 결코 아니야. 나의 성실함도 결코 아니야. 이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고, 하나님의 의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끝에 가서 주시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그것을 성육신의 생애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끝을 보여주는 생애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생애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곧 율법 !! 그렇다면 이제 율법 이야기를 해보면, "목사님, 율법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보는데, 즉 "예수님의 생애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곧 율법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방앗간에서 나가면 되고 말이다. 우리는 나가있고, 예수님과 직접 관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아브라함의 자손만 그렇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손자가 아니고,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여럿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니, 가족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다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까지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끝장을 보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여서, 스스로 자기의 육적인 혈통을 단절시키는 지점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자식을 죽이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인데, 끝장을 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자기 인생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을,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시려고 한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아, 니가 죽어야한다 !! 그렇게 나타내려는 바탕에는 "아브라함아, 니가 죽어야한다" 라는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죽는 것이 힘들겠는가? 아니면 남을 죽이는 것이 힘들겠는가? 어느 것이 더 괴롭고 힘이 들겠는가?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남을 죽인다는 것은, 평생 그것이 자기의 목을 조르는 죄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손으로 자기를 죽이는 작업을 해야될 사람이 아브라함인데, 이렇게 아브라함이 해야한다는 말은, 그 아들 이삭이 해야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아들 야곱이 해야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아들들인 집단 이스라엘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손으로 자기를 죽이는 방법이 바로 율법이었다는 말이다.
◈ 율법이 곧 누룩과 같은 역할을 !! 술을 만들 때 발효시키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 누룩인데, 그렇게 율법이 곧 누룩이라는 것이다. 이게 다음에 설교할 내용인데,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즉 그들의 죄가 누룩이라는 것이다. (마 16: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죄가 무르익어야 !! 그렇게 자기 손으로 자기를 죽이는 작업에 율법이 들어감으로서 말미암아서, 그것이 드디어 숙성이 된다는 말이다. 즉 죄가 무르익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숙성을 성숙이라고 해도 되는데, 성숙이라는 것은 긍정적 의미이고 말이다. 이것을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죄가 관영한다" 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애굽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즉 히브리인들이 무려 430년을 대기하고 있다가, 그 다음에는 가나안 땅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는데, 그러면 왜 바로 가지 않고 애굽나라에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곧 그들의 열조 속에서 죄가 숙성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아직까지 죄가 관영하지 않아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이전에는 율법이 없는데, 아브라함 언약이 주어지고 난 다음에 430년 이후에 율법이 주어지는데, 즉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방금 율법은 자기 손으로 자기를 끝장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다.
◈ 자꾸만 오해하는 인간들 !! 그렇다면 왜 끝장을 보아야 하는가? 끝이 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꾸 오해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린단다" 라는 오해를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하는데, 인간은 자꾸만 그 의를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동반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정의이고, 하나님의 공의인데 말이다. 이것을 로마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공의가 피로 무엇을 유발시키는고 하니, 무엇을 상정하는고 하니, 불의가 숙성되고 관영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 가치가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전체를 불의한 집단으로 만들기 위함인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 이스라엘은, 방앗간 직원들 !!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방앗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그냥 나가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특별히 방앗간 직원들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방인들인데, 이방인들에게는 율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우리에게 십일조라는 것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안식일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준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백부장 - '주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 우리는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는데, 그러면 이방인인 백부장이 받은 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일종의 군법인데,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그런 법이라는 말이다. 그것뿐인데, 십일조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백부장은 자기 부대원들만 잘 관리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 백부장이 어디에 갔는가? 