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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1 - 구조 / 141201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21 - 구조 / 141201

정인순 2014. 12. 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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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1 - 구조
                                                                                
                                                         

14,12,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교회에서 가난한 자는 그 누구로부터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자를 보세요. 모든 이의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만약 교회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찾아와 계신다면, 역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할 겁니다. 아마 교회의 천덕꾸러기가 되겠지요. 과연 이런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 가난한 자, 예수 그리스도 !!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 당시에 가난한 분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한 노림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노림수를 가질 수는 있지만, 성경자체를 그 노림수에 맞추어서 해석을 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즉 "복을 받아야 한다" 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성경해석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같은 성경말씀인데도 인간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해석을 했고, 반면에 예수님은 "이렇게 가난해도 성경말씀의 완성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난하게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아무도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 아담은 아담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

그래서 어제오후시간에 "아담은 아담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아담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은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게 악마인데 말이다. 인간들은 "왜 인간의 문제가 인간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왜 해결이 되지 않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제안과 해결책을 내놓지만, 인간의 문제가 인간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시는고 하니까, 하나님 자신의 품속에 계시던 독생자를 보내셔서, 물론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하나님의 원수를 상대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를 말이다. 그렇게 해서 발생되는 것이 '전쟁' 이라는 것이다.

 

 

◈ 이미 전쟁 중입니다 !!

어떤 분에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 사이트에 그런 질문을 하셨는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과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라고 말이다. 요즘 시대가 이러하니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까 싶어서 염려하는 분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미 전쟁 중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버는 전쟁 중에 있다는 말이다. 해결책은 없는데, 무조건 해본다는 것이다.

 

 

◈ 주님의 흥정이 대상이 아니기에 !!

그러니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흥정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것을 지키면 저것을 주실 것이죠?"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전혀 안 된다는 말이다.

주님의 우리의 그런 대상자가 아닌데,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우리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긍정이 되고 마는데, 즉 "내가 가난한 것은 말씀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말씀을 지키면 내가 원하는 부자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 노림수가 있으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왔을 때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해방신학자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왔다는 것은 현재 자유주의자들이나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부르짖는 것이고, 그들은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가진 자들이 예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십자가 정신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가 스톱이 된 상태인데, 즉 "왜 가난하면 되지 않는가?" 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주님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아예 죽은 자를 위해서 계시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자까지는 가지 못하고 가난한 자까지만 와서, 거기에서 유턴을 해서 다시 부자 쪽으로 어떻게 해서든 가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득의 분배를 주장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번 것을 당신이 등처먹었으니 내놔라. 그래서 평등하게 살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평등하게 살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의 해방자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 가난함에 머물지 말고 아예 죽어버려라 !!

가난했는데 부자가 됨으로 자기 자존심이 회복되는 식이라면, 하지만 그것은 어제도 이야기를 했지만,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만나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아예 새로운 판을 짜시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가난함에 머물지 말고 아예 죽어버려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죽게 되면 가난한 것도 은혜임을 알고 감사해야될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왜 가난한가?" 라는 것은 고민거리가 될 수 없는데, 또한 "나는 왜 남자친구와 헤어졌는가?" 라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희생 덕분에 살아있으니,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도 고민이 되는 것이지, 만약에 죽어버리면 그런 고민차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이미 죽음의 편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우리가 그런 안목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불철주야로 설치고 있다는 말이다.

 

 

◈ 여기를 봐야지 !!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위험한 곳으로 점점 더 기어간다고 하면, 그러면 엄마가 뭐라고 하겠는가? "아가야, 여기를 봐야지" 라고 하면서 장난감을 흔들고 하는데, 물론 실제로는 당장 날아가서 데리고 오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우리가 "왜 나는 가난하기만 하지? 예수님은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걸어가면, 마귀가 뭐라고 하는가? "여기를 봐야지. 교회가 부흥이 되어야지. 여기를 봐야지. 선교사를 많이 보내야지" 라고 하면서 유혹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는 계속해서 "교회가 부흥이 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가 아니야. 여기를 봐야지. 그리고 목사를 잘 섬겨서 너도 부자가 되어야지. 빨리 기도해서 병이 나아야지. 여기를 봐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어떠한가? 멀쩡한 사람도 죽이고 말았는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그런 경우라는 것이다. "여기를 봐야지" 라고 할 사이도 없이 그냥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죽이고 난 다음에 나흘만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해서 다시 살려냈지만 말이다.

