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왕하 19:20-28 / 하나님의 응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왕하 19:20-28 / 하나님의 응답

정인순 2014. 2. 6. 21:11

 

 

이근호

 

34. 하나님의 응답 (왕하 19:20-28) 
                         
19: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19:2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19:22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19:23 네가 사자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지경 끝에 들어가며 그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19:24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렸노라 하였도다
19:25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19:26 그러므로 그 거한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19:27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19:28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단비를 우리의 마음속에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자인하면서 주의 능력으로 주의 힘으로 남은 인생을 살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고 또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것을 느끼는가 하면, 성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왠지 처량하고 불쌍하게 다가오신 적은 없습니까? 언제까지고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태도를 왠지 가련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현명하게 현실을 대처하는데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안 도와 준다든지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불쌍하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되는 낭패를 어찌 감당하려고 하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그 때를 대비해서 한 다리를 늘 세상에 걸치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인 줄 모르겠습니다. 이게 현대인들의 교회 다니는 모습일 것입니다. 한쪽 다리를 세상에 걸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고 없고가 가슴에 큰 상처가 되지 않겠지요. 설사 진짜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판명되더라도 평소에 착한 일을 어느 정도 해놓은 있도록 살아왔기 때문에 심적인 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현대인의 눈으로 봐서는 딱할 정도로 믿을 분을 하나님으로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이제 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없이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눈으로 봐서는 참으로 대책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런 히스기야 같은 자들은 만약 하나님이 계시면 일어 설 수 있고 만약에 하나님이 안 계시면 그 자리에서 쫄딱 인생 망하게 됩니다. 참으로 무모하게 보이는 위태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한 다리를 세상에 걸치고 있었으면 그런 걱정이 안 할 수 있을 것을 말입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그런 극단으로 몰아넣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게 보이지 않습니까? 여분의 세상친구도 사귀어 놓았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을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인생관 때문에 히스기야 같은 자들이 즐비한 성경을 아예 안 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답답한 인간만 눈에 띄기 때문이거든요. "바보 같이 어떻게 하나님밖에 모르나". 이런 투가 절로 나오지요. 혹시 나 자신이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자칫하면 나도 그런 답답한 인간과 한 통속이 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요령 있게 교회 다니기로 마음 속에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성경을 보되 그냥 곁눈질로 보고 그 대신 주로 세상 쪽에 적을 두고 살자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이러한 현대 인간상에 대해서 성경은 놓치지 않습니다. 이런 요령 피우는 인간도 성경에 그득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짜 신앙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 자를 지목해서 철저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아침 운동을 했는데 대동초등학교를 지나서 조그만 개울다리를 건너는데 마침 아주머니 두 분께서 개울에 들어가 골뱅이를 줍고 있었습니다. 줍고 있는 뒷모습에서 저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진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과연 사람과 동물하고 무슨 차이나는 것이 있을까? 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골뱅이 줍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물개들이 바다에서 연어를 잡아먹는 것과 또한 멧돼지들이 땅을 파서 고구마를 캐먹는 것은 무슨 차이가 날까요? 동물이나 사람이나 눈만 뜨면 먹고살아야지 하는 본심에서 밖에서 뭔가를 찾아 헤맵니다. 물론 생김새가 다르다고 하지만 생김새가 다른 것도 다른 거예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생김새 다른 것은 차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 이것입니다.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골뱅이를 줍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동물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도 결국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교회에 나오고 종교를 찾는 것은 뭡니까? 저는 그것을 일종의 사치로 보고 싶습니다. 땅을 파고 먹을 것을 찾는 주종이지만 그 외의 지루한 시간에 짬을 내어서 왠지 다른 것에 눈을 돌려보는 겁니다. 동물치고는 일종의 과장된 행동을 하는 거지요. 인생에 있어 하나의 장식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픈데 하나님 찾는 것 대신 역시 재빨리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아니면 쌀통에 쌀이 떨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이미 몸과 육체 자체가 동물인데 동물이 하나님 찾는다고 동물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 찾는 사람이 아침 밥 안 짓습니까? 교회에 나온다는 것도 심심해서 시간 때우고 사람 만나고 교회 와서 못 들어본 이야기 들어가며 시간 때우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근본 동물성이 지워질까요? 나의 목숨은 역시 농사와 직장과 장사 바로 여기에서 책임진다고 확신하면서 사는 것이 영락없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 것을 꼭 해야만 하는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요? 그것은 동물이 동물다우면 족하지 뭔가 더 필요한 것입니까? 동물이 교회 나온다고 해서 위대한 영장이 될 수 없으며 개가 교회 온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다닌다고 개 같은 우리가 곧장 동물의 행세에서 벗어나서 개울가에 골뱅이가 깔려 있더라도 모른 척 외면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입장이 못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 나오고 성경 말씀 들어도 이런 동물의 수준에서 못 벗어나는 것입니까? 이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 해답은 이렇습니다. 못 벗어나는 것은 안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동물하고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를 아예 묻지도 안 해요. 묻지도 않기를 아예 힘있게 입을 악물고 다짐을 하며 차갑게 살기를 작정합니다. "나 이대로 사는 것이 족해 시간 나면 하나님을 찾을 게. 그러나 하나님 찾더라도 나 자신이 동물이 되는 것이 더 좋아 계속 나는 동물로 살래. 구태여 지금보다 더 인간답다든지 하나님 모습 닮자 라든지 하는 소리를 하지마. 동물에게 주제 넘는 이야기야. 아예 그런데 관심조차 안 둘래 나 가만히 놔도. 나는 내가 동물답다는 소리가 더 매력 있어!"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동물에서 벗어나서 사람답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죠. 문제는 어디에 골뱅이가 많이 깔려 있는가 그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돈벌기에 바쁘게 나서야 하는 마당에 어디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자...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아이구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군요. 그런 질문 자체를 동물에게 던져서는 아니 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요. 성경에서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그것은 복음이 들어있으면 사람이고 복음이 들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쉽게 풀이하자면, 자기 안에 하나님이 들어 있으면 사람이고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으면 흙이고 짐승이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 보면 중심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에 이끌려 가는 사람을 사람다움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 보통사람은 골뱅이를 잡고 골뱅이 국을 끓이는 것이 납득이 가는 사람입니다. 물론 짬이 나서 때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막간의 태도이고 역시 삶의 무게는 세상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형적인 동물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랍사게입니다.


