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7 - 인격과 가면 / 150302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7 - 인격과 가면 15,03,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구조적으로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가 다름으로, 불의 구조 아래에서 '부요하다' 라는 것은 남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 부요한 겁니다. ◈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 !! 불의 구조 아래에서 '부요하다' 라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인데, 물의 구조 아래에서는 이 땅에서 번창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불의 구조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 굉장히 위험인데, 그게 축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물의 구조에서는 땅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즉 새로운 땅을 만드는 것인데, 하지만 불의 구조에서는 그런 땅마저도 날아가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땅에 모든 가치를 쏟아 붓는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는 것이다. 하박국서에도 그런 말씀이 있는데, 즉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고 외양간에 소가 많아도, 그런 것은 다 심판의 대상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 따라서 이 불의 구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자기 자신이 애초부터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복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가지는 것으로, 그렇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말이다. 예수님은 창조주인데,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오는 것이 마땅하지 싶은데,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지는 만화영화도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메시야가 오게 되면 가는 곳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해서, 일하지 않아도 잘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지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진짜 복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즉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는 것은, 하지만 그것은 이미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와의 시험에서 실체가 드러났다는 말이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귀는 자꾸만 이 땅을 고집하는데, 이 땅에서 잘 되는 것, 즉 부자가 되고, 인기가 있고, 권력을 쥐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할 일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결코 이 땅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는 말이다.
◈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 그러니 예수님의 일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인데, 즉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간은 삭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스겔서 37장에도 나오듯이, 뼈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의 보편성, 그런 죽음을 일반화를 시킨다는 말이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라는 것이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즉 "예수님이 죽었기에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은 그것을 간파하는지, 간파하지 못하는지에 집중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 90페이지에서,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에서, 부자가 되고, 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러면 잠언서는 어디에 해당되겠는가? 잠언서는 구약이기 때문에 물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복이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오래 사는 것인데, 그렇게 이 땅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아직도 땅이 해야될 일이 여지가 있는 가운데서 잠언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잠언서가 구약이니 말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신약시대라는 것이다.
◈ 목사님, 부동산이 어떻습니까?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데, 즉 "마태복음 5장에 팔복이 나오는데, 거기에 '복이 있는 자는 땅을 차지한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면 성도들은 부동산업을 어떻게 하면 잘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부동산이나 거기에 관련된 업종을 하면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땅을 주시고, 또한 아파트 평수를 넓혀주시기에 말이다. 그렇게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땅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물과 불의 구조를 모르면, 그 말씀을 가지고서 예배당 평수를 넓히는데 이용할 수가 있는데, 또한 자기의 개인적인 부동산을 넓히는 곳에도 써먹고 말이다.
◈ 이 땅을 떠나시는 예수님 !! 여기 마태복음 5장 5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온유한 자가 누구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만이 온유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영원히 거할 땅은 어디인가? 분명히 이 땅은 아닌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니까 말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왜 떠나시는가? 사람들이 추방을 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부활에 의해서 세워진 땅이 바로 그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땅에 가려고 하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서 죽고 부활의 영으로 다시 살 때,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땅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 때부터 그때 분명히 아브라함은 자기 땅이 있었는데,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약속의 땅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놔두고 떠나야할 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살기는 오랫동안 살았지만, 언젠가는 작별을 고해야하는 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더 나은 땅을 사모했으니,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으로서, 그 본향의 이름이 바로 '예루살렘' 이라는 것이다.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 여기 16절에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다윗 때 와서 예루살렘 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에 없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바로 이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상에 있는 성전이나 예배당을 사모하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질의 신앙이라고 볼 수 없는데, 아브라함과 같은 계열로 말이다. 이 땅에 미련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외양간에 소가 없고, 감람나무에 과실이 없다는 것은, 그것은 가난하게 고생하란 말이 아니라, 잘 되던 잘 되지 않던 간에, 즉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에 과실을 풍성하게 맺더라도, 한 마리의 소가 새끼를 한꺼번에 20마리를 낳더라도, 그렇게 해서 갑부가 되더라도 애착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사람이 살고 죽는 그 모든 것이, 그것이 다 같은 사건인데 말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하나의 죽음을 사건화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렇게 살아있는 것을 죽이니, 죽음 사건은 반드시 그 이전에 살아있다고 우기는 것들이 있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살아있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있어주어야만, 그것을 내리쳤을 때 죽음 사건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것, 그렇게 살아있기에 좋다고 여겼는데, 거기에 죽음이 들이닥쳐서 살아있는 것이 깨어지고 소멸될 때, 비로소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그 핵심적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우리 악착같이 삽시다. 그리고 죽읍시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것인데, 등산을 통해서 몸을 관리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만 바위에서 미끄러져서 갑자기 죽고 말이다. 이것은 저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보다 죽음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악착같이' 라는 것이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아, 여자의 일생 ♬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미자가 부른 '여자의 일생' 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야말로 눈물이 나는데,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그리 잘못이라고 눈물로서 한 평생을 다 보내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 눈물을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복음으로 보게 되면 정말로 수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으면 되는데 자꾸만 살려고 하니 눈물이 나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이 세상을 악착같이 살려고, 즉 "남편은 나를 버리고 도망갔어도 자식만큼은 제대로 키워야한다" 라는 것, 그것이 여자의 운명이고 일생이란 것이다. 이럴 때는 이미자의 노래를 들어가면서 강의를 해야하는데 말이다(ㅋㅋ). --------------------------- 2.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그러니 남편이 얼마나 애를 먹었으면 눈물의 연속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것마저도 천국을 차지할 자격이나 권리가 되지 못하는데, 오직 온유한 자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온유한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말이다.
