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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10 - 잠 8:35 / 발견과 발견 안됨 / 140616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10 - 잠 8:35 / 발견과 발견 안됨 / 140616

정인순 2014. 6. 16. 14:25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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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0 - 발견

                                                           

14,06,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지혜와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이 왜 인간이어야 하는지가 밝혀집니다. 즉 인간은 결코 인간을 위한 존재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위한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짐승 취급을 받아도 쌉니다. 그래서 8장 35절과 3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

여기 35절에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라는 것이다. "생명을 얻는다" 라고 하니까 말이다. 죽음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이게 구라인지 진짜인지 몰라도, 우선 챙기고 봐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생명이니 말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죽어가고 있는 입장에서 말이다.

영생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급선무인데, 로또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에 당첨이 된다고 해도, 그 순간에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생이 오게 되면, 우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전부인데,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주겠다고 하니 우리는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감나무 밑에 있는 감은 주우면 되고, 요즘은 오디가 나오는 철인데, 그 오디는 털어서 손으로 주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35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감도 아니고, 오디도 아니고, 수박도 아니고, 참외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나를 얻는 자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물건이라고 하면 주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참 쉽고 좋겠는데 말이다.

요즘 TV를 보면 건강에 관한 프로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몸에 좋으니, 갈아먹으면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그게 야채든 무엇이든 갈아먹으면 되는데, 즉 자기 말고 다른 인격체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생명도 그런 식으로 가질 수가 있다고 하면 좋은데, 즉 "생명나무 과일이 있다. 이것을 먹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에덴동산시절이 참 좋았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 과일을 갈아먹든지 씹어먹든지, 일단 먹으면 영생을 얻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생명나무는 무엇인고 하니, '나를 얻는 자는' 라고 하시는데, 과일과 같은 물건이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생명나무의 과일을 따먹고 영생을 얻는, 그런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다. 이제는 "내가 곧 생명이다" 라고 하는, 즉 예수님을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36절에 보면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심판과 같이 영원히 가는, 그런 저주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생명의 문제는 정치나 경제문제보다도, 세월호 사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아니 영원히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가 5년을 섬기다가 6년째는 그만 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강의를 조금 어렵게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말이다.

 

 

◈ 5년 동안은 잘 사귀었는데 !!

여기에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라고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어떤 아저씨를 안다고 하면, 그런데 그 아저씨가 하는 말이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아저씨와 사귀는데, 5년 동안은 잘 사귀었는데 어떻게 하다가보니 6년째에 그만 헤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는 "생명을 얻은 것인가? 얻지 못한 것인가?" 라는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즉 알고 지내는 사이이지만 이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오랜만에 만나면 또 반갑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참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의 경우에는, 처음에 자식을 얻었을 때는 참 예뻤는데, 5살이 되면서 아이가 반항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둘째도 생기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초등학교를 가고 하면서 어릴 때만큼 귀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자식을 얻은 것인가? 잃은 것인가? 이럴 경우에 말이다. 누군가가 "자식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없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그렇게 물으면 "자식이 있습니다. 20년 전에 낳은 자식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분명히 자식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술친구를 얻는 것처럼 얻는 것이 아니라, 술집에서 만나서 서로 친구를 하기로 하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고, 가족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가족이 말이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오니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 여기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만나려고 왔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 12: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 죽어도 갈라서지 않는 관계 !!

그러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얻은 것인가? 아닌가?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혈육적 관계가 아니라, 다른 관계로서 혈육보다 더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영생을 얻기가 힘이 드는데 말이다. 영생을 얻으려고 하니, 예수님께서 "나를 얻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친구처럼 알고 지내는 사이로서는 안 되고, 그리고 사실 가족도 안 되는데, 죽으면 갈라서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영생을 얻는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죽어도 갈라서지 않는 같은 공간 안에 같이 지낼 수 있는 사이, 그런 관계가 곧 영생을 얻은 관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자기가 결심하는 것은 자기가 죽는 순간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결심으로 영생을 얻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 짓이란 말이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결심했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사자인 자기가 죽어버리면, 자기의 그런 결심과 의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지 말고 매장을 해라" 라고 백 날을 부탁해도, 매장을 하면 번거러운 것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마다 벌초를 하는 문제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장례 도중에 가족회의를 하는데, 매장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모두가 바빠서 아버지의 무덤을 돌봐줄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를 한 결과 화장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아버지가 아무리 유언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자가 일어나서는 "내가 분명히 화장을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이게 뭐야?" 라고 하면서 따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미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그러니 결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우기는 자들만의 결심이지, 죽는 인간들의 결심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누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느냐는 것인데, 그러니 정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즉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는다. 반면에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라고 하는 말씀을 끄집어내신, 바로 그분에 의해서 이런 사실이 구체화가 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마음을 어떻게 다잡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 라고 했으니, 내가 예수님을 얻어야지" 라고 하다가도, 그만 자기가 죽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책임은, 말을 끄집어낸 쪽에서 !!

다시 정리하면, 중요한 것은 말을 끄집어낸 쪽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그런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책임을 지고자 하지만,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말에 책임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이다.

 

 

◈ 집사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규정을 !!

이번에 서울에서 강의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디모데전서 3장인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집사가 되는 사람에 대해서 나오는데, 3장 8절에 보면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마 뜨끔한 사람들이 많지 싶은데(ㅋㅋ), 즉 한 입을 두 가지 말을 하는 사람은 집사로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딤전 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한 입을 가지고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즘 문창극이 세월호를 눌리고 있는데, 그 문창극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은 상황에 맞추어서 말하는데, 우리의 이 주둥이가 자기에게 달렸다고 해서 자기 주둥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황에 달린 주둥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하면 유리하게 이야기하고, 불리하면 불리하게 이야기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라고 하는데, 그러한 사람이 집사라고 한다면, 자격이 되어서 집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 앞에 보면 감독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것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나오는데, 이런 감독은 없다는 것이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그러면 정답은 무엇인가? 그런 목사나 집사를 구하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는 없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자기가 집사가 되고 난 뒤에 보니,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런 조건에 맞추었다고 규정해버린 자들만 집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규정을 말이다. "내가 집사가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사가 되고 난 뒤에 보니, 거기에 맞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하셨다는 것이다.

