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3:20-25) 목자의 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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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자의 피 2002년 8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 20-25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안맞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할 때는,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에게 제일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는 대표적인 것이 돈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아갈 때는, 결코 인간에게 값을 요구할 만을 것을 가지고 오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값없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오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성의조차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사랑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인간 세계에는 무참하게 천대받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은 자기 딴에 성의껏 장만한 헌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있을 인간이 아닙니다. 가인이 애초부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삐치는 일도 없었을 것인데 자신이 뭔가 신을 향하여 했다다는 것을 고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조치에 대해서 갑자기 안색이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복에 나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그래서 이 땅에 피가 흘려졌습니다. 아벨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이 인간 세계에서 피를 흘려야 하시면서 아벨의 피와 연관시켰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벨의 피와 연관시켰을까요? 그것은 아벨의 피는 난데없이 생긴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흔적이 됩니다. 즉 아벨의 피에는, 인간들에게 내장되어 있는 원초적인 무지와 죄악이 어떤 식으로 밖으로 표출되는가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아벨의 피'에는, 인간들이 하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바른 모습에 대해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몸짓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 아벨의 피와 자신의 피를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곧 인간 전체가 얼마나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유발된 정신 상태가 곧 이 땅에서 하나님마저 배척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성의의 정성을 다할 때는 하나님조차 함부로 무시해서는 아니된다는 주장이 곧 인간의 마음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인간 세상에 무엇을 앞세우면서 오셨습니까? 오늘 본문 20절의 말씀처럼 '언약의 피'입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언약의 피'입니다. 그냥 '피'는 모든 인간이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피'는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언약의 피'를 앞장 세우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아느냐?"고 다구치면서 말입니다. 물론 이 언약의 피는 '값없이' 주시는 겁니다. 댓가를 받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의 피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속내를 갖고 있는가를 다시 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인간들의 순교의 피는 아닌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지킬 위인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 밖에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구원이나 죄용서 문제 때문에 걱정할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하시고 마무리 되었던 그 피가 곧 언약의 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피 가지고 무엇을 하시려고 합니까? 출애굽기 19장과 24장:8절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성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려고 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이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요? 백성들 머리 위에 그 언약의 피를 뿌립니다. 즉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언약의 피로 온통 적시어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자 합니다. 피가 묻힐 때만 거룩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가안의 제사처럼, 돈 바치고 재물 바치고 자신의 성의와 열성을 바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결국 이 땅에서 집단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드는 원인을 제공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된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인도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는 기존의 모든 조직체에 있어 지배자의 통치력을 확고히 하는데 좋은 비유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위상 관계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양 천마리를 모아놓아도 목자 하나 보다는 못하고 목자 한 사람의 발언이 양 만 마리의 지혜보다 더 낫다는 겁니다. 무조건 맹종하고 복종하라는 분위기를 강요하는데는 목자와 양의 비유 더 멋진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자칭 목자라는 작자들의 음흉함을 주로 드러내시는 말씀도 많이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같은 경우에 보면, 선한 목자와 선한 목자 아닌 자로 나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한 목자와 강도와 도적과 이리로 분류해 버립니다.
즉 "나는 선한 목자 노릇에 영 자신이 없으니 조용히 양 곁을 떠나버리자"라는 그런 자들이 목자를 사칭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와 양이다. 내 밥이다. 닥치는대로 뜯어먹고 갈취하자. 더 나올 게 없는 양은 방치하거나 차버려야지"라고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선 자들이 소위 선한 목자로 행세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선한 목자는 어떻게 나오시는 분입니까? "여러분, 저는 선한 목자입니다"하고 떠벌이고 다니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아예 양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귀한 목숨을 포기한 분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그냥 목자가 아니라 '큰 목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크다는 말입니까? 더 강압적으로 양을 지배한다고해서 큰 목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큰 목자인지 정말, 말 안듣고 말썽피우고, 하찮고, 보잘것없고, 제 갈길도 모르는 시시한 못된 양을 위해서도 과감하게 자기 목숨을 던지실 정도의 큰 목자입니다.
