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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 - 1,2장 / 1998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 - 1,2장 / 1998

정인순 2011. 1. 4. 15:17

 

 

히브리서 강해(1) - 이근호 목사

 

 

 

[ 히브리서 (1)] - 1,2장
                                                              

1998,6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복음은 오직 '아들'에 대해서 !!

* 복음은 '이것을 믿고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오직 '아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가? 옛적인가? 조상들인가? 하나님인가?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들을 높이는 것이 히브리서의 특징이고, 성경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말이다. 이러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모르면 아들에 대해서 규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

* 이렇게 여로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예수님과 견주어봄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아들 됨의 내용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라는 것은, 한 몸이 할 것을 미리 폼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 2절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는 것은, 히브리서 해석은 아들의 범위 밖으로 나가면 반칙이라는 것이다. 그 해석범위가 아들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 4장의 경우에, 옛날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인내를 가지고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자고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살면 된다고 하면, 아들은 왜 왔는가? 아들이 무슨 들러리인가?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그런 설교를 듣고 집에 가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해하겠는가? 실족하면 망하니까 말이다. 아들을 통해서 말한 것이 기껏해야 짐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아들인데, 까불지 말고 인내해라' 라는 식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렇게 해석하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는 면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어려운 말인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을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인내해야지' 라는 식으로 가버리면, 아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히브리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과거 구약시대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어떻게 되어있으며, 그것이 아들과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지를 1장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히브리서가 얼마나 놀라운 책인가?

* 예를 들어서 5절에 보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구약 어디에 나오는가?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 시편 2편 7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편 7편의 아들이 예수님이 맞는가?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시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서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해석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뚫는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예수님 이전의 과거 시편의 해석부터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 이호식 씨의 히브리서 설교집을 보면 꽤 괜찮은 점들이 많이 있는데, 물론 약점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런 설교집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설교의 평가 - ① 오직 예수님만으로 끝나는가?
                 ② 본문과 예수님이 제대로 연결되는가?
                 ③ 교인들이 본문을 가지고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설교하는가?

*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성경의 흐름을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결시킨다고 해서 엉뚱한 적용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의 성막 같은 경우에 말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면서,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계속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총신의 박희천 목사 설교의 경우에, 이 세 번째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앞에 것도 잘 안되지만 말이다. 그분이 뭐라고 설교를 하는가? - 여러분, 성경을 봅시다. 심히 괴롭더라. 여러분, '심히 괴롭더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심히' 라는 것을 다른 본문에서도 한번 찾아볼까요? 여러분, 우리도 심히 기뻐합시다.

* 꼭 재건파에 하는 설교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말씀 스스로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멋있게(?)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경우는 말씀이 아니라 문자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맞으면 성경이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 되지, 교회에 나갈 필요가 뭐 있는가? 박희천 교수가 이런 식으로 총신에서 설교학을 10년 동안이나 가르쳤다는 것이다.

* 이런 경우에는, 3번째를 완전히 놓쳐버리는데,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먼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한다는 것을 미리 체크해서,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데는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분이 목회하는 서울의 내수동 교회에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는데 말이다.

* 시편 2편의 말씀을 통해서는 전혀 예수님이 나올 수 없는데, 또 6절에 나와있는,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라는 것은 성경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97편에 나오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히브리서는 이렇게 시편 2편과 97편을 마구 갖다 붙이느냐는 것이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히 1: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내 말씀을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시편에 나오는 것을 예수님에게 모두 다 갖다 붙여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마지막으로 오기까지의 모든 말씀도 모두 다 그 아들을 집어넣어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하나의 해석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진 것을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해석자체가 하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아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만약에 누군가 어느 놈이(?) 그런 해석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내가 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따라서 히브리서 1장을 설교할 때는, 얼마나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이 아들과 가까이 부각되어있는지를 설교하면 성공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오직 아들만을 강조하는데, 그 연결부분이 바로 1장에 나오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문자체가 무엇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분이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아들이다' 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것만 강조하면 된다는 것이다.

(히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히 1: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 11절에 '그것들은' 이란 누구인가? 피조세계라는 것이다. 피조세계는 멸망하지만 주는 영존한다는 것이다. 벌써 이렇게 히브리서에서 앞으로 나올 구약해석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인데 그 해답은 주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시며, 모든 천사들을 부리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이미 앞으로 히브리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설교하면서, 1장에 나오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부각시킨다면 설교는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예수님은 영원하시지', '이러니까 예수님만 홀로 다 이루셨지' 라고 말이다.

◈ 히브리서의 핵심 - 역시, 예수님이시구나 !!

* 히브리서의 구조가 그러한데, 1장에서는 예수님을 한껏 높여드리는데, 이렇게 높여주는데 수고한(?) 것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1장을 펼친 것이 13장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역시, 예수님이시구나!' 라고 말이다.

* 흔히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서 '믿음의 영웅들' 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러나 이 11장에 나오는 믿음은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을 이렇게도 강조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말이다.

