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2:3-13) 징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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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징계
2002년 6월 30일 52강 본문 말씀 : 히 12:3-1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욕을 달성시켜주고 삶의 괴로움을 해소해 주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피 흘리심에 관심두고 있습니다. "왜 내 아들이 피를 흘렸는지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행복과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말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고난'이라는 것이 발생됩니다. 인간은 고생 줄이기에 급급하지만 이들 앞에 하나님은 아들의 십자가 고난을 들이 댑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생을 줄이는 방법으로 자기 고생을 남에게 넘겨버립니다. 남을 더 고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자기만 덜 고생스럽다면 그것으로 선이고 바람직인 상황이라고 여깁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세상을 너무 좁게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것도 자기 위주로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예수 믿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착함이란 전체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도 자기 편익 위주일 따름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고급 의류를 사는 것도 남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심지어 미국의 금융 회사가 남미의 광산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만 해도 수 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에 큰 타격이 주어집니다. 비록 그 금융회사 간부가 아무리 자기 동네나 교회 안에서 이웃 사랑을 벌려도 말입니다. 잘 사는 동네의 윤리, 도덕은 못 사는 동네의 윤리, 도덕으로 적용할 수 없는 법입니다.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는 옹고집이 얼마나 많는 평범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결과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즉 나의 열심이 타인의 열심을 나의 성실함이 타인의 순박한 성실함을 억압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가 놓여 있는 경제 체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 어쩔 수 없는 이 범주를 못 벗어 납니다. 선진국이 열심히 살면 자연적으로 환경을 파괴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이 후진국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자... 여러분,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선함이고 무엇이 바르게 함입니까? 전체를 모르고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데, 그저 자기 조직과 자기 집단의 생존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있어 진리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란 그껏 '자기 이익' 뿐입니다. 개인적인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복되는 소비 형태는 이 땅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에 치중하는 중소기업의 설 자리를 점차 잃게 만듭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팔 걷어붙이고 이러한 인간 세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이 세상에 구원과 행복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9절에 보면, '영'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 인간들은 눈만 뜨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에 대해서만 집중 관심을 두고 살고 또 육으로 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이외에는 아무 것과 관심없는데 어째서 성경에는 '영'이라는 말씀이 나옵니까?
영이라는 말씀은 육이 아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인간을 다루고자 하십니다. 사실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전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영은 돈이 되지 않기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중요시 하지않는 그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마태복음 10:28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신이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왈, "뭘?" 사람들이 말합니다. "육적인 것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왈, "또 육이냐? 나는 영으로 다가설꺼야"
인간들은 육이 전부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을 치는 쪽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라는 겁니다. 징계란 단순히 벌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되어 있는 영을 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육을 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육을 쳐서 수리된 그 육을 가지고 그 전에 잃었던 이득을 다시 얻고자 하는 식의 징계는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육적인 징계를 받았다고 함부로 주장하면서 바르게 살고자 다짐을 하지만 그 결과는 도리어 전보다 악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고 바르게 살고자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전에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겁니까? 진짜 저는 하나님에게 실망했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밥먹고 살게 하는 이 사회 구조 안에서 옳다, 바르다 같은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면, "하나님, 저의 죄가 이 정도 인 것을 몰랐습니다."라는 선에 그쳐야 됩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갖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 94:9에 보면,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리는 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영에 있습니다. 진리와 선함과 옳음을 육에서 찾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바로 이 점에 집중 공략합니다. "제발 육으로 육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육적인 징계를 겪게 되므로 보다 나은 육적인 이득을 챙기려는 바로 이러한 육적인 생각을 때려 부수기 위한 징계가 하나님이 벌리시는 징계입니다.
성경 공부 좀 한다고 행복해집니까? 우리 자체가 바르지 못한 존재인데 이 바르지 못한 존재가 무슨 염치로 행복을 논하고 행복을 기대합니까? 그런 생각부터가 징계 받을 이유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 영의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는 그 관계성" 이 자체로만 행복입니다.
