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2) - 3,4장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2) - 3,4장

정인순 2011. 1. 4. 15:19

 

 

[ 히브리서 (2)] - 3,4장
                                                              

1998,6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지난번 강의를 다시 반복하면, 히브리서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껏 높이는 초점을 맞추었고, 2장에서는 그분이 낮아졌는데 어느 정도인고 하니까, 혈육에 함께 속했다는 것과 형제라고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혈육에 속한 이유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혈육에 매인 자를 마귀의 사슬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이 빌립보서에는 조금 다르게 나온다는 것이다. 빌립보서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종의 형체를 지녔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배려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인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자들을 다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 자손들을 붙들려하심이라' 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성취에 예수님이 직접 나섰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은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시험받는 것을 도와주는데, 그것은 시험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험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는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식사를 하셨는가?' 라고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광야에서 3가지 시험이 끝나고 나서 천사가 와서 받드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아마 그 뒤에 식사를 하셨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시험에 항상 직면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혼자 시험을 받아서 혼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 이제 히브리서 3장을 보도록 하자.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3장에 들어오면 갑자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봐서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는 이미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제사장과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히브리서는 나중 5장에서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젖을 먹는 수준에서 탈피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저희는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단단한 식물 -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믿음 !!

*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충분히 지식이 확보된 사람을 두고서 말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뿐만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말이다. 인간의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고 말이다.

* 그렇다면, 3장부터 13장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젖이나 먹는 그런 수준에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도로 만들기 위한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단단한 식물을 말하고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문제라는 것이다. 제사와 멜기세덱은 서로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래도 제법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도 여기에 대해서 헤매고 있는데, 특히 신학교 교수들은 말이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철학에서 나왔기 때문에, 철학은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서 유에서 유를 끄집어내는 것이 철학인데, 그런데 예수님과 멜기세덱의 관계는 무(無)에서 무(無)로 바로 넘어가는, 그야말로 슈퍼맨(?)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여기서 신학자들이 고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 문제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어렵다는 것인데, 전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너무 비약이 많고 그야말로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영적으로 말이다. 그러니 따라다니려고 하니 너무 숨이 찬다는 것이다. 물론 숨만 차면 다행인데, 사실은 따라 다니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 보통 교회에서 젖을 먹는 것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윤리적 차등을 두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면 젖먹이 신앙이고 끊으면 단단한 신앙이고 말이다. 그러나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부터 힘이 들겠지만 그래도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성경적인 논리로(?) 한번 따라가 보자는 것이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히브리서 3장 1절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을 부르신,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모세는? 모세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세는 거룩한 형제의 부류로서, 우리들과 같은 수준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분으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모세에게 두던 비중을 이제 다 끊어버리고, 예수님에게로 옮겨버린다는 것이다.  

* 이것이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부분과 모양으로 이야기하던 것을 이제는 아들로 이야기한다' 라고 나오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3장 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모세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이것은 시편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기서 그의 음성은 누구의 음성인가?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음성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3장 1절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인데, 이러한 그분의 대제사장의 위치가 구약을 거쳐오면서 더 부각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인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직분과 함께 있었다고 말이다.

* 그러나 구약을 보면 분명히 모세가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히브리서에서는 모세는 보이지 않는 자의 종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모세를 인도하는 대제사장 직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인가? 논리적으로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분명히 그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론도 아니고, 대제사장 직분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지금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와 광야생활을 이야기하지만, 나중에 뒤로 넘어가면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으로까지 당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직통으로 연결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하냐는 것이다. - 헬로, 멜기세덱 입니까?

*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아론의 제사장 직분에 그래도 의미를 두고서, 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이것이 히브리서에 넘어오면, 제사장이 따로 계셨고, 그분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지 않고 시험하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지금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들을 믿으면 들어간다' 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인데, 그만큼 그분은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 보통 사람이 생각을 할 때 자기가 결정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철학에서는 우연히 떠오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이다. 특히, 실용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이성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 이러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데리라' 인데, 그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의 무정부주의를 주장한 '테아 베트' 라는 사람은, 과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은 발전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우연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 우연 !!

