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6 - 지혜와 죽음 본문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 - 지혜와 죽음
14,04,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잠언은, 첫째로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고, 둘째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셋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주십니다.
◈ 첫째로,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고 !! 사람들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데, 뭔가 감추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율법적 기능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도 잘 아는 이야기지만, 잠언을 지켰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잠언을 보게 되면 놓치고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잠언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행함으로서 천국에 간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아브라함은 행했는가? 믿었는가? 믿었는데, 어떻게 믿었는가? 행함 가운데서 믿었다는 것이다. 행해보니, 그 행함이 자기 본색을 자꾸만 들추어내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그 행함을 유도하신다는 것이다. 자꾸만 사건이 벌어지고 말이다.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임을 포기한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그 양반이 구약의 어떤 대목을 보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는고 하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하는 대목을 보고 자기는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 살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남이 자기를 죽이는 살인이 있고, 사람들은 이것만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남을 죽이는 살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관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런데 남이 자기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즉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만 배가 침몰해서 자기 자식이 빠져서 죽는다든지 하면 그야말로 발작을 하는데, 전 국민이 분노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남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이다.
◈ 아브라함아, 니 손으로 니 자식을 죽여봐라 !!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을 죽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고, 반면에 사람을 죽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데, 바로 이러한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즉 "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니 손으로 직접 죽여볼래?"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죽이는 심정이 어떠한지, 그것을 알고 난 다음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해라"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마구 분노를 표시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다. 즉 "믿으려고 하면 이렇게 믿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주님께서 만드신 어떤 사건 속에 아브라함을 집어넣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가? 즉 "니 손으로 니 자식을 죽여봐라.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 자기 목숨과 자기 재산 지키기 !! 그러니 인간의 본성은 자기 것을 애지중지하면서 사수하는데 있는데, 그렇게 자기의 소유를 지키고 자기 목숨을 지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24시간 하는 일이 그것인데, 자기 가족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는 것이란 말이다. 어떻게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할지 궁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목숨과 자기 재산 지키기, 그것 두 가지뿐이라는 말이다. 그것 말고 우리의 하루일과가 무엇이 더 있겠는가? 주부가 자기 가족에게 밥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가족의 목숨을 사수하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움직였다고 하면 '내 것 지키기' 라는 말이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로 나가시는데, 즉 "너희들이 너희들의 것 지키는 것은 잘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평생을 지키고자 애를 썼던 것을 너희들의 손으로 한번 파기를 시켜볼래?"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엑기스에 들어가는 출입구라는 말이다. 그러니 말이 쉬워서 신앙이지, 이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갓바위에서는 빌기만 하는 신앙이 되는데, 그러한 토속종교나 불교는, 물론 천주교도 그러하고 말이다. 마리아에게 꽂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습니까?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진짜 신앙은 무엇인고 하니, "니가 사수하고 있는 것을 니 스스로 파기시킬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하셨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자기 사랑하는 독생자를 하나님 손으로 직접 죽이셨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인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즉 "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에 들어가서, 우리가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는 말이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그것을 믿을 수가 있는데,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혹시 믿게 된다면,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흔적이고 증거입니다" 라고 강조하고 싶다는 것이다.
◈ 신앙생활은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 그러니 신앙생활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되지도 않는 것을 괜히 한다고 고생만 하지 말고 말이다. 신앙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신앙처럼 여겨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주께서 찾아오신 그 찾아오심을 계속해서 노출시키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건강진단을 받게 되면, 엑스레이 앞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키는데, 특히 여성분들은 유방암 검사를 받을 때는 부끄러운 것도 없이 모두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엑스레이가 아주 무서운 광선인데, 뼈까지도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건강진단을 다들 싫어하는데, 힘들고 무서워서 말이다. 그렇게 힘든 것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장식품이 된다는 것이다. 명품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다 필요가 없고, 엑스레이를 가지고 찍어서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중심을 찢어버리면, 거기서 시커먼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노출되는데, 즉 "나의 행함은 애당초 받지를 않는구나" 라고 말이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닌데, 아예 받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행함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행함을 통해서 신앙의 핵심으로 아브라함은 초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마치 늪에 빠지듯이 말이다. 자기는 땅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발을 디뎌보니 그만 푹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에,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에 아브라함이 먼저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빠진 장소가 나중에 아브라함의 자손에 의해서 십자가로 구체화가 되는데, 그 이전부터 아브라함은 사람에게 있을 수가 없는 일에 빠지고 말았는데, 즉 "니 손으로 니 자식을 죽여라" 라는 것에 말이다. 그것도 자기의 사랑하는, 백 살에 낳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말이다. 그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신앙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천국은, 내 행함이 아니기에 좋아라 !! 그것이 곧 천국인데, "이제는 내 행함과는 상관이 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구나"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행했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의미가 없어서 좋아라" 라는 말이다. 혹은 "내 행함이 내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좋아라' 라고 하면 좋지 싶은데,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그것이 자기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으니, 그것이 너무나 즐겁다는 말이다. 감사하고 말이다. 죽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살아도 구원을 받지 못하니 더욱 더 즐겁다는 말이다.