영과 영이 서로 내통된다는 이 놀라운 기적적인 산물이 되었고 이런 식의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육의 피조물이 아니고 영의 피조물인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다행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으로서는 아무 것도 해결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처음에 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다가 결국 자신도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김 집사님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병문안 가서 다음과 같은 설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인용하면서, "집사님의 육은 엉망인데 문제는 과연 온전한 영은 지니고 계십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육의 하나님 뿐만 아니라 우선 영의 하나님이십니다. 육의 온전보다 영의 온전을 감안해야 합니다. 육은 어차피 늙으면 해체될 대상일 뿐입니다. 육과 혼을 멸하는 분으로서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의 진리 체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착하면 복준다"입니다. 무엇이 착한가에 대해 세분화 시켜보니, 거짓말 안하고 성실, 근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좋은 대학갑니까? 보장됩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이 세상을 향해 징계적 차원에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니,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피'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라는 것은,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최고로 보게 되면 무엇 때문에 목숨 바쳐, 피 흘리는 손해를 보면서 무엇을 지키려고 싸우겠습니까? 동시에 죽어가는 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미 확보되어 있는 자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피 흘림과 죽음조차도 능히 감수할 것입니다.
따라서 죄란 구약에서부터 영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육으로 놀다가 육으로 죽는 것이 죄입니다. 이런 생각을 기초로 갖추고 있어야, 영의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하는 것이 기쁘다라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안 가지고 있게 되면 다음과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 모든 일이 잘 안풀리는 것을 보니 지금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구나. 그런데 왜 징계를 받지? 옳지 내가 죄와 싸우게 죽기 까지 싸우지 않았구나. 옳지 이제부터 죄를 기어이 꺽어서 죄를 꺽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동안 손해 받는 것 보상받아 내야지"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쁨의 영으로 주어지는 기쁨 아니라 여전히 육적으로 얻어지는 기쁨일 뿐입니다. 즉 징계 받음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징계 안받음에서 오는 기쁨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 기쁨이란 딴 게 아니라, 나같이 하찮은 것에도 나를 사랑하사 징계와 징계로 인도해 주시는 영의 아버지가 실제로 계시다는 이 사실 자체가 바로 기쁨의 전부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된통으로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굶고, 육체에 가시가 박혀 있고, 사람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고, 도적이 위험과 강의 위험과 각가지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기쁘다"는 겁니다. 왜 기쁠까요?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그의 인생 목적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사람의 창조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징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영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임을 확인하고 자인됩니다. 육의 사람을 가지고 교육 시킨다고 영의 사람으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영의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의 따로 창조하신 신기한 창조물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의 아버지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늘 느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의 아버지로부터 징계 받을 때 압니다. 평소에는 영의 아버지가 계신 것을 잊고 삽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이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평소에는 이 말씀을 보면서 자기 변명에 급급합니다. "하나님, 저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저에게는 무리한 말씀입니다. 늘 참고는 하지만 못 지켜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징계를 받게 되면, "나에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영의 아버지가 다 계시다니! 오 과연 이것이 사실입니까?"하고 감격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고 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아버지로부터 영에 관심두게 하는 징계를 받는 자만이 참 아들이입니다.
이들만이 자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가 아니고 말입니다. 12-13절에 보면,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되어 있습니다.
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옳으면 모든 것이 정리된 정상적인 아들로 보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으로 옳은 아들상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희들의 기쁨도 이것 뿐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자신을 숨기거나 속이지 말게 하옵소서. 육으로 육을 해결하려 들지 말고 영의 아버지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함께 살기를 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2. 징계(히 12:3-13)
------------------------------------- (히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
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신의 구원을 달성시켜주고, 그리고 삶의 괴로움을 해소시켜주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혀 그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자기 아들의 ‘피 흘림’에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아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너희들은 아느냐?” 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기 구원만 챙기려고 하는데, 개인적인 행복과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 앞에 자기 아들의 십자가 고난을 들이댄다는 겁니다.
어제도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자기 아들을 군에 보냈는데 그만 북한군에 쏜 총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북한군을 왜 총을 쏘았습니까? 그냥 심심해서 쏜 것이 아닌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남쪽에 있는 부모는 그만 자기 자식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러한 둘 사이에서 ‘고난’ 이란 것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의인이 남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이마에 땀을 흘리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란 말이죠.
우리 인간들은 이런 고생을 줄이기 위해서 급급해하는데, 그래서 자신의 고생을 줄이는 방법으로서, 그만 자기 고생을 남에게 넘겨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남을 더 고생하게 만드는데, 아무튼 자기만 덜 고생스럽다면 그것이 선이고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 세상을 너무나 좁게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인데, 그야말로 자기 위주로 말이죠.
‘착함’ 이란?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를 믿고 착하게 살면 되지를 않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착함이란 무엇입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도 자기의 편익 위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가 되는데 말이죠.
