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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12 -아들과 언약 140721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12 -아들과 언약 140721

정인순 2014. 7. 21. 14:49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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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2 - 아들과 언약

                                                           

14,07,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출애굽기 4장 22절과 23절을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는 자기 남편을 '피 남편' 이라고 부릅니다. 피와 관련된 가장(家長)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하시는 그 사태로 말미암아 달라진 남편에 대한 위상입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4: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 하나님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는가?

여기에 '피 남편'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구약에 있어서 난해구절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다니엘서의 '70이레' 라는 것이고, 그리고 여기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피 남편'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난해하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세는 동업자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이 동업자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고분고분 건지려고 하면, 그러면 적이 누구인가? 애굽의 바로왕이 적이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를 숙소에서 죽이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 왜 일관성이 없느냐는 말이다. 협조를 했으면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죽이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숨어있는 진리를 파악해낼 수 있는고 하니, 논리를 따지면 복잡하니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들 건지기'에 있어서 아들이 이스라엘과 같으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건지되 그것이 곧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아는데 무려 1500년이나 걸렸는데, 물론 성령을 받아야 알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여겼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이라고 자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해였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망해야만 비로소 숨겨진 아들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디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할 때 항상 누구 위주로 상대하는가? 자기 위주인데, 하나님이 자기와 동업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도와주셔야만 하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일에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모세야, 비켜라 !!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진리를 가리고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보시는데, 그래서 인간의 손을 잡고 비켜나게 하신다는 말이다. 즉 "니가 비켜나면 너를 가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모세가 무엇을 가리고 있는고 하니, 모세 뒤에는 할례언약인데, 이 할례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포함이 되는데 말이다.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그러니 모세라는 존재가 아브라함 언약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할례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 본문에 보면 십보라가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 앞에서 던지면서 피 남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십보라는 모세와 부부이니 같은 한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모세는 자기 소속이 아니라 할례라고 하는 피 언약에 소속되어있음을, 그것을 십보라가 확인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어려운데, 그러니 모세와 그 가족들은 얼마나 황당했겠느냐는 말이다. 모세는 그야말로 보람찬 일을 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숙소에서 아예 자기를 죽으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보내면서도 그 현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적절하는 것을, 그러니 하나님은 뭔가 교체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체를 원한다는 것은,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자기는 희생이 되어야하고, 그러니 자기는 그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투입되었고 참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일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하나의 희생타로, 그런 소모품으로 넣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피 남편, 할례언약 !!

그러면 그 명분이 무엇인가? 피 남편인데, 그게 바로 할례언약이고, 이 할례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피 남편이라고 했으니, 그러면 여기 출애굽기 4장에서 아들의 개념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22절에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분명하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아들이고 장자다" 라고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게 오해했고 말이다. 

 

 

◈ 사건이 입혀진 존재 !!

하지만 그런 존재가 아닌데, 그냥 존재가 아닌 사건이 입혀진 존재라는 것이다. 즉 어떤 추가된 사건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그 존재 자체로서는 아들이나 장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인데, 반드시 여기에 사건이 입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건이 말이다.

그 사건이 새로운 피조물로 전환시키는데, 즉 아들이 아닌 자를 아들로 바꾸는 사건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골로새서에 의하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 '아들의 나라' 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에 대한 개념을 통째로 찢어버리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천국은, 아들의 나라 !!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즉 하늘에 어떤 어르신이 계시고, 그 어르신이 이 불쌍한 중생들을 받아들여서 행복하게 영생을 누리는 세상은 너희들이 상상 신화적 세계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로는 없는 세계이다" 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상상의 세계와 천국이 늘 충돌과 마찰과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고생이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평생을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서, 그렇게 죽어서라도 호강을 해보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마지막 희망이고 카드라는 말이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나이가 들면 종교를 선택하고, 거기에 자기 영혼을 맡김으로 말미암아, 그런 희망을 가지고 이 찌달린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용기와 힘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인간들이 언제든지 상상할 수 있는 자기 관리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을 이성의 간교, 혹은 이성의 책략이라고 하는데, 철학에서는 말이다. 지상에 있는 것을 모델로 삼아서, 이 지상보다 더 월등한 세계를 염두에 두고 힘을 내는 것, 그게 곧 종교의 힘인데 말이다. 물론 그런 종교의 힘은 악마가 조장한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실재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즉 마귀가 조작한 가상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거기에서 처음부터 추방되어야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꾸만 상상을 하게 되면 신학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데, 상상해서 그것을 천국이라고 하면 말이다.

 

 

◈ 회복신학을 아세요?

