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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7 - 반대로 / 140505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7 - 반대로 / 140505

정인순 2014. 5. 5. 17:09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7 - 반대로

                                                           

14,05,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2강, 낯선 접근] -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에 예수님께서, 공금을 횡령하는 그 인간을 차라리 지혜롭다고 할 정도이면, 그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딴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즉 잠언대로 성경대로 산다고 하지만, 장부를 조작한 그 인간과 더불어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라고 했습니다. 이 악하고 어두운 세대는, 전부가 다 어둡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제가 조금 낫지요?" 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잠언을 보면서, 잠언대로 살면 복을 주겠다는 제의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시선 앞에서 왜 모든 인간은 죄인밖에 없는 걸까요? 왜 의인은 없는 걸까요?

 

◈ 낯선 천국 !!

제목이 '2강, 낯선 접근'으로 되어있고, 그림 밑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리고 더 내려가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즉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분명히 갈 사람이 있는데, 텅텅 비워놓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채워지는데, 그런데 문제는 세리와 창기가 종교인들보다도 먼저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인들이 나름대로 "천국은 이러한 곳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즉 "죄가 없는 곳이고, 살기 좋은 곳이고, 악한 자가 없는 곳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천국은 모든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다 모아서, 그것을 천국이라고 여기고, 그런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으로 자신을 갖추어나가는 작업을 종교인들이 했는데, 그런데 막상 진짜 천국에서 살던 분이 오니까, 그분은 반대로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그들이 천국에 가려고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지만, 그렇게 준비한 사람은 가지를 못하고, 전혀 준비가 되지 아니한 세리와 창기가 먼저 간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들은, 자기들이 준비한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진짜 하나님이 사시는 천국에는 준비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리어 그들이 생각한 천국에서 배제가 되는 자들, 즉 "너희들은 천국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해. 너희들은 안 돼" 라고 단정을 지었던 자들이 곧 세리와 창기들인데, 그들이 천국에 간다고 하면, 이 천국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더럽고 못된 인간들, 죄만 지은 인간들만 오골오골 모인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거부를 하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당신은 이 시대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당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전혀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는 말이다.

 

◈ 사람들이 버린 돌이 오히려 머릿돌이 !!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라고 하는데 말이다. 무슨 뜻인가? 건축자가, 즉 사람들이 버린 돌이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버린 돌을, 하나님은 그것을 주워서 성전에 반드시 필요한 모퉁이 돌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현상인데, 사람들이 버린 예수를 오히려 구세주라고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사람들이 쓸모가 없다고 하는 예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려 가지 종류의 예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복을 받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예수, 바로 그 예수를 찾게 되면, 새로운 성전에 합류가 되고 어느 곳에서라도 벽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막상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마치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초반에 이야기고 싶은 것은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제목도 '반대로'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다. (녹취 '구'- 그것을 전문용어로 '로꾸거' 라고 합니다. ㅋㅋ)

 

◈ 반대로 - '세상 자체가 악하고 음란해' !!

이렇게 '반대로' 라는 것은, 개인의 사고방식이 반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묘사할 때는, 이런 악하고 음란한 것이다 퍼져있으니,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반대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곧 진리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취지라는 것이다. 즉 악한 자들이 악하다고 여길 때, 그것이 오히려 선하다는 말이다.

인간세계가 정상적이고 제대로 돌아간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악하다고 하는 게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악한 것이 되는데, 하지만 세상 자체가, 개개인이 아니고 말이다. 이 세상 자체가 악하고 더러운 것에 스펀지처럼 젖어있는 세대이기 때문에, 여기서 반대하는 것이 진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해석하는 방식이 아주 간단해지는데, 반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는 것과 반대로 나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반대로 나가게 되면, 그 반대편에서 예수님은 오신다는 것이다.

 

◈ 흠모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예수님 !!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메시야는 아주 거룩하고 고상하게 올 것이다" 라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가르쳤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오신 메시야는 사람들이 기대하고 흠모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누구를 만나면 나름대로 건질 것이 조금이라도 있어야하는데, 예수님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 라고 반대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말한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라는 것은 신약시대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구약시대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악함과 선함으로, 진리와 비진리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안다, 모른다" 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 때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약시대는 "이 세상은 악해!" 라고 되지만, 구약시대에는 "너희들은 아무 것도 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점이 있는데, 즉 어른들이 아는 것은 악한 짓이지만 어린아이들이 하는 것은 모르고 하는 짓이란 말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기서 다니엘서 2장을 살펴보자.

(단 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단 2:2)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단 2: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단 2:4)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방언으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단 2:5)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단 2:6)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단 2:7)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단 2:8)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단 2:9)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단 2:10)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2:11)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단 2:12)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 내 꿈을 돌려다오 !!

이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어떤 꿈을 꾸었는데, 그런데 그만 그 꿈 때문에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억도 나지를 않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월급을 주고 있는 신하들 중에서, 소위 신의 뜻을 안다고 하는 박사들을 불러다가, 요즘 말로 하자면 점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5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협박을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 꿈의 내용은 그만 가르쳐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알아내라는 것인데, 만약에 알아내지를 못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자 박사들도 자기 목숨이 아까우니 강력하게 반발하는데, 그래서 7절에 보면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왕과 신하들이 대치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데, 왕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그 능력을 너희들이 보여달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하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하지 못하고,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만 합니다" 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신하들은 "일단 꿈을 알려 주시면 우리가 해석해드릴 테니, 당신의 꿈을 알려만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런데 왕은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꿈을 기억을 못하는 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인데, 그러니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데, 그런데 그 꿈을 알려달라고 신하들을 닦달한다는 말이다.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무슨 이런 횡포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말이다.

