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3:8-15 ) 영문 밖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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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영문 밖 2002년 7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8-15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13: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하나님은 진리를 가지고 세상과 대치하십니다. 진리라는 것이 있어 하나님도 그 진리에 따라 일하시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진리를 타야합니다. 진리에 타지 아니하면 진리 밖에 존재하는 자가 되어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예 진리 자체를 거부해 버립니다. "오직 하나만 옳다는 진리가 과연 성립되는가?"하고 의심합니다. 믿을 것은 내 몸 뿐이다고 합니다. 자기 목숨이 진리이고 자기 가족을 진리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편한 것이 진리이며 이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고 봅니다.
정말 곧 죽어도 괜찮을 참 진리를 알았다면 평생을 울어도 그 기쁨을 다 표현할 정도로 귀한 겁니다. 사람이 진리 없이 무슨 낙으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다른 교훈에 이끌리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교훈에 이끌리지 말라는 것은 진리는 분명히 있고 그 진리는 오직 하나로서 분명히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확고한 진리를 확보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확고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면, "예수는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 초점 맞추어져 있지 아니하면 모두 다른 교훈입니다. 진리도 아닙니다.
영생과 구원과 천국 가게 됨은 모두 예수님의 자기 피이지 결코 우리들의 노고나 수고나 피가 아닙니다. 이 점은 모든 종교와 학문과 인간의 지혜와 복음과의 차이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만이 진리라고 나서셨습니다. 예수말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없는 자들이 진리의 대체물로서 등장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 부흥시키기'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줄 압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은 '교회 믿기'이지 결코 '예수 믿기'가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지 결코 교회 다니는 교인이나 목사가 아닙니다. 진리 아닌 것에 충성하면 저주의 길로 빠지는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벌어지고 일어나는 것은 진리의 증거물이 아닙니다. 비진리의 증거물입니다. 진리는 성경 말씀으로 그냥 그대로 우리들에게는 나타날 뿐입니다. 그 외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금식해서 병 나았다'는 것을 진리를 간직하면 이 사람은 늘 초조하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병이 생기면 이번에서 금식에서 곧 바로 나아야 되는데 만약 쉽게 낫지 아니하면 남들이 자기보고 불신앙적 사람이라고 비난할까봐 초조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을 것은 성경 말씀이지 그런 변화무쌍한 에피소드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리가 되는 이유는, 그 전에 주어졌던 말씀들이 모두 예수님을 겨냥해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따른 성취가 없으면 진리가 안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예언은 무엇이며 그 성취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0-11절에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앞선 말씀이요 그 뒤에 나오는 12절의 말씀 즉,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라는 말씀의 성취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39에서 예수님은, "성경이 내게 대해서 증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이 예언과 성취의 선상에 놓여 있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예수님 안에서 예언과 성취를 발견하고 말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과 다행스러움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말씀을 지켜서 구원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 마땅히 일어날 현상입니다. 그러면 예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대제사장이 등장합니다. 그 대제사장은 제단 위에서 뭔가를 잡습니다. 그것은 희생 제물로 쓰여질 가축입니다.
과연 이 가축은 음식물로서 먹기 위해서 잡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버려지기 위해 잡습니다. 바로 이 일을 백성들을 대표해서 수행해야 하는 자가 대제사장입니다. 희생제물이 왜 무참히 죽고 또한 무참히 전 밖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추방되는 겁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하여 저는 여러분들에게 요한복음 19장의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대제사장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은 반드시 죽어야 될 자로 삼아버립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에게 죽임을 임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체포된 그 날은 바로 '유월절 예비일'입니다. 즉 이러 저러한 인간들의 별의별 계획과 의도와 휩싸여 맥도 못추며 놀아나는 것 같으면서도 예수님은 저들과 상관없이 예비된 '유월절 양'의 길로 묵묵히 갑니다. 바로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는 양상'으로 말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이 예언의 성취의 길을 가로막아도 예수님은 중단없이 유월절 희생의 길로 나가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과연 처형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30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혼잣말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여러분 오늘날같이 번잡스럽고 온갖 일들과 사건들이 뒤덮여 있는 세상에서, 이 속삭이듯이 내뱉은 예수님의 혼잣말, "다 이루었다"를 절대 진리로 삼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누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중얼거렸던 말씀에 관심 두겠습니까?