 

 

◈ 아하, 나는 집사가 될 자격이 전혀 없구나 !!

그러니 그 조건이 우선이지 자기 자신이 우선이 아닌데,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집사답지 않다고 하시니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그 누구라도 스스로 집사가 될 자격이나 권한이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집사가 되게 하고, 또한 감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지 싶은데, 즉 성경에서 "집사는 이러이러해라" 라고 하는 것은, 집사가 되고 난 다음에 자기는 도저히 집사가 될 수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차후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주제파악을 하는 자만이 진정한 집사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사람은 복음만 증거하기에 말이다.

이러한 원리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까, 잠언서 8장 35절에 있는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는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즉 "나를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을 얻을 자가 생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예수님께서 단언해서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 어느 시대이든 간에 예수님을 믿을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래, 니 말이 과연 맞다. 하지만 나를 얻어서 생명을 얻는 사람이 나오도록 내가 알아서 조치를 취하겠다" 라는 것인데, 오직 그럴 때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나오고 발생이 되고 생겨난다는 것이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데 말이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의 뜻은 곧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내 속에 주님의 자리가 있다 !!

그러니 우리가 이 말씀을 보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법으로서 따질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끄집어내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내 속에 주님의 자리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2장 29절과 같은 의미인데, 즉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남긴 모든 말씀도 같이 살아나는 것인데,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숲에서는 나무가 일어선다 !!

최성화의 시에 보면, "숲에서는 나무가 일어선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의 책제목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숲에는 나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어서 있다는 것이다.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숲에서는 나무가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 안에서는 누가 주인공인가? 예수님이 주인공인데, 즉 예수님이 일어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아도 예수님은 놀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껍데기는 늙어가고 있지만, 하지만 주님은 젊다는 것이다. 주님은 여전히 20대이고 생생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껍데기가 늙어간다고 결코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유지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애터미로 해결이 되지 않아도 주님은 하신다는 것이다. 아마 녹취하는 사람은 애터미가 뭔지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

(녹취자 - 저도 애터미 치약 애용자입니다. 잇몸이 좋지 않아서 말이죠. 개인적으로 몇 년 전부터 알았는데, 요즘 갑자기 우리 동네 여기 저기에 깔려서 좀 의아해했습니다. 목사님 동네도 그런가 봅니다. 제2의 암웨이를 꿈꾸는 것 같은데, 제품들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ㅋㅋ)

 

 

◈ 내 속에 말씀의 자리가 있다 !!

이렇게 "내 속에 주님의 자리가 있다" 라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속에 말씀의 자리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런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의 자리 중에서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우리가 살펴본 잠언서 8장 35절에 나오는 것인데, 즉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는다" 라고 말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누구를 동원하는가? 아무 것도 아닌, 죽어가고 있는, 그야말로 뱀 허물과도 같은 우리를, 허물자체는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그냥 갖다버려도 되는데, 그런데 버리지 않고 그 속에 주님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은 결국 그게 누구의 고통이란 말인가? 주님의 십자가 고통이 우리 속에서 발현되는데, 그러면 그런 고통을 안겨주는 원인 제공자는 누구인가? 뱀의 허물과도 같은 육신을 가진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그런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을 괴롭게 하는 식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늘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해대면서 말이다. 비싼 기술자를 불러서 공사를 세 번이나 해도 계속해서 물이 샌다고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지금 니 속에 누가 들어있는가? 도대체 그게 누구의 것인데? 그게 니 것인가? 아니면 내 것인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평소에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달린 입이라고 말은 번지러하게 잘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님의 것이라고 하다가도, 막상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마구 화를 내면서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겠는가? "아니, 왜 그래? 니는 니 것이 아니라면서? 평소에 그렇게 말을 했잖아? 그렇지? 그런데 지금 짜증은 왜 그렇게 내는데?"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우리가 한번 주님을 알았다고 해서 "이제는 주님과는 떨어져 살아도 괜찮겠지"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보통 끈질긴 것이 아닌데, 계속해서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라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껍데기가 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말씀이 어떻게 실현에 옮겨지는지, 그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 내 증인이 되리라 !!

우리가 유명한 성경구절을 하나 인용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인데 말이다. 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하시는데, 즉 우리 자신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아니라, 그만 자기 자신의 증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의 찬란했던 과거 인생사의 증인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랑질을 해대는데, "나는 이런 놈이야. 나는 이렇게 잘나갔던 사람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치고 과거에 어디 잘나가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모두가 다 젊었을 때 나름 잘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을 하겠는가? 모두가 뱀의 허물인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44페이지를 보자.

** 이 말씀도 역시 어려워요.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나를 사랑하라" 라고 먼저 조건이 제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그 누구를 사랑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를 빼놓고는 사랑할 수는 없게 되어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손을 대도, 그 손은 내 손입니다. 즉 내게 속한 손이라는 겁니다.

 

 

◈ 역시 나의 손이지 !!

자기가 누구에게 손을 대도, 그 손이 자에게서 나온 손이기 때문에, 그렇게 손을 대는 작업이 끝나고 나면 그 손은 다시 어디로 회수가 됩니까? 원래 속한 몸체인 자기 자신에게도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자기 쪽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결국은 자기 사랑인데, 즉 자기 사랑, 자기 섬김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천 번을 사랑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여기에 "'나를 사랑하라' 라고 먼저 조건이 제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잠언 8장 35절과 36절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교재 45페이지를 보자.