'삼투막' 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포와 세포의 막 사이를 전해질이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자유롭게 왔다갔다하신다는 것이다. 천사도 왔다갔다했는데 말이다. 삼손의 집에 나타나서 할 말만 전하고 가버리고, 주님도 이 세상에 왔다가 가버리고 말이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하니, "너는 몰라도 돼. 따라오지마" 라고 하면서 가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졸지에 닭을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애매한 존재 !!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뭔가 여기에 있으면서도 여기에 없는 존재, 그것을 두고 '애매한 존재' 라고 하는데 말이다. 여기에 어떤 공동체가 있는데, 그 공동체에 낯선 존재가 등장하고 난 다음부터 이 공동체에 액운이 끼게 되면, 공동체는 일년에 한 번씩 그런 사람을 색출해서 처단하고, 그 시신을 광야에 버림으로 말미암아서 다시 액운이 없는 시절로 되돌아가는, 그런 반복적 종교행사가 고대민족들로부터 계속해서 있어왔다는 것이다. 

끼면 안 되는데 낯선 인간이 들어와서는, 그러니 이런 인간은 일종의 뱀파이어나 좀비와 같은 존재인데, 너무나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옛날 구약시대부터 천사들이 들락거린 역사라고 하면, 하지만 불교는 그런 낯선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도를 닦는 여부에 따라서 이 세상의 윤회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계속 쳇바퀴에 걸려들어서 돌든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 누구의 빡빡 머리가 더 예쁜가?

불교의 교리는 해탈된 사람이 빠져나간 입장에서, 즉 "나는 이렇게 해탈이 되었다" 라고 알려주어서, 그 사람도 같이 해탈이 되는 것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사랑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의 교리를 공부해보면, 인간의 의식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힘들고 고된 세상, 심지어 살아있어도 맥이 빠진 것과 같은 이 세상이 너무나도 불만스러우니, 뭔가 미지의 부푼 영혼의 영역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나 짜증스럽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렇게 점선으로 여분의 여지를 만들어서 희망을 가져보는, 그렇게 해서 이쪽에서의 고통을 덜어주는 말이다. 마치 프로포폴과 같은 마취약을 통해서 이쪽 세계를 잊고자 한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실연을 당해서 머리를 밀고서 중이 되는 여자들이 많은데, 물론 수녀도 그렇고 말이다. 머리를 빡빡 민다는 것은 일종의 오기인데, 한 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도를 닦는 것과 머리를 미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괜히 폼을 내는 것인데, 즉 "나는 이 정도로 결단력이 있는 여자다" 라는 말이다. 여자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머리카락이 얼마나 귀한 자산인지 모르는데,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나는 이 정도로 각오를 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끼리 모이면, "깍은 머리들 중에서 누가 더 예쁜가?" 라고 하면서, 또 그것을 가지고 경쟁을 한다는 말이다. 이게 결코 빈말이 아닌데, 수녀들의 세계에서 가장 힘든 것이 학력의 차이라는 것이다. "너는 어느 학교를 나왔는데?" 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게 수녀들의 세계에서 보통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수녀들이 암에도 많이 걸린다고 하는데, 병을 고치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더 걸려서 나온다는 것이다.

 

 

◈ 악마의 둥지로 제공된 몸 !!

그러니 우리 자신이 문제인데, 예수님도 그런 지적을 했지만 말이다. 남진이 부른 노래 가운데 '둥지' 라는 것이 있는데, 아마 한 집사님은 잘 알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제가 대신 부르면, "내 품에 둥지를 틀어봐 ♬" 라고 하는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 몸이 악마의 둥지로 제공된 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몸은 악마가 주는 망상을 생산해내는 공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것보다도 어떠한가? 어떤 여분의 것으로 빨리 도피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지금 자기의 괴로움을 잊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무엇인가? 환자가 되었으면 자가 치료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설프게 민간요법을 사용하다가는 몸을 다 망치고 만다는 것이다. 컴퓨터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갈 테니,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시는데, 그게 예수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치려고 오신 분이, 우리는 이미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희망에 대해서 일체 희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은 예수님보다 앞서 마귀가 준 희망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런 희망의 결과물인 중보자는 마귀가 제시한 가짜 예수라는 것이다.

 

 

◈ 내가 망상 속에서 살아왔구나 !!

그러니 예수님은 "희망은 없다. 그러니 더욱 더 절망해라. 절망하는 것이 바로 니가 살길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은 그 어떤 희망이라고 가질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통보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악마가 자리를 잡은 그 둥지자체를 이제는 주님이 관리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귀는 마귀대로 활동하게 하시면서, 그 마귀의 실체를 보게 하는, 그런 다른 새로운 요소를 둥지 안에서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하, 내가 마귀의 종으로 살아왔구나.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마귀의 협박 가운데서 두려워하면서,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살아왔구나. 망상 속에서 빠져서 살아왔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주님의 희생 덕분에 살아왔으면서도, 마치 자기의 노동 덕분으로 살아왔다고 하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모습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73페이지를 보자.

