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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왕하 19:1-7 / 히스기야의 결단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왕하 19:1-7 / 히스기야의 결단

정인순 2014. 2. 6. 21:08

 

 

이근호

 

33. 히스기야의 결단 (왕하 19:1-7) 

 

19:1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19:2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19:3 저희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19:4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19:5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19:6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19:7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나옵니다. 4절에 '하나님이 살아있다' 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이 과연 맞는 이야기입니까? 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들아, 너희들이 하나님께 너의 책임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안 살아있다 라는 말은 "살아있는 우리 인간들아, 우리 멋대로 살아도 괜찮네"이라든지 혹은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도 터치 할 사람이 없으니  마음놓고 살자"라는 뜻입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했거든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이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더 이상 허용 안 된다는 내 멋대로 사는 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이상, 내가 하는 모든 태도를 심사하시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 곁으로 다가왔을 때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을 한 겁니다. 즉 실제로 계신 하나님이 실제로 다가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도록 죽여 없애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인간들 밖에 없겠지요. 이제 마음놓고 제멋대로 살 수 있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을 꼭 죽인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금방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같은 표현으로 보다 부드러운 표현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라는 것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라는 러시아 소설가의 작품 중에는 '까라마조프 형제들'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바는. 그냥 하늘에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냥 계시면 이 땅의 구원. 신앙. 부흥 문제는 우리 성직자들의 아이디어와 민중들의 종교적 열의와 행정력으로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 자기들에게 다 맡겨 주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알아서 잘 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이 작가가 그 시대의 종교 성직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요즘 목사들의 말로 고치면 "교회 없이 구원 없고 목사 없이는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자 여러분 과연 그러합니까? 교회 없애버리고 목사 없애버리고 장로 없애버리면 과연 우리들은 절망이냐? 이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하심 이외에 뭐가 또 부족하더란 말입니까? 교회란 꼭 있어야 되는 겁니까? 교회 없으면 지옥 가는 겁니까? 천당 갈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작가가 교회를 없애자는 운동을 벌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추궁하고자 하는 바는 왜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있는 교회 인간들만 쳐다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이 없을 때 교회 오면 대인 관계나 목사의 눈치 등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을 때에는 교회가 불이 나고 목사도 없고 교회도 없어지고 사람들도 빠져 버리더라도 주님 사랑은 여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계신 분으로 살아 계시거든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이 말은 이제는 구원받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데 있어 누구의 간섭을 받을 필요도 없고 눈치코치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는다면 늘 누구에게 기대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에게 의지하고 나를 당겨주기를 바라며 기댈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목사는 그런 교인을 이용해 먹겠지요. "내가 시킨 대로하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비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활동과 종교생활에 접어드는 불상사가 시작되는 겁니다. 교회의 문제성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면서도 교회 다니는 여기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돈 빌리기가 힘드니까 자연적으로 사채시장을 의존하듯이 본인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무시하니까 온갖 사기꾼들이라는 사기꾼들은 주위에서 득실거리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성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계신가를 엿보아야 합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절망과 절망으로 항상 인도합니다. 기댈 언덕도 없고 기댈 구석도 없게 만듭니다. 험악한 난관에서 내 손으로 해결 할 그 어떤 아이디어도 없게 만듭니다. 손을 놔버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이란 절망을 느끼지 않으면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는데 뭐 하려고 하나님을 새삼 귀찮게 해 드리겠습니까. 자기 힘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케 해서 비로소 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살아 있음을 알게 만들고 그리고 그 자체를 감사하게 만들죠. 이런 식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절망의 상태라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뜸 드리지 않고 성경을 가지고 바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키우신다. 그 다음에 들의 핀 들꽃을 보라 어찌 들풀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아름답다. 그 다음에 누가 너희의 옷을 들풀보다 아름답게 했겠는가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은 지옥 가는 사람들이 구하는 행세지 성도가 할 행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자체가 우리들에게 크나큰 절망을 줍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이런 염려들에게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옳은 말씀이고 옳은 하나님의 명령인 줄은 압니다.


