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35. 히스기야의 기도 (왕하 20:1-7)
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0: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20: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20: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0: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20:6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20:7 이사야가 가로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 주 날~ 사랑하니 우리가 기쁠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많이 앎으로서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더욱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성경에 보니까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벽을 향하여 울면서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놓고서 저는 상당히 신기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을 대하면서도 잘 울지 않고, 부모가 돌아가셔도 잘 울지 않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심성에 있어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왔다고 해서 울까요? 그것도 통곡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벽을 향하여 심히 통곡과 기도했다는 이 모습자체가 상당히 요즘 교인들이나 교회에서 드물게 보는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순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느껴질 것입니다.
사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20장 1절에 보면 이사야가 와서 하는 말이 "너는 죽는다 너의 주변을 정리해라" 고 했습니다. 제가 만약에 여러분 집에 심방 가서 "집사님 이제 이불 펴고 돌아가실 준비나 하세요. 부동산 있는 것 정리하시고 말입니다. 제가 오늘 새벽에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게 계시하시기를 집사님이 세 시간 내에 돌아 가신답니다. 안되었습니다. 정리하십시오" 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저의 등을 보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완전히 돌았구먼. 목회 좀 하더니만, 미쳤구나. 교회 헌금하라고 협박하는 건가?" 아마 이럴 공산이 큽니다. 제가 가고 난 뒤 혼자서 벽을 향해 기도하기를 "하나님, 조금 더 살면 안되겠습니까?"라고 진심으로 울면서 통곡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성경말씀을 보노라면 현대인의 삶이란 신앙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듯이 느껴집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고민하는 히스기야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너무 순진하고 구식으로 보입니다. 요령부리는 듯한 것이 전혀 없고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성경은 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을 일러줍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종교란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복음이란 하나님이 도리어 우리를 낚아 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을 소지할 수 있습니까 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진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이 말씀을 했다고 해서 벽을 향하여 엉엉 우는 그러한 태도 방식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마음자세가 왠지 그리워집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분명히 느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울 수 있는 여유까지 있겠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놓고 엉엉 울 수 있는 열린 마음 그런 태도가 부럽고 그립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교류하는 생활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뭐라고 하시면서 다가오십니까? 아예 직격탄으로 다가오십니다. "'너의 집을 처지 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고 1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자기 성도에게 오시면서 "너 죽어!"라고 하시면서 바로 다가오십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사시면서 누구에게 협박을 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협박하는 자와 협박당하는 자의 관계와 그 긴장도는 도저히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하지요, 얼마나 무서운 관계인지.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죽어!"라고 다가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 긴박감과 공포를 이해 못합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벽을 향하여 엉엉 울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을 모르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은 그저 구름 위에서 놀고 계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너 죽어!"라는 식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합니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들을 죽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이러한 긴박감을 히스기야는 어떤 식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됩니까? 그것은 벽을 향하여 통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약하고 죄진 인간의 입장 그 자체입니다. 그런 위치에다 하나님은 모든 자기 백성을 세워놓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치는 뭡니까? 그것은 우리를 죽이는 위치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낱낱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봐주어서 오래 사는 겁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니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 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라고 되어있지요. 진작 마땅히 죽어야 될 인간이 벽을 향하여 통곡하니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15년의 수명을 연장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일단 연장된 수명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히스기야가 온몸으로 느끼는 느낌은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당연히 내 것이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덤이다고 느끼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겠지요, 여기에서 히스기야 왕의 경우에는 15년입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몇 년을 더 덤으로 얻었습니까?