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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왕하 21:1-9 / 므낫세의 꼬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왕하 21:1-9 / 므낫세의 꼬임

정인순 2014. 2. 6. 21:17

 

이근호

 

36. 므낫세의 꼬임 (왕하 21:1-9) 

 

21:1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21:2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21:3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21:4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쌓고
21:5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21:6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21:7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찌라
21:8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21: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 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높은 곳에서 살수 있는 저희들을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인간들만이 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다 라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에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사람들 손에 의해 이미 파악된 것 된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에 대해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명령권을 주었습니다. 비록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그 이름은 사람에 의해서 짓도록 맡겼습니다. 그것은 모두 다 사람의 권한 밑에 있다는 거죠.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람 아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과연 인간이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요? 만약 하나님마저 사람이 붙여준 이름이라면 그 하나님은 사람들 권한 아래 놓인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부를 때는 그 동물의 특성이나 성질을 파악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쉽게 이름을 지어 붙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마저 사람이 지은 이름이라면 하나님의 속성마저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속성이라서 사람들이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신 참 하나님은 사람이 지어낸 이름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 나라에 가만히 계셔 주시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이 지상의 모든 일들은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인간에게 지혜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월등하니 세상만사를 사람들에게 맡겨 두시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편안히 주무시고 쉬시면 된다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계신 하나님이 특정 이름을 가지고 인간세계에 등장했습니다. 출애굽기 6:2-5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서 자기 이름을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이름을 여호와라고 분명히 밝히시고 이 땅위에 일을 하시려고 나타나셨다는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어 그리 중요한 겁니까?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면 되는데 왜 하나님이 나섭니까? 출애굽기 5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에게 나타나실 때 "바로 왕이여 나는 여호와 이름으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나를 보낸 것은 여호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이 이야기가 참으로 이런 멍청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여호와를 누가 알아준대요? 만약에 은행에 대출 받으러 가서 나는 대통령이름으로 왔습니다 했을 때 은행직원들이 반길까요 아니면 박대할까요? 아마 그 은행 비상 걸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멍청하게 보지 않습니다. 도리어 부러움으로 듣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이, 사람에 의해, 사람을 위해서 움직여 가고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우고 느껴왔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대통령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멍청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나는 여호와 이름으로 왔습니다. 내 백성을 내어놓으세요" 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바로가 다음과 같은 지극히 당연한 대꾸를 합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네가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나는 여호와를 듣도 보도 못했다"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모세와 바로가 신경전을 벌리면서 다툽니다. 이 다툼이 예의상의 문제라든가 상대방을 무시했다는 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가 하면 "모세 내가 말하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왜 네가 못 알아보느냐"로 모세가 화를 내고 있고 반면에 바로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다스리고 인간들이 충만한 세상에서 여호와라는 신이 무슨 가치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엇이 그리 중요한 문제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무슨 대수냐 는 거죠. 여호와가 없어도 밥 먹고살고 농사짓고 살고 여호와 없이 한평생 탈 없이 살 수 있는데  여호와 모른다고 협박을 하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여호와라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어떻게 몰아넣고 계시는가를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신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나셔서 홀로 세상을 끌고 가신다는데 만약 여호와의 이름을 모른다든지 들어도 무시한다든지 하면 이 세상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바로의 듣기 정말 같잖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황 아무개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자, 예를 한 번 들어 봅시다. 안동에 대대로 전통을 고수하면서 살고 있는 한 유교 집안이 있다고 합시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조상을 섬기는 것을 천리로 여기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며 살아간다고 합시다. 만약에 장손하나가 도시에 가서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고 칩시다. 큰 제삿날이 되어 온 집안 가족,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인 가운데서 그 장손이라는 자가 갑자기 나서서 이야기하기를, "일가 친척 여러분, 여호와를 아십니까?" 라고 건방지게 발언을 했다 칩시다. 또 외치기를 "여호와를 모르면 이 집안은 다 망합니다. 나는 이 집안에서 자랐기에 여호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세상을 개입해서 세상 모든 움직임을 자신이 약속하신 것과 자신의 말씀한신대로 이끌고 간다는 것을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집안의 모든 가족들이 불쌍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대부분의 가족들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여호와가 누고? 대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했더니만 이상한 것에 물들었데, 아 이거 집안 망하겠다. 무슨 조치를 취하든지 손 좀 봐야겠네"하고 그 장손을 죽이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는 근본적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여호와를 아십니까?"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십니까?"입니다. 물론 사람들이야 '여호와'라는 세 글자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여호와의 이름'이 그 위력을 알고 계신가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할 때에 왜 여호와 이름을 불러야 우리가 구원을 얻느냐를 곰곰이 생각해보셨느냐 이 말입니다. 왜 인간의 이름, 수많은 다른 이름, 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는데 하필이면 여호와의 이름 만이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 문제가 지금 먹고살기에 바쁜 일과 속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호와 이름이 천덕꾸러기가 되고 찬밥 신세가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릴 때보면 같은 반에 힘을 쓰는 학생이 더러 있었지요. 그 학생은 다른 학생들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사지요. 용기 있게 나쁜 짓을 하는 그 아이를 남자답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속은 채우지 않고 겉멋만 내고 허송 세월을 보내면서 아까운 시간 다 보내다가 나중에는 조직폭력배가 됩니다. 그리고 건달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젊을 때 교회에 나올 때는 여호와가 어떻고 예수가 어떻고 하다가 막상 사회에 나가니까 여호와가 왜 나타났는가는 관심이 없고 여호와가 무엇 때문에 자기 이름을 걸고 이 세상에 나타났는가도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등록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돋보이게 하는데 신명을 바칩니다.


