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2:18-29) 소멸하시는 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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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소멸하시는 불 2002년 7월 1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18-29
12: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2: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12: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12: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성경 로마서 8:30에 보면,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리 정하신 자란 또한 미리 아신 자도 됩니다. 이렇게 되니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구원됩니다.
이런 사람들만 옹기종기 모인 곳이 오늘 본문 22-23절에 나온 집합들입니다.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나와 있지요. 성경이란 결국, 천국에 모인 자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고 말해주자고 나타난 책입니다.
또한 반대로 이러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다는 점도 아울러 말해줍니다. 이 두 집단을 분류시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 자체를 버리고 도외시하는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자의 등장도 성경을 통해서 말해집니다.
아까 일찍 교회에 나온 우석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니 아직 사람들이 별로 안왔거든요. 그래서 "엄마, 예배 끝났나?"고 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수없이 반복되는 예배 참석이 다 지나면 결국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했을 때 과연 남은 것은 무엇인지요? 성경에 보니 천국이라는 집합체와 지옥이라는 집합체만 남습니다. 마태복음 25:31-33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자... 이렇게 주장하니 여기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생겨 나겠지요. 즉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자만 부르시고 나중에 심판 하실 때 그들을 불러준 취지에 합치 되게끔 심판하신다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있으나 마나 하는 것이 불과하단 말입니까?"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미리 아신 자, 구원 중심이라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인간을 미혹하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라는 것이 허구요, 인간들의 발악에 불과하다면 이 역사 안에서 위대한 영웅이 되고자 노력한 모든 것도 사실 하나님께서 놓은 덫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밖에 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점을 하나님도 미리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그토록 길게 끌어 오셨는가 말입니다. 애시당초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될 것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들만 상대로 하기 위해 천구과 지옥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범죄케 한 그 뒤 배후 세력까지 그 정체를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이끌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까불고 활발한 활동성을 보여도 실은 그 배후에 있는 악마가 시킨대로 놀아난 것 밖에 안됩니다. 인간들이 왜 이런 식으로 악마에서 포로잡혀 있는 겁니까? 그것은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그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악마는 인간들에게 윤리와 도덕과 선행과 의로움을 자체적으로 갖추어 놓기를 독려해 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뭉쳐져서 종교라는 것이 탄생됩니다. "나의 착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자"라는 본성이 인간은 근본 본성입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그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로지, '미리 아신 자'만 부를 뿐입니다.
인간의 윤리와 선행과 도덕도 그 '미리 아신 자'의 원칙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다 부서지고 무너질 뿐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나오는,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온전케 의인의 영들'이라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이처럼 구원받을 수 있었고 또 온전케 된 영들이 된 이유가 24절에 나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 새언약 그 피, 곧 예수님의 피 때문에 온전케 된 겁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데 여기에 순간 순간 개입하시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하늘과 땅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란, 인간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 주시는 분을 말합니다. 대신 흘리신 의로운 피로 인하여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됩니다. 이것 뿐입니다.
인간들이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예수님의 피 앞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자꾸만, 새언약, 새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류의 역사로부터 출발했는데, 거창한 인류의 역사만이 아니더라도 개인들의 역사도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월을 보내면 보낼수록 긴 그림자가 꼬리처럼 딸려옵니다. 누구에게나 지난 날을 소설로 써 보라면 10권이라도 됩니다. 이 긴 개인적 역사의 본질은 무엇입니다. 어릴 때는 장난감 가지고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안 지나서 그 장난감은 지하 창고로 들어갑니다.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상은 다 재미없다고 창고에 내다버린 장난감들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려보낸다면 아마 지긋지긋할 겁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 어떤 흥미나 신비나 재미를 거기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 번 겪었다는 것이 얼마나 시시한 일입니까.