**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한 자'가 된 거예요. '가난'은 나쁜 것이지만, '가난한 자'는 나쁜 자가 아니에요. '가난한 자'는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가는 메시아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 '가난한 자'와 '가난' !!

가난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자는 나쁜 자가 아닌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예수님도 나쁜 자가 되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왔다는 것은, 가난함 그 자체가 주님의 뜻의 완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 말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즉 마귀가 "부자가 되세요" 라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집들이용 화장지에도 보면 '잘 풀리는 집'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부자가 희망인 세상에서 차라리 가난의 절망적인 모습 속에서 주님께서 일을 개시하신다는 것이다. 즉 '나보다 더 가난하게 되신 분' 이라는 말인데,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이 무서운데, 그렇게 우리가 무섭다고 하는 그 가난 속에서 오히려 구원의 모습을 찾게 하신다는 것이다.

 

 

◈ 성탄절만 되면 마귀가 !!

일년을 마무리하는 행사 가운데 하나가 크리스마스, 즉 성탄절인데, 그 성탄절만 되면 방송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수님의 정신으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자" 라고들 하는데, 구세군 냄비도 등장하고 말이다. 그게 바로 마귀의 멘트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탄절의 정신은 무엇인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런 성탄절의 정신에서 예수님의 가난이라는 모습은, "나처럼 가난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그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특수한 가난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74페이지를 보자.

** 따라서 잠언서는 인간현실을 생생하게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그 안에서 배태되고 몸부림치는 인간본성을 추적하면서 의미를 쏘아대는 것이 잠언서이고, 지혜입니다.

 

 

◈ 주님의 몸에서, 의미를 쏘아대니 !!

여기를 의미를 쏘아댄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몸이 있다면 그 몸의 내부에서 쏘아대는 의미가 따로 있고, 또 주님의 몸으로서 쏘아대는 의미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잠언서에서는 두 가지의 몸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현재 우리의 몸이고, 또 하나의 몸은 점선으로 된 몸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바로 이 점선으로 된 몸을 중심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서 쏘아대시는데, 잠언서는 구약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그 대신에 언약이 나타나는데, 그게 잠언서는 곧 다윗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다윗의 아들, 곧 다윗의 자손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이 잠언서를 쏘아댄다는 것이다. 어디에 근거해서 말인가? 자신의 몸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험해서 살지를 못하겠다고 아우성인데,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현실 속에 있어. 그러니 그렇게 불평을 하면 곤란하지.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그런 짜증나는 현실 속에 있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러니 그런 환경을 탓하지 말고, 나도 너희들과 동일한 환경 속에 있지만, 하지만 이렇게 얼마든지 지혜를 발휘할 수 있잖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하루하루 사는 것이 무섭습니다 !!

그 지혜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무섭습니다. 너무 아슬아슬합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은 "그게 바로 지혜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산다는 것이 결코 내일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 그게 바로 지혜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일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만 의지한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 만나의 특징은, 저장이 되지 않아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만나가 무엇인가? 만나의 특징은 저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만나는 무엇을 의지하게 만드는데, 무엇을 말인가? 주님께서 벌리시는 일을 의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의 가치는 날아가는가? 자기가 벌리는 일의 가치는 언제나 삭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봐야, 애굽에서 했던 그 방식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 공부를 잘하는 놈들은 !!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못하는 놈들이 시간만 축내고 있는데,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서 말이다. 잘하는 놈들은 화장실에 가서 잠시만 봐도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놈들은 "여기서 뭐가 쏘는 것이 있는가?" 라고 하는 반면에, 공부를 못하는 놈들은 "내일 시험을 잘 쳐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놈들은 공부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즐거움에 빠져서 공부를 재미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놈들은 "공부하는 것이 제일 재미있고 쉽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쉽다고 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공부가 제일 재미가 있다는 것은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못하는 놈들은 공부가 하기 싫은데, 하기 싫은 것을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될 리가 없다는 말이다. 

 

 