얼마 전에 미국의 한 금융회사가 볼리비아의 광산에 투자한 돈을 그만 회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그 광산이 그만 문을 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게 그 광산에서 일하던 15,000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는 날벼락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졸지에 그들은 거리를 배회하는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미국 금융회사의 억대 연봉을 받는 간부는, 자기 동네나 교회 안에서 이웃을 위한 잔치를 벌리고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우리 가정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그것을 보답하기 위해서 나는 이런 착한 일을 한다”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과연 그러하냐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 동네의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그것을 가난한 동네에서는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그렇게 하면 그것은 가진 자의 횡포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그런 것을 전혀 착함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착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열심히 살면, 이웃은 망한다 !!
사람들은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열심히 살면 환경이 파괴되고, 그런 옹고집이 얼마나 많은 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결과로 나타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열심이 타인의 열심을, 자기의 성실함이 타인의 성실함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어쩔 수 없는 경제체제라는 말이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게 엄연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선진국이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면 잘 살수록 자연환경은 더욱 더 파괴가 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대로 후진국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데, 그것을 선진국에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서 그렇다고 하지요. 그래서 교육을 시켜서 아이를 낳는 것을 줄이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다는 보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렇지 않은데, 그래도 가족이라도 많아서 그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서 푼돈이라도 벌어야, 그래야 가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이죠.
하루에 1달러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전 세계인구의 3분의 1이라고 하는데, 물론 제가 경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자고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느냐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온 그 좁은 지역과 짧은 세월, 그런 환경에서 습득한 경험을 가지고 죽니 사니 하면서 함부로 결론을 내리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선함입니까? 인간은 전체를 모르고 동시에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그저 눈에 보이는 자기 조직과 자기 집단의 생존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자들에게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란 기껏 ‘자기 이익’ 뿐인데, 남도 모르고, 전체도 모르고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사고방식이 남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반드시 사고 말겠어 !!
강남 백화점에 새로운 신상이 하나 나오면, 그런 것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구입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코트 하나에 천만원이나 주고 사는데, 그것을 왜 사는지 강남 아줌마들에게 물어보면, “나도 이것이 사치인 줄을 알지만, 사람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줄 알아? 권태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은 직장에 보내고, 그렇게 혼자 집에 남아서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쇼핑이 나서는데, 그래서 신상을 구입하는 쾌감,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비싼 것을 사지는 않았지만, 점점 가격대가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아줌마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사는 것이죠. 신혼 때는 먹고 사는 것이 바빠서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런데 이제 여유가 생기니까 그런 것에 눈이 가더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집만 한 채 있으면 행복할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집이 생기니 최고급 승용차가 욕심이 나고, 그 다음에는 명품 백이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그런 것을 구입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허무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허무가 찾아오고 또한 기다리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데, 뭔가 새로운 다양성, 즉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그러니 지나치게 카드를 긁는 것도 이해를 좀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러한 사치스러운 소비풍조 때문에 기업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치품을 수입하는데 힘을 쓰게 되고, 그러면 국가 경쟁력은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본적인 생필품 생산에 치중하는 중소기업들은 점점 더 설자리를 점차 잃게 되는데, 당연히 값싼 중국산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이죠.
그러면 누가 그런 것을 유발시켰습니까?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렇게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지루함을 없애려고 하는 행동으로 인해서 그만 사회경제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그들이 그런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이런 인간 세계의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서, 이 세상에 구원과 행복을 주시려고 하셨습니까? 아마 모세라면 잘했지 싶은데, 그가 바로의 왕궁에서 자라면서 사회나 경제 전반에 걸쳐서 다 익혔을 테니 말이죠. 그러면 굳이 예수가 필요가 없는데, 모세와 같은 사람을 데려다가 대통령으로 세우면 된다는 겁니다. 요셉도 그렇고 말이죠.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말씀에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교회에도 제대로 나오지를 않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지금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가정과 사회가 진리이고 선하다고 여기기에, 그래서 여기서 그만 스톱을 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영’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들은 눈만 뜨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육’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래서 육으로 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이외에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히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영, ‘육은 아니다’ !!