그렇게 되면 '회복신학' 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데, 회복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바로 통일교인데 말이다. 구원파도 그렇고, 기독교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 모든 신학은 회복신학인데, 즉 "하나님께서 회복을 시켜주시면 우리는 회복된 삶을 살 수 있다" 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 인간이 죄를 지어서 추방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수해서 더불어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이 곧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통일교가 이것을 가지고 히트를 쳤는데, 지금도 워치만 리나 위트리스 리의 지방교회에서는 그렇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지방교회의 인기를 등에 입고 등장한 신천지나 안상홍 등인데,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회복인데, 왜냐하면 회복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들에게 희망만 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긍심(?)을 제공하기 때문에 목회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천국은 없어 !!

하지만 이것들이 다 거짓말이고 구라인데, 성경에는 회복이 없다는 것이다. 즉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천국이 없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한번 쫓겨났으면, 하나님은 그 쫓겨난 취지를 계속해서 살리기 위해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갈 수가 없는데, 그러니 인간에게 천국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갈 수 없는데 어떻게 가야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수용해주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갈 수 없는데, 어떻게 제가 갈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그런 자기 존재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반발이고 반항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께서 "너는 갈 수 없어"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물론 갈 수 없는 것은 인정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다른 제3의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란 말이다.

 

 

◈ 사건의 현장에서 숨겨진 천국이 !!

여기에 대한 성경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갈 수 없는 것은 갈 수 없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사건의 현장에서 드디어 숨겨진 천국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언약사건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호명을 해주시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호명하시고, 그리고 그 앞서서 아담을 호명하셨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아담을 호명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 아담의 생각은 완전히 좌절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상상하던 천국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호명을 하시면 말이다.

 

 

◈ 하나님의 '자기전개과정' !!

그리고 하나님이 호명하시면서 투입되는 언약 사건 속에서 서서히 밝혀지는데, 거기에는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천국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전개과정'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나' 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기 전개가 우리보다 우선이 된다는 말이다.

어제 낮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비밀이 우선인가? 내가 우선인가?" 라고 말이다. 성도에게는 당연히 비밀이 우선인데, 즉 우리가 비밀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비밀이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고 하면, 그것은 창세기 3장 24절에 있는, 그렇게 인간을 추방한 그 취지가 그만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인간을 쫓아내고는 "아이쿠,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나갔구나. 다시 오너라" 라고 한다면, 이것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쫓겨났더라도, "이런, 미안하다. 내가 너무했지? 내 새끼들아, 그러니 이제 돌아오너라" 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이 원하는 신이라는 말이다. 이방인들의 신인데, 언약이 없이 상상하는 말이다.

 

 

◈ 이단들 - '하나님은 나를 책임지실 거야'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만들었어. 그러면 당연하게 나를 책임질 것이다. 그렇게 책임을 지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화를 내었지만, 영원토록 노하시는 분은 아니니, 그렇게 잠시 동안 화를 내시는 척을 하셨을 것이다" 라고 나오는데, 그게 바로 '여호와 증인' 이라는 것이다.

보통 신학교에서 이단들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데, 그러면 어떤 문제들이 생기는고 하니까, "우리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했으니, 즉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완벽한 교리를 갖추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사실 이런 이단들의 교리는 신학생들이 알아서 공부를 해야하는데, "도대체 이들이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입만 벌리면 성경구절인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냐는 것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카더라" 라고 하는 '카더라' 통신은 들으면 안 되는데, 그러니 이만희를 이야기하라면 반드시 이만희가 쓴 책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주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책을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잡힐까 싶어서 말이다. 물론 전통이 있는 이단들은 쓰는데, 여호와 증인이나 안식교는 책을 엄청 많이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일관성이 없는데, 수시로 수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단이 되지 않으려고 말이다. 수시로 재림날짜를 계산하고 바꾼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주는 말을 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성령께서는 바람과 같기 때문에 글로 표현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녹취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단들의 특징은 그렇게 책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비를 걸까 싶어서 말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에 !!

그러면 목사들은 어떠한가? 물론 목사들도 역시 책을 남기지 않는데, 그 대신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책임에서 면제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교단의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다 나와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언제 작성된 고백서인고 하니, 1648년도라는 것이다. 완전히 구닥다리라는 말이다. 천주교를 염두에 둔 것인데, 그러니 성경과 맞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모순이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헌법 4조에 보면 "헌법조항은 수정할 수가 있다" 라고 되어있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인데 말이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담고있는 헌법 4조가 수정이 되는가? 안 되는가? 당연히 수정이 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똑같은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모든 진리는 성경에서 나온다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 신앙고백서도 폐기처분이 되어야하고, 당연히 최종권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뭔가 선언을 할 때는 성경을 보고 해야하는 것이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다가 손을 들고서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에서는 어디에다가 손을 들고 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 자체가 이미 모순인데, 이것은 관심사가 진리가 아니라 교단이고 교회라는 것이다. 즉 자기 집단이란 말이다.

 

 

◈ 이스라엘인가? 언약인가?