◈ 너희들,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이 즐거운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무엇인고 하니,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이 즐거운가?" 라고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즐거운데, 자기는 죽고 난 뒤에 갈 곳에 있으니 얼마든지 그런 아슬아슬함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닌데, 우리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살아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 세상을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적합하게 바꾸는가?" 라는 것에 집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를 죽이는 세상이지, 살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도 우리가 고르게를 먹고 있는데, 이런 기름에 튀긴 것이 몸에 해롭다는 것이다. 불포화산 지방산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말이다. 이것은 애굽에서 먹든 만나인데, 광야에서 먹든 게 아니고 말이다. 주님의 만나는 우리를 살리고, 반면에 애굽의 만나는 우리를 죽인다는 것이다. "여기를 봐야지. 말씀 말고, 맛있는 것이 있는 여기를 봐야지" 라고 하면서,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아슬아슬하게 사는 세상을 나도 아슬아슬하게 살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남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가?' 라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집에 잠입된 이삭 !!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인데, 그 예가 바로 아브라함의 집에 잠입된 이삭이라는 말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혈육과는 상관이 없는데, 즉 혈육이 아닌 약속으로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가정이 혈육이 있고, 그 혈육에 약속이 끼어 들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문은 무엇인가? 혈육에 의해서, 즉 아브라함 본인의 의도에 의해서 움직이는 가문이 아니라, 투입된 약속에 의해서 변형된 가문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에게 약속이 투입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자꾸만 꼬이면서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 인생이 변형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변형된 것을 아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망상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즉 어떤 두려움에서 쫓기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착한 일로 맞서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착한 일로 맞서다보니, 점점 더 착한 일을 추가해서, 그런 착함의 폭발이 일어나게 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 유신자(有信者)의 특징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 !!

어제 낮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티를 내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란 말이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30년 이상이 걸린 분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지요?

(녹취자 - 목사님, 저는 주님의 은혜로 겨우 20년이 걸렸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곧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것처럼 티를 내는, 즉 유신자(有信者)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의 놀음에 말려든 것인데, 거기에 빠져들게 되면 점점 더 미로에 빠져서, 나중에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순종하는 자기 자신을 믿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예수님이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면, "그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의인이잖아요" 라고 하면서 대들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덤비는 것이 곧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 대드는 것인데, "모든 목사들이 다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당신이 뭐기에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도 늘 옥에 갇혀있던 마음가짐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형들이여,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형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들을 정죄할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저도 이용을 당한 것밖에 없어요" 라고 하는, 이것이 곧 지혜의 결정입니다.  

요셉이 이런 이야기를, 물론 즐겁게 할 수도 있겠지만, 요셉이 이런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자기 뜻이 희석되고 얇아져야 하는지 모르는데, 결국은 다 날아가 버리고 말이다. 그런 고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편 105편에서는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게 얼마나 무섭고 겁나는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편 105편 16절에서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시 105: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시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

여기 19절에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이 되도록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17절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라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

요셉의 경우에, 그가 꿈을 꾸어도, 물론 요셉은 자기가 그 꿈을 소유했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그 꿈의 내용을 본인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 꿈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요셉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 중간과정은 다 생략되고, 나중에 자기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에게 절을 받는 것만 먼저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셉은 중간과정은 모르는데, 자기는 꽃가마를 타고서 폼을 잡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최고가 되는 줄로 말이다.  

그런데 꽃가마는 고사하고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것을 제가 "여러분, 절망하세요!" 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이삭도 마찬가지인데,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조그만 더 빨리 칼을 내리쳤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약속의 아들이 죽는 순간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만, 멈춰라!" 라고 하는 순간, 이것을 영화로 그려내면 칼끝이 이삭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인데, 아마 그 간격이 1미리도 되지 않지 싶은데, 그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시겁을 했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이삭도 그렇고 말이다. 멈추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데,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이것을 가지고 씹는 분들이 계시는데, "목사님, 저는 제 인생에 있어서 왜 '멈춰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까요?" 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더 힘들고 무서운데, 평소에 우리는 우리가 멈추지 않아도 남들이 다들 멈춘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길을 건너니 차들이 다 멈추는데, 그래서 아직까지 생존해 계신다는 말이다(ㅋㅋ).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멈추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멈추고 비쳐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이 아니면 닫게 해주시고 말이다. 수많은 멈춤이 우리도 모르게 이미 많이 지나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살아왔다고 우기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 오늘도 소보르를 먹으면서 !!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제가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요셉처럼 "형들이여,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형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했습니다" 라고 하라는 것이다. 주께서 사도바울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만난 적도 없고 그 이름도 모르지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는 이렇게 여기서 소보르를 먹으면서 살아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먹고 힘을 내어서 누구인지 몰라도 또 살려야 하는데, 즉 성도는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고, 반면에 불신자는 또 누구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말은 곧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 자체를 정당화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가난은 나쁜 것입니다.

 

 

◈ 성도는, 주님의 개입을 증거하는 것 !!

그러니 잠언서는 잔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잔소리에 따라서 주님이 우리에게 개입을 하신다는 것이다. 개입이 되면 언약의 사람이고, 그게 아니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신다면, 제가 대답을 수천 번 이상을 했지만, "여러분 속에 개입하신 주님을 증거하세요" 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인데, 그게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신앙생활이 아닌데, 그것은 자기 자랑질에 불과하고 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주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용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 4강, 덮인 구조 !!

이제 4강을 보겠는데, 그 제목이 '덮인 구조'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냥 구조가 아니라 덮인 구조인데, 영어로 하면, 프레임이고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말로 하면 '체계'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틀이 잡혀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게 구조이니 말이다.