이들에게는 이것보다 몇 천배, 몇 백배 더 가치있고 더 진리적인 사실이 따로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의 희생양은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리 성취자로서 그 임무과 사명을 다 했기에 이제 남은 것이 이 진리에 따라 전 인류를 심판하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대제사장의 손에 의해, 그리고 민중들의 손에 의해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받아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 사태가 곧 전에 대제사장의 손에 의해서 반복되었던 그 예언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대제사장의 손에 의해 시행되는 속제제물은 결국 진 바깥에서 처참하게 뭉개지고 태워지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은 이렇게 제물이 진 밖에서 버려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겠어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과연 무엇이 예수님을 성문 밖까지 몰아갔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피만이 성도를 거룩케 한다'라는 진리를 아는 자라면 그 사람의 뇌리 속에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말씀이 공명되면서까지 왕왕 울릴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행함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버림받는 과정을 통해서 유월절의 희생양의 역할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영문 바깥의 세계는 영문 안을 사수하는 자들에 의해서 추방된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쫓겨남은 영문 안의 세계를 유지하려는 힘에 의한 겁니다. 따라서 참으로 진리를 아는 자라면 그 진리를 따라 영문 밖에서 진정한 소망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따라 영문 밖에서 참된 소망을 만나는 자들입니다. 그 대신 영문 안에서 출세와 성공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확고한 진리가 그 안에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여기에 보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나와 있습니다. 구원이 안되는 소망을 포기하고 버렸다는 겁니다. 또 덧붙여 말씀하기를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갓바위 신앙과 복음과 차이점이 어디 있다고 봅니까? 갓바위 신앙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데 있습니다. 물론 성문 안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추방하고 난 그 나머지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 자신을 위대하다고 말하고 이 세상에서 위대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는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해 버립니다. 이제 오늘날 이 세상들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왜 교회를 찾습니까? 자신들이 예수님을 차버렸는지 그 이유를 보다 잘 알기 위해서 교회 다닙니까? 과연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교회 다니는 자기 자신을 보다 위대한 존재자로 변신하기 위한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해 교회 다닙니다. 여러분, 예수도 없는 세계, 아니 예수님을 일심으로 추방시킨 그 세계에서 성공하고 위대해지는 것을 그토록 소원하십니까? 여러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성문 밖에 있습니다. 성문 안에는 없습니다. 아니, 성문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를 추방시키고 또 추방시킵니다. 진리는 성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문 밖으로 나가보면 유월절 어린 양이 우리 때문에 피를 흘린채 죽어계십니다.
만약 그 피에 손을 담그는 자가 있다면 그 순간 자신은 철저하게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자아가 불필요하고 자아가 사라저야 할 존재임을 말씀해 주는 십자가이고 또한 오직 진리 되시는 예수님만 계시면 되는 장소입니다. 과연 이런 모든 사실이 참된 진리인 이유는, 이 고백만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패척한 그 세력과 세계에 못 끼어들어 안달나서 고개 숙이고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소망은 구원시켜주기 못하는 소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우리 머리 속에는 보이는 온갖 잡동사니와 세상 문제로서 가득차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음성만이 가득차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6. 영문 밖(히 13:8-15)
----------------------------------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히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진리에 올라타라 !!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가지고 이 세상과 대치하시는데, 그러니 진리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 진리에 따라서 일하시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역시 이 진리에 올라타야만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진리에 올라타지 아니하면, 그만 진리 밖에 존재하는 자가 되어서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진리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그만 진리 자체를 거부해 버립니다. “오직 하나만 옳다고 하는 진리가 과연 성립되는가?” 라고 하면서 의심을 하는데, 즉 믿을 것은 자기 몸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목숨이 진리이고, 또한 자기 가족을 진리로 보고 있는데, 따라서 자기가 편한 것이 진리이며, 이것 이외에는 다른 진리는 없다고 우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정말 곧 죽어도 괜찮을 참된 진리를 우리가 알았다고 하면, 우리는 3박4일을 울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이것이 진리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이런 진리도 모르고 무슨 낙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는 분명히 있고, 그리고 그 진리는 오직 하나로서 분명히 드러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인데, 참으로 확고한 진리를 확보한 사람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결코 흔들림이 없다는 겁니다.
(히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면 그 확고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면,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의 자기 ‘피’ !!
우리가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자기 피이지, 결코 우리의 노고나 수고나 우리의 피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이 진리 이외에 다른 것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학문, 즉 인간의 지혜와 복음과의 차이점은 바로 이것뿐인데, 예수님의 자기 피로 자기 백성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 이러한 현실성만이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진리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아닌 자기를 믿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진리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 진리의 대체물로서 등장시키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교회 부흥시키기’ 라는 겁니다. 즉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안다는 말이죠.
