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11 - 아들 / 140707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11 - 아들 / 140707

정인순 2014. 7. 7. 13:28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1 - 아들

                                                           

14,07,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잠언 1장 8절을 봅시다. 거기에 '내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지혜는 어떤 특정인을 지목했는데, 그 대상은 바로 '내 아들'입니다.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 내 아들아 !!

이렇게 지혜는 이렇게 어떤 특정한 인물을 지목했는데, 그러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내 아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윗과 다윗 아들 사이에 무엇이 형성되어있는고 하니까,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를 해서 아이를 놓으면 다윗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지만 다윗과 아들의 경우에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아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딸이 생길 수도 있고,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런 점에서 다윗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와 내 자식 사이에는 육신이 주도적으로 관여하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는데, 정말이지 특이하게도 말이다. 우리는 밧세바와 합궁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되지 않느냐고 여기겠지만,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은 솔로몬을 낳을 때에, 그 솔로몬은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다윗은 믿었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다윗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가, 그것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말이다.

 

 

◈ '다윗언약'이란?

아마 여러분도 '다윗언약' 이라는 말을 들어봤지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 가문을 만들어내겠다" 라는 것이 곧 다윗언약이라는 것이다. 다시 천천히 해보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들이라는 가문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인데, 거기에 관한 약속이 바로 다윗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낳은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겠는가? 아들이 아닌데, 그러면 다윗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고, 즉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고,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아들인 자와 아들이 아닌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언약을 주셨다고, 그렇게 정리하면 된다는 말이다.

 

 

◈ 아들은, 오직 약속에 의해서만 !!

그러니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고, 거기에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내장되어야 하는데, 그 약속이 담겨있을 때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조용한데(ㅋㅋ), 너무 번잡스러우면 강의하기가 참 힘이 드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이 아니라, 물론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 나를 누가 만들었지? 아하,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라고 되는데 말이다. 자기 주변에 보니, 아버지가 있고 엄마가 있고 자기가 있으니, "아하, 나를 만들어주면 아버지로구나. 나를 만들지 못한 옆집 아저씨는 아버지가 아니구나" 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다. 아닌가요? (ㅋㅋ)

하지만 그런 것이 바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왜 그게 잘못된 생각인고 하니,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없었다고 하면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이 바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게 그만 들통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다윗계통이 아니라고 하면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것인데, 그게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즉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 때, 언약을 주셔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방금 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즉 여기에 다윗이 있고,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아들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한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인데, 그러니 아들이 아무리 사고를 치고 해도, 아버지가 낳았으면 그 아들은 아들이다" 라는 것이다. 아무리 호적에서 파낸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너는 어디에 가도 내 자식이다" 라고,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그것이 아닌데, 참으로 공정한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아들로 만들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고, 이렇게 아들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약속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방금 그것을 두고 '다윗언약'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나 생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한번에 말이다. 그래서 자꾸만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알아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묻게 되면 머뭇거리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되니 말이다.

 

 

◈ 다윗보다는 약속이 중요해 !!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아들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다윗이 있다는 게 조건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언약이 있다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인가? '나'보다는 약속이 우선인데, 즉 다윗보다는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약과 약속은 같은 의미로 보면 되는데 말이다.

만약에 다윗의 자손들이 약속을 위반하게 되면 그들은 아들인가? 아닌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 낳게 되면, 그것으로 아들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의 노선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것은 아들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이 솔로몬을 낳을 때, 물론 밧세바와 합궁을 해서 낳았지만,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으니 내가 있다" 라는, 즉 그렇게 해서 자식이 있는 것이 아님을 다윗은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있다" 라는 것은 약속에 의해서 있어야 하는데, 물론 '밧세바' 라는 여인이 있다는 것도 약속이 있어야하고 말이다. 그렇게 약속이 있고, 약속이 있는 그 사이에 있는 자식도 약속에 의해서 주어져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여디디아 !!

그래서 솔로몬의 이름이 무엇인가? '여디디아' 라고,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솔로몬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약속 덩어리가 나왔는데, 그 약속 덩어리가 곧 여디디아, 즉 우리말로 하면 사랑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하 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그렇게 해서 사랑이 나왔는데, 그런데 솔로몬이 나오게 된 당시의 다윗은 어떤 형편이었는가? 다윗은 간통한 사람이고 살인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6계명과 7계명을 모두 어기고 말았는데,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계명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긴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다윗은 나머지 계명도 몽땅 다 어긴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다윗은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고, 또한 부모를 공경하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인데, 사랑 덩어리인데 거기에다가 미움이 들어가게 되면, 그 전체 사랑이 그만 분노 덩어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오잉, 죄가 사랑으로?

지금 다윗은 죄를 지었는데, 밧세바도 그러하고 말이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무엇이 나왔는가? 여디디아, 즉 사랑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내가 죄인이며,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즉 죄인이 자기 힘으로 살아봐야 죄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이 나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일어났는데, 무슨 그런 공식이 다 있느냐는 말이다. 차에 물을 넣었는데, 밟으면 100키로라는 것이다. 무슨 그런 일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휘발유가 아닌 물을 넣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불이 났는데 물이 아닌 휘발유를 부으니 불이 꺼졌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밖에 몰랐는데 사랑이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사랑밖엔 난 몰라 ♬' 라는 노래도 있었지만, 그렇게 죄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랑이 나오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전체가 세팅이 되어서, 즉 '다윗, 밧세바, 솔로몬'이 세팅이 되어서,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사랑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표준모델로서, 즉 "나는 너희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죄인에게는 나올 수 없는 사랑을 너희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받을 때, "이 사랑은 나 같은 죄인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랑인데, 그런데 값없이 받았습니다" 라고 할 수 있기를 주께서는 바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을 한 군데 찾겠는데, 제일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을 보자.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성령과 신부 -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라' !!