◈ 첫째는 인간의 본색을, 둘째로는 그 한계를 !! 그래서 잠언은 첫째로 인생의 본색을 드러낸다고 할 수가 있는데, 본색을 이야기하니 겁나는데 말이다. 즉 감추고 있는 것을 엑스레이로 찍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첫째로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고, 둘째로 그 한계를 드러낸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이 잠언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잠언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그것은 바로 잠언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이 잠언서를 주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엑스레이를 찍게 되면, 그것을 담당하는 의사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참 착하네요" 라는 소리는 하지 않고, "건강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뼈가 참 잘생겼네요"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너무 착하고 성격이 정말 좋네요" 라는 소리를 엑스레이를 찍어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자야, 이 해골들이 살겠는가?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들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에스겔을 보고 "인자야, 이 해골들이 살겠는가?" 라고 했을 때, 에스겔이 어떤 해골을 하나 들고서는 "하나님, 이 해골이 참 착합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해골이 너무 예쁩니다. 여기에 리본을 달아서 선물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해골은 그 누구의 해골을 보더라도 어떠한가? 성철 스님의 해골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해골이나, 또한 한경직 목사의 해골이나, 그 누구의 해골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망측하고 흉물스러운 것이지, 거기에서 어떤 선한 것들이 그냥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에스겔을 하필이면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자인 에스겔도 같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도 동일한 시선으로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그렇게 보고, 살려달라고 하는 그 부모들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 탈출불가능 !!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에 '일상과 죽음' 이라는 글을 올려놓았는데,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해놓고, 그렇게 배가 침몰하고 하니까 인간적인 모습들이 다 나온다는 말이다. 배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아이들을 보고 "참으로 불쌍한 아이들이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제 귀에는 어떻게 들리는고 하니, "우리 아이는 빠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라고 들린다는 것이다. 제가 삐딱하게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것이 깔려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그 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는데, "그 배만 빠진 게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지옥에 빠져있다"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탈출불가능'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어떻게 원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달음박질을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오직 불쌍히 여기심으로 인해서, 전적으로 주님의 고유권리로서 탈출시킬 사람만 골라서 탈출을 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인데, 바로 그렇게 될 때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바다에 빠진 자들을 보고 "아니, 불쌍해서 어떻게 하지?" 라고 하지 말고,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건질 자만 건지고, 건지지 않을 자는 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에게는 그만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잠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 다시 정리하면, 이 잠언서는 첫 번째로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꾸만 그런 본색을 감추면서 살아가니 말이다. 그러면 그 본색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의 행함으로 뭔가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자기 한계에서 말이다. 그리고 세 번쩨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잠언서인데,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우주선에 모선이 있는데, 거기서 분리가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품속의 독생자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서 이 땅으로 오게 되는데,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 도대체 구원자가 어디에 있지? '니고데모' 라는 어질고 아주 착한 사람이,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는 도사인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구원자가 왔음에도 불고하고, 엉뚱한 곳에서 구원자를 찾고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구원자가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을 살려달라고 철야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구원자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구원자가 뭐라고 하는가? 자기 목숨을 사수하면 잃게 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자식을 살려줄 구원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러니 인간들이 평소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엉뚱한 구원자를 찾고 있고 또한 믿고 있는지 모르는데, 바로 그것을 신명기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탐심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잠언서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31페이지로 넘어가서, 여기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는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잠언서를 계속해서 하지 않고 이렇게 신약성경을 살펴보는고 하니까, 바로 여기에 보면 무엇이 나오는가? '지혜'가 나온다는 것이다. 교재 31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불의한 청지기와 토라에 대해서 우수한 실천력을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비교하시면서 누가 진정한 지혜자인가를 묻습니다. 1번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 2번은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 3번은 토라는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 4번은 불의한 청지기인데, 여기에서 몇 번이 정답입니까? 4번이 정답입니다.
◈ 불의한 청지기와,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 !! 만약에 어떤 사장이 자기 회사의 직원들 가운데서 이러한 청지기가 있다면, 그야말로 도둑놈을 직원으로 데리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토라는 율법인데, 이러한 토라, 즉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불의한 청지기를 비교하는 가운데 무엇이 나온다는 말인가? 거기서 바로 지혜가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1번이 율법에 정통한 사람인데, 그들은 잠언을 그야말로 달달 외운다는 것이다. 잠언이 구약의 지혜문서로서 율법이니 말이다. 그리고 2번은 그것을 잘 알뿐만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인데, 또한 3번은 잠언은 몰라도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4번이 무엇인고 하니, 불의한 청지기라는 것이다. 착한 청지기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몇 번이 정답인가? 정답은 4번인데, 바로 그렇게 4번을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끄집어내셨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이 아침이지만 약간은 복잡하게 나가보겠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불의한 청지기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고 지혜로우냐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그렇다면 여기서 왜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로운 자로 등장을 하느냐는 말이다.
◈ 인간은, 대조되고 대립되는 가운데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대조되고 대립되는 다른 요소를 겨냥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가 결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대조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이 곧 의로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대조', 혹은 '대립'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조금 어렵더라도 참아주셔야 하는데 말이다. "인간 존재는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대립요소와 더불어서 존재한다" 라고, 그렇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너는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시면, 마치 그것이 자기 혼자 천국에 가는 것으로 들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 때는, 그것이 바로 "너는 천국에 가고, 저놈은 지옥에 간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지옥에 가는 사람과 천국에 가는 사람을 대비시키는데, 바로 그렇게 대비를 시키는 틈에 무슨 기준이 작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 그 틈을 주목하라는 말이다. "너는 구원을 받았어" 라고 하면 우리는 좋아서 휘파람을 부는데, 그래서 "정말 신난다. 나는 구원을 받았어.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살아갈 거야.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내 멋대로 해도 괜찮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무슨 모습인가? 