그런데 바로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받았을 때, 언약이 위주라는 것을, 즉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투입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언약을 주셨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율법이라는 언약을 소유해서, 그 율법대로 실행에 옮기면 자기들은 다른 나라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부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실수인데, 바로 이런 실수로 인해서, 수 없이 투입된 선지자들은 계속 고난을 받고 또한 죽임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그들에는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본인이, 즉 '나'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다시, '하나님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가?'

제법 많이 돌았는데, 다시 출애굽기 4장을 보면, 이제 질문을 던지겠는데, "하나님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제가 방금 설명을 했는데도 답하기가 곤란하지 싶은데 말이다. 하나님은 같은 동업자를, 자기가 시켜서 일을 하는 모세를 왜 죽이려고 하시느냐는 것이다. 죽여버리면 일이 안 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모세가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준비된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대로 해야만 이스라엘이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모세나 십보라는 무엇을 생각했는고 하니, 인간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들인 줄로 알았는데, 하지만 그 존재가 변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에, 즉 아들의 나라에 갈 만한 존재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스스로 도를 닦고 자기를 낮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언약사건과 마주쳐서, 언약사건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올 때, 그 언약 안에서, 그것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 라고 하는데 말이다. 구약에서는 언약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저에게 말씀 사건이, 언약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라는 고백을 내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40장에 보면, "인간의 육체는 풀이나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무엇은 영원하다는 말인가?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 사람 위주의 신학을 하게 되면 !!

그래서 구약신학자들도 이 피 언약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마는데, 해석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한신대의 김이곤 교수도 난해해서 정답을 내릴 수 없다고 했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기독교를 추구하다보니, 그런 기독교에 맞춘 신학을 하다가보니, 그게 항상 사람 위주의 신학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그런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는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런 형상으로 만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우리 신학자의 도리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오니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배제하고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오지 않으면 신학이고 교회이고 간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야 신학도 살아남고 교단과 교회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 단박하게, '언약위주' !!

그런 사고방식으로 시작하니, "동업자인데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는 단박한 질문에 대해서 단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것인데, 즉 "사람위주가 아니고 언약위주이다" 라는 말이다. 그것으로 끝인데, 간단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 위주가 아닌 예수님 위주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면, 모든 문제가 간단하게 다 풀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자기 주체문제를 집어넣으니, 이것이 무엇을 가리는가? 주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나도 좀 삽시다" 라고 하게 되면, 살 자격도 없고 천국에 갈 자격도 없는 인간이 말이다. 그러니 이단 티를 내고 교주 티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자기도 한번 살아보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통하는 것이고, 여기에 반해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살릴 놈은 살리고, 죽일 놈은 죽이겠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에 보면 "니가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렸구나" 라고 되어있는데, 그들이 그런 책망을 받는다는 것이다.

(겔 13:19)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 시장원리에 입각한 거짓신학 !!

그러니 거짓 선지자들의 모든 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맞추어진, 즉 시장원리에 입각해서 된 신학이란 말이다. 즉 고객이 왕이기 때문에, 그런 고객에게 맞추어야 가게가 운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모든 조직에서 다 통용되는 법칙인데, 그러니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심지어 모세의 경우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가리키라고 했는데,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는가? 백성들이 하도 말을 듣지 않으니 성질이 나서 그만 두 번이나 내리치고 말았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오직 독생자의 영광 !!

그렇다면 소급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모세는 화를 내면 안 되는데, 그러니 백성들의 원망을 다 듣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지시한 대로 물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한 것처럼 행세를 해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모세 본인의 영광이지, 누구의 영광은 아니란 말인가?

그것은 주님의 영광은 아닌데, 주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독생자의 영광은 비난을 받는 영광인데, 하지만 비난을 받고 또 고난을 받는 것이 무슨 영광인가? 그것은 영광이 아닌 오히려 수모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모를 당하는 것이 이 땅에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이라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비난을 당하고 밉상을 받는 것, 그것이 곧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계란으로 바위 치기' !!

부산에서 그런 강의를 했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계란으로 바위 치기'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계란이 깨어지기에 말이다. 그렇게 계란이 깨어져야만, 그 깨어진 계란이 유일하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계란이라는 것이다. 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계란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라는 것이다. 깨어져야만 하는데, 그것이 곧 좁은 길이고 주님이 가신 길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죽으면, 그것이 복이 있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팔복이 나오는데 말이다. 팔복의 모든 복은 마지막 복에 초점이 모여져 있는데,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즉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하리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

마귀는 바보가 아닌데, 우리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과 번영과 번창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바위에 부딪쳐서 깨어야 하는데, 그러면 드디어 노른자가 나오는데, 그 노른자가 곧 성령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깨어지지 않으면 성령은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깨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의 탄식소리가 들리고, 평소에 우리가 기도한 내용들이 얼마나 철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깨어지지 않고 우뚝 서고 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하는 세상적인 욕망이 기도의 근간에 깔려있음을, 그런 것이 들통나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모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인데, 그런데 모세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 표상이기는커녕 자기가 살아있는 줄 알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가끔(?) 보인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제치고, 모세의 자존심을 제치고 모세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설움을 당하게 하고, 미움을 받고 밉상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아픔과 수모를 계속해서 당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 '아들 되기'의 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제 결론을 내리면, '아들 되기'의 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관계 속에서 무슨 개념이 구축되는고 하니, 아들의 원형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첫째 조건은 아들은 약속에 의해서만 실현되는데, 그 약속 배후에는 3명의 천사가 와야한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