** '사랑했다' 라고 하는 대단한 임무를 수행한 업적이 묻어있는 손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한다' 라고 천 번을 말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앞에는 "내가 나를 위한 사랑의 일환으로 너를 사랑했노라" 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해 ??

그러니 우리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은 자기 자신의 사랑을 위한 이용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보고 "사랑해. 자기를 사랑해!" 라고 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역시 자기 사랑인데, 인간은 자기를 벗어나서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자기를 벗어나서 남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를 사랑하라"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그 말씀을 듣고서 실천에 옮기는 순간부터,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 자기 자신을 다시 회수하면서, 그만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는 썼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실패로 끝났다고 했는데, 그것을 복음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너는 남을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 라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 누구라도 말이다.

 

 

◈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 !!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너를 대신해서 죽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라도 자기를 배제하고 남부터 우선시해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러한 경쟁에 있어서 누가 이기겠는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님이 이기겠는가? 아니라면 대신해서 죽을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자기의 영광만을 챙기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겠는가? 당연히 예수님인데,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더 어렵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도 얍삽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면 된 것이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주었다고 하는, 그런 자기 행위의 공로를 가지고 구원을 받아버리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의 공로가 그만 무색해지고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 그래, 내 기저귀는 내가 갈자 ??

제가 지금 무척 어렵게 표현을 했는데, 하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태어난 지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지금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그런데 이 아이가 천재가 되어서 "엄마가 나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을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 내 기저귀는 내가 알아서 갈아야지"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오줌을 싸지 말든지 말이다(ㅋㅋ).

그러니 이런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있는가?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어린아이도 여기고 계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저는 이제 다 컸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게 되면, 서로 생각하는 것이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해야하는데, 구원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시작한 일은 자기 영광을 듬뿍 않고 되돌아오기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라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가짜라는 것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아주 멋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하는 것이, 행함이 아니고 말이다. 소위 믿음이라는 행함을 동원시킨 모든 자들이, 그들이 신자가 아님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이것 말고 더 좋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어느 누구도 남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어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라고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남을 위해서, 혹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었었다" 라는 것을 보다 더 확실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최종적으로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자기를 제치고,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가 아프리카의 난민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닌데, 자기가 속해있는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 러시아도 태국도 아닌 말이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기가 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대한민국에 자기 자신이 소속되어있는데, 그러니 자기는 자기 나라를 침략한 일본의 앞잡이를 총으로 쏘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중근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물론 안중근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시켜주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35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에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나를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은 분명하게 구미가 당기는데, 그러면 과연 '나' 라고 하는 예수님을 얻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렇게 얻는 경로, 그 과정이 우리는 상당히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로 보낸 자를 얻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자신의 앙꼬를 던져놓고, 그 앙꼬가 있는 것만 다시 집어내는 방식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붕어빵을 굽을 때 보면 앙꼬가 있는데, 그 앙꼬가 없는 것은 버리고 앙꼬가 들어있는 것만 회수하신다는 것이다.

 

 

◈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그것을 두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만이,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 속에 사람만을 두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영인 그리스도의 영이 말이다.

그러면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원래 구원을 받지 말아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앙꼬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앙꼬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발굴해내신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인간에게 호소하지 않고, 자기 것을 주고 다시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권한은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에서 취득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낚싯대를 내려서 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몸소 그 길을 가셨다는 것이다. 고쟁이를(?) 말이다.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말이다.

사실은 이게 없는 길인데, 이것을 다시 이야기해보면, 제가 칠판에 크게 쓰겠는데, 즉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발굴해내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길을 모르는데, 천국에 가는 길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천국이 좋은 줄은 알지만, 그 가는 길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몸소 길을 만들어내시는 예수님 !!

그렇다면 이 지상과 천국에는 길이 없는데, 천국으로 가는 갈이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아니고, 그것은 세례요한인데, 예수님 본인이 길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길이 있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그 곳에 길이 점차 점차 만들어지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없는 길을, 그렇게 몸소 길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나는 길이요"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I did it my way ♪

옛날에 프랑크 시나트라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MY WAY' 라는 것이 있는데, 그 가사에 보면 마지막 삶의 커튼(장)을 마주하고 어쩌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마이 웨이는 것은 따지고 보면 무엇인가?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마이 웨이는 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태어나서 땅에 흔적을 남겼는데, 그것을 뒤돌아보니, 그것이 곧 'MY WAY' 라는 말이다.

그런데 프랑크 시나트라가 몰랐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자기만의 마이 웨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이 웨이, 즉 'EVERYBODY WAY'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아담이 가는 길인데, 자기만이 가는 길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아담이 갔던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줄기차게 계속해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주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즉 죄를 지은 인간은 결국 사망으로 골인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죽은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이 왕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인간은, 아담의 길을 벗어날 수 없어 !!

그러니 길은 없는데, 불교신자들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은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아담은 닦은 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제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역시 아담은 갔던 길이고, 또한 가인이 갔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참 안타까운데, 성철 스님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남들이 다 갔던 길이란 것이다. '부처' 라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 "나만 깨우쳤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만 깨우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즉 반복된 것이란 말이다.

 

 

◈ 나는 국화빵이다 ??

국화빵을 굽어놓으니까, "나는 국화빵이다" 라고 하는데, 물론 말은 맞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국화빵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니만 국화빵이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화빵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닌데, 앙꼬가 많이 든 것도 있고 적게 든 것도 있고, 그리고 덜 굽은 것도 있고 많이 굽은 것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체를 뭐라고 하는가? 그냥 국화빵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담이면 그냥 아담이고, 흙이면 그냥 흙이라는 것이다. 즉 동일한 본질로 돌아가고 마는데, 그런데 도는 무슨 도를 닦는다는 말인가? 그런 것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를 이야기하려면, 진정한 도(道)는, 즉 진짜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그 길에 참여해서 같이 간다고 우겼던 제자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그들은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지금 엉뚱한 길로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말이다.