주님께서는 맞은 편에 일부러 대립의 요소를 깔아놓았는데, 그런데 그만 그것은 날아버리고 독자적인 요소로 회귀하고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누구는 천국에 보내고, 누구는 지옥으로 보내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십자가의 피 용서인데, 그런 피 용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양쪽을 대립시켜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저는 천국에 갑니까?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해서, 예수님이 "응, 천국에 간다" 라고 하면, "그래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에게로 돌아와 버리면, 그만 그 기준인 틈은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새생명 운동을 아세요? 그런 대표적인 사조가 무엇인고 하니, 소위 '새생명 운동' 이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를 잊어버리자고 하는, 그런 태도라는 말이다. 십자가는 그만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곧 예수를 믿는 사람다운 모습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아마 새생명 운동을 들어보았지 싶은데, 그래도 나름 한국교회를 비판한다는 인간들은 다 여기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대조해야하는 기준이 부각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이 강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제대로 된 교회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독자적으로 나선 것인데, 하지만 그런 자들은 한번도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새생명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역설적으로 새생명을 운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인데, 즉 KTX를 타고 서울에서 출발해서 대전을 지나서 대구에 왔으면 이제 대전은 그만 잊어달라는 것이다. 이제 부산만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심사가 자기 구원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 99프로가 이러한데, 정말 구원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렇고 말이다. 자기에게만 꽂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하는 것도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인데, "주께서 구원하십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주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은 없고, 오로지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줄 때만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주어 자리에 주님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건방지게 자기가 끼어 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구원의 주도권은 전혀 우리에게는 없는데, 물론 우리는 구원이 되고 싶은데, 하지만 주도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당연히 천국에는 가고 싶지만, 하지만 그 주도권은 주님이 쥐고 계신다는 말이다.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기 잘남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나쁜 청지기는 착하다 !!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겠는데, 지혜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의 지혜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지혜 자체를 설명하면서 "니가 지혜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에 비해서 너를 지혜가 있는 자로 만들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가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데, 그냥 쉽게 나쁜 청지기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나쁜 청지기는 착하다" 라고 되는데, 참으로 희한한 공식인데 말이다. 아가씨들 가운데 보면 다음과 같은 독특한 취향을 가진 자들도 있는 있는데, "나는 나쁜 남자가 좋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거칠게 다루어줄 때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거친 남자를 만나서 호된 맛을 따끔하게 보면 정신을 차릴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에게 고분고분 잘해주는 남자보다도, 자기를 험하고 거칠게 다루어줄 때, 바로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당신의 나의 동반자' 라는 노래에도 보면 그런 가사가 나오는데, 즉 밀고 당기고 하면서 거칠게 다루어줄 때, 그것이 좋다는 것이다. 논리가 참으로 그러한데 말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가? 잠언, 즉 지혜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동안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것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너무나 특이하고 낯선 하나님 !! 그것이 잠언서에서, 첫째로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고, 둘째는 우리의 한계를,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너무나 특이하고 낯설고 생소한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하나의 예를 든 것이, 지혜가 무엇인고 하니, 나쁜 청지기와 착한 청지기, 그러한 논리를 가지고 찾아오시니, 지혜의 도사인 바리새인들이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대로, 즉 악하면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회사에서 돈을 횡령하는, 그런 악한 일을 장려하고, 그러한 것을 유포시키는 쪽이냐고,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소속이 달라요 !! 그러면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는데,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가 이 시대의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할 때는, 이게 참으로 난해한 문제인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가 속해있는 소속이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속한 소속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따져서 나쁘고 좋고 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되는데,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우리 개인의 행함과 자질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 나쁜 짓을 많이 했지. - 아니오.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 어이쿠, 착하구나" 라고 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너는 이미 지옥에 속한 소속인데, 새로운 머구리에, 여기에서 '머구리' 라는 것은 옛날식 잠수부를 의미하는데, 잠수복이 마치 우주복과 같이 생겼는데,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와서 뭔가 덮어씌우는, 그렇게 우리를 옴팍 뒤집어씌우는 머구리와도 같은, 그야말로 쇠로 된 갑옷과 같은 것이 와서 불의한 청지기를 둘러싸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 물론 불의한 청지기는 나쁜 청지기가 분명히 맞는데, 하지만 그것을 덮어버릴 지혜가 의로운 지혜가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한 머구리가 찾아오지 않은, 즉 천국의 용서하심이 찾아오지 않은 바리새인들보다도, 결국은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의롭고 지혜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 가만히 있어봐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우리의 멱살을 잡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씀을 주었는데도 똑바로 못하지? 이 나쁜 놈아!" 라고 하면서 우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어봐" 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옴팍 뒤집어씌운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여기에 파리가 한 마리 앉아있다고 하면 우리는 파리채를 뒤로 감추면서 속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파리야, 거기에 가만히 있어" 라고 하는데, 만약에 파리가 그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우리는 나쁜 사람이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죽이려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 정도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인데, 즉 "가만히 있어. 행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가? 하늘에서 내려온 머구리로 우리를 덮어 씌어서 천국으로 보내버리신다는 말이다. "가만히 있어. 행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말이다. "주여, 제가 몸이 아픕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데 왜 이렇게 몸이 아픕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거지로 살아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시면서 언약으로 때려잡아서 낙원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부자는 지옥으로 보내고 말이다. 그렇게 치는 파리채에 지혜의 덩어리가 묻혀 있는데, 지혜가 말이다. 올림픽을 할 때 사격에 보면 클레이 종목이 있는데, 접시를 하늘로 날려보내면 총으로 쏘면 접시가 깨어지는데 말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총으로 맞아서 깨어질 때, 그렇게 총을 맞은 사람만이, 물론 총을 맞아서 가슴이 뚫렸다는 여자 가수도 있는데 말이다(ㅋㅋ). 바로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데,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까 엑스레이를 찍는다고 했는데, 온갖 장식을 다하고 폼을 잡고 병원에 갔는데, 그런데 그만 옷을 다 벗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추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폭로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잠언서 자체가 총알이 되어서 우리 깊숙한 곳에 그만 박혀서 우리 자체를 파괴시키고 해체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서가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왕창 다 깨어지고 깨어져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저렇게 유리창을 깨는 것도 복음적인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잠언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깨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일리지로 쌓아놓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처럼 말이다. 자기 착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깨어진 것을 자랑해야지 왜 착한 것을 자랑하느냐는 말이다. 깨어진 것이 없어서 그러한가?