요즘 집을 짓는 것도 보면, 이미 공장에서 다 만들어와서는 크레인으로 가져다가 끼워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블록을 쌓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조립식 주택인데, 최근 들어서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구조가 마치 블록을 쌓듯이 짜여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구조가 아니라 덮인 구조인데, 그렇게 구조가 우리를 덮치니 우리가 어떻게 애를 쓴다고 해서 구조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제가 방금 성도는 주님의 개입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덮어주신 구조를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더 간단해졌는데, 자기가 기쁘고 슬프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하는 것보다도, 이제부터는 "성경구조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냉철하게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감정에 휩쓸리게 되면, 이런 구조보다 자신의 멜랑코리한 면을 신앙이라고 증거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의식은, '전의식'과 '무의식'으로 !!

여기서 잠시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것이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나눠지는데, 제일 윗 부분에는 냉철한 이성이고, 그 다음이 감정이고, 그 밑에는 무의식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 위에는 전의식이 있고, 그 위에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낮에는 무엇이든지 의식을 하지만, 하지만 밤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꿈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전의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꿈에조차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의식' 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무의식이 자기는 나타나기를 거부하면서 낮에 있는 의식으로 엉망진창으로 조립한 것이 곧 전의식이라는 것이다. 즉 무의식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한 의식을 동원해서 자기 속에 깊숙이 들어있는 무의식을 감추려고 한다는 말이다.  

 

 

◈ 무의식의 세계는, 자아도 관여할 수 없어 !!

그래서 꿈은 얼룩덜룩한데, 줄거리가 제대로 맞지도 않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극도로 자기의 본심을 자기가 숨기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자아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고 하니, 전의식까지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을 깨라" 라고 해서 깨어나게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 자아마저도 관여할 수 없는 것이 무의식의 세계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칼 구스타프 융' 이란 심리학자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무의식은 개인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전체, 즉 인류 전체의 공통적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식세계와 전의식의 세계는 의학으로 다룰 수가 있는데,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는 그게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미치겠다고 하면, 그것을 어떻게 말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약을 먹여서 억지로 잠을 재울 수는 있지만, 하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또 미치는 것이 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는 무의식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인데, 인간의 무의식을 다룰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지금까지는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귀신을 상대로 해서 귀신을 조정할 수 입장에 있지를 못하는데,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그게 반대로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처음부터 미친놈 !!

그러면 "그렇게 무의식이 설치면 우리는 미친놈이 됩니까?" 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미친놈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미치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그렇게 처음부터 미쳐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미친 인간을 의식과 교육으로서 전의식에서 이것을, 즉 비록 얼룩덜룩하든지 간에 전의식에서 편집을 하는 능력이 있는 자를 '정상인'으로 보는데, 물론 미치기는 미쳤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편집할 능력이 없어서, 자기를 위장하지를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버려서, "나는 나폴레옹이다" 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비정상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다같이 나폴레옹인데, 하지만 자기는 마음 한 편으로는 나폴레옹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되고 싶어도 참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미친놈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외치면서 돌아다니니 정신병원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병원에서는 어떻게 고치는가? "이제는 나폴레옹이라고 하지 말고, 전두환이라고 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래, 나는 전두환이야" 라고 하면, 정신병원에서는 "이제 다 나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퇴원을 시킨다는 것이다(ㅋㅋ).  

 

 

◈ 인간의 욕망은 물침대와 같아서 !!

아무튼 인간의 정신은 물침대와도 같아서, 이것을 이렇게 정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불교에서는 이것을 욕망이라고 하는데, 이 정신과 욕망은 제거가 되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다른 한 쪽으로 대체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제거가 아니라 대체가 될 뿐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도박을 하는 인간에게 뜨개질을 하는 것을 가르쳐서 거기에 몰입하게 한다든지 말이다. 또한 하루가 멀다하고 산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서, 성경공부에 빠지게 한다든지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낮에 뭐라고 했는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다른 더 재미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ㅋㅋ).

 

 

◈ 인간은, 평생을 눌려대면서 !!

그렇게 인간의 욕망은 물침대인데, 여기서 눌리면 저기서 올라온다는 것이다. 저기서 눌리면 여기서 올라오고 말이다. 안에 들어있는 물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은 편재되어있기 때문에, 여기서 눌리면 저기서 솟아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평생을 그런 짓을 하다가 나이가 84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이가 70이 넘은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나서, 그 다음의 희망사항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도 할머니를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새 장가를 가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를 대체할 욕망이 새로운 할머니와 연애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노망이 들었다고 너무 야단을 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ㅋㅋ).

 

 

◈ 무의식에게 놀림감이 된다는 것 자체가 절망적 !!