◈ 목사님, 신명기 28장이 너무 궁금해요 !! 오늘 아침에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가지고 질문을 했는데, 즉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목사님이 질문을 했는데, 그러니 흔히 하는 답변이 아닌 우리가 미처 모르는 답변을 좀 해달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벌칙조항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축복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참 어렵고도 기본적인 것인데 말이다. 복은 우리가 요청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즉 우리의 요청이나 요구에 의해서 오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 무서운데, 하나님께서 "복을 줄까?" 라고 하면 겁을 내야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고 하니, 조건이 맞지 않으면 저주가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복을 줄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다고 받았는데, 그런데 그 뒤에 보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만약에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가 온다고 하니, 복에 대한 조항과는 반대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저주가 무엇인지 먼저 봐야하는데, 즉 복은 반대로 여기면 된다는 말이다. (신 28: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 이렇게 일곱 길로 도망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는 뭉쳐지지 못하도록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난다는 것인데, 그러니 심방을 하면서 신명기 28장 말씀을 들고 간다는 것은 심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는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습니다" 라는 설교만 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일곱 길로 도망을 가야하는, 즉 가족이 완전히 박살이 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침입 !! 저는 이것을 '침입' 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즉 인간들끼리 나름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침입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격을 하셨다는 말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아, 니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도 역시 침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하늘의 어르신은 너무 부담스러워 !! 예를 들어서, 아이들끼리 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있으면 그냥 두면 되는데, 그런데 괜히 선생님이 와서 "야, 우리도 좀 끼워 넣어줘라" 라고 해서 같이 축구를 한다고 하면, 아이들이 제대로 공을 차겠는가? 자기가 찰 공이라도 선생님에게 양보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이 축구를 잘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축구를 하면 같이 차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담스럽겠느냐는 말이다. 그래도 같은 편이면 몰라도, 상대방이라고 하면 누가 그 회장님의 공을 빼앗으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찍히면 국물도 없는데 말이다(ㅋㅋ). 더욱이 하나님의 경우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침입을 하셨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상당히 거북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개업했는데, 돈까스 집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권리권을 좀 받고 자리를 옮겨서 이번에는 치킨 집을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오셔서 맛있게 잘 드시고는 계산을 하시려고 카드를 내미는데, 그게 하늘나라의 신용카드라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는 사용할 수도 없는 말이다. 그러면 주인은 현찰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거북스럽다는 말이다(ㅋㅋ). 우리 인간들끼리 아웅다웅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면 되는데, 그런데 어르신이 오시게 되면 우리는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그야말로 어떻게 몸 둘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님의 침입이 없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말씀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위험한데, 인간의 본심은 말씀과 멀리 떨어져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만만한 인간들끼리 수다나 떨면서 노는 것이 최고인데, 그게 우리가 좋아하는 일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말씀이 제대로 오게 되면 우리는 파산이 나는데, 쪼개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동행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 이스라엘 역사는, 주님의 개입으로 파탄이 난 역사 !! 이스라엘의 역사가 상당히 어렵지만,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데, 즉 "주님이 개입하셔서 파탄이 났다" 라는 것이다. 그게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말이다. 주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즉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들은 나름대로 우상숭배를 하면서 재미있게 살았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해도 망하지 않는데, 실제로 이스라엘이 살펴보니 우상을 섬기던 이웃 나라들이 다 잘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상을 섬기던 나라들이 망하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우상을 섬기지 않을 텐데, 그런데 이쪽의 여호와를 믿는 것보다 저쪽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만사가 더 형통하게 되니까, 그래서 그쪽의 신을 믿는다는 말이다.
◈ 집사님, 위암을 축하드려요 !! 그러니 "목사님, 예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묻기 이전에,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어서 제일 잘된 케이스를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은 어떻게 돈을 왕창 벌었어요?" 라고 하면, "예, 하루에 성경을 3장 읽고 기도하니 주님이 도와주셨죠" 라고 하는데, 그래서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만 암에 걸려서 빌빌거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집사님은 어쩌면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아갑니까?" 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하루 빨리 낳아서 모습으로 교회에서 만납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건강해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그러니 마치 욥의 친구들과도 같은 마음으로 병 문안을 오는데, "정말 부럽다. 나도 저렇게 암에 걸려야 주제파악을 할텐데" 라는 마음이 아니고 말이다. "나는 일본 수산물을 마구 먹어도 암에도 걸리지 않고, 음식물을 아무리 태워서 먹어도 멀쩡하고, 그런데 집사님은 어떻게 복을 받아서 그런 암에 걸렸습니까?" 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시대에 선지자가 밉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가 충분히 알 수가 있는데, 하지만 선지자를 무시하는 것은 누구를 무시하는 것인가? 하늘나라의 천상회의에 참석한 자의 말을 무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말이다.