* 다시 말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은 자기와 관련이 있을 때만 그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와 관련이 없는 사건은 아무리 터져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철학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지금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도, 그것에 관심이 있는 자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무 관심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장로, 목사라도 아버지가 자동으로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교회에 나와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3장에 들어오자마자,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라고 하는 것이다.

(히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나사렛 예수를 시시하게 여기는 풍토 속에서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예수님은 왜 믿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신 이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주제라는 것이다.

◈ 히브리서의 주제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

* 그러면 오늘같이 예수님이 슈퍼스타가 된 마당에 이런 히브리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돈이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보다도 말이다.

(히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히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맹세하게 해서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자기의 아들인 대제사장인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이러한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거룩한 형제라고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지난번에 우리가 안양대학교 김영규 교수의 '조직신학 편람'을 공부해보았는데, 김 교수의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단코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 15절은 분명히 '강팍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우리는 '강팍해도 한번 봐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 말이다. '예수님만 생각해!' 라고 해도, '다른 것을 생각해도 한번만 봐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16절에서, 듣고 격노한 자들이 모세를 쫓아 나온 자들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모세를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지금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있어도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인데, 인간은 이렇게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야만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인간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을 하나님은 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을 생각해도 자기와 무슨 관련이 있어야 생각하는데,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수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모세를 따라 나온 자들은 광야에서 망했는데, 그 망한 이유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자기들의 구원과 연관된 말씀이고 말이다. 그 당시의 말씀이 오늘날의 예수님이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망했다는 것이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을 받고 고난을 받아서 시험받는 자를 도우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3장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형제들은, 내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생각한다면 거룩한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내가 중심이 아니라, 그분을 중심으로 !!

* 이것을 철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먼저 중심을 잡아서 내 조건에 맞추어서 잡아당기면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저쪽에서 정해진 일방적인 조건에 맞지 않다면 나 자신이라도 탈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3장 18절에서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

*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이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라는 것이다.

* 교인들에게 아무리 이렇게 설교해도, '목사님, 제가 10년을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일 믿음이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또 틀을 자기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를 위한 구원의 틀은 부수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틀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라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제 히브리서 4장을 보자.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 4: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광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창세기로 붕붕 뛰어버리는데,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러나 깊이 생각해야 하는 예수는 어느 정도로 대단한 분인고 하니, 앞으로 구원받을 사람들까지 다 완성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고 쉬셨다는 것이다. 이미 창세기에서 말이다.

* 그러니 여기서 창세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일방적으로 다 만들어놓고 쉬셨다는 것은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모두 다 완성했으니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 감사하면서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았는지를, 그 내막만을 조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제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분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우리를 포크레인으로 집어서 당기는 순서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에 화합한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믿음의 본질과 우리의 믿음이 내용상 일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니까 말이다.

(히 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 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안식에 아직도 들어갈 자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모두 다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들어가야 하는데 몇 명이 떨어진 것과 들어가지 못하는데 몇 명이 들어가는 것과는 사고가 정반대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뜯어고치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임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교회에 나오면 당연히 구원받는 줄로 알기에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을 그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대해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못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횡재했냐는 것이다.

(히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지금 이런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그런데 여기에서 안식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라고 하면서 나오는가? 그리고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미 완성된 차원에서 말씀을 보면 우리들 자신을 훤히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이미 안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성된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순종하지 않는 것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비춰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안식에 도달한 입장에서 말이다.

* 그리고 11절에서,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한다' 라는 것에서, 순종이란 윤리가 아니라 반드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해내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환경이 제 아무리 바뀌어도 말이다.

*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왜 낙담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하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기에, 즉,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 교인들은 깊이 생각했을지 몰라도 말이다.

*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갈라졌을 때는 박수를 쳤지만, 그러나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안식의 때를 생각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안식을 기억하라고 7일째는 만나도 내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시고, 완성하시고 쉬셨는데,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도 그 안식의 때를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왜 그러한 과정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원망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깨달으라고 7일째는 만나도 내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죽 했으면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쳤겠는가?