여기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뭐라고 하는가? '오라' 라고 하시는데, 와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와서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과 신부는 이미 알고 있는데, 생명수는 값을 주고 나서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한다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금식을 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값없이 받는다는 것이다. 세리든 창기든 간에 말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주님의 신부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여자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여인, 그것이 곧 사랑인데, 참 특이하게 말이다. 너무나 특이해서 우리는 잘 믿기지 않지만,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봐서, 그 특이함이 특이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진리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인간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되고, 인간 이야기를 해야될 경우에는 "우리 인간이 왜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펼쳐서 읽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가? 그 말씀에서 다른 단어들이 튀어나와서 마구 인간을 삿대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니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야" 라고 말이다. 

성경말씀이 왜 그렇게 활동할 수밖에 없는 말씀인지,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은 값없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참사랑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야말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는 사랑인데, 회개했다고 해서 주는 사랑이 아니고, 믿는다고 해서 주는 사랑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주께서 사랑을 주시니까, 그 다음에 믿음도 생기고 소망도 생기는데,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랑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니 사랑은 사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 보따리에서 믿음도 나오고 또 소망도 나오는데, 그러니 "나는 믿음이 좋습니다. 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라고 자랑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왔음을 고백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랑에서 말이다.

오늘은 강의초반부터 성경이 다 정립되고 말았는데, 혹시 저 혼자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ㅋㅋ), 그렇게 항상 전체를 알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 아마 장로님이 오셨지 싶은데, 누가 한번 나가보세요.

그러면 아들 이야기를 다시 하겠는데, 다윗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사랑' 이라는 것이다. 이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기존의 아들은 아들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 이방딸과 혼인하지 말라 !!

이제부터 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좀 하겠는데, 그것을 하기 전에 쉬운 것부터 먼저 해보면,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서 제사장을 보고 "이방딸과 혼인하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 레위인들이 이방딸과 혼인을 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느 13: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느 13:24)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느 13:25)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이방딸과 혼인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이방신이라고 해도 되는데 말이다. 즉 "이방신을 섬기는 딸과 혼인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책망을 받을 때, 우리 인간들의 대책은 무엇인가? 당연히 이방딸과 혼인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참 쉬운데, 하지만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이 너무 단순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이방딸과 결혼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아가씨와 하면 되지!"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여기서 느헤미야가 세 가지를 지적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 문제와 안식일 문제, 그리고 이방딸과 결혼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책이 말라기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말이다.

이러한 질책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간단한데, 십일조에 대해서 질책을 받으면 십일조를 내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십일조라는 율법을 지킨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수준이 그러한데,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질책하면, "그러면 십일조를 하면 되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안식일의 경우에도,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면 되지" 라고 나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바로 지옥에 가는 자들의 특징인데, 바리새인들을 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고 안식을 지켰는데, 그리고 이방딸과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마귀의 새끼들이라는 것이다. 즉 마귀의 아들들이란 말이다.

 

 

◈ 하나님의 아들과 사탄을 끄집어내는 작업 !!

제가 여기서 어렵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 '하나님의 아들'에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을 끄집어내는고 하니, 사탄을 끄집어내는 작업에 하나님께서 나섰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많이 어려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아들이 되면 되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으로 끝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체적인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모르고, 물론 관심조차도 없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 십일조를 통해서 돈을 사랑하지 않기 ??

여기에서 어제오후설교를 다시 해보면,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십일조를 하면 되고, 안식일을 지키면 되고, 이방딸과 결혼하지 않으면 된다" 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십일조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돈을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십일조를 해도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하나님도 밝히기는,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드세요" 라고 하면서 십일조를 하나님에게 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데, 하지만 '십일조를 통해서 돈을 사랑하지 않기' 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가?

"안식일에 가게문을 닫고 교회에 오라. 그래서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하면, 물론 그렇게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하필이면 문을 닫았을 때 단골이 세 번이나 왔다가 바람을 맞아서 그만 단골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거리, 그리고 주문전화도 왜 그때 그리 많이 오는지 말이다.

구 목사님이 있는 인천의 녹매교회는 식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설교를 들어보면 도중에 전화벨 소리가 얼마나 많이 들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때가 거의 점심시간인데, 물론 초창기에는 받아서 양해를 구하면서 거절을 하다가, 요즘은 아예 받지도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물론 이방딸과 결혼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하고 싶은데,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얼굴이 못생기고 이방딸은 예쁘다고 하면, 그래서 부모가 강제로 아들에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하면, 그래서 할 수 없이 결혼을 했는데, 그 뒤에 몰래 이방딸과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이다. '사랑과 전쟁2' 이야기인데 말이다(ㅋㅋ).

 

 

◈ 주께서 질책을 할 때는, 그게 곧 절개지 !!

부모의 신앙이 아들까지 변화를 시킬 수 있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오후설교시간에 했는데, 물론 지금은 다 잊었겠지만 말이다. 주께서 질책을 할 때는 그게 곧 절개지인데, 즉 인간은 쪼개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봉합해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십일조를 하지요" 라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들은 왜 이방딸과 결혼할 수밖에 없고, 왜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또 안식일을 건성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을, 그것은 우리 인간이 쪼갠다고 해서 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오셔서 쪼개주셔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쪼개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자신을 감추려고 하지, 쪼개는 것은 결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쪼개는데, 그렇게 쪼개면 무엇이 드러나겠는가? 죄가 드러나는데, 그러면 그 죄는 어디로 향해야하는고 하니까, 장차 오실 율법, 즉 "안식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드려라.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 라고 하는 그 모든 말씀을 제대로 지킨 분과, 그리고 쪼개져서 죄가 노출된 지점과 서로 마주치게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레위언약인데, 즉 약속이란 말이다.  