*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아벨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벨이 더 낳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책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호식' 이라는 평신도(?)가 이것을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주 약하지만 말이다.

* 모세는 바로 왕의 아들 됨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는 바로 왕의 아들로 살았고, 살고 싶었는데, 그런데 믿음이라는 실체가 모세의 바로 왕의 아들 됨을 거절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였는데, 그런데 이것이 들통이 나고 그만 문제가 되도록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 그래서 11장에서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고 하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도저히 자기 자신에게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믿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런 믿음의 본질에 해당하고, 11장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이 괜찮은(?)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외부의 힘이 들어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인도하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믿음이라고 신약시대에서는 가능하지만, 그러나 구약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란 모습으로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셨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듯이 믿음의 증인들이 있기에 그런 믿음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라기보다는 예수님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인 구약시대에는 어떠하냐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여러 군대에서 계속해서 대제사장으로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즉, 성도들은 이러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 구약시대에도 성도들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들이 제사를 드려서 구원받았는가? 히브리서에서는 'NO'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구약시대에서는 이것을 제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 분명히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데,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구약 때에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각자의 믿음으로 잘 요리를(?)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앞당겨서 믿음이라는 그런 환경 속에서 활동을 하셨기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이것은 모세가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신약시대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조치하듯이 말이다. 모세는 바로 그런 예수님을 나타내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과연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들과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그런 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를 부린다는 것이다. 천사도 부리시는데 인간을 부리지 않겠는가?

(히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 그리고 우리가 우리들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길 수 없는데 누가 구원받는가? 못 받는다는 것이다. 모세고 아벨이고 아브라함이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과연 원수를 이길 수 있는가? 믿음의 영웅?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원수를 발등상(footstool,발판)으로 박살내셨는가?

◈ 구원은 그분의 고난받으심으로 !!

*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어떠한가? 그것이 바로 2장 9절에 나오는 '고난받으심' 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 그것이 12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만 잘난 것이 아니고 나도 잘랐다' 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자인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이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말해서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도 못 받고 형제도 아니고,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너무 당연한 소리인가?

* 히브리서 1장 14절에 '천사를 부린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리고 여기에서 '구원을 얻을 후사'는 바로 성도들인데, 그러므로 천사들이 이러한 성도들을 섬긴다는 것은, 만약에 이러한 천사들을 부려서 우리들을 인도하게 하시는 분이 없다면, 아무리 성도라고 해도 인간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천사를 부리는 분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 이러한 관계를 구약시대에는 잘 몰랐는데, 마지막 때가 되고 보니까 이런 모든 관계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 예수님께서 하셨구나!'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받음으로 해서 원수를 이김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들 속에는 노아나 아브라함이 포함되는가, 안 되는가?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아브라함의 자손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 지상에 뛰어내려오셨다는 것이다.

* 구약만 보면, 아브라함이 위대하고 모세가 대단해 보이지만, 그러나 원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수를, 즉, 마귀를 이기시는 분이 오셔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도와준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엇을 더 보태주는 수준이 아니고, 히브리서 2장에서는 고난받는 모습이고, 7장과 8장으로 가면 자기의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 이렇게 히브리서를 보면, 흔히들 히브리서가 바울서신들과는 다르다고들 하지만, 그러나 로마서와 똑같다는 것이다. 해석을 이상하게 그렇지 말이다. 로마서를 한번 보라. 바로 아들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말이다.

* 야고보서도 그렇지 않는가? 야고보서가 무슨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는가? 야고보서를 살펴보기 전에 산상설교를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먼저 마태복음 5장 20절을 보자.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수준이 어떠한가? 모든 것을 전폐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데, 이들이 천국에 못 가면, 이 세상에는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바리새인들 수준인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처럼 안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이방인들도 다 한다는 것이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왜 우리가 온전해야 하는가? 온전하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 이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킬 것만 한 것만 지키고 아닌 것은 빼려고 하는데, 즉, 자기들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빼면 재미없어!' 라고 했다는 것이다. 천국에도 가보지 않은 놈들이 그따위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두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여기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의식주(衣食住)를 다 책임져주시겠다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들을 보고 '굶어죽어라' 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 인간들이 24시간을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먹고살지?' 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의식주(衣食住)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도 구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이방인이 아니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는 것이다. 천국은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천국은 아버지와 같이 완전한 자들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마태복음 7장에 무엇이라고 되어있는가?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아버지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즉, 아들은 아버지 덕분에 좋은 것을 가지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좋은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하라' 라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말이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좋은 것을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말씀대로 남을 대접하는 자가 되도록 그 사랑을 저에게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자가 진정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아버지가 완전한 것같이 그 아들도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달려갔고 말이다.

* 그러니 천국의 기준은, '완전함' 이라는 것이다. 완전하지를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완전함은 오직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에게서 라는 것이다. 맏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좋은 것이 우리에게 전달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완전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완전함에 초점을 두고 우기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완전하심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이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모두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남을 대접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런 차원에 예수님이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들이니까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이고, 아들이니까 주어진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 마태복음 7장은 기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라고 하면, 어디서 해결해야 하는고 하니, 마태복음 6장이라는 것이다. 이 7장에서는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말씀의 완성인데, 이것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복음에는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내용을 받아드리려면 참으로 겸손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 예수님께서 혈육으로 오신 이유는?