 

◈ 바벨론에, 다니엘과 그의 삼총사가 있는 이유는?

다니엘서 2장의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까, 왕이 정상적인 경우라고 하면, "그래, 짐이 좀 과했구나. 꿈이 기억나면 알려줄 테니, 그때 해석을 해다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바벨론 나라는 그냥 평범한 인간적인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 안에 그 어떤 신적인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나라에 다니엘과 그의 삼총사가 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다니엘서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 세계 속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 대구 바닥에 우리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는 "여보, 어제 내가 이런 꿈을 꾸었는데 해석을 좀 해줄래" 라고 하면, 남편은 "그래, 무슨 꿈을 꾸었는데?" 라고 하고 말이다. 그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여보,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어. 그러니 당신이 좀 이야기해봐" 라고 하면, 당장에 남편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게 미쳤나? 나이가 들더니만 완전히 맛이 갔네. 요양병원에 가고 싶어?"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그렇지 않은가요?

 

◈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어 !!

그러니 우리는 항상 사람만 살고 있는 세상인데, 바로 그런 세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오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이 세상을 악한 세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똑똑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서 상식에 위반되는 것은 거부하고, 합리적이고 정당하고 다수의 의견을 종합해서, 가장 진리에 부합되도록 살아온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인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자마자 뭐라고 하시는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야,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남이 꿈을 해석할 수준이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인데, 즉 말이 안 되는 경지라는 말이다. 수준이 높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는, 즉 다른 세계에 속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와야 믿는다" 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편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어도 좋아요" 라는 것을 경유해야만,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우리가 의미 있게 토해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속에는 인류의 미래가 !!

지금 제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어떤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을 몰라서 신하들에게 마구 닦달을 낸다는 것이다. 해석을 좀 해보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보는 성경말씀에 그런 이야기가 분명히 담겨있고, 또한 그것이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내용인가? 인류의 모든 미래문명과 연결이 되어있는데, 즉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속에는 모든 인류의 종착점이, 앞으로 되어질 인류의 그 모든 것이 그 안에 소복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특정인의 꿈속에 인류의 미래가 이미 다 완료된 상태로서,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은, 마치 사람들이 아파트를 구입할 때의 계약서와 같다고 보면 되는데, 그 계약서에 보면 아파트가 누구의 소유인지가, 그것이 그 안에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부갓네살 왕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이미 그와 계약을 한 셈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계약에 의하면 무엇인가? "이 세상은 망한다" 라는 것인데, 무슨 그런 계약이 다 있는지 몰라도 말이다. "이 아파트는 앞으로 너의 것이다. 그러니 잘 살아라" 라고 하면 우리가 얼른 사인을 하겠는데, 그런데 그 계약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앞으로 이 아파트는 모두 다 무너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자의 나라로 교체되기 위해서, 세상은 망해야 !!

그러면 왜 세상은 망하는가? 그것은 인자의 나라로 교체가 되기 위함인데, 처음에는 나라가 금처럼 화려한데, 조금 있으면 금보다 못한 은과 같고, 그 다음에는 더 못한 놋과 같고, 그 다음에는 또 더 못한 철과 같고, 그리고 제일 나중에는 철과 진흙이 섞여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나라라고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철과 진흙이 섞여있으니 말이다. 이것들은 서로가 섞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온전하게 섞여지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아울러서 네 번째 짐승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 이후에 나라가 200개가 넘는데, 그러니 섞여지지 않았는데, 즉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은 큰소리를 치고, 중국은 여기에 반발하고, 북한은 또 자기 마음대로 까분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계약서에 의하면 이 모든 나라들이 네 번째 나라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 이후에 마지막 때까지, 즉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모든 나라가 네 번째에 속한다는 것이 다니엘서 2장에 벌써 나온다는 말이다.

다음은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한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보자.

(단 2: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단 2:37)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단 2:38)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단 2:39)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단 2:40)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단 2: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단 2: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단 2:43)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 흩어진 세상에 자기 백성이 하나인 채로 움직이기에 !!

여기 43절에 보면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합하지 않는데, 그것을 합쳐서 하나의 짐승이라고 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진짜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세상이, 철과 흙으로 구성된 모든 흩어진 세상에 자기 백성이 하나인 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가 캐나다나 미국에 이민을 간다고 해서 다른 교인 되는 것이 아닌데, 교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교회이고, 한 교인이라는 말이다. 우리교회에 다니다가 미국의 교회에 다녀도 다른 교회의 교인이 아닌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지금 이렇게 우리교회에 다녀도 우리교회의 교인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그래서 우리교회의 교인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밖에 없는 교회의 교인이라고 하면 되는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니 교회, 내 교회' 라고 하게 되면, 다른 곳에 가면 남의 교회 교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때부터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교인이 아니었음이 들통날 뿐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니 교회, 내 교회'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만이 있을 뿐이지 말이다(ㅋㅋ).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교회, 무슨 교회'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만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말이다. 인간만 있으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데, 지금 제가 다니엘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악과 선이 아니라 무지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알기 이전에 먼저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면 나는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라고 하지 말고, 그런데 마지막에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몰랐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몰라야 하는데,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니 말이다.

