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9 - 잠언 1:23 / 죄인의 개입 / 140602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9 - 잠언 1:23 / 죄인의 개입 / 140602

정인순 2014. 6. 2. 15:11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9 - 죄인에 합류

                                                           

14,06,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3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고 스스로 해결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잠언 1장 23절에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어주는 신이 누구의 신이냐 하면, 바로 '나의 신'입니다. 곧 지혜의 신입니다. 인간의 아닙니다. 지혜자가 되시는 그분의 신입니다. 완벽한 나, 곧 그분의 신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 딴에 지킨다고 지킨 그 모든 것이 책망, 책망을 연속적으로 쉬지 않고 받아야 할 우리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

사람에게 신이 부어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인간에게 찾아왔을 때,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타인의 신이 자기에게 도달한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잠언서 1장에도 있지만, 창세기 2장에도 보면 이미 나와있다는 것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자체가 우리가 성경대로 행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이 하신 대로 따라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자체가 말이다. "하나님을 본받자" 라고 하는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본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참새 한 마리도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본받자' : '예수님을 본받자' !!

그러니 "하나님을 본받자"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예수님을 본받자" 라고 해야 되는데, 이렇게 분명히 구분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어떤 물체에다가 하나님의 신을 부어서, 그것이 산 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그대로 시행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아무리 감동을 주어도,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즉 사람은 아무리 해도 남에게 하나님의 신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입장에서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이 되어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는 이 동네에서 할 수 없는 것, 즉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령을 말이다.

그런 것은 안 되는데, 그런데 이것을 안 된다고 하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서 "그럴 리가 있어? 없다" 라고 하면 그만 문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만 모아서 인간의 역사를 이루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싸가지가 없는 인간들 !!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하기를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라고 한다면, 하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들로는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만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이다.

화가의 경우에 남들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칭찬해주면 기쁜데,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알아주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가 되면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일을 가지고 아무리 들이대도,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솜씨자랑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흔히 이야기를 하기를 "하나님, 제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아주 싸가지가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자기를 알아달라는 것인데, 즉 자기를 너무 닥달내지 말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식으로 나갔는데, 하지만 결국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본받자" 라는 것이 말이 안 되고, 그러면 그건 아니고 "예수님을 본받자" 라는 것은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신 자체가 죄가 있는 육신이기에 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인데, 그런데 죄인에게 잠입을 해버리신다는 것이다. 즉 죄인 속에 들어와 버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시는고 하니, 죄인으로 취급해서 다루신다는 것이다. 즉 힘이 들었고, 고난을 받았고, 아팠고, 배가 고팠고 말이다. 로마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물도 흘렸고 말이다.

 

◈ 아버지만을 의지하신 예수님 !!

그러한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아버지를 의지했는데, 바로 그것을 본받자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자" 라고 하는 것은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을 믿자" 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믿자는 말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는 것처럼 믿자" 라는 것은 말이 되는데,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자" 라고 하면, 그런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인데 믿자고 하니,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다 보여주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은 제쳐두고 하나님과 바로 상대를 하려고 나오니, 그렇게 해서는 아무리 교회를 세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초반에 이렇게 강의를 하면서 저 자신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의 이야기인데, 하나님이 흙으로 육신을 만드시고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생령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 즉 하나님의 신을 넣어서 그것이 산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대목인데 말이다.

그 대목을 제가 왜 어렵다고 생각하는고 하니,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말이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즉 우리 인간들은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성경에 기록되고 우리에게 알려주게 되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하게 되면 우리는 희망이 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서, 그렇게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하는 순간부터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먼저 치고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수동적이 되고 마는데, 즉 '기다려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대기하라', '가만히 있어" 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언제까지 기다리면 됩니까?" 라고 나오는데, 우리는 그렇게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꾸역꾸역 뭔가 자기 손에서 출발하고 싶어하니 말이다.

◈ 기다려라 !!

사무엘과 사울 왕의 경우에,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제사장이 먼저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전쟁에 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인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다렸는데, 하지만 약속이 시간이 지나도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적들은 사기가 마구 올라가 있고, 그래서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전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 왕이 참지를 못하고 제사를 드렸는데, 나름 잘 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따지는 것은 무엇인가? "왕이시여, 제대로 제사를 잘 드렸습니까? 제가 없어도 잘 드렸지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시여, 왜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왜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가? 이렇게 사람이 다른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혀 주도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즉 "자생적으로 내가 존재할 이유는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제대하는 즐거움을 !!

제가 이 옷을 입을 때마다 작년이 생각나는데, 하지만 저는 작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돌아가면 일년은 더 젊어질지 몰라도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 이 지옥과 같은 세상을 빠져 나온다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아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도 30도가 넘는다고 하는데, 더워서 환장하겠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즐거움이 바로 그것인데, 즉 "우리도 이제 제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즐거움이 있는데, 그런데 왜 다시 뒤로 돌아가서 입대를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빨리 빨리 제대를 해야하는데 말이다. 다시 입대를 해서 그런 생고생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잠언서를 보고 있는데, 이 잠언서에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이 세상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는데, 즉 빠져나가면 어디로 갈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주께서 마련해주신 말이다. 그런데 빠져나가도 딱히 갈 곳이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갈 곳이 어디인지 확정이 되지 않은, 바로 그런 자들의 서글픔을 이 잠언서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지혜가 왔다 !!