약속에 의한 자녀이기 때문에, 이것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에게 여자가 두 명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약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갈과 사라, 그렇게 두 개의 언약이라는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냥(?) 마누라를 두 명이나 데리고 살았는데,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소 그렇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 왜 마누라가 두 명이었는가?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는데, 그렇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손들 중에서 천국에 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역사라는 것은 남자와 남자의 싸움이 아니고, 물론 남자와 여자의 싸움도 아닌데, 그러면 무엇인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인데, 그런데 그 여자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천국의 일을 할만한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천국은 우리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멘트를 계속해서 날리셨는데, 그래서 아무도 자기가 질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34절의 말씀처럼 말이다.

(눅 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 18: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눅 18: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눅 18: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 언약이 와서 그 사람을 죽였다 !!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아들의 요건은 무엇인고 하니, 약속대로 와야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육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천사가 와서 약속대로 해야하는데,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이 만들어 내어야하는 것이지, 기존의 있는 사람을 천국에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 가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것을 죽여야 하는데, 그 방법이 곧 할례라는 말이다. 그렇게 죽이면 없어지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였다' 라는 것이 남는다는 것이다. 즉 "언약이 와서 그 사람을 죽였다"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였다' 라는 현장이 중요한데, 그 현장에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아버지가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말이다. 그러니 이미 이삭은 죽은 존재인데, 그런데 "아써라, 말아라, 스톱!" 라고 해서 대체물이 들어가는데, 옆의 수풀에 걸려있던 수양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두 말려들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들의 아이디어가 아닌데, "이렇게 쇼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에게 그런 계산은 없다는 것이다.

 

 

◈ 천국에 갈 인간은 아무도 없다 !!

다시 이야기하면, "기본적으로 천국은 있지만 그곳에 갈 인간은 아무도 없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천국에 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언약의 사람들만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약의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언약이 들이닥쳐서, 그 언약이 개입된 자들만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언약이 개입하면 살 수 있는가? 언약이 개입하게 되면, 벌써 언약 안에서 '나' 라는 존재는 이미 죽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이나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날마다 죽는데, 그러한 죽음에서 주님의 생명이 날마다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즉 오직 그리스도께서 살고, 자기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 관계를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언약이 터진 사건 안에서 계속해서 !!

이러한 신약의 내용이 이미 구약부터 있는데, 즉 언약이 터진 사건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봐서 지식을 확보하고 구원을 받자" 라고 한다면, 하지만 성경은 애초부터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말이다. 그것을 구원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라는 이름의 종교적 몸부림에 말이다.

그런 아이디어는 성경에 없는 것인데, 민중들의 영혼 불멸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조립한 논리라는 것이다. 성경자체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오지 않으면, 그리고 이삭이 태어나지 않으면 아브라함 본인이 구원을 받을 길은 없다는 것이다.

이삭이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복의 근원이, 즉 주도권이 어디로 가는고 하니,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위치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삭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손이 오히려 선조를 살리는, 그렇게 시간이 역전되는 새로운 언약적 철로가 깔린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시간은 무엇인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데, 그런데 그 미래의 최종적인 시간의 완결된 지점에서 지나온 모든 것들을 다시 새롭게 살리는 철도노선이 깔린다는 것은, 그것은 곧 언약노선이라는 것이다.

 

 

◈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했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겠는가?"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뻘이 먼저 온 다윗의 주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리고 세례요한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섰다. 그는 나보다 먼저 계셨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도대체 이런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특히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많은 시골교회에서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냥 주무신다는 것이다. 특히 여름에는 말이다. 심지어 언약이라는 말도 끄집어내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약국에서 파는 약인 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ㅋㅋ). 그러니 성경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하면 설교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데, 이것을 풀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들이 되는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약속으로 되어야 하고, 그 약속의 내용은 이 땅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은 자가 약속에 관여된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선배들을 살리는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이삭에 의해서 또 다시 이삭의 자손들에게 전달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삭은 전달된 약속에 의해서 자기는 죄인으로 등장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야곱이 아닌 큰아들인 에서를 밀어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식에게 주어진 언약의 구체화로 인해서 자기는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내용이 하나의 제물이라는 형식으로 담기게 되면, 그게 모세율법에 의한 제사법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제사법이 되었다가 그게 발현해서 인격화가 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듯이, 즉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요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오직 아들이 원하는 자만 살린다 !!

