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3:1-6) 성도의 생활 모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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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성도의 생활 모습 2002년 7월 2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 1-6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3 자기도 함께 갇힌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왜 조건을 따지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구원에 관해서 가망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어이 구원하신다면 무조건 용서 이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무조건 용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의 중심은 단순히, 병고치고 물에서 건져 주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피흘리심'에 있습니다.
이 피흘리심은,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 대신 저주받고, 대신 심판 받아주기 위해 흘려야 될 피입니다. 이것이 새언약,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기초는, '무조건 용서'에 있습니다. 믿는 자는 기쁩니다. 즉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받은 자 된다면 모든 자 앞에서 떳떳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무조건 사랑이 내게 있다면 구태여 사람들의 사랑에 울고 불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살면 좋지요. 그러나 그것은 보너스 정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랑에 목숨 걸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본인부터 정신 차려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사람이란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폭우가 쏟아질 때 지리산 노고단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을 피신시켰다고 어제 아침 뉴스에 나왔습니다.
저는 이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빗방울 하나 하나가 뭐길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 빗방울을 피해서 동굴 속이라도 피해야 한단 말입니까. 일종의 자존심 구기는 짓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대자연에 굴복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날씨가 덥다고 해를 없앨 수 있습니까? 태평양에서 발달한 열대성 고기압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고해서 원자폭탄으로 그 태평양 고기압을 없앤다해도 그 피해는 결국 우리들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원치 않는 조건과 상황을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입맛에 맞도록 변신과 변신을 거듭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장난감 운명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식은 신체적인 조건이나 사회적 관계만 신경을 쓰라고 말합니다. "감기 걸렸습니까? 약 잡수시고 편히 쉬시면 됩니다."라든지 아니면, "학교 성적이 걱정되십니까? 좋은 과외 선생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라고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몸의 조건, 사회적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됨의 합당한 마음과 영혼의 조건을 제시해 놓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이러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어야 돼"라고 말이지요. 즉 타인도 누구도 주위에 없고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그 순간만이라도 인간다워야 될 조건 같은 것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옷 벗고 있다가도 손님이 오면 옷을 차려 입게 되지요. 이것은 하나의 예절이요 에티켓입니다. 이런 것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 올 때 옷을 잘 차려 입었다고해서 천국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다른 조건이 따로 있는 겁니다. 무조건인 용서가 우리 안에 내장되어야 합니다. 이 용서가 용서로서 받아드려 질려면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대단히 거룩을 따지시는 분인지를 절실하게 알고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 분이시기에 그 어떤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일괄적으로 자신의 '무조건인 용서'로만 구원하시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하셨듯이, 모세 때는 땅이 진동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으로 말미암은 결과이지요. 이제는 땅 뿐만 아니라 하늘마저 진동한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제 우리 마음조차 하나님께서 쥐고 흔드시면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으로 충격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나 4절에 말씀에 대해서 자신만만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이 대목을 어길 기회을 갖지 못해서일까요?
그러나 막상 5절을 보면 질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항의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예 날 잡아 먹으세요. 나, 이 말씀에 대해서 정말 자신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평생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못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면서 왜 꼭 이 말씀으로 언급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혹은 하지말"라고 당부한 사항을 빼놓고 그 나머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될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새며느리를 길들인다고 아주 호되게 시집살이시키는 시어머니가 있다고 칩시다. 설거지 하는 방법, 김치 담는 방법, 장 담그는 방법을 일일이 다 가르치면서, "하라", 혹은 "하지 말라"를 반복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러한 훈계 사이 사이를 빠져서 새댁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까지 시어머니가 관여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만약 관여 한다고 한다면 그 새댁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 될 것이고 만약 관여 못할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면 그 새댁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수행하되 나머지는 시어머니마저 간섭 못할 자기 만의 세계를 따로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고된 시집살이라도 어느 정도 견딜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느 쪽입니까? 만약 소위 신자라는 사람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은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자유함을 누리기 위한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식으로 생활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참으로 많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든 행위가 전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자 한다면 숨이 막혀서 신앙 생활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자포자기라고 해야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최상의 봉사로서 교회 충성을 다하되, 그 대신 돈을 사랑하고 또 현재 가진 재물로도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라도 하나님이 좀 눈 감아 주셔야 다소 숨통이라도 터지겠다는 타협조로 나가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잘못된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서 4:32-5:2까지를 통해서 해결해 봅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해 주심만 남아 있으면 되는 겁니다.
