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31. 하나님의 반응 (왕하 18:9-16) 18:9 히스기야왕 사년 곧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칠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8:10 삼년 후에 그 성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의 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구년이라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8: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8:12 이는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하였음이더라 18:13 히스기야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 18:14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 18:15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18:16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세상으로 부딪히는 풍랑에 이리저리 밀리는 심령으로 이 자리, 이 시간에 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서 우리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떻게 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불행으로부터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라고 말입니다. 교회 처음 나오신 분이나 수십 년 교회에 나오신 분에게나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불행과 고난을 당신이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사람은 자기의 불행과 자기의 고통을 담고 교회에 나오고 신을 찾고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악에 받혀서 신앙생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지러 오는 것 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더 고생하시고 우리 보다 더 불행스럽게 이 세상을 마감하신 그 예수님의 죽으심, 그 불행과 고통으로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저 양반은 왜 죽으셨는가? 죄도 없고 착하신 분이 왜 죽게 되었는가? 이 물음부터 우리는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밖에 챙기며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어떻게 저 분은 자기 목숨까지 철없는 우리 위해서 내 던져버렸는가 정말 내 자신이 부끄럽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요, 내가 재산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가 신앙의 출발점이 아닙니다. 빌딩 갖고 있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 열 번 갔다왔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근본으로 우리 인간을 향해 따지시는 것은, 하늘에서 보낸 내 아들의 고통을 네가 아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이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가 결정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불행에만 안쓰러워 하고 관심 갖고 조마조마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팔딱거리는 참새 가슴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주님의 희생하심에 풍덩 뛰어 들어야 됩니다. 더 이상 조마조마 할 필요가 없어요. 뭐든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신앙을 출발하려 하니까 가슴이 팔딱거리는 거예요. "지난 번 교회 한번 안 나갔으니 저주받을까? 두 번 나갔으니 복 받을까?"라는 마음과 같이 무엇이든지 신앙 출발을 내 고통에 관심 두고 시작하니까 교회 나와도 두근두근, 안 나와도 두근두근 거리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 푹 놓고 신앙생활을 해도 괜찮은 이유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피 터지면서 돌아 가셨거든요. 어떤 자도 용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땅에서 어떠한 고생과 실수와 실패를 겪었던 자도 주께서 능히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두 팔 벌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피를 네가 사랑하느냐 면서 우리에게 물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현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나의 요구사항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면 그 사람 신앙을 바르게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 신앙생활 제대로 시작한 사람입니다. "아, 예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구나."라고 예수님의 고생한 그 피에 다리를 딛고 그 속에 잠길 때 비로소 제대로 신앙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서 축복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고 저주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0년, 50년 예수 믿어도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천국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난데없는 깡패 같은 엄청난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도 밀려오고 곧이어 남쪽 유다 나라에도 밀려왔습니다. 북쪽나라는 한 순간에 점령당해서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각종 종족들을 이주해서 살게 합니다. 갑자기 혼혈아들이 늘어나겠지요. 혈통을 혼잡하게 만들어 다시는 고유한 자기 종교와 자기 종족 하에 힘을 뭉치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이 깡패 같은 앗수르 나라는 그것도 모자라서 남쪽나라까지 밀어 붙여서 유다 왕 히스기야 왕에게 돈과 재물과 금전을 요구합니다. 그 내용을 우리는 방금 읽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남의 불행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불행에도 별 관심 없는데 과거에 일어난 남의 나라 불행에 대해서 관심 갖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불행한 일에 우리는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왜 하나님 믿는 나라에 이런 불상사가 터졌느냐? 그것은 우리 들으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때 그 당시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 오늘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그 하나님 믿는 히스기야 왕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오늘 우리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의 행동도 또한 우리보고 들으라는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내 놓은 대책은 딴 게 아닙니다. '형님 잘못 되었습니다'입니다. 잘못된 것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무조건 빌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뭐가 '범죄 하였습니다'라는 것입니까? 왜 악마에게 범죄 하였다고 합니까? 이것은 바로 죄 지은 것이 있어서 범죄 하였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쨌든 이 위기를 모면해 보고자 빌어보자는 식입니다. 그야말로 꼭 우리 식이지요. 빠져 나오고자 하는 비겁함입니다. 신앙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 치어버리고 말입니다. 우선 살고자 하는 마음에 무슨 아부인들,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습니까. 돈을 요구하신다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또 14절에 보면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신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달라고 하시든 내가 드리겠으니 제발 돌아가 주소서.