사람이란 새로운 장난감만 자꾸 찾게 됩니다. 마찬가지고, 교회 다니기, 신을 찾기, 기독교 신자 되기 같은 것도 일종의 장난감 가지고 노는 식이 될 것입니다. 잠시 흥미를 가지다가 곧장 그것조차 기억의 지하실에다 쳐 넣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다시 지나간 시절의 종교 장난감이나 하나님을 끄집어내어 다시 가지고 노는 것은 더 큰 문제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행동을 안해도 구원해 준다는데 왜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합니까? 결국 미리 정하신 자만을 결국 천국에 옹기종기 모이게 마련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데 왜 자꾸 행함에 집중 투자하려고 합니까?
제가 방금 부서질 장난감이라고 소개했는데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진동'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멸하시는 성질을 가지신 하나님이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소멸한다는 것은 그 위에 딛고 사는 인간들도 소멸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영원함을 이 세상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발생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멸하려고 하시는데 소멸의 대상이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소멸의 위력을 극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새언약의 피가 코 앞에 있더라도 어떻게 그것까지 접근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으로 삼을 수 있는가 이 말입니다. 그 조취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8절-20절에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직접 산 위에 등장하신 적이 있는데 그 순간 그곳은 완전히 불의 세계입니다.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 두려운 광경입니다. 어떻게 그 안에 감히 하나님에게 올라가서 "하나님 저 구원해 주세요"라고 나설 자가 누가 있습니까? 설사 나선다 할지라도, 아니 짐승이라고 가까이 접근하면 다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감히 구원받고자 나설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리 정하신자, 미리 아신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나신다는 말입니까? 고린도후서 3:9과 12절-13절에 보면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꼭대기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명을 받고 시내산 위에서 밑으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모세 쪽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산 밑에 쪽에서 문제가 있기에 모세가 산 위에서 받고 온 그 하늘의 영광스러움으로 인해 도무지 모세와 백성이 한 자리에 같이 만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을 끄집어 내어 자기 얼굴을 덮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거룩함에서 오는 영광성을 가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자신이 하늘 나라에서 알고 본 구원의 내막을 다 이야기하게 됩니다. 물론 그 전해지는 하늘 나라의 정보를 믿는 자라면 구원이 됩니다.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덮지 아니하면 백성들은 모세를 만날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만나지 못하면 그들에게 구원 세계는 별개의 세계로 남습니다. 세속과 하늘의 찬란함을 중개하기 위해 모세는 수건을 동원했습니다.
마태복음 3:12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세례 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과연 세례 요한 이런 하늘 나라의 정보를 함부로 이야기할 자격자가 됩니까?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또 마가복음 9:47-49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이 이 말씀하실 때에 과연 함부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세처럼 직접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점을 의심해서 유대인들은 모세만을 고집했고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또는 다른 선지자들도 이런 계시를 이야기할 자격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쓰지 않았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 말씀, 즉 하나님께서는 육신이 되셔서 그 하나님의 엄중함과 영광성을 육신 속에 감추시고 나타나셨기에 일반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주위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 겁니다.
즉 예수님의 육신성이 곧 모세에게 있어 수건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저 예수님은 사람이니 사람의 몸을 가졌다고 여기에 무시한 겁니다. 이것을 보니 하나님편에서 미리 정하신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 얼마나 자기 영광성을 낮추었는가가 드러납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모세의 수건 역할 하라고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이 오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합니다. 옛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기에 마음놓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전하실 수 있는 레벨로 활동하신 것처럼 그 낮은 차원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기 위해 성령께서 활약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보통 큰 기적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정보나 계시는 아무나 믿고, 또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늘을 향해 손 벌린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제사장이 성전에서 기도해야 하고 그것도 사전에 정결한 짐승으로 제물을 바쳐서 그 제물을 태운 연기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했다는 증거가 있을 때만 하나님께서 계시를 내려주었고 그 계시를 가지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가장들을 모아서 그 뜻을 전했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1000번 씩이나 번제를 드린 것도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선지자들은 본인들이 하고 싶어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어야 하고 그것은 하나님께 요청한다고 새로운 계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입술과 그들의 각가지 기이한 행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할 때만 그들은 시킨대로 그 받은 계시를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비밀이요 숨겨진 계시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에 의해 성령이 성도들에게만 보편화되었고 그 성령으로 인해 성경 말씀을 구원의 말씀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소멸하시는 불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소개된 중보자 예수님 덕분입니다. 끝으로 로마서 8:33-34를 다시 보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러분, 성령으로 모든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보내심이 무시될 뿐입니다. 중보자를 모독하지 마십니다.