물론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즉 "너희들이 나와 함께 12고을을 다스릴 것이다" 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분위기를 띄워주니, 그들은 진짜로 주님의 길을 같이 가는 것으로 그만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떠한가? 그만 갈라서고 만다는 것이다.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 마구 갈라진 포신처럼 !!

제가 어느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는데, 어떤 포병부대에서 대포를 쏘는데, 그런데 너무 많이 쏘다보니까 그만 대포의 앞부분인 포신이 갈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화에 보면 그런 그림이 종종 나오는데 말이다. 포를 너무 많이 발사해서 열이 나서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 예를 들었는고 하니, 지금 예수님과 베드로가 같이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앞장세우셔서 나오면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육체를 그만 폭발시켜놓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만 다 찢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 자신은, 자기는 전혀 찢어지지 않은 고운 인간성으로 예수님과 함께 할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그를 쑥 빠져 나오면서 그만 베드로는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저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에이, 이제 잘 가시오!" 라고 하면서 그만 예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존심을 그만 다 구겨놓고는 홀로 빠져 나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은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그 누구라도 없다는 말이다.

 

 

◈ 우리도 날마다 찢겨져야 !!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과 같이 붙어있다고 해서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결국 주님과 같이 한다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찢겨져야 한다는 사실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주의 말씀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고 오만인데,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남을 지적질하기 이전에, 오히려 주님의 말씀이 자기 자신을 그만 찢어놓는다는 것을, 그렇게 자기를 지적질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한 자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니,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라고 하시는데, 즉 그것이 곧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지금 니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입장이 되는가? 너도 나의 은혜로 살았어. 니가 잘나서 산 것이 전혀 아니란 말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많은데, 즉 "남의 불행을 보고 좋아하면 그 불행이 너에게도 닥친다" 라고 말이다. 잠언서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망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말이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오징어를 사서 튀겨 먹으나 굽어 먹으나 입에 들어가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다. 회를 쳐서 먹어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분수를 모르면,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있어서, 뱀의 허물과 같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우리를 통해서 길로 등장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자기가 길이 아니라 "오직 주님 자체만이 길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진정으로, 진정성이 있게, 정말로 본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저는 찢어진 놈입니다 !!

그것이 바로 이미 생명을 얻은, 예수님을 얻은 자의 특징인데, 예수님을 얻지 아니하면 인간은 결국 자기 영광으로, 자기 자랑으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보여주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은 "니가 자랑할 것은 니가 찢어졌다는 것이다"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라는 말인가? 오직 예수님인데, 대신 죽으심으로,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남겨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완전히 찢어놓는 짓을(?) 하시면서, 뒤돌아보시면서 "너희들 같은 인간을 위해서 내가 대신 죽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멀쩡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게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찢겨져서 우리의 더러운 본색이 다 나온, 바로 그러한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지, 잘난 척을 하는 인간을 위해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 앞으로 우리가 그 얼마나 많이 당해야할지, 그것을 우리는 각오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45페이지를 보자.

** 어떤 부자가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고 우기면서 예수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사랑하는 재산을 다 팔고 난 다음에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그 부자청년은 근심해서 돌아갔습니다.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부자청년 이야기는 그동안 많이 했는데, 여기 부자청년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는 멀쩡한 채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그만 돈만 밝히는 인간으로 전락한 채로 예수님과 바이바이를 했다는 것이다.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하고 말이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사귀려하다가, 마지막에는 그만 작별인사를 고하고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갈래면 가지 왜 돌아보오 ♬" 라는 윤복희가 부른 노래도 있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어떤 타인의 그림을 보고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평소의 누적된 이해력 발휘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타인의 그림을 통해서 자기 혼자서 내심 즐거워할 자기만의 작품이 머릿속에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머릿속에 기억된 그 작품은 남의 작품을 이용한 자기 작품이에요.

 

 

◈ 예수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다 ??

사람들이 화가가 그림을 볼 때 어떻게 하는가? 화가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작품을 해석해서 그 작품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즉 예수님에 의해서 가짐을 당해야하는데,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빼앗겨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거리를 두면서 "예수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동일한 태도라는 것이다. 화가는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런데 그림을 보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야, 그림이 참 좋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대하면서도 "예수님은 참으로 훌륭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누구 마음대로? 내가 정말 훌륭한지, 아니면 지긋지긋한지 일을 한번 만들어볼까? 사건을 한번 일으켜볼까? 그래도 내가 좋은지 말이야. 니가 배가 부르니 나를 좋아하는 것이지, 정말로 힘든 지경에 이르게 해볼까?"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욥기처럼 말이다. (어서 오세요)

이제 교재 46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령이란 이처럼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우리는 책망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게 성령님의 역할인데, 즉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왜 책망을 하시는가?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왜 책망을 하시고 잔소리를 하시느냐는 말이다.

 

 

◈ 성령은 곧 간호사 !!

성령님은 곧 보혜사인데, 이 보혜사가 무슨 의미인가? '도와주는 자' 라는 뜻인데, 여기에 제일 비슷한 직업이 간호사인데 말이다. 그런데 간호사가 환자를 도와주는가? 아니면 잔소리를 하는가?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술을 드시면 안 되고, 담배도 끊으세요. 그리도 약도 반드시 제 시간에 맞추어서 드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특히 입원을 하게 되면 이 간호사의 잔소리가 떠날 날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환자를 죽이려고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책망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그렇게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설거지를 바로 했는교? 하이타이는 제대로 넣었는교?" 라고 하면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그것을 가지고 책망하시냐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아마 궁금하지 싶은데, 500원을 받지 않겠는데 말이다(ㅋㅋ).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음을,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라는 것을 집어서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개념이 누구의 개입으로 말미암아서 완전히 종결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가? 재판을 받는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 스스로 이 세상으로부터 재판을 받는 순간, 그 예수님에게 가해졌던 죄와 의와 심판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 우리끼리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