아까 예를 든, 시어머니 경우를 다시 들어보면, "네가 내 시킨대로 설거지 안하고 집시 깨면 나는 너를 우리 집안에서 쫓아 낼꺼야"라고 시어머니가 나온다면 이미 그 집안에 그 새댁을 며느리로 인정안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의 며느리 됨이란 네가 설거지 하다가 접시를 깨든지 말든지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다"고 나온다면 이것은 바로 사랑이요 은혜 관계로 성립된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5절의 말씀을 보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궁극적으로 반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돈 만큼 최고의 가치로서 포기 못하겠다"고 나온다면 이 사람은 애초부터 용서를 모르는 자이요 믿지 않는 자입니다.
4절 같은 경우를 보면, "나는 하나님의 자비나 예수님의 용서나 대속의 피도 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음행하는 재미 만큼은 최종으로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나선다면 참으로 구원된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의 차원이기 때문에 사랑의 차원은 다른 것과 비교하는 본질로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전달 방식입니다. 설마 이런 바보 같은 시어머니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애야 너는 내 며느리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마구 마구 접시를 깨어라"하는 식의 시어머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얘야 너는 이미 구원받았고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 마구 마구 돈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입니다. 세상과 돈을 사랑하라고 부축이는 하나님이 어디있습니까. 이렇게 보니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한 자를 이미 자기 식구처럼 간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표현이 오늘 본문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즉 용서해주시는 그 당사자이신 주님과 성도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세상 것을 못가지고 못 행했다고해서 너무 아쉬워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식구라면 이처럼 구원자와 함께 이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에베소서 4:32-5:2의 취지가 바로 이런 겁니다. 사랑받고 용서받은 자면 필히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밖으로 퍼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비누로 세수한 사람의 신체에서 향긋한 비누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성도는 '은혜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3:8-10에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신 바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다면 이 사랑이 어떤 때 터져나올까요? 그것은 자기 사랑을 하지 않는 순간을 통해서 퍼져 나옵니다. 사람이 자기애나 자기 집착에 몰두한 순간에는 아무리해도 이웃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 소위 이웃 사랑이라고 행한다면 항상 그 댓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10:29-37에 나옵니다.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제사장이요, 또 한 사람은 레위인이요, 또 다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세 번 째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현재 자신의 몸을 강도 만난 사람의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돈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위한 돈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돈처럼 사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잘 치료해 주기를 부탁하면서 부비가 더 들면 자신이 다 담당하겠다고 합니다. 타인과의 일치성 속은 대신성이란 자기를 포기할 때 발생되는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한 번 한 형제 사랑으로 끝날 사항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계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즉 한 번만 '은혜 덩어리'가 아니라 계속해서 '은혜 덩어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6절의 말씀처럼, 계속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하시기를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는 순간을 주셔서 오로지 밖으로 이웃 사랑이 펼쳐지게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물론 우리들은 그 어떤 순간이라도 자기 사랑을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사랑이 가능케 되도록 주님께서 크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소유가 아님을 잊지 말게 하시고 이 몸을 이웃 사랑의 향기로 드러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5. 성도의 생활모습(히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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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용서 !!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 이라는 겁니다. 왜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은 구원에 관해서는 가망성이 전혀 없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을 하려고 하신다면 무조건 용서하는 것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이죠. 조건을 따진다면 구원받을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구체화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서 오셨다는 것인데, 사람이 되어서 말이죠. 그러니 완벽하게 확실해졌는데, 여기에 대해서 토를 달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오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고 하니까, 단순히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피 흘리심’에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피 흘리심은,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데, 그래서 그분이 대신해서 저주를 받고, 대신해서 심판을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흘려야 될 피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피를 믿는 자들은, 과거에 지은 모든 지은 죄,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는다는 말이죠.
이것이 새 언약, 즉 새로운 약속인데, 그리고 그 핵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초는 무엇인고 하니, 조건을 보고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에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는 자는 기쁜데,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 이라는 겁니다.