◈ 깨어지지 않는 마리아와 마르다 !!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나사로에게 갔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그래서 주님에게 마구 대어든다는 것이다. "진작에 왔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이제 왔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주님이 우시는데, 즉 "지금까지 내 말을 어떻게 그렇게 헛되게 들었는가?" 라는 것이다.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순재도 그런 헛소리는 하지 않는데(ㅋㅋ), 주님이 말씀을 하셔도 아무도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지키라고 준 것이 결코 아닌데, 오히려 날마다 깨어지라고 주신 말씀이란 것이다. 즉 "너는 이미 죽은 자로서 산다. 그것이 정답이다" 라는 것이다. 사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십자가 이후에 산 자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의 방향은 죽는 쪽이고, 우리는 사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방향이 그러한데, 이미 죽은 데서 살아난 식으로 우리를 다루신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주님의 사랑도 전혀 몰랐는데, 우리는 매일 매일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산 자로 간주하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죽음을 경유해야, 비로소 주님이 사랑하는 그들이 진정 살아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엄마, 나도 같이 가고 싶어 !!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하시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래, 니가 복이 있도다" 라고 해놓고,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그것을 위해서 나는 십자가에 죽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주여,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베드로는 지금 같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갔다가 오시는데, 그 결과물이 곧 베드로인데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그렇게 갔다가 오셔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싶은데,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가 시장에 가면서 "너는 집에서 놀아라" 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엄마, 나도 같이 가고 싶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놈아, 내가 시장에 빨리 갔다가 와야 맛있는 잡채를 해줄 수가 있어. 그러니 너는 여기 집에 있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영생은, 주님이 갔다가 와야 !! 그러니 영생은 주님이 갔다가 와야 주어진다는 것인데,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그 뒤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영생을 아는 자는 오직 예수님께서 기도한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니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크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 전체가 애초부터 미쳐있었는데, 자기는 죽지 않고 살려고 하는데 미쳐있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가운데 오직 성도만이 아는 것은, "나는 이미 죽었는데, 오직 주께서 살려주신 자만이 산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든지 살려고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들을 왜 죽였는가?" 라고 따지는데, 그들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가 평소에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다치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라고 말이다. 그것을 아예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살아왔으니, 거기에 대해서 동료의식을 느끼면서 "주님, 저 아이들을 왜 죽입니까?" 라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싸우지도 않았고 죄도 없는 아이들이 왜? 여기에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이번에 진도 앞 바다에서 죽은 그 고등학생들이 기껏해야 나이가 17살, 18살인데, 그들이 누구와 싸우다가 죽었는가? 아니면 어른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었는가? 살아온 세월이 적으니 당연히 지은 죄고 적다는 것이다. 즉 싸우지도 않았고 죄고 없는데 죽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한창 공부에 정신이 없을 때인데, 그들이 무슨 도박을 했는가? 아니면 도둑질을 했는가? 기껏해야 컴퓨터 오락정도인데, 그런데도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공식에서 비워있는 곳을 채워야하지 않겠는가? 술을 마시고 누구와 싸운 것도 아니고, 죽을 만한 죄도 없는데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죽었는가? 즉 하나님이 왜 죽이셨느냐는 말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 대목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너희들의 공식은 틀렸어 !! 만약에 성폭행범들과 연쇄 살인범들을 안산 교도소에서 제주 교도소로 이감하기 위해서, 너무나 흉악범들이라서 제주도로 보내려고 배를 태워서 가다가 진도 앞 바다에서 빠져죽었다고 하면, 아마 모르기는 해도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싶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한 공식에 맞으니 말이다. "남을 그렇게 죽이더니만 천벌을 받았구나. 죄를 그렇게 지었으니 죽어서 마땅하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공식이 성립하는데, 그런데 이번에 17살을 먹은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그만 죽었으니 이 세상 공식에 맞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공식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즉 지혜가 없는 인간들에게 있는가? 지혜를 모르는 인간 본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자들에게 "너희들은 지혜가 없다. 너희들의 공식은 틀렸어" 라고 말은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너희들이 한번 이야기를 해봐라"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나도 몰라" 라고 하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 애초부터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 그래서 이런 이들이 있어서 제가 수십 년을 강의했는데, 즉 "애초부터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밖에 모르는고 하니, "싸우지도 않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인데, 그런데도 그분은 죽으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란히 따라가면서 "너희들이 생각한 이런 죽음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선악적 사고방식의 죽음이고, 즉 "선하면 살고 악하면 죽는다" 라는 말이다. 사실 이런 선악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죽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절대적 원칙이라고 어제 낮에 설교했는데 말이다.
◈ '죽지 않음'이 도리어 죽음을 당해 !! 그러니 그런 선악이 아니라 생명나무가 죽음의 세계에 찾아올 때는, 생명은 '죽지 않음' 이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죽지 않음이 이 세상에 왔을 때는 죽어야하는 인간에게 도리어 죽음을 당하는 식으로 생명의 생명이 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생명이다"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땅에 오셔서 잘난 우리 인간들에게 얻어맞아서 죽는 것이, 소위 지혜가 있다는 자들에게 얻어맞아서 죽는 것이 곧 생명이었느니라"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생명이 같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는 자를 대신해서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인간은 죽어서 마땅한데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이것이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유발시켜서 천국에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원칙을, 이런 공식을 주님께서 준비하셨는데, 그런 기쁜 소식을, 복음을 우리에게 집어넣어 주셨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믿는 자가 신앙인인데, 따라서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보아야 하는데, 즉 "싸우지도 않고 죄가 없지만, 그렇게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들 가운데서 성령이 임해서 주님을 믿은 자들은 죽어도 살고, 그 날로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말이다. 신앙인은 바로 그러한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여기는 바닷속 100미터 !! 그러면 배를 타기 이전에 교회에 가야하는가? 배를 타기 이전이 문제가 아니라, 평소에 배를 탔다고 여기고, 그래서 물에 빠졌다고 여기고, 세상이라는 지옥 속에 있다고 여기고, 지금 여기가 바닷속 100미터라고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주께서 날마다 생명과 호흡과 단비와 햇빛을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그렇게 주님이 매일같이 살리고 죽이신다는 주님의 동행하심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앙이 이 세상에서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는 소속으로, 그렇게 속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 알게 되었는데, 즉 "지혜는 소속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소속을 말해주는 것이 곧 지혜라는 말이다. "나는 지혜롭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지혜에게 속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지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에스겔 이야기를 !! 