그러니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세상이 활주로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활주로에 내려서 잠시 접촉을 했다가, 다시 떠오른다는 것이다. 절대로 이 세상과, 즉 아담의 것과 섞일 수가 없는, 연속이 되지 않는 말이다. 인간들은 살려달라고, 천국에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그런 것은 개무시를 하고 오직 주께서 계획한 대로만, 오직 언약사건에 접선이 되는 사람만 건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마치 독수리처럼 먹잇감을 낚아채서 올라간다는 말이다.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러니 백을 쓰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즉 "아들이 원하는 자만 살린다. 끝!" 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만 살린다는 것이다. 그런 언약사건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자기 위주가 아닌 예수님 위주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기 부인이 절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침에 밥을 먹어도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이 아침은 주님께서 먹여주신 것입니다. 결코 제가 한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제가 짓는 것은 죄밖에 없는데, 그러니 저는 밥을 먹을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주님의 일을 하라고 밥을 먹여주셨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그 나라의 그 의를 사모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 사기를 당해도 주님의 뜻 !!

오죽했으면 교회에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할 때 고소를 하지 말라고 했겠는가? 사기를 당하더라도 그것은 왜 당한 것인가? 주님의 돈을 주님이 가지고 가시는 것인데,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이 돈은 저의 것입니다" 라고 오해한 것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딱히 제 돈이라고 라고 이야기할 것도 없이 저는 진작에 죽어야만 하는 놈인데, 그런데 이렇게 돈이 몇 푼 생기니까, 또 이것을 가지고 더 살아야 하겠다는 욕심을 발생시킨 죄인이 바로 저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라고, 그래서 그런 사기꾼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교회에는 왜 아직 그런 사기꾼이 오지 않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아직 순서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사실은 매일같이 그런 사기꾼들이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뻥튀기를 하나 사도, 보통 3000원을 하는데 어떤 마트에 가면 3500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500원을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드리려고 제가 가끔 뻥튀기를 사는데, 물론 제가 더 많이 먹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매일같이 우리는 어리석게도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엔진오일을 하나 갈아도, 4만원을 하는 곳도 있지만 조금 옆에 가면 37,000원을 하는 곳이 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다 주께서는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다.

 

 

◈ 내 아들아 !!

여기 교재 50페이지에서 왜 '아들' 이라는 개념을 제가 언급했는고 하니까, 잠언서 초반에 보면 누가 나오는가? 다윗의 아들이, 혹은 다윗이 나오는데, 이것도 설명을 좀 해야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설명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예를 들어서, 모세가 죽는데 그 뒤에 여호수아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존재하지 않는데, 여호수아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모세언약에 의해서 발생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말이다. 여호수아 자신이 그것을 아는데, 즉 자기가 하는 모든 짓거리는 자기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을 실행에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 신발을 벗어라 !!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는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신발을 벗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 때에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는 말이다.

(수 5: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모든 계획은 너의 아이디어나 협조로 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동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언약적 사태 속에 니가 휘말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인데, 마치 돌아가는 세탁기 통 속에 빨랫감이 휘말려 들어가듯이 말이다. 

 

 

◈ 옴파로스 !!

그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중심이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모든 와류에, 그 소용돌이에 누가 말려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광주에서, 또 어떤 사람은 대구에서, 그렇게 전부가 그리스도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렇게 말려들어도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자인데, 그러니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그 구심점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 나온 일관된 변화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 모세가 아닌, 지팡이 !!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갔을 때는, 모세에게 주어진 모든 사항은 이미 동행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일으킨 사건에 모세는 당황하면서 응급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지만 사실은 지팡이가 모세의 모든 행동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아니,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모세는 뱀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는데, 그러면 그것을 잡은 손이 떨리겠는가? 안 떨리겠는가? 혹시 자기 손을 물지 모르는데, 얼마나 겁이 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뱀과의 전쟁에 모세가 말려든 것이란 말이다.

 

 

◈ 아들은, 뱀과의 전쟁에서 !!

아들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겠는데, 여기서 다시 정리해보면, 뱀과의 전쟁에서 파생물로 등장할 때만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라고 부르니 제가 아들이 맞지요?" 라고 하는, 그런 인간의 언약이 없는 존재는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악마에게 속해있는데, 그것을 주님이 오셔서 건져주어야만 아들이 됨을 알게 되는데, 그때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이외에 아들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건져주셨으니 말이다.

교재 51페이지로 진도를 나가기 이전에 50페이지를 조금 더 설명하겠는데, 여기서 누가복음 21장을 살펴보자. 10절에서 13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눅 21: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눅 21: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눅 21: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눅 21: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 이 세상의 모든 천재지변은 예수님과 관련이 !!