  랍사게는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인고 하면 그는 항상 사람만 관계하는 자입니다. 사람만 상대하다 보니 너도 동물이고 나도 동물인데 똑 같은 데 뭐 하면서 기죽지 않고 그 인간들을 늘 정복해 가는 자가 랍사게입니다. 그런데 그 랍사게가 사람들을 상대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다가 크게 된 통을 당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뭐냐하면 사람만 상대하는 이 랍사게를 하나님께서는 "너 이 하나님도 한번 상대해 볼래" 하시면서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는 경우를 당하게 합니다. 사람만 상대하다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대목이죠.


  인간만 상대하다가 진짜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상대하게 된 것, 저는 이것을 신앙의 시작으로 봅니다. 물론 오랜 교회 출석한 실적이나 직분 높낮이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모두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와 교인과의 만남도 기껏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신앙인들은 목사를 상대해도 조금도 기죽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죽는 사람 자체가 불 신앙적이라는 의심을 살만 합니다.


  이 랍사게라는 자가 하나님과 만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28절에 나옵니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본문에 적혀 있네요.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랍사게가 교만하다고 하셨습니다. "너 참 건방지더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랍사게 입장에서 봅시다. 사실 말해서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신마저 자신의 공격을 당해 내지를 못했습니다. 그 내력이 17-1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과연 랍사게에게 당할 인간이 없었습니다. 랍사게 라는 장군이 유다 나라 성문 앞에서 여호와라는 신마저 모독할 만 합니다. 그동안 자기를 꺾는 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히브시야 왕은 평하기를 랍사게가 꺾은 신은 사실 참 신이 아니라 나무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것이 23-24절에 나옵니다. " 네가 사자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지경 끝에 들어가며 그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렸노라 하였도다" 그런데 말이지요. 실상은 랍사게가 한 것이 아니라 유다 나라의 신이지만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25절을 잘 살펴봅시다. "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라고 분명 되어 있지요? 우리가 보기에 처량하고 불쌍해 보이는 히스기야 왕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만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이 그에게는 성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건방진 랍사게 이 히스기야한테 걸려든 것입니다. 20-22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랍사게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상대한 것은 돌이나 나무뿌리라는 겁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뿐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드디어 한계가 드러날 때가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제대로 기도하는 히스기야과 부딪치면서 들통나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랍사게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드디어 사람하고만 싸우다가 랍사게는 하나님하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신앙 인에게는 이것이 신앙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걸려들어야 합니다. 된 통으로 걸려들어야 합니다. 사람만 상대하는 법으로만 현대 시대를 살다가 이 현대 문명이 우상인 것을 깨닫는 시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랍사게를 가만히 두지 않는 순서가 온 겁니다. 하나님은 랍사게라는 인간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그 한계의 범주 밖으로 그 자를 끄집어냅니다. 지금까지 그가 알고 왔고 경험해 왔던 그 범위 안에 있는 그를 달랑 들어내어서 다른 세계와 마주치게 합니다. 들어냈다는 이야기가 6-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있지요? 즉 그는 본국에 돌아가자 마자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랍사게는 자기 한계 밖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만나느냐 하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만나는 거예요. 난데없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는 난데없이 부하에게 칼을 찔려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랍사게로 하여금 도저히 예상치도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식으로 그를 인도합니다. 어디까지 말입니까? 건방진 자의 종말은 하나님에게는 죽음뿐이라는 사실로서 말입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 랍사게의 본질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사실 사람만 상대하면서 건방 질대로 건방지고 교만 할 대로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요? 그것은 우리의 본질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오면서 어떤 직업을 가졌든 어떤 부동산을 소유했던 이 모든 다 놔버리고 빈몸으로 주님 앞에 설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그 빈 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우리들의 본질입니다. "너 참 건방지게 살아왔었지. 너의 진짜 한계도 모르고 말이야"라고 평가가 내려진다면 지옥의 우리의 영원한 자리인 줄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보지 않으려 하고 또 보더라도 그냥 스쳐지나가려 합니까?