그러면 보혜사가 우리에게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니가 매사에 있어서 나와 관계가 없이, 잠시 그런 관계를 중단시키고 어떤 일을 처리하게 될 때, 그게 바로 죄와 의와 심판에 의해서 책망을 받을 일이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 즉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은 잠시 나가 계셔요. 이것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곧 성령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일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죄와 의와 심판이, 사실 이게 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즉 최종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다 들추어낸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죄와 의와 심판의 개념에 의해서 예수님을 사형을 시켰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형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 우리 동네에서 놀지 마시고 그만 꺼져 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을 사형시킨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의 개념에 대해서 끼어들지 마시고, 그만 꺼지세요"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즉 "당신이 있음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죄와 의와 심판의 개념이 그만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는데, 그러니 당신은 나가서 죽어라. 다시는 우리 속에 끼어들지 말라"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재판을 할 때 그 마음가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 당신이 없어도 우리끼리 알아서 제대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재판을 잘할 수 있어요" 라고 하는 속성인데, 그 속성이 곧 그들의 육신이고, 바로 그 육신을 지금 우리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주님은 여기에 끼어들지 마세요. 이것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 자체에 대해서 성령께서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즉 "뭐, 니가 다 알아서 한다고? 니가 알기는 도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 여보, 가스 불이나 좀 꺼주세요 !!

부부의 경우에, 평소에는 좋을 때는 주님의 은혜가 어떻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지금 가스불에 음식을 올려놓았으니 5분 뒤에 좀 꺼주세요. 저는 지금 빨래를 넌다고 조금 바빠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방에서 "응, 알았어"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마침 그때 남편은 월드컵 시합을 본다고 그만 깜박하고 말았는데, 보스니아와 아르헨티나가 시합을 하면서, 하필이면 그때 메시가 골을 넣는 바람에 말이다. 그런데 아내가 나중에 빨래를 모두 늘고 난 다음에, 가스레인지 위에서 음식이 다 타버린 것을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결코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일부러 한 것이 아닌데, 탄 냄비를 닦으면서 고생을 실컷 하라고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내가 그냥 남편을 보고 "여보, 다음에는 좀 잘하세요. 축구는 다음에 봐도 되잖아요"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물론 남편도 "여보, 미안. 사랑해" 라고 나올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5년 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부터 시작해서 "아무튼 당신 집구석은 모두 똑같아. 여자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 라고 하면서, 그렇게 확대를 시켜버린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거기에 예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기 성질대로 다하는 것이란 말이다(ㅋㅋ).

주님은 바로 그러한 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평소에 남편에게 감정이 있던 것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하나의 빌미로 해서. 그만 집안식구에서 사돈에 팔촌까지 모두 다 끄집어내어서 확인사살을 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평소에 얼마나 억눌려있는지 모르는데, 마치 스프링처럼 말이다.

 

 

◈ 한(恨)을 만드시는 예수님 !!

이렇게 인간은 자기 한에 의해서 살아가는데, 아무리 예수님을 외쳐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무엇인가? 억눌린 스프링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한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을 누가 만들었는가? 성령께서 만드셨는데, 예수님께서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밖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고, "그래, 주님이 다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겠지" 라고 하면서, 그것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꾹 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남편이 가스불을 끄지 않은 것을 통해서 폭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평소에 눌리고 있던 것이 말이다. 

그래서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나이가 들어도 성질은 결코 변하지를 않는다는 것인데(ㅋㅋ), 결혼을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아지지도 많고 말이다. 생판 모르던 사람인데, 둘이 붙었다고 해서 그 혼자 살던 버릇이 달리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서 살던 그 버릇이 말이다.

 

 

◈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지 !!

그래서 항상 어려울 때를 생각해야 하는데, "차라리 내 혼자서 사는 것이 낫겠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인데, 즉 결혼을 했으면 그 값을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되었으면 자기가 아프면 도와주고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내 혼자 사는 것이 낫지" 라는 것은, "같이 살고 싶다" 라는 것의 다른 표현인데, "뭔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기대를 말한다는 것이다. 진짜 혼자 살고 싶다면 그런 말도 하지 않는데, 같이 살기 때문에 뭔가 도움을 받을 희망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결혼함에 대한 이익인데, 뭔가 희망이 있고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남자가 나이가 들면 집구석에 기어 들어오는데, 처음에는 폼을 잡으면서 어른인 척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 온 몸이 다 아프면서 그만 어린아이가 되어서 마누라에게 재롱을 피우고 기대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바나나킥' 이라고 했는데, 멀리 가는 것 같지만, 다시 되돌아오는데, 어린아이에서 어린아이로 말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속성으로서, 우리는 항상 돌아서면 주님을 빼놓고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다" 라는, 그런 자립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46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최선을 다한다" 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선별해서, 지킬 만하다는 것만 골라서 지키려고 하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방법만 동원하겠다는 뜻입니다. 

 

 

◈ '최선을 다한다' 라는 의미는?

여기에서 "최선을 다한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자기가 임으로 선택해서 하나를 뽑는데, 그렇게 뽑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이것은 지킬 수 있다" 라고 해서, 그 점에서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A, B, C, D'가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자기가 B를 뽑았다고 하면, 그 B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러나 'A, C, D'에 대해서는 결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예 애초부터 제쳐놓았던 것인데, 그러니 오히려 비겁한 짓이란 말이다. 

