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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왕하 18:17-25 / 내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왕하 18:17-25 / 내기

정인순 2014. 2. 6. 21:04

 

이근호

 

32. 내기 (왕하 18:17-25) 

 

18:17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왕을 치게 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저희가 올라가서 윗못 수도 곁 곧 세탁자의 밭에 있는 큰 길에 이르러 서니라
18:18 저희가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저에게 나가니
18:19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18:20 네가 싸울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18:21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18:22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 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18:23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그 말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필을 주리라
18: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듯하냐
18: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성경을 보게되면 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을 말합니다. 지옥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지옥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면서 자꾸 사람인 체하는 종족을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아니며, 처음 만든 인간의 모습이 아닌데, 자꾸 사람이라며 우기는 겁니다. 말도 할 줄 알고 원숭이가 아니고 만물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을 만든 하나님은 기가 찰 노릇이지요. 내가 저런 쪽으로 만들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본인들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긴다 말입니다. 선도 알고 악도 안다고 말입니다. 도시문명을 발달시키고 기계 문명을 발달시키고 음악을 발전시키며 예술을 고양시키고....등등  하면서 사람이니까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고 나선다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 면전에서 추방당한 가인의 이야기를 적혀 있습니다. 추방된 주제에 기껏 한다는 것이 도시를 건설하고 국력을 키운다면서 요새를 만들고 철기문화를 발달시키고 예술을 누리고 많은 여자를 거느리면서 자기에게 손대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단호하게 선언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창세기 4장의 모습은 창세기 6장에 가서는 소리 없이 물 속에 수장되고 맙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아무리 인간들이 "나는 사람이다. 나는 인간이다"고 주장해도 하나님이 설정해놓은 최초의 인간, 하나님 머릿속에 담아 놓은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아닌 거예요. 인간이 아니면 뭐냐? 시편에 보면 짐승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저가 신학논쟁을 하고 토론을 하다보면 이런 항의를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로봇이냐?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데 단지 피조물이라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로봇처럼 다룰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은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인정해 주고 특별히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기계 다루듯이 사람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면서 항의를 하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부부사이에 정이 오갈 때는 "여보 나는 당신의 종이야"라며 자진해서 서슴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정이 떨어지면 "너만 인간이냐? 내가 너의 애완동물이야?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지? 나도 자유의지가 있다 말이야" 라고 주장합니다.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인데 느낌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갈라서자 라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나요? 사랑할 때에는 흔쾌히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할 때는 자유의지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고 할 때,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니었던가요? 이미 입에서 그런 반항조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이제 나는 하나님 당신이 만든 그 기준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하나님 당신이 말하기를 '사람은 이래야 사람이다'라고 정했던 안 정했던 간에 나는 내 기분 내키는 데로 살 거야" 라는 자기 선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성경에서 눈을 돌리며 교회에서 눈을 돌리는 일차적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심판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축제의 순간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인간 같지 않는 인간들을 지옥에 보냈다 그러니 나의 신부들아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고 나옵니다.  "최후의 심판이 이르렀도다. 기뻐하고 기뻐하라 종려나무 들고 나를 반겨라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유황불에 들어가 다시는 못나오게 했다. 내 잘했지?"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창세기에 만든 진짜 인간과는 달리 악마의 종  노릇하면서 살고있으면서도 마치 사람인 체하는 인간들과 완전히 결별시켜 가지고 또렷하게 구분 짓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시고 계시고 있습니다. "나 하나님은 절대로 너에게 속어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죠.


  우리는 생각을 해야됩니다. 남들은 나를 인간으로 보는데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사람다움에 내가 포함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과연 내가 인간입니까?"라는 것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친구 친척 가족들에게서 자극을 줍니다. 내가 인간이냐? 아니면 인간행세 만 하고 구더기 같은 인간인가? 라는 점을 순간 순간마다 깨닫고 점검하기 위해 성도를 오히려 불신 세계에서 한가운데 두십니다. 그리고 그 불신자의 관계와 교류를 통해서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북쪽의 거대한 강도 같은 나라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다가 드디어 북쪽 이스라엘을 삼켜버리고 이제는 더 조그만 유다 나라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이 유다를 삼키려고 시비를 걸어옵니다. 유다 나라의 왕 히스기야는 체면이고 뭐고 없이 신하 세 명을 미리 보내어 마음을 달래주려고 합니다. 랍사게라는 신하가 대군을 이끌고 조그만 유다를 기죽이려고 쳐들어옵니다. 칼쓰기 전에 사기를 완전히 꺾어 무혈로 입성해서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외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너의 대장 히스기야 나오너라. 우리 앗스르 대왕의 이름으로 랍사게가 왔다고 아뢰어라"하고 큰소리 칩니다. 그러니 유다 신하가 쩔쩔맵니다. 19절에 보니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라고 조롱하지요.