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 성경이 도움이 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데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식의 인간이 점차 자기 본질과 멀어지면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본질을 모르는 건방진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네가 이 땅에서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되는 가가 아니라 네가 벌거숭이로 주님의 심판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심판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참으로 랍사게는 바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에 여기기를, 자기가 예상치도 않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신도 내가 예상치 않는 일은 터트리지 않는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랍사게가 난데없는 풍문에 따라 본국에 돌아가고 거기서 죽음을 당할지 누가 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예상하겠습니까. 이것도 모르면서 사람만, 그저 사람만 상대하며 살려는 자는 필히 건방지다는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또 랍사게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 막강하다는 앗수르 군사들이 하룻밤에 다 죽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 교통사고로 청년이 3명 죽었다고 방송에 나왔습니다. 세 명 죽었다고 mbc 뉴스에 떴는데 그럼 18만 5천 명 죽은 것은 어느 방송에 나올까요? 세 명밖에 안 죽어도 그 뉴스를 듣는 가족들은 "하나님이 너무 하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파리 목숨 취급하나!"하면서 분통하고 억울해 할 것인데 이 본문의 내용처럼 18만 5천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면 도대체 사람 목숨이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목숨이 개미 목숨보다 더 못하단 말입니까? 왜 이 많은 사람을 다 죽입니까? 이 죽은 군인들이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이나 형제 자매 부모들의 심정을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젊은 자식을 남의 전쟁터에 나가 죽었을 때 과연 그들은 인생 살 맛이 나겠습니까? 남은 가족들은 어찌하란 말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에게 교만하다는 평가는 무서운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놀라워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일을 발생시킵니다. 그래야 우리가 교만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랍사게는 승리. 또 승리로 이어지는 멋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 왕보다 랍사게는 선호할 것이 뻔합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이상형일는지는 모릅니다. 모든 일이 자기가 예상한대로 착착 잘 진행되어 왔는데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화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웃기지마. 나는 모든 인간들을 굴복시켜 왔던 말이야. 나에게 당할 자가 없었어. 신? 신들도 마찬 가지었어" 여러분 누가 랍사게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니, 누가 우리를 인간이기를 생의 소망으로 삼게 만듭니까? 교회입니까? 목사입니까? 그렇다면 그 목사, 그 교회는 이단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의 이방신전 속에서 예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기 앞에 건방진 것을 용서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랍사게와 그 부하 되는 군사 18만 5천명을 하나님께서 다 죽인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라고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랍사게는 남을 지배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랍사게와 우리는 별 겁니까? 우리가 사는 목적은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다든지 내가 가진 재산이 남보다 더 많다든지,  항상 남보다 더 나은 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인생을 포기를 걸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이 미워하는 건방짐에 속한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는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설마 이런 일까지 터지랴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니, 일어나야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바로 아는 기회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동안 장애 되는 것을 내가 제거해 주마." 하고 놀라운 일을 발생시켜 우리를 낭패케 하고 절망케 합니다. 


  히스기야 입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가 랍사게라는 건방지고 무지막지한 인간이 오지 않았다면 기도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급하니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해서 하나님께서 나서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는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버려라는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움켜쥐어야 우리가 구원케 되는 겁니다. 우리 손으로 주님의 손을 붙들어서 구원케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손이 높은 자리에서 우리를 잡아 챙길 때 우리는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난처한 일을 발생시키고 계십니다. 우리 힘과 지혜로 우리가 구원되는 수법을 사용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일으키는 일로 믿고 늘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넘겨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생기는 현상은 바로, '교만 없음, 건방지지 않음'입니다. 
  여러분 랍사게 되렵니까, 아니면 히스기야가 되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그저 하나님은 선택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취미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은 중요치 않고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꺾는 재미에 인생의 목적을 두었습니까? 하나님, 바로 그것이 우리 속의 랍사게인 것을 고백하오니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기 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옮기는 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