그러니 이러한 구조가 우리 인간에게는 상당히 절망적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존심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자기 손에 장악해야 안심이 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의 무의식을 장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놀림을 받고 있는데, 즉 무의식에게 놀림감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자존심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할 수 없다"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그러면 자기가 공격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패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그러니 그것을 미리 당겨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절망적으로 몰아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뭔가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어 !!

그러면 이런 사실을 불신자도 아는가? 물론 아는데, 그것을 어떤 징후로 알게 되는고 하니,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가 자꾸만 쫓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꾸만 쫓기게 된다는 것이다. 꿈에서도 쫓기고, 꿈이 아닌 것에서도 쫓기고 말이다. 뭔가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망칠 수밖에 없고 말이다.

보통 며느리의 경우에는,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꿈을 꾸고 나면 그야말로 땀에 흠뻑 젖는데, 그러면 황금 한의원 원장님께서 보듬어주면서, "무슨 심한 악몽을 꾸셨습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술과 담배와 로또, 혹은 주식투자 등등,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면 나의 물침대를 보다 더 안정화를 시킬 수 있을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애를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도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하면, 보다 더 안정된 가운데서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다.

 

 

◈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불안한 가운데서 결혼하게 되면, 그 결혼에 더 집착하게 되고,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야"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상대방에 대해서 집착을 강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은 부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근을 해서도 계속해서 집에 전화를 하는데, "지금 잘 있나? 옆에 무슨 소리가 나는데, 누구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결혼의 단꿈이 다 깨어지고 나면 "나는 니가 지겹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여자는 "오빠, 정말로 이렇게 나오기야?"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남자를 보고 '여보' 라고 부르지 않고, 왜 '오빠' 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정이 되어있어야, 그래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덮친 구조가 안정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에도 변하지 않는 구조를 주님은 주셨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35절에서 39절까지 보자.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끊을 수 없으리라 !!

여기 38절에 보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라고 하는데, 여기사 권세자들은 마귀를 의미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덮친 그 구조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인가? 39절에 보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를 덮친 구조를 결코 망가뜨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우리 자신의 기분을 증거하게 된다면, "요즘 내가 기도를 하니, 너무 기분이 좋아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조가 아닌데, 오전 10시에 그런 기분이라고 해도, 오후가 되면 기분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도 장담하지 못하는데, 장담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기분이 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차갑고 냉정해야만 하는데, 너무 붕 떠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만 자기 기분에 놀아나면 추락하는 수가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기분이 다운되게 되면, 기분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맞아" 라고 하게 되면, 옆에서 달래주기도 곤란하고 말이다.

 

 

◈ 목조르기 한판 승 !!

자기를 덮친 구조를 봐야하는데, 자기에게 덮인 구조를 말이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를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4강 제목을 '덮인 구조' 라고 붙여보았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그러한 의미라는 것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왜 유도시합을 할 때 보면, 목을 졸라서 30초가 지나면 한 판으로 쳐주는데, 완전히 덮쳐서 말이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우리가 마귀로 인해서 얼마나 우리의 욕망이 출렁거렸으면, 주님께서 이렇게 완전히 덮쳐서 목을 졸라서 한 판 게임으로서 마무리를 하시겠느냐는 것이다.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눌려서 명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눌려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특기는 촐랑대는 것인데, 돈이 좀 생기면 촐랑대고, 또 사기를 당하면 낙담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덮인 구조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 구조와 주체 !!

그러면 이 구조의 반대는 무엇인고 하니, 이 구조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알려고 하면, 그러면 도대체 불안정한 것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안정되게 하려고 하셨느냐는 말이다. 이 구조의 반대말을 현대 학문에선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주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체의 반대말은 주님의 주신 구조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 주체의 반대말을 '객체' 라고 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인데, 하지만 과학이 안정된 구조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경제학자들이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주 난해한 수학까지 동원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내년 3월에는 주식이 얼마까지 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브라질 펀드에 넣으시면 얼마의 수익을 볼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온 정신을 거기에 다 팔고 있다는 것이다. 돈 문제가 관련되어있기에 말이다.    

기름 값은 어떻게 되고, 환율은 어떻게 되고, 또 부동산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사놓으면 돈을 왕창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들리기로는 땅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보다도, 자기가 파니까 땅값이 올랐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ㅋㅋ).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있는 것도 백분의 일로 줄어들고 마는데, 2차대전 때는 독일에서는 이런 컵 하나의 값이 엄청났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돈이 돈이 아니라 휴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도 남미에서는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는 것도 주님의 희생덕분인데, 성경말씀에 그게 나오는데, 물론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안정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안정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손에 달려있는데, 요동을 치고 하는 것도 말이다.

 

 

◈ 구조와 언약 !!

