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 12: 14-17) 에서의 운명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2: 14-17) 에서의 운명

정인순 2010. 9. 5. 13:50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53강-히12장,14-17(에서의,운명)-heb020707.mp3

 

 

이근호

 

에서의 운명

2002년 7월 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 14-17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내가 사는 문제입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 계시는가, 아예 있지도 않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더 시급한 문제라는 겁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애절하게 고수하고 싶은 그 귀한 생명 문제를 우리 쪽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해결해 주시면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시면 할 일이 있고 그 할 일이란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는데 그 기쁜 소식이란 죽음 문제까지 이미 해결 봤다는 겁니다.

 

죽음의 문이란 우리 쪽에서 봐서는 닫힌 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열린 문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고 산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열린 문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하는 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에는, 목숨 끊어지면 그것이 죽음인 줄 아시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과 하나님이 헤어져 사는 것이 곧 죽음 상태입니다. 죽어서도 같이 살면 그것이 곧 생명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로지 지상의 자기 생존 문제에만 몰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 곧 영생이 얻을 수 없습니다. 12:14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에 관심있다고요?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여들었느냐 아니냐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를 바라볼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거룩함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의로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마귀의 속임수도 같이 드러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로 가는데 반해 마귀는 부추기기를 인간이 자신의 의로 간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을 마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전략에 따라 마귀의 전략도 세워집니다.

 

천국은 완벽한 의만 요구합니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 자체 내에서 자신의 의를 생산하게 독려합니다. 종교? 교회 다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마귀는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의로 다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교회 다녀도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소의 생활 습관이 "나의 의는 내가 만들어낸다"에 확고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타고난 본능이고 본성입니다. 이 본성 가지고 교회를 다니든 종교를 세우던지 나오는 열매는 한결 같지요. 이것은 죽을 때까지 안 놓칠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제 낭패를 보느냐 하면,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모아놓은 의가 한 순간 긴장이 풀려서 실수를 하게되면 모두 무용지물로 허물어질까봐 안절부절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작전입니다.

 

문제가 이렇게 되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집니다. 즉 자체적 의 지키기에 나서니까 행여 옆의 사람이 잔소리하면, 자꾸만 자기 방어, 자기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교만이라는 태도입니다.

 

자기 행동에 입각해서 허구적인 의의 기준을 자기 쪽에서 자꾸만 만들어내게 됩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죄인임을 아예 선언해 버렸다는 점을 꼭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요? 그것은 로마서 1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라는 작자입니다. "한 그릇의 음식물을 인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망령된 자'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자기 멋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특히 음행하는 자와 에서를 같이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고린도전서 11:3에 보면,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특히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관계성 말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에서 교육받기를, "너의 힘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겁니다. 자립성이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에게는 관계성이 있다는 겁니다. 우주인들이 생명 끈이 있어서 우주 유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하늘과 이어진 생명선이 끊어진 자라면 그 자는 곧 망령된 자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바라보기는 왜 바라보는데?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고해서 뭐가 문제인가? 아무런 두려움도 내게는 없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중에 에서라는 자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도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는 무엇을 발견한 겁니까? 정말 중요한 것에 무관심했다는 점을 알게 된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이 주로,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라든지, 세상 문제를 그 때, 그 때마다 해결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 나오면 교회 나오나 마나입니다. 물론 교회가 그런 식으로 장사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설교 처음에 말했듯이 교회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는가 아닌가에 관심 갖고자 올 곳입니다. 인생을 사면서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교회 나오지 마시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에는 어떤 생명선이 닿아져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보면 거기서 치료만 해 줍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며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며"라는 문제를 전혀 모르게 됩니다. 순간적인 대처만 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보험, 생명 보험, 암보험 들고, 나중에 생계를 위하여 연금듭니다. 그런 것은 일시적 문제 해결밖에 안됩니다.