조금 전에 한 에스겔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에스겔이 해골 골짜기를 구경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미 에스겔은 그 소속이 여호와 소속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명에 소속이 되니 이러 저리 같이 다니면서 구경을 한다는 것이다. 제가 어제 에스겔 16장을(37장?) 이야기하면서, 에스겔은 이미 용서를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니가 용서를 받아야될 이유를 내가 알려줄게" 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같이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낱낱이 다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 우리는 구두쇠 스쿠루지 !! 여러분이 어릴 때 학교를 다니면서 다들 읽었지 싶은데, 유명한 외국의 단편소설인데 말이다. 한글로 된 제목이 아마 '크리스마스 송가' 라고 되어있지 싶은데, 그게 다름이 아닌 바로 스쿠루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스쿠루지가 알다시피 구두쇠인데, 저는 어릴 때 구두에다가 쇠를 박는 사람이 구두쇠인줄 알았다는 말이다(ㅋㅋ). 그 구두쇠인 스쿠루지가 자기가 죽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꿈속에서 말이다. 죽어 지옥에 가서는 쇠사슬을 질질 끌면서 자기 행동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스쿠루지가 춥다고 몰래 물건을 취하는 자기 모습을 보고 "야, 이놈아!" 라는 대목이 기억나는데 말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스쿠루지처럼 우리를 다루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이미 구원을 받고서 천국에 간 사람으로 확정을 지어놓고는, 다시금 스쿠루지처럼 우리가 한 행동들을 살펴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4살 때, 10살 때, 22살 때, 40살 때, 60살 때, 80살 때,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살펴보면 우리는 어떠한가? 오직 자기 잘난 것만 자랑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남이 소속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 소속이 아닌 개인적인 자랑, 즉 "나는 이렇게 잘났는데 너는 왜 못났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평생을 스쿠루지처럼 행동을 하면서 살아왔음을 보여줄 때, 그것이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죽음이 아닌, 생명을 대비해야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문제가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죽은 사람들에게는 보상금을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어린 학생의 목숨을 어떻게 돈으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회갑기념으로 여행을 간 연세가 많은 분들의 경우에는, 그 자식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속으로 싱글벙글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효도관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지 모르니, 죽음을 대비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에 갈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하는데, 즉 이미 우리는 생명을 얻었는데, 물론 태어날 때는 이미 죽어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편히 쉬는 것, 잠자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인식이 이렇게 툭툭 터지는 대형사건을 통해서 대조가 되는데, 즉 저쪽집단과 신앙집단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말이다. 그것을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데, 그런 은혜를 주님이 주신다는 것이다. "아하, 이렇게 다르구나" 라고 깨닫게 하시도록 말이다.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고 가지 않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기반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근본자체가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이런 것이 결코 호들갑을 떨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고맙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에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살인행위가 너무나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그것이 곧 지혜인데 말이다.
◈ 주님께서 귀하다고 하시니 !! 이게 로마서 8장의 이야기인데, 즉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아들을 죽여버리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행위, 바로 그런 행위 속에 우리가 뛰어들었을 때, 과연 우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우리를 볼 때는 가치가 없는데, 주님은 가치가 있다고 하시니, 우리는 고귀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피' 라는 책의 뒷부분에 보면 '고귀한 신분' 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전혀 귀하지 않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소중한 왕자라는 것이다.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피가 묻어서 그러한데,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말이다. 즉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피로 인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주신 생명을 자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31페이지를 보자. ** 이 불의한 청지기는 횡령한 사람이에요. 회사에서 쫓겨날 기미가 보이니까 장부를 조작했습니다. 퇴직할 때는 대비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장만해서 자기 앞가림을 시도한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토라에 정통한 바리새인들보이 이 시대에 더 지혜롭다는 겁니다.
◈ 인간은 코앞의 이익에 몰두해 !! 이러한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코앞의 이익에 몰두한다" 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세계평화가 어쩌고 하는 것은 심심할 때 하는 소리이고, 인간이 하는 행동들은 자기 코앞에 있는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나중 여유가 있을 때는 국제평화를 운운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기가 살아가는 살 궁리에 전념하게 된다는 말이다. 세월호에서 시신들을 인양하는 것을 TV를 통해서 보면서도, 자기가 음식을 먹다가 포크를 떨어뜨리게 되면 당장 어떻게 하는가? TV를 보는 게 아니라 떨어진 포크를 줍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크를 주울 때는 TV를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인간이란 것이다. 세계평화가 어떻고, 하나님께 영광이 어떻고 하다가도, 하지만 인간은 실제로 백 날을 그러한 소리를 해도, 당장에 포크가 없으면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에게 딱 필요한 일만, 그것을 우선 순위로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너무 예쁘게 보면 안 되는데, 인간은 자기가 신앙이 있던 없던 간에, 성령을 받든 받지 않든 간에, 자기 코앞에 있는 일만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받는 것인데, 행동을 똑바로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불의한 구조 속에 놓여있는 인간 !!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 "왜 인간이 불의한가?" 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의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특별히 나쁜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곧 나쁜 짓이 되는, 그러한 세상구조 속에서 우리 인간은 몸부림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그게 회사의 입장에서 그만 횡령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회사에서 쫓겨나면 당장에 거리로 나가서 빌어먹어야 할 판인데, 그렇게 전혀 명예회복도 되지 않는 입장에서, 자기 앞가림을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최대한 해쳐먹어서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만 생각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불의한 청지기는 가장 지옥다운 모습을 !! 바로 그러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군상,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옥과 같은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가 잘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의한 청지기는 이 세상이 왜 지옥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신다는 것이다. 가장 지옥다운 모습을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바리새인들은 무엇인가?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고,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에 모델케이스처럼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것이 선과 악의 구조에서는 굉장히 선한 쪽에 속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의한 청지기는 그야말로 얌체와 같은 나쁜 쪽에 속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나쁜 쪽에서 쳐들어 올라가서는 선한 쪽까지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내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의한 청지기는 "나는 잘했습니다" 라고 할 수가 없는데, 주님은 지혜롭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나의 앞가림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놈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자가 바로 구원받은 자라는 것이다. 소속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경우에도, 남의 자식이 나쁜 짓을 하면 욕을 하겠지만, 하지만 자기 자식이 그렇게 하면 뭐하고 하겠는가? "뭐, 이유가 다 있어서 그랬겠지. 어쩔 수가 없어"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냥 입 닦고 나오세요 !! 