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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3:16-19) 두 가지 사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3:16-19) 두 가지 사랑

정인순 2010. 9. 5. 14:01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57강-히13장,16-19(두,가지,사랑)-heb020804.mp3

 

 이근호

두가지 사랑

2002년 8월 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 16-19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과 충돌을 이르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밀쳐 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사랑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니, 하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망가지심과 죽으심에서만 나온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천국 가기 위해서는 우선 십자가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선 말입니다. 만약 자기 사랑을 포기못하면 하늘의 사랑도 못건지고 또 다시 세상쪽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자기 사랑이 너무 지독하다보니 마땅히 세상쪽으로 도로 물러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에 보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쪽에서 구원의 근거로 인정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스레 장만한 사랑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정성스레 준비하신 사랑을 받을 때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용납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하루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마르다는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음식을 준비하려 분주합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턱 밑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 듣기에 전념합니다.

 

보다 못해 언니 되는 마르다가 말을 꺼냅니다. "예수님, 제 동생 마리아 보고 이 언니 일을 좀 도우라고 일러주세요"합니다. 그 때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괜찮다. 마리아는 오히려 더 좋은 편을 골랐느니라"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이 도리어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를 훼손하고자 했던 예가 됩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소중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의 소중함을 우리는 무엇을 포기함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천국은 어떤 상태냐 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만끽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만남이 성사되었고 예수님의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마르다는 자기에게서 나온 나름대로의 조그만 영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귀중함도 귀중함이지만 그것보다는 자기 식의 사랑이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겁니다. 자기 솜씨, 자기 열심을 가치있게 인정받을 수 있는 영역을 포기하지 못하고 더 사랑한 겁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지금 마르다는 쓸데없는 것의 가치를 더 높이고자 염려하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활동은 예수님의 전 활동에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과 같이 나열시키게 하시고 그 두 사랑 가운데 어느 사랑이 더 소중한가를 가르키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고 보여주면 줄수록 인간들의 본성도 지독스럽게 자기 사랑 위주로 폭로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극단적인 사랑이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아예 예수님 자기 자신이 죽어버리는 겁니다. 죽음으로서 사랑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물론 그 현장에는 대다수의 제자들은 다 도망친 후입니다. 각자 자기 살 궁리를 찾아서 말입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좋은 교훈과, 병 고침의 기적과 귀신 쫓아냄의 기적과 떡과 고기를 주시는 기적과 심지어 물에 빠진 자를 건지시는 기적들을 베풀 때에는 사람들은 진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추종했지만 막상 진정한 사랑, 그리고 최종적인 사랑을 제공하는 그 시점에 가서는 모두들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비쳐 볼 때 비로소 인간들은 자기 사랑의 극단적 모습을 드러낸 것 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 때까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오해한 모든 것들을 다 쓸어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다 십자가만이 홀로 남게 합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방주입니다.

 

십자가만의 사랑으로만 우리가 삽니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 어떤 괴로움도 견뎌내게 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사랑이 너무 크고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이 사랑의 힘으로 험한 인생길을 통과하게 됩니다.

 

아내로서 진정한 남편의 사랑만 확인할 수 있다면, 남편이 비록 먼 이국 땅에서 일하고 자신이 홀로 본국에 남아있더라도 꿋꿋하게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하늘에서 거저 오는 겁니다. 따라서 그동안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가지고 혹은 보람을 가지고 전력을 쏟고 조립해 온 사랑은 결코 소중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는 아니됩니다.