 

근본적인 회개가 안됩니다. 회개는 다시금 내 자신이 누구냐를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거기에 두 형제가 나옵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자식이고 동생 야곱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자식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호시탐탐 맏이를 노리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형이 사냥을 나갔다가 몹시 허기져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은 팥으로 죽을 쑤었는데 동생 야곱이 그 팥죽을 미끼로 하여 형의 장자 자리를 뺏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형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동생이 참 어리석게 보여겠지요. 이미 형 날 때부터 형이 되어버린 마당에 장난삼아 형의 자리를 판다고 해서 과연 자기가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 될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 좋다"라고 낼름 그 팥죽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둘 사이의 장난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에서가 장자의 자리의 중요성을 우습게 여기는 그 마음 자세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만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립니다. 다음 장자는 이삭입니다. 이삭이 복주면 복을 받고 이삭을 건드리면 저주를 받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의 축복자는 누구입니까? 진정한 장자는 누가 된다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시는 생명선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장자'라는 인물로 내려옵니다. 로마서 8:29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맏아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그 분의 양자 자격으로 구원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따로 존재하고 그 분에 의해서만 축복과 저주를 걸정됩니다. 마치 아브라함 같고 이삭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이 방식 뿐입니다.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장자권을 획득한 야곱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창세기 27:29절에 보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그는 생명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에서는 바로 이 생명선으로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과연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세상 사람과 성도들은 자기 행위에 의한 결과는 죄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마음 속으로 타인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이고 마음 속으로 음란을 품는 것도 간음입니다. 단지 차이 난다면 세상들이 도저히 관심 둘 수 없고 또 관심 두지도 않을 생명선에 관심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분에 의해서 저주의 인생과 축복의 인생이 갈라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고서부터 오로지 자기에게만 최종적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말고 타인에 관심을 두고 주를 바라본다는 것은 기적 중에서도 최고의 기적이요 행운입니다.

 

주도 두렵지 않고 은혜의 나라에 이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자신 만만해 하는 것이 바로 망령된 행위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팥죽이 중요한 것 아니라 장자 자리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장자 자리는 장난이 아닙니다. 에서가 돈이 모라자서 울었습니까 권력이 갖고 싶어 울었습니까? 오로지 세상의 실상을 몰라서 후회해서 울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놓쳤다는 후회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볍게 터치하고 가볍게 넘겨 간 겁니다. 에서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되돌아 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서로 싸우게 되어 있고 둘 중의 하나는 저주를 받고 하나는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의 야곱 이야기는 오늘날 인류의 양상이 이런 식으로 끝나감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온 우주보다 더 귀한 것임을 우리는 관심 가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가속도를 내면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흘려가고 있습니다. 저희들 하나님의 의만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3. 에서의 운명(히 12:14-17)

-------------------------------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살아계신 하나님 !!

교회는 이 세상과는 다른데, 그러면 어떻게 다를까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사는 문제인데, 즉 “사느냐? 죽느냐?” 라는 것이 모든 것인데, 자기에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교회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그것보다도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계시는가? 아니면 아예 있지도 않는 존재인가?” 라는 것, 그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교회가 반드시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바로 교인인데, 아니 신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자기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말이죠. 어째서 그러한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애절하게 고수하고 싶은 그 생명 문제를, 그것을 우리 쪽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해결해 주시면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즉 하나님은 할 일이 있고, 그 할 일이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그 기쁜 소식은 바로 이미 우리의 죽음 문제까지 해결을 봤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바로 이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계시겠지. 아마 주무시고 계실 것이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되고 왜곡된 하나님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계시는데, 주무시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고민하던 생명의 문제를 다 해결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는 말이죠.

‘죽음의 문’ 이라는 것은, 물론 우리 쪽에서 봐서는 닫힌 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열린 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산다”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열린 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그런 의미에서 열린 문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죽음이라는 것은 자기 목숨이 끊어지는, 우리는 그것이 죽음인 줄 알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인간과 하나님이 헤어져 사는 것이 곧 죽음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 그것이 곧 생명의 상태, 즉 ‘영생’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존문제에만 몰두하게 되면, 즉 아무리 건강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서 오래 산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신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어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 즉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에 머물지 말고, 그분이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면서 살아계시는지, 그것을 우리가 몽땅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성경은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여들였는가?” 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를 바라볼 수 있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하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14절에 보면 “거룩함을 좇아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선 마귀의 전략을 생각해봅시다.

왜 마귀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고 하니까, 우리가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기에 말이죠. 마귀는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인데, 즉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완벽한 의가 아니라면 천국생활을 견딜 수도 없고 말이죠.