교회 믿기, 그것은 ‘다른 교훈’ !!
하지만 이것은 ‘교회 믿기’이지, 결코 ‘예수 믿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즉 다른 교훈이란 말이죠. 진리는 예수님이지, 결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나 목사가 아닌데, 그렇게 진리가 아닌 것에 충성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 저주의 길로 빠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이 단순한 것을 믿을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대체물로서 교회를 만들어서 믿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교회가 커지면 하나님이 축복한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저주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측정하고, 또한 확인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정작 중요한 믿음은 없는데,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그 증거물은 찾고 싶고,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녀서 자기 사업이 잘 되고 가정이 잘 되는, 그런 것을 모아서 마치 진리처럼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잔뜩 쓰레기를 끌어 모아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다른 교훈인데, 그래서 언제나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금식해서 병이 나았다” 라는 것을 진리로 간직하게 되면, 이런 사람은 늘 초조하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병이 생기면 이번에도 금식을 해서 곧 바로 나아야 되는데, 만약 쉽게 낫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병도 병이지만, 남들에게 자기를 보고 믿음이 없다고, 그렇게 비난의 소리를 할까 싶어서 초조하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을 것은 성경말씀이지, 그런 변화무쌍한 에피소드들은 아니라는 말이죠.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말씀은 결국 어디로 모아집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이 흘린 피로 인해서 구원받을 자들을 온전케 했다고 하는,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작품이란 말이죠. 여기로 모든 진리가 모아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혀 여기에 한 다리를 걸치려고 하면, 그것은 반칙이라는 말이죠.
절대로 여기에서 흔들리면 안 되는데, 물론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막상 교회생활을 오래하고, 그리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있어야 되는 자리에 그만 자기의 업적들을 쌓아놓고 있다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
하지만 말씀이 인도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라는 것인데, “믿음에서 행함으로” 라는 것이 전혀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그만 “믿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행해야지”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처음도 믿음이고 마지막도 믿음인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자기 행함을 집어넣으면 안 되는데, 그 어떤 행함도 말이죠. 온전히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이지, 자기의 피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기도하면서 흘린 눈물은, 설령 그게 피라고 해도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다 다른 교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으려고 하면 쉬운데, 반면에 이해를 하려고 하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봉사와 찬양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이전에 있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따라가다가 보니, 이러한 진리의 최종지점에 도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 있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히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히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지내라 !!
유대인들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전혀 익숙하지가 않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지내라” 라고 해서, 그런 규칙을 율법으로 미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말씀인데, 즉 ‘옛 언약’ 이라는 말이죠. 즉 율법인데, 이게 구약성경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구약성경에 왜 이런 말씀이 먼저 들어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먼저 주셨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가 무엇을 행하셔서, 우리 인간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하고 말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신 메시야 쪽에서 뭔가를 행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온전하게 아무런 탈도 없이 천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그 ‘은혜’,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설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지내라” 라고 시켰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구약의 모든 말씀은 결국 예수님을 겨냥한 것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저는 그게 정답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예수님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모든 성경말씀을 예수님을 겨냥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도 모르고, 자기가 말씀을 지키는 그 의로움으로 구원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물론 오해라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 의’ 라고 하는데, 로마서 3장 5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 자기 의 !!
사도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충성과 봉사를 다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따로 마련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대체물로서 성전에서 자기 의를 축적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가지고 남들과 비교에 나서는데, 심지어 교회에서 목사들이 그것을 부추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자기 아픔을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섞이면서, 그만 예수님을 죽였던 그 분위기로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자칭 믿음이 좋다고 하는 인간들만 남아있는데, 그야말로 잘난 인간들만 말이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헌금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는 인간 조직체가 되고 말았는데, 그게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이고 실상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교회를 비판하는 재미로 살라는 게 아니고, 우리는 과연 그렇지 않은지, 그들과 한 패거리는 아닌지를, 그것을 살펴보자는 말이죠. 즉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과연 예수님을 믿는가? 아니면 10년 동안 교회에 다닌 것을 믿는가?” 라는 것을 물어봐야만 한다는 겁니다. 정말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교훈을 믿고 있는지 말이죠.
흔들림이 없는 믿음 !!