천국에 갔는데, 율법도 없이 말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방앗간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하나님의 의를 주던 말던 상관이 없는데, 구원은 그렇게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긍휼이 되는데, "구원을 꼭 주셔야 합니다" 라고 해서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달라고 해서 준 것이니, 그렇게 조건이 성립하고 만다는 말이다. 우리는 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 우리와 관련이 있지 않는가?" 라고 하신다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이스라엘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 방앗간 직원들과,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들 !! 어떻게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고 하니, 그 관계를 끊어놓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그만 끊어놓았다는 것이다. 언약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이미 관계가 끊어져 있는데, 그러니 방앗간 직원들과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관계가 단절되어있다는 말이다. 방앗간 직원들은 떡을 만든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는데, 주인에게 "똑바로 하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야단도 맞아가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직원들이 가끔 바깥을 쳐다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우리를 보고 고생한다고 하지만, 정작 불쌍한 것은 너희들인데, 우리는 고생을 해도 구원을 받아. 너희들이 개와 같아" 라는, 그런 착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는 너희들보다 나아.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떡을 떼먹을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떡은 없는데, 일만 신나게 하고 바깥으로 쫓겨난다는 것이다. 주인이 "나가라, 이 놈들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 인간은 마귀와 함께 살았다 !! 사실은 주님이 그들의 엉덩이를 차서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예수님의 엉덩이를 차서 밀어내고 말았는데, 이방인들이 있는 쪽으로 말이다. 즉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 나라를 만드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지 몰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포도원의 농부들처럼 말이다. (눅 20: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그러니 인간은 그동안 마귀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를 죽여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자기를 살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말인가? 율법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서, 그 법으로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자기 손으로 자기를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작업이, 그리고 그 율법 속에는 '믿어라' 라는 것도 포함이 되는데 말이다. 그런 방법을 오늘날 교회도 똑같이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했던 그 짓을 말이다. 만약에 성경에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 그들은 오늘날 최고의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지 싶은데, 손양원, 주기철, 한경직, 김수환 추기경, 테레사 수녀 급으로 말이다. 그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이 땅에 나타났다고 하면 말이다. 그냥 나가 있으면 되는데,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물론 그들은 가만히 있어도 안 되는데, 그러면 가만히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꾸어보자는 것인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으로 만족하자는 말이다. 그 의의 혜택을 입고 말고 하는 것은 따지지 말자는 것이다.
◈ 우물에 빠져라 !! 그렇게 따진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끝에 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끝에 선 것이 아니라 끝에서 100미터 전이라는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100미터 전' 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말이다. 즉 "끝으로 가면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박탈이 되는데, 그러다가 이 코너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니가 우물에 빠져라. 그러면 건져주겠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간단한 말인데, 그렇게 건져주겠다고 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물가로 가기는 가는데, 우물에서 100미터 전까지는 가는데, 하지만 우울 속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물에서 5미터 정도 앞으로 오면 그대로 뭔가 손을 내미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지. 내가 말씀을 지켜야하는 것이지, 내가 믿기는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내가 알아서 지켜야지" 라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 죽어도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우물이 있는데, 그런데 우물 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이쪽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렇게 우물에 손을 걸치고도 머리를 돌려서 여기 바깥을 보는데, '낑낑' 거리면서 말이다. 우물 안을 보는 것이 아니고, 혹시 도와주는지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손을 놓으란 말이야" 하면, "죽어도 놓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버틴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물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두 가지의 의식이 있는데, 그것이 성만찬과 세례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그것을 해야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면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없는 것만 같다는 것이다. 우물 속을 봐야하는데, 그 안에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안으로 빠지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만 손해인 것처럼 여겨진다 것이다. 마귀에는 여기 우물 바깥에 십자가가 달린 근사한 예배당을 지어놓았는데, 그러니 그 십자가가 우물 속의 십자가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거기에 놀이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우물은 너무나도 외롭다는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말이다.