 

 

◈ 요나의 경우에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런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요나의 경우에 자기가 니느웨로 갈 때, 자기는 지금 하나님과 생각이 같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니느웨가 회개를 함으로서, 40일 만에 멸망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누가 삐쳤는가? 요나가 삐쳤는데, 그러면 요나는 자기가 절개지가 되었는가?

전혀 그게 아닌데, 요나는 자기가 옆에 붙어있으면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된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똑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요나는 초막을 짓고 죽으려고 했는데, 그러자 박넝쿨이 생겨서 시원하게 되니 또 좋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벌레로 인해서 박넝쿨이 말라버리니 햇볕에 뜨거워지는데, 그러자 요나는 또 못살겠다고 앙탈을 부린다는 말이다.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욘 4: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욘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조금 전까지는 죽겠다고 해놓고, 금방 뜨거워서 못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치매 환자도 아니고 말이다. 이것은 마치 한강다리에 자살을 하려고 가서는, 물이 너무 차갑게 보여서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죽는데도 몸이란 폼은 다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어디서 강의를 하면서, 사람에게 있어서 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분이라고 했는데, 즉 사람은 기분에 따라서 사는 것이지, 자기 결심에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결심은 큰소리를 치는 것에 불과하고, 자기 기분이 좋으면 팁을 뿌리고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물론 기분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 !!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도 자기가 다스릴 수 없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언약은 어떠한가? 언약은 우리 인간을 아는데, 인간이 어느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를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쪽 인간의 죄를 유발시키는 작용을 겸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쪽은 쟁기로 파는 작업과 동시에, 주님께서 등장하신다는 말이다. 해가 뜨는 동시에 그 동안에 있었던 어둠은 물러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가 뜨는 동시에, 이쪽에서는 그 해를 맞이하는 환경도 동시에 조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그것을 누가 다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혼자 다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라고 했는데, 즉 "너희들은 못하지? 분명히 못하지? - 예, 못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들이 못하는 것이니 내가 해낼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주께서 해내시면 그 모든 공로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주께서 홀로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모든 공로를 주님께서 돌려드리는, 천국은 바로 그렇게 해서 모인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주님 혼자서 다 하셨음을 고백하는 자들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법에 대해서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사탄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그러면 아까 제가 던진 문제에 대해서, 즉 여기서 사탄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은 곧 약속인데 말이다. 이 율법이라는 약속이 드디어 더 구체화가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율법이 곧 모세언약이고, 이 모세언약이 더 구체화가 된 것이 다윗언약인데, 그러면 율법에서 아들로 전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율법은 모든 인간이 받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 율법이 아들로 구체화가 되면 하나님은 누구와 상대를 하시는고 하니, 모든 인간은 배제를 해버리고, 하나님이 만들어낸 그 아들과만 상대하시는데, 그러니 율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독점적으로 넘겨지고 만다는 것이다.

 

 

◈ 먼저 사탄을 만나신 예수님 !!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그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만나기 이전에 누구를 먼저 만났는지를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마태복음 4장에 나오듯이,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서 사탄을 대면했다는 것이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사탄을 만났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가장 먼저 묻겠는가? 사탄에 대해서 무엇을 가장 궁금해하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 사탄이 어떻게 생겼던가요? 귀는 정말로 당나귀 귀이고, 또 피부는 녹색인가요?"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여기서 녹색피부는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옛날에 'V' 라는 미국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때 외계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피부가 녹색이었다는 것이다. 파충류가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 마귀에게 뿔이 있던가요?" 라고 하지 싶은데, 흔히 부흥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염소는 뿔이 있어서 마귀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뿔로 들이박는 성질이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 부흥회를 마치고 나서 꿈을 꾸면 사탄이 등장하는데, 부흥사가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당나귀 귀에, 녹색피부에, 뿔이 달려서 말이다. 그리고 눈은 왜 그렇게 찢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왔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없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항상 제일 먼저 자기 눈을 통해서 외부를 감각하고, 그 감각된 것을 가지고 인간 내부의 역사 속에 남겨져있는 인간들의 언어 속에서 구성을 하게 되는데, 그런 가상적인 세계관과 결합되면서 인간 나름대로의 정답을 내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감각과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들었던 풍월, 즉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자기를 가르쳤던 아버지 세대의 강요된 진리체제로 조립해서, 그래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밝혀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주관적이고 일방적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 사탄은, 그때그때 달라요 !!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알다시피 사탄은 천사인데, 천사는 어떤 특정한 모양을 갖춘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이다. 사탄이 나타났다고 해서 사진을 찍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탈이고 가면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게 인자한 모습으로 왔던 며느리가 사탄으로 변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미스코리아 출신이야!" 라고 하면서 자랑했던 며느리가 집안을 다 말아먹을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이다. 선입관 때문에 좋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첫 인상이 좋아 보이면 무슨 말을 해도 천사의 말로 들리고, 반면에 첫 인상이 좋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도 마귀의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 그런고 하니, 제가 방금 이야기했지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으로 구축된 선입관이 무엇이든지 오류가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탄을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는데, "사탄인가? 아닌가?" 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상을 보고, 또한 피부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탄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 다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사탄이 나오는가?'

아직까지 제가 던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사탄이 나온다' 라는 것이 어떤 논리로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누가 반대하는고 하니, 기존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무척 반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줄 때는 율법을 독점한다고, 방금 그런 말을 했는데, 그러면 율법의 완성은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넘어가는데, 그쪽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야기가 율법을 받은 인간에게 과연 기분이 좋게 들리겠는가? 아니면 나쁘게 들리겠는가?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데, 누가 한번 대답해보라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쁜데, 세상에 인간을 모독해도 그렇게 모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인간의 인격을 짓밟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 내가 콱 죽어버릴까?