잠언서에서 "지혜가 왔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가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야할 곳, 즉 우리가 합류해야할 곳이 먼저 우리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 한마디가 바로 잠언서 전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기다려라. 대기하라. 너는 수동적이어야 돼. 나대지 말라. 니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도 안 돼. 너는 아무 것도 몰라" 라고 말이다.

항상 이러한 것을 주지시키면서 지혜가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자기가 가야할 곳, 자기가 가서 영원히 살 곳을, 그것을 지혜가 미리 와서 우리에게 그 소식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말이다. 제가 방금 이 땅을 떠난다고 했는데, 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이 들었기 때문에 말이다.

 

◈ 잠시 출애굽기를, '애굽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가?'

이번 여름 수련회에 출애굽기를 할 것인데, 그것을 준비하면서 그야말로 난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내용을 우리 성도들이 알아들을지, 그것이 걱정되는 내용들로 채워나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 중에서 하나를 미리 이야기하게 되면, 대전에서도 미리 이야기하고, 여기에서도 미리 이야기하고, 이러다가는 다 미리 이야기하고 말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미리 이야기할 때마다 내용이 다른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주자' 개념이란 것인데, 즉 "애굽에 누가 살고 있었는가?" 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애굽에는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가 "애굽에 누가 살고 있었는가?" 라고 물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려고 하면, 우리가 애굽이 아닌 다른 나라가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애굽이라는 남의 나라에 잠시 살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인들의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애굽이라는 나라말고 다른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의 조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에이, 여기서 잠시 살다가 빨리 빠져나가야지"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히브리인들이 단 한 사람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모세도 거주자가 아니고 !!

심지어 모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즉 사나 죽으나 여기 애굽이 자기의 조국이고 나라이지, 다른 나라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애굽의 거주자가 아닌데, 그냥 자기 나라의 거주자이지 애굽이라는 타국의 뉘앙스를 가진 거주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가 어려운데 말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살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모세는 애굽을 보여줄 만한 진정한 거주자가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다가 모세가 어떻게 해서 그만 애굽에서 탈출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탈출하고 난 다음에 다시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줌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되었는가?

애굽을 애굽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내면서 그 애굽은 안 된다고 하는, 즉 "이 애굽은 구원을 받을 만한 나라가 되지 못해"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진정한 거주자는, 그것은 바로 모세도 아니고 히브리인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말이다.  

 

◈ 하나님이 애굽의 거주자가 되셔서 출애굽을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애굽의 거주자가 되셔서 탈애굽, 즉 출애굽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애굽이라는 나라를 탈출해야하는 대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란 인간은 전부가 다 탈출이 불가능한 애굽인으로 규정을 짓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그러니 외부인이 아니라고 하면 애굽나라의 정체를 드러낼 만한 진정한 거주자가 될 수 없는데, 외부인이 아니라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애굽 나라의 바깥에 사는 외부인이 그 속에 들어와서 거주자로 행세하게 되면, 그 거주자는 애굽나라를 파괴시켜야만 될 임무와 사명을 띤 유일한 애굽나라의 거주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줄 곧 거주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나라에 줄 곧 거주해도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즉 자기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데, 그러면 이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모르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외국에 나가보니 우리나라가 정말 좋은 줄을 알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깥에서는 보는 안목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출애굽' 이라는 것이 애굽나라 사람들에게는 성립이 되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을 떠나서 다른 나라도 간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진짜로 천국에 사시던 분이 오셔야 만이, 우리가 이 땅에서 갈 나라가 확실해지는 것이지, 그냥 이 땅에 사는 것이 힘이 들어서 "빨리 죽어서 다른 나라에 갔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만든 상상의 나라이지 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것은 천국이 아닌 유토피아 !!

그렇게 해서 만들어놓으니, 그 나라는 이 땅에 없고 아쉬운 것들을 모아놓은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유토피아, 즉 희망사항의 나라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있는 그 나라는 우리에게는 처소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처소가 마련되는, 그 나라가 진짜로 천국이고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말씀하시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하늘나라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겠는가? 인류역사와 전설에 보면 하늘나라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집트나 바벨론의 신화도 그렇고 말이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종교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를 보아도 그러한데, 즉 죽어서 좋은 나라에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하늘나라인가?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천국을 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천국을 말이다.

(요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다시 정리하면 !!

계속해서 해봐야 점점 더 어려워지지 싶은데, 방금 이야기한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언약이 주어졌을 때만 그 위상이 주어지는데, 그렇게 애굽의 위상을 마련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파괴되어야할 대상으로서 애굽나라라는 것이다.

* A : 당신은 어디에 삽니까?
* B : 나는 대한민국에 삽니다.
* A : 그러면 언약에 의해서 망가져야 할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인정하십니까?
* B : 뭐라고요?
* A : 언약에 의해서 망가져야 할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 B : ? ? ?

그렇게 우리가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지금 베트남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트남은 망해도 괜찮은데, 중국이 망해도 괜찮고 말이다. 물론 북한이 망하면 더 좋은데, 일본이 망하면 제일 좋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건드리면 그만 화가 치민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복수를 하시면 !!