◈ 심판 아래에 휩싸여 있는 세상 !! 제가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심판 아래에 휩싸여 있는 세상' 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는 심판 아래에 있으면서도 잘났다고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엇이 심판인데? 오늘도 날씨만 좋네. 이것도 심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산에 가서 '야호'를 마음껏 외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심판은 얼마든지 받겠다는 심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자기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침투하셔서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시는가? "이놈아, 제발 정신을 차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자꾸만 자기 환상에 빠지지 말고 정신을 좀 차리라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인간의 세상이 아닌 말씀의 세상임을 우리에게 언급하시는데, 그러니 잠언서는 일방적 침투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 잠언서가 없었으면 몰라도, 잠언서가 있어서 우리에게 들어옴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만 들통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90페이지를 보자. ** 가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가난한 이유가 첫 번째로는 '게으름' 이라는 겁니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 부지런하면 과연 부자가 되는가? 여기 10장 4절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되는가? 손이 부지런한 사람들을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떠한가? 그렇게 부자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접시를 잘 닦는 달인, 봉투를 잘 접는 달인, 동대문 상가에서 짐을 잘 옮기는 달인, 과연 그들이 재벌이냐는 말이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바지런까지 한데 말이다.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데, 그렇게 하다가 아이가 큰 병이라고 걸리게 되면, 그 하던 일마저도 그만두고 아이의 병을 간호한다고 하면서 곧장 가난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여유가 있어서 연금을 제대로 들었겠는가? 아니면 생명보험을 넉넉하게 넣어놓았겠는가? 그저 배운 기술이 그것이라서 그것만 열심히 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조그만 돌발적인 사태만 일어나도, 그만 사채업자의 신세를 지고 평생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절벽의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하냐는 말이다. 하지만 새벽부터 일하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들 가운데서 재벌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재벌 사모님이 야쿠르트 모자를 쓰고 야쿠르트를 파느냐는 말이다. 오전에는 맛사지를 받고, 점심에는 새로 오픈한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시간을 보내지, 그리고 오후에는 또 수영으로 몸매를 가꾸고 말이다.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그렇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한데, 그런데 왜 부자가 되지 않는가? 여기 잠언서에 "부지런하면 입에 풀칠은 한다" 라고 하지 않았는데, 뭐라고 하는가? 분명히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부자 되세요 !! 왜 과거에 B.C카드 CF의 멘트가 "부자 되세요!" 라는 것이었는데, 기억이 나세요? 물론 카드를 써서 부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다. 탤런트 김정은이 그 CF를 찍었는데, 그래서 "부자가 된 것은 거액의 모델료를 받고 출세한 당신밖에 없어" 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또한 카드회사의 배만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당시는 농업형 경제구조였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 산업형 경제구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형 경제구조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일종의 상식인데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땅 위에 살았는데, 그래서 농사를 짓고 난 뒤에 여분의 것은 물물교환을 하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먹고사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시대였다는 말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신약시대로 들어오면 그게 아니고, 즉 "일해야 부자가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아야 부자가 되는 시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죄가 더 깊어졌는데, 즉 "나는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일할 것을 남이 대신하고, 나는 그렇게 그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나는 점점 더 부자가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런 시대라는 말이다.
◈ 마르크스 - '개천에서 용이 날 수는 없어' !! 마르크스는 그것을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남이 일해서 얻은 가치를 강탈했다" 라고,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누가 말인가? 자본가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본시장에서는 있는 사람은 더 잘되고, 없는 사람은 더욱 더 궁핍하게 되는, 이것은 개인의 부지런하고 하지 않는, 그런 역량과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구조적으로 이미 확정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돈 많은 집의 아이는 똑똑하고, 그런 똑똑한 아이가 결국 사회지도층을 차지하고, 그런 지도층은 돈의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캐치하고, 그렇게 캐치하면 적은 노동으로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반면에, 가난한 집의 아아는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못하면 결국 사회에서 그 자리가 정보에서 소외되는, 그런 뒷북이나 치는 자리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몰리면 매일같이 사기만 당하고 빚만 지게 되는데,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개선해보겠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인데, 하지만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결코 개선될 수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팔자 소관이다" 라고 하는데,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라는 것이다. 즉 운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런 것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고 하는 종교야말로 아편에 해당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병은 낫지 않고 고통만 제거되는 약재, 즉 아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에서는 종교를 탄압했다는 것이다. 중국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 사람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정신도 달라지는데, 물론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도 정신이 달라지고 말이다. 흔히들 "나는 비록 돈은 없지만, 정신은 바짝 차린다" 라고 하는데, 하지마 바짝 차려지지가 않는데, 오히려 화가 난다는 것이다. 즉 가난하면 분노가 쌓이고, 부유하면 온유함이 쌓인다는 것이다. 물론 팔복의 그 온유함은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많으면 착해지고, 돈이 없으면 악해진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이 그 비싼 담배를 더 많이 피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담배로 피움으로서 분노를 삭히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담배값이 오르니 그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부자는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골프나 치면서 즐기면 되니 말이다. 물론 공이 컵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그러면서 캐디의 엉덩이나 더듬고 말이다. 그것이 자기의 즐거움인데, 그런데 그것이 골프보다도 캐디를 더 향하고 있으니 사회문제가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래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게 심판의 대상이 되는데 적합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잠언서의 모든 말씀은 고난을 받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끝!", 바로 그것이 정답이라는 말이다. 잠언서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 잠언서의 말씀대로 하면 실패하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이 땅에서 실패자로 전락하게 되는데, 따라서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누룩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목사님, 설교가 너무 어려워요 !! 어제 설교를 듣고 어렵다고 문자로 항의가 들어왔는데 말이다. 사실 어제 설교가 정말로 어려웠는데 말이다. 만약에 여러분의 옷감에 얼룩이 묻어있으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 얼룩이 묻은 곳만 세제로 씻어내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데, 세상이 이렇게 있고 자기가 있으면, 나쁜 곳이 있으면 자기는 피해가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깨끗해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쁜 곳이 가지 않으면 되는데, 즉 얼룩이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 평지가 아닌, 반죽을 창조하신 주님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하실 때, 평지가 아닌 둥근 반죽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루 전의 일인데, 그 설교가 기억이 좀 납니까? 그러니까 이 반죽이, 즉 누룩이 자기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얼룩이 묻어있다고 하면, 그 얼룩과 자기 사이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라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누룩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기 안에 누룩이 다 퍼져있는데, 그것을 어느 지점이라고 과연 파악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전체가 모두 누룩으로 번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평지가 아닌 누룩으로 봅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돈에 따라서, 그리고 환경에 따라서 인간성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가난하면 분노하고, 부유하면 여유가 있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인간성이 좋다고 자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빠졌을 때, 그 사람은 자기 속에서 누룩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창조에 저항하는 세력이 곧 누룩 !! 어제 누룩이 뭐라고 했는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데, 묻는 제가 미안한데 말이죠. 누룩은 창세 전에 예수님이 창조한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세력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그런데 신약시대에서는 가난한 자든 부자든 둘 다 망하는데, 모두 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가난한 자의 편에 섰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참되고 이상적인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 누룩이 만든 것이 교회다 !! 이스라엘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접촉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인간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을 욕보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교회가 그 이스라엘의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 예수님을 욕보이는 대표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누룩이 만든 것이 교회다" 라고 했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오용익 목사님이 녹취를 해서 올리면, 다시 보면 되지 싶은데 말이다. 서구에서 잘 산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사실은 14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과 인도가 전 세계의 경제력의 70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가 그만큼 잘살았는데, 14세기에 중국은 아프리카에 무역을 했는데, 그리고 중동에 있는 사람들이 중국까지, 혹은 일본까지 오고 말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가야시대에도 중동 사람의 흔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경주에는 영국 사람의 얼굴이 불상으로 조각되어있고 말이다.