즉 죽음으로서 선한 목자의 목자됨을 보이신 겁니다. 세상 목자들은 가르치는 것으로 목자의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여깁니다. 자기 말을 안듣고 안 따라주면 양 아니라고 미워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르치는 선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자기 양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들 위에 말입니다. 출애굽기의 상황처럼 피를 뿌리신 겁니다. 인간들이 어떤 점에서 철이 없는가 하면, 사는 이유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살겠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사는 이유도 없이 살면, 성공을 했던 출세를 했던 그런 것은 정말 무의미한 짓들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는 의미를 못 가지는가 하면, 만약 뭔가 보람있는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싶더라도 죽음이라는 세력이 밀려와서 그것마저 싹 쓸어가버리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의 소켓트에 꽂히지 않는 한 그 사람이 무슨 거창한 위업을 달성해서 당장 본인에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은 본인에게 허무한 것이 됩니다. 마치 풀의 핀 꽃은 화려하지만 풀 자체가 시들어 간다면 결국 꽃도 그 원줄기의 풀과 함께 사그라들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진정한 의미는 생명선과 통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점을 하나님은 아시면 예수님도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약의 피'이신 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겁니다. 그 언약의 피를 주시기 위해 목자이면서도 양을 위해 귀한 목숨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언약의 피가 생면선이 되는 겁니까? 보통 인간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보따리를 조사해 보면, 평소에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서 골라 잡았던 온갖 잡스런 소망들은 다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야 이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저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흘리신 언약의 피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완성으로서 그야말로 '의'의 결정판입니다. 마태복음 7:1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완성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양을 위해 흘리신 목자의 그 피는 이웃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것은 곧 의입니다. 의가 있으면 저주는 물러가고 복만 주어집니다. 영생이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피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즉 그 언약의 피 안으로 초대된 사람은 마치 풀장에 풍덩 빠진 것처럼 예수님의 의의 풀 안으로 풍덩 빠진 것이 됩니다.
그야말로 값없이 얻어진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과 언약의 피가 있는 자만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의 풀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해서 의인이라 인정받았습니다.
로마서 4:4-8에는 다음과 같이 그 내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의의 세계 안으로 초대받은 것도 은혜요, 그 안에서 이 의의 세계를 믿게 된 것도 아브라함의 노고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세계 속으로 초대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그 복이 우리 안에서도 작용함을 세상을 알리고 하시는데 있엇습니다. 시편 135:4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이 땅에 나타났으며 오늘날 성도들이 왜 출현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새로운 소유물을 생산해 내신 결과인 것입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 성도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을 사는 이유입니다. 값없이 주신 것이니 그 어떤 값어치보다 더 가치있게 간직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식으로 불안하게 살지 말고 생명선을 꽂힌채로 오직 하늘의 영생만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8. 양의 큰 목자(히 1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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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 주어진 언약의 피 !!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아는 것이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는,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기에게서 제일로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는, 그것을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언약의 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언약의 피는 요한계시록에게 보면 ‘값없이’ 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구원의 피가 되고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에게 값을 요구할 만을 것을 가지고 오시지를 않고, 오히려 값없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나가는데, 그게 ‘돈’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왜 돈을 들고 나갑니까? 그것은 바로 “나에게 돈이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에게도 중요하겠지” 라는 것인데, 물론 엄청난 착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조차도, 그게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이런 착각을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가인’ 이라는 말이죠. 이 사람은 자기 딴에는 성의껏 장만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했는데, 물론 자기의 일방적인 생각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닌데, 가인이 애초부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삐치는 일도 없었을 것인데, 자신이 뭔가 신을 향하여 했다고 하는, 그 ‘행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만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갑자기 안색이 변하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보복에 나서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다는 겁니다. 그 결과로서 이 땅에는 피가 흘려졌는데, 그게 바로 ‘아벨의 피’ 라는 말이죠.
왜 하필이면 ‘아벨의 피’ 인가?