 

예수님은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 5:33-37에 보면,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도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했던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지고 논 것이 되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명예를 위해서도 그 인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주장이 우리네들의 상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해버리십니다. "아예 맹세할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예부터 맹세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임도와 관계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약속을 잘 지키면 정말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듣기 위해서도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우리네 상식과 다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구태여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하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해서 '예'라고 할 것은 '예', '아니오'라고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이 하나님이 주는 것만 먹으라는 겁니다. 여러분, 정말 너무 간단해서 거짓말 같지요. 그러나 만약 여기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수갑을 채우는 무리한 짓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맹세거리를 길게 만들어놓고 그 하나 하나를 지킬까 못지킬까에 보고서 자진해서 초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스스로 지킬만한 것들을 맹세 조항을 동원하면서까지 만들어내곤 합니다. 이것은 중지되어야 합니다. 악마는, 우리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라고 부축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망가졌는데 자기 자신은 안 망가지게 위해 사투를 벌리는 꼴이 됩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절정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 자신이 예수보다 더 소중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시도를 '육', 혹은 '육신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사도 바울이 보이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다. '영' 혹은 '영적'입니다. 육신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신의 힘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의 열매라면, 영이라는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요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하늘의 사랑은 그냥 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영적을 위해서 종사하는 인도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인도자의 관계는 오로지 사랑의 관계로만 이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인도자 위에는 참 목자장이 따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7절에 보니, '회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계'란 돈의 출입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즉 평소에 인간들이 돈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돈의 출입에 지대한 신경을 써서 회계를 늘 하게 됩니다. 얼마 들어오고 얼마나 나갔느냐를 따지게 됩니다. 마음 속에 돈에 대한 장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마치 돈 회계하듯이 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자들이 자신의 육적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알면 영적으로 수입 잡았다고 여기고,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자기 사랑쪽으로 전한하면 영적으로 지출했다고 보고 안절부절하는 겁니다.

 

바로 이렇듯 영적인 세계의 존재와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복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 때 영적 인도자 행세를 했다고해서 늘 인도자라고 봐주어서는 아니됩니다.

 

목사라도 주위 사람들이 훌륭하고 존경스럽다고 나선다면, 하나님 사랑을 버리고 자기 사랑으로 스스로를 감싸고 보호하려고 나서게 됩니다. 만약 이런 경우에도 단지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의 말에 복종하고 순종한다면 차라리 마귀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편에서 회계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사랑에 대해서 회계하려고 나서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용납해주어서 아니됩니다.

 

영적 인도자를 판단할 수 있는 경우는 스스로 자기 사랑을 벗어나서 하늘의 사랑만 그리워질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도록 사도는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영적 인도자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유익되도록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독한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 도리어 영적인 형제를 미워하지는 안았습니까? 또 다시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경우가 없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7. 두 가지 사랑(히 1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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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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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데, 그런데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과 항상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밀쳐 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사랑으로 채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천국에 가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거짓사랑인데, 그것을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 가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짓사랑이고, 그런 죽도 밥도 아닌 현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교회나 우리 마음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망가지심에서 !!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은 예수님의 망가지심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몸이 찢겨지고 부서지심으로서, 오직 거기서만 사랑이 나오는데, 다른 것에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것에서 사랑을 찾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찾기 위해서 십자가 쪽으로 접근해 들어가는데, 그런데 자꾸만 그 십자가가 눈에 거슬린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꼴 보기가 싫다는 말이죠. 가까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꾸만 피하고 싶은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도 건지지를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물러서는,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이 바로 거기에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바로 사랑인데,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속으로 우리 몸을 풍덩 던져야 하는데,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기 사랑이 너무나 지독한데, 자기 가족과 자기 형제, 자기 교회, 자기 회사, 그렇게 자기와 연결된 것들이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을 전적으로 받기에는, 우리는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자기 사랑이 너무나 지독해서 이 세상 쪽으로 도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고 우리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구원의 근거로 인정치 않는다는 말이죠.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의 사랑을 인정하게 되면, 그야말로 개판이 된다는 말이죠.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준 사랑을 너희가 믿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장만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이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사랑을 받을 때만 구원이 되도록, 하나님은 그런 방식을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마리아와 마르다 !!