예를 들어서, 지금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데 빨래를 끄집어내려고 해서, 그래서 "어머님,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끄집어내세요" 라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러면 "응, 알았어"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뭐라고 하는가? "내가 콱 죽어버릴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이게 어떻게 된 사연인고 하니, 제 아내가 볼 때는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으니 그러니 아직 빨래를 끄집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볼 때는 무엇인가? 분명히 빨래가 이미 다 된 것 같은데, 그런데 아깝게 물도 계속해서 나오면서 세탁기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빨래를 끄집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물을 아껴야 한다. - 아닙니다. 세탁기가 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80년 동안,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아왔던, 즉 '아껴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 '나' 라는 것이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누가 진리였는가? 나름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그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과 단짝이 된 모습인데, 그러니 이게 특정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가 아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평소 모습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다 그렇다는 말이다.

 

 

◈ 딱 보니, 그 여자는 아니다 !!

예를 들어서, 아들이 어떤 아가씨를 데리고 왔는데 엄마가 극구 반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자기의 긴긴 역사 속에서 "저 여자는 절대로 내 며느리 감이 되지를 못한다" 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아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 내 여친을 싫어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좀 대주세요"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뭐라고 하는가? "기분상 그렇다" 라고 하는데, 즉 "그냥 딱 보니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여자 친구가 옛날에 엄마의 곗돈을 들고 튄 그 계주의 인상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이다(ㅋㅋ). 이것을 두고 정신분석학에서는 '트라우마' 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번에 우연히 TV를 보는데, 메추리알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장모님이 그래도 생각해서 다른 것과 그 메추리알을 섞어서 음식을 해놓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고 하니, 다름이 아닌 천하장사 이만기인데, 그 이유를 물어보니, 몸에 무슨 메추리알에 대해서 알레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릴 때 메추리를 키웠는데, 그것이 불쌍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메추리알만 보면 어릴 때의 그것이 생각나서 도저히 먹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계란과 거의 똑같은데 말이다. 장모가 아무리 먹으라고 해도 전혀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장모가 몰래 넣어놓으면, 살펴보고는 그게 들어있으면 먹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형은 잡채를 먹지 못하는데, 어릴 때 잡채를 먹다가 제대로 채한 경험이 있어서 말이다. 그리고 저는 개고기, 순대, 곱창 등을 먹지 못하는데, 물론 그런 경험은 없지만 말이다. 특별히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사실 몸에 꽤 괜찮은 것들인데 몸이 받아주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 사탄 - '바로 니가 진리다' !!

그러니 결국 사탄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니가 진리다" 라는 것인데, 즉 "진리라고 따로 믿을 것이 아니라, 너는 너 자신만을 믿고 살아라. 너 자신만을 믿으면 되는데, 왜 다른 사람을 믿어? 너는 의지가 그렇게 약한가? 너의 문제는 너 자신이 해결해야지. 그렇게 비겁한가? 설령 너 자신이 지옥에 가더라도 다독거려줄 사람은 너 자신밖에 없어. 너 자신만이 너를 위로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너를 위로할 수 없어. 너의 주인은 너 자신이야"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을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계속해서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즉 "너는 돌이 떡이 되게 행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배가 고플 때는 너부터 살아야만 돼. 그러니 이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너 자신부터 살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면 되잖아"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사탄의 주장은, 그동안 끈질기게 인간의 양심에 호소했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속에 사탄이 활개치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까, "항상 모든 책임은 내가 알아서 내가 진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니 말이다

그런 논조를 사탄이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들이대었는데, 즉 "니가 제일 중요해. 그러니 너부터 살고 봐야돼. 그러니 이 세상 영광이 부럽지 않은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하시는데, 즉 "아버지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들입니다. 아들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아들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없어 !!

다시 정리를 하면, 사람에게는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없다는 것인데, 즉 누구의 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신이기 때문에,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아들이라고 하면 누구의 잔소리를 계속해서 들어야한다는 말인가?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한번 아들이 되었다고 해서 계속해서 아들로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까도 했는데, 즉 다윗이 아들이 되었다고 해서 계속 아들로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율법의 완성단계가 유지되어야만 하는데, 그러니 한번 신자라고 해서 계속해서 신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유지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면, "목사님, 그래서 우리는 성화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아들이 되게 한 것은 값없이 아들이 되었는데, 성령에 의해서 말이다.

 

 

◈ 관리도 외부인에게 !!

그러면 아들이 되게 하고 관리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성령에게 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기가 아닌 다른 외부에게 전적으로 맡겨야한다는 것이 너무 불안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복음을 같이 듣고 예배시간에 같이 참석을 해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라고 할 경우에는 어떠한가? 복음이 자기 마음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거기서 빠져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 마음속에 들어와야 하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가 알아서 해왔는데, 그런데 목사의 설교는 무엇인고 하니, "당신이 아닌 외부인이 책임을 집니다" 라고 하니, 그 외부인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 빠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빠지고 나면 "아하, 성경이 그런 내용이 있었구나. 내가 미처 몰랐구나" 라고 하면서 성경지식만 습득해서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 소설을 집필한다는 작가들을 보면 전혀 신자가 아닌데, 물론 신학자도 그렇지만 말이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저는 "그래서 어떻게 하라구?" 라고 묻고 싶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 속한 교수들을 보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아닌데,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성경을 공부한 것이지 말이다. 

 

 

◈ 목사님, '복음과 역사'가 뭐예요?