설교를 다시 해보면, 과연 진리라는 것을 눈치챘다고 하면,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나는 살았다!” 라고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전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정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와 같은 것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이미 진리를 알았는데, 그런데 왜 흔들리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있는고 하니, 정작 자기는 진리에 속하지 않으면서, 다른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시기심이 나서, “교회에 어디 크고 부흥이 된다고 되나? 진리에 속해야지.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들어봐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문제라는 말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을 천지개벽이 된다고 해도 언제나 수용할 마음이 준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주시는 평안함인데,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한다는 말이죠.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영문 밖으로 !!
그러면 이렇게 진리를 알았으면 다 알게 된 것인데,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오늘 본문을 보면 ‘영문 밖으로’ 라는 말도 있고, ‘성문 밖에서’ 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런 표현이 왜 나오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 19장을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14절에서 19절입니다.
(요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 19: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요 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요 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 19: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 ‘기야바’에 의해서 체포가 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집에 갔는데, 물론 그에 앞서서 그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갔는데 말이죠.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는 죽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반드시 죽어야하는 자로 삼아버리는데, 또한 군중들도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죽여달라고 요청을 한다는 말이죠.
유월절 예비일 !!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된 그날은 무슨 날인고 하니, 여기 15절에 보면, ‘유월절 예비일’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인간들이 설치는 바람에 맥도 추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과 의도와는 상관없이 준비된 ‘유월절 양’의 길로 묵묵히 가신다는 겁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는 양상으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방인인 빌라도 총독에게 가고,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죽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유월절 어린양의 길로, 영문 밖으로 가시는데,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또한 처형이 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모두다 이미 준비된 것이란 말이죠.
여러분, 오늘날같이 번잡스럽고 온갖 일들과 사건들이 뒤덮여 있는 이 세상에서, 2,000년 전에 일어난 이것이 과연 중요한 사건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월드컵 4강이 중요하고, 또한 남북통일이 중요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진리가 아닌 다른 교훈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고,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에 보니, 예수님은 누구인고 하니, 유월절 어린양의 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영문 밖으로 쫓겨나서 우리 대신에 죽임을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 예수님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하,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았구나. 예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지, 즉 “예수님 때문에!” 라는 것이 항상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언제든지 말이죠. 교회에 와서만 생각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교회고 목사고 장로고 나발이고,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자기의 충성과 봉사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게 한다는 말이죠. 유월절 어린양, 거기에 누가 관심을 두겠습니까? 사람들은 전혀 관심도 없는데, 그런데 그 유월절 희생제물의 길을, 그 운명적인 길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께서 성취하셨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예고가 되고 성취가 되어왔는데, 마지막 결론은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예수님께서 성공적으로 치러내심으로서, 모든 말씀은 다 끝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인데,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마치 혼잣말처럼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는 지금 살아간다고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외롭게 속삭이듯이 내뱉은 혼잣말이 있어요. 그게 바로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을 절대진리로 삼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누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혼자서 중얼거렸던 이 말씀에 관심을 두겠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염려하지 마라.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고민하지? 내가 일을 하고 하는데, 사소한 것 때문에 고민을 하면 되겠나? 내가 다 이루었어” 라고, 마치 속삭이듯이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머리 속에서 메아리를 치면서 울리는게 되는데, 그게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그 머리 속에 “필승, 코리아!” 라는 것이 가득하지만, 우리 머리 속에는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가득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교훈에 끌리면 안 되는데, 이것이 그 귀한 예수님의 발걸음이고 예수님의 행동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전부인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겁니다.
제사장은 왜 제사를 드리는가?
그러면 여기는 의문점이 하나 생기는데, 제사장이 제물의 내장은 제단불에 태우고 그 나머지는 영문 밖에 있는 쓰레기장에 버린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의 가치와 제사장 존재는 그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느냐는 말이죠. “제사를 지냈냐? 잘했다. 구원시켜줄게” 라고, 그렇게 되어야지, 그게 아니라 “제사를 지냈냐? 그것 가지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고 하면, 그러면 무슨 재미로 제사를 드리고 하겠느냐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면서 “나는 남들과 구별이 되어서 이렇게 제사를 드리니 참 대단하다” 라고 하면서 자기 잘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고 하니, “왜 흠이 없는 이 제물이, 왜 영문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비참하게 찢기고 죽어져야 하느냐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거부를 당하는, 즉 하나님에게 바친 제물조차도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짐을 당하는 것을 통해서 제사장은 무엇을 깨닫게 되는고 하니, 장차 오실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시는 분이 사람들에게 의해서 거부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셨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제사를 드리는 순간순간마다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누가 거부했습니까? 그때 그들이 거부했고, 또한 오늘날 우리가 거부했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게 진리처럼 여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히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뭔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싶고 또한 외면하고 싶은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그런 요소가 말이죠.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능욕을 받아서 죽었다는 겁니다.