제가 얼마 전에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기가 어떤 단체에 손해를 끼치게 되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기에, "어쩔 수가 없지요. 그냥 입 닦고 나올 수밖에 없지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ㅋㅋ). 상담을 하면서, "저 나쁜 놈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모른 척을 나오라고 했다는 말이다. 손해를 끼쳤는데, 도저히 자기로서는 갚을 길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혼을 할 사람이 저에게 와서 상담하기를, "목사님,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라고 하면,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미 그 사람은 이미 이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저에게 왔기 때문에, 제가 그 사람을 보고 "이혼을 하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미 마음을 먹고 왔으니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어떤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닌데, 그것을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상하게도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입에 달달 외우면서도, 실제로 하는 행동을 보면, 자기 코앞에 떨어지는 이익에 따라서 행동을 해놓고는, "이것을 잘했을까? 못했을까?"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미친 세상 !! 우리는 "이번 사고로 희생을 당한 학부모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희화화시킨다든지 그 어떤 경우에도 웃을 수가 도저히 없지. 그 슬픔에 같이 동참해야지" 라고 하게 되는데, 이번에 SBS 기자가 방송을 하면서 약간 웃었다고 해도 경고를 먹었다고 하는데, 전혀 웃지도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상이 완전히 미쳤는데 말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일만 생각하는데, 제가 왜 지금의 사회형태를 나무라는고 하니, 그것이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는 척을 하면서 자기 본색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놀리고 해도 안 되는데, 그것도 역시 자기 자랑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께서 하시는 이 모든 일이, 그게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주님에게는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날마다 주님이 살려내시는 은혜의 필연성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분위기는, 그런 감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제일 안타깝다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원래 그렇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들도 역시 그러하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미쳤다' 라고 했는데, 왜 감사가 사라져야 하는가? 주께서 여전히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는데 말이다. 물에 빠져서 죽은 아이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주님이 살려주시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도 주님이 여전히 살려주시고 있는데 말이다. 왜 거기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잘 죽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죽어야 마땅한데, 살려주셨군요" 라고 하는 감사가 항상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시대, 즉 예수님 시대는 악한 시대입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주인의 돈을 횡령한 사람이 성경말씀을 맡아서 가르치는 너희보다 더 지혜롭다는 거예요. (눅 16: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 악한 세대 !! 그러니 이러한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어디까지 나가시는고 하니, 세대를 이야기하시는데,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소속인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소속을 생각한 적도 없고, 오로지 자기 앞가림만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까지 합쳐서 '악한 세대' 라는 것이다. 즉 악한 세대에서 불의한 청지기는 악한 세대다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혜는 기존의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지혜와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 바깥 세상에서 오신 예수님 !! 이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이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자라고 함으로서, 불의한 청지기를 무엇과 동일시하는고 하니, 즉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그 악한 세대를 지목하는 나 예수는 바깥 세상에서 왔다" 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바깥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세대가 악한 세대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예수님은 지금의 이 악한 세대에 속하면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서 악한 세대라고 해야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만 그런 언급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평가할 만해서 평가를 하신다는 것이다.
◈ 불의한 청지기와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악한 세상 !!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구원을 받아야 돼"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주님이 된 구원자이기 때문에 비로소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보고 지혜롭다고 하시는 것은, 그 불의한 청지기가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요러한 면면과 바깥에서 오신 예수님 자신을 이 세상에서는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스스로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불의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처신과, 그런 말씀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곧 "너희가 속한 세대는 그 소속이 악한 세대이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 바깥에서 온 심판주 !! 이제 풀렸지 싶은데,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이 보기에 불의한 청지기는 때려죽어야만 되는 것처럼 나도 너희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하지만 너희들은 사람을 잘못 골랐어. 내가 바로 너희들을 악한 세대라고 지목할 수 있는, 그런 바깥에서 온 심판주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와 이 세상의 만남인데,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전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의 말씀이 아니라 바깥에서 온 말씀임을 알고, 그리고 나서 이 잠언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온 말씀임을 말이다.
◈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 잠언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즉 "모든 일을 내게 맡겨라. 그러면 너희가 경영하는 것을 이룰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 안다고 해놓고 다시 설명을 하려고 하니 제가 또 부담이 되는데, 여러분이 이해를 못할까 싶어서 말이다.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렇게 "모든 일을 여호와에게 맡겨라. 그러면 너희가 하는 일을 이룰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출발을 이 지상에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언서는 뭐라고 했는가? 잠언서는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고 한계를 드러내는 누구의 말씀이란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인데, 그런데 같은 잠언을 놓고 예수님은 어디서 말씀하시는가? 이 악한 세대의 바깥에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모든 일을 여호와에게 맡겨라. 그러면 너희가 하는 일을 이룰 것이다" 라고 하면, "너희가 하는 일을 이룰 것이다" 라는 것에 그만 뽕 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루고 싶어서 "제가 맡기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선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잘못인데, 왜냐하면 "제가 맡기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노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있는 절차에 과감하게 뛰어들기로 결심을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과 우리가 충동을 일으키면서 !! 하지만 원래의 이 말씀은 지혜에서 온 것인데, 그러면 이 말씀은 누가 먼저 뛰어든 것인가? 예수님이 뛰어든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뛰어들어서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내가 원하는 소망을 이루리라"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말씀을 놓고 예수님과 우리가 충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바로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본색이 드러나고 한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님에게 "저리가세요. 나는 내 소원을 위해서 이 말씀을 이용하겠어" 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는 말이다. 특히 여기에 '경영'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혹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목사님, 여기 흰 봉투입니다 !! 그것도 목사가 심방을 하면서 "집사님, 사업을 하지요? 여기 잠언서에 보면 '너의 행사를 맡기라. 