그런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려고 하면 저도 부담이 되는데 말이다. 이번 8월 15일에 박용기 목사 측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거룩한 광복절에 말이다. 9시부터 3시까지 하는데, 3번째로 제가 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제가 '복음과 역사' 라는 논문을 보내주었는데, 미리 교재를 만든다고 해서 말이다. 또한 사진도 필요하다고 해서 제 아내가 찍어서 보내주었는데, 물론 인상을 쓰고 있는 사진을 말이다(ㅋㅋ).

아마 모르기는 해도 과거에 개혁주의협회에서 한 세미나와도 동일하지 싶은데, 해봐야 무슨 말인지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주께서 시키는 일이라고 하면, 저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데 말이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을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이 주께서 조성하신 상황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물론 기대를 하지 않는데, 싹싹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실력대로 교회를 유지하고, 목사답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박용기 교단의 모토가 무엇인고 하니, '바른교회되기' 라는 것인데, 도대체 이 세상에 바른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교회 만들기에 몰두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제가 거부할 권한은 없는데, 다만 제가 아는 것은, 제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지식만 습득하고 빠져나가는데,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던진 공은, 그것은 이미 성령께서 포수가 되어서 자기 마음을 장악하고 있어야, 말씀이 우리에게 현실화가 되고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곧 투수이고 포수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들과 사탄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는데,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아담은 이미 죄가, 즉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마태복음 12장에도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강도가 집주인을 결박하고 난 다음에야 세간을 가지고 나올 수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사탄이 주인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러니 하늘나라의 세계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세계가 같이 동반해서 나타나주어야만 하는데, 그리고 둘 사이에 전쟁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없기 때문에 점선으로 표시가 되는데, 그런데 이것이 실선이 되기 위해서는, 점선으로 되어있던 사탄의 지배도 같이 실선으로 표시가 되면서, 이 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빠지고 말이다.

 

 

◈ 이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러니 이 세상은 어떠한고 하니, 지금부터 잠시 이 세상의 표현대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는데, 괜히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은 인간들이 만든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만들었는가? 부모가 있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세상인데, 처음에 인간세상은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이었는데, 그 유인원인 파충류에서 나왔고, 그 이전에는 원생동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게 47억년 전인데, 지구가 처음 생겨날 때라는 것이다. 그때 처음에는 산소가 없었는데, 산소가 생기면서 진핵생물이라고 해서 핵이 나오고 척수가 생기면서 두뇌가 발달하고, 그렇게 두뇌가 발달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육지에 올라와서 긴긴 세월을 거치면서 발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인원에서 크로마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시작을 하는데, 그렇게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없는데, 그런데 인간의 세포에는 세포핵이 있고 세포질이 있는데, 그 세포질 안에는 미토콘드리아가 있는데, 그 안에도 DNA가 있다는 것이다. 세포핵 안에 있는 DNA 말고 말이다. 그런데 이 DNA는 엄마의 정보를 그대로 인수하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조사해서 인간이 몇 백만 전에 태어났다는 것을 밝혀내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그렇고 말이다.

 

 

◈ 모든 것이 다 실선, 점선은 없어 !!

지금 이야기한 것은 이 세상에서 말한 것인데, 아무튼 이렇게 인간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면 전부가 다 실선이지 점선은 없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전쟁에 의해서 사는 것인데, 그러니 산다는 것은 "내가 산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자연은 어떠해야하는고 하니,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와있는 것이 아니니, 어려워도 그냥 들으면 된다는 것이다. "아하, 그런 것이 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는데, 하나는 향유, 즉 '즐김+누림'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위협인데, 자연은 자기 배가 부를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데, 그런데 배가 고프면 자연이 밉다는 것이다. 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놓았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망친다면 자연이 너무나 밉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은 무엇인가? 신보다 인간이 먼저 있고, 인간은 점선이 아닌 실선인데 말이다. 인간들끼리 이 대자연을 어떻게 조절해야하는데, 그런데 어떤 부족에서 비가 오지 않아서 신에게 제사를 드렸더니만 비가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옆 부족에게 당연히 유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신이시여, 비를 주소서" 라고 했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백날 제사를 드려도 비가 오지 않는 신보다는, 비를 주는 신을 수입해야하는데, 그 신이 바로 바알신이라는 것이다. 그 신의 아버지가 '엘' 인데, 이 세상의 모든 신은 오직 이 하나의 신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엘의 복수형이 '엘로힘' 이라는 것이다. 알라도 엘이고, 여호와도 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엘신이 가나안 지역을 통치할 때, 그 아들의 이름이 바알신이고, 이 바알신은 우리에게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농사를 지으면 때를 맞추어서 비를 주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하게 말이다. 그러면 죽었던 씨앗이 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러면 그 곡식에서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여러 가지 유기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곡식을 먹으면 인간이 사는데, 그 인간 속에는 누가 있는가? 자기가 들어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신은 무엇인가? 자기를 먹여 살리면 좋은 신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신이 아니라 아예 없다는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의 신이 있는 신이고, 가나한 자들의 신은 애초부터 헛다리를 짚었다는 것이다.

 

 

◈ 오직 인간만이 !!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은, 교회에 와서 확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측정이 되는데, 즉 자기에게 잘해주면 믿을 것이고, 자기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가든지, 아니면 성당이나 절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꾸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직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실제의 현실은, 즉 실선은 "내가 있기에 있음" 이라는 것인데, 우리 인간에게 다른 현실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세계에서 이야기하는 논조인데, 자기가 있다는 것만 유일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불신세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 내가 여기에 확실하게 있다 !!