 

◈ 왕이여, 왜 그리 성질이 급합니까?

계속해서 다니엘서 이야기를 해보면, 그렇게 느부갓네살 왕이 닦달을 내면서 신하들을 다 죽인다고 하니, 다니엘과 그 세 친구도 죽을 판이라는 것이다. 몸이 쪼개지고 집이 박살이 날 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뭐라고 하는가? "왕이여, 왜 그리 성질이 급합니까?" 라고 하면서 일단 왕을 진정시켜놓는다는 말이다.

사실은 지금 왕이 화를 낼 입장이 전혀 아닌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서 다니엘이 하는 말이, "일단 기한을 좀 주시면 제가 알아내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이런 똥 배짱이 다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이게 과연 기한을 준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냐는 말이다.

 

◈ 하나님의 '억지스러움' !!

그러므로 다니엘서 2장에서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남의 꿈을 알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다는 말이다. 물론 왕도 이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느부갓네살 왕은 지금 하나님이 앞장세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느부갓네살 왕을 앞장세워서 꿈을 꾸도록 하시는데, 그런데 그 꿈을 본인도 모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르게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그 결과가 "모든 인간은 죽어서 마땅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억지스러움' 이라는 말이다.

마치 다음과 같은데, 하나님께서 "니가 죽을지 살지 한번 시험을 해볼까?" 라고 하니까, 우리는 "예, 시험을 한번 해보세요. 저는 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제 아무개가 꿈을 꾸었는데, 니가 그 꿈을 아는가?" 라고 하는데, 물론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니가 모르지? 그러니 너는 죽어야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어야한다는 이유를 어디서 찾는가? 자기 스스로 "내가 죽을 인간인가? 살 인간인가?" 라고, 자기가 생각한 범위 내에서만, 즉 "그래, 나는 살 수 있어" 라고 하든지, 혹은 "아니지, 죽을 거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에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서 우리를 죽이겠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그 이유를 몰라 !!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그 죽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이 왜 물에 빠져서 죽는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그것이 다른 이유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것이 곧 성경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희한한데,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당신은 이유도 모르면서 16년 동안 군만두만 먹다가 죽게 됩니다" 라고, 그렇게 되는데, 무슨 그런 날벼락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

제가 아침에 어쩌다가 TV를 후딱 보았는데, 어떤 여자 꼬마아이가 나와서 벨리댄스를 추는데, 그만 거기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다 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나오는 자막이 인상 매우 깊었는데,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 "반평생을 바쳤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3살부터 추었는데, 지금이 6살이니 맞다는 것이다(ㅋㅋ).

저에게는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왔는데, 왜냐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나이계산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한 살, 두 살, 그렇게 나이계산을 하면 안 되고, 죽는 날부터 거꾸로 해서 나이계산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예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온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인간에게 정말 나이가 있는가?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뭔고 하니, 인간들의 나이 계산은 자기를 우대하고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인데, 즉 "내 나이가 지금이 50인데, 1, 2, 3, 즉 태어날 때는 어떠했고, 자랄 때는 어떠했고, 학교를 다닐 때는 어떠했다" 라고, 그렇게 최종영광과 이름의 빛남이 자기 자신에게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자기 자신에게 나이계산을 하게 되면 나중에 어떤 모순이 생기는고 하니, "89, 90, 91" 라고 하다가 그만 꼴까닥, 즉 제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애초부터 사라지게 되는데, 그렇게 사라지는 인간에게는 시간도 같이 사라지게 때문에, 즉 나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91 다음에 왜 제로가 되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나이가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존재해야 되는데, 그런 존재자가 없는데 무슨 나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집사님이 떡을 가지고 오셨는데, 여기 봉지에 6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를 먹고 나면 5개밖에 없는데, 또 하나를 먹고 나면 4개밖에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다 먹고 나면 떡은 현재 몇 개가 있는가? 물론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 창세 전부터 주와 함께 있었다 !!

그렇게 인간은 제로인데,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이 그 사람을 키워준 공로는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나이계산을 할 때,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지 말고, "주님이 먼저 계시고, 먼저 계신 그분에 의해서 후차적으로 내가 여기에 존재했었다" 라고, 그렇게 아울러서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러면 나이계산을 "90년 동안 은혜로 있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게 되면, "영원 전부터, 창세 전부터 주와 함께 있었다" 라고 하면 되고 말이다.

그래서 생일을 계산할 때는, "이제는 내가 천국에 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라고 해야하는데, 그러니 케익을 자면서 "생일 축하합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나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축하합니다 ♬"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효자가 아니겠느냐는 말이다(ㅋㅋ).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고 두근거리는데 말이다. 여기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자기가 아무리 유명한 박사이고 백만장자라고 해도, "내가 없어도 그분만 계시면, 그분이 또 만들어낸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분만 있으면 잇몸이 녹아서 이가 다 흘러내려도 괜찮은데, 그분이 또 만들어내니 말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지금은 흙으로 만들었지만, 장차 죽게 되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부활의 효과인데, 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의 장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받은 효과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은 흙에 속해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 나이가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실감이 나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런데 부활의 효과로 그렇게 아파야 하는 이유가 완전히 다 제거가 되고 말았으니, 그래서 이제는 즐기고 또한 누려야될 이유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공로인데, 즉 주님의 준비된 사랑이고 준비된 은총이라는 말이다.