저주와 징계를 막고자 우리 행위를 동원하지 마세요. 예수님이나 성령께서 괜히 기도하시는 줄 아십니까? 마귀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점은 바로,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종교성 고수입니다. 이것이 모세 수건 밑에서 모세가 알았던 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입니다.
인간들이 이것을 안 믿는 것은 그동안 인간들이 인류의 역사와 자기 역사성을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배후에는 악마가 조종해 오고 있습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다"고 스스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는 오직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신 자에 국한된다고 말입니다.
소위 세상에 스스로 훌륭하고 잘났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입니다. 소위 인간의 그 잘남은 소멸하신 불 앞에서도 감히 설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감당하지도 못할 것을 가지고 자신을 커버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 행동으로 커버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기쁜 소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최종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은 사라지고 그 중앙에 있는 자신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악마의 무기입니다. "너는 너만 믿어라!"고 말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긴 그 악마의 음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금 신앙을 정리케 하옵소서. 예수님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고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사탄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행위를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4. 소멸하시는 불(히 12:18-29)
--------------------------------------- (히 12: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히 12: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히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히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2: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히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미리 정하신 자 !!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미리 정하신 자’ 라는 것은, ‘미리 아신 자’도 되는데, 그러니 구원을 받은 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바로 이러한 사람들만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곳이 어디인고 하니, 그것이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은 결국, “천국에 모인 자는 이러 이러한 자들이다” 라는 것을 말씀해주는 책이란 말이죠. 또한 반대로 “이러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라는 점도 아울러서 말씀해준다는 겁니다. 이렇게 두 집단을 구별을 하는데, 물론 이러한 기준 자체를 도외시하는 자들도 물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자들의 등장도 성경을 통해서 언급이 되는데 말이죠.
그러니 성경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가 누구인지, 의롭게 되는 자가 누구인지, 영화롭게 되는 자가 누구인지,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는 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지, 그것도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엄마, 예배 끝났나?
아까 일찍 교회에 나온 우석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가 보니까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엄마, 예배 끝났나?” 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다. 예배참석이 모두 다 끝나고 나면, 그러면 결국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말이죠.
여러분, 교회든 뭐든 간에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했을 때, 과연 남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면 천국이란 집합체와 지옥이라는 집합체만 남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 원칙 !!
이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생겨나겠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자만 부르시고, 나중에 심판하실 때 그들을 불러준 취지에 합치되게끔 심판을 하신다면, 그러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있으나마나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미리 아신 자들을 중심으로 구원을 하신다면, 인류역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인간을 미혹하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역사라는 것이 허구이고, 인간들의 발악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역사 안에서 영웅이 되고자 노력한 모든 것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치한 덫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것밖에 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점을 하나님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왜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그토록 길게 끌어오셨습니까? 애당초 모든 것이 다 흐지부지 될 것인데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만 상대로 하기 위해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범죄케 한 배후 세력까지도, 그들의 정체를 온 천하에 공개하기 위한 환경으로서, 일종의 무대장치로서 역사를 계속해서 이끌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인간들이 까불고 활발하게 움직여도, 사실 그것은 그 배후에 있는 악마가 시킨 대로 놀아난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들이 왜 이런 식으로 악마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겁니까? 그것은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이 두렵다는 말이죠.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을 하는 인간들 !!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 깔려있는데, 그래서 착하게 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프로이트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악마는 인간들에게 윤리와 도덕과 선행과 의로움을 자체적으로 갖추어 놓기를 독려해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극복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다 악마에게서 나온 것인데 말이죠.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꽃피워진 것이 바로 ‘종교’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천주교이고 불교라는 겁니다. 즉 죽음이 무서워서 희망을 가져본다는 말이죠. “나의 착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자” 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러니 죽음이 무서워서 그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어디 하나님이 그런 것에 속아넘어가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로지 ‘미리 아신 자’만 부를 뿐인데, 그러니 인간의 윤리와 도덕과 선행과 착함도 ‘미리 아신 자’의 원칙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이고, 또한 부서지고 무너질 뿐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 라고 하는데, 그러니 “당신은 어느 교회 출신인가?” 라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인간들끼리 서로 패거리를 만들어서 하는 짓들이지, 하나님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온전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게 24절에 나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 라고 하는데, 바로 그 ‘피’ 때문에 온전케 되었다는 말이죠.