예수님 당시에, 하루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마르다는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분주합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뻔뻔스럽게도 예수님의 턱 밑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듣기에 전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니가 보다못해서 말을 꺼내는데, “예수님, 제 동생을 보고 이 언니의 일을 좀 도우라고 해주세요” 라고 말이죠.

성경에는 그런 표현은 없지만, 이것은 마리아가 화가 난 것인데, 그러면 왜 화가 났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천국이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천국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천국에 있으면서도 마르다는 왜 화를 내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통치아래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챙기려는, 즉 소박한 자기만의 세계, 자기 솜씨를 발휘할 수 있고 자기 자랑을 할 수 있는, 그런 따로 챙기는 어떤 영역이 있었다는 겁니다. 마르다는 말이죠.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그것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는 것이죠.

아마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동생에게 먼저 했지 싶은데, 순서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동생이라고 해서 말을 듣는 것이 아닌데, 언니가 되어서 동생에게 무엇을 해준 것이 있어야 듣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언니의 말이라도 듣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르다는 화가 나서 그만 예수님에게 일러바치는데, 자기 동생이 하는 짓에 대해서 고자질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시는데, “괜찮다. 마리아는 오히려 더 좋은 편을 택하였느니라” 라고 말이죠.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괜히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그래서 한 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자기의 솜씨를 발휘해서, 자기가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하나님에게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국이 맛은 있는데, 좀 싱겁다. 소금을 더 넣어라” 라고, 그런 잔소리는 시어머니가 하지 예수님은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무엇이 대비가 되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데, 즉 “하늘의 사랑이 소중한가?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온 너의 솜씨, 그것이 더 소중한가?” 라고 말이죠. 그렇게 항상 양쪽을 대비시키면서 우리게 질문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 일어난 이 일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이 도리어 예수님의 사랑과 그 가치를 그만 훼손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종종 범하면서 살아가는데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기적은 ‘십자가’로 모아지면서 !!

예수님은 이런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는, 그런 것으로 비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은, 즉 진짜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요나의 기적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대신 죽으마. 그리고 너희들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신 살아날게. 나는 부활의 첫 열매다. 내가 부활이 된다는 것은 나를 믿는 자도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전부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죽어주시는데, 떡을 주고, 병을 고쳐주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기적들, 그것을 수 천 가지 모아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구원이 일어나려고 하면, “내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사랑하지 있는지, 나는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라는 것을 물어봐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인가? 아니면 내가 만든 사랑인가?” 라는 것인데, 정말로 예수님을 통해서 전혀 추가될 것도 없이 완벽하게 완제품으로 안겨주신 사랑인지, 아니면 자기가 온갖 정성을 다해서 열심을 내어서 만든 사랑이냐는 겁니다. 후자를 언젠가 ‘장난감’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러므로 십자가의 기적이 다른 모든 기적들을 일소에 해소시켜버리는데, 그 빈자리에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고 하시면서 그만 ‘쾅’ 하고 놓아버리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를 놓는 소리인데, 그러니 거기에는 피가 흥건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과거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하는, 그런 것을 되새김질을 하지 말고, 그런 것은 다 파내고, 그 빈자리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하면서 십자가가 ‘콱’ 꽂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곧 구원방주이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런 사랑이 있다고 하면, 이런 더위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자기 자존심이 깨어지는 비참함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비록 손가락질을 당하고 끼니를 굶는다고 해도, 그런 것도 역시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설교를 다시 하면 !!