◈ 오늘도 낑낑거리는 인간들 !! 그렇게 우물가에서 계속해서 낑낑거리면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소위 '고난주간' 이라는 것이다. "주여, 보옵소서" 라고 하면서, 금식을 하는지 다이어트를 하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데, 아무튼 그렇게 다목적인 용도로 고난주간을 지낸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난주간에 "6.25를 생각하자" 라는 사람도 있는데, 갑자기 6.25는 왜 나오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6.25를 생각하면서 일주일을 금식해서 남은 쌀을 가지고 보람이 있는 일을 하지고 하는데, 그러한 여유가 있으면 우리교회에 세척기나 하나 기부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고난주간, 성찬식, 세례식, 성경공부, 철야기도 등등, 이런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물에서 그냥 손을 놓으면 되는데, 놓지 않으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자신의 군화발로 그만 밟아버리는데, 오늘 표현이 너무 자극적인데,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으악, 살려줘. 할렐루야 !! 그렇게 밟으면 "으악, 살려줘!" 라고 우물 속으로 빠지는데, 그들이 바로 강도, 세리, 창기들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할렐루야인데 말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바리새인은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하는데, 세리는 "주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그것이 바로 "니가 나와 함께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물 속에 빠졌다는 것이다. 주님이 바지가랑이를 그만 잡아당겨서 말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인데, 그러니 십자가의 능력이 곧 끝날의 능력이고 끝장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심판을 완료했을 때 나오는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으로 이마에 도장을 받았는데, 너무 심하게 받아서 그만 이마가 깨지고 말았는데, 그렇게 머리가 깨지고 그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가서 박혀야 하는데, 우리의 두뇌에 말이다. 그렇게 우리 속에 내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시한폭탄이 들어있어서 시계소리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2분 42초, 2분 41초,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뭔가 끝장을 내는 요소가 우리 머리 속에 있어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미 끝난 존재라는 것을,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말이다. 다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거룩을,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을 보여주는 자들이 곧 사도들이고 사도바울이고, 또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이 말하는 '율법' !! 이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면, 하나님의 의가 공의와 정의의 개념으로 나타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의한 것이 되는데, 로마서에 의하면 인간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간에 행하는데, 그렇게 행하는 것이 불의로 모인다는 말이다. 그 역할을 이스라엘이 그동안 해왔는데, 무엇을 통해서 말인가? 로마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율법을 이야기하는데, 즉 "하나님이 율법을 주었는데, 그런데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선생이면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을 보고 말이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런데 만약에 그 이야기를 바리새인들이 듣고 "우리가 앞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도바울은 그런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 즉 "앞으로 우리가 결단코 위선적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율법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그게 2장의 말씀인데, 그래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그러니 "너희들이 왜 율법대로 살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은 "똑바로 말씀대로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지 육적인 할례는 소용이 없다" 라고 한 것은, 지금 로마서 자체가 성령 이야기를 하려고 유대인들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 율법과 성령의 법 !! 그것을 율법과 대비해서 성령의 법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율법과 성령을 서로 반대개념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법을 이루기 위함이지 율법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의 법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율법을 이루게 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죄의 종이 되어버리는데, 이게 로마서 8장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죄의 종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버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율법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라고 하는데, 끝에 가야하는데, 중간과정에서 말이다. 즉 우물에 빠져야 하는데, 우물에 빠지지 않고, 여기서 손을 걸치고 있다가 다시 돌아와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킬미, 힐미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율법적 성향인데, 그런 율법적 성향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로마서 7장에서는 주체가 분열되어있다고 하는데, 자아가 말이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내 속에 또 내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분열된 자아인데,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합치는가? 즉 "1+1=2" 인데, 그 2를 어떻게 1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그 2를 어떻게 1로 만드는고 하니까, 2에서 1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그 2를 없애게 되면 0이 되는데, 즉 0에서 1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1+1=2"이 되고, 그 2를 0으로 만들고, 그 0에서 1을 만든다는 말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분이 우리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그래서 우리를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으니 제로가 되는데, 즉 분열된 자아인 우리를 죽여버리고, 그런 죽은 자인 상태에서 성령의 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주체가 되는데,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렇게 아들이 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즉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여놓고, 우리 안에서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신다는 말이다. 마치 방앗간 주인이 떡을 마음껏 주물러서, "여기 떡이 다 되었으니 가지고 가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저의 어릴 때 경험에 의하면, 어머니와 함께 방앗간에 떡을 만들려고 가는데, 갈 때는 다라이가 별로 무겁지 않은데, 올 때는 그게 왜 그렇게 무겁던지, 뭔가가 첨가된 것 같은데, 떡을 만들 때 물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물론 설탕과 소금도 좀 들어가고 말이다.