그러니 마귀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그 완벽한 의가 아니라, 우리 자체 내에서 의를 만들게 해서, 우리의 ‘자기 의’로 천국에 가도록 길을 제시해준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행함인데, 즉 마귀는 “행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천국은 완벽한 의만 요구하는데, 하지만 마귀는 우리 자체 내에서 자기 의를 생산하도록 부추긴다는 말이죠. 종교, 교회 다님, 하나님께 대한 충성 등등, 그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마귀는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의로 다 바꿀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녀도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소의 생활습관이 “나의 의는 내가 만들어낸다” 라는 것에 너무 익숙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교회를 10년을 다니고, 20년을 다니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그 마음속에서 공포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가 가르쳐준, 즉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의는 내가 챙긴다” 라고 하는, 사실 그것이 우리의 타고난 본능이고 본성인데 말이죠. 이런 본능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종교를 만들고 하는데, 그래서 그 나오는 열매는 모두가 한결같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놓치지를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언제 낭패를 봅니까?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모아놓은 자기 의가 한 순간 긴장이 풀려서 실수라도 하면, 그러면 다 무용지물이 될까봐서 안절부절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때는 믿음이 참 좋았는데, 기도원에서 소나무를 세 뿌리나 뽑았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인가? 지금은 성경도 제대로 보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이렇게 하가는 지옥에 가지 싶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마귀의 작전이지만 말이죠.

물론 이것도 문제지만, 그런데 이렇게 되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체적인 의를 만들다가 보니까, 행여 옆에 있던 사람이 잔소리를 하면, 자꾸만 자기 방어와 자기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교만한 태도인데, 즉 자기의 행동에 입각해서 허구적인 의의 기준을 자기 쪽에서 자꾸만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너희는 누가 뭐라도 해도 죄인이다 !!

여기서 정리하는 의미에서 로마서 3장에 보면, 19절에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죄인임을 아예 선언해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러니 그 누구도 잘나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죠.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전체가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지만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데, 그런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 라는 인물로서,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이 구절을 무척 어려워하는데, 에서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리고 하필이면 이 내용이 왜 이 대목에 놓여있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그게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16절에서 ‘망령된 자’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냐는 겁니다. 그 해답은 바로 이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자를 뜻하는데, 그러니 국어사전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망령되다고 하는 것은, 자기 머리 위에 있는 어떤 높으신 분과의 선이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인데, 즉 생명의 로프가 끊어진 상태라는 말이죠.

특별히 여기서 음행을 하는 자와 에서를 같이 보고 있는데, 이런 것도 정말 어려운데 말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풀 수 있는데, 3절입니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관계성’인가? ‘자립성’인가?

여기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관계성’ 속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특히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관계성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의 힘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하지만 이것은 관계성이 아니라 자립성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는 관계성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우주인들에게 생명의 끈이 있어서 우주유영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우리 인간들끼리는 그런 것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데, 즉 “이제 하나님은 없다. 우리끼리 살자”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 하늘과 이어지는 생명선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끊어진 자는 망령된 자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멸망하는 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14절에는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지 않으면 되지 뭐? 주를 바라보기는 왜 바라봐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오면 안 되나?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말이야” 라고 말이죠.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한 본능도 우리 한 구석에서 발작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지옥이 있다고 하니 내가 할 수 없이 믿어준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15절에서 걸리고 말아요.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라고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말하기 이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히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라고 하는데, 왜 에서가 나중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도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느냐는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말이죠. 결국 그는 무엇을 발견하는고 하니, 자기가 정말로 중요한 것에 무관심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그런 에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 대단한가?” 라는 것부터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사느냐? 죽느냐?”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는데,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오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장사를 하고는 있지만 말이죠.

설교 처음에 말씀을 드렸듯이, 교회라는 것은 “내가 사느냐? 죽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는가? 아닌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큰 문제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 뒤의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에서의 이야기든 뭐든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를 바라볼 이유도, 두려워할 이유도, 회개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마시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어떤 생명선이 닿아져 있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말이죠.

제 아내가 삼계탕 남은 것이 아까워서 먹다가 밤 12시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포도산구균인가 뭔가에 걸렸다는 겁니다(ㅋㅋ). 물론 병원에 가면 그런 것은 치료를 해주는데, 하지만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라는 것은 해결해주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순간적인 대처를 하는 것이 그만 우리의 일상적인 버릇이 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자동차 보험, 생명 보험, 암 보험에 들고, 나중에는 연금까지 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일시적 문제의 해결밖에 되지 않는데,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말이죠. 교회는 그런 순간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는 회개가 전혀 되지 않는데, 회개란 무엇입니까? 다시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에서, 그는 누구인가?