아무튼 "내가 여기에 확실하게 있다" 라는 것인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아무리 언약을 주고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자기만이 확실하게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모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모호하기 짝이 없고 증거도 없는데, 다만 "그런 이론은 있지. 그런 종교교리는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필요가 없을 때는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윗도 처음에는 이렇게 나왔는데, 그런데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난 다음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를 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감격은 천하보다 귀한데, 이 지구상의 모든 보석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는데, 자기가 죄인임을 말이다. 누구 앞에서 말인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신약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가? 없는데, 그것이 또한 즐거움이란 말이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에 대한 모독이고,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앞에는 주님이 없기에, 자기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조폭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착하게 살자' 라는 것이 종종 등장하는데, 물론 맞춤법도 잘 맞지 않고 말이다. 그것을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이유가 있는데, 왜 착하게 살라고 하는가? 복을 받으려고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가 곧 실선인데, 즉 "나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경우에는, 자기에게 언약이 오니 어떻게 되었는가? 언약이 곧 실선이고, 자기는 하나의 점선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이다" 라는 것이다. 그게 시편 90편인데, 현재 우리가 이렇게 있어도 하지만 50년 이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넉넉하게 잡아서 말이다. 그러니 권사님도 130까지 산다고 버티지 말라는 것이다(ㅋㅋ).

(시 90: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

그 "아무도 없다" 라는 것을 줄이면 '없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앞당겨서 우리에게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지금 있어도 곧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무대' 라고 하는데, 즉 인생은 일종의 연극무대라는 말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는 공허함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손자들이 모여서 뭐라고 하는가? "할머니께서 심은 나무가 이렇게 자랐는데, 그런데 할머니는 하늘나라에 갔어" 라고 하는데, 즉 "할머니는 이제 여기에 없어"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이름은 '없다' 라는 것인데, 김 엄마, 박 엄마가 아니라, 김 없다, 박 없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없다' 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다고 하는 것은 주 안에서 '있음'이 성립되기 때인데, 그러니 기존의 그런 것은 발로 차버려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우리의 생명은 '있다' 라고, 그것은 곧 "하늘에 있다" 라는 것이고, "땅에서는 없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사탄은 이것을 싫어하는데, 사탄은 늘 뒤에서 조종하기를 좋아하는데, 사탄은 전면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기분을 좋게 해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것은 사탄의 작품인데, 즉 "이 세상에서 나만 있으면 된다? 라는 것은 사탄이 군불을 지펴서 우리 인간의 얼굴을 벌겋게 해서 들뜨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떠한고 하니, 사탄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인간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

그랬던 이 세상에 누가 왔다는 말인가? 예수님이라고 하지 말고, 오늘 강의제목이 아들인데, 아들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인고 하니, 아들과 더불어서 같이 달려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는데, 모두가 바알이고 엘인데, 그것을 사탄이 조작해낸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구약학자들은 구약을 연구하면서 사탄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사탄, 엘이라는 이름의 사탄을 말이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언어를 탐구해서, 그렇게 언어를 탐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렸다는 것인가?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했던 짓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여, 누구십니까?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데,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섬겼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들 중의 바리새인이 사도바울인데,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데, 새삼스럽게 말이다. 그러니 그분은 평소에 자기가 꿈꾸던 하나님이 아닌데, 만나고 싶어하던 하나님이 말이다. 너무나 낯설고 엉뚱한 하나님인데, 그러니 그동안 마귀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즉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난 다음에 나단 선지자를 만난 것처럼, 사울은 다메섹으로 내려가면서 누구를 만났는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즐겁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자연이 울부짖고 있다고 했는데, 대자연을 보면서 탄식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대자연도 같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대자연이 말이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해가 울고 달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가? 저 바위가 신음하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가?"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신비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 도를 닦아야 이런 수준이 도달하겠는가? 온 피조물이 함께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탄식 가운데 피조물들이 희망을 갖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진행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는 것은 반드시 언약이 완성될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 라는 의미는?

여러분의 실력을 알기 때문에 어려워도 일을 한번 저질러보겠는데(ㅋㅋ),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없는 데서 있고, 죽은 데서 살아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없는 데서 있게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자식을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또한 죽은 이삭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 쪽에서는 무에서 유이지만, 그게 인간 세상에서 적용될 때는 다음과 같은 의미인데, 유를 모두 무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유가 무로 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유를 무로 되게 하는 것만, 즉 "하나님께서 있게 하셨다" 라는 것만을 생각해서 기분이 아주 좋은데,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는 이 뒷다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유를 무로 돌리는 것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있게 하셨다는 것은, 있는 것도 없애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신학자의 책을 본 적이 없는데, 제가 읽어본 책 가운데서는 말이다. 부정적이고 허무적이란 비난이 두려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없는 데서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 당사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분이 있는 것도 없애버리려고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 일에 바쁘신 분을 우리가 방해를 놓으면 안 되는데, 즉 "너희들을 없애버리겠다"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반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선하신 창조작업이니 말이다.

 

 

◈ 이렇게 바쁜 중에서 무슨 구슬치기야?

이사를 하게 되면 꼭 아이들의 책상서랍에서 구슬이 나오는데, 딱지도 나오고 말이다. 그리고 500원짜리는 거의 없고 10원짜리나 50원짜리 동전이 많이 나오는데, 작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구슬이 나오면 아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또 노는데 말이다. 그러면 엄마는 뭐라고 하는가? "이렇게 바쁜 중에서 무슨 구슬치기야?" 라고 하면서 야단을 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구슬, 혹은 잃어버린 딱지가 뒤에서 나오니 너무나도 반갑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사를 가는 줄도 잊어버리고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면서 논다는 말이다. 즉 모든 것이 유에서 무로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구슬치기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구슬이 더럽게 먼지 속에 쌓여있던지, 그런 것에 관계없이 그게 자기가 친숙했던 것이기에 너무나 좋다는 말이다. 그동안 자기가 찾던 것이 나왔으니 반갑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를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구슬치기나 하면서 그대로 눌러 살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 있는 마귀적 속성이란 말이다.