여기서부터 어려워지는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평가했을 때 어떻게 했는고 하니까, “이 아벨의 피와 나의 언약의 피가 한 통속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구원해주시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아벨의 피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아벨의 피는 난데없이 생긴 피가 아니기 때문인데, 이렇게 아벨의 피가 흘려지게 된 그 사건의 배후에는, 뭔가 인간들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다는 말이죠. 즉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고 하는 흔적이라는 것이죠. 기껏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죽이는 쪽으로, 상황이 그렇게 돌변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TV에 나오는 CF를 얼른 보니, “니들이 게맛을 아느냐?”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물어보신다는 겁니다. “니가 하나님을 알고 돈을 바치고 봉사하고 충성을 하느냐?” 라고 말이죠. 물론 여기서 모른다고 하면 천만다행인데, 그런데 모른다는 것이 모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진실로 아는 자를 묵사발로 만들고 피를 흘리는, 그리고 그것을 반복시키는 작당을 계속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봉사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진짜 하나님의 종을 완전히 이단으로 몰아 부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하나님에게 충성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 자꾸만 생각난다면, 그런 사람은 백발백중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데, 즉 자기가 지금 가인의 노선에 섰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세울 때 땅을 바친 것을 아는가?” 라고, 주로 은퇴 장로님들이 목사가 새로 부임해서 오면 그런 이야기를 자랑삼아서 하는데, 혹은 기도를 좀 한다는 권사라고 하면, “나의 낙타무릎을 아는가?” 라고 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겁니다.
값없이, 값없이 !!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무엇을 가지고 오셨는지, 그게 중요한데, 그것도 전혀 ‘값없이’ 말이죠. 돈을 받고 나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짜로 나눠주시는데, 그러니 ‘값없이’ 나눠주시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규정하면 된다는 말이죠. 진정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인지, 그것을 이 시간에 다시 조립해보자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피’ 인데, 그것을 더 줄이면 ‘피’ 라는 말이죠. 피는 피인데, 왜 언약의 피인고 하니, 그것은 인간들이 애를 써서 흘린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지킬 위인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흘린 ‘피’ 라는 겁니다. 즉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완수가 되었다. 구원에 대해서 더 염려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런 최종적인 증거물로서의 ‘피’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죄도 확실하게 다 씻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피인데, 그것이 바로 ‘언약의 피’ 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피를 가지고 무엇을 하십니까? 왜 피를 흘리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뿌리기까지 하는데, 우리나라의 이단종파인 ‘부두교’ 입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죠.
피를 뿌려라 !!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피로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성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려고 하시는데, 즉 거룩한 백성이 태어나게 하신다는 말이죠. 어떤 식으로 말인가요? 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가 백성들 머리 위에 피를 뿌리는데, 그러면서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바로 언약의 피다” 라고 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속마음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가 생산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제시한 방식으로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방식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고 하니, 그만 피를 확 뿌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피를 뿌리게 되면, 우리 인간들은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은데, 물도 기분이 나쁜데 피는 오죽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아니라, 그렇게 피가 뿌려질 때만 거룩한 자기 백성이 되는데, 그렇게 해야 ‘이스라엘’ 이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닌데,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가인의 제사처럼, 돈을 바치고 재물을 바치고 자신의 성의와 열성을 바치는 식인데, 주로 바치는 것인데 말이죠. 왜 바칩니까?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아서 복을 받으려고 바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평생을 연구해서 만든 아이디어인데, 그게 ‘종교’ 라는 말이죠.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는 일종의 인간들의 데모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데, 즉 “다른 하나님을 찾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나는 너희에게 나갈 때 피로서 나가는데, 다른 것이 없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고 언약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양과 목자 !!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예수님을 ‘양의 큰 목자’ 라고 하시는데, 이게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겁니다. 양과 목자의 사이가, 이게 얼마나 그만 기존 종교단체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치할 수 있는 멋진 비유가 된다는 말이죠.
(히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다시 말해서, “양이 어디서 까불어?” 라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는 목자인데, 그것도 큰 목자라는 말이죠. 그렇게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을 이 자연세계에서 찾아낸다면, 가장 멋들어진 것이 바로 이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겁니다. 양이 천 마리가 되어도 목자가 될 수 없는데, 양은 목자 앞에서 꼼짝도 못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목자가 최고인데, 이것을 잘 이용하면 교주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지배하고 통치만 하면 되지 싶은데, 왜 피를 흘려야 하느냐는 말이죠. 갈 바를 모르는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양들을 위해서 말이죠. 이것이 어디 헌혈을 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인데, 왜 그렇게 해야하냐는 겁니다. 양들이 잘 모르면 가르치면 되는데 말이죠.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먼저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거기에 목자와 양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부터 먼저 하시는고 하니, “어떤 놈이 목자가 아닌가?” 라는 것부터 말씀하신다는 말이죠. 목자의 생계를 위해서 양들이 존재한다고,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놈들은 도적이고 강도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가 아니면, 모두 강도와 도적 !!