 

◈ 성경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 !!

여기에 대해서 "듣기는 좋지만, 그게 구라가 아닌가?" 라고 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증거하면 되는데,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 부활의 효과가 오늘날 성령이 오게 하셨고,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경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임을, 자기의 미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늘의 형상을 입는다고 하는 것이 자기의 이야기라고 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도 역시 자기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죽는 것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신 것이지, 재수가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에 빠져서 죽던, 차에 부딪쳐서 죽던, 동일한 원칙에 의해서 주어진 주님의 일괄적 조치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슬퍼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믿어지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으니 그렇다는 말이다. 주님의 하신 일은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죽는 자가 선배가 되는데, 살아남는 자가 후배가 되고 말이다. 태어날 때는 나이순서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죽어서 지옥에 가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도록 선택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골라잡을 입장이 전혀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라는 말씀조차도, 우리를 보고서 어떤 조치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것을 후차적으로 통보해주신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 삭개오야, 오늘은 너희 집에 심방이다 !!

"삭개오야, 내가 너희 집에 거하리라" 라고 하는 순간 삭개오는 구원을 받았는데, 삭개오는 그야말로 한 것이 전혀 없는데, 자기는 예수님이 온다고 하니 보고 싶어서 나무위로 올라간 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삭개오 이야기가 중요한데, 삭개오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작아서 나무위로 올라간 것밖에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목을 당했다는 것이다. 삭개오 자신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쳐들어오듯이 심방을 오셨다는 말이다. "오늘은 너희 집에 심방이다!" 라고 말이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 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 19: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이 이야기를 하니, 과거에 제가 그런 식으로 심방을 하다 혼이 난 기억이 나는데 일방적으로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저는 교인들이 다 삭개오와 같은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ㅋㅋ). 물론 저의 잘못이 큰데, 미리 전화를 하고 갔어야하는데 말이다. 

 

◈ 과연 다니엘은 무대뽀인가?

다니엘서를 다시 해보면, 지금 다니엘이 "왕이여, 성질을 좀 죽이시고,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알아내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이러한 다니엘의 이야기와 그리고 그와 동일한 운명에 놓여있는 박사들, 즉 다니엘의 세 친구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원정을 온 박사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들이 보기에도 지금 정말 다니엘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고 볼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책도 없으면서 말만 앞장세운다는 말이다.

16절에 보면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하지만 기한을 얼마나 주면 풀리는가? 이게 기한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그런데 다니엘에게 무슨 이런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도 배포인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왕이시여, 당신은 미쳤습니다" 라고 해야 정상인데 말이다.

(단 2:14)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단 2:15)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고하매
(단 2: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다니엘의 이러한 자신감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죽은 자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그 어떤 은혜와 복도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은혜를 받고 살아야 돼" 라고 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알아서 어떻게 해봐야지" 라고 하면, 그런 자에게 복음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 "주여, 저는 이미 천국이고 지옥이고 간에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자격도 전혀 없습니다. 주께서 지옥에 보내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입장에서는 그 어떤 대책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쓰신다면 비로소 그 의미가 살아난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기도는, 먼저 자기 이름을 포기해야 !!

바로 그러한 기도의 뜻이 모아진 것이, 자기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의 이름이 쓰시기에 편리한대로 써달라고 하는 것, 그것이 곧 기도의 최종응답이라는 것이다. 모든 기도의 응답은 거기로 모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암에 걸렸으니 제발 낫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암에 걸린 걸레와 같은 이 몸이라고 해도 주께서 필요하다고 하면 쓰세요" 라고 해야, 그것이 참된 기도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다니엘의 기도인데, 그러니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맛이 갔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비록 나이가 많아도 주께서는 얼마든지 유용하게 쓰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적을 지정하지 말고, 해봐야 주님이 들어주지도 않으니 말이다. 목적을 지정하게 되면, 항상 자기 자존심과 결부가 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니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기도했다는 것 자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그런 차원에서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헌금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돈이란 것이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고 헌금을 해도 해야한다는 말이다. 아닌가요? 

 

◈ 은밀하고 위대하게 !!

그렇다면 다니엘의 대책은 무엇인가? 일단 왕에게 기한을 달라고 해놓고,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의 세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니엘이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 여기 18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다니엘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기를, "왕에게 꿈을 꾸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 꿈을 잊어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왕이 화를 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래서 왕이 우리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제가 왕에게 기한을 달라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에 포함되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그렇게 기도하는데, 은밀하게 감춘 것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왕은 하나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고 말이다.

그러자 19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것을 다니엘에게 이상 중에 보여주시는데,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이다.

(단 2: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단 2: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단 2: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그러면 그게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임을 어떻게?