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앗수르 왕이 얼마를 요구했나 하면 은 300 달란트와 금 30 달란트를 세금으로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줄 돈이 어디 있어야지요. 그래서 16절에 보면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는 그 성전의 출입문에 입혀져 있는 금까지 벗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궁전의 기둥에 있던 금박까지 벗겨서 상납금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보다 깡패 나라 형님이 더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불상사를 보면서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진리를 찾아야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왜 교회에 나오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다른 종교를 가지게 되어서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의 유언에 의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바꾸었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것이 딴 게 아니라 그분이 제게 '미안하다'고 한 그 대목입니다. 그 '미안하다'는 말이 상당히 이상스럽게 들렸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를 살 때에 어떤 경우일 때 미안한 겁니까? 내가 내 것을 고수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미안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법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의 뒤에는 "내 것은 손해 안 보렵니다. 내 것 하나는 내가 확실히 챙기고 빈틈없이 간수하는 놈입니다."라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즉 "내 것이 되어버린 그 종교를 챙기다 보니 교회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라는 뜻이거든요. "내 종교를 챙기다 보니 당신의 종교를 못 챙기게 되어서 미안합니다"라는 풀이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다른 종교로 가버렸다고 멍하니 닭 쫓는 개처럼 지붕이나 쳐다보시는 분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그 인간을 따라 붙여서 기어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죽고 나서도 무덤을 열어 제쳐서라도 심판해 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죽은 자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나니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럼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야 합니까? 그 사람이 저에게 미안해야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미안해야 됩니까? "이 인간아 미안하다. 끝까지 너를 지옥 보내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식이 되어 요한복음 5장에 맞는 말입니다. "인간아, 네가 나를 피한다고 피하지만 그렇게는 안될걸. 끝까지 심판해서 미안하다. 너는 지옥으로 가야만 될 팔자야"라고 하실 분이 주님입니다. 그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아마 자기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니까 교회를 상대로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목사를 상대로 해서 미안하다고 한 거예요. 또한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가 왜 그런 철없는 말을 할까요? 그것은 이런 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 것만 있는 줄 아십니까? 내 것도 있습니다. 내 것 챙기기 바빠서 당신 명령을 못 들어서 미안합니다."라는 식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살펴보면 "네가 값으로 주고 내 것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인생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거예요. 내 것 없고 내 인생도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미안할 것도 없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것이 확고히 있을 때에만 남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차를 박았을 때에 내차 가지고 당신 차 박았으니 미안하다는 말이 되지요. 그 사람은 내 종교 가지고 목사 당신 종교 박았으니 미안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무슨 자기 종교가 따로 있습니까? 하나님 밖에 없는 이 세상에 말입니다.
방금 제가 예를 들은 이 이야기는 꼭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교회에 충성되게 나오면서도 늘 자기 것 챙기기에 바쁜 자들은 꼭 "하나님 미안합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윤리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서 자기의 불행으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자기의 고통으로부터 면제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됩니다. 차이점이 없다는 이 말입니다. "하나님 미안합니다. 제가 바빠서 교회에 못 나갑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분은 무엇을 모르고 있는 분이냐 하면 성도가 어느 장소에 가든 어느 지역에 가든 자기 일이나 자기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그 자리에서 일하게 되는 그 일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준 것이지 자기 일이 아닙니다. 운전을 하시든지 농사짓든지 하나님이 주신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눈, 귀 ,입, 심장 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자기 일은 없습니다. 자기 일이 없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분 나쁜 차원까지 뛰어 넘으라고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분 좋고 나쁜 차원까지 한 번 뛰어 넘어 보세요. 내 인생을 자꾸만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바심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내 것이라는 갑옷을 벗어버리면 오히려 반대로 세상 전체가 나의 공간이 되고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벗어나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이런 수지 맞는 장사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이 본문에서 히스기야 왕이 알아서 벌벌 떨면서 기는 장면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무리 본인이 생각하기를 "나는 하나님 믿고 있다"고 내세운 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현실 속에서 행동 자체가 이런 모습이 보이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이 현실 세상 속에서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공포에 절여 살아가는 우리 인생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요. 저는 이 시간에 본문을 잠시 접어 두고 다른 본문을 가지고 그 잘못된 원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바다에 짐승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이 얼마나 날래고 똑똑하고 힘세고 재빠르고 명석한지 ... 2절에 보니 "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나온 것이 이 짐승입니다. 이 짐승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수완이 비상한지 모든 민족이 그 짐승에게 탄복하고 자진해서 절합니다. 며칠 전 TV를 보니 북한에 무슨 투표를 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노동당 당증을 들어 보이는 식으로 투표를 하는데 모두 다 찬성입니다. 투표 결과가 100%입니다. 