  하지만 그 옳은 영역으로 안전히 옮길 수 있는 그 어떤 용기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로 더욱 절망케 합니다. 그 나라와 의가 아무리 좋고 아름답고 바람직한 세계이다 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동시에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는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저주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옮길 여력도 없고 힘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해요. 사실을 사실대로 깨달은 절망, 이 절망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망이에요. 차라리 성경말씀을 매직으로 검게 칠하거나 불에 태워버렸으면 내가 절망하거나 기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아예 하나님 말씀을 모르고 있고 듣지도 않았으면 내가 어느 정도 괜찮은 존재여서 천당가지 않겠나 라는 희망이나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단호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는 자가 누구야? 그 자는 지옥 가는 자야" 라고, 이렇게 나오니까 "바로 나구나, 나보고 하는 이야기이구나"라는 것을 직감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절망을 느끼는 거예요. 이것이 나쁜 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쪽이 좋은 줄 알면서도 나쁜 쪽에서 그곳으로 옮길 만한 재주가 우리에게 없다는 말입니다. 없으니까 하나님은 늘 우리를 절망케 하시는 분이지요. 교회에 나와서 십일조 열심히 내고 헌금한다고 해서 단번에 그 나라 의를 구할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남에게 구제하고 전도했다 해서 단박 그 나라 의를 얻을 수 있던가요? 말이 안되잖아요. 교회생활에 아무리 충실해도 절망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결국 멀쩡하게 휘파람 불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으로서 우리가 절망에 완전히 갇혀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입니다.


  제가 요즘 보고 있는 책은 주로 카톨릭에 관한 책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각이 주된 핵심이 되어 있는 천주교에서는 어떤 교리들이 번성하고 있는지는 지난 금요일 날 김수환 추기경과 김용옥 박사의 대담했는데 다소 밝혀졌습니다. 거기서 김수환 추기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과 희망을 주는 말을 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복음으로 듣고 있더란 말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니까 곧 복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식이죠. 그 김수환 추기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존엄하게 본다. 얼마나 존엄하게 보았으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들에게 내어 주었겠는가.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이 된다"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용옥 박사가 하는 말이 "우리 김수환 추기경같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감동을 받을 것이고 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개신교는 배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다 좋은데 왜 개신교는 그런 이야기를 못하고 있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하나님 같으면 지옥을 만든 하나님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으로 하는 하나님이시라면 지옥은 왜 만들어 놓았겠어요. 아예 지옥을 없애야 마땅하지요.