(히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새 언약의 피 !!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런데 여기에 순간 순간 개입하는 것이 바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 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분만이 하늘과 땅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중보자’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이 연약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해서 해주시는 분인데, 인간에는 그러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분의 대신 흘리신 피로 인해서 의롭고 되고, 또한 영화롭게 되는데,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를 쓰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자꾸만 ‘새 언약’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을 믿으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설교를 거창하게 인류역사로부터 출발을 했는데, 사실은 각자 개인의 역사도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은 세월을 보내면 보낼수록 긴 그림자가 꼬리처럼 딸려오는데, 그래서 누구에게나 지난날을 소설로 써보라고 하면 족히 10권은 거뜬하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할 말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긴 개인적 역사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어릴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그런 장난감은 그만 창고로 들어가고 만다는 것이죠.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게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래서 찬란하고 빛나는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재미없다고 창고에 버린 장난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라고 하면 아마 지긋지긋하지 싶은데, 왜냐하면 더 이상의 그 어떤 흥미나 재미를 거기서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죠. 이미 한 번 겪었다는 것이 얼마나 시시한 일이 되고 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자꾸만 새로운 장난감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세월을 허비하게 되는데, 하지만 자기가 왜 새로운 것을 찾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부서질 장난감 !!
서유석 씨의 어떤 노래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라고 말이죠. 헤르만 헤세의 시를 개사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젊었을 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아하, ‘나’ 라는 존재는 새로운 장난감만 찾다가 볼일 다 보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하는, 그런 것들은 다 일종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식이라는 말이죠. 물론 처음 교회에 다닐 때는 기뻤는데, 하지만 잠시 흥미를 가지다가도 곧장 그것조차도 기억의 지하실에다가 넣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안 되지. 다시 열심을 내어서 교회에 잘 다녀야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지난 시절의 종교 장난감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가지고 놀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는 겁니다. 나이가 60이 되어서 마징가 제트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굳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구원해주신다고 하는데, 왜 그러한 부질없는 짓들을 합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만이 천국에 옹기종기 모이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왜 자꾸만 자기 행함에 집중투자를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소멸하시는 불 !!
제가 방금 부서질 장난감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오늘 본문 28절에서는 ‘진동’ 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29절에 보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소멸하시는 성질을 가지신 하나님이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들었다는 말이죠.
(히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이 세상이 소멸한다는 것은, 그 위에 서있는 우리 인간들도 역시나 소멸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장난감과 그것을 가지고 노는 자들도 모두 불태워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는, 그리고 이 세상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죠. 하나님은 우리를 소멸하려고 하시는데, 그런데 구원을 받는 자들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소멸의 대상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소멸시키는 힘을 극복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이 그 무서운 불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설령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가 우리 눈 앞에 있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거기까지 접근해서 구원하는 능력으로 삼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방법이 또 다시 동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그 조치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소멸을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다가 빼내주신다고 하면, 과연 어떻게 빼내주시는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죠. “너는 지옥이다. 너도 지옥이다” 라고 하시다가, “어, 너는 천국이야” 라고 하시면서 뭔가 취하시는 그 조치가 궁금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18절에서 20절을 보겠습니다.
(히 12: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히 12: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불타는 시내산 !!