그걸 남쪽 사람들은 보면서 비웃게 되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북한 주민이라고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김정일이 보고 있고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니오!"라고 과감하게 부표를 던질 사람 있다고 여겨집니까? 단번에 아오지 탄광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온 가족의 장래가 그것으로 끝장나 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쪽 남한은 북한보다도 자유롭다고 여기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유의 폭이라는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학 때에 재벌구조를 깨라. 경제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치던 그 운동권 학생들이 대기업 사원모집에 면접 볼 때 자세는 공손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제가 범죄 했나이다. 제가 이 회사에 들어가면 목숨을 다하여 충성을 다 하여 신명을 다 바쳐서 일하겠나이다. 다른 회사의 정보를 빼내어서 라도 이 회사를 살리겠나이다" 라고 속으로 다짐할 것입니다. 꼭 순한 양 같습니다. 북한 김정일 앞에서 반대 못하는 것이나 현실 세계에서 먹고살기 위해 "제가 범죄 했나이다" 라는 심정으로 가슴 뛰면서 살아 남겠다고 하는 우리들이나 오십보 백보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고 바랬던 그 모든 꿈을 몽땅 가지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있는데 그것이 악마다는 말입니다. 이 막강한 악마 앞에 모든 사람이 다 경배하는데 하지만 그 악마 앞에서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보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 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나옵니다. 또한 17장 8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 책에 녹명 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이 땅의 그 어떠한 성공 유혹에서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 땅에서 왜 고난을 받습니까? 왜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공기와 하늘의 별만 있는 줄 알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니 실제로 뭔가에 의해 둘러 쌓여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강한 공포심과 강한 두려움을 주는 어떤 세력에 의해서 파묻힌 채 이 땅에 태어나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상황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이지만 그 주변에는 이스라엘보다도 몇 십 배나 강력한 권세를 가진 앗스르가 이스라엘을 포위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유다 나라 왕조차 꼼짝 못하고 벌벌 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그 때 뿐만 아니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짐승이라는 막강한 세력이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공포로 압박을 가하면서 우리를 매사에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가 교회에 와야 하는 것은 단순히 복을 챙기고 복을 따내고 도망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 우주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인간세상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점령당하고 있는가의 지혜를 확보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만 보는데 왜 겁을 냅니까? 같은 눈과 코가 있는데 대통령 앞에는 벌벌 떱니까? 왜 대기업 회장 앞에서는 식은땀을 흘립니까? 자기 부모 앞에서는 큰소리를 잘 치면서 말입니다. 아이들 키워보면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7살에는 미운 7살이라고 얼마나 저지레를 많이 합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아이들이 학교에 막 들어간 낯선 환경에 가면 학교 선생님이 무서워 그렇게도 말을 잘 순종합니다. "차려" 하면 차례를 잘합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집에서는 그렇게도 말을 안 들으면서 말입니다. 누가 그 아이의 심령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자기 입장을 변명하는 말로 흔히 "어쩔 수가 없다"고 중얼거립니다. 맞습니다. 이 '어쩔 수가 없다'는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솔직한 심정이어야 하고 그 마음이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마귀를 이겼니, 어쩌니 하는 것은 참으로 신앙이 뭔지 아직 모르고 신앙에 발을 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같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나와 보라 그래!"라고 큰 소리 치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그 사람은 마귀에게 농락 당하고 있는 자입니다. 진짜 신앙 인은 "주여 어쩔 수 없었나이다. 집에 있는 돈 보따리 강도에게 줄 수밖에 없었나이다. 내 마음이 이렇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아부하기를 몇 번이며 세상에게 고개 숙인 것이 몇 번인고. 죽을 때까지 내 행세 못 버리고 벌벌 기면서 살아 왔나이다." 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다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가 한 말을 되풀이하겠습니다. 신앙의 첫걸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나'하는 것부터라고 했지요. 이처럼 우리가 빌빌 기면서 살아가니 대신 죽으신 겁니다. 우리 힘으로 이 마귀를 못이기니 대신 돌아가셔서 그 마귀에 잡힌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그 분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내 신앙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자는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사람의 본심은 노출시키지 않고 신을 구경하러 온 다는 것입니다. 신이 벌리는 기적이나 보면서 박수나 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호응이나 해 주자는 거지요. 그걸 신앙이라고 우기는데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신기한 구경거리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구경거리를 주면 그것 가지고 자기의 속셈을 감추는 것이 인간입니다. "나 신이 하는 것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신을 안다"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상은 마귀에게 벌벌 기면서 살아갑니다. 남들에게는 신앙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또한 남들은 속아넘어갑니다. 우리는 신이 하시는 일을 구경하려 들지 말고 십자가의 죽으심부터 신앙 생활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2000년 전 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지? 왜 유월절에 피를 바르니까 죽음의 신이 넘어 갔을까? 그 피를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이면 주님이 돌아 가셨겠는가 참 부끄럽구나. 주여 저는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작이요 신앙의 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히스기야가 이웃나라에게 철저하게 영혼이 유린당했습니다. 깡패에게 당한 것처럼 당한 그 모습이 마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처럼 어찌 그리 흡사 한지요. 주여 다시 한번 십자가에 달린 그 피만 의지합니다. 아무 것도 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용서하신 그 피만 의지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이 될 줄로 믿사오니 죽을 때까지 주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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