어제 설교를 마치고 물어보니, 설교시간에 복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게 참 중요한 지적인데, 제가 설교시간이 짧아서 일일이 설명하지 못해서 그런데 말이다. 지금 잠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복수심이 없는데, 왜 그렇게 복수 이야기를 많이 해야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인간의 원조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수를 하시면 인간은 그대로 따라서 복수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는데, 그게 바로 잠언서 1장 23절에 나온다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그러면 잠언서 1장 23절도 창세기 2장 7절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부어주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까?)

왜 그렇게 하나님의 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는고 하니,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그 모든 내용물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곧 인간이 하게 될 일이라는 것이다.

 

◈ '출애굽' 이라는 사건을 누가?

'출애굽' 이라는 사건을 누가 일으켰는가? 히브리인들이 일으켰는가? 모세가 일으켰는가? 모세는 그냥 양이나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무슨 감정이 있고 힘이 있다고 애굽을 치러 가겠는가? 물론 감정은 좀 있지 싶은데, 하지만 가봐야 상대도 되지 않는데 말이다. 무슨 대책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어디 자기 혼자 가서 지팡이로 바로 왕의 머리를 치던지 하면 이기는가? 바로 왕이 "모세 할아버지, 알겠습니다. 백성들을 내놓겠습니다" 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계획은 누구에게 사로잡혀있는고 하니,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미안한데, 걱정도 되고 말이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생각은 그 출발을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계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계획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일이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본받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시비를 걸 수밖에 없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본받는다" 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자기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한 야비한 짓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에게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까지 믿고 본받는다" 라고 하는 비열한 짓이란 말이다.

 

◈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인간들 !!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야 이렇게 속시원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오직 관심사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다. 세월호 사건에나 관심이 있고 말이다. 신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광고를 해봐야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그래도 이단들은 싣고 하지만 말이다.

출애굽의 경우에도,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미쳤나? 출애굽을 왜 하는데?"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인간들의 반응이 무엇인가? "미쳤나?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데?"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신을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데? 우리가 알아서 잘하는데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성령이 왜 오는데? 우리가 알아서 바르게 살면 되는데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뭐라고 주장하는가? 자기가 얼마나 착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측정해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자기가 성실하고 올바르고 착한지, 그것을 날마다 자기에게 되새김질을 하면서, 그런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하나님, 저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거울을 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거울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착하고 예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러니 니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거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없는 이야기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데, 억지라도 꾸역꾸역 그런 소리를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전체를 부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니가 다시 태어나도 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정리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시는고 하니,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애를 써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는데, 우리에게는 전혀 그런 능력이나 자질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삽입되어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 권사님, 여기 우산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서, 제가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 이렇게 우산을 들고 왔는데, 이 우산을 권사님에게 선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권사님, 여기 우산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권사님은 그것을 제가 보는 앞에서 그만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서문시장에서 오천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싸구려 우산이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우산이라는 선물을 주기 이전과 이후가 동일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이 전혀 동일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선물로 주었음에도 불고하고, 그만 그것을 완전히 개무시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무시한 관계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신이 왔는데도 그 신을 섭섭하게 하고 위반해버리면, 인간은 신이 오기 이전의 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 '뻥'하고 구멍이 뚫리고 말았는데, 어제 그것을 설교시간에 '최후의 어둠'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미 인간은 어둠이라는 것이다.

 

◈ 내가 찾아가리라 !!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런데 인간은 이미 망가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망가졌다. 너희들 힘으로는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두 번째로 "내가 찾아가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라는 말이다.

아까 이야기한 애굽으로 말해보면, 인간은 애굽나라에 살고 있는데, 그래서 인간은 행동은 개인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제 설교시간에도 이야기를 했는데, 너무나 빨리 지나가서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지 싶은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상황이 먼저이고 그 상황에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행동이라는 것은 없는데, 모든 것이 자기 집안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행동이란 말이다. 그리고 어릴 때의 성질은 커서도 변하지 않는데,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다들 부부생활을 해봐서 알지 싶은데 말이다.

 

◈ 국가적 단위에다가 인간을 집어넣어서 !!

그래서 애굽자체를, 즉 "니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너를 너 되게 했던 그 상황자체를 망가지게 하려고 한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 인간을 국가적인 단위에다가 집어넣어서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 단위에다가 말이다.

"저는 대한민국에 삽니다" 라고 한다면, 하지만 성경에는 대한민국이 나오지 않는데, 성경에 나오는 나라는 하나밖에 없는데, 즉 애굽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이 되는데, 소돔, 혹은 애굽,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곳,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 이미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편입이 !!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편입이 된 상태라는 말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순간, 그 유대나라는 사실은 바벨론에게 복속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예언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벨론의 시민이고 백성인데, 애굽나라의 백성이고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교회에 좀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본받겠습니다" 라고 해봐야,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겠는가? "어서 거기서 나와" 라고 하시지, "아이쿠, 참으로 착하구나. 훌륭하네. 정말로 그 마음이 고마워" 라고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교회는 위험한 곳이다" 라고 자주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훌륭하다고 하면서 폼을 잡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소속되어있는 나라가 바벨론이고, 그러니 당연하게 거기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우리는 나름대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데, 하지만 망가진 인간들이 망가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자체가 망가진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망가졌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 번째로 우리는 "그러면 주님의 방식을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주님의 방식도 첫 번째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방식대로 해도 망가진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내가 찾아가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이미 찾아왔다 !!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찾아왔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말이다. 그러면 "저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는데요?"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국가단위로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아저씨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졸지에 왕 앞에서 종이 된다는 것이다. 즉 왕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 의식, 백성 의식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 왜 개인이 아닌 집단인가?