 

 

◈ 다시,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제공하신다' !!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제공하신다" 라는 것인데,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자꾸만 자기가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입만 벌리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피해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끄집어내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B를 발견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B를 제외한 'A, C, D' 중에서 말이다. A도 아니고, C도 아니고, D도 아니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선택해서 최선을 다한 B의 밑바닥에 계신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최선을 다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자기 의를 가미하다가보니, 주님의 은혜로 주었다는 것이, 그것이 "최선을 다했다" 라고 하는 자기의 실천력으로 인해서 가리워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나대고 설쳤을 때, 그래서 그만 일을 망치고 나서는 할 말이 없으니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의로움으로 핑계를 댈 때, 그로 인해서 핍박을 받고 고통을 받는 양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상당히 복잡하게 들리지 싶은데, 사실 이렇게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의대로 보낼까? 법대로 보낼까?

예를 들어서, 어떤 엄마가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의대로 보낼까? 법대로 보낼까?" 라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 엄마는 자기 아이를 법대로 보냈는데, 그런데 그만 법대에 흥미를 느끼지를 못하고 낙제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 재수를 해서 의대로 가고 싶어요" 라고 한다면, 그것을 법대를 빼고 주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법대에 묻혀있던 의대가 주님의 뜻이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요즘은 의사가 너무 많아. 그러니 의사도 이제는 한물 갔어"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식을 의대가 아닌 법대로 가라고 한 엄마의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냄과 동시에, 그러한 엄마마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데, 항상 같이 있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실패를 계속해서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실패의 연속을 통해서, 그런 실패마저도 대신 죽으심의 효과로서 구원되게 하시는, 그런 능력을 주님께서는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도 구원을 받고, 심지어 강도도 오늘밤에 낙원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 강도가 강도짓을 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강도짓을 덮어주셨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용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용서가 되도록, 그렇게 이미 십자가 피가 더해졌다는 것이다. 이미 십자가의 피가 말이다.

 

 

◈ 치료제가 먼저 있고 !!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치료제가 먼저 있고, 나중에 병이 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주께서 용서가 되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치료약이 얼마나 효과가 뛰어난지 모르는데, 독일제인지 몰라도 말이다. 그 어떤 병이라고 해도 이 약으로 치료가 되도록 해주는, 그런 치료약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약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것을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모르고 설치고 까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병에 걸리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것은 의미가 없고,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 아, 짜장면이 좋은데 !!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기도로 시작하는데, 물론 그것도 좀 수상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오늘 성경공부를 마치고 어디로 가서 점심을 먹을지 기도를 한다면, 즉 "예수님, 짜장면을 먹을까요? 칼국수를 먹을까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기도를 해서 우리가 B를, 즉 칼국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칼국수를 먹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먹는 도중에 짜장면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집이 짜장면으로 소문이 난 맛집이라고 하는데, 오늘 선택을 잘못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주님께서는 매사에 우리가 그렇게 선택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다른 선택은 없어 !!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여기면 되는데, 즉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자기의 '마이 웨이'가 아니라 '주님의 웨이'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어쩔 수 없다고 믿으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어유, 다른 선택을 했으면 되는데" 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다른 선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그 시절로 되돌아가도 그 선택이 그대로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코스를 우리가 아닌 주께서 조정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마이 웨이'가 아니라 '지저스 웨이' 인데, 즉 우리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이란 말이다.

그러니 마르디와 마리아의 경우에,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한다고 분주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턱 밑에 앉아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이 웨이가 곧 주님의 웨이인데, 즉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이 웨에, 즉 그 말씀이 자기가 가야될 길이란 말이다. 물론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해가 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여러분, 문어다리가 몇 개입니까? 여덟 개입니까? 대충 여덟 대라고 하고, 그 문어에게 "문어야, 너 다리가 많네. 그 중에 내가 하나 밟는다" 라고 하면, 그 문어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겁니까?

 

 

◈ 문어몸통인가? 문어다리인가?

여기에 보면 "문어야, 너 다리가 많네" 라고 하는데, 그 질문이 참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질문을 문어몸통을 보고 한 것인가? 아니면 문어다리를 보고 한 것인가? 물론 몸통을 보고 한 말인데, 이게 정말로 어려운 내용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살아계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무엇도 눈에 보이지 않는고 하니, 천사도 보이지 않고 천사의 일종인 악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과 악마의 입장에서는 서로서로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악마에게 속해있는데, 그것을 악마로부터 빼내주시는 전쟁을 벌리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는, 그것이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즉 문어다리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문어몸통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마귀에게 "그 사람은 그만 좀 나둬라. 그는 내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은 니 마음대로 해더라도 그 사람은 안 돼. 그는 창세 전에 예정된 자야" 라고 말이다. 즉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 바로 그 코스에 해당되는 자들을 주께서 성령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하지만, 인간은 예수님도, 천사도, 마귀도 보이지 않아 !!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기 때문에, 즉 예수님도 보이지 않고 천사도 보이지 않고 악마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보고 이야기한 것으로 여겨서, 그래서 자기가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문어야, 너 다리가 많네" 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문어다리로 보지 않고 문어몸통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주여, 몸통인 저와 이야기합시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겠는가? "나는 너하고 이야기하기 싫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와의 협상카드가 아닌데, 즉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줄게"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미 마귀에게 매인 몸인데, 그래서 우리는 평생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한 평생을 마귀에게 얽매여 있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의 육신이 바로 그러한데, 그러니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이 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플리즈, 헬프 미 !!

어제 주일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70이 가까운 할머니가 개울가에 엎어져있다는 것이다. 물이 흐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옆에 보니까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데, 남편으로 보이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아하, 저 할아버지가 119에 도움을 요청하는구나" 라고 여기고는 그냥 갈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때 저의 귀에 상당히 복음적인 말이 들린다는 것이다.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려갔는데, 사마리아인도 아니면서 말이다. 마침 주일이라서 아침에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가보니, 그만 할머니가 팔이 부러졌는데, 다른 곳은 괜찮고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끌어안고 어떻게 응급조치를 취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사람이 도와달라고 라고 할 때는, 영적인 문제로 인해서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죽어 가는 육신이 아프니까 도와달라는 것인데, 거기에는 종교든 뭐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구원파도 전혀 상관이 없는데, 누구든지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 우리에게 육신이 있는 이상 !!