그러면서 선한 목자와 선한 목자가 아닌 자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한 목자와 강도와 도적과 이리로 분류해버린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선한 목자 노릇에는 자신이 없으니, 조용히 양의 곁을 떠나버리자” 라고 하는 자들이 선한 목자가 아닌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와, 양이다. 내 밥이다. 닥치는 대로 뜯어먹고 갈취하자. 더 나올 것이 없는 양들은 그만 차버려야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선 자들이 소위 선한 목자로서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양을 이용해 처먹는데, 그러니 방향성이 있는데, 매우 적극적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선한 목자는 어떻게 나옵니까? “여러분, 저는 선한 목자입니다” 라고 하면서 떠벌이고 다니는 분이 아니고, 선한 목자는 아예 양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귀한 목숨을 포기해버린다는 겁니다. 역시 방향성이 있는데, 자기 목숨을 바칠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자기 양을 목숨을 바쳐서 살리려고 하는 목자는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러면 왜 인간은 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죄를 타고났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말이죠. 죄가 곧 자기의 본질인데, 전혀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출생지가 곧 죄의 자리라는 말이죠. 죄를 지어서, 그게 모아져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콩나물이 물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자라듯이, 그렇게 우리 인간은 죄를 영양분으로 삼아서 자라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이 우선이지,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그저 흉내만 낼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본질은 아니라는 말이죠. 제 아무리 희생과 봉사를 해도, 그것은 반대급부를 기다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선한 목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어떤 목사는 그대로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선한 목자는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본질부터 그 다름을 알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이다” 라고 하는 것은, “제2, 제3의 선한 목자는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
그러니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본질을 받아야 하는데, 결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그러니 끊임없이 예수님으로부터 그 마음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 순간만큼은 목자 행세를 하게 되는데,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 그 공급이 중단된다고 하면 사도바울도 목자행세를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마음은, 자기 자존심이 그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장악하시는데, 그것을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통치가 여전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여전히 사도의 길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하는데, 참으로 솔직한 표현인데 말이죠. 또한 고린후서 8장에서도 “너희들이 헌금을 한 것은, 너희가 아니요, 주님의 은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헌금을 했기 때문에, “나는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전혀 모르는 자라는 말이죠. 통치라는 것은 완전히 짓밟히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소리를 전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낼 때,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면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이죠. “너는 누고? -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참으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주님이 아닙니까? - 그래, 맞다” 라고 되어야 천국생활이 즐겁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들이 하나님을 모릅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즉 악마가 우리 인간의 눈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껏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가짜 하나님만 실컷 양산해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가 이 땅에 이렇게 번성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게 한 수 가르친다는 겁니다. 즉 “예수야, 너는 어느 신학교를 나왔지? 너의 선생이 누구지? 너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성전을 만들게 하셨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만나게 해주셨는데, 그러니 성전이 길인데, 그러니 왜 너는 자기 자신을 감히 길이라고 해? 그러니 너도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의 가르침에 복종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성깔을 부리시는데, 성전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는 말이죠. “이런 것들이 뭐가 필요하단 말이야?”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러면 그런 예수님을 보고 “과격하다. 폭력적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가짜인데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성깔을 부릴만하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천국에 가는 줄로 아는데, 그게 너희들의 한계인 줄은 아는데, 하지만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죄를 사해주는 능력이 있는데,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예수님을 짓밟고 무시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당기고 해도,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하는 그 희생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이상하고 낯설고 생뚱맞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사는 의미가 없어 !!