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요. 그 누가 알겠습니까? 지금 이 예배드린 후 차 타고 집으로 가시다가 중도에 여러분을 호출하실 지 누가 알겠습니까. 만약 돌아가신다면 그 사람은 그 때까지가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덤의 삶입니다. 그런데 미리 알았더라면 어제 밤에 벽을 향하여 통곡을 할 걸 거지요? 혹시 누가 알겠습니까 5년 정도는 추가될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와 우리와의 다른 점은 히스기야는 이사야가 미리 알려주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어떤 선지자가 안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몇 년을 살고 있던 지금 하루하루 사는 것도 덤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소에 운전을 잘하시는데 그러나 우연한 한 순간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저수지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약하냐 하면은 파리목숨입니다. 비록 선지자가 우리에게 직접 우리의 죽는 날을 안 알려주어서 통곡을 못할 뿐이지 우리가 상대하는 하나님이나 히스기야가 상대한 하나님은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즉 그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상대하든 우리를 상대하든 다가오시는 원칙을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벽을 향하여 통곡하는 자세가 정상이다 는 겁니다. 그런 열린 마음으로 늘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 히스기야에게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보고 "오늘밤에 죽으니 모든 것을 정리하라"고 했다면 히스기야는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대충 자기 인생을 정리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는 우는 겁니까? 무엇이 억울해서? 자기의 죽는 시점을 알려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잘못 질문하고 있는 겁니까? 죽는다는 것이 뭐 그리 행복한 팔자냐 라는 식으로 의아해 하십니까? 다시 언급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갈 권리가 있는 겁니다. 왜 우리는 그 분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여깁니까? 왜 반발합니까? 반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다 죽더라도 나만은 건드리지 마시요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라는 정신 자세를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상대하면서 성도가 취할 태도가 맞습니까?
저 의 강의 시간에 받는 질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살아 있다고 여기니 모든 고민이 거기서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없애고 싶다면 간단합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죽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한번 살아가 보세요. 그렇게 사시면 남은 걱정 근심은 언제 몸에 붙어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 떨어집니다. 살기는 살지만 단지 사는 목적이 죽으려고 사는 사람, 죽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은 모든 걱정 근심이 저절로 살아져 버립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잃고자 하는 자는 모든 것이 공짜이고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힘든 노동의 자그마한 소출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경을 펼쳐야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는 무엇입니까? "아하~ 누구든지 덤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이구나"라는 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자기 죽음에 대해서 히스기야는 반발합니까? 어떻게 반발하는가 한번 봅시다. 3절에 보니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엉엉 울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내가 착한 일도 많이 했잖아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 온 것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지금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는 식입니다. 선지자의 죽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현실로 간주하는 순진한 이 자세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멈추면 안되지요.
엉엉 울고 있는 히스기야의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감추고 있는 우리의 본체 부분입니다. 히스기야가 저와 여러분을 대신해서 낱낱이 다 드러내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몹시 아플 때가 있지요. 그 때 우리는 울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남들은 멀쩡한데 왜 나만 아프고 죽어가고 있는가 하면서 억울해서 우는 겁니다.
옛날에 공자도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부모 초상 후에 3년 동안 무덤을 지켜야 된다고 하니 어떤 제자 하나가 "공자님 3년 상은 너무 깁니다. 1년 상으로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하는 말이 "'네가 처음 태어나서 3년 동안 부모는 아무 일도 못하고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투자했다. 이게 다 너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는 네 부모를 위하여 삼 년도 못 참겠다는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짐승보다 더 못하다는 말이죠. 