이렇게 우리 인간은 먼저 육신이 항상 앞장서는데, 그래서 심지어는 마귀에게도 도와달라고 할 판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경우에도 보면 어떠한가? 사람들은 자기 배만 부르면 최고인데, 예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니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녔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안다고 해도, 우리에게 육신이 이렇게 있는 이상은, 우리에게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도와주세요' 라는 것이란 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런 마귀에 본성에 계속해서 개입을 해주셔서, 진정한 도움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 즉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이기는 방식임을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국물에 독을 풀어 넣을 때, 한 쪽으로만 넣어도 모든 양푼에 독이 다 퍼지게 됩니다. 비록 태양은 하나이지만, 그 태양이 온 천지를 다 비추잖아요. 그처럼 위대한 영도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독이요, 심판주가 되십니다.  

 

 

◈ 위대한 영도자이신 예수님 !!

여기에 예수님을 위대한 영도자라고 되어있는데, 많이 듣던 말인데 말이다(ㅋㅋ).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님이 독이다" 라는 것은, 우리 인간은 자기가 발견하는 것만 소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은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닌데, 그런 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만약에 주님이 그런 것을 주시면, 주님은 그만 마귀와 한 통속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있는 마귀와는 다른 것을 제시하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신다는 것이다. 그게 곧 구원인데, 즉 건져내신다는 말이다. 마귀는 우리에게 돌이 떡이 되게 했고, 인기를 알고 했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그것을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건희보다도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그렇게 돈이 많고 또한 건강한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마귀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유일하게 빠져나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는 경쟁이 일어나는데, 즉 자기가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까지 알고 계시는 주님과의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 고집의 싸움이란 말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라고 하지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피해가면서 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을 달라고 하지만,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발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데, 그런 사실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 거기서 손을 떼세요 !!

그래서 목사가 설교를 할 때는, 사람들이 원하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면 안 되는데, 말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씀을 지킬 테니 내가 발견한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을 주옵소서" 라는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오는데, 그러니 그런 손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게 여러분의 눈에 발견이 되었으니 안 됩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라고 하지만, 목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손을 떼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리를 잡고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발견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인데, 즉 "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약을 풀든지 무엇을 집어넣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당연히 남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집과 멋있는 차를 가지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할 때는 그런 것들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되는데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홍수 때에는 방주가 필요하듯이, 그런 것들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가 평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데, 하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발견한 것이란 말이다. 만약에 자기 집 때문에 아랫집에서 물이 샌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평소에 기도한 제목이 전혀 아닌데, 자기가 아랫집에 물이 새게 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전혀 자기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이 정도면 섰을 거야 ??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런데 인간은 매일같이 "이 정도면 섰을 거야" 라고 하면서, 자기가 자립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생명이 있기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하는 작업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니 우리 자신은 주님의 작업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작업공장이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런 인간도 내 덕분에 구원을 받았잖아" 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주님 자신의 공로와 영광과 자기의 솜씨를 뽐내는 그 현장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47페이지를 보자.

**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라고, 정말 마지못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감격의 환호성을 질러대면서 고백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름답고 고운 것'을 포기하란 말이 아니고, 내가 나를 대상으로 해서 내리는 판단이 무의미함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라는 말씀을 누가 좋아하는고 하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 못났다고 욕을 듣는 여인이 그런 말씀을 들었을 때, "역시 주님은 알아주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얼마나 감사하겠느냐는 것이다(ㅋㅋ).  

여러분은 할머니들이 셀카를 찍는 것을 보았는가? 10대나 20대가 그렇게 해서 저장하고 하지, 할머니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시체를 찍어서 뭘 하겠다는 말인가? 그냥 귀신인데 말이다. 귀신을 찍어서 어디 나열할 일이 있는가? 무슨 월하의 공동묘지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라고 하는 잠언서의 이 마지막 말씀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딴 고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없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지혜만 있으면 그것이 자기를 살리기에 말이다. 즉 생명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말씀이라고 하면 실천에 옮기면 되는데, 그런데 이것이 그러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던 지키지 않던 거기에 상관없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도 그렇게 몰아넣는데, 그러니 우리가 하루를 살면 그 하루를 산만큼 아름답지를 못하다는 것이다. 일년을 살면 일년을 산만큼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일년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어떠한가? 그만큼 이미 더 귀신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두려워서 아예 사진을 보지 않는데, 하지만 그게 우리의 뜻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프로젝트라는 것을 수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주님의 계획은 전혀 차질이 없이 진행되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 교재에도 나와있지만, 이 말씀은 우리를 보고 '아름답고 고운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를 대상으로 해서 내리는 판단이 무의미하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대상으로 해서 내리는 판단은, 그것은 자기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내리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판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판단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또 묻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내리는 그 판단으로 하여금 핍박을 받고 설움을 당하는 판단이 곧 주님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그런데 우리가 안다고 하면서 우기기 때문에 덮여버리고 숨겨지게 되고, 그렇게 우리에게 무시를 당하는 쪽에 주님의 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즉 나중에 우리가 우리의 판단으로 인해서 후회할 때, 그제야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 것이 주님의 판단이란 말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무엇인고 하니, 울면 되는데, 그렇게 우는 가운데 웃을 일이 비로소 새삼스럽게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히 울었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실컷 울어놓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때 울었던 것은 내 욕심이었구나" 라고, 그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살아가면서 자기가 화는 다 내어놓고,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를 낼 것도 아닌데, 다른 즐거움이 없어서 내가 화를 내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라고 작업을 벌리신 그 여호와,, 바로 그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다는 것이다. 

 

 

◈ 주님의 '자리' 채우기 !!