  우리가 이 점이 마음에 걸린다면 바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걸리는 이 지옥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극락부터 출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시는 그런 번거러운 일은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 없이 존엄한 인간들을 존엄하게 대우해서 곱게 말만하시면 그만일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 그렇다면 너의 존엄함처럼 너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히스기야와 이스라엘과 더불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랍사게라는 무서운 인간이 앗스르 대군을 이끌고 유다 나라에 쳐들어 와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능욕하는 말을 합니다. 신앙적 사기를 떨어트리고자 유다와 그 하나님을 조롱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왜 이러한 어려움이 옵니까?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주시고 그 다음 절망가운데 자기 성도를 놓아둠으로서 우리의 구원자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게 합니다. 나와 그리고 나의 친척과 이웃도 나를 못 건진다는 것을 새롭게 유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즉 절망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무능력에서 오는 절망을 기피하고 싶지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신의 순수성도 잃어버린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순수함을 잃으면 거짓만 남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서도 우리 인간들끼리 대동 단결하여 선행도 하고 좋은 쪽으로 하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을 내 힘으로 시도하기에 하나님이 항상 귀찮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제가 잘 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개입하기 마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물 건너 간 것이 됩니다. 오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꼴이 됩니다. 한평생 위선자로 남죠. 한평생 구원  받은 자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결국은 지옥사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교회 다녀도 구원에서 탈락되어 버린 불쌍한 영혼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단 한 순간만이라도, 10초라도 내 힘으로 구원되지 못한다는 절감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 힘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불쌍히 여김 없이는 구원 될수 없다"는 것을 단 5초만으로도 절감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가시가 있어 너무나 괴로워서 하나님께 가시 빼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말씀이 "내 은혜가 너에게 충족하다"고 하시면서 안 빼어 줍니다. "이는 네가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니라"고 했습니다. 늘 약하고 약한 상태에 있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라고 합니다. 9절에 보니 사도 바울은 이 응답을 받고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라고 나와 있지요. 내가 약함 자체에 머물고자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약하기에 그리스도 능력만이 내게 머물 수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새댁이 음식을 못합니다. 그런데 집에 온 손님마다 그 색시 음식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사실은 시어머니가 다 했지요. 그런데 하루는 시어머니가 '"애야 나 시골에 가야겠다. 너도 이제 요리 잘한다고 소문도 났으니 이제는 내가 없어도 되겠지"라고 했다고 칩시다. 새댁은 맹렬하게 붙듭니다. "저는 요리 못함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능력이 항상 저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가 나의 구주시고 나의 능력이시고 시어머니 없이는 내가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시어머니 없으면 요리 못하는 것 들통나니까요 그렇죠. 시어머니가 항상 계시도록 붙들 것이 뻔합니다. 신앙이란 이와 같습니다.


  아마 신앙이 없는 사람 같으면 "어머니 이제 가셔도 됩니다. 나도 어머니 비슷하게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나오겠지만 그 새댁은 시어머니를 계속 붙들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가 남들하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와 자신과 비교하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음식을 못하는지, 자신이 절망인지를 제대로 아는 거지요. 이처럼 자신을 자기 외의 다른 인물을 믿는 것을 두 자로 신앙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랑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 전도 목회 등등을. 자랑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나는 목회도 할 줄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리라" 바로 이러한 고백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하루 중에서 한 번도 염려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자라도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부터 생각합니다. 가끔 정신이 나가서 그 나라의 의를 구할 수가 있는데 그때는 성령이 임해서 생겨난 생각이고 우리 솜씨가 아닙니다. 곧장 우리  본색으로 돌아오지요. 우리의 본색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만 의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늘 절망이에요. 절망이라고 해서 욥 처럼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태가 안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심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절망상태입니다. 절망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주님만 의지하면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 왕은 절망상태에 있습니다. 해결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으니까 자기 부하들에게 장례복장, 절망적인 복장을 하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냅니다. 3절에 보면, "궁내대신 엘리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둘 다가 절망상태에 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은 옵니다. 다만 예수를 믿는 자의 차이성은 모든 문제를 자기 문제로 해결하지 않고 이것을 주님의 문제로 이전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포위하고 있는 나쁜 적 랍사게 군대를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사적인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적으로 연결시켜 버리지요. 하나님의 궁극적인 적,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적인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직접 해결해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일을 미루어 버리는 겁니다. 제가 자기의 일을 하나님께 미룬다고 이 신앙론에 대해서 주위의 목사님들이나 신학생들이 반발하고 나섭니다.


  이 목사님이 성경을 그렇게 가르치고 설교를 그렇게 하니까 교인들이 나태에 빠져 가지고 농땡이 다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거나 금식 철야를 한다든지 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자기가 해결을 하도록 해주어야 신앙에 있어 성숙이 되고 성장이 되는 것이지 무슨 문제만 생기면 몽땅 하나님에게 다 맡겨 버리면 본인은 무슨 신앙 성숙이 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질문을 하는 목사님은 단 한번이라고 그런 염려까지 하나님에게 맡겨 본적이 있습니까? 교인들이 농땡이가 되면 어떠하나 하는 염려까지 하나님께 맡겨 본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목사는 당연히 믿음이 있을 거라고 간주하고 또한 목사들은 그 점을 설교시간을 통해 교인들에게 과시하는데 실제에 있어 그런 위선을 신앙으로 간주해 줄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것은 빈 마음과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신앙이 없으니까 그런 염려와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생활, 목회 생활이 목사의 일과가 아닙니다. 차라리 목사직을 버리고 하나의 신앙인으로 돌아서는 것이 본인에게 구원입니다. 목사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한 순간 만이라도 신앙인이 되고 믿는 자가 되면 이것보다 더 큰 축복과 기쁨이 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라는 것이 가면과 가면의 만남, 위선과 위선의 만남처럼 느껴집니다.