저는 그 이유를 어디서 찾는고 하니, “인간들은 사는 의미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의미도 없으면서 성공과 출세를 언급하는데,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있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성공은 무슨 성공이냐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침몰하는 여객선 안에서 고스톱을 치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흔들고, 피막에, 쓰리고에 점수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사람에게 “축합니다. 당신은 대박입니다” 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의미도 모르고 고스톱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인간의 진정한 의미는, 마치 형광들이 아무리 좋아도 코드를 꼽아야만 불이 들어오듯이, 그렇게 생명이 우리 인간의 그 어디에 꼽혀야만 한다는 겁니다. 즉 생명이 우리의 이 죽음의 육체에 꽂혀야, 그렇게 해서 생명의 의미가 흘러 들어와야, “아하, 산다는 것이 이런 의미구나” 라고, 그렇게 스파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하늘의 영생이 자기 속에 흘러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다고 간주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코드가 그만 빠져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왜 살지? 어떻게 살지? 에이, 모르겠다.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 라고 하면서, 감각적이고 찰나적으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왜 ‘언약의 피’ 인가?
이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에 도착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데, 조금 전에 일종의 비유로서 하늘에서 전기선을 당겨온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는 오늘 본문 20절에 나오듯이, ‘언약의 피’ 라는 겁니다. 왜 언약의 피가 나오느냐는 말이죠.
(히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그냥 간단하게 우리의 코나 입에 적당하게 코드를 꼽아주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언약의 피를 들고 와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우리로서는 너무나 부담스럽다는 말이죠. 왜 하필이면 생명을 언약의 피에 담느냐는 겁니다.
다윗의 경우에 !!
그 이유가 있는데, 시편 23편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는데, 이사를 가면 교회에 액자로 만들어주는 성경구절인데, 그러면 받으면서도 “봉투로 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죠(ㅋㅋ).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은 지나가는 소리이고, 이 시편 23편을 기록한 이가 다윗인데,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생명의 코드가 자기에게 꼽혀서, 남들은 모르는데 자기만 기름부음을 받아서, 그것도 사무엘이 몰래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기름만 부은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임하셨는데, 반면에 사울 왕은 악신이 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신을 받았다는 것을 누가 아는고 하니, 악신을 받은 사울 왕이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아니, 내가 왜 이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도 악신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후회를 하는데, 이것은 가룟 유다와도 같은데, 즉 “내가 왜 예수를 팔았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자살을 해서 지옥으로 갔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만 믿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뜯어보면 전부가 자기가 원했던 것이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가 잘 노릇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믿습니다’ 라고 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은데, 다윗은 성신을 받고 나서 그때부터 수난과 고난을 엄청 받는데, 그래서 다윗도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편 22편 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22:1)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롓사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진정으로 고난을 압니까? 자기가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단지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을 알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남들과 대화도 전혀 되지 않고, 교회에 가도 교제는 고사하고 그야말로 분통이 터진다는 겁니다.
목사들은 한결같이 교회부흥과 헌금을 강조하고, 교인들은 거기에 동조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분명 그게 아닌데, 즉 교회가 아니라 생명의 코드라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소리를 해도 전혀 반응이 없는데, “니가 미쳤나?” 라는 소리나 하고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무엇을 알았는고 하니, 자기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돌발적인 사태로 몰아가는 것이 진정한 목자가 양을 몰고 가는 영생의 길이라는 겁니다. 여기 시편을 계속해서 보면, 다윗은 그야말로 친구도 없는데, 오히려 친구들이 다윗이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 극도의 왕따, 잘림, 즉 사회성이 완전히 차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다음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양 됨 자체가 곧 즐거움 !!
그러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목자가 안겨다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목자가 됨 자체로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으로 자기의 양 됨 자체도 완결형이니 말이죠. “나는 양인데 국무총리가 되는 양, 나는 양인데 재벌이 되는 양”,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목자의 양 됨 자체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극도의 소외성 가운데서도 자기는 즐겁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생명의 코드가 아니라면 무엇이냐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모르는데, 왜냐하면 죽음이 있는 이상, 자기가 의미를 가져도 그것이 죽음의 세력으로 인해서, 그게 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시들어버린다는 겁니다. 한 번 인기는 오래가지 않는데, 그런데 그 인기에 대한 기억이 오래 남아서, 그때는 인기가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는 말이죠. “나는 잘 나갔었는데, 왜 이렇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교하고 투쟁하고 성취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런 짧은 순간에 삶의 보람을 찾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또 어떤 죽음의 세력이 쳐들어올까 싶어서, 이미 뭔가 가지고 있어도 조마조마하다는 겁니다. 남편이 지금은 성실해도 언제 바람을 피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계속해서 지속되는 의미는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살게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외부에서 오는 생명의 선은 그만 차단되고 없는데, 그러니 어디까지나 자기가 자기를 살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한 사람에게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목자이고 또한 자기가 양이라는 것이죠. 자기가 감독이고, 자기가 배우인데, 그래서 이런 노래도 있다는 겁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만 편지”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편지는 다 썼던 그렇지 않았던 찢어버려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머리 위에 언약의 피가 있기에, 즉 하나님께서 “여기 있다. 먹어라” 라고 하면서 주시는 언약의 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편 23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목자가 양을 인도함이 있어서, 그 방식이 바로 약속에 의해서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약속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언약의 피’가 나오는데, 언약과 약속은 같은 의미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아까 인간들의 기도 보따리를 풀어보면, 전부가 다 세속적인 것들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남을 이기는 것, 자기가 성공하는 것, 등등이 말이죠.