이제 마지막으로 '룻' 이야기를 하고 마치고자 하는데, 이 룻은 원래 이스라엘의 호적에는 전혀 없는 이방여인이라는 것이다. 룻은 알다시피 모압 여인인데, 그러니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자라는 것이다. 어제 낮 예배시간에 사도바울을 두고서 이방인의 사도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말로 개 같은 이방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룻은 개 같은 여인으로서 전혀 영생을 얻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약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는고 하니, 여기에 자리가 하나 빠져서 그러한데, 즉 자리가 비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자기를 채우는 것인데, 사람을 채우는 게 아니고 말이다. 사람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자리가 아쉽다는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 땅에 살아야 될 엘리멜렉 가문이고 나오미인데, 그런데 그들이 그 자리를 우습고 여기고 그만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

이런 원칙은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에서는 그만 배가 고파서 그만 장자의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는데, 원래 자기 자리를 팟죽 한 그릇에 그만 팔아버리고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형인 것이 분명하니까, 그 자리를 팟죽을 먹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서의 생각이고, 주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귀한 장자의 자리, 복이 오는 자리, 그런 복이 오는 자리가 다른 자리가 아닌 예수님이 출현되는 자리인데 말이다. 마치 총알이 날아가면 그 옆에 파장이 번지듯이, 고속촬영을 하게 되면 그런 것이 보이는데 말이다.

그렇게 장자의 자리는 그게 축복의 자리이고, 나머지는 저주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남에게 저주를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복의 자리인데, 에서는 그것을 팟죽 한 그릇에 그만 팔아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들어갔는가? "니가 팔아먹으면 내가 들어간다" 라고, 야곱이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도저히 발견될 수 없는 자리 !!

그것은 보통 사람에는 전혀 발견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것을 발견하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 자체가, 이것은 바로 성도가 아니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천국의 자리, 즉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이런 십자가의 자리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빼앗기거나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늘 되새기는 쪽으로, 그런 방향으로 주님께서는 지금도 늘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말이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생명을 얻고 라는" 라는 그 말씀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그렇게 복잡한 작업을 지금도 행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행함은 거기에다 끼들 여지가 없는데,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다만 그 가운데서 우리는 책망을 받고, 또 책망을 받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에 그만 혹해서 달려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려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기는 달려가는데, 즉 고운 것도 원하고 아름다운 것도 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육신이니 우리는 어쩔 수가 없는데, 하지만 같이 동행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말이다. 

아무튼 나오미가 빠진 이 자리에 룻이 차고 들어가는데, 그러면 나오미가 룻을 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 롯에 의해서 나중에 누가 태어나는가? 다윗 왕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절묘한 작전이라는 말이다.

 

 

◈ 구원이 자리는 없지만, 그러나 주께서 !!

다시 말해서, 구원이 자리는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부러 오셔서 구멍을(?) 파서 죽어도 사는 자리를, 즉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자리를 만들어놓고, 그런데 그 자리는 발견되지 않는데,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런 영생의 자리가 있음을,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구원이 되는 자리가 있음을, 그런 지혜가 있음을, 그것을 오직 택한 자에게만 알려주시는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물처럼(?)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돈 때문에 믿은 것도 아니고, 건강 때문에 믿은 것도 아니고, 오직 그 자리를 보고 믿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성령의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말씀이 친히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자리는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자리인 줄 압니다. 거기에 맞지 않는 저희들을 주님께서 꾸겨서 넣어주신, 그래서 그런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7,23 오후 6시에 마침.

                                              최경환 부총리는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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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Way / Frank Sinatra -

And now the end is near               지금 끝이 다가오고
So I face the final curtain               나는 마지막 막이 내려지는 것을 보네
My friend, I'll say it clear              친구야, 나는 분명하게
I'll state my case                       내가 확신하는 나의 경우를
of which I'm certain                    말 할거야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나는 바쁜 삶을 살았지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길 따라 모든 곳을 다 가봤어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말야
I did it my way                         내 나름의 방식대로 살았어.

Regrets, I"ve had a few                 후회, 조금은 했지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하지만 구태여 말할 정도는 아냐
I did what I had to do                  나는 내가 해야 할 것을 해냈고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그리고 남김없이 전부 다 해치웠어

I planned each chartered course           나는 좋은 방향으로 계획을 짜고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조심스럽게 단계들을 밟아갔지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I did it my way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했다는 거지.

Yes, there were times,                  그래, 그런 때도 몇 번 있었지,
I'm sure you knew                     너도 알겠지만,
When I bit off more than               내가 씹을 수 있는 것보다 
I could chew                           너무 큰 걸 베어 물던 때가 있었지.

But through it all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when there was doubt                  좀 의심스러울 때는 말야,
I ate it up and spit it out              왕창 삼키기도 하고 도로 뱉어놓기도 했지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나는 모든 걸 정면대응을 했고 굳게 섰지
And did it my way                     그리고 내 나름대로 살아왔지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나는 사랑을 했고, 웃고 울었지
I've had my fills,                       나는 한 몫 챙기기도 하고
my share of losing                     왕창 깨질 때도 있었지

And now as tears subside              그리고 이제 눈물이 사라지니
I find it all so amusing                 그런 것들이 전부 즐거움이었음을 알아.
To think I did all that                  내가 그걸 다한 걸 생각해보니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Oh, no, oh no, not me                  오 그래, 난 아냐, 절대 안 부끄러워.
I did it my way                       나는 내 나름대로 했으니깐

For what is a man,                    남자가 뭐며,
what has he got                       뭘 얻었지?
If not himself,                          만일 참된 자기자신을 못 얻었다면
then he has not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거야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진실되이 느끼는 것을 말하고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무릎꿇는 비겁자들의 말은 안돼.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내 삶의 기록엔 어려움도 많았지만
And did it my way                    난 내 나름대로 살았지
Yes, it was my way                   그래, 그게 바로 나의 길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