  자, 어릴 때 믿던 여호와 하나님, 어릴 때 믿던 예수님은 결국 우리들의 타락과 방탕과 세상 사랑에 맥도 못 추고 기가 꺾여 계신 겁니까?  "나 인간에게 못 당하겠다. 아무리 섬겨라 해도 안 섬기는데 난 들 어쩌겠노. 내가 사람들에게 졌다. 나는 그저 사람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으련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이 손을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것이 용납이 안됩니다. 2-6까지를 보면,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므낫세 왕은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골라서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쁘다', '악하다', '가증 되다'라는 말들은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나 본 것이고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관여한 바가 없다고 한다면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어떻게 사람이라는 것이 꼭 여호와라는 신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살수가 있습니까. 심심해서라도 날마다 새롭고 짜릿한 것을 하고 싶잖아요.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므낫세의 일이 전혀 악한 일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의 취미 생활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겁니다. 점을 치던 무엇을 하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며 타인이 관여하거나 간섭도 해서는 안 될 일일 것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알아서 내 마음대로 섬기는데 누가 내 자유를 훼방하려 감히 덤벼드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나 교회 밖에서 만난 사람들의 마음이 대부분 이러합니다. "너는 네 종교 ,나는 내 종교, 내가 네 종교 간섭 안 하듯이 너도 나 종교 간섭하지 말아라."라는 식입니다. 이런 종교 선택의 자유, 신봉할 신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쌓고" 또  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나옵니다.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찌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므낫세에게 하는 말씀은, "여호와의 이름을 영원히 두기 위해서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거룩한 성전을 세웠는데 이 므낫세가 내 이름을 무시하고 내 이름 있는 곳에 우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화가 굉장히 많이 났다는 겁니다. 진노가 극을 달했다라는 내용이 6절에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무시당하고 짓밟히기 때문에 나는 저 므낫세를 그냥 두지 않고 극한 벌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집의 문패에 자기 이름을 써서 붙인다면 여러분이 가만히 보고 계시겠어요? "이 사람아. 이 집은 내 이름이 있는 곳이다. 왜 내 이름을 무시하고 너의 이름으로 바꾸느냐"하고 그 사람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름이 약속하신 계획이 따로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이렇게 되게 하겠다"는 작심을 하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없던 데서 새로 있게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에다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걸었던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 악독한 애굽에서 나왔던 것은 이스라엘 사람의 능력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니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전해 준 그 이름을 무시하고 그 능력을 무시한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왕과 그 집과 온 애굽 사람을 쳐서 하나님의 극도의 분노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모집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로 이 약속의 땅에서다 심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살게 된 것에 대해 다윗 왕은 다음과 같은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이름덕분이며 하나님의 약속덕분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이점을 이 땅에 영원히 기념하고 그 이름을 모셔놓기 위해 여기에 성전을 세우고 싶습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이 약속에 땅에 서있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위력과 능력의 덕분으로 성전 짓고 편안히 살고 있습니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 므낫세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만이 기념되어야 될 거기에다가 우상을 심고 바알 상을 세우고 아세라 상을 섬기고 일월성신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즉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 하는 생활을 하겠다 이것이 나의 생활 신조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예 온 나라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가 누군데!"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가 누군지 간에 상관없이 내가 섬기고 싶은 내가 골라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한번 봅시다. 9절에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 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왕을 봅니다. 왕이 보여주는 그 대범함을 봅니다. 마치 아까 제가 예를 든 것처럼 건달 학생을 모든 다른 동급생들이 참 남자답다고 감탄하면서 부러워 눈총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왕의 행동을 본 백성들은 "아 저렇게 여호와를 무시하고 모독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구나 우리도 그렇게 하자"하고 왕을 따라 악을 같이 행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이전의 열왕 때보다 더욱더 심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저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소개 올리고자 합니다.  요한 1서 4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세상으로 결정 내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런 결정 상황에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가장 큰사랑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는 이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우리 힘으로 얻을 수도 없고 우리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겁니다. 그 사랑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 1서 4장 9절에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바와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는 못 빠져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아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는 거죠. 살린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 그냥 있으면 저주받는다는 말입니다. 