◈ 자신의 삶이 낯설게 느껴질 때 !! 그렇게 우리에게 뭔가가 주어졌는데, 우리가 의도하지 않던 것이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볼 때 자기의 삶이 낯설 때,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툭툭 뭔가가 불거져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저는 임신을 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안에서 발로 자꾸만 찬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속에 뭔가 다른 것이 들어있어서, 자기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니가 띠를 띠고 원하지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하, 나보고 미국에 가라고 하는구나" 라고 해서, 미국으로 가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길을 다시 원치 않는 길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주여, 기복신앙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꼼수를 써도 되지 않는데,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싸움을 우리가 주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는데, 즉 "주여, 기복신앙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기복신앙이라는 말이다(ㅋㅋ). 그렇다면 왜 기복신앙이면 안 되는가? 그것은 자기가 벌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가 벌을 받으면 어떠한가? 벌을 받으면 아프다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었다고 하면, 죽은 놈이 아프고 말고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기복신앙이고 뭐고 간에, 성도에게는 그런 개념자체가 날아가 버려야 하는데, 선과 악이란 개념자체가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것을 따진다는 것은, 아직도 율법적 성향이,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혼 줄이 나던 성향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말이다. 같은 인간이니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것이다.
◈ 구원이란, '거꾸로'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 !! 그러므로 이방인의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다 이루어놓고 거꾸로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거꾸로 이스라엘이 되어가면서, "아하, 이것 때문에 주님이 화를 내셨고 분노를 하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가게 하시는고 하니, 기어이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데,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우리는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그렇게 그리워하던 마귀를 만나는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자기를 괴롭혔던 마귀를 말이다. 그러니 "그래, 예수고 뭐고 간에 내가 신이야" 라고 하는 고백을, 목사들의 99.99프로가 그런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말이다. 아무리 믿음으로 위장하고 감추어도, 물론 아직도 0.01프로가 남아있음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아무리 목회를 하고 무엇을 해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나 선교사들이나 간사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일반 교인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 반갑다. 친구야 !! 이제는 여러분도 그런 것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정작 우리가 그런 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간파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같은 동종업계인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오히려 동종업계니 아는데, 세탁소를 하면 세탁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말이다. 그리고 빵집을 하면 빵에 설탕을 얼마나 많이 넣는지를 알고, 또 케이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식당을 하면 식당음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고 말이다. 또한 정치인들의 문제점을 매스컴에서 지적을 많이 하는데, 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정치인 본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짓을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속지 말자는 것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아닌 척을 하는 말이다. 그러니 "반갑다. 친구야" 라고, 즉 "니나 내나 똑같다" 라고,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것은 공의가 나온다는 것이고, 그 공의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2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우리는 1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라고 하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2장은 그냥 넘어가고 마는데, "1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다 되었는데, 2장에 이런 이야기는 왜 있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2장에 왜 필요한가요? 여기 2장 5절에 보면,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라고 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했으면 말이다.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 믿씁니다 !! 그러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데, "믿습니다. 믿어드리겠습니다. 기꺼이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의롭다고 해주겠다고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믿씁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되는데 왜 공의와 불의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이미 이렇게 믿어서 의롭게 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중간과정에서는 '믿습니다'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것이 되려고 하면, 우리가 끝장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돈도 없고, 마누라와는 이혼을 하고, 건강이 박살이 나고, 그야말로 거지 나사로처럼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죄를 지었다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죄를 지은 것도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백지인데, "내가 죄를 지어도 의가 된다는 것은 너무 심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말조차도 마스크를 가지고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욥처럼 말이다. 즉 "니가 잘하든 잘못을 하든 간에, 방앗간 바깥에 있는 인간이 방앗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거기에는 간섭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 이제 우리가 제2의 이스라엘이 되어서 !! 그리고 이제는 아예 그 방앗간이 통 채로 우리 안에 장착이 되었는데,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항상 귀에 '윙' 하면서 방앗간의 그 돌아가는 기계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는 것이다. 아닌가요? 그런 소리가 들리면 병원에 가야됩니까? (ㅋㅋ)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생산되는 과정을 이미 이스라엘이 겪었고 그래서 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제2의 이스라엘이 되어서, 과거의 이스라엘이 잘못했던 그 모든 과정을 반복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했다고 하는데, 낯설기가 짝이 없는데, 계속해서 낯설다는 말이다.