그 은밀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가르쳐주실 때, 이런 것을 설명하고 있는 저 자신이 어려운데, 무척 힘이 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르쳐주셔도, 그것이 마귀가 가르쳐준 것인지 하나님이 가르쳐준 것인지, 다니엘 자신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다니엘이 하나님이 가르쳐주었다고 하면서 자신 만만하게 왕에게 가서 "왕이여, 드디어 풀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꿈 이야기를 하겠는데, 왕은 이런 꿈을 꾸었지요? 맞지요? 맞지요?" 라고 하는데, 그런데 왕이 그만 "그건 아닌데, 아니야"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얼마나 우사스러우냐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왕과 신하들 앞에서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는데, 그런데 점쟁이들의 특징은 돈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만 벌리면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구라라는 말이다. 물론 구라를 백 개를 쳐서 그 중에서 하나가 맞으면 용한 점쟁이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다니엘은 이미 본인 자신이 "내가 이번에 꿈을 잘 해석해서 이익을 챙겨야지" 라고 하는 것이, 이미 그의 기도 가운데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꿈 해석이 맞던 틀리던 간에 자기 형편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꿈을 잘 해석해서 "어유, 드디어 살았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살기 위한 용도로서 했다고 하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여, 제가 암에 걸렸습니다. 낫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면, 아니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제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 주께서 마음대로 하소서" 라고 한다면, 나중에 암이 나아서 죽음과 결별해도 여전히 그 사람은 죽음이 자기 품속에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 그래, 나는 죽어야만 되는데 !!

그런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결코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인데, 주께서 또 쓰시는구나. 그래, 당연히 주께 드려야지" 라고 나오지, "나 봐라. 내 믿음이 정말 댁길이지" 라고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마음을 낮추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가 구약인데, 신약에서는 다니엘의 꿈 해석과 같은 사건은 성령을 통해서 매일같이 반복하신다는 말이다. "나는 살아야 돼" 라고 하면서 아침에 눈을 떠서 기도하는데, 그런데 "그래, 죽어야만 되는데 오늘 또 주께서 무슨 일을 시키지?" 라고, 그렇게 되도록 늘 반복시키는데,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 인류의 비밀이 부갓네살 왕 개인에게 응축되어서 !!

아무튼 그리고 나서 다니엘이 왕이 꾼 꿈을 해석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까 과연 느부갓네살 왕이 잠도 자지 못하고 환장할만한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대한 모든 비밀이 담겨있는 정보가, 그것이 느부갓네살 왕 개인에게 그만 응축되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또 설명하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응축되어서 주어졌다고 했는데,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알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정보를 우리에게 응축해서 언질을 주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 스페인에 여행을 가도 !!

예를 들어서, 복음을 알고 난 뒤에 유럽을 여행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복음을 알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자기가 보고 즐기기 위해서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래서 취소도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같이 곗돈을 넣어서 계획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에 말이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스페인 어떻게 사는지, 그것을 재미있게 보려고 했다면,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들이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천주교가 되어서 형식적이었구나. 그렇게 믿으면 안 돼지" 라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아는가?" 라고, 거기에 관심을 두면서 스페인 여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일이, 자기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히 다같이 적용이 되니, 그래서 그것을 '전도(傳道)'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도를 전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 우리의 입을 벌리게 하셔서, 우리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데, 물론 스페인에 가서 말이다.

어떻게 우리 권사님은 곗돈을 모아서 스페인에 전도를 하러갈 여행계획이 없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성령을 받아야 전도가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니면 그냥 놀러갔다가 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일주일을 갔다와서는, 너무 돌아다녀서 두 달을 방에 누워있어야 되고 말이다(ㅋㅋ).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을 받으면 이제는 더 이상 개인용도로 자기 자신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인데, 오직 주님의 용도로서 쓰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든지, 아니면 안양에 있는 자식 집에 가든지 말이다. 성령을 받아서 가게 되면, 그야말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낯선 접근'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지금 은밀한 것을, 즉 도저히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성도는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은밀한 것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탈출해야한다" 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착해지고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건이 구비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를 받음으로서, 흙에 속한 우리의 몸이 장차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은 말이다. 그렇게 이미 확정을 지은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제가 또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했는데,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말이다. 물론 우리도 그랬었던 자들인데, 그런데 성령이 오시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모두 열리면서 어떻게 되는가? "아하,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구나. 이 세상 자체가 악하고 음란하구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렇게 인간들이 문제가 있으니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어떠한가? 예수님의 영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 인간과 이 세상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또한 그것을 우리는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혜택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낯선 접근' 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 이제 본격적으로 잠언서에 들어가서 !!

이제 교재 34페이지로 넘어가서, 거기에 보면 잠언서 1장 20절에서 22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잠 1: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잠 1:21)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잠 1: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우리는 여기서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저쪽에서 "나는 지혜다" 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잠언서에 들어가겠는데, 다음과 같은 것을 한번 설명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여기 성경말씀에 나와 있다는 말이다. 

지혜가 말하기를 여기 22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가 나오고, 그리고 20절에 보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지혜가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길거리와 광장에서 소리를 높여 부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와 같은 곳에서 말이다. 이렇게 지혜가 길거리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지혜가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이 어리석은 자들아 !!