◈ 향신료 전쟁 !! 그러다가 1492년에 스페인 왕의 지시를 받고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설치게 되는데, 특히 '바스코 다 가마' 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아프리카의 남쪽인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양을 통해서 동양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콜로버스는 반대로 해서 신대륙인 미국에 도착했는데, 인도에서 난다는 향신료를 찾아서 말이다. 그래서 콜롬버스는 그것이 인도인 줄 알고, 거기 사람들을 인도사람, 즉 '인디언'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스코 다 가마는 동양으로 들어옴으로서, 그래서 그때 일본이나 중국에 포르투칼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중국과 인도가 잘 살았고, 그리고 자기들 나라에서는 나는 향신료를 유럽에 팔아먹는 것이 큰돈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장사의 중심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되는데, 그 이전에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였고 말이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양보다도 동양이 잘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서양이 동양을 앞질렀는고 하니, 땅에서 석탄을 캐내면서, 에너지를 말이다. 그런 석탄을 캐내려고 하면, 그게 땅 속 깊숙이 들어있는 것까지도 다 캐내어야 하는데, 그러면 에너지가 더 많이 들고 말이다. 그때 왓슨이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증기기관차가 만들어지고 철로가 놓이게 되고, 그것을 항구까지 연결시켜보니 상당히 괜찮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화약을 수입하면서 광산이 더욱 개발되고, 그러면서 무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식민지를 만들고, 또한 여러 가지 물자와 노예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무기가 발달하게 되는데, 그 무기로서 결국 중국과 인도까지 점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인격은, 돈이 만들어 !! 이것이 바로 산업화 시대인데, 산업화 시대가 무엇인고 하니,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즉 돈이 돈을 버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성, 혹은 인격이란 것은 돈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인격을 너무 가치 있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에 지금 인격이 괜찮다는 소리를 들으면, 돈이 그렇게 만들어내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 중의 괴수인데, 그래서 이 인격을 '페르소나' 라고 해서, 즉 가면이라는 것이다. 모든 형식을 다 벗겨보면 찌꺼기밖에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옷을 아무리 근사하게 입고 있어도, 머리를 헝크러지게 하고 옷에 때를 묻히게 되면, 그게 바로 노숙자라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형식이 떨어지게 되면, 그렇다면 '나' 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 자기가 자기가 되게 위해서, 여러 가지 형식들을 잘라보면, 마치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자르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보면, 하나하나가 다 외부적이고 수입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나' 라는 것은 없는데, 그렇게 없으니 너무나 허전해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동원시킨 것이 바로 '인격'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격은 일종의 허상인데, 즉 뭔가 궁한 것을 땜질하기 위해서 동원한, 그래서 그것을 가면, 즉 '페르소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의 인격은, 재현된 것 !! 그래서 인간은 그 인격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재현한다는 것이다. 재현, 즉 다시 연출한다는 것인데,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함으로서 자기도 그와 비슷한 인격이 되고자, 그런 수완을 부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잘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면서, 그게 국민들의 성향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 대한민국에는 부자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급이 바람을 피우면 일반 국민들은, 자기들도 바람을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을 '공모' 라고 하는데, 결국 한 나라에서 서로가 서로를 공모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없는데, 모든 것이 공모인데 말이다.
◈ 공모한 상황 !!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죽여라"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공모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됐나? 됐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공모인데 말이다. (마 27: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부흥을 했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돈을 주시는가?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너희는 죄인이니 죽어도 마땅하다" 라고 하는데,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지금도 예수님을 좋아할 리가 없는데, 그래서 자기 인격에 맞추어서, 그런 가짜 예수를 만들어서, 예배당을 세워서 소위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가면무도회인데, 그러니 집단적으로 전세버스를 대절해서 지옥으로는 가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교회' 라는 이름의 지옥행 버스를 말이다.