설교를 다시 하겠는데, 주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인생은 무엇인고 하니까, 항상 대비되는 사건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온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너희가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지?” 라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 사람은 간암에서 나았다고 하는데, 저는 감기라도 낫게 해주세요. 저에게도 그런 기적을 조금이라도 베풀어주세요”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 이미 있는데, 그런데 그런 것에 왜 신경을 쓰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챙긴다는 것은, “나는 이만큼 믿음이 좋다” 라는 것을 모으고 모아서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주님이 주신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랑에 얽매이는 꼴인데, 즉 “내가 나를 구원시키겠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보면, 사랑은 하늘에서 그저 내려온 것인데, 그렇게 그저 내려왔기 때문에 어떻다는 겁니까? 그동안 자기가 열심히 땀을 흘려서 성취감을 가지고 자기 명예를 걸고 투자했던 모든 것, 그런 것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사업도 포함이 되지만 교회봉사도 포함이 되는데, 그런 것을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사랑의 연속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이전에.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장을 보겠는데, 33절에서 37절입니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아예 맹세할 필요조차도 없다 !!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했던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약에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지고 논 것이 되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명예를 위해서도 그 인간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이죠. 바로 이런 주장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만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해버리시는데, “아예 맹세할 필요조차 없다!” 라고 말이죠. 우리로서는 상당히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데, 옛날부터 맹세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나,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임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즉 약속을 잘 지키면 매우 신실한 사람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듣기 위해서도,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나올 것이 분명한데, 그래야 믿음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러한데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우리의 상식과 다른데, “하나님을 위하여 너희 자신의 신실함을 구태여 보일 필요가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사람에게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단지 “하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해서 ‘예’ 라고 할 것은 ‘예’ 라고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즉 “가만히 있어라. 내가 주는 것만을 먹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정말 너무 간단해서 거짓말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만약 여기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옹호하고 수갑을 채우는 짓이 된다는 말이죠. 스스로 맹세거리를 길게 만들어놓고, 그 하나 하나를 지킬까 못 지킬까 싶어서 초조할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짓은 오늘부터라도 당장에 스톱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맹세하지 말라” 라는 것이, 이게 성경말씀에 나오기 이전에, 사람들은 계속 스스로 지킬만한 것들을, 그런 맹세조항을 만들어내곤 한다는 말이죠. 즉 “하루에 성경 3장, 주일에는 5장, 이렇게 하면 일년이면 성경을 다 본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를 해야지. 그리고 차에 타서도 핸들을 잡고 또 기도를 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재미를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악마의 덫인데, 우리 인간들을 보고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부추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따위 신앙은 휴지통에 집어던지라는 말이죠. 악마는 우리에게 맹세를 유발시켜서, 그것을 스스로 측정하게 하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든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니가 사업이 안 되고 가정이 꼬이는 것은 니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주겠나? 정신을 차려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스스로 자승자박을 하도록 만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고양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그게 마귀의 작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반짝 반짝 빛나는 자기 자신인데, 그것이 마귀가 만든 작품이란 말이죠. 다른 말로 ‘우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망가졌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리는 꼴이 되고 마는데, 무슨 그런 주님의 형제가 다 있느냐는 겁니다. 말씀을 보통 오해한 것이 아닌데,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죠.

설교를 다시 하면 !!

설교를 다시 하겠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법칙과 규칙을 그대로 노출을 시킵니다. 즉 “너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수법을 내가 다 안다. 바로 이것이잖아. 맹세를 해서 복을 받고, 또 맹세를 해서 복을 받고, 그렇지? 맞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지킬만한 것만 골라서 그렇게 하는데,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를 지키는 것이 전혀 아니고, 결국은 자기 사랑인데, 즉 인간의 자기 탐욕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는 장모는 나았는데, 너희 장모는 그냥 죽었지. 봐라, 내가 믿음이 있잖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실상을 폭로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데, 물론 그 마지막은 ‘십자가’ 라는 겁니다. 즉 “너 자신이 이 예수보다 더 소중하더냐? 니가 그렇게 갈고 닦으면,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도대체 뭐가 되는데? 정말 이렇게 할거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도 기어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무슨 대가를 바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는 것인데, 그것을 믿지 않겠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받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협조한 것이라고 여겨버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구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사랑을 따로 챙겨서 조립을 하려고 하는데, 즉 자체 생산에 나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신앙이냐는 말이죠. 자기가 그냥 자기 것을 들이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것만 이야기해라”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은 우리의 수법을 다 아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으려고 나서는 것을 아는데, 하지만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모두 다 떠나고 없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대립되는 사랑의 관계 !!