이렇게 해놓고 ‘에서’를 살펴보겠는데, 창세기 25장에 보면, 거기에 두 형제가 나옵니다. 형인 에서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자식이고, 반면에 동생 야곱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자식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호시탐탐 형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자였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 형이 사냥을 나갔다가 몹시 허기가 져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팥으로 죽을 쑤었는데, 동생 야곱은 그 팥죽을 미끼로 하여 형의 장자 자리를 뺏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형의 생각은 이러한데, 동생이 참 어리석게 보였겠죠. 이미 태어날 때부터 형이 되어버린 마당에, 장난 삼아서 형의 자리를 판다고 해서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될 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에서가 “그래, 좋다. 야곱아, 니가 형이다” 라고 하면서 날름 그 팥죽을 맛있게 먹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둘 사이의 장난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얼마든지 이런 장난을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와 비슷한 게임도 있지 않습니까? ‘야자타임’ 이라고 말이죠. 얼마든지 그렇게 하면서 놀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무슨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과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죠.

보이지 않는 ‘장자의 자리’ !!

여기서 문제는 형 에서가 장자자리의 중요성을 우습게 여기는 그 마음자세에 있었는데, 장자의 자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자리라는 겁니다. 하늘나라의 유일한 장자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이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태어나야하는 자가 바로 구약에서의 ‘장자’ 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장자였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 다음의 장자는 이삭인데, 그래서 이삭이 복을 주면 복을 받고 이삭을 건드리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차례는 누구입니까? 이삭이 낳은 장자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고 하니, 즉 우리 어깨에 있는 생명선이 어떤 것인고 하니, 그게 눈에 보이는 밧줄로 되어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장자’ 라는 신분으로 내려온다는 겁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장자라는 말이죠.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즉 하늘의 장자를 본받아서, 그 장자가 부활을 했으면 우리도 부활이 되고, 그분이 하늘로 가시면 우리도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자가 생명선이 되어서, 그 장자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말이죠.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직 맏아들 !!

여기에 ‘맏아들’ 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맏아들이 되신 분으로 인해서 양자의 자격으로 구원이 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는 따로 존재하는데, 그분에 의해서만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는 말이죠.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이 말이죠.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오직 이 방식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장자, 즉 예수님을 믿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자기 말고 타인, 그렇다고 해서 부모나 친구는 안 되고, 예수라는 타인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죠.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쫓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이죠. 우리에게는 전혀 의가 없는데, 만약에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가 장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닌데, 우리는 그런 잘난 놈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가 되는데, 그러니 그 어떤 식으로 해도 우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는데, 다만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어깨에 생명선이 없고, 우리는 어깨 위에 뭔가가 달려있다는 말이죠. 그들은 “주를 바라보면 무엇을 할건데? 회개는 왜 해야하지? 물론 내가 잘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냐. 그리고 나는 두려워하지 않아” 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나서는데, 하지만 그것이 망령된 것이란 말이죠.

장자권에 올인한 야곱 !!

반면에 야곱은 어떠합니까? 그는 팥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의 어깨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그 생명선을 보았다는 말이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그 다음 차례가 자기의 형인 에서인데, 그래서 야곱은 형의 그 장자 자리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다가 올인을 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바로 저것이다. 팥죽이 문제가 아니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축복이 저기에 있다. 이것은 전혀 장난이 아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섭리이다. 물론 남들은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할지 몰라도, 절대로 그렇지 않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5장에 의하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 서로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싸웠다고 하는데, 즉 “누가 장자가 될 것인가?” 라는 겁니다. 그런 에서와 야곱의 모습은, 앞으로 인류에게 나타날 희한한 양상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예고편이라는 말이죠.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모두가 자기 살기에 바쁘고, 자기 목숨을 유지하는데 연연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장자가 누구인가? 생명줄이 무엇인가? 주를 어떻게 하면 바라볼 수 있지? 은혜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라는, 그런 쓸데없는 것에 왜 신경을 쓰겠냐는 겁니다. 그냥 보험이나 든든하게 많이 들어놓는 것이 훨씬 낫지,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말이죠.