옛날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직접 산 위에 등장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곳이 놀이동산과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라, 그 순간 그곳은 완전히 불의 세계라는 겁니다. 너무너무 무섭고 너무나 두려운 광경인데,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니 그 얼마나 무섭겠느냐는 말이죠. 시내산 꼭대기에 그만 불이 붙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산 아래에 있는 백성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는데, 그러니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올라가서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나서겠습니까? 설령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산짐승도 접근하면 다 죽는데, 그러니 하나님 앞에 감히 구원을 받고자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미리 정하신 자, 미리 아신 자를 구원하신다는 겁니까? 그러니 이것은 우리 인간이 나서서 될 문제가 아니라, 뭔가 하나님 쪽에서 나서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후서 3장 9절에서 13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수건을 얼굴에 쓴 모세 !!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꼭대기에서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는데,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시내산 위에서 밑으로 내려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그만 문제가 발생되었는데, 그것은 모세 쪽이 아니라, 산 아래에 있는 백성들 쪽에서 그만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죠. 모세가 산 위에서 받은 하늘의 그 영광스러움으로 인해서 도무지 모세와 백성들이 한 자리에 같이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 2절에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하나님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나타나신다는 말이죠. 물론 모세는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서있었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데,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해주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다시 고린도후서 3장으로 돌아와서, 13절에 보면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라고 하는데, 모세는 하늘나라의 거룩함에서 오는 그 영광성을 가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덮지 아니하면 백성들은 만날 수 없고,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일단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의 영광성을 가리우고 자기가 알고 보았던 하늘나라의 구원내막을 다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전달해지는 하늘나라의 정보를 믿는 자라면 모두가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했는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라고 말이죠. 과연 세례요한이 이런 하늘나라의 정보를 함부로 이야기할 자격자가 됩니까? 무슨 자격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겁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라도 했느냐는 말이죠.
(마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또한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 49절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막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과연 함부로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세처럼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러한 점을 의심해서 유대인들은 유독 모세만을 고집했고, 반면에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알고 믿기에는,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또는 다른 선지자들도 이런 계시를 이야기할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육신 속에 감추어진 영광성 !!
그렇다면 왜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쓰지 않았던 겁니까? 예수님의 경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즉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엄중함과 영광성을 육신 속에 감추시고 나타나셨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그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았고, 그리고 서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육신성이 모세의 그 수건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그저 예수님을 사람으로 여기고, 사람의 몸을 가졌다고 무시를 했다는 말이죠. 이렇게 보면, 하나님 편에서 미리 정하신 자기 백성들을 건지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자기 영광성을 낮추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모세의 수건과 성령 !!
방금 이야기한 고린도후서 3장의 모세의 수건역할, 그것을 이제는 예수님의 영, 즉 성령께서 오셔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과거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기에 마음놓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전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활동을 하신 것처럼,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런 레벨로 활동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그 동일하고 낮은 수준으로 활동을 하시는데, 그러니 성령이 임하게 된 자들에게는, 이제는 모세의 경우처럼 수건으로 가리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골고루 다 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하나님은 불이시고, 우리는 그 불을 보기만 해도 죽는데, 그러니 구원을 받고 싶어도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셔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거기에 동원된 자가 바로 모세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오니 백성들이 무서워서 모세를 만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모세가 덮었던 수건의 역할을 지금은 누가 하는고 하니, 성령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은 무슨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백성들과 만났을 때,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있을 수도 있는 그 낮은 레벨,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조치를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야말로 보통 큰 기적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말이죠. 하늘나라의 정보나 계시는 아무나 믿고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을 향해서 손을 벌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솔로몬의 일천번제 !!
그렇다면 기도는 누가 합니까? 시편에 보면, 제사장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는데, 사전에 미리 정결한 짐승으로 제물을 바쳐서, 그 제물을 태운 연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셨다는 증거가 있을 때만 그 기도의 응답을 내려주셨고, 그러면 그 응답을 가지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각 가장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순간순간 재생하는 것이란 말이죠.
솔로몬 왕이 1,000번이나 번제를 드린 것도,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올 때까지 제사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000번을 목표로 해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도 응답이 되지 않으면 1,001번, 1,002번, 그렇게 계속 간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왕이지만 제사장이기도 한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계시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른 것들은 다 자기들이 지어낸 엉터리라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은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의 중보자이시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계속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응답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말이죠.