  즉 너희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의지 할 만 한 것이냐고 비웃고 있는 거지요. 애굽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여호와라는 신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대국 앗스르 나라는 그동안 신을 찾는 숱한 나라들을 연속적으로 정복해 오고 있는데 그런 전쟁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믿는 너희들도 별거냐 라는 뜻이지요. 특히 18:25를 보게 되면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온 것은 여호와가 가라고 해서 왔으니 항복하고 성문을 어서 열라는 겁니다. 18:20에는 "네가 싸울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라고 합니다. 즉 너희가 머리가 좋다고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입에 발린 말뿐이라는 겁니다.


  어쨌든 랍사게 장군은 유다 나라가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전부 선수치면서 조롱하고 있습니다. 알아서 항복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왕으로부터 명을 받고 적군을 마중하려 나간 유다 나라 신하들은 더욱 사기가 떨어져서 다음과 같이 사정합니다. "그 말을 우리말고 다른 백성들이 다 알아듣도록 어떻게 히브리말로 하십니까. 백성들이 다 듣고 기가 죽잖아요. 제발 아람말로 하세요"라고 합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우리 백성들을 보호할 기본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랍사게 장군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8:28를 보면,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질러 불러 가로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저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라고 오히려 더욱 더 큰 소리를 질러대면서 전체적으로 사기를 죽이도록 합니다. 무조건 우리나라가 최고이니 어서 항복하라는 겁니다.


  자.. 여러분 왜 하나님 믿는 나라에 이런 시련이 오는 겁니까? 이런 시련 같은 것은 신자에게는 아예 오지 않아야 된다고 여기는 분들은 뭔가 착각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착각은 어디서 오는가? 만약 어릴 때부터 믿는 집안에서 자라 폐쇄적 사고방식에서 갇혀 있다가 사회에 나가서 다른 세계와 접촉하게 되면 마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징벌이나 시련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 아닙니다. 도리어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좁은 신앙, 일방적인 신앙, 폐쇄적인 신앙을 마치 참된 신앙인 것처럼 즐기고 있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를 들면, 불신자의 의견과 직접 들어오고 가슴 터놓고 접촉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동안 크게 자기 자신에게 오해한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무조건 "나는 선택을 받았다 신자 맞다"라고 자부했었는데 막상 불신자의 의견을 그들의 입장에서 듣고, 그들과 사귀고 그들과 삶을 같이해 보니 그들의 주장이 충분히 일리가 있더라 이 말입니다.


  신학생을 대해보면 재미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학교 2학년쯤에는 자신이 천하의 신앙인양 여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하향곡선을 그리는가 하면 3학년이 되면 교인들을 자기 사람 만드는 비법 같은 것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방법론 같은 거죠. 그리고 교회 중직자를 다루는 법, 직분을 배분하는 법, 직분에 따라 얼마의 헌금을 받아야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 하는 그런 쪽으로 머리를 굴립니다. 그러다가 목사가 되면 더 노골적이 되는데 이는 모든 동기 목사들이 다 이런데 관심 있으니까 그런 관심이 잘못이 아닌 줄로 알고 더욱 용기를 가집니다. 노회 목사들에게 잘 보여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러다가 목회 한 5년이 지나면 역시 돈 많은 장로들이 중요한 것을 압니다. 이미 예수 관심 없기는 벌써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60살쯤 되면 어떻게 해야 원로목사가 되어서 나의 여생을 계속해서 봉급을 받고 살수 있을까 방법을 연구하는 재미로 삽니다.


  이것은 애초에 그 인간의 본색, 즉 인간도 아니었음이 드러내는 과정인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도사보다 늙은 목사가 신앙이 없다가 아니라 늙은 목사님이 이제 비로소 자신을 알고 세상을 이해한 사람이 되었다는 거죠. "나는 평소에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아니까 아마 하나님이 밥 먹고살도록 조치하겠지"라는 철없는 전도사의 생각에서 벗어나 "아하 밥 먹고사는 것은 설교 잘하고 기도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만 주어지는 거구나. 가정에 어려움이 있으면 화평을 위해서 상담을 하고 몸이 아픈 사람은 기도해 주고. 돌아가시려는 분에게는 천국으로서 위로를 주고 또한 윤리도덕으로만 목사를 평가할 줄 밖에 모르는 장로들에게는 아주 점잖고 겸손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서 당회장 자리에 오래 보존할 수 있겠구나" 라는 know-how가 발달 된 것이죠.