그렇게 우리가 개인의식이 아니라 집단의식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천국에 가도 자기 자랑을 할 여지가 전혀 없어지는데, 그것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더불어 구원을 받은 것이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정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천국다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부터 이미 우리가 천국의 삶을 산다는 것은, 개인의 가치를 포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도록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뭔가 빠져 나오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 땅에서 뭔가 탈출하는 즐거움이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썩은 이를 빼듯이 '쑥'하고 빼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게 빼버리면 천국에 가서 살지를 못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어지간하게 시달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달려서 진짜로 자기 자랑이 도저히 나올 수 없음을 알아야, 그래야 천국에 가도 천국다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되어야 천국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만 살겠다고 탈출을 하면 천국에 가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데, 우리는 충분히 이 땅에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연단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위주로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시도가 전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을 혹독히 아는, 그런 시련을 우리가 충분히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 다시,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잠언서 1장 23절에서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라고 함으로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즉 주셔야 받는 것이지, 우리가 달라고 한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신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렇게 하나님의 신이 주셔야만 하는데, 그 주시는 장소가 어디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망가지는 것, 즉 아까 우산을 선물로 주었는데 버림으로서 준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했는데 말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상처를 받은 자리에 우리가 합류될 때, 즉 "제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상처를 받았군요" 라고 고백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찾아왔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이것을 다르게 이야기를 해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자만이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니라는 말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을 믿자"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자" 라는 말인데,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은 정녕 어떤 예수님인가?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분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장소를 가지고 계신 그분을 우리는 드디어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 저는 송유관에 구멍을 낸 기름도둑입니다 !!

어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실수가 없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 라고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이렇게 송유관 파이프가 있는데, 여기에 기름도둑이 와서 송유관에 구멍을 내게 된다면, 그 구멍으로 무엇이 나오는가? 분명히 기름이 나온다는 것이다. 도둑이 그런 짓을 하더라도 말이다. 

이 기름을 진리라고 하면, 그런데 여기 송유관에 구멍을 낸다고 하면 그것은 죄가 되고 실수가 되고 오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잘못을 함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기름의 맛을, 즉 진리의 혹독함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다. "아하, 나는 죄인이고, 오직 주님만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구나. 나는 죄를 짓는 것밖에 할 수 없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사람에게 마치 송유관에 기름이 흐르듯이 진리가 흐르게 된다면, 그 사람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훔쳤는가?"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저는 기름을 훔쳤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저는 진리만 훔쳤어요" 라고, 그렇게 진리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다. 즉 죄를 지어서 진리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한 것은 죄를 지은 것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무엇을 증거하는고 하니, 진리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 성령은 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창으로 찔렀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만 성령이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아무에게나 성령을 주시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왜 성령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의 자리에서만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만큼 인간들이 저지레를 했다는 말인데, 즉 인간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몰랐다는 말은 천국을 모른다는 말인데, 그렇게 천국도 모르면서 종교만 잔뜩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죽으면 이런 나라에 가고 저런 나라에 가고, 극락에 간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온갖 아이디어들을 다 쏟아내었지만, 하지만 그런 인간의 아이디어들이, 즉 천국에 대한 열망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진짜로 천국에서 오신 그분을 그만 옆구리를 찔러서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오신 분을 말이다.

 

◈ 유일한 접촉점은, 내가 죄를 지은 바로 그 자리 !!

그러니 거기서 우리가 접촉되는 지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지은 장소가 바로, 마치 송유관에 구멍을 내어서 기름이 흘러나오듯이,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령이 쏟아지면서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기가 참으로 힘들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목사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오히려 할 수 없는 것만 골라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목사님, 그러면 성령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저에게 물을 사항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할 도리는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을 어떻게 꼬드기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로서 증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오직 목격자이고 증인 !!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어떻게 달리 도리가 전혀 없는데, 즉 "저는 기름도둑이었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신의 인격은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은 말이 안 되는데, 기름도둑에게 무슨 인격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진리의 도둑이었고 지금 자기 속에 그 진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자기는 그 진리를 모르고 오해한 채로 있다가 진리가 진리로 드러났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윗의 '상한심령' 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우리가 그것 외에 달리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가 있겠는가? "당신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라고 질문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서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차라리 학원을 차리지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또 다시,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

다시 잠언서 1장 23절로 돌아와서, 여기에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받지 않는데, 오직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받아진 사람만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상처를 증거하는, 즉 인간으로 인해서 받은 상처를 증거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너희들은 백수이고 거지들이었다 !!

그러므로 천국은 모두가 주님에게 죄를 지었던 자들이 모여서 이룬다는 것이다. 주님의 아이디어가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알려주셨는데,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부류의 자들었는가? 대부분이 백수이고 거지들이었다는 것이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아무나' 데리고 오너라 !!