어떻게 하면 육이 행복할지, 거기에만 집중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죠. 그런데 어째서 성경에는 ‘영’ 이라는 말씀이 나오느냐는 겁니다. 육이 아닌 영이 나오느냐는 것이죠. 여기서 ‘영’ 이라는 것은, “육이 아니다” 라는 의미인데, 즉 하나님은 영으로서 인간을 다루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다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을 하는데, 그러니 영은 돈이 되지 않기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신상품이 나왔을 때, 남들보다 먼저 달려가서 구입하고 동창생에게 자랑을 하는, 그런 육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칠도 필요가 없고 팔도 필요가 없는데(ㅋㅋ), 우리 인간은 ‘육’이 전부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영, 그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징계’ !!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하는데, “신이여, 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달라는 말이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육적인 것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또 육이냐? 나는 영으로 다가설 꺼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들은 육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을 치는 쪽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징계’ 라는 것인데, 그러니 징계는 단순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육을 쳐서 육적인 행동을 바로잡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서 다시 육이 잘 되는 것, 그런 식의 징계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징계는, 이미 확보되어 있는 영을 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육을 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을 쳐서 수리된 그 육을 가지고서, 그 이전에 잃었던 이득을 다시 얻고자 하는 식의 징계는 하나님에게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없을까요? 예를 들어서, 육적으로 징계를 받아서 혼이 났다고 하면, 그렇게 해서 몸이 많이 아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한다면, 하지만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경제구조 안에서 어떻게 착하게 사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고 싶어서,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게 안 되는 구조 안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구조 안에서 옳고 바름은 성립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면, “하나님, 저의 죄가 이 정도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라고 하는 선에서 그쳐야 하는데, 바르게 산다든지 하면서, 그렇게 더 이상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육적인 징계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바르게 살고자 다짐을 한다면, 오히려 그 결과는 도리어 전보다 악화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바르게 살고자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전에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겁니까? 진짜 하나님에게 실망했습니다” 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나올 수 있다는 말이죠.
물론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데, 그래서 시편 94편 9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라고 하시는데,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이죠.
(시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아하, 나는 영의 아버지의 아들이구나 !!
진리는 육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에 있는데, 그러니 진리와 선함과 옳음을 육에서 찾는 것 자체가 곧 죄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징계는 이런 점을 집중해서 공격하는데, “제발 육으로 육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육적인 징계를 겪음으로서 보다 나은 육적인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바로 그런 육적인 생각을 때려부수기 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징계’ 라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행복해집니까? 우리 자체가 바르지 못한 존재인데, 이런 바르지 못한 존재가 무슨 염치로 행복을 논하고 행복을 기대합니까? 그러한 생각부터가 징계를 받아도 당연한 이유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것인데, 즉 “하나님은 나의 영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 영의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라고 하는 그 ‘관계성’, 그 자체로서만 행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영과 영이 서로 내통된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적인 산물이 되었고, 이런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겁니다. 육의 피조물이 아닌 영의 피조물이라는 사실, 이것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육으로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기에 말이죠. 모세의 경우에도, 그는 처음에는 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제가 김 집사님이 아파서 병원에 심방을 가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인용하면서, “집사님의 육은 엉망인데 과연 온전한 영은 지니고 계십니까?” 라고 말이죠. 하나님은 육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선 영의 하나님인데, 그러니 육의 온전함보다 영의 온전함을 감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육은 어차피 늙으면 다 해체될 대상일 뿐인데, 육과 혼을 멸하시는 분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느냐는 것이죠.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착하면 복을 받는다 !!
제가 어릴 때부터 배운 나름대로의 진리체계는 이것인데, 그것은 여러분도 별반 다르지 않지 싶은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착하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믿고 난 이후에도 역시 그러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엇이 착한지에 대해서 세분화를 시켜보니, 거짓말을 하지 않고, 성실하고, 근면하고, 그런 것들이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면 좋은 대학에 가고 출세를 시켜주느냐는 겁니까? 오히려 그렇게 착하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한 아이들보다도, 남들이 하지 않는 청소도 잘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 아이들보다도, 그런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죽으라고 자기 공부만 한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가더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 겁니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이 세상을 향해서 징계적 차원에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에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알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4절을 보겠습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여기에 보면, ‘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데, 그런데 피를 흘리면서까지 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하나님께서 죄라고 규정을 하시는 것은 어떤 것인고 하니,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뒤로 물러가게 되어있지, 더 이상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피를 보는 싸움 !!