  신학교 시절에는 주님만 바라보다가 이제는 다른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교시절의 폐쇄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두루 두루 세상사람들, 특히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삶을 꾸려 나가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가를 접촉하며 그들 입장에서 자기 인생을 다시 보게 된 거죠. 그렇게 해서 깨닫는 바는 이런 겁니다. "그렇다, 불신자들의 뜻이 일리가 있다.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말이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알 것이며 실제로 있다고 치더라도 인간 생활에 무슨 영향을 줄 것인가. 혹시 믿는다는 폼을 내면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콩고물이라도 떨어줄 거이며 내게 이익이 되고 안 떨어지면 그동안 사귀어 놓은 돈 많은 교인들이 나의 생활에 도움을 줄 거야. 그래 이것만 생각하자. 딴 것은 생각 말자 골치 아프다. 누구하나 하나님 본 사람 있나?"라는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실제 교회에서 젊은 신학생의 설교를 아주 싫어합니다. 눈치코치도 없이 마구 지옥이야기를 하지를 않나, 예수만을 고집하지 않나 그러니까 교인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나이들은 목사는 역시 융통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넓게 열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라는 차원에서 설교를 합니다. 예수 심판은 어디로 갔는지 날아가 버리고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보편적인 윤리로서 끌고 가지요. "여러분, 교회가 이 사회에 빛을 위해서 이웃을 돌보아야 됩니다." 자 여러분 보세요. 누가 보아도 걸림돌이 없고 누가 들어도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감동적인 설교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신자가 아니더라도 "아, 그건 바른 소리야"라고 느껴질 설교를 해대는 겁니다. 젊은 신학생의 고지식한 설교는 너무 철이 없고 폐쇄적이라는 일반 장로님들은 자기 교회 당회장을 뽑을 때 적어도 10년 이상 된 사람을 뽑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아예 포기하고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 중 누가 들어도 모 나지 않는 설교를 해주니까 교인들이 더욱 더 모여들 가능성이 있다는 전략이지요.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이 랍사게가 하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기록하신 것은, 우리가 그 랍사게 입장에 한번 서 보라는 겁니다. 정말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나요?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여러분들보다 더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랍사게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만 그 사람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적극 인정해 주면서도 무용지물이라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더욱 더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 대해서 이 랍사게가 유다 나라에 인정해주고 존중해 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되더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유다 나라야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지? 그것은 내가 존중해 줄게. 그런데 너희들의 하나님이 온 세계의 주권자라면 유다 나라에 우리들이 쳐들어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 맞잖아 그지? 너희들의 이론대로 말한다면 말이야. 너희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천하를 다스린다고 홀로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좋아, 그것을 존중해 줄게. 그렇다면 나 이 랍사게가 너희들의 나라를 쳐들어 온 것도 여호와의 뜻이 맞지 그렇지? 말이 맞지? 그러니까 너희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뜻에 어서 복종하고 항복하란 말이야"라고 이렇게 나온 겁니다.


  자... 여기서 랍사게가 말하는 여호와의 주권, 즉 온 세계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내가 너희들에게 쳐들어 온 것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는 이 논리에 대해 우리 박사 교인들이 한번 반박을 해 보세요. 할 수 있거든 말입니다. 반박이 되나요?  반박이 안 되시면 여러분들은 랍사게와 같은 신앙이라고 보면 됩니다. 평소에 자신이 잘 믿는 자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불신자의 의견과 동일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만약 반박이 안되면 말입니다.