소위 돈이 좀 있다고 하면서 밭을 사고 소를 사고, 그리고 장가를 간다고 하면서 들떠있는 인간들은 어떠한가? 즉 이 땅에서 나름대로 자기가 할 일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바쁘다고 하면서 임금의 혼인잔치에 오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그야말로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냥 예복이나 하나 걸치고 말이다. 그러니 천국에는 자기를 자랑할 인간들이 전혀 없는데, 그러니 그런 천국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우리교회의 좋은 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자랑할 사람들이 없다는 것인데, 물론 아직 제대로 찔리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ㅋㅋ). 일단은 서로 건들지 않기로 암암리에 약속이 되어있는데, 아무튼 그것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살기 좋고, 평균기운이 몇 도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천국에는 자기 자랑할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것, 오직 예수님만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인간이 되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깨어져야하고, 또한 그 얼마나 피동적으로 움직여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제 교재 40페이지를 보자.

** 불교에서는 도를 닦지만, 기독교에서는 도를 닦는 자는 나쁜 존재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A에서 B로 가려고 시도하는 자입니다. 

◈ 기독교에서는 도를 닦는 자는 나쁜 놈 !!

여기에 "기독교에서는 도를 닦는 자는 나쁜 존재입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렇게 나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인데, 즉 도를 닦는 남자와 여자들이 나쁘다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도를 닦겠다는 것은 나쁜 자들인데, 이것은 성화론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A에서 B로 가려고 하는 시도인데, 그러면 그것이 왜 나쁜가? 왜냐하면, B에 가보면 B'가 다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B'가 발생하는 순간에 B"가 또 다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A에서 B로 도달한 것에 대해서 "야,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외부의 능력이라고 고백한다고 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B"가 없다고 하면 기적으로 만족해하겠는데, A에서 B로 노렸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B에 도착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사람 속에는 B'가 기다리고 있으면서, 그 사람은 또 다시 기적을 요청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경우에 A에서 B로 도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런데 B에서 B'가 오지 않게 되면 그 사람은 그만 구원에서 탈락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나온다는 말이다. "나는 B를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주께서 기적과 더불어서 B에 있게 하셨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B에 도달해도 B'를 생각하겠는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는 B도 없고, B'도 없고, B"도 없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게는 그냥 A, 그런 위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죄인에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인의 자리에서 말이다.

 

◈ 이근호 목사는 왜 자꾸만 죄인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이근호 목사는 왜 자꾸만 죄인이라고 하는가? 의인으로 나아가야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생각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목표를 정해서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해"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자기 뜻은 주님의 진짜 기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는 말이다.

진짜 기적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목표점까지 더해서 오는데, 즉 "아니 이것은 내가 원하는 목표가 아닌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기적이 오는 것이지, 목표는 우리가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능력만 기적으로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데리고 농락하고 장난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부름꾼인가?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자기가 정해놓고서, 자기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달라고 하니 말이다.

 

◈ 왜 홍해바다인가?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갈 때, 모세 외에(?) 그 누구도 바닷가로 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는 끝인데 그야말로 더 이상은 길이 없다는 것이다. 홍해바다 자체가 애굽과 그 바깥 나라의 경계선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홍해에 도달했다는 것은, 더 이상은 나갈 수가 없는데, 그러니 애굽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나라를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그 가나안 땅이 텅텅 비어있었는가? 강력하고 장대와 같은 민족들이 버티고 있었는가? 분명히 그들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계획했던 것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만 좌절이 되고 실패하고, 실망으로 끝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으면 최소한의 물과 양식은 제공이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로 인도했는데, 거기에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겠다는 말인가? 살리겠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들이 공동묘지를 언급했는데, 즉 "우리가 어디 공동묘지가 없어서 이리로 데리고 왔는가?" 라고 하면서 모세에게 달려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식이란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멀쩡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만 기적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멀쩡하다는 사고방식 자체를 계속해서 제거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
(출 16: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 빠라빠라빠~, 빠라빠라빠~  ♬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다시 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리스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래서 미리 공부하는 차원에서 그리스에 관한 다큐를 보면 참으로 그리스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에다가 그야말로 하얀 집, 그것이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보면 나오는데, '빠라빠라빠~♬'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파란 옷을 입은 예쁜 애인까지 있으면 더 좋고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누가 빠져있는가? 거기에는 '나' 자신이 빠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나' 자신이 포함되어서 그리스에 놀러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풍경이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포함이 되게 되면, 전혀 그런 멋있는 풍경이 전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실감이 나지 않으면 가족끼리 한번 그곳으로 놀러가 보라는 것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그리스에서도 분명히 새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푸른 바다와 하얀 집이고 간에, 음식도 입에 맞지를 않고, 그리고 남편은 엉뚱한(?) 짓만 하려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나' 자신이 포함된 풍경을 우리는 왜 생각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약속의 땅은 좋은 땅임에는 분명히 맞는데, 그런데 그만 우리 자신이 들어가면 다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들어가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천국을 유지하려고 하면, 주님께서는 아예 우리를 완전히 갈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 그야말로 콩가루로 !!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콩국수' 라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를 콩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도토리를 갈아서 묵으로 만들든지 말이다. 그렇게 완전히 갈아서 액체로 된 주체로 만들어야하는데, 그래야 장차 천국에 가서 '빠라빠라빠~♬' 라고 하면서 마음껏 천국을 즐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그 순간 천국은 그만 개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곧 문젯거리인데, 그런 인간이 천국이랍시고 들어가게 되면, 그 천국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정말로 천국이겠느냐는 말이다.