영문 밖에서 만나는 예수님 !!
그러니 우리는 어디서 주님을 찾아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나쁜 놈입니다. 저는 이 세상만 좋아하고, 예수님은 뒷전입니다” 라는 겸하여 알면서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영문 밖’ 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가야 비로소 예수님의 희생가치와 그 고마움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남들에게 칭찬을 받고 대우를 받게 되면, 스스로 어떻게 오해를 하게 되는고 하니, “나는 가치가 있다” 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알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거짓말인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지식으로만 수용할 뿐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의 그 참혹한 얼굴을 보기가 싫어서 밀어내는데, 즉 “십자가는 내가 믿어줄 테니, 그만 저리 가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괜찮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말로는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예수님을 그만 밀쳐내는, 그야말로 반복음적이고 패역한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말로서 “예수님을 압니다. 진리를 압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속아넘어가지를 않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 본문 13절을 들이대면서 “이것을 보여주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영문 밖의 쓰레기장에서 만나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떻게 만나야 한다는 겁니까? “나는 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가?” 라고 하는 것을,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이 세상을 향한 집착 때문이다”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나게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서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문 밖’이고, 또한 ‘십자가’ 라는 말이죠.
물론 남들이 존경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여러분, 이것이 나의 자리가 아닙니다. 나의 자리는 영문 밖인데, 그러니 영문 안에서, 즉 교회에 안에서 칭찬을 받고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리는 예수님이 외롭게 돌아가신 영문 밖의 쓰레기장입니다”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영문 밖 쓰레기장을 음부, 즉 지옥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내가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동참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분이 계시는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분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외롭게 돌아가신 분인데, 거기서 그분과 독대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과 무슨 대화를 하겠습니까? “주님, 저는 잘난 놈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는 것을, 그것을 영문 안이 아니라 영문 밖에서, 즉 십자가의 현장에서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남들이 칭찬을 해주면 면박을 주기는 좀 그렇지만, 하지만 그 자리가 자기 자리가 아님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영문 밖에 늘 머물러있기 때문에, 즉 진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아무리 태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해도 흔들릴 필요가 없는데, 물론 흔들릴 이유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무슨 의미도 아는고 하니, 그게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여기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제는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소리라는 것을, 그래서 자기 자신의 심령과 골수에 이 말씀이 사무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 외에 다른 진리는 없는데, 다른 것들은 다 다른 교훈이라는 말이죠.
다른 교훈들은 자기를 칭찬하고 위대하게 만들어주는데, 즉 자기 가능성을 심어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영문 밖의 장소는 어떻습니까? 그런 우리 자신을 완전히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쓰레기장이니 말이죠. 그러니 거기서는 오직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여러분, 복음과 갓바위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갓바위 신앙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데 있는데, 물론 성문 안에서, 즉 예수님을 추방하고 난 그 나머지 세상에서 말이죠. 그러나 복음은 우리 자신을 이 세상에서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쓰레기로 취급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문 안이 아니라 영문 밖에서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말씀이 로마서 8장 24절에도 나온다는 말이죠.
(히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
여기에 보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구원되지 않는 소망은 포기하고 버렸다는 겁니다. 또 덧붙여 말씀하기를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도성에서는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도성이 예수님 자체를 거부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그런데 도성을 지키는 자들이, 즉 이 세상을 고수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그만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해서 쫓아내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놈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머리를 들이밀고 아부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문 밖에 있는데, 즉 십자가라는 겁니다. 거기에 모든 소망을 다 걸어야 하는데, 그것은 영문 안이 아니라, 영문 밖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의 피가 있다는 겁니다.
진리를 먹으면서 !!
오늘날 도성 안에 있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왜 교회를 찾습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왜 발로 차버렸는지, 그 이유를 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 교회에 다닙니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다 위대한 자로 변신시키기 위해서, 그런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도 없는 세계, 아니 예수님을 합심해서 추방시킨 이 세계에서 성공하고 위대해지는 것을 그토록 소원하십니까? 진리는 영문 밖에 있는데, 영문 안에는 없다는 말이죠. 영문 밖에 유월절 어린양이 우리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린 채로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진리인데, 그러니 그런 진리를 먹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우리 머리 속에는 눈에 보이는 온갖 잡동사니와 이 세상 문제로서 가득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라는 음성만이 가득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8 오후 5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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