* 다시 히브리서로 돌아와서,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혈육으로 온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자손을 붙들어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

* 그러니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장차 혈육으로 오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믿는 사람들은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데, 좋게 해석을 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부정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갈 놈은 간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히브리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믿음에 화합하지 못한 자는 떨어져나간다는 것이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우리는 그 아들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순종이 우리에게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인내가 생긴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인내가 아니라, 주님의 인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혈육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내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 그들이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생아가 아니면 반드시 징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구약 때의 성도들 가운데서 구차하게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사실 예수님께서 신약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그 믿음을 부분과 모형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1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 그래서 히브리서 1장은 미리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덕분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단한 분이시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아니 구약에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고 믿음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억지인가? 우리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 예수님이 어디에 나오는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에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 만약 그들이 부활을 믿는다면 사도바울처럼, '아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그러면, 시편 2편과 89편에 나오는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그렇다' 라고,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그러니 성경은 이렇게 믿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완전히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스포츠 신문은 다 같이 은혜를 받도록 하지만 말이다. '잘한다. 박세리!'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 같이 은혜를 받는 법은 없고, 싸우다가 헤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이제 히브리서 2장을 보도록 하자.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히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히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누가 견고케 하는가?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구원' 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두 다 하셨으니 '우리는 놀자' 라는 것이 있는가? 로마서도, 에베소서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빛의 아들로 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명령법이냐, 직설법이냐?' 라고 하면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어떻게 푸는가? '예수님께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 라고 해서 한방에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로 오셨는데, 이것은 동생은 형을 닮는다는 것이다. 아니, 닮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순종함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그런 순종과 인내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그러니 '명령법이냐, 직설법이냐?'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맏아들이니까 말이다.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이것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인데, 구약에 성령이 없다고 할지 몰라도, 우리가 구약을 예수님으로 해석을 하듯이, 여기서는 성령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 2: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히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히 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에게 먼저 적용을 시키고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난을 받듯이, 우리도 역시 그러한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그러한 고난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보물을 보고 기뻐했으니 우리도 천국을 발견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들어가시고 우리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물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눈이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쁨' 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먼저 그 기쁨을 조성해서 우리에게 주셔야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그제야 보물임을 알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보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처음부터 보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는가? 분명히 동행했지만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비로소 알아본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는가? 자기 마음이 지옥이(?)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지옥에 갈 바에야 차라리 오른 손을 찍어버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면 십자가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을 치려고 할 때, 그때 '잠깐, 이제 내가 알겠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이, 신앙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모숨보다 소중한 아들까지도 바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완전히 360도를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 그러니 우리가 알아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우리를 붙들어서 그렇게 믿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그것이 1장 3절에 나오는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tape 1 끝)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시고 결국은 죽음을 맛보게 되는데, 우리들도 그러한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2장 14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예수님이 왜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자기 형제들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형제들이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에서 벗어난 자기를 바라봄으로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내가 알아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게임 끝 !!

*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데, 우리의 환경이 바뀌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 인간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고, 예수님 자신의 순종과 인내에 참여시키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나도 죽어서 살아났잖아. 그 다음은 네 차례이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이러한 죽음이 두려우니까 도와주시겠다는 것이다.

* 목회자가 되어서 만약 이러한 죽음이 두렵다면,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어도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으면 부활하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수가 있는 하늘나라에 간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못 먹어도 'GO' 라는 것이다.

◈ 아브라함 자손들 -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미리 태어난 자들이다 !!

* 예수님은 아무나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손들만 도와주는데,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미리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다 그러한데, 즉,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다' 라는 것을 말이다.

*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인데, 즉, 더 나은 본향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어차피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는 제쳐두고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나오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이것이 여호수아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우르에서는 아버지와 같이 나왔지만, 하란에서는 아버지인 데라는 두고 조카만 데리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담기 위해서 하나의 증거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 사실 마리아도 예수님을 잉태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믿음인데, 즉,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믿음 말이다.

*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것과 노아와 에녹도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모든 죽음을 죄와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심판과 관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히브리서 12장을 미리 한번 보자.

(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히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히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그래서 히브리서 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그러니 무엇과 상관이 없는가?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죄와 관련이 있기에,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 죄(罪)의 문제를 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이 와도 두 번째로 나타나기에 괜찮다는 것이다.

* 그래서 히브리서는 가만히 들어보면 괜찮지만, 그러나 믿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도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한번 죽은 것은 정해졌다고 하면서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심판까지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냐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의 결단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유혹을 주님께서 직접 관여해서 붙들어주지 아니하면, 징계를 통해서라도 직접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안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은 천사도 부리시는, 만물을 붙드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고난 당하는 것도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보고 '힘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전반부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정말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생계나 유지하려고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 자신부터 이것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날마다 결심하며 다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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