*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대부분이 다 망했다는 사실이 가만히 보면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다만 믿음에 화합하는 자만이 안식의 때를 바라보는데,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그러므로 14절에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라는 본문은, 예수님을 굳게 잡는 나의 의지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큰 대제사장인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심으로 우리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연약함을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망하는데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이왕 망하는 것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오신 대제사장인 예수님을 굳게 붙들자는 것이다. 양식이 떨어져도 말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연역함을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그분이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도록 도와주시니 그것을 굳게 믿자는 것이다. 광야에 있는 사람들이 왜 망했는가? 자기에게 의미 있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니 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가 존재함을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환경 탓만을 하고 있으니 믿음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이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 그러므로 젖이 아니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사람은 무엇을 제대로 아는고 하니까, 대제사장이 누구인지를, 그분이 왜 대제사장인가를 안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히브리서 3장부터 4장까지는 아주 용의주도하게 되어있는데, 2장 마지막에 있는 내용을 3장과 4장에서 반복하면서, 반복하면서 그 안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까,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망했던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유용한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대제사장이 있는 이유는, 망할 수밖에 없는데 은혜로 체휼하시는, 불쌍히 여겨주시는 차원에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 4장을 반복하자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완성하시고 안식하셨던 그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니까,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 죄와 제사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 그러므로 5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도대체 '대제사장'의 직분이 어떤 직분이기에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죄와 제사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죄라고 하는 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부싸움을 해도 자기들끼리 싸우면 몰라도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을 보상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라고 하면 하나님께 범죄를 한 것인데, 도대체 하나님께 무슨 피해를 입혔느냐는 것이다.

◈ 죄(罪) -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 !!

* 그러한 피해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의 죄가 야기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리 알기 위해서 6장 6절을 한번 보자.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이 세상의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다고 했는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전혀 예수 '예' 자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근본적으로 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죄인지 아니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혼자 산 속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죄를 짓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히브리서 1장에서 부분과 모양으로 말했던 것이 아들로 나타난다는 것의 뜻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에 심판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심판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욕을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에 따라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받아들이면 구원이고, 아니면 심판이라는 것이다.

◈ 죄(罪)는, 오직 십자가 앞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

* 그렇다면, 인간들끼리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자기들끼리 아무리 연구를 해서 내놓아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노회법과 총회법의 문제점이 있는데, 성경을 통해서 죄를 규정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죄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정해서 죄를 규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인 것을 죄라고 규정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서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 속에는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까지도 포함이 되었기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완전히 쪼개놓고 '너희들, 죄인이 맞잖아!'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제사 - 날마다 자기가 죄인임을 규정받기 위해서 !!

* 히브리서 10장 5절을 보면, 날마다 드리는 제사는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아니, 흠 없는 양과 염소가 왜 필요한가? 죄가 있기에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양과 염소를 잡는 것이 아니라, 그 흠 없는 양과 염소를 잡음으로 말미암아서, 즉,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서 죄인임을 규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머리가 띵한 일인가?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냐는 것이다.

* 이러한 차원이 바로 젖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인데, 이런 경우에 제일 황당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주 점잖게 살아가는 양반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인임을 말이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자기는 나름대로 죄를 안 짓고 그래도 제대로 살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분의 말씀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과 같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말씀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사실은 다른 이방민족들도 이스라엘의 제사에 관심을 좀 가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 '너희들 또 양 잡나?', '응, 그래. 죄 때문에 잡는다', '아니 너희들이 모슨 죄를 또 지었나?', '응, 그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 잡는다'

* 이것이 바로 부분과 모양인데, 이것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두 다 드러나는데, 이 아들은 십자가에서 현저히 욕을 받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인지를 확실히 규명해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 여기서 '진동한다' 라는 것은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살을 내는 것인데, 그런 정도로 무섭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무서운데, 그런데 24절에서 하늘에 있는 장로들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고 하니,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새 언약의 예수님의 피로 말이다.

*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최종적인 실상(實像)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렇게 보는 것이 바로 젖을 먹는 수준이 아니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냐는 것이다.

* 아니, 왜 나같이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때문에 양이 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야 너희들, 제사를 드리지마' 라고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모든 우주 만물을 밝히는 핵이 되는가를 밝힌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반발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