시중에 보면 ‘복음 보청기’ 라고 있는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니 기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귀만 들려서 되는 것이 아니고, 보지 못하던 것까지도 보게 될 때, 그렇게 되어야 정말로 기쁘다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그 순간에 다 날아가고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용서함을 받은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받은 자가 되었다면, 모든 자들 앞에서 떳떳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조건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구태여 이 세상의 사랑에 울고불고할 필요가 없는데, 물론 마누라나 자식에게 사랑을 받고 살면 좋지만, 보너스 정도로 여기시기면 된다는 겁니다.
연애를 할 때, 그 사랑은 3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죠. 새로운 자동차는 3개월을 가고, 새로운 애인은 6개월을 간다는 말도 있는데(ㅋㅋ), 그런데 그게 연구를 해보니 두뇌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성질이 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결혼생활이 늘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데, 항상 쾌감이 넘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철이 없을 때는 그게 전부인 줄 알지만,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생활에 들어가면 자기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런 철없는 사랑에 목숨을 걸지 말고 말이죠.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이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폭우를 피할 수밖에 없는 인간 !!
그러니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전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어제 뉴스를 보니, 지리산에 폭우가 쏟아져서 야영하던 자들을 피신시켰다고 하는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지만, 산에서 그런 폭우를 만나면 참으로 위험하다는 말이죠.
저는 그 뉴스를 들으면서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빗방울이 무엇이기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그 빗방울을 피해서 어디로 숨어서 들어가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야말로 자존심을 구기는 짓인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대자연에 굴복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날씨가 덥다고 해를 없앨 수 있습니까? 태평양에서 발달한 열대성 고기압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고 해서, 원자폭탄으로 태평양 고기압을 없앨 수 있습니까? 설령 그렇게 해서 없앤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는 결국 우리 인간들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원치 않는 조건과 상황을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의 입맛에 맞도록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살게 되어있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오래 살고 싶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인큐베이터에 하나님의 장난감으로, 그런 운명으로 이 땅에 태어난다는 말이죠. 그러나 세상의 학문이나 지식은 신체적인 몸의 조건이나 사회적 관계에만 신경을 쓰라고 합니다. “감기에 걸렸습니까? 약을 잡수시고 편히 쉬면 됩니다” 라고 라든지, 아니면 “학교성적이 걱정됩니까? 그러면 좋은 과외 선생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정도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몸의 조건이나 사회적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됨의 합당한 마음과 영혼의 조건을 제시해놓고 있다는 말이죠. 즉 “인간이라면 이러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어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누구도 자기 주위에 없고, 자기가 홀로 하나님 앞에 서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순간이라도 인간다워야 하는 그 조건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는 옷을 벗고 있다가도 손님이 오면 옷을 차려 입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예절이고 에티켓입니다. 이런 것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잘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데 손님이 왔을 때 옷을 잘 차려입었다고 해서 천국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다른 조건이 따로 있는데, 즉 ‘무조건 용서’가 우리 안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 용서가 용서로서 받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또한 얼마나 거룩을 따지시는 분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그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그 어떤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일괄적으로 자신의 무조건적인 용서로만 구원을 하시느냐는 말이죠. 거기에는 우리의 그 어떤 행함이라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뇌물이 말이죠.
이미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신, 그 사랑 !!
설교를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사람을 따져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고 무조건 용서를 하시는데,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뜻을 다 펼치셨다는 겁니다. 알려줄 것은 이미 다 알려주셨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다 알려주셨는데, 그게 대신 심판받음과 대신 저주받음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무조건 용서를 받는데, 그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이기에 말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도 그런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이렇게 똑똑하고 착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데, 그런데 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지, 그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침투해서 자리를 잡고 펼쳐지게 된다는 말이죠.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엄청 무서운 분이라는 겁니다. 모세 때는 땅이 진동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으로 말미암은 결과인데, 그런데 이제는 땅 뿐만 아니라 하늘마저 진동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땅과 하늘이 다 움직이고, 결국은 다 부서지고 사라진다는 겁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제 우리 마음조차 하나님께서 쥐고 흔드시면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래서 5절에 보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인데, 혹시 4절에 대해서 자신만만해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막상 5절을 보면 질겁한다는 것이죠.