오병이어를 기적을 행할 때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와, 정말 끝내준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진짜 메시야다” 라고 하면서 쫓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돌아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진정 너희들은 나를 모른다. 나를 알았다면 나를 떠났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진정 산다고 할 수 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자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떡은 맛있는데 말씀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다들 떠나고 말았는데,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너도 가지. 왜?” 라고 하니,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는데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은 니가 잘나서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택했기 때문에, 즉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이 나와 함께 있다” 라고 하셨는데, 이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 라는 겁니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육(肉)과 영(靈) !!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공생애는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기 사랑이 첨예하게 대립이 되면서 이어져나가는데, 이것을 사도바울을 ‘육’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좀 골치가 아픈데, 육과 육체가 다르다는 것이죠. 육신과 육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말이죠.

우리 인간은 육이 있어서 육대로 했다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육을 동원해서 했다는 겁니다. 기도를 하라고 해서 기도를 했고, 전도를 하라고 해서 전도를 했는데, 그게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시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육으로 흉내를 냄으로서 그 말씀이 실현되었다고 여기는데, 우리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 육의 맞은 편에는 영이 있는데, 그런데 이 영은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은 사랑의 관계라는 겁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이 있기에, 그것이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중동에 일하러 간 남편을 위해서, 여자는 아무리 외로워도 참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는 6.25 때 헤어진 남편을 50년이나 기다렸는데, 그런데 이번에 만나보니 그 남편은 그만 결혼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따졌다고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결혼을 해버리면 나는 무엇이 되는가? 이 나쁜 놈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은 짝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말 사랑이 있다고 하면,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기가 만들어낸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2,000년 전에 벌어진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죽음에서 부활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그 사랑이 주님이 주신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자기에게 아무리 대단한 것이 있다고 해도,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만을 완벽한 사랑으로 인정하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영, 즉 영적인 세계를 따로 준비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가 서로 대치가 되면서 성도의 삶이 이어져가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영혼과 회계 !!

여기에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라고 하는 것은, 영혼을 위해서 신경을 쓰고 깨어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지도자는 따로 계시는데, 그게 ‘양의 큰 목자’ 라고 20절에 나오는데 말이죠. 그분이 예수님인데, 그래서 그분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런데 그분은 육적인 사랑을 원하지를 않고, 영적인 세계, 즉 주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하고 즐거워하는, 그것을 양의 큰 목자이신 분께서 요구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빠져서, 그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안타깝다고 하면서 걱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걱정을 하는고 하니, 오늘 본문에서 참 재미있게 표현을 하는데, 즉 ‘회계’ 라고 한다는 말이죠.

회개가 아니고 회계인데, 이것은 알다시피 돈의 수입과 수출에 관련된 것인데, 평소에 우리 인간들은 돈에 몰두해있는데,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육체가 살 수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돈의 출입에 대해서는 항상 지대한 신경을 관심을 가지고, 늘 회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나 나갔느냐를 따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마음속에 돈에 대한 장부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돈이 아닌 영혼을 위해서 경성하는, 즉 영혼을 위해서 깨어있는 자들이 나오는데, 반면에 일반 사람들은 언제나 돈을 위해서 깨어있다는 말이죠.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마치 돈을 회계하듯이 하는,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특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돈의 장부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지 모르는데, 장사가 좀 되면 헤헤거리다가, 좀 힘들다 싶으면 오만 우거지상을 다 쓴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은행에 가서 통장을 확인하면서 얼마나 거기에 정성을 쏟아 붓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희한하게 영적인 영역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서 “돈보다 주님이 좋아요” 라고 하면, “야, 수입이 들어왔다” 라고 하고, 반면에 “신앙은 돈이 안 돼. 역시 돈은 돈이야” 라고 하면, “이런, 이것은 지출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 물론 거의 없는데, 혹시 그런 사람이 있거든 지도자로 여기고 존경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여기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현상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존경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존경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성경말씀이 수상하게도 목사 위임식에 많이 쓰이는데, 즉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한 번 위임을 받은 목사는 영원한 목사다” 라는 것인데, 완전히 이단들이고 사기꾼들인데, 성경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나는 주님의 사랑밖에 몰라 !!