여기 11절과 12절에 보면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한 마디로 응축해서 이야기하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천재지변은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이 33살 먹은 청년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과연 믿어지는가? 어떤 도사가 이런 소리를 하면 아마 당장 맞아죽지 싶은데, 그래서 예수님도 죽었지만 말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이 세상의 모든 변화와 모든 미래가 나와 관련이 되어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말이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그리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고 하는데 말이다. 이 누가복음 21장 전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데, 즉 "제자들아, 이 세상에 그 어떤 천재지변과 기상이변이 일어나도, 정치, 경제, 사회에 그 어떤 변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 나와 관련이 되어있어 있음을 너희는 믿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이런 믿음이, 이런 황당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믿음에 대한 요구에 호응하지 못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평소에 우리는 이 자연을 누구와 직결시키는고 하니, 자기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즉 '나의 삶'과 말이다. "주여, 어떻게 하면 이 자연세계 속에서 그것을 이용해서 제가 살 수 있겠습니까?" 라고, 즉 자기가 우선 살고 보겠다는 것이다.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우리교회 ??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하다보니, 예수님의 기적마저도 어디에 활용이 되고 동원이 되는가? 결국 자기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배당을 차려서 '대한 예수교' 간판을 달고 개척교회를 하고 말이다. 거기서 나오는 모든 멘트가 무엇인가? "여러분, 하나님 덕분이 살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분명히 간판은 교회인데, 그 말하는 내용은 절간이라는 것이다.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그런 것을 원하지요?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를 빌려서,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여러분의 기대를 충족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여행사이고 중간매체인데,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오늘이라도 우리교회에 등록하시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런 상품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1장에서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데, 믿음은 새삼스럽게 교회를 만들 이유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누가 만든다는 것인가? "교회는 주님이 만드시는데, 너희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교회를 만들면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 수 만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이 만드시는 교회는 달랑 하나밖에 없는데, 즉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수의 교회를 버리고 하나의 교회를 교회라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버려야 될 교회에 무엇도 포함이 되어야하는가? 자기가 다니고 있는, 자기가 충성하고 봉사하던 교회도 아낌없이 포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 결국 우리 자신이 곧 모세 !!

그러니 결국 우리가 모세인데, 우리 자신이 누구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인가? 자기 교회가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교회를, 언약적 사건의 교회를 자기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사택에서 주님이 죽이겠는가? 죽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죽어야만, 우리가 꺼져주어야 무엇이 보인단 말인가?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교회' 라는 간판을 걸고 앞장서게 되면, 사람들은 우리교회만 교회인 줄 알고 있는데, 그러니 그게 얼마나 불신앙적인 행동이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저기 달을 좀 따서 오시죠" 라고 하면, 당연히 "그것은 힘이 듭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주님은 그게 된다는 말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움직일 때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10가지 재앙이 떨어지는데, 그게 무엇과 관련이 되어있는가? 천재지변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을 모세가 했는가? 지팡이가 했는가? 그런데 만약에 모세가 "여러분, 그것은 제가 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겠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는 단지 목격자입니다 !!

사도바울이 죽은 자를 살려내었는데, 그게 3차 전도여행을 할 때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 일을 사도바울이 했다고 하면 일어나겠는가? 손수건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하신다는 말이다.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누가 일어나게 했는가? 베드로인가? 아니면 요한인가? 자기들은 결코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던 자들은 "당신들이 했다" 라고 하면서 엉터리 증언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하셨다. 우리는 그냥 이 일에 목격자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러니까 일어난 같은 일을 보면서도, 한 쪽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 하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목격자가 두 종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순종이 곧 믿음 !!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제오후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순종이 믿음이라고 했는데, 기적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인데, 즉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몰려와서 교회가 부흥될 것이다" 라고 꾸미지 말라는 것이다. 두 날개를 펴면 목회가 날아오른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믿음이나 순종이 아니라, 자기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이름인데, 그런 사람은 하늘의 달이나 별을 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름을 타고 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세웠다고 하면, 그 사건조차도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의 일의 연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왜 먼지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예를 들어서, 어떤 UFO, 즉 미확인물체 비행접시가 미국 워싱턴에 내려앉았다고 하면,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인데 말이다. 그렇게 UFO가 내려앉으니 먼지가 무려 4km밖까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먼지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비행접시가 내려앉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비행접시가 말이다.

그런 먼지 중의 하나가 우리교회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교회가 목적이 아니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유발된 그 결과물이 우리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일으키게 된 사건에 대해서 순종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를 말아먹으면 안 되고 교회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앞뒤가 맞지 싶은데,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누가 가리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교회가 그것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교회를 부수어 버리면 하나밖에 없는 교회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초부터 우리교회를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만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들어서 깨져야 한다는 것이다. 계란은 깨져야 맛이 나듯이 말이다.

 

 

◈ 죄를 짓는 것도 일종의 순종 !!