(히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마음속으로 “하나님, 아예 저를 잡아드세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항의를 한다는 말이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는데, 그러면 왜 꼭 이런 말씀으로 하심으로서 우리의 기를 죽여놓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무조건 용서를 해주시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 그것을 끝내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굳이 하시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잔소리로 들리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융통성을 부려서,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무엇일까요?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는 틈 사이로 빠져나가서, 그 나머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될 공간이라면, 그것은 무엇이겠느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며늘아 !!
예를 들면, 새 며느리를 호되게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있다고 칩시다. 설거지를 하는 방법, 김치를 담는 방법, 장을 담그는 방법을 일일이 가르치면서, “하라, 하지 말라” 라는 것을 반복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한데, 며느리가 되어서 라면밖에 끓이지 못하면 좀 곤란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음식에만 그치겠습니까? 모든 것을 일일이 사사건건 다 간섭을 한다고 하면 숨이 막힐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간섭하지 못할 공간이 따로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새댁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하기는 하되,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챙길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고된 시집살이라도 견딜 만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은 하면서도 나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한 자기만의 공간을 챙기는 식으로 한다고 하면, 그 새댁처럼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과 성경말씀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는 것인데, 성경말씀을 너무 단편적으로 잘라서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가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의 모든 행위가 전부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어서, 도저히 숨이 막혀서 더 이상 신앙생활을 못하겠다고 하면서 포기해야 합니까? 그게 아니면, 최상의 봉사로서 교회에 충성을 다하되, 그 대신에 돈을 사랑하는 것 정도는 눈감아 달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과 타협조로 나가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하는 겁니까?
여기서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5장 2까지 보겠습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미 용서했다 !!
여기 32절에 보면,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지무지 중요한 기초인데, 이것을 빼먹으면 조금 전과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시어머니에게 된통 당하는 새댁처럼 말이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했다는 것인데,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용서하심만 남아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시어머니가 “내가 시키는 대로 설거지를 하지 않고 접시를 깨면 우리 집안에서 쫓아내겠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그 집안에서 그 새댁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네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깨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없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고, 은혜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는데, 그런데 용서를 반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돈만큼 최고의 가치로서 포기하지 못하겠어” 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애초부터 용서를 모르는 자이고,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그 자비와 용서와 예수님의 대속의 피도 참으로 좋은 이야기이지만, 하지만 나는 여자를 밝히면서 이 세상을 즐기는 재미, 그것만큼은 최종으로는 포기하지 않겠어” 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도 역시 구원된 자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의 차원이기 때문에,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전달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설마 이런 시어머니는 없겠죠. “애야, 너는 내 며느리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마구 마구 접시를 깨어라” 라고 말이죠.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닌데, 즉 “애야, 너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부터 마구 마구 돈을 사랑해라” 라고 말이죠. 세상과 돈을 사랑하라고 부추기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한 자를 이미 자기 식구로서 간주하신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나와있는데, 즉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인데, 한 식구로서 말이죠. 그냥 멀뚱멀뚱 얼굴만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주시는 당사자로서 주님과 성도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옳지 않구나. 여기에 인생을 걸어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것을 항상 되새기게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한 식구 !!
그러나 그 어떤 행동을 하든 말든 간에, 그런 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서 구원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를 흘려서 용서하시는 분으로서 계시는데, 그러니 그 용서와 사랑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도록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한 식구라고 하면, 이처럼 구원자와 함께 사랑의 포로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던 에베소서의 취지가 바로 이런 것인데, 즉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은 자라고 하면, 필히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밖으로 퍼져 나오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의 몸에서 향긋한 향수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과도 같은데, 즉 ‘은혜의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제가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말이죠. 여기서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을 보겠습니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여기 9절에 보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웃사랑’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무조건적 용서하심을, 그 사랑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서, 그 사랑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게 될 때 이웃사랑이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여기에 천사가 나오는데,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천사가 등장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우리 인간이 비가 오면 피해야하는, 그런 육체적인 한계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천사처럼 날개도 없고 말이죠. 하지만 거기에는 원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이웃사랑이 된다는 말이죠.
(히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 생각만 하지 않으면, 터져 나오는 이웃사랑 !!