  김완선의 노래처럼 삐에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광대의 모습처럼 우리는 믿음이 없으니까 남에게 믿는 체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성화 되고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절망에서 탈출하기는커녕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기어 들어가는 꼴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내게 속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전쟁임을 왜 우리는 진심으로 안 받아드립니까? 진심으로 말입니다. 


  오늘 히스시야는 자기에게 날라 온 공을 슬쩍 선지자에게 패스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요즈음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연결고리 이거든요. 그러니 오늘날 예수님이 왜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계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걱정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부르고 찾아도 염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절망이 그대로 절망으로 휘감아 듭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어떤 절망적인 사태에서 하나님께 돌릴 줄 아십니까? 아니면 나의 종교와 나의 신앙으로 그 난제를 풀려고 온갖 일을 다 하시는 것입니까? 일을 우리 주님에게 맡기세요.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께서 맡기시고 절대로 여러분이 나서지 마시오. 여러분은 그저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은 내 뜻한 대로 인도해 주시지 않습니다. 내 희망하는 대로 절대로 안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확실한 것은 그분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오히려 우리를 끌고 간다는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십니다. 이 자체를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떻게 일을 처리되었습니다. 4절에 보면 "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생 중계하잖아요.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꺼야. 라는 느낌을 히스기야 왕은 생생하게 가슴에 품고 삽니다. 그 생생함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간에 귀를 지으시고 눈을 만드신 분이 엄연히 살아 계시다는 점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런 히스기야의 신앙심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6절에 보면 "히스기야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갈을 보내져 왔다는 겁니다. 뭐냐하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너의 절망을 내게 넘겼느냐? 그렇다면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적이 삼 겹 사 겹을 둘러싸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해답이죠. 신약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이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압축해서 말씀드리자면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 인생을 내 인생으로 보고 내가 감당해야 되니 두려운 겁니다. 그런데 내 인생은 없고 하나님의 인생으로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이 인생을 말아먹든 어떻게 하시겠지요. 우리가 두려워 할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넘겨야 할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그것을 끙끙 앓을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가 왜 교인들에게 간섭합니까? 그것은 목사가 믿음이 없다는 표시밖에 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다면, 그리고 이 교회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면 자기는 자기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예요. 왜 남의 성숙과 성화에 간섭합니까?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남의 성화와 성숙에 간섭합니까? 이것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자기 절망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일을 하나님께 맡겼으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것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괜히 하나님이 아니고 괜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있다고 간주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편하게 합시다.


  이 목사 당신이 신앙생활 편하게 하라고 해서 교인들 농땡이 더 친다 라는 걱정도 하지 마시고 우리들은 편하게 삽시다. 예배당 불이 났다. 그러면 목사가 없다. 이민 갔는데 그곳에도 교회가 없다. 배를 타고 가는데 그곳도 교회가 없다. 여러분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어떤 처지에 있더라고 구원받는데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러합니까? 내 구원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죠. 우리는 내 힘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먹을 것 입을 것에도 해방될 수 없다는 것도 현실로 인정합시다. 그러면 누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뿐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듯이 주님이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내 적을 공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을 기초부터 새로 시작하게 하옵소서. 불안가운데 절망가운데 있다는 것이 결국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된 모습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더 이상 자신의 재주와 종교 노력과 종교자랑에 얽매이지 않고, 다 버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넘길 수 있는 빈 마음,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