인간의 주체는 객체를 파악해서 그때그때 대처하게 되면 주체가 안정된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실패인데, 그 어떤 돌발변수가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돌발사태를 미리 앞당겨서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어차피 모든 변화는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객체이든 주체이든 말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구조 안에 갇혀 있는데, 이 구조를 성경에서는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새언약인데, 옛언약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면 옛언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새언약을 알 수 있는데, 옛언약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 라고, 그게 신명기 28장에 나오는데, 즉 말씀을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예수님의 공로로만 얻어지는 복에 참여하는가?

그러니 인간들이 참된 복을 얻기 위해서는 순종해야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순종할 수 없는 주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순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바로 이것을 아시고 주님은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복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복은, 제대로 순종하시는 예수님에게만 주어지는 복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공로로만 얻어지는 복에 참여하는가? 참여하지 못하는가?" 라고 하는, 그것으로만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데, 그러니 이게 우리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문제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복을 완성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 복에 참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복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치를 왜 인정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아직도 옛언약에 속했기에, 즉 자기 힘으로 순종해서 복을 쟁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굳이 예수님이 왜 필요하냐는 말이다. 자기가 이렇게 잘났는데 말이다.

 

 

◈ 순종배틀 !!

어제 낮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어느 정도로 착해지는가?" 라는 것을 한 번 테스트해보겠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낸 숙제보다도 더 많이 함으로서, 선생님이 자기에게 간섭하려는 것을 애초에 차단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보겠다" 라는, 일종의 오기가 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순종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 목사들이 설교시간마다 "여러분, 순종하세요" 라고 하니, 그 순종하는 것이 맛이 들어서 "순종이 제일 쉬워요" 라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순종배틀'에 들어서 시합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순종시합을 하니, 그렇지 않아도 미쳐있는데, 더욱 더 미친놈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아예 TV에서 기독교방송 채널을 삭제해버렸는데, 괜히 보고 설교시간에 이야기하다가 교인들에게 짜증을 줄까 싶어서 말이다. 그쪽 동네는 분명히 아닌데, 그러나 아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이게 반드시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끔 들려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속이 상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구조인데, 그런데 왜 사람의 기분을 가지고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목사들이 인간의 정신을 장악해서, 그렇게 교인들을 자기 손아귀에 집어넣어서는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목사님, 참 인물이 좋네요 !!

하지만 목사는 어떠해야하는가? 예수님처럼 애매해야하는데,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닌, 애매한 존재 말이다. 그래서 복음을 좋아하다가 어느 날 복음 이외의 것을 좋아하게 될 때, 거기에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을 전하는데, "목사님, 참 인물이 좋네요" 라고 하면,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이 중요하지 인물이 문제가 아닌데, 물론 여기는 그런 인물이 없으니 마음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말이다(ㅋㅋ).

"목사님은 복음보다도 돈이 많네요. 사택에 비밀금고가 있다면서요?" 라고 하면, 그것은 매우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우리 목사님은 너무 가난해서 월세도 제대로 내지 합니다" 라고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은 너무 부자라서, 제가 어려울 때는 생활비도 보태줍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누구를 도와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감독이 된 자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도와주면 안 되고 그냥 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를 도와주면 위험한데, 그렇게 되면 그 목사는 갑이 되고 나그네는 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혼을 또 그런 식으로 장악하게 된다는 말이다.

 

 

◈ 구조는, 지혜로 만들어 !!

이제 교재 76페이지를 보겠는데, 아무튼 이렇게 구조가 있는데 그 구조는 고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님, 그 구조는 어떻게 만듭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잠언으로, 즉 지혜로 만든다는 것이다. 지혜로 구조를 만드는데, 그러면 어느 세월에, 언제 만드느냐는 말이다.  

아까 요셉을 이야기했는데,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런데 그 꿈은 중간과정이 다 생략되고 끝 부분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열 한 개의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또한 해와 달도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스바 여왕이 찾아왔는데, 스바 여왕이 지혜를 다 알았는가? 그게 아니라, 뭔가 끝 부분을 들고 안다는 것이다. 요셉이 마지막을 알고 그 중간의 고난과정을 다 견딘 것처럼 말이다.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와 같이 구조로 된 것은 딱 보면 아는데,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스바 여왕이 찾아왔는데, 물론 여기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말이다. 지혜를 듣고 찾아왔다가 솔로몬의 인물과 재산을 보고 반해서 그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래서 세운 나라가 에디오피아라고 하는데 말이다. 무슨 야사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는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왕상 10:6)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왕상 10: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왕상 10:8)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 예수님의 지혜 - '나랑 같이 죽자' !!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남방의 여왕이 온 것처럼,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나를 '딱' 하고 알아보는 자가 누가 있는가?" 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지혜를 말해줘야 우리가 믿던지 말던지 하지"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궁금해? 내가 보여줄 지혜는 요나의 표적이다" 라고, 즉 "죽는 것이다. 왜 따라올래?"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왜 그러한가? 예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느냐는 말이다. 사람들이 지혜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지혜를 찾으면 그것을 활용해서 살고자 하는 자기가 더 살려고 하는데, 그래서 지혜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지혜는 무엇인가? "나랑 같이 죽자" 라고 하니, 그러니 그것은 그들에게 애초부터 탈락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이 무엇인고 하니, 자꾸만 만날 듯하면서 갈라지고, 만날 듯하면서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쫓기면서 "지혜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자기 주체를 안정시키려고 그것을 찾는데, 즉 구조는 전혀 모르고 자기가 안정되면 세상 만사가 안정된다고 본다는 말이다.