우리는 이 땅에서 열심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줘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게 죄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짓는 것도 일종의 순종이라는 말이다. 하고 보니 오늘 이상한 논리가 나왔는데, 마귀가 좋아하는 말 같은데 말이다(ㅋㅋ).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갑자기 "죄를 짓자" 라고 되고 말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 죄를 짓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항상 죄를 짓는 것을 두고 "아하, 이것마저도 죄였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이라는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확인하는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따라나오는데,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먼지인데 말이다.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 라는 노래도 있는데, 그래서 그 원인을 찾아보니, "주님이 먼저 계시고 나는 이 땅에 남자로 태어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죽으면 죽으리라 !!

그러면 자기가 남자로 태어난 이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순종해야 하는데,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말이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니가 왕비가 된 것은 호강하려고 것이 아니라,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라고 말이다.

(더 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더 4: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하는 것, 그것이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하루하루가 말이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면 되고, 오늘 주어진 것까지 말이다. 이것도 순종이란 차원에서 보면 다 의미가 있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절대로 모세 흉내를 내면 안 되는데, 홍해가 갈라졌다고 해서 지팡이를 들고 홍해까지 가서 치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그 당시에 순종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이 순종인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게 홍해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것 이상의 기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기 위해서 젓가락질을 하는 것조차도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 시골교회 목사의 비애 !!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계산을 해보니 장례식을 무려 19번이나 했는데 말이다. 시골교회 목사들이 제일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장례식은 자연적으로 교인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을 하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무엇인고 하니,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부모가 살아있으면 그래도 도시에 갔던 자녀들이 돈을 부쳐주면 그것을 가지고 부모가 헌금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처음에는 당장 끊어지지는 않는데, 처음 한 두 달 정도는 십일조 비슷하게 해서 자녀들이 직접 부쳐주는데, 하지만 결국은 끊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다. 그래서 모든 목회가 돈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그러면 목사의 가슴이 그야말로 철렁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의 부모가 죽으면 그래도 좀 괜찮은데, 그래도 좀 재산이 있는 집의 부모가 죽으면 큰일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본심인데, 그런 음흉한 마음에도 우리가 순종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인데, 아무런 가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 고민이 되지만, 죄를 지으라고 하니 무엇이 걱정이 되느냐는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즉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자기 위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고민거리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심이고 본능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구원이 되지 않는 인간을 구원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그 솜씨를 우리의 입장에서 마음껏 감사해야만 하는데,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다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누가복음 21장을 다시 !!

누가복음 21장을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얘들아, 모든 것이 나와 관련이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모든 일들은 너희들의 잘못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죄책감이 생기게 되면 마귀가 들고, 그렇게 마귀가 들면 칸트가 말한 것과 같은 반성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성을 하게 되면 점점 더 마귀의 질곡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성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행여나 주어질까 싶어서, 회복이 될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 또 회복신학인데, 옛날에 손해본 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반성에 반성을, 즉 극한의 자학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금식을 더하고, 성경을 더 열심히 보고, 전도도 더 많이 하고, 그렇게 도를 닦는다는 말이다. "하나님, 이래도 제가 손해본 것을 더 보충해주지 않을 겁니까?" 라고 하는, 그런 분노심을 가지고 말이다. 일종의 데모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모든 일은 너희들이 아닌, 나와 관련되어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이게 복음이란 말이다. 그러니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 편히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개미가 기어가는 것조차도 주님이 주신 변화인데, 그러니 우리가 거기에 개입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잠언서의 핵심이란 말이다.

 

 

◈ 아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

교재 51페이지에 보면 방금 제가 했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아들을 생산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들을 생산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들이 나온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일종의 인큐베이터인데, 아들은 담는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죄인들의 집단인데, 지리적으로는 애굽에서 나왔지만 속으로는 완벽하게 100프로 애굽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그들은 애굽의 사상이고 애굽의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10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는데, 거기에는 부추도 있고 양념도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요즘 우리가 즐겨먹는 수박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없어서 지금 자기들의 정력이 약해졌다고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민 11:4)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 11: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그러면 그것이 과연 아들의 모습인가? 아들이 그러하냐는 말이다. 그러니 아들이 아닌 자들 속에서 아들이 나온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감사해야 되는데, 즉 자기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아들이 아닌 자가 어떻게 언약이 개입함으로서 아들이 되는지를 말이다. 어떻게 아들로 변하고 있는지를 주님의 사건을 통해서 느끼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 대속죄일에 한꺼번에 모든 것이 소멸 !!

그러면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은 모세의 제사법에 나오는데, 율법을 주어서 우리를 하여금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 죄를 어린양이라는 대체물로 인해서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독대를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린양의 피가 뿌려짐으로서, 의도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7월 10일 대속죄일에 한꺼번에 모든 것이 다 소거된다는 말이다.

드디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에 도달했지 싶은데, 어려워도 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데 말이다. '1-2-3-4-5-6-7',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면 이 '1-2-3-4-5-6-7'의 차원이 높아지는데, 끝나면 또 올라가고 말이다.