 

◈ '천국을 누린다' 라는 의미는?

"천국을 누린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이것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어떤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그야말로 공주처럼 손에 물도 넣지 않고 고이고이 자란 아가씨가 결혼을 하면서 "이제 결혼을 하면서 마음껏 누려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손끝도 대지 않고 마음껏 누린다고 하는 것, 그렇게 즐긴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반드시 자기를 대신해서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천국을 누린다" 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는 것이다.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누린다' 라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누리기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을 했다는 것인데, 누가 희생을 하셨는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런 희생도 모르고 누리기만 한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천국이고, 곧 지옥이란 말이다.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 예수님에 대한 감사, 그렇게 천국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혹독하게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전혀 누릴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이, 그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천국, 그것은 저에게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은 저에게 주지를 마시고, 저 사람에게 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런 마음이 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구리에서 나오는데, 즉 십자가의 피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 다시 '복수(復讐)' 이야기를 !!

여기서 '복수(復讐)'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제가 지난 설교시간에 복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복수는 주님이 먼저 하셨는데, 그렇게 주께서 원수에게 복수를 함으로서, 주님은 죄를 그냥 묵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는 것이다. 만약에 주님에게 복수가 없다고 하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물에 물을 탄 것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바보와 같은 주님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해서 다 복수를 해버리시는데, 그 복수의 대상자가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인간에게 복수를 하시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을 주심으로서, 즉 언약이 없는 민족들에 대해서 강력한 복수를 하심으로서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려내시는, 그러한 방법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유무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 마음대로,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저 사람은 구원을 하면서 나는 왜 해주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취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주님에 의해서, 주님이 원하는 자만 구원을 받는다" 라는 취지를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불만이 있고 싫은 소리를 하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방성 !!

그러니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데, 과연 그런 하나님의 일방성에 대해서 우리는 동의할 수가 있는가? 당연히 우리도 삐치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하시니 말이다.

따라서 그런 주님의 일방적인 구원이 왔을 때, "역시 나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되는구나" 라고 하는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나오게 된다는 말인가? "어, 저는 구원받을 자격도 전혀 되지 않는데, 그런데 왜 저를 구원해주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 자만이 주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성령을 받은 자라는 말이다.

오직 그런 자만이 천국에서 마음껏 천국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만이 예수님의 희생을 아니까 말이다. 즉 "이것은 분명히 나에게 돌아올 복이 아닌데, 그런데 왜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이것은 정말로 말도 안 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주님에 대한 과분한 생각이 언제 없어지는고 하니까, 아이가 사고로 죽었을 때, 그리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하게 될 때, 사기를 당해서 재산을 다 날렸을 때, 교회에서 자기에게 왕따를 시키면서 뒤에서 욕을 할 때, 그리고 잇몸이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등등, 아직 제가 예를 5개밖에 들지 않았는데 말이다.

 

◈ 그러니 애굽의 의미는?

바로 이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저에게 과분하신 하나님입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혹독한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굽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로 하여금 "너는 결국 애굽나라의 사람이지, 천국의 사람은 아니다" 라는 것을 자꾸만 새겨주는데,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옆구리의 피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제가 곧 강도입니다. 제가 곧 창녀입니다. 제가 곧 세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이고 말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 아픔을 자리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제공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복수를 하시니까 우리도 따라서 복수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절대적이니, 그렇게 자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제가 설교시간에 복수에 대해서 너무나 심하게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저는 당연히 해야할 이야기를 했다고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40페이지를 보자.

** 이 노선에는 그 바닥에 주인공의 그림자만 계속 깔립니다. A가 되던 B가 되던, 아니면 B'가 되던 B"가 되던, 전부가 다 자기의 그림자예요.

 

◈ 누구의 그림자인가?

그러니 주님의 그림자가 아닌 누구의 그림자가 깔린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깔린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도를 닦으려고 애를 쓰는, 그런 자기 그림자가 계속해서 기억이 되고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A가 되던 B가 되던, 아니면 B'가 되던 B"가 되던, 전부가 다 자기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제3의 그림자가 없는데,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그림자가 생기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 그림자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그림자를 밟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밟는 것이라고 여겨서 발악을 하면서, 갑자기 울분을 터트리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렇다고 방금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를 긴 망토처럼 늘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은 성도도 자기 그림자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하지만 자기 그림자와 더불어서 주님의 그림자, 즉 십자가의 그림자도 같이 등장할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의 그림자가 함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우리의 그림자가 있게 되는데, 그런 우리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그림자도 같이 비춰질 때, 그렇게 둘 다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데, 그게 그렇게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 저만치 앞서가는 '님 그림자' !!