◈ 구토, 구토, 구토 !! 교인들은 "저게 진짜 예수인가?" 라는 것을 따질 생각이 없는데, 왜냐하면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자기 가면을 만들기에 급급하기에, 즉 "신이시여, 제가 이만큼 훌륭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번다고 인격이 얼마나 와해가 되었는지 모르는데, 특히 장사를 해보면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런 것들을 인간 대접을 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구토가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 "사모님, 정말로 잘 어울립니다. 참, 예쁩니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돈 쓰는 재미로 살아야지. 내가 돈이 없으니 이런 짓을 하고 있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낸다는 말이다. 장사를 하는 분들은 공감을 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 좋다는 직업을 가진 의사들의 경우에도, 의사들이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신병자들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아침 9시부터 할머니들이 출근하는 병원들도 많은데,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프다고 하면서 위로를 받으려고 말이다. 자식도 찾아오지 않고, 남편은 일찍 죽고, 그러니 병원에 가서 친절한 의사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에게 자기 몸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이번에 우리 자식이 승진을 했어요" 라고 하면서 엉뚱한 소리나 하고 말이다. 물론 의사도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는데, 그래야 병원이 운영되니 말이다. 심지어 어떤 병원에서는 무료로 노인들을 진료해준다고 하면서 꼬드기는데, 사실 그게 공짜가 아닌데 말이다. 자기들은 의료보험 공단에서 나오는 것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형외과를 개업한 의사를 한 분 만났는데,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한 달에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만 5천만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얼마나 환자를 많이 받아야 그것을 충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모르기는 해도 그분이 정형외과를 개업했기에 장비 렌탈료가 그렇게 많지 싶은데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고 선진국인데, 하지만 옛날에 중국과 인도는 그렇지 않았는데, 죽으면 그것은 하늘이 죽인 것인데, 그러니 병원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건강검진을 왜 하느냐는 말이다. 그냥 돌아가실 때 맛있는 것만 좀 사드리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진의학이 들어와서는 어떻게 하는가? 이미 땅 속에 들어있어야 하는 사람들도 끄집어내어서 온 몸에 온갖 것을 다 꼽아놓고 말이다. 그러니 벌이 따로 없는데, 오래 사는 것이 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건강할 때 죽은 것이 최고인데, 건강하지 않으면 그게 이미 손을 들고 벌을 쓰는 단계라는 말이다. 선진국이 좋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것이다.
◈ 하루에 딱 3마리면 좋아요 !! 파푸아뉴기니의 주민들은, 제 아무리 강에 고기가 많아도 하루에 딱 3마리밖에 잡지 않는데, 왜냐하면 내일 또 잡으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가서 뭐라고 하는가? 왜 3마리밖에 잡지 않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냥 자기 식구들이 먹을 만큼만 잡으면 되는데, 더 잡아봐야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려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자 선교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백 마리를 잡아서, 3마리는 먹고 나머지는 다 팔아서, 그렇게 해서 돈이 생기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그러면 옆 마을에 가는데 한 시간이 걸리던 것이, 이제는 10분이면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원주민들은 뭐라고 하는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남아도는 것이 시간인데, 그러니 걸어다니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리도 튼튼해지고 말이다. 그런데 그 자식들인데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TV를 통해서 드라마를 보면서, 자기 부모들이 구닥다리로 살았다고 여기고 가출을 한다는 말이다. 또한 정부에 보조금을 달라고 해서, 그 돈으로 마약이나 하고 말이다. 요즘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미국의 인디언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부탄'을 아십니까? 선교사들이 들어가면 그만 물을 다 흐려놓고 말았는데, 그러니 이제 행복은 끝났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행복한 나라가 어디인고 하니, '부탄' 이라는 곳인데, 국민의 90프로 이상이 불교를 믿는 불교국가인데, 물론 평균소득도 높지 않고 말이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나라인데, 수도에도 교통신호는 없고, 경찰이 수신호를 한다는 것이다. 행복치수가 최고라고 하는데, 아프면 죽으면 되고 말이다. 조금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부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는 말씀만 있어도, 그게 곧 부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오래 산다는 것은, 다른 곳에 가서 영생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게 잠언서의 핵심이고 본질이란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잠언서가 완성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존의 세계는 무엇인가?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점점 더 이 세상이 물질화가 되는데, 그렇게 물질화가 되면 물질이 우선이고 인간은 나중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없어지고, 물질로 만든 기계와 같은 인간들만 인간으로 취급해준다는 말이다.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 능력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자본이 없으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도태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91페이지를 살펴보자. ** 여기서 부지런함의 정의와 차원이 달라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지런함이란 농경시대의 부지런함과는 달라요. 부지런함이 육체의 부지런함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주체적으로 자립하는데 필요한 힘을 모을 수 있느냐에 관한 부지런함입니다.
◈ 어떤 부지런함인가?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스스로 자기가 살아남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부자라고 하는데, 성경이 아니고 말이다. 스스로 일어서는데 필요한 에너지인데, 바로 그 에너지를 구입할 수 있는 교환수단을 돈이라고 하고 말이다. 돈을 주고 양식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양식 안에 에너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같은 에너지가 말이다. 그것을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구입하는고 하니,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많이 짓는데, 그래서 시장에서 판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장에 팔 수 있는 것까지 많이 생산해야하는 것, 그래야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농협에 융자를 내어서 많은 노동력을 들여서 농사를 크게 짓게 되는데, 그래야 단가를 내리게 되고 경쟁이 된다는 것이다.
◈ 현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장사꾼' !! 그러니 이런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장사꾼', 그것으로 끝난다는 말이다. 교사도 장사꾼, 공무원도 장사꾼, 농부도 장사꾼, 어부도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장사꾼과 한국의 장사꾼이 서로 서해바다에서 장사한다고 바쁘다는 말이다. 요즘은 동해바다까지 붙고 난리인데, 서로 빼앗고 빼앗기면서 말이다. 한 척의 배를 건조해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물론 수협에서 돈을 빌려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고기를 잡아서 돈을 갚고, 또한 자기와 자기 가족도 먹고 살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들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장사꾼이 아니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목회자도 역시 장사꾼인데, 교인들이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찾는 가짜 예수를 자꾸만 이야기를 원하는데, 정작 자기는 가면을 쓰고 다니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잠언서를 공부한 수련회에 참석하고 난 다음에 자식을 보고, "게으르면 가난해지니까, 지금부터 방 청소를 열심히 해라" 라고 훈계를 하겠습니까? 그런 부모는 없는데, "열심히 학원에 다녀라" 라고 하겠지요.