그런데 지혜는 이야기할 때 "이 점잖은 자들아!"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리석은 자들아!" 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초반에 제가 설명을 했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지혜가 우리를 보고 어리석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자기 입장에서 어리석지 않다고 반발할 것이 아니라, 어른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아닌, 주님의 자리에 가서 우리를 다시 보자는 말이다. 그래서 "아, 어리석은 것이 맞네요" 라고 하면, 그게 바로 지혜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지 말고 자리를 바꾸라는 말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자리에 가면, 비로소 우리는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자기가 소유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니, 자기가 왜 저분이 피까지 흘려야만 하는 죄인인지, 그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점잖고 착한데, 사람이 좋다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들어왔는데, 그런데 왜 자기가 죄인이냐는 말이다. 아마 한 집사님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지 싶은데, 아닌가요?(ㅋㅋ) 물론 본인의 자리에서는 자기가 죄인이 아닌데, 그러니 자기 쪽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서 자기를 보면 어떠한가? 자기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는데, 그러한 자의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인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우리가 좋아하던 세계는 곧 지옥 !!

그러니 세상 친구들은 무엇인고 하니, 전부가 제각기 제각기 자기 입장에서 보니 어떠한가? 과거의 자기 자랑, 자기가 잘나갔던 것,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렇게 돈 자랑, 자식 자랑이 줄줄 다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열하는 것은 남이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좋아하는 세계인데, 그러니 죽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로, 즉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천국은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의 관점으로 다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해주신다는 말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관점 바꾸기가 안 되는데, 돈 벌기에 바빠서 말이다. 지혜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 서로 돌아보아, 모이기를 힘써라 !!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서로 돌아보아, 모이기를 힘써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주 모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가 머물 장소가 자기 집이 아니라, 즉 자기만의 확정된 장소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러니 말씀의 자리가 곧 자기 자리가 되어야하는 것이지, 자기 자기가 따로 있는데, 말씀을 거기에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자기 위주로 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가라" 라는 소리가 아니고, "모이기를 힘써라"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자리에 누가 모이게 했는가?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나는 내가 확보한 이 자리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을 거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자리가 곧 자기가 최종적으로 있어야하는 진정한 자기 자리임을 인정한다고 하면, 복음으로 모인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 혼자서 자기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보다도, 복음으로 함께 모이는 자리, 그런 자리가 더 좋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성도로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이 없는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것은 자기 체면 때문에 다니는 것이니 당연히 끊어야하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이렇게 "모이기를 힘써라" 라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내 자리야.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은, 그것은 성령을 받은 성도로서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길거리에서 지혜가 있으면 관심을 가져라 !!

그것을 잠언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길거리에서 지혜가 있으면 관심을 가져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지혜가 나타나는데 자기는 그냥 집구석에 있다고 하면 자기는 무엇이 되는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칭 똑똑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커지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병원에 곧 바로 가면 되는데, 아프지 않다고 하면서 버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제 복음을 아니까, 집에 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항상 우리 자신의 문제는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 정도로 알았으면 나는 이제 도사다" 라고 하고 싶지만, 하지만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잠시동안이라도 살다보면 문제가 계속해서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문제가 생기면 지혜에게 그 문제를 들추어내고 들이대야 한다는 것이다. 전혀 부끄럽다고 여기지를 말고 말이다. 옛날 속담에도 보면 "아픈 것은 자랑하라"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잠언서에 의하면 뭐라고 하는가? "지혜 앞에 등장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20절에서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지혜가 물질인가? 그게 아니면 인물인가? 어떤 인물인데, 그러면 이 인물이 여러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한 사람인데, 그렇게 한 사람이 길거리에 나오니 다른 사람들은 "저게 미쳤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 성경에서 "주의 이름으로 모여라" 라고 하는 것은, "모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만큼 모였으니 참 기분이 좋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한 분의 이름으로 모이는데, 그러니 "그 한 분만을 쳐다보면서 모여야 한다" 라는 것이다.

 

◈ 야외예배는 주님께서 가게 하실 때 !!

저는 우리교회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봄만 되면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야외예배인데 말이다. 야외예배를 가는지를 두고 혹시 교회 내에서 의견충돌이 없을까 싶어서 말이다. 야외예배를 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야외예배를 가게 되면, 저와 교인들이 항상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과연 이번에 몇 명이 모일까?" 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장로님, 갑시다. 갑시다" 라고 하면 많이 모일 가능성이 많고, "바람이 부는데, 또 꽃가루 알레르기도 있고, 갔다오면 허리가 아파서 사흘은 꼼짝못해" 라고 나오면, 별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아이들도 좋아하고, 재미가 있다. 코에 바람도 좀 넣고 말이야" 라고 나오면, 물론 우리교회가 외곽지역에 있어서 오는 것 자체가 콧바람인데 말이다.

그렇게 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모든 것이 지혜, 즉 예수님을 보면서 하는지, 그게 아니고 몇 명이나 모이는지, 그것이 목적과 보람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지혜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명이니 모으는지, 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나중에 가서 "온다고 해놓고 누가 안 나왔어" 라고 하면서 그만 말썽이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외예배는 주님께서 가게 하실 때 가면 된다는 말이다. (딩동댕 ♪)

그러니 중요한 것은 야외예배가 아니라, 평소에 누구 앞에서 자기를 어리석은 자인지로 내세웠느냐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너무 똑똑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지혜가 외쳐야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는 자체적으로 지혜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만 있다는 말이다. 

 

◈ 지혜는, 지혜가 와서 호명(呼名)을 해줄 때만 !!