과연 무엇이 기적인가?

그래서 저는 교회에 나오는 것을 정상으로 보지 않는데, 교회에 나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에다가 관심이 가진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겁니다. 이미 지나간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그리고 예수 이야기,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요즘 교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그런 설교를 하다가는 당장에 쫓겨난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복을 받습니다. 갓바위보다 예수가 더 능력이 있습니다” 라고, 즉 “예수가 진리가 아니라, 부처보다는 예수가 더 효력이 있으니,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자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어떻게 이용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할지, 여기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이 장자의 자리는 장난이 아닌데, 에서가 어디 돈이 없어서 울었습니까? 권력을 가지지 못해서 울었습니까? 오직 세상의 실상을 몰라서 후회하고 울었는데, 가장 귀한 것을 놓쳤다는 것 때문에 말이죠. 지금 당장 자기는 너무나 배가 고프기에 장자의 자리보다는 팥죽이 훨씬 더 좋았다는 겁니다. 팥죽이 보물이지 장자가 보물은 아닌데, 그렇게 에서는 하나님을 가볍게 터치하고 가볍게 넘겼다는 말이죠.

여러분, 예수님이 정말로 좋습니까?

오늘 설교가 조금 복잡한데, 간단하게 말하면 “여러분, 예수님이 정말로 좋습니까?” 라고 하는, 바로 이 한 문장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혹시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가 뭐가 좋은데? 나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라고 하는 감정이 솟아나지는 않습니까?

지금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에서가 회개하지 못해서 지옥에 갔다” 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있는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말이죠. 즉 “장자 자리에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팥죽에 관심이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좀 확인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에 말도 안 되는 내용이 기록해놓았다는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장자권을 획득한 야곱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창세기 27장 29절을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내용인데, 즉 야곱이 장자의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창 27:26)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창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야곱은 생명선이 어깨에 있었고, 그런데 에서는 바로 이 생명선이 떨어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삭이 에서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그게 39절과 40절에 나오는데, 즉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인데, 즉 지옥에서 산다는 말이죠. 정황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창 27: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창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여기서 에서가 이러한 운명이 된 것은, 이게 사람의 능력으로 된 것은 아닌데, 어차피 야곱과 에서는 서로 싸우게 되어있고, 둘 중에서 하나는 축복을 받고 다른 하나는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둘을 동시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러한 원칙, 즉 누구는 축복을 받고 또 누구는 저주를 받는데, 그것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다 적용을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야곱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그 당시 야곱이 받았던 축복의 이야기나, 오늘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축복 이야기나, 그게 모두 같은 내용이라는 겁니다.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과연 야곱처럼 장자의 자리에 관심이 있느냐는 것인데, 즉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면 과연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은 자기 행위에 의한 결과는 죄라는 점에서 모두가 동일합니다. 마음속으로 타인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이고, 마음속으로 음란을 품는 것도 간음죄이라는 겁니다. 똑같다는 말이죠.

단지 차이가 난다면, 이 세상이 도저히 관심을 둘 수도 없고, 또한 관심을 두지도 않는 장자의 자리, 즉 생명선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생명선을 주신 그분에 의해서 저주의 인생과 축복의 인생이 갈라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로지 자기에게만 최종적인 관심을 두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말고 타인에 관심을 두면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 중에서도 최고의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은 그야말로 행운아라는 말이죠.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하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에게 전혀 다른 인생을 주신 것은, 그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인데, 즉 축복이 아니면 저주, 저주가 아니면 축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에서처럼 생명선을 관심을 두지 않으면 결국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이해가 되지 싶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니 그런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에서를 그 예로 들었다는 말이죠. 즉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발로 차버렸는데, 그래서 울면서 회개를 했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아서 결국 멸망의 길로 갔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관된 일이라는 말이죠.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겠습니까? 물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중국이나 인도 사람들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람들도 믿지를 않고, 물론 유럽 사람들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즉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서, 그런 것을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이 축복을, 즉 하나님의 용서, 은혜, 사랑,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가속도를 내면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마구 마구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자기 잘남과 자기 의로움을 챙기면서 말이죠. 하지만 감히 저희들은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예수님만이 진짜 축복인 줄 알고, 그 예수님만을 믿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3 오후 11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