여기서 피는 목숨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피가, 즉 자기 목숨이 얼마나 귀하냐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즉 자기 목숨이 제일로 소중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최고로 보게 되면, 굳이 무엇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쳐서 피를 흘리는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까지 싸우려고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 죽어가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이미 확보되어있는 자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는 겁니다. 즉 죽음조차도 능히 감수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엇이 죄입니까? 영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영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라고 하는데, 즉 피조물이 창조자를 모르는 것이 곧 죄라는 겁니다. 육으로 놀다가 육으로 죽는 것이 죄라는 말이죠. 윤리와 도덕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만, “영의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는 것이 기쁘다” 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구나. 그런데 왜 징계를 받지? 옳지, 내가 죄와 싸우게 죽기까지 싸우지 않았구나. 그러니 이제부터 죄를 기어이 꺾어서, 그런 죄를 꺾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그동안 손해본 것을 보상을 받아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으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여전히 육적으로 얻어지는 기쁨일 뿐이라는 말이죠. 징계를 받음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징계를 받지 않음에서 오는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존재자로 있어도 주어지는, 즉 절대자가 되는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그것이 전혀 아닌데,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나같이 육적인 것도, 그야말로 하찮은 것도, 나를 사랑하사 징계와 징계로 인도해주시는 영의 아버지가 실제로 계시는구나” 라고 하는, 그 사실 자체가 바로 기쁨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 이상의 기쁨은 없다는 말이죠.
영의 아버지가 징계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징계를 받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익혀온, 즉 “육은 육으로 해결을 한다” 라고 하는, 즉 “착하고 성실하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육으로 보면, 너무나 불쌍한 사도바울 !!
만약에 육으로 해결한다고 하면, 그러면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야말로 제대로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육체에 가시가 박혀있고,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도 듣고, 강도의 위협까지도 당하고 말이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항상 기쁘다” 라고 했는데, 왜 기쁠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어려움에 처해있더라도, 자기는 영의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아버지의 참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인생의 전부였기 때문에, 담대하게 기쁨으로 그런 고난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니 영의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육의 사람은 육으로서 끝난다는 겁니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영의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말이죠. 기존의 있는 제품을 가지고 리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처럼 종교적인 열심이고, 영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따로 만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자기가 영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임을 확인하고, 그것을 자인하게 된다는 말이죠. 육의 사람을 가지고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영의 사람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영의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의 따로 창조하신 신기한 창조물이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
그러니 영의 사람은 오직 영의 아버지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해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항상 느낄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은데, 영의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 비로소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는 영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이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평소에는 이 말씀을 보면서 자기 변명에 급급해하는데, 즉 “하나님, 저도 염려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에게는 무리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염려를 하더라도 조금은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징계를 받을까 싶어서 미리 조치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징계를 받지 않은 것에서 오는 기쁨이지, 아버지의 살아계심에서 오는, 영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에서는 오는 기쁨은 아니라는 겁니다. 솔직히 아버지가 부담스럽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반응이 전혀 달라지는데, “나에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영의 아버지께서 다 계시다니, 오 과연 이것이 사실입니까?” 라고 하면서, 그것을 기뻐하고 감격해한다는 겁니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데,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미리 예방조치를 해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과감하게 징계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징계를 받게 되면, “왜 때려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때려주세요!”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것은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사랑이 느껴지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나타난 정상적인 관계라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라고 하는데, 참으로 신기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참된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자들은 아버지가 없는데, 자기가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하고 징계를 하시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죠.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면 어떤 자가 참 아들입니까? 영의 아버지로부터 육이 아니라 영에 관심을 두도록 하는, 그렇게 징계를 받는 자들만이 참된 아들이고, 그러한 자들만이 영의 아버지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하는데, 12장 2절을 보겠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는 즐거움 !!
우리는 양자이고, 참 아들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전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는데, 여러분은 과연 그런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까? 도대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무엇이기에 그러한 부끄러움을 참느냐는 겁니다. 그 앞의 즐거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보자 우편에, 즉 아버지와 함께 있는 즐거움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즐거움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영의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천국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육적인 즐거움에 젖어서 살았는데, 강남의 아줌마처럼 명품을 사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말이죠. 그런 것에서 쾌감을 느끼면서, 즉 육에서 육을 해결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런 명품을 마다하고 십자가를 택하셨느냐는 말이죠. 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영의 아버지이고 영의 아들이기에, 즉 육이 아니라 영으로 통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된 아들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영으로 통하는 자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방법이 바로 ‘징계’ 라는 겁니다. 그러니 징계는 사업이 망하고 몸이 아프고 하는 게 아니라, 징계는 매일같이 주어지는데, 그래서 징계를 받으면서도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이죠. 자기 아들로서 인정해준다는 뜻이기에 말이죠. 왜냐하면 징계가 없으면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보겠습니다.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적인 사람은 징계를 받음으로서 기뻐하는 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 사람은 비록 육적으로는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라고 해도, 곧은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의 수치도 마다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참된 아들의 모습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는데, 바로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쁨이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제대로 알고 우리 자신을 알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숨기거나 속이지 않게 하옵소서. 육으로 육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징계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오직 영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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