그래서 잠언서의 내용은,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을 하는지,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청사진이 잠언서의 주제가 되는데 말이다. 즉 이 세상의 인간들이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얼마나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들을 반복하고 있는지, 그런 사례를 열거한 것이 잠언서의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정말로 이 땅에는 지혜가 없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 땅에서의 지혜는, 지혜가 불러줄 때만 지혜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혜가 와서 호명해주고 불러줄 때, 오직 그때만 지혜가 생긴다는 말이다. "너는 나에게 와서 살아라" 라고 하면서 불러주실 때, 그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나사로야, 나오너라 !!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나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무덤 앞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니 시신이 썩어서 냄새가 심한데 말이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하시면서 호명을 하신다는 것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것을 보고, 우리는 죽은 나사로만 이름을 부른다고 여기지 말고, 지금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능력으로 호출했다고 여기시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부를 때,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 이름을 불러주신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나사로가 자기 이름을 듣고서 나왔지만, 나사로 그 덩어리 자체는 어디 소속인고 하니, 나사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불러준 예수님 소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라고 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다. 자기는 쉬고 있는데, 주께서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런 상태에 놓여있는데,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이다. 아파야 된다고 하면 아파야 하고, 나아야 된다고 하면 나아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께서 밀고 당기고 하는 가운데,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수동적인 것에서 오는 여유로움, 그것을 우리가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잠언서에서 명단을 만들어서 이름을 부르면 그것으로 끝인데,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고 하니, 구약에서는 불러줄 때 잔소리로 불러주신다는 것이다. "니가 이런 짓을 해서 되겠나? 너의 모든 것을 나에게 다 맡기라고 했잖아. 그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불러줄 때, "예, 그렇습니다" 라고 반응하게 되면 지혜자가 되고, 반면에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짜증이 나는데, 당신까지 잔소리야" 라고 하면서 거부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로 그냥 남게 된다는 것이다. 

 

◈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

잠언서를 다시 정리하면, 잠언서는 이미 우리가 어리석다는 것을 기정사실화를 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심으로서,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호명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이 이미 지혜가 되시는 분과 한 통속이 되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1장 23절에 보면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라고 하고 말이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런 내용이 교재 34페이지 이하에 보면 나와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1장 19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잠 1:19)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 너희 힘으로는 안 된다. 내가 빼줄게 !!

너무 복잡하게 하지 말고 좀 쉽게 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다" 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어떤 악한 자가 이미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에 빠진 아이들이 나오지 못하듯이, 이 세상에 빠지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지혜가 책망하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호명을 하는데, 그러면 악한 자가 놓아주게 되는데, 그렇게 악한 자가 놓아줘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악한 자는 호락호락 놓아주지 않는데, 성령이 오셔서 "이 사람을 놓아줘라" 라고 하면, 마귀는 붙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먼저 주인을 꽁꽁 붙들어놓아야, 그 안에 들어있는 냉장고나 TV를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의 집에 붙들려있는 세간 살림과도 같은 우리를 데리고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주인을 묶어놓고 강제로 데리고 가는 식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다. 천국은 이런 식으로 성령을 통해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러한 일방적인 데려감,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32절에 보면,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 부흥사들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죄 !!

그런데 이 구절을 가지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흥사들이 장난질을 쳤는지 모르는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은 방언을 할 줄 모르죠? 저는 합니다. 방언을 한다는 것은 성령이 왔다는 것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1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성령을 거스리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나 부흥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원히 오는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 부흥사를 주의 말씀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보시고, 무조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아무런 토도 달지 말고, 아무런 댓글도 달지 말고, 그저 이 부흥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고, 그냥 그대로 믿으시기만 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것이다. 사실은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중요한데 말이다.

부흥사가 하는 말이 "제가 이번에 이 교회에 와보니 재정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집을 팔아서 전세로 가시고 남은 것은 헌금하세요. 그렇게 바치면, 그것이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어서, 자식들이 그것을 보고 '야, 나도 아버지처럼 천국에 가야지' 라고 해서 어긋난 길로 가지 않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식 이야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부모들은 자식이라고 하면 그냥 넘어가니 말이다. 그래서 사기를 쳐도 자식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러니 여러분은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헌금을 하되 넘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아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이번 부흥회 마지막 시간인 목요일에 작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 확장에 방해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늘나라 확장에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물론 그렇게 하고 나서는 그 교회 목사에게 가서는 "이번에 얼마 줄래?" 라고 하면서 서로 나눠먹기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완전히 칼만 들면 강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닌데, 그러니 오히려 그러한 부흥사나 목사가 악령이 들린 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곧 성령을 받는 자라는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아멘' 소리가 들림. ㅋㅋ)

왜냐하면, 천국에 가는 것은 수동적이라는 말이다. 손을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음, 그래서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구원을 받을 생각도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죄인이라고 알려주시는 것 자체가 선택 이전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이다. 아픈 것도 없는 그 나라에, 그렇게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다는 말이다.

 

◈ 이미 확정된 상태를 성령을 통해서 통보를 !!