◈ 사울 왕과 사무엘 !! 예를 들어서, 사울 왕의 경우에, 아말렉이 쳐들어와서 전쟁에 나가야 하는데, 그런데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 승리를 하는데, 그래서 "아말렉은 까불지 마라. 애들아, 어서 이리 오너라. 제사를 드리자"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을 기다리는데, 그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적들은 코앞에 와있고, 도저히 더 이상은 왕으로서 지체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사울 왕은 "그러면 할 수 없다. 사무엘을 하나님이 오지 않게 하신 것 같으니 내가 직접 제사를 드리겠다" 라고 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렇게 드리면서도 사무엘을 기다리는데, "사무엘이 왔는지 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우물에 모가지를 걸고 우물 안이 아닌 바깥으로 쳐다보는 것과 같은데, 그래도 사무엘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 그만 제사를 드렸는데, 그때 사무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진작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 텐데, 제사를 드리고 나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 왕이 가려는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으니까, 사무엘은 "오우, 놓으세요" 라고 하는데, 그만 옷이 그만 찢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찢어진 옷의 면적이 사울이 가지고 간 것은 10이라면 사무엘은 2인데, 그래서 사무엘은 "나라가 이렇게 둘로 쪼개질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냐는 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당하는 사울 왕의 입장에서 보면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굉장히 이상하다는 말이다. 사울 왕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데, 뭔가 뭔지를 모르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 중요한 것은 내부전쟁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이스라엘은 바깥과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내부전쟁의 그림이 바깥에 적용이 되어서 적들을 이기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내부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다면 바깥에 나가서도 패배한다는 것이다. 즉 바깥에 있는 풍경들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내부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싸움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까?" 라고 하는 싸움인데, 사무엘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율법은 미래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라는 것이고, 사울 왕은 무엇인가? "미래는 모르겠고, 아는 것은 과거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서 출발하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고, 반드시 미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미래에서 출발하겠는가?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말이다. 그렇게 해석의 차이가 나는데,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 왕을 보고 "당신은 망해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망해야 하는데, 왜 그러한가?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 라는 말이다. 그 의를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겠는가? 자기가 망하는 것을 내용으로 품고 있는데 말이다. 즉 "나는 내가 망하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것 !! 어제 오전인가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오후가 맞아요? 저는 지금 저의 과거도 그만 뒤죽박죽인데, 우물에서 손을 너무 일찍 뗀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날마다 우물에 들어가시고, 그리고 주님께서 끄집어내 줄 때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의를 품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유하라는 말이 아닌데, 소유하게 되면 주체가 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의가 자기를 소유하도록, 주님의 의를 품고, 혹은 주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식으로 우물에서 기어 나와서 하루를 살다가, 또 잘 때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고 말이다. 즉 그날 염려는 그날에 족하다는 것이다.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것이 의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실수를 해도 그것이 성공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성공했다고 여기는 것도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 그러니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우리는 제3자의 입장에서 관여할 바가 되지 못하는데, 사도바울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사람들은 "사도가 올라가셨군요" 라고 할지 몰라도, 사도바울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인데 말이다. 즉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기가 삼청천을 보려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끌어당기시는 상황이 되게 되면, 자기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일부러 자기 자신을 빼버린다는 말이다. 본문인 2절에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병이 들어서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응답이 뭐라고 하는가? 주님이 아주 비정하게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이다. 주신 은혜가 자기에게 적절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 그게 은혜군요.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시는 그 문제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게 병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끝에서 시작한 성경이기 때문에 그 해석도 항상 끝에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주여, 가시를 빼주옵소서!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다시 교재 89페이지를 보자. ** 잠언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땅에서 장수한다' 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불의 구조에서 보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땅은 옛 땅에 불과해요.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땅에서 장수한다' 라는 의미는? 여기에 관한 성경구절이 여러 군데에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런 대목을 끝에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자기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계시는 분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중간지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니, 그것이 율법적 기능을 발휘해서, 그 율법이 하나님의 불의를 유발시켜서, 즉 하나님의 징벌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로마서 2장에 의하면 말이다. 그렇게 율법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불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즉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지키겠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불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한다" 라는 잠언의 말씀 자체가 이미 율법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잠언에서 "땅에서 장수한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장수를 해야한다는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할 수가 없는데,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에 부귀가 있다" 라는 것은, "가난하게 살아도 적절하다" 라고, 그렇게 해석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지만 불의 구조에서 보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땅은 옛 땅에 불과해요. 그러면 새 땅은 어디인가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다" 라고 합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언제 이 말씀을 실감하게 되는가? 아까 언급을 했는데, 우리가 모두 여자라고 치고, 그게 바로 '울 때' 라는 것이다.