그런데 구약시대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때는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레미야야, 나의 계시를 전해라” 라고 하면, 예레미야는 하기 싫어도 전달해야 하고, “이사야야, 벗어라” 라고 하면 벗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는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어야 하고, 물론 하나님께 요청한다고 해서 새로운 계시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입술과 그들의 각가지 기이한 행위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할 때만 주어지는데, 그러면 그들은 시키는 대로 그 받은 계시를 전해야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비밀이고 숨겨진 계시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오심으로서, 그분의 영인 성령이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신 자들에게만 주어져서 보편화가 되었고, 또한 그들은 성령으로 인해서 성경말씀을 구원의 말씀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모두가 인간들이 만든 종교이고 장난감에 불과한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물론 배후에는 마귀가 있었고 말이죠.
수건, 성령, 예수님 !!
그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궁금하게 여겨야하는 것은, 그런 장난감이 아니라 모세가 덮었던 수건인데, 그 수건이 바로 성령이고, 성령은 예수님만 이야기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라는 말이죠. 소멸하시는 불, 무서운 하나님, 만나면 타죽는 그 무서운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2절은,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 것도 역시 예수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그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 일러주시는데, 또한 역사는 다 속임수이고 허구라는 말이죠. 장난감이고 그것들이 모인 쓰레기더미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났을 때는,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천국으로 분류되는 무리들과 지옥으로 분류되는 무리들뿐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하늘의 정보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이 되었는데, 물론 그 이전에 모세도 있었고, 선지들도 있었는데,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들은 것이 아니고 특별히 선택된 자들만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이고 말이죠.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그 모든 내막이 공개가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닌 성령에 의해서 쓰여진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이죠.
여러분, “성령으로 하셨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과 지옥을 모독하는 것인데, 자기 자신의 행위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무시될 뿐인데, 즉 중보자를 모독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저주와 징계를 막고자 자기 행위를 동원하지 마세요. 예수님과 성령께서 괜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마귀는 우리를 정죄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하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이것은 찾아봐야 하는데, 로마서 8장 31절에서 34절입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니 택한 자들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자들인데, 이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다 주시는데, 그러니 이런 우리를 감히 누가 송사하고, 누가 정죄를 하겠느냐는 것이죠. 그런 일은 없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것인데, 즉 수건을 덮고 모세가 알았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들이 이것을 믿겠습니까? 믿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인간들은 인류역사와 자기 역사성을 믿어왔기 때문인데, 물론 그 배후에서는 악마가 조종해오고 있었고 말이죠. 즉 “나의 행동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다” 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가르쳐 왔다는 겁니다. 자기 착함이 자기를 커버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는 오직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신 자에 국한된다” 라고 말이죠. 이 세상에는 스스로 훌륭하고 잘났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뭐라고 되어있던가요?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그 착함과 잘남이 소멸하시는 불 앞에도 감히 나설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도저히 감당치도 못할 것을 가지고 괜히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닌데, 오직 성령이 임한 자에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미리 아신 자와 부르신 자에게만 주어진 특별하고도 특별한 혜택이라는 것이죠.
(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줄 수 있는 전부를 다 !!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줄 수 있는 전부를 모두 다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자기 행동으로 자기를 커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우리를 얼마나 기분이 좋고 홀가분하게 해주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이것이 복음, 즉 ‘기쁜 소식’ 이라는 말이죠.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지 않게 되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만 최종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고 하면, 그만 예수님은 사라지게 되고, 그 중앙에 예수님이 아닌 자기가 자리를 잡고 되고,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악마의 무기인데, “너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너 자신밖에 없다. 너는 목사잖아.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너를 커버하란 말이야. 하나님은 너를 도와주지 않아. 한 번 생각해봐. 하나님이 너를 도와준 적이 있었어? 너는 너 스스로 서는 거야” 라고 하는데, 즉 “너는 너만 믿어라!” 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부추긴 악마의 음성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금 저희들의 신앙을 정리케 하옵소서. 예수님에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사탄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그런 것은 다 장난감으로 여기고 부수어 버리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5 오전 11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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