그리하면 경영하는 것을 이루리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믿습니까?" 라고 하면, 봉투를 내놓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ㅋㅋ). 같이 간 권사들도 옆에서 "그리될 줄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장단을 맞추어주고, 그렇게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속된 이 악한 세상과, 주님이 소속된 세상이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는 그 틈바구니에서, 비로소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나오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도 그렇고,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는 말이다. 지금 자기가 당장 사업을 벌여놓았는데, 그러면 그 코앞의 사업이 중요하지, 물에 빠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남북통일도 그렇고 말이다. 포크를 놓치면 당장에 그 포크를 줍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자기가 이렇게 돈을 수억이나 투자를 했다고 하면, 그 투자한 것이 그래도 은행이자보다는 많아야 하는데, 그러니 그것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라고 하니,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고 하면 가르쳐주겠는데, 교회가 어떤 단체인지를 말이다. 각자의 소원들을 이루기 위해서, 그것을 여호와에게 맡기려고 온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의 최종 도달점은 천국인데, 왜냐하면 이 말씀을 예수님이 몽땅 다 가지고 가서, 예수님 홀로 아버지에게 맡기고, 예수님 홀로 다 이루어놓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렇게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말씀을 그냥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흙에 속한 형상이 아닌 하늘에 속한 형상이 되어서, 아픈 것도 없고 눈물도 없는 그곳으로, 우리는 공짜로 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의 이 말씀을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루셨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그 세계에 합류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믿음 이전에 이 말씀을 얼마나 이용을 해쳐먹었는지 모르는데, 이 세상에서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고 자기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서 말이다. 코앞에 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배만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액자로 만들어서 집에 걸어놓고 하는데,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라고 말이다. 우리 모임의 경우에도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서 집사님의 집에 가보면 액자가 있는데, 그런데 걸려있는 말씀이 다르다는 것이다. "날마다 죽노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다(ㅋㅋ). 하지만 이런 말씀의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만들어놓아도 팔리지도 않고 말이다. 왜 팔리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신앙이 없다는 것인데, 교회는 다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절에 가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잠언서의 말씀을 통해서,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날아가는 접시가 총에 맞아서 박살나는 것처럼, 그렇게 깨어지게 될 때, 그런 깨어짐을 통해서 생명이 다시 한번 손에 잡혀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32페이지를 보자. ** 지혜란 의인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를 논하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말은, 곧 아무도 지혜로운 자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왜 지혜로운 자가 없는가? 그것은 이 세상이 곧 소속이 음란하고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말이다. 같은 세대에서는 한 통속이라는 것이다. 같이 놀아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서 오셔서 우리를 이 세대에서 끄집어내신다는 말이다.
◈ 바로왕의 입장에서 출애굽은?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알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애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월절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애굽나라의 모든 맏아들을 다 죽였다는 말이다. 우리가 유월절에 대해서 자꾸 이스라엘 쪽에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바로왕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러분은 바로왕의 입장에서 유월절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열 번이나 당해놓고도 마지막에 어린양으로 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로 갔을 때, 왜 바로왕이 군대를 동원해서 히브리인들을 몰살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심정이겠냐는 것이다. 그 이전에 애굽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온 집안의 맏아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러니 결국 인간에게 남는 것은 복수인데, 보복이고 분노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분노는 애초부터 누가 일으킨 것인가? 악마가 그렇게 한 것인데, 즉 인간과 악마는 한 편이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편이 된다는 것이다.
◈ 신에게 복수를 !! 출애굽 때 군대가 따라온 것은 복수를 하기 위함인데, 누구에게 복수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신에게 복수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신에게 보란 듯이 복수하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말이다. 그러니 출애굽에 있어서 이스라엘만 보지 말고 양쪽을 다 보자는 것이다. 그쪽 심정을 이해하고, 그쪽의 강퍅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퍅하니 나쁘다고 하지 말고,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품고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 밑바닥에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내 모양이 이렇습니까?" 라고 하는 복수심과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죽으라면 죽지요 !! 제가 가락교회의 김 집사님을 볼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이가 이제 50인데, 20대부터 아주 심각한 당뇨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당뇨수치를 묻게 되는데, 그런데 그분은 언제나 싱글벙글이고 얼마나 침착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죽음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는데, "죽으라면 죽지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 제가 그분을 이렇게 칭찬하는고 하니, 혹시 복수심이나 보복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서 살펴보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나이가 59도 안 되었는데 자기를 죽이니까 말이다. 사업은 벌려놓았고, 자식은 두 명이나 있고 말이다. 그리고 처갓집도 자기가 챙겨주어야 하는데, 그리고 중국에는 본래 아버님이 있어서 생활비를 꼬박꼬박 챙겨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신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싶은데, 그런데 집사님에게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는데, 그 정도가 되면 충분히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지금 이 나이에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라고 할 수 있지 싶은데 말이다.
◈ 십일조를 하면 창고가 넘친다 ??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신학교에 가고 목사가 되는 것도 복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열심히 헌금을 하고, 또한 십일조도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제 창고가 이렇게 텅텅 빌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신에게 복수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십일조의 경우에, 그 십일조의 말씀은 누가 가지는가? 예수님의 지혜로 가지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십일조를 하면 창고가 넘친다" 라고 하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가지려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아서 말인가? 자기 창고가 넘친다는 것을 노리고 십일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도 그 십일조를 잡았는데, 창고가 넘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의 창고를 의미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십일조를 함으로서 지상의 창고가 넘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수평적인가? 수직적인가?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왜 수직적으로 하지 못하고 수평적으로 퍼지느냐는 말이다. 즉 "내가 여기에 있다. 십일조를 한다. 내 창고가 넘친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 지상에 붙여서 자꾸만 옆으로 퍼지는데, 지평에 들어 붙어서 말이다. "기도를 했더니만 교인이 50명에서 500명이 되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옆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옆으로 퍼지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밤에 니 영혼이 낙원에 가리라" 라고, 그렇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어떻게 하는가? 옆으로 퍼지는 것을 가지고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더욱 더 오래 살려고 말이다.