그런데 그림자가 언제 드러나는가? 밤인가? 낮인가? 밤에는 보이지 않는데, 낮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코앞에 있는 생계와 생존의 문제가 부딪치게 될 때는, 그것은 어둠이라는 말이다. 자기 그림자도 생각나지 않고 주님의 그림자도 생각나지 않는데, 즉 "우선 살고 보자"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일이 해결이 되든 안 되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게 되면, 자기 그림자가 길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하지만 주님의 그림자도 함께 따라감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장소는 하나의 광야가 되는데, 주님의 이름이 함께 동행하는 말이다. 저는 이 주님의 그림자를 '님 그림자'로 보고 싶은데, 노사연이 불렀는데 말이다.

------------------------
♪님 그림자 - 노사연 ♬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하니
서러움이 가슴 에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일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헝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그림자 밟을 날 없네
-----------------------

이제 교재 41페이지를 보자.

** 여러분 밑에 한번 보세요. 지금 누구의 그림자인가? 여러분 자신의 그림자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고, 만약에 옆 사람의 그림자가 있다면 '어머나!' 라고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 각자는 귀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림자가 자기 그림자를 밟고 있다면, 우리는 평소에 자기가 실체이고 나머지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주님의 그림자가 자기를 밟고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이 허깨비이고, 진짜로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만이 진정 살아있음이 되고, 그런 살아있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허상이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귀신과 같고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영화 '식스 센스' !!

마치 '식스 센스'의 반전과도 같은 것인데, 영화를 안 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영화 내내 정신과 의사가 남의 영혼을 치료한다면서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치고 했는데,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보면 정신과 의사가 사실은 이미 죽었던 자라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부르스 윌리스가 나온 영화인데, 굳이 번역하면 '여섯 번째 감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자기는 살아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보면 "아하,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니 얼마나 복음적이냐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이미 십자가에 죽었나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자기가 살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의 허상이고, 자기는 귀신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신인 주제에 옷을 사주지 않는다고 삐치고, 또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삐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귀신이 결혼을 아무리 자주 해도, 남자를 여섯 번이나 사귀어도 그것도 역시 귀신이라는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이다. 주님께서는 여섯 번을 결혼해도,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은데, 어차피 귀신이니 말이다. 그래서 세리나 창녀도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 구원은 그야말로 일방적 !!

구원은 그야말로 일방적인데, 구원은 살아계신 분이 살아있는 자기의 자존심을 걸고, 즉 자기의 이름을 걸고 허깨비와 같은 우리를, 허깨비와 같은 애굽동네에서, 진짜 처소가 마련된 보이지 않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작업을 지금도 주님께서는 쉬지 않고 실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하기가 참으로 곤란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본인들은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목사님, 그 따위 소리는 하지 말고 우리가 무엇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만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닦달을 내는데, 하지만 죽은 자에게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은 놈 거시기 만지기인데 말이다(ㅋㅋ).

만약에 죽은 자에게 기도를 요구하면, 그것이 어디 기도이겠느냐는 것이다. 집안에서 망가진 인간이 그리스에 놀러간다고 해서 망가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또 싸울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가 누린다고 하면, 그것은 누군가가 희생을 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에 가서 남편과 재미있게 지냈다고 하면, 그것은 남편이 희생을 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어디 집에 가서 보자" 라고 하면서 꾹 참았다는 말이다(ㅋㅋ). 한 쪽이 은장도를 가지고 자기 허벅지를 찌르면서 참아야만, 다른 한 쪽이 즐겁다는 것이다.

 

◈ 남편은, 아내의 희생을 먹고살아 !!

아내가 반찬을 해주면, 그것은 반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희생을 먹는다는 것이다. 물론 맛은 있어야하고 말이다. 만약에 간이 맞지 않고 짜다고 여겨지면, 얼마나 자기 때문에 힘이 들었으면 그렇겠느냐고 하면서, "젖은 손이 애처러워 ♬" 라고 하면서 한 곡을 땡겨주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간도 하나 못 맞추나?" 라고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소금을 왕창 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뭔가를 누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가능한 것인데, 지금 우리가 에어컨 바람으로 인해서 시원한데, 하지만 저 에어컨을 만드는데 얼마나 실패가 많았고 기술자들이 땀을 많이 흘렸느냐는 것이다. 그런 타인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고생을 하면 할수록 남이 좋아진다는 사명감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힘이 들지만, 하지만 이렇게 자기가 고생함으로서 남들이 편해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남을 위해서 자기가 고생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인물인데, 자기가 구원을 받았으면 그냥 집에 편안하게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욕을 들어가면서 돌아다니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에 빚진 자이다" 라고 했는데, 즉 "나 하나 고생하면 너희들이 산다. 나는 빨리 죽고 싶지만, 너희들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다.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에도 말이다" 라는 것이다.

 

◈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만물의 찌끼와 같은데, 그것은 너희를 위함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도 "우리는 배가 고파도 너희는 불러라" 라고, 즉 "우리는 죽을 테니 너희는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도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곧 성령이 임했기 때문인데, 예수님이 그런 인생을 사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고마움 가운에서 마음껏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천국은 아무도 갈 사람도 없을 것이고, 아무도 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아무도 갈 수 없는 나라가 곧 천국이다. 그런데 천국의 주인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극락인데, 자기가 효도를 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이제 교재 42페이지를 보자.