위에 큰 어른이 계셔서, 그 어른이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교회는 없어. 당회장이고 뭐고 나는 주님의 사랑밖에 몰라. 교인들이 한 사람도 없어도 나는 주님만 있으면 그만이다” 라고 한다면, 그 순간에는 교인들이 복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말이죠.

그런데 처음에는 좀 그렇게 하다가, 그러자 교인들이 뭐라고 부추기는고 하니, “우리 목사님은 정말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돈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저렇게 예수님만을 사랑하다니, 정말이지 진짜 목사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괜찮은 인간입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인간에게 복종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죠.

그런데 옆에 교회도 보니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자기들끼리 ‘노회’ 라는 것을 만들어서, “목사를 벌을 받는다” 라고 하난, 성경에도 없는 규칙을 만들어서 널리 퍼트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사에게 덤비다가 벌을 받은 케이스를 모아서, 간증거리로 만든다는 겁니다. 사실은 덤벼도 멀쩡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말이죠. 그러면 교인들은 그것을 믿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도 그렇게 믿어달라고 하니, 더러워서 그렇게 믿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목사는 지금까지 자기가 일구어온 재산을 보호해주면, 그것으로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사랑에 흠집이 생길까 싶어서, 목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모르는 척을 한다는 말이죠. 교인들도 자기 사랑이고, 목사들도 자기 사랑인데, 물론 거기에 성경말씀을 이용하면서 서로 서로가 기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도대체 이게 무엇을 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고린도서전서 13장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인가요? 목사의 설교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감사히 받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것뿐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랑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니 사랑과 내 사랑을 다 부수자” 라는 것인데, 자기가 교회를 세우고 병에서 낫는 것이 사랑이 아닌데, 진짜 사랑은 더 이상의 사랑이 추가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완벽하고 완전한 사랑이 될 때,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오직 십자가 사건뿐 !!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는 목사가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한 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셨다는 겁니다. 어떤 교회의 장로는 그 교회의 역사가 50년인데, 자기가 땅을 바친 것을 무려 50년 동안이나 우려먹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낙타무릎이 되었다고, 그것도 무려 50년 동안이나 우려먹는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거기에 기가 죽을 이유가 없는데,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언제 인간이 될래?” 라고 하면 되는데,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죠. 그게 얼마나 지독한 자기 사랑입니까?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은 전혀 십자가 사건이 아닌데, 십자가 사건은 오직 십자가 사건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목사가 새로 부임을 해서 “500명을 모으겠습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500명을 모아서 단체로 지옥에 갈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500명이 되지 않아도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낙원에 갑니다” 라고 해야 목사가 아니냐는 말이죠.

역시, 나는 나밖에 몰라 !!

방금 제가 말한 것은 흔히 있는 목사들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런 우리가 목사를 비판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인데, 그들을 공격하면서도 그 칼날을 자기에도 들이대야 한다는 말이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 보인다는 것은 자기 눈에 들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니 주님의 사랑으로 항상 자기를 쳐야한다는 겁니다. 즉 “너는 너밖에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므로 주님의 완벽한 사랑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사랑을 가지고 조물딱 조물딱 거리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가온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망가지고 상처를 입었던 간에, 그 사랑으로 인해서 다 용서함을 받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주님의 백성들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만 증거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지독한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서 영적인 형제를 미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또 다시 예수님을 못박아는 경우가 없도록 해주시고, 오직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9 오전 12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