◈ 날씬하게 해서 위로 솟구치자 !! 하지만 주님이 돌아가실 때 그 연세가 얼마였던가? 겨우 32세에서 33세인데, 유월절을 두 번 갔다왔으면 32세이고, 그게 아니고 세 번을 갔다왔으면 33세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과연 오래 사셨는가? 많이 잡아도 33년만 살고 위로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님이 늙어서 돌아가셨는가? 팔팔한데 그냥 올라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조금 늙으신 분이 밧모섬의 사도요한이고 말이다. 대부분이 제 명에 죽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니 옆으로 퍼지려고 하지 말고, 그것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인데(ㅋㅋ), 좀 날씬하게 해서 위로 올라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솟구치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불의한 청지기라고 하면, 주께서 "너는 지혜롭다" 라고 하면, 그것은 "너는 지혜로우니 사업을 해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밤에 너의 영혼을 데리고 가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맞습니다. 저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그렇게 나의 앞가림만 생각하는 저를 찾아오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지혜가 있어. 미리 종말을 예비하고 다른 세대를 준비하니, 니가 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다" 라고 하실 때, "맞아요. 저는 이 세상에서 제 앞가림만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제가 가야하는 곳은 저쪽입니다.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고, 그야말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은 잠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이렇게 해서 32페이지까지를 다 했는데, '1강, 숨겨진 기준'을 말이다. 끝으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30페이지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것이 흐름과는 상관이 없는데, 그게 왜 들어있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잠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구약에 대해서 정통했는데, 그들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똑같은 인간이 잠언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잠언을 보게 되는 반면에, 즉 예수님이 지혜라는 것을 알고 보지만,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경유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죽으나 사나 자기 머리, 자기 신앙심,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성과 거룩함, 그러한 것들에 의지해서 이 잠언서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때 과연 그들은 잠언서를 어떻게 해석하겠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면 안 되는데, 우리가 이런 점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해석했고 신앙으로 해석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이미 우리의 선배 격인 바리새인들이 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목사들이 잠언서를 가지고 대심방을 하면, 그게 바리새인들의 해석인지, 아니면 십자가 복음인지, 교인들도 그것을 눈치채야 한다는 말이다. "목사님은 프로니까 알아서 하겠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로가 달리 프로가 아닌데, 믿음으로 해야 프로답지, 그냥 들이대는 것은 전혀 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교재 30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 그들의 '미르라쉬' 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율법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보면, 그들이 잠언을 어떻게 해석해내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교재 30페이지를 보자. ** "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기뻐하라" 라는 말씀을 두고서, 여기에서 맛있는 음식이 곧 '토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체한다는 겁니다. 왜 그러합니까? 토라 공부도 갑자기 많이 하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 과유불급(過猶不及) ?? 이런 성경해석이 어디서 많은 들은 해석이지 싶은데, 옛날에 부흥사들이 하는 해석과 비슷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해야하는데, 주일설교, 수요설교,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등, 설교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는 말이다. 그쪽 동네 설교는 들은 지도 오래 되었고 이제는 관심이 없어서 전혀 모르는 모양인데(ㅋㅋ), 유식한 척을 하는 목사들이나 성경신학을 이야기하지, 나이가 든 목사들은 전부가 교리설교라는 것이다. 교리에만 맞으면 어떤 성경구절을 갖다 들이대도 다 그게 맞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기뻐하라" 라는 말씀은, 여기에서 맛있는 음식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먹을 때 기뻐하는데,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한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갑자기 너무 자주 많이 대하게 되면 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서히 하라는 것인데, 차분하게 조용히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마무리를 하겠는데, 옛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든지 너무 지나치면 해가 된다는 것이 틀린 말인가? 아니면 상식적으로 옳은 말인가? 상식적으로는 옳은데, 그러면 제가 목사로서 설교를 해놓고 교인들에게 "그래도 그건 아니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목사님, 납득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그들이 이미 교회에 오기 이전에 일반화가 된, 종교와는 상관이 없는 인간으로서 아는 상식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든지 너무 심하게 하면 화가 됩니다" 라는 것을 주제로 삼아서 잠언서를 들추어서 "여러분, 맛있는 음식도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 교회 목사님은 별 문제가 없어 ?? 맛있는 음식을 성경에서는 꿀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꿀을 허겁지겁 먹으면 토합니다" 라는 말을 가지고 목사가 설교를 했을 때, 그러면 교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맞는 이야기를 목사님이 하시는구나. 오늘도 은혜를 받았어" 라고 하면, 목사는 속으로 헤헤거리면서 얼마나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때운다는 말이다. 주일이고 수요일이고 간에, 매 설교시간마다 사람들이 납득이 되고 상식에 부합이 되는 것을 설교하게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 교회 목사님은 별 문제가 없어. 건전해"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돈도 밝히지 않고, 여자관계도 복잡하지 않고, 물론 TV는 조금 많이 보지만, 그래도 아무런 문제도 없어" 라고 말이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 다니면 천당에 갈 거야" 라는 것과 같은 소리인데,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 이야기냐는 말이다.
◈ 하지만, 어린양이 빠지게 되면?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이 빠졌는가? 우리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리고 어린양을 소개하지 못하는데, 어린양이 빠지면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히 지옥으로 깔아 앉고 마는 배를 타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지 못하고 말이다. 평소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이에게 "야야, 너무 심하게 하지마. 그러면 넘어져" 라고, 그러한 이야기를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같이 해주니까, "아하, 내가 살아가는 이것도 아주 건전한 것이구나" 라고, 그렇게 자기 잘남에 잠기게 될 때,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해석이었고, 그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살인에는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살인도 있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죽이는 살인도, 그것이 자기 자존심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 것을,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역시 살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그것을 바로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 전체를 지혜로서 지금도 설명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다고 여기지만 다시 한번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시는지, 그 내막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 같은 죄인을 지금도 살려주시는 주님의 고마움이, 그것이 우리의 목숨보다도 더 감사한 일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언'속의 그리스도 9 - 잠언 1:23 / 죄인의 개입 / 140602 (0) | 2014.06.02 |
---|---|
'잠언'속의 그리스도7 - 반대로 / 140505 (0) | 2014.05.05 |
'잠언'속의 그리스도 5 - 인간의 지혜 / 140407 (0) | 2014.04.07 |
'잠언'속의 그리스도 4 - 경로 / 140324 (0) | 2014.03.24 |
'잠언'속의 그리스도 3 - 성령과 잠언 / 140310 (0) | 201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