** 베드로는 우리와 같이 A에서 B로 가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만의 역사가 되며, 소위 '베드로 노선'이 되는 겁니다.

 

◈ 베드로의 노선이 곧 마귀의 노선 !!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천국에 가서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다스려라" 라고 하니,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 그러면 우리들 중에서 누가 더 높습니까?" 라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지금 'A' 라는 자리와 장차 갈 'B' 라는 자리만 생각하지, 그 중간의 과정은 모두 빼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빼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 라고 하니,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A에서 B로 가는 노선을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자기는 A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즉 B로 가신다고 하니, 그게 멋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그것을 곧 바로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실선으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다 단절을 집어넣는데, 즉 "내가 죽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한다" 라고 말이다. 즉 이 세상과의 단절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우리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깔아놓은 노선이 결국 누가 한 것인가? 마귀가 깔아놓은 것인데, 즉 마귀는 십자가만 없으면 무조건 마귀의 노선이고, 반면에 십자가를 집어넣으면 무조건 마귀가 싫어하는 노선이란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성경내용이 좀 편집이 된 것 같습니다. ㅋㅋ)

(눅 22:23)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눅 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눅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십자가를 집어넣게 되면 인간의 이러한 가능성이 다 날아가게 되는데,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죽음이니, 그렇게 자기가 죽을 때 B를 품고 같이 죽기 때문에, 이러한 B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까지 가야하는가? 우리는 십자가까지만 가야한다는 말이다. 

 

◈ 바둑판 위의 개미들 !!

예를 들어서, 이렇게 바둑판이 있는데 여기에 개미가 몇 마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미가 여기서 여기로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렇게 바둑판으로 예를 들었는고 하니까, 여기가 교회이고, 여기가 집이고, 또한 여기가 직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는 당연히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평일에는 직장에 가고, 또 저녁에는 집에 온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 가는 것이나 직장에 가는 것이나, 또 집에 가는 것이나, 그것은 '나' 라는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바둑판을 수직으로 세우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개미들이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는데, 그리고는 한 쪽으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떨어지고, 직장에서도 떨어지고, 또 집에서도 떨어지고 말이다. 그렇게 떨어진 곳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자리에 가야만, 비로소 자기가 누군가의 희생 덕분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둑판을 수평으로 놓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에서도 자기 잘난 맛, 직장에서도 잘난 맛, 물론 집에서도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목사가 하도 야단을 치고 설치니까, 잠시 자기 잘난 맛을 감추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예 이 바둑판을 한번 세워보자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떨어지고, 직장에서도 떨어지고, 또한 집에서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를 가도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데, 그러니 우리는 세워진 바둑판에서처럼 뚝뚝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력이 아닌 십자가로 인해서 말이다.

 

◈ 며늘 아이야, 정말로 미안하다 ??

집에서 손자를 볼 나이가 되게 되면, 평소에는 아쉬운 소리를 하다가도 설이나 명절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식과 며느리가 오게 되면 세배를 받고 덕담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바둑판이 수평으로 놓여지면서 없던 권위가 생겨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자식을 "주 안에서 사랑하라" 라고 하는데, 즉 바둑판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훈계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이 해야하는데, 즉 "지금 내 나이가 이미 65세인데, 아직도 살아서 미안하다. 내가 정말 죄인이다. 며늘 아이야, 정말로 미안하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아마 용돈이라도 더 주지 싶은데, "아버님, 왜 이러세요? 우리가 앞으로 더욱 잘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그러면 분위기가 얼마나 좋고 화기애애하게 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작전을 사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로 개무시를 당하게 되니 말이다(ㅋㅋ).

평소에 우리가 애굽에서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게를 잡는 것인데, 그것 하나로 버텨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버리면, 자식들이 많이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 평소에 하던 대로 하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속으로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척을 하지 마세요"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순간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가야만 우리의 본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사탄아, 물러가라 !!

그러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시는 것은 그야말로 바둑판을 세우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베드로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개망신을 주신다는 말이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말이다.

베드로는 수평으로 놓여진 바둑판 위에서 온 동네를 자기 자랑을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그런데 그만 세워버리니까 완전히 자기는 쪼다가 되고 말았는데, "내가 물위를 걷고 어쩌고 했다" 라고 하면서 자랑하다가 말이다. 그야말로 졸지에 사탄의 두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이 무섭게 되면 이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주님이 한없이 무서워야하고, 주님이 한없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두렵지 않고, 오직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야 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주님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지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사람이 무섭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지금 세월호 사건 이후에 말조심을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유를 빼앗긴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그만큼 사람을 두려워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 공직을 놓치지 않으려고 말이다. 하지만 바둑판을 세우면 어떻게 되는가? 공직이고 뭐고 다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면, 그것이 곧 구원 !!

이제 마치도록 하겠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직업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되면, 그것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도를 닦는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데, 그분이 찾아오게 되면, 그분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희생 덕분에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그런 희생에 대해서 마음껏 감사하게 되는데, 그러한 역할을 지금 우리가 미리 앞당겨서 알게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이, 그런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가 찾아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살펴보았습니다. 남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지혜를 모독하고 무시하고 무관심하면서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변하지 않는 주님의 희생과 그 사랑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