  자, 어떻게 반박을 하는가? 지금 제가 한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렵습니다만.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랍사게가 주장하는 대로 유다 나라가 자기에게 굴복해야 된다고 접근하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면 "너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27절에 나옵니다.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 행정관들아 고집을 부리고 성문을 안 열면 너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의 똥을 먹고 오줌을 받아 마시는 처참한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즉 이 성문을 열지 않으면 너희들은 패배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랍사게가 사람의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어떤 관점에서 좋은 인생 나쁜 인생을 결정하는가 하면, 승리자인가 아니면 승리자한테 밟힌 패배자인가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불신 친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너 하나님을 믿지. 그런데 인생 승리했냐?"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나는 인생 성공하지 않은 것 같은데"라고 하지요. 그러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성공했잖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존중하기는 하는데 너 하나님께 너무 매이지 말아라"라고 나의 신앙을 존중해 주는 투로 위로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소리 듣고 "'그래 그래"라고 동의를 표하는 이런 식이다 이 말입니다. 지금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를 무엇을 통해 보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네 인생이 소위 성공했으면 하나님이 계신 거고 실패했으면 하나님이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소위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사고를 기준으로 그 동안 교회 다니고 있더란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랍사게의 주장에 반박을 못할 수 밖예요. "내가 교회 10년을 다녔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 있나?"라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다가선다면 이는 랍사게의 신앙과 똑 같은 겁니다. 불신자와 똑 같은 교인입니다. 교회 아무리 오래 다녀도 신자가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공, 실패를 가지고 신앙의 열매로 삼으니까 불신자와 다를 바 없지요. 제가 아까 목사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목사가 되었으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야할 텐데 목회 성공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고 목회 성공 못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그 사고 방식 자체가 아무리 목사라도 그 사람은 불신자이며 랍사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시간 마지막에 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람을 끌어 모읍시다"입니다. "선교합시다, 전도합시다, 선교하려니 돈이 필요하니 돈 내세요." 이것이 설교의 주 메뉴이고 요지입니다. "주차장 지어 가지고 사람들 많이 끌어 모읍시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목사나 교인들이나 워낙 믿음이 없으니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 못 끌어 모으면 가짜 주의 종인 줄 알 터이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수단과 방법 고려치 않고 사람을 모아야 되겠다"라는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고 교인들도 그것에 아낌없이 협조해 줍니다. 그러니 이런 목사가 목회를 잘 할 수밖에 없지요.


  랍사게가 이런 신앙인들을 향하여 서슴없이 놀립니다. 18:24에 보면,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듯하냐"라고 기고 만장합니다. "신앙 때려 쳐라. 차라리 내가 알고 있는 식으로 하나님 믿어라"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얼마나 현실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으면 이런 소리를 다하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용기가 교회라는 폐쇄적 사회에 놓여 있는 교인들 눈에는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은 새삼스럽게 세상을 넓게 보면서 이런 불신자를 본받아 교회 나올 때는 신자처럼, 세상 밖으로 나갈 때는 그들과 우호적으로, 이렇게 이 중 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전도하라하면 돈주고 교회에 데리고 오는데 오는 인간이나 데리고 오는 교인이나 전도하라는 목사나 모두 불신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무슨 생가이냐 하면, 악마가 사람을 대하면서 "네가 사람다우냐 사람답지 못하냐"를 측정하는 측정 기준입니다. 랍사게가 바로 이런 악마의 기준을 대변해 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악마의 기준에 울었다고 웃었다가 하면서 놀아납니까? 이건 신앙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 순간부터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기준을! 이 기준을 안 바꾸면 여러분 친구 가운데 이런 랍사게 같은 친구들이 수두룩 나타나 접근해 올 겁니다. 그런 친구들을 볼 때, "야 너 참 불쌍하다 너 지옥 간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야 부럽다, 네가 부럽다."라는 생각도 마구 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이 따로 있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13:4-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에 보면, 정말 인간다운 기준의 모델로서 누구를 제시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떻게 인생을 마감을 하셨다구요? 예수님은 죽으실 때까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약하심에 좌절하거나 낙담을 하셨습니까? 대법원장이 자기 편들어 주었습니까? 아는 친구가 많았습니까. 빽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능히 살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냥 과감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돈 좀 있다고 자신을 강자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빽이 있다고 자신을 성공한 인생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약자 일 수밖에 없느냐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든든한 것은 오직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이런 것을 고린도후서에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으면 인간이고 못 믿으면 인간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강할 때는 예수를 시시하게 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같이 자신이 너무나도 실패하고 약한 자라고 느낄 때는 예수님이 부각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서 크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인간다운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감이 너무 강해서 주님을 콱 밟아 버리면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참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목표로 삼아 철야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33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으로 너를 위대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 것으로 포장해서 너를 세상적으로 위대한 존재로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해요! 예수님이 들어 있는 자라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요일 5장에 이런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4-6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를 보면서 죽을 때까지도 사랑을 입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는 자가 인생 성공자가 아니라면 누가 성공 자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우리의 성공 여부를 엿보지만 우리는 그런 기준을 채용하지 맙시다. 그런 기준을 거역합시다. 그 대신 예수님을 보라고 합시다. 그 분은 아버지의 능력으로 살았다고 말합시다. 이게 참된 인간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기준을 앞당겨서 적용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친구들의 말에 현혹되어 동의한 적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그래놓고도 과연 우리가 인간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죄의 피를 최고의 보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