  예배 시작 때에 교독했던 시편 91편에에 보면, "저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건진다는 말은, 건짐을 받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건짐을 받는 요건은 딴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로지 한편단심 '하나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의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건지고 사랑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이 땅에서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은 상태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의 이름, 오직 주의 이름에만 매여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 보다 귀한 것이 이 하나님의 이름, 곧 주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낫세왕은 어떻게 생각했다고요?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될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철저하게 밟았고 무시했다는 이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왜 그리 중요한 지를 감도 못잡고 있어요. 그저 남들처럼 밥이나 잘먹고 잠이나 잘 자고 직장이나 잘 다니면 됐지 그 외의 것이 무어거리 중요하냐고 따지며 나옵니다.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낫세의 심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으로 멸망시키기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안즉 저를 건지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우리의 운명이 걸리는 거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이 지상에 등장했다면 그 나라의 멸망도 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여호와 이름을 무시한다면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실패작입니다. 이보다도 더 큰 실패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돈을 얻으려고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돈만 바라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제자가 그 거지를 보고 그 거지가 무엇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로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이 돈이 되는 겁니까? 예수 이름으로 통장에 저축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까? 예수 이름이 재물로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지금 거지는 돈 달라고 앉아 있어요. 우리도 또한 거지처럼 교회에서 돈 축복 달라고 목사 앞에 하나님 앞에 마음의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입니다. 므낫세가 그토록 무시하고 깔보았던 그 하나님의 이름을 그 거지에게 주니 그 앉은뱅이가 다시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은과 금을 주는 것보다 낫지요? 즉 "주의 이름을 불러라, 그러면 네가 산다" 이런 말입니다. 물론 안 믿는 므낫세 같은 인간에게는 허황한 것으로 보이지요. 거지가 돈 달라고 하는데 예수 이름을 주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고 따지겠지요. 이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있는 곳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베드로과 요한, 당신의 경건과 능력으로 저런 기적이 일으켰지요."라고 기뻐했습니다. 자기들도 같은 능력을 받을까 싶어서 그랬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주의 깊게 한 번 들어보세요. 베드로의 말이 "이 사람들아 이 사람이 걷는 것이 나의 경건한 신앙생활과 나의 능력으로 나온 것처럼 왜 나를 주목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부흥사들에게 물어보세요. 뭐라고 하는지. "이것은 나의 많은 기도 때문에 나온 것이고.. 이런 일은 내가 성령 받아서 나온 능력이고…"라고 떠벌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기입니다. 여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나의 능력으로 이 사람이 낫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나를 주목하는 거예요. 이 사람을 낫게 하신 이는 아까 내가 준 예수 그리스도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능력이 이 거지를 걷게 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돈을 바라고 손을 내 밀던 그 거지가 예수의 이름을 믿더라 이 말입니다. 돈도 안되고 밥도 안될 것 같은 그 예수님의 이름을 말입니다. 그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비록 거지라도 므낫세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사도행전 3:16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과 동료 요한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거지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그저 목격자일 뿐입니다.  그 거지가 뭐를 믿었는가?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소개하는 그 이름을 꽉 잡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살길이다. 이 분의 이름으로만 산다."고 믿었습니다. 왜요? 구약 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홍해가 갈라졌거든요. 그리고 지금 이 시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음으로서 죽음에서 삽니다. 자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강단에서 무얼 이야기합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저런 일을 하셔야, 이런 행위를 보여 주셔야, 요런 선행과 행함을 보여 주셔야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행함을 말미암아 복 받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앉은뱅이 거지가 십일조를 했습니까? 전도를 했습니까? 예배를 참석했습니까? 그 거지가 낫게된 것은 무엇입니까? 예, 곧 나사렛 이름으로 낫게 되었어요.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목사님 시킨 대로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는데 왜 복이 없습니까? 목사님 시킨 대로 예배를 빠지지 않고 꼭 참석했는데 왜 가정에 불화가 있습니까? 목사님 시킨 대로 전도도 많이 했는데 취직이 안됩니까? 이건 전부 돈과 은과 금을 위해서 하나님께 손을 내 밀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부흥이나 성장을 위해 거지 손을 하나님께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의 이름으로 주신 것은 그런 취지가 아닙니다. 촌에서 올라온 노부부가 뷔페 식당에 가서 차려놓은 음식을 그저 먹기만 하면 되는데 구태여 주방에 가서 자기가 솜씨 부려 자기가 꼭 음식을 해 먹겠다면 나서면 정말 말도 안되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도록 다 조치를 해놓으셨는데 이것도 모르고 자기의 선행과 윤리로서 천국의 문을 뚫어놓겠다고 덤비니 이런 횡포가 또 있습니까!