 

 

◈ 존 로크와 칸트 !!

존 로크는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감각으로 새로운 현실상을 만든다" 라고 했는데, 나중에 칸트가 그것을 완성했는데, 즉 "세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기 나름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각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 다른데, 즉 각자의 세상이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건이 터져도, 그것이 자기 인생에 의미가 있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 구성된 세상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동일한 일이라도 말이다. 세월호 사건의 경우에도, 그 부모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아프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자기는 안정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외부인이 오게 되면 안정감이 불안정한 것으로 바뀌는데, 왜냐하면 외부인이 새로운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 인생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공격을 받아서 흠집이 나기 때문에 말이다. 

 

 

◈ 레비나스와 마르틴 부버 !!

그래서 '레비나스' 라는 사람이 칸트의 윤리를 공격하는데, "나는 착하다" 라고 하는 칸트의 윤리를 말이다. 그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윤리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윤리를 위해서 나의 윤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윤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양반은 유대인인데 말이다. "'타인의 얼굴' 이라는 찡그러짐, 아픔, 고통, 피 흘림, 그것은 바로 나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찾아온 나의 본질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그것을 듣고 특히 신부들이 난리가 났는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의 주장에 십자가 정신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유대인인데 말이다. 즉 "나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타인의 등장이 곧 메시야의 등장이다"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철학에 이름을 붙이면 '타인의 철학'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이전에 같은 유대인인 '마르틴 부버' 라는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뭐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이 과학시대에, 자본주의 시대에 참된 윤리라는 것은, 나만 잘났다고 하면 안 되고, 너와 나의 관계성에 유지되어야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 신자인데 말이다.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는고 하니, 예레미야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의 글에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으로 와서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르틴 부버가 레비나스보다 먼저 약간의 언질을 주었고, 레비나스는 그 체계를 보다 더 확실하게 잡았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 과연 이들의 주장이 맞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주장이 맞는가? 굉장히 솔깃한 주장들이 많은데 말이다. 제가 앞서서 구조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런 것이 굉장히 복음적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너와 나가 만났다. 그런데 뭐? 여기에 뭐가 있는데?"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는 '너'와 '나'가 만나면, 즉 주체와 주체가 만나면 거기에서 만들어낸 합동 주체, 즉 또 다른 주체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주체는 안정이 되는가? 과연 그 구조가 안정이 되느냐는 말이다. 제3자가 오게 되면 또 다시 불안정해지고 마는데, 그러니 도대체 언제 안정이 되느냐는 것이다. 언제 말이다.

그러면 모든 주체가 다 부정을 당하는 사건은 무슨 사건인가? 이것은 자기가 아프고 희생을 당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된 언약인데, 그 새언약으로 피를 흘릴 때, 모든 인간들의 구조 만들기는 다 허사라고 하는 것이 들통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해야하고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 그런 양반들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끼리 착함과 선함을 총동원해서 인류를 책임지자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이 과연 안정된 구조이냐는 말이다.  

 

 

◈ 인간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데, 하지만 !!

강의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 악마를 이기지 못하는 이상 그 어떤 몸부림도 그야말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손대지 말라는 것인데, 주님의 구조 안에서 주님이 다루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안정된, 즉 "죽어도 살았고' 라고 하는 안정감에서, 그러니 여기에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그런 것이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빈부의 격차가 소득의 재분배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이미 죽어서 마땅한 존재인데,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언약을 증거하라고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면, 온갖 고상해 보이는 사상들이, 레비나스가 얼마나 고상해 보이는가? 앞으로 그런 육적인 사상들을 우리가 만나게 될텐데, 그것은 바로 주께서 일부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전파하라고 주신 기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우리 스스로 살피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레비나스의 철학과 같은 것이 주님의 구조에 비하면 얼마나 불안정한지, 무엇인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구조가 이미 덮어씌워졌는데, 우리는 그 주님의 구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체의 안정감을 위해서 또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손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의해서 우리가 끌려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