그러면 과연 이 이웃사랑이 어떻게 터져 나올까요? 그것이 이웃사랑인지, 아니면 자기의 윤리와 도덕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사랑을 하지 않는 순간에 필히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이웃사랑을 하려고 시도하면 이웃사랑이 아니고, 그런 것은 굉장히 어설프고 부자연스러운데, 물론 이웃도 괴롭고 말이죠. 그런데 자기에게 집착하지 아니하면 이웃사랑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데 말이죠. 어떤 사람이 율법대로 이웃사랑을 하고 싶어서 예수님에게 묻는데, 사랑은 무엇인지 알겠는데 이웃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옆집의 옆집의 옆집도 이웃이냐는 말이죠. 사돈의 팔촌까지도 이웃인지, 그것을 알면 따져서 이웃사랑을 하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지금처럼 너의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이웃사랑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이웃을 사랑을 해야지” 라고 하는 순간, 그런 사람은 그만 이웃사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웃사랑은 자연스럽게 퍼지게 되어있는데, 마치 꽃향기처럼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쓰레기 냄새가 퍼지게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니, 너도 나를 사랑해라” 라고 나오니 말이죠. 그러니 자기 것을 하려고 하면 이미 실패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자기를 뒤덮고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인데 말이죠. 그런 마음가짐이 있을 때, 그런 요소가 퍼져서 이웃사랑이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닌 자기 사랑은 결코 이웃사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역시 돈이 최고야 !!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라고 하는데, 오늘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이웃사랑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인데, 돈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죠. 은행의 잔고에 따라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게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결정이 된다는 말이죠.
(히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 사랑은 자기 것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실컷 무엇을 해놓고는 “내 것이 나왔습니다” 라고 하면 정말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랑이 깨지고 만다는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
여기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처음 한 사람은 제사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레위인이고, 또 다른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인데, 그 참으로 특이하다는 겁니다. 현재 자신의 몸을 강도를 만난 사람의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돈을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위한 돈이 아니라, 마치 강도를 만난 사람의 돈처럼 사용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료를 부탁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지불을 하겠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은혜 덩어리가 보여주는 모습이란 말이죠.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존재합니다 !!
다시 말해서,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도구로서 존재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럴 때만 이웃사랑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타인과의 일치성, 혹은 대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를 포기할 때만 발생되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물론 늘 나올 수는 없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인간은 계속해서 “나는 내 것이다” 라는 것을 놓치지를 않는데, 그게 가끔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그게 끊어져서 이웃사랑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마리아 사람이 다음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도에게는 이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도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하다가 보니, 어려운 사람을 만나서 그만 3만원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아깝다. 왜 그렇게 했을까? 이웃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시 돈이 최고인데 말이야” 라고 하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돈이 너무 좋은데, 그런데 어려운 사람을 만나자, 그 순간에 그만 번개가 쳐서 돈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 그만 3만원을 지갑에서 꺼내어 주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고, 돈만 생각나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그런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는구나” 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무조건 용서하심만 붙들어라 !!
그러니 불신자든 성도든 돈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그 근본을 누가 주관하시는고 하니, 하나님의 무조건 용서하심의 사랑이 꽉 붙잡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이 정말로 필요하고 좋고, 또한 비가 오면 빨리 피해야하고, 때로는 이웃과 싸움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가장 기본이 무엇인지를 알자는 겁니다. 인생의 근본은 주님이 주신 사랑인데,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정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하면, 자기의 윤리와 도덕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고, 그런 것은 모두 버리라는 겁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이 되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도대체 어떤 흔적을 남기셨는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계속되는 이웃사랑 !!
오늘 본문 1절에서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라고 하는데, 이 ‘이웃사랑’ 이라는 것이 한 번에 한 형제 사랑으로 끝날 사항이 아니라, 이것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무조건적 용서하심이 들어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히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순간을 주셔서, 바깥으로 이웃사랑이 펼쳐지도록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말이죠. 물론 우리는 그 어떤 순간이라도 자기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웃사랑이 가능케 되도록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고, 살아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남의 용서로 여기지를 마시고, 이제 우리 자신의 용서로 감히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비록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도, 항상 그 무조건 용서하심을 품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드신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게 하시고, 항상 주님의 그 무조건적인 용서하심을 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우리의 이 몸이 이웃사랑의 향기로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6 오전 11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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