현재 자기가 멀쩡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니 태어날 때도 원래 그런가 하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무 것도 못할 때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똥오줌도 전혀 못 가리고 먹여 주어야만 살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런 시절이 공자는 3년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살았을 때에 부모에게 미쳐 보답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서 부모를 일찍 죽인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3년 동안은 베옷을 입고 울어 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저는 그런 것을 효도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나에게 잘해주었다는 조건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보답하는 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며 너무나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한 자에게만 보답한다는 것이 사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겁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우리를 대표해서 깊은 죄악 된 본성을 낱낱이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왜 죽여야 됩니까? 12-13절에 보면,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 왕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병 문안 차 자기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입장에서 보니, 큰 대국이 왕이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주니 너무 황송해서 제 자랑을 하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런 큰 축복과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니 대국의 사신이 돌아간 뒤 이사야가 갑자기 나타나서 히스기야에게 묻습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저희가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창고에 있는 것 중에 하나도 빠짐없이 자랑삼아 다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이사야가 하나님의 소리를 왕에게 전합니다. 16-18절에 보면,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히스기야가 자기가 요청해서 자기 수명이 15년 간 연장이 되었는데 그 연장된 수명 속에서 히스기야 한 게 뭐가 있습니까? 한 것이라고는 기껏 그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보물을 왕의 망발과 자기 자랑, 교만과 객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안 믿는 적에게 몽땅 다 빼앗기고 말입니다. 자 이럴 것 같으면 왕 본인이 살아야겠다고,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의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죽인다고 할 때는, 히스기야가 항변하기를 "하나님 제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저는 잘못이 없나이다"고 울고불고 하다가 막상 수명이 15년이나 연장이 되어놓고 나니 그동안 한 짓이란 기껏 자기 자랑입니까?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겁니까? 사람이 왜 자꾸만 살고자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자랑하기 좋아하며 교만하며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마치 모든 것이 자기의 공로로 얻은 양 으스대는 그 나쁜 짓을 하나님께서 낱낱이 고발하기 위해서 우리를 더 살게 하신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15년 수명이 연장되었지만 15년이 지나면 역시 똑같은 모습으로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15년 기간동안 바벨론 왕의 사자를 대하게 하신 이유는, 그 전에 평소에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 대했느냐를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 대한 것이 바벨론 왕 대했듯이 대했다는 겁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왕을 대할 때, "위대한 왕이여, 당신도 위대하지만 저도 위대합니다. 저의 창고 한 번 구경할래요. 제가 이토록 위대하고 대단합니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죽이겠다고 했을 때, 왕이 대들기를 "하나님, 저는 나쁜 놈이 아닌데 왜 저를 죽입니까? 하나님도 위대하지만 저도 위대하잖아요. 저도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과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였던 겁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 보시기에 글러먹은 정신이다 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나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건방지게 하나님이라면, "장로님에게 30년 추가", 집사님들에게는 "애라 기분이다 50년 추가" 이렇게 수명을 연장시켜 줘봤자 그 연장된 수명 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그래 나 잘났으니 더 살아야지. 하나님도 양심이 날 더 살려주어야 돼 팍팍 써야돼.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살게 해야돼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착한 일을 했으니까"라는 이런 자세가 나올게 뻔합니다. 더 살아도 쓸모 없는 인생이다. 다행히 히스기야 왕은 이런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19절에 보니 "당신의 전한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최후의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선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날 죽이려는 것도 하나님께서 잘 하신 일이고 저에게 합당한 운명이었습니다"라는 식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 이런 자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라고 이 본문 말씀이 성경 속에 쓰여있습니다. 만약 어떤 인간이 우리에게 협박하기를 "돈 내놔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인다"라고 나온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처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런 인간 보내신 것도 잘하신 일이고 저 인간을 통해서 저를 죽게 하신 일도 잘 하신 일입니다. 이 놈아 협박할 생각말고 날 죽이라. 더 살고 싶지 않다. 뭐 돈 내 놓아라고? 웃기지 마라 오늘날 내게 허락하신 덤의 인생이 마감되는 날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참새도 안 떨어지는 법인데 그래 날 죽여라"라고 해야 합니다. 평소에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살려고 하는 자는 살아도 그게 사는 것 같지도 않고 괴롭습니다. 오히려 "어제 죽어야 되는데 오늘도 살았구나 벌써 한 달 전에 죽어야 될 것도 벌써 한 달 동안 끌어가고 있구나 일년 전에 죽어야 될 인간이 아직도 왜 살아있지. 아 이건 덤이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구나. 그래 내 주제 파악이나 하자"라는 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종교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서 살아가는 진짜 신자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인간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쓸데없는 자기 자랑, 과시에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도 모르고 사는 생활을 이제 청산하고 언제든지 저를 죽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권한인 줄 알아 가볍게 남은 인생을 덤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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