◈ 굿바이, 정들었던 내 몸 !! 권사님은 언제 울지요? 하품이 날 때인가요? 그 정도는 제가 맞출 수 있는데, 드라마를 볼 때 운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면 인간이 왜 우는가? "여기가 끝인가 보다. 아, 이것뿐인가?" 라고 여길 때, 그때 운다는 것이다. 즉 절망감 때문에 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이 들었던 자기 자신과 빠이빠이를 할 때 인간은 운다는 말이다. 자기 몸의 어느 한 구석 한 구석, 세포 하나 하나, 그야말로 자기의 숨결이 없는 곳이 없는데, 그런 자기 자신과 작별을 할 때 우리 인간은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과 미련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는 자는 화가(복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울어라, 딸들아. 이제는 나 때문에 울 때가 오고, 또한 그렇게 울어주어야, 나 때문에 웃을 때가 있을 것이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결국, 우물의 마지막 턱은 예수님 !! 그러니 결국은 우물의 마지막 턱은 예수님이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신랑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늘 웃을 수 있는 기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가 신랑을 버리고 자기 주체정립을 위해서 살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그것을 울음으로 끝장을 내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충성봉사를 하고, 자기 자존심과 자기 잘남을 위해서 지문이 다 닳도록 아무를 하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을 때, 우리가 우는 것 외에는 달리 그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먹는 것인데, 그러니 울면서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ㅋㅋ). 욕을 해가면서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제는 좀 놔라" 라는 것인데, 즉 "그 무거운 짐을 니가 지려고 하지 말고, 그 마귀를 좀 놔두어라. 너의 것이 아닌데, 그런데 왜 자꾸만 니가 쥐고 잘 되려고 하는가? 그냥 놓아버려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놓게 되면, 우리는 "헤헤, 주님이 함께 계셨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주님께서 살려주신 인생의 소유권을 자꾸만 자기 이름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날의 이스라엘인데, 아무리 은혜를 주시고 약속의 땅에 살게 해주시고 해도, 심지어는 약속의 땅에 가서 그렇게 많은 구원자를 보내서 도와주셔도, 다시 돌아서면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얻어터지고, 또 얻어터지고 한다는 말이다. 마귀 두더지 게임과도 같은데, "내 것이다" 라고 하면 치고, 또 "내 것이다" 라고 하면 치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근심하고 걱정할 때, 자식의 일로 인해서 말이다. 그렇게 "내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나' 라는 것이 올라올 때는 근심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즉 "저 놈의 자식이 내 자식인데,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 근심도 함께 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주님이 우물 속으로 집어넣게 되면, "그것도 주님께서 하신 의의 자기 전개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펼침인데,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불의의 징벌에 대한 펼침, 즉 심판의 펼침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끝났다. 의로운 것은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런 세상에서 어슬렁거리느냐는 말이다.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처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땅에서 생각하는 것은 우상이고 탐심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다.
◈ 성도는, 예수님의 긴 옷자락 !! 옛날에 제가 이와 비슷한 강의를 하면서 그린 그림이 있는데, 10년 정도 되었지 싶은데 말이다. 골로새서 3장을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주님이 왕관을 쓰고 계시는데, 지팡이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옷자락이 이렇게 길게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옷자락이 바로 오늘날 성령을 받은 성도인데,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말이다. 이 이미지를 제가 조수미가 불렀던 '마술피리' 라는 오페라에서 따왔는데, "아하하히하하하 ♬"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때 조수미가 입었던 옷이 이러한데, 옷자락이 굉장히 길다는 것이다. 조수미는 키가 작으니 밑에다가 무엇을 바치고, 그렇게 옷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이미 우리는 죽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살아있는가? 주님의 의의 옷자락으로 인해서, 그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주님을 배신한 이 세상의 결말을, 그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 '거꾸로' 하면, 그게 곧 신앙생활 !! 그러니 성경은 간단한데, 항상 끝에서부터 새로 역순으로 올라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즉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이 한 번 되어볼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죄를 한 번 지어볼까?"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아미 성령을 받았기에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세상 끝에 온다는 말도 맞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즉 십자가에서 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 끝이 맞는 말인데, 왜냐하면 구약에서 마지막 종말에 성령이 오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구약의 종말은 시간적 종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두고 종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지?" 라는 것은 그야말로 주제 넘는 짓이고, 그러니 그런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공의와 불의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라고 하는,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능이고 역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구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로마서나 골로새서 등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든 편지에 보면, 구약적 내용을 가지고 신약의 완성 의미를 담아서,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다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그 이전단계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의 포장된 완제품으로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애굽에 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나를 핍박하라" 라고 할 필요가 없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구약과 신약을 함께 말씀 안에서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0장 8절을 보자. (고전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 구약의 지평선이 지금도 !! 여기 8절에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라고 하는 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계속해서 구약을 인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 구약의 지평선이 지금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에서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게 되겠다고 하는 그 행함의 원칙이, 그것이 지금도 우리 내부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죄를 유발하게 하고, 걱정과 근심을 유발하게 하고, 마귀에게 시달리는 힘든 생활을 보내게 한다는 말이다. (민 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렇게 "나는 고린도전서 10장 말씀도 지키지 못하고, 그리고 11장에 보니 남자는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자는 여자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나는 매일같이 신랑에게 바가지만 긁고, 그렇게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결국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바로 우물 바깥으로 기어서 나온 것인데 말이다.