이것은 바로 시작과 끝, 즉 창조와 종말이 7일만에 끝난다는 것인데, 물론 이 세상에서는 1년이 365일이고 계속 시간이 흘러가지만, 언약사건 안에서 시간개념은 이처럼 차원을 높이고 또 높이고 하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이 시간마저 사라지는 순간까지 끌어당기는, 그런 엘리베이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희년(禧年) !!

이러한 시간의 반복이 곧 제사제도인데, '(7×7=49)+(1)'은 무엇인가? 50년, 그것이 바로 희년이라는 말이다. 그 희년이 맞추어서 누가 오시는가?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펴놓고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보라, 지금의 희년의 때다" 라고 하시는데, "눈이 먼 자는 보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하게 되고, 옥에 갇힌 자는 해방을 얻는다"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모든 죄를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말인데,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눅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렇게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시간과 공간들은 결국 죄를 생산하고 또 생산하고, 그리고 거기에 율법까지 개입하는데, 율법이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입을 막고, 우리를 저주아래에 두게 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런 저주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속에서 비로소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누가 등장하는가? 생명이 되시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이다. 아들이 말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이스라엘은 껍데기, 그러나 !!

다시 정리하겠는데,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껍데기인데,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없이는 아들이 온다는 말인가? 오지를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죄인인데, 그러면 자살이라도 해야만 하는가? 그게 아니라, 죄인 안에서 더욱 더 죄인이 되게 하시는 그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시면서 외치면서 그 죄를 의로 바꾸어주시는 분이 우리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블랙박스' 라고 했는데 말이다.  
 
◈ 이스라엘 역사는, 마치 말린 카펫과 같아서 !!

이제 끝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칸 영화제나 부천 영화제를 보면 배우들이 야사시한 옷을 입고 레드카펫 위를 걷는데, 그 레드카펫이 처음에는 깨끗했는데 나중에는 배우들이 걷다보니 흙도 묻고 하이힐에 찍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카펫을 감게 되면 하나의 롤이 되는데, 그렇게 감게 되면 바닥에 붙어있던 카펫의 뒷면이 드러나게 되고, 밟았던 그 앞면은 안으로 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밖에 있던 것은 안이 되고, 안에 있던 것은 밖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둘둘 말아버리시는데, 그러면 안에 있는 것은 죄의 역사가 되고, 밖에 있는 것은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희생했던 참된 선지지와 같은 언약에 의해서 희생된 자들인데, 결국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참된 역사인가? 사실은 둘 다 동일한 카펫이기 때문에,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앞뒤로 깔려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도는 양쪽을 다 봐야만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이 역사는 문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인정하자는 말이다. 세월호가 물에 빠지게 된 것은, 인간의 부도덕한 탐욕의 결과임을 말이다.

하지만 그 뒷면은 무엇인가? 문창극인데, 국무총리 후보로 나섰다가 떨어진 말이다. 그 양반이 뭐라고 했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건 선한 뜻이란 말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니 말이다. 

그러면 그 학생들의 부모는 자식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부모의 잘못에 대한 책임추궁이 아니라, 모든 일은 누가 유발시킨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사건은 일어나야 했다는 것이다. 

 

 

◈ 언약사건에 휘말려들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

그러면 아이를 잃은 가정은 어디에 말려들었다는 말인가? 주님의 언약사건에 휘말려들었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 그 사건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면, 아브라함이나 그들이나 모두가 다 천국에 갈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이다.

그야말로 '아멘'인데, 그런데 왜 그들이나 우리는 거기에 감사할 수가 없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살고 싶어. 이 짓을 해서라도 나는 살아야만 돼. 나는 무조건 살아만 돼" 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감추면서도 가장 기본적으로 올라오는 마그마인데, 그러니 그것은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올라오는 우리의 죄성, 하지만 그것마저도 다 의미가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죄인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거나 걱정해야하는 것들이나 두려움이 말이다. 사람이 두렵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이 없어서인데, 사랑이 있으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으로, 즉 심판이 없다는 말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것이 바로 아들로 인한 것인데, 우리는 이 땅에서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의 삶을, 즉 아들의 삶을 바깥으로 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스펀지가 머금은 물은 배출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작 믿음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희한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 !!

물론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믿어지는데, 즉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믿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사이지, 우리가 알아서 관리하는 믿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인데, 그것을 주름이 접혀진 것을 펼치는 것과도 같은데, 마치 접혀진 부채가 펼쳐지듯이 말이다. 그러면 학 그림도 나오고 온갖 그림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펼치면서 그리스도의 뜻이 거기서 향기를 내뿜으면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 '예'가 된다고, 즉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나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잠언서에서 말하는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에 우리가 어찌 되었던 간에 말려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되고 싶은 멋있는 존재는 따로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부수어 가시면서 기어이 아들로 만들어내시는 주님의 솜씨에 그저 감사하고 고맙고 기쁠 따름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