 

 

◈ 인간을 통해서 마귀의 속성이 !!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뱀을 허락하시고 선악과를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인간을 마귀 손에 이미 넘겨버리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넘김으로서 인간을 통해서 마귀의 속성이 나오도록 주께서는 의도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을 통해서 인간의 속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마귀의 속성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는 뭐라고 했는가? 보일러 배선을 깔았다고 했는데, 온 방바닥에다가 구불구불하게 말이다. 그래서 전기를 꼽아서 스위치를 눌리면 뜨듯하다는 것이다. 즉 겉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말이다.

(마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예수님은 속성반 강사 !!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줄을 아셨는데, 그런데 왜 산상설교에서 '하라' 라고 하시면서, 그런 설교를 하셨느냐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다 더러운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율법적 기능 때문에 그러한데, 즉 율법을 주시고 아들을 주신 그 스토리를, 즉 구약 때의 과정을 신약에서는 한꺼번에 다 집어넣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의 말씀으로 율법적인 기능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구약은 긴긴 역사 속에서 하셨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속성반으로 당일치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수능을 앞두고 한 달 속성반으로 학원을 끊어서, 그렇게 해서 다시 한번 압축해서 재현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를 유로 바꾸시는 주님의 작업인데, 왜 집수리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면 뭔가 있던 것을 뜯어내어야만 일이 된다는 것이다. 물이 새는 것을 고칠 때도 그렇고 말이다. 주께서는 그렇게 기존의 있는 것을 뜯어내시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러한 주님의 일을 건방지게 말리느냐는 것이다.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 우리 아들이 제주도에 갔는데, 사고가 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일을 말리게 되면, 주께서 매우 섭섭해하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면서 범사에 감사해야한다는 것이다.

 

 

◈ 아, 옛날이여 ♪

나이가 들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누구나 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자기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짜증을 내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다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라도 새벽 3시에 깬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유를 없애는 작업을 하시는데, 자기 자신이 뭐라고 거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버티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옛날이 참 좋았는데, 그때는 70만 살아도 엄청난 장수였다는 것이다. 70이후에 살아남은 사람이 그때 우리동네에는 거의 없었는데, 할 일이 없으면 빨리 사라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살아남아서 식량을 축내면서 돌아다니느냐는 말이다. 물론 저도 주께서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렇게 돌아다니겠지만 말이다(ㅋㅋ). 

 

 

◈ 인간의 창조의 하나님의 창조 !!

그런데 인간은 무엇인가? 이왕 있는 것, 즉 '이왕 있는 유'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 유를 무로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키워나가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여기에 에너지를 마구 소비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는데, 기존의 있는 것을 수리해서 사용하고, 그리고 더욱 다 오래 살도록 만들게 하고 키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를 인간세계에서는 창조성이라고 하는데, 즉 "창조의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유를 계속해서 유로 지탱하고 사수하고 유지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창조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무엇인가? 있는 것도 없애버리는 것, 그것을 주님께서는 창조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고방식이 정반대라는 것이다.

아까 이야기한 실선과 점선을 다시 해보면, 인간은 인간만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마귀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오직 인간만 눈에 보인다는 말이다. 마귀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데, 이 땅의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보려고 하다가 보니 말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종교이고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도 그렇고, 참신한 아이디어 하나를 끄집어낸 것이 중보자이고 말이다. 그러니 중보자이고 하나님이고 다 떨어지고 나면, 배부른 인간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 '노출된 가닥' !!

그렇게 인간만이 남는 것을 실선이라고 했을 때, 마귀는 여전히 우리에게 감추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에 보면, 저기 뒤에 있는데, 죄송하지만 누가 좀 가져다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겉면에 보면 이렇게 "노출된 가닥으로부터 해서 거꾸로 역사를 추적해보자"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편집하시는 분이 머리말에 있는 글을 이렇게 겉면에다가 적어놓았는데, 이렇게 되면 창세기는 심판의 책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했다' 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창조한 것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 !!

그래서 창조한 것과 창조한 것을 없애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 창조할 때는 창조한 것이 나타났는데, 그런데 그것을 없애면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데, 그러니 창조한 것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 결코 아닌데, 그것을 창세기부터 이미 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요한계시록까지 멈추지를 않는데, 그러니 창세기로 성경이 끝났다고 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창세기는 그 시작점이고, 그리고 그 창조는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로 마감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 !!

그런데 그것이 여기에 보면 '노출된 가닥'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것이 점선이라고 하면, 여기에 삐죽삐죽 삐쳐 나온 노출된 가닥, 이것이 하나의 가닥인데 말이다. 결국 이 가닥은 숨어있는 것인데, 즉 감추어진 것인데 말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마지막인 16장에서 '복음의 감추어진 비밀' 이라고 했는데,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이다.

(롬 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롬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롬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렇다면 아들과 사탄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고 하니, 아들과 사탄 이야기가 모두 다 숨겨진 비밀인데, 그러니까 이러한 비밀을 알려고 하면 외부에서 파헤쳐서 나갈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사탄은 사탄도 아니고 아들도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뭔가 파헤쳐서 쏟아져 나온 결과로서 아들과 사탄이 짝이 되어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신학자가 아닌, 신앙인이 되어야 !!