완벽한 ‘하나님의 의’ !!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보따리를 풀어보면 거기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의는 그야말로 ‘완벽하고 완전한 의’ 라는 말이죠. 왜 인간이 죽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러니 우리가 병들고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즉 죄의 세력 때문이라는 말이죠.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혀 봐주지를 않는데, 다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쓴 어떤 책에 보면 ‘죽이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죽여야 다시 사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중고는 부수어 버리고 신제품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폐차장에 가서 박살나는 차들을 보고 아까워하면 안 되는데, 새차로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라는 동요도 있는데,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그게 목자라는 겁니다. 즉 “양아, 죽어라. 생명의 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양의 자존심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날아가 버리는데, 그래서 시편 135편 4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말이죠. 인간은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 그러니 어떤 기대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의’ 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말씀과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죠.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데, 그런데 만약에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죠.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신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신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시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의라고 하면 복을 주시고, 죄라고 하면 벌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정해주지를 않는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게 하나님의 의란 말이죠.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의 전부인데, 그런데 인간은 타고나기를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상태에서 어떻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의를 만들 수 없는데, 그 의는 공짜로 값없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만드시는 ‘의(義)’ !!
그 의를 예수님께서 만드시는데, 어떻게 만드시는고 하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계명은 누구만 지킬 수가 있습니까?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만이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게 최고의 계명이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랑의 결정적인 증거물로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의 피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피를 흘리고 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피는 단순히 우리를 살리고자 흘리신 피가 아니라, 우리를 살린다는 것이 이웃사랑의 절정이고 완성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희생을 하심으로서 이웃사랑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것이 의로움이고, 그것이 곧 천국이라는 상황을 예수님께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초대를 받았다는 말이죠.
우리는 분명히 죄인인데, 그런데 목자의 음성을 들은 양이 되고 난 뒤에는, 우리는 이제 이래도 이웃사랑, 저래도 이웃사랑,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도 의, 저기도 의, 그렇게 ‘하나님의 의’ 라는 풀장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 이 꼴이라도 하나님의 의에 흠뻑 젖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까, “정말 그럴듯하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깜빡 속아넘어가겠다” 라는 식인데(ㅋㅋ),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함, 즉 전도, 기도, 전도, 봉사, 예배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의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 안에서 “값없이 얻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껏 헤엄을 치고 있는데, 누가 옵니다. 그래서 만나보니 아브라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해서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았을까요?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서 로마서 4장 3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래도 의, 저래도 의 !!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일을 하지 않아도 의, 경건치 않아도 의, 바로 이러한 의의 세계 안으로 초대받은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한 그 안에서 이 의의 세계를 믿게 된 것도, 그게 아브라함의 노고가 전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란 말이죠. 즉 “이래도 의, 저래도 의”,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은 반대급부로 뭔가를 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실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기에 말이죠. 그래서 시편 135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자기 소유로 택하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거룩하다” 라는 게 아니라, “너희들을 택하신 분이 거룩하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이 땅에 나타났으며, 오늘날 성도들은 왜 출현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새로운 소유물을 생산해내신 결과인데,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인데,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이니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게 간직하면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를 언제나 자랑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와서도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헌금도 남들보다 더 많이 하려고 하니, 봉사도 더 많이 하려고 하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은 다 버리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그 하나님의 의만을 간직하고 자랑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9 오후 11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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