  현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다 주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될 문제 인 겁니다. 구약 때 여호와 하나님이 없던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신 것이 주의 이름의 솜씨이고 신약 때에 우리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힘과 모든 능력이 다 예수의 이름으로 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주의 이름으로 모든 죄도 씻음 받고요. 그러니 성도에게 그 어디를 쿡 눌려도 주의 이름만 소리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덕분입니다. "그럼 네 것은 뭐냐?" 할 때에 우리는 "나의 것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는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을 무시합니다마는 나중에 주의 이름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양과 염소로 나누어진다는 것, 이점이 주의 이름을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따봉이지요. 주의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고 믿지 않는 자는 예외 없이 지옥행입니다. 이것 하나 좋으면 나머지는 볼 것 없이 나쁩니다.


  끝으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19:13-15에 보면 영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마귀가 하는 말이 예수도 내가 잘 알고 사도바울도 내가 아는데 네가 어디서 사기 치고 있느냐고 합니다. 악마도 예수님을 압니다. 악마는 사도 바울이 오직 복음만을 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계시다면 그 사람은 악마보다 아이큐가 더 낮은 사람입니다. 악마는 예수 이름 부르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왜냐고요? 그들이 악마가 못 들어가는 천당을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지옥은 가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악마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예수님은 중요하지 않다고 철저하게 믿게 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설픈 사람이 예수 이름을 도용하다가 악마에게 들킨 거지요. 목사보라고 주위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보라고 하는 것은 안 하는 것 보다 못해요.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이 세상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세요.


  주의 이름으로만, 즉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능력으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고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아까 읽었던 교독문을 다시 읽어보면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어떠한 마지막 때라도 그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이 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 엉터리 같은 생활을 청산하게 하시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