◈ 그 결과만 따먹자 !! 여기에 다같이 '열심히' 라고 하는데, 하지만 동일한 육체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소를 하는 것과 학원에 가는 것이 말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인가? "나중에 돈이 되는 것에 열심히 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놀지 말라" 라고 해도, 경제적인 차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 잠언서 14장 33절에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라고 하는데, 왜 게으른 자가 그렇게 하겠는가? "1번, 잠이 와서이다. 2번, 결과만 따먹기 위해서이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인가? 잠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결과만 따먹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생각을 한 번 해보라는 것이다. 집안에 형이 열심히 일을 해도 돈을 벌면, 동생을 따로 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형이 돈을 벌어오면, 그것을 먹고 놀면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잘 벌면, 아들이 굳이 알바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재벌 집 아들이 돈 때문에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에서 "아들아, 왜 자꾸만 노는가? 잠만 자는가?" 라고 하는 것은, 놀아도 용돈을 많이 주니까, 그 용돈을 가지고 더 노는데 연구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어떻게 스키를 잘 타지?" 라고 하고, 날씨가 풀리면 "어떻게 골프를 필드에서 멋있게 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오렌지족의 등장 !! 그렇게 노는데 재주를 부리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재벌 집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놀면 놀수록, 더 자극적이고 짜릿한 놀이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오렌지족인데, 자동차를 몰아도 어떻게 하면 더 스피드를 내고 자극적으로 몰지, 그런 것만 궁리한다는 것이다. 놀아도 시시하게 노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더 주는 쪽으로, 돈은 얼마나 더 더는지는 전혀 구애받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스포츠카에 빠지고, 명품에 빠지고, 마약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명절이 되면 백화점이 그렇게 장사가 잘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명절에 시장을 보러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명절이 되면 여자들이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래서 "이번 설이 끝나기만 해봐라. 명품을 하나 사고 말겠어"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하나의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래, 참아야 하느니라. 이제 곧 백화점으로 달려가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수긍이 좀 되지요? (ㅋㅋ) 그러니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더 새롭고 멋있는 것으로 바꾸는, 그런 결과를 위해서 부지런함을 떠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부지런함이겠는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노리는 목표나 동기가 없으면 부지런함을 떨지 않는데, 그러니 결코 순수한 부지런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은,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어 !! 그래서 잠언서는 우리가 지킬 수가 없는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하니 속이 다 시원한데 말이다(ㅋㅋ).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이런 구조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자본주의' 라는 구조 속에서 말이다. 인격도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도 한 푼 없으면서 점잖을 떤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무슨 지리산의 청학동 훈장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은 청학동 사람들이 돈이 더 많다고 하는데, 하동시장에 가면 그들이 최고 인기라는 것이다. 한복을 입고 머리를 따고 나타나면 말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스스로 자기가 사람이라고, 즉 "나도 사람이다" 라고 하려고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성, 인격, 성격, 양심 등등, 그런 것은 이미 성경에서 요구하는 주님의 마음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한껏 '붕' 떠있는데, 돈이라는 터전 위에서 말이다. 즉 "너나 나나 똑같이 가면을 쓴 거짓된 인격들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고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실례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항상 사기를 치면서 열심히 장사를 하는데, 거기에 목사가 들어와서 복음을 이야기하면 당연히 실례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제 교재 92페이지를 살펴보자. ** 잠언 6장 6절에서 11절을 보면 개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동화책이나 이솝우화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잠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여기에 게으른 자의 규정이 나와있는데, 즉 게으른 자는 개미와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다는 것이 여기 잠언서의 주장인데 말이다. 그러면 게으른 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누가 지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개미 자체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부지런히 설친다는 것인데, 그런 부지런함의 덩치가 곧 개미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개미가 살기 위해서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개미는 부지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주님의 일일스케줄로 짜여져서 !! 바로 성도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땅에서 돈이 있다고 놀고, 돈이 없다고 해서 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함을 떠는 것이 곧 우리에게 주님이 맡기신 죄를 지은 자의 팔자라는 말이다.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을 죽도록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진해서 고생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가 마음고생을 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런 사태가 일일스케줄로 짜여져서 매일같이 들이닥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조용하다 싶으면 오히려 수상한데, 언제 일이 터질지 몰라서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놈이 팔에 깁스를 하고 등장하면, "그렇지, 터졌구나. 바로 그것이었어!"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ㅋㅋ). 그렇게 이 세상은 주님의 계획으로 꽉 차여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계획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우리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 방향으로 그것이 노출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만사는 주님의 뜻대로 되는데,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이 거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계속해서 교재 93페이지를 보자. ** 이제는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조 속에서 함께 잡혀 들어가는 형편에 놓여있다는 것을 잠언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 목사님, 백부장이 갑자기 왜 나옵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구조 속에서 함께 잡혀 들어가는 형편에 놓여있음을 아는, 그런 자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이다. 어제 설교를 하면서 백부장의 예를 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어제 설교 하나 하나가 다 어려웠는데 말이다. "목사님, 백부장이 갑자기 왜 나옵니까?"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찾아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하지만 백부장은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님을 찾아갔는데, 어떻게 말인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는 오나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이 세상이 백부장이 보기에 뭔가 꽉 차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으로 꽉 차있는 세계, 어느 한 군데 몸을 돌려도 주님의 말씀과 접촉이 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눅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이리 봐도 말씀, 저리 봐도 말씀 !! 이것은 마치 밀가루를 가지고 풀을 끓인 것과도 같은데, 처음에는 그 풀이 마치 물과 같이 줄줄 흐르는데, 그러다가 물렁물렁해지면서 굳어진다는 것이다. 거기에 볼펜을 꼽았다가 빼면 어떻게 되는가? 