그렇게 이미 확정된 상태를 성령을 통해서 통보해주신다는 것이다.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는 이미 구원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어. 그것을 마치 출석부를 부르듯이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뒤늦게 확인한다는 것이다. "아하,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부흥사가 필요하고 교회부흥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성령님이 하셨는데 말이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것인데, 부흥사들이 하는 방언은 누구나 할 수가 있는데, 연습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말을 좀 빨리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기도를 계속해서 빨리 하게 되면 방언이 터진다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니 말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넘어갔는지 모르는데, 그것은 점쟁이를 찾는 것과 동일한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 아하, 이것이 내 모습이구나. 끝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1장 23절에서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바르게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무엇을 해도 안 돼" 라고 하시는데, 사실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안 되니까,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을 십자가에 근거해서, 마치 엑스레이를 찍듯이 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찍힌 사진을 보고서 "아하, 이것이 내 모습이구나. 끝!" 이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만 하는 모습이 곧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준 것은 자기 자리가 아닌 지혜의 자리인데, 즉 이미 구원을 받은 자리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모습이 자기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영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 복을 받고 건강하게 잘 살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잠언서 12장 1절에 보면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짐승이라고요? 네, 짐승입니다. 징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짐승입니다.

(잠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 에이, 이 짐승아 !!

이것을 좀 설명해야 하겠는데, 이것만 설명하고 이번 강의는 마치도록 하자는 말이다. 일단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치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해보다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아끼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누가 자기를 보고 잔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는가? 귀를 막고 듣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잔소리가 듣기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잠언서 12장 1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 잠언서가 바로 지혜인데 말이다. "니가 왜 어리석은 놈이고, 엉터리 인간인지 모르지? 그것을 내가 알려주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무엇과 같은 줄을 아는가? 그것은 곧 짐승이야. 알겠어? 에이, 이 짐승과 같은 놈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이, 이 짐승과 같은 놈아!" 라고 야단을 치는 자리로 옮겨가 보자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옮기게 되면, "그래, 나는 짐승이 맞아"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성추행을 하고 짐승과 같은 짓을 해서 짐승이 아니라,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라는 주님의 확정된 말씀에 의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맞습니다. 제가 짐승입니다 !!

이 세상에 잔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는데, 그러니 모두가 짐승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자기가 짐승임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이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지옥에 갈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바로 나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고마해라. 마이 무것따 아이가?"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인간인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또한 벌을 받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의 건전한 것만을 사수하고 지키려는 쪽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징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

그런데 여기 12장 1절에서는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지식은 지혜인데 말이다. 쉽게 말해서,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천국에 가고, 싫어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인데, 그런 이런 말이 우리 인간에게 과연 설득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다 말씀과는 반대로 살아가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반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시고서는 반대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즉 "니가 잘못이 아니라, 니가 속해있는 이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는데, 그러니 내가 너에게만 일부러 닦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편파적인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그 누가 남들로부터 "어이, 최 짐승", "어이, 박 짐승"," 어이, 이 짐승",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차라리 "나를 보고 짐승이라고 부르는 당신은 뭐요?" 라고 하면서 즉각 반발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러니 지혜는 점잖은 척을 하는 우리 껍데기가 아니라, 우리의 숨겨진 본성을 노출시키는 힘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버이날이 되어서 제 아내는 강의가 끝나면 처갓집으로 빨리 가셔야만 하는데, 그런데 저는 또 미리 처갓집 광경을 그려본다는 것이다. 사실 짐승들이 다 모였는데, 그러니 거기서 복음을 이야기하면 다 싫어한다는 말이다.

우리 권사님 댁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다들 좋아합니까? 하지만 기존 교회의 경우에는 모두 다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지금도 이 땅에서 수난을 받고 있는데, 그래서 제 아내는 가서 엉뚱한 소리만 하는데, "이번에 떡이 참 맛있다" 라고 말이다. 일체 복음은 이야기하지 않는데, 얼마나 지혜로운지 모른다는 것이다(ㅋㅋ). 

정말 마지막으로, 교재 36페이지를 보자.

** 이런 사실을 모르게 되면 잠언을 읽은 소감으로 기껏 내놓는다는 것이, 소위 '잔소리 백과사전'입니다. 각양 잔소리는 다 들어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마누라 잔소리에도 짜증나는 마당에 성경에서까지 잔소리를 듣게 되면, 자연히 얼굴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 성경은, 잔소리 백과사전 !!

여기에 '잔소리 백과사전' 라는 말이 나오는데, 제가 만들어낸 신조어인데 말이다. 그렇게 성경말씀까지도 잔소리를 하니 누가 성경을 보겠느냐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지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강제적으로 QT나 성경읽기를 하게 하니, 마지못해서 한다는 것이다. 하루 일당을 채우듯이 말이다. 그래서 후다닥 성경을 읽고는 "오늘 일당을 채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현장에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문득문득 이 잔소리가 우리를 통해서 발설이 되도록 유도하신다는 것이다. "형님, 저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이다. "삼촌,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라고 하게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그렇게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자기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니나 잘하세요 !!

물론 그런 말을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니나 잘하세요" 라고 욕을 듣는데, 즉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누구를 훈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훈계인데, 즉 주님의 훈계라는 말이다. 그런 주님의 훈계가 자기를 통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출렁 출렁거리는 현상인데, 물론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데,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데 뭔가가 담겨서, 즉 성령이 오셔서 말씀을 주시니까, 이런 소리를 하면 욕을 얻어먹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쑥 이야기를 했다가, 그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에게서 말씀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전혀 우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전도자로 사용하시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생명이 들어왔기에 우리는 싫던 좋던 간에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남에게 전달하는 중간 매개체로서 살아가야 되는 줄 압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돌이켜보면서, 천국에 가기 전까지 이 땅에서 그렇게 의미가 있게 쓰여지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