◈ 내 인생을 근사하게 !! 그러니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내가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그것이 옛날에 우리가 경험하고 싶었던 것인데, 본의 아니게 이렇게 이미 경험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나쁜 짓을 했다고 하는 의식 때문에 벌벌 떠는, 그런 경험을 말이다. 과연 그것이 감사이고 또한 과연 찬양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챙기는 '주체정립' 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변종 박테리아인 주체를 제대로 된 주체로서 유지하고 간수하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결국은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즉 "내 인생을 근사하게!" 라고 하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 자기 잘남인데,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또 성령을 이용해먹는 죄를 다시 짓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만 사라지고 없고, "누가 누가 잘났나?" 라고 하는 시합에 나선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경에 보니 "하나님을 경외하면 장수하고 오래 산다" 라고 하니,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4장 6절과 7절을 살펴보자.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여기 7절에 보면,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게 종이 원하는 유업은 아닐 테고, 종은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원하는 유업인가? 아들이 되시는, 즉 예수님이 받는 유업을 우리가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합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룬 것에 합류가 되려고 하면,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율법적 성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적인 성향을 버리려고 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서, 그 십자가에게 죽으면 너희도 살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십자가를 지고, 또 무슨 방법으로 사느냐는 말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꼼지락 꼼지락거리는 아브라함 !! 그러니 우리는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데, 아브라함의 장점이 바로 그런 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되지 않는데, 주님께서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올 메시야의 내용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의 머리통을 향해서 내리쳤다는 것이다. "니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가셨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꼼지락 꼼지락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데,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어떻게 하든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는 곳마다 들통이 나는데, 물론 그 뒷감당을 아브라함 자기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바로 왕과 해결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마소. 어제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서 힘들게 해서 내가 봐주는데, 그래서 내가 당신이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을 알고 살려주는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오늘 죽었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 우리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드시는 주님 !! 그러니 성도는 보통 사람이 아닌데, 그것은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알려주도록 주님이 그렇게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수호천사가 되셔서 인도를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방앗간에 들어가서, "야, 떡이 참 곱구나. 그런데 기계에는 기름을 좀 쳐야해" 라는,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나가 있으면, 방앗간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인생을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시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의 펼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시는데, 그런 일의 증인으로서, 그런 기계로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 막장이 아닌 인생이 없지만, 그러나 !!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것은 저에게 물을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을 막장 인생으로, 그야말로 매일같이 막장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게(개?)를 먹어가면서 막장 인생을 살고, 소고기를 먹어가면서 막장 인생을 살고, 또한 놀러가면서 막장 인생을 살고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막장이 아닌 인생이 없는데, 그러니 늘 울면서 웃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 일에 실망해서 울고, 그리고 주님 때문에 또 다시 웃고, 이게 무슨 조울증도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일을 펼치시는 인생임을 알고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닌데, 건방을 떨면서 말씀을 지킨다고 자기가 편하게 살아보려고 꼼수를 쓴 줄로 압니다. 이것이 모두 선배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고스란히 우리가 물려받아서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선배들을 찾아가셔서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신 것처럼,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그 용서가 우리를 지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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