볼펜이 풀이 묻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입장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씀 속에서, 즉 우리의 온 몸에 말씀이 다 묻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의 신앙생활은 간단한데, 우리의 몸에 접촉되어있는 말씀을 그때그때 인식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하, 이 말씀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아하,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는 말씀 때문에 또 내가 욕심을 내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면, "아하, 그것이 나보고 하는 말씀이구나" 라고 하고,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이미 의인이 되었으니" 라고 하면, "아하, 나보고 착한 일을 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용서만이 의가 되는구나. 오히려 나의 착함으로 자랑하려는 것이 바로 죄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렇게 평소에 느끼는 것이 온 몸에 묻어있는 말씀의 풀인데, 그러니 여러분이 돌아가실 때는 말씀의 풀에 흠뻑 젖어서 가야하는데, 또 집에 가서 샤워를 한다고 하면서 왕창 다 씻어버리지 말고 말이다. 사실은 샤워가 아니라 드라마를 보면서 다 닦이고 씻기는데 말이다(ㅋㅋ). 특히 자식에게 전화라도 오게 되면 그야말로 깨끗하게 닦이는데, "야야 잘 있지? 누가 뭐라고 해도 몸 건강한 것이 최고다. 그리고 그저 싸우지 말고 살아라. 니가 참아야 한다" 라고 하면, 그만 말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자식에게 대물려준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95페이지를 보자. ** [5강, 상실에서 오는 기쁨] 잠언 20장 4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그러니 행운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인데, 지혜 안에 행운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동안의 모든 혜택도 지혜의 수고와 원칙, 노력과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행운은 없고 은혜만 있어요. (잠 20: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행운은 없고 은혜만 있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있다, 없다" 라는 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말이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있다고 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들은 반대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 행운은 없고, 은혜만 있다 !!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세계는 있는데, 하지만 없다는 것이다. 사라질 세계이니 말이다. 그래서 '상실에서 오는 기쁨' 이라는 것이다. 현재 하늘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 하늘나라를 대체하는 이 땅의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게 하늘나라의 있음을 가리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의 있음과 이 세상의 있음이 말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없어 보이고, 자기 것만 눈앞에 크게 느껴지지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그게 곧 상실인데, 즉 자기 것을 놓치는 순간, 커튼이 내려가는 순간 베일에 가려졌던 세상이 훤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우리에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적 용어로 '계시' 라고 하는데, 즉 커튼이 열려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즉 커튼이 열리게 되면, 처음부터 알파요 오메가였던 분이, 그분이 처음부터 계셨다는 말이다. 그분이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그런데 우리 자신의 눈이 그것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살아가기에 바빠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 만든 환상이 자기의 시선을 가려버렸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만든 환상에 속아넘어갔다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환상에 자기가 갇혀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강제로 우리의 꿈을 부수게 되는데, 그렇게 우리 자신의 꿈이 뭉개지게 될 때 우리는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 간통죄가 폐지되니 !!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간통죄가 폐지되니 나이트클럽에서는 축배를 해방의 들었다고 말이다. 물론 평소에 사람들이 그런 법이 있다고 해서 간통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항상 찜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없으니, 법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일종의 율법에서 해방인데, 그래서 십자가 마을의 복음을 좋아한다면 심히 수상하다는 것이다. "막 살아도 됩니다. 십일조도 없습니다" 라고 하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좋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이런 법에서의 해방보다도 더 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음에서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간통해도 괜찮아" 라는 것으로 해방감을 느끼지 말고,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아" 라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 그것을 가지고 축배를 들면서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지 싶은데, 즉 "주여, 저를 죽여주셔도 고맙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할 말을 잊었지만은 ♬ 그렇게 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즉 "할 말이 없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욥기의 마지막 장에 있는 대목인데 말이다. 왜 노래에도 "할 말을 잊었지만은 ♬" 라고, 아무튼 그런 노래가 있는데 것이다. (녹취자 - 제 아내에게 문의한 결과, 김수희의 '잃어버린 정' 이라고 합니다. ㅋㅋ) (욥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그렇게 할 말을 잊었다는 것은 언어를 잊었다는 말인데, 언어를 잊게 되면 자기 생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그러니 우리는 '내 생각에는' 라고 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꽉 차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주신 것으로 그야말로 가득한데,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은혜로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으로 꽉 차있는데, 굳이 거기에 자기의 말을 보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열심히 말해서, 그 덕분에 자기가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떡으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는 것인데, 즉 주님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그 덕분으로 우리가 살아가니, 그래서 우리는 할 말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 주님, 저에게 남아있는 행운을 주세요 !!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행운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기가 계획을 하다가 제대로 안 되니,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주님에 부탁하는 것인데, 즉 "이 부분은 주님이 좀 채워주세요" 라고 부탁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느낌으로 행운을 찾는다는 것이다. 제가 특히 미국에 가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남아있는 행운을 달라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는 그 나머지를 일가친척들이 좀 채워주는데, 그런데 미국에 가면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그러니 그 나머지 부분을 하나님의 도와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다들 교회에 나와서, 그런 식의 왜곡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뭐하노? 어서 안 따라가나? 그러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위에는 친척들이 있다는 것이다. "호적을 파라" 라고 하면서 부모가 도와준다는 말이다. "니 같은 자식은 둔 적이 없다" 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쫓아내면, 엄마가 뒤를 따라가서 "야야, 그래도 그게 아버지의 진심이 아니다. 아버지를 너를 여전히 좋아한다" 라고 하면서 봉투에 돈을 넣어주고 말이다. 그러니 남자는 말뿐인데, 괜히 권위를 세운다고 하면 "나가라. 너 같은 자식을 둔 적이 없다" 라고 쫓아내어 버리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마누라를 쳐다본다는 것이다. 왜 얼른 자식을 따라가지 않느냐는 말이다(ㅋㅋ). 폼은 자기가 다 잡고, 뒷치닥거리는 마누라가 다 하고 말이다. 하지만 행운이란 것, 그런 행운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생하는 게 자기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고생에 동참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인생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두라는 것이다. 즉 "내가 하는 일은 주님의 일이다" 라고 하는 느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주의 말씀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 인생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운을 더 이상 찾지 않는 사람이 그야말로 행운아인데, 사주팔자와 토정비결에 관심도 없고 보지 않는 사람이 정말이지 행운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즉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말이다.