물론 우리가 파헤치는 것은 지식이고, 반면에 실제로 비밀에 도달하는 파헤침은 지식이 아닌 언약이 된다는 것이다. 너무 어려운가요? 우리가 우리의 지식으로 사탄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무엇인지, 그것을 백날 이야기해도, 그것은 신학자가 될 뿐이지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하는가? 박사학위로 교수짓을 하면서, 그래서 성경이 무엇인지, 가닥이 무엇인지 연구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총회장에게 찍혀서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이시여, 제가 독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그런데 이제 실업자가 되어서 가족도 간수하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아이 둘이 굶고 있습니다" 라고 나설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여기 비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성경내용을 통달해서, 그것으로 교수짓을 해서 밥 먹고 살겠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때는 비밀을 몰랐었는데, 막상 진짜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되니 "니가 뭐 굶고 있다고? 나는 머리 둘 곳도 없었다" 라고 하면서, 마태복음 8장 이야기가 진짜 실선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그 이전까지 그것은 점선이었는데, 그런 지식을 알고 있는 자기가 실선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경말씀이 실선이 되면서, 그 성경말씀을 위해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그 교수는 말이다. 물론 저는 그런 아직 교수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아무리 고생해서 받은 박사학위라고 해도 찢어버리면 되는데, 그것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섬긴다는 것이다. "내가 박사다" 라고 하면서 인간들은 있지만,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인간은 없는데,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외국까지 나가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아서 다 망하고 마는데, 물론 받지 않아도 망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비밀은 가닥인데, 즉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전선을 보면, 전기가 흐르도록 되어있는 안에 있는 구리를 피복으로 감싸고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야 밖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닥은 비밀이 되어서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 아들이 포함된 비밀 !!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비밀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아들이 포함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에 있고, 아들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삼위일체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아들이 아니고,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아들을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아들일 수가 없고, 그런 능력은 나에게는 전무하다" 라고 하면서, "아들은 따로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와서 아들이 되는 것은 양자(養子)인데, 즉 아들은 따로 있는데, 오직 그분만이 아들이라는 말이다. 예수님만이 아들이고, 그분이 맏아들이고, 우리는 양자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양자까지 합쳐서 아들들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 지식의 아들에서 비밀로 갈 때는, 그러면 지금까지 자기가 주장한 아들은 누가 시킨 것이라는 말인가? 아들은 무엇과 병행해서 나타난다고 했는가? 반드시 사탄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탄이 이렇게 같이 등장하는데, 그러니 예수님과 같이 등장하지 않는 사탄도 역시 지식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자기를 병들게 하면 사탄이고, 병들게 하면 성령이고, 그런 식으로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탄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탄은 누가 병이 들고 건강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찌되었던 아무튼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일체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양심의 소리가 바로 사탄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 다시, '사탄은 그때그때 달라요' !!

다시 강의 초반으로 돌아가서, 사탄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즉 "사탄은 그때그때 다르다" 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말이다. 그런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탄이 전달하는 내용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니 인생은 니가 책임지고 챙겨야지, 그런데 왜 옛날 33세에 죽은 나사렛의 청년에게 니 인생을 맡기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모습인데, 그 표현이 곧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배했던 현상이라는 말이다.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 !!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날 때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사렛의 비리비리 청년이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바로 그 비리비리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이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인데, 아니 "중국 만주의 33살 먹은 청년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있는데, 어떻게 말인가? 우리의 능력인가? 우리의 지식인가? 그게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이 죽은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따질 이유도 없이 그냥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냥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즐거움은, 어떻게 돈으로 살 수도 없다는 말이다.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도, 신학교 교수가 되어도,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노숙자이든, 신학박사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평생을 걸쳐서 양육을 받고 관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 나는 사탄도 함께 있다 !!

잠언서에서 아들 이야기를 할 때 사탄도 더불어서 나오는데, 그래서 제가 이렇게 연결을 지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눈에는 예수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탄도 보이는데, 그러면 사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모아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가는 곳에는 사탄이 있는데, 그러면 방정식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주님과 함께 있다" 라는 것이, 제일 먼저 주님이 가는 곳에만 사탄이 나오는데, 아들과 사탄은 같이 동반해서 나오기에 말이다. 그러면 아들이 없으면 인간만 남는데, 인간만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사탄도 같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 좀비들과 함께 !!

그러니 나사렛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알게 된다면, 주와 함께 있는 것인데, 그것이 두 번째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곳에는 사탄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오지 말라고 허더라도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설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자를 찾는데,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지금 역병이 천지에 깔려있다고 말이다. 전부가 좀비들 천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눈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만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고, 가야될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성도의 경우에는 말이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과 더불어서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죄의 왕노릇을 하고 있음을, 그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 역시 2초 !!

베르고송이 말하기를, 그가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니, 어떤 의식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시간이 0.5초에서 3초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의 이론에 따라서 조사를 하면 '야, 이것이다" 라고 하는 시간이 5초 정도가 유지된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육체의 심리정도가 그러한데, 그 시간을 넘게 되면 다른 것에 의해서, 감각으로 다른 변화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 긴장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변화에 묻혀서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도 밖으로 나가게 되면, 예수님 생각은 다 날아가 버리고, "요즘 날씨가 왜 이렇게 덥지?" 라고,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시 자기가 실선이고 예수님은 점선이 되어서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즉 설거지를 하다가도 "내가 정말로 죄인이 맞구나" 라고 하면서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은 여전히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심한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만 신이다" 라고 하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뉴스시간에도 들리고, 신문도 도배하고, 이웃에게서도 그런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이 그렇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갔던 그 길을, 사도바울이 갔던 그 길을,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그 길을, 감히 우리가 동반해서 가게 된 것이 웬 기적이고 사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길이 얼마나 중요한 길인지, 그야말로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면서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