◈ 성도는, 점쟁이를 찾지 않는 행운을 !! 로마서 8장에 보면, "지금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토정비결을 보고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뭔가 허전하기 때문에, 쫓기고 두렵고 떨리기 때문에, 뭔가 미진하고 불안정함을 느끼기 때문에 말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래서 자신을 믿을 수가 없는데, 믿고 싶어도 말이다. 뭔가 살아간다는 것이 항상 불안한데, 그래서 자꾸 마귀를 찾는다는 말이다. '압구정 백야' 라는 드라마를 보면, 거의 매 회마다 점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날짜를 찾고 말이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운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는 행운아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기도를 할 테니 기도의 값을 달라고 하는, 즉 기도하는 그 노동의 값을 달라는 겁니다. 내가 드릴 것을 드릴 테니, 약속한 대로 내가 대가를 받을 것을 달라는 식입니다.
◈ 자기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 그것이 바로 금요철야기도인데, 자기가 행운을 얻기 위해서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수고와 노력이 다 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려고 하면 다음과 같이 해야하는데, 즉 "어떻게 내가 노력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참여하게 하셨습니까?" 라는 감사의 기도,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가 바라지도 않던 이런 큰 행운을 주셨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겠는가? "너는 니가 아니고 바로 나다. 자꾸만 너라고 착각하지 마라. 너 속에는 니가 아닌 내가 살고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 라고 하는 자아는, 주님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용도로서 우리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96페이지를 보자. ** 잘난 체를 하다가 깨져서 "아버지 없이는 내가 못살겠습니다. 아버지가 길러주신 것이 맞습니다" 라고, 그렇게 아버지의 은혜를 알면서 돌아오게 되지요. 그래서 잠언도 이런 내용인데, "우리는 지혜가 없이는 못산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아버지 없이는 내가 못살겠습니다. 아버지가 길러주신 것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탕자비유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이번 장의 제목이 '상실에서 오는 기쁨' 인데, 무엇이 상실되었다는 말인가? '나' 라고 하는 장애물이 제거될 때, 애초부터 아버지가 길러왔음이 티가 난다는 것이다. 비로소 진리가 환하게 드러난다는 말이다.
◈ 빛이 있어라 !! 어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첫날에 만든 것이 '빛'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뭐라고 하셨는가? 사람들이 빛이라고 했는데, 즉 "빛이 있어라" 라는 것이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면 우리가 창조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즉 창조 안에서 재창조의 모습을 갖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어둠이 거두어지고 빛의 세상이 왔을 때, 주님이 만드신 창조가 우리를 통해서 개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에베소서 5장에서는 '빛의 자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밝는데, 행운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조금 전에 간통죄가 없어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간통한 사람에게 간통죄가 없어지니 그렇게 기쁘다고 했는데, 감옥에 있는 사람도 당장에 석방이라는 것이다. 기소된 것도 다 무효가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으로 바뀌었는가? 부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란 어둠이 빛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 빛이,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즉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이 된다면, 온통 우리가 있는 구석구석이, 조명시설들이 다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그야말로 환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실패하는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죄를 짓는 실수와 실패를 말이다. 그런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빛 앞에서 다 드러나기에 말이다.
◈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 빛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빛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빛 앞에서 초라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인데, 그게 바로 '상실에서 오는 기쁨' 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늙어 가는데, 하지만 빛 앞에서 늙어 가는 것은 곧 우리가 천사처럼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여러분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60년, 혹은 70년 동안 말이다. 그것은 천사처럼 되기 위한 것인데, 그러니 늙어 가신다고 수고를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80년 동안 수고하신 분도 계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빛의 세계로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빛의 광채가 비치고 있다는 말이다.
◈ 너희는 어디서 왔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너희는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린양의 피 뿌림을 받았습니다" 라고 답변할 준비를 갖추고 있고 말이다. 그러면 천사가 "어린양의 피 뿌림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러면 "그것은 십자가에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한 자들이 바로 144,000명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성령을 받은 말이다.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 그러니 모든 허물과 모든 죄를, 그것을 더 이상 씻을 제사는 남아있지 않는데,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 모든 것이 완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둘째, 셋째의 제사는 없는데, 더 이상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간통죄 폐지도 복음이 맞는데,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아서 죽어도 사는, 즉 십자가의 부활의 법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정말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날지, 그것이 의심이 된다면, 예수님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맨홀이 폭발한 것인데, 가스가 가득히 차서 말이다. 주님의 시간 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님의 시간 속에는 죽은 자도 살리는 성질이 들어있는데, 즉 새로운 묵시의 세계가 역사 속에서 폭발했다는 말이다.
◈ 오직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 그런데 그 파편이 우리에게 날아와서,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게 맞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직 예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에 말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을 하셔서 자기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을 주신 분과 연결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것을 바로 믿음을 주신 분의 솜씨라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고백, 그것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빛이 왔을 때, 그것이 제대로 된 가면임을 깨닫고, 그것을 노출시킨 기쁨을 항상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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