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1: 39-12:2) 예수님을 바라보자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51강-히11장,39-12장,2(예수님을,바라보자)-heb02062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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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보자
2002년 6월 23일 51강
본문 말씀 : 히 11:39-12:2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귀찮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실 필요없이 그저 귀하신 말씀이나 듬뿍 내려주시면 우리들이 그것을 잘 순종하고 지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만해지는 것이 순리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대인처럼 됩니다. 자기 딴에 참으로 의롭다고 여길 것이고 자신의 순결한 신앙심으로도 너끈하게 구원도 달성해 낸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상을 아십니다. 겉과 속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논하고 신학을 따지고, 성전을 지키고, 예배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에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어두운 면을 스스로 덮어 씌우기 위한 위장술임을 압니다. 인간들의 정신이 엉뚱한데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님과 우리 인간들을 비교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허술하며 제멋대로인가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향해 하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쓰레기 같은 것입니다. 오늘 분문 12:2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합니다. 딴 것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설프고 부족했으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그 분은 구원의 주이십니다.
모든 이가 다같이 보조를 맞추어서 어울리며 살아가는데 만약 별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못살게 굽니다. 구박을 합니다. 즉 남들이 죄지을 때에도 같이 보조맞추어 썩어가고 타락해 주어야 이 사회 한 구석에서라도 버림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점차 죄에 대해 심각하게 여겨지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세가 그러하니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대다수의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게 팔짱이나 끼고 아무 대책도 없이 지켜 보시면서 안타까워 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누가 오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을 심판하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해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가 예수 모르는채 살아가기에 그 무지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하늘에서 누가 오셨다는 사실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다수가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밥먹고 살다고 그냥 늙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만 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거의 전부가 합세해서 이것만이 진리를 외칩니다.
오늘 불렀던 찬송가 253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으은 참 험하니
구원의 문 열렸으니 주의 공로 힘입어 주저말고 들어가서 생명길로 갑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간다면 대다수가 납득을 하겠지만 '주의 공로 힘입어 생명길로 갑시다'하는 주장에는 의아해 하기 마련입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데 '주'가 꼭 필요한 것입니까? 하루라도 생각 안하면 못 견디게 괴로운 그런 분입니까 대다수가 과연 그렇게 살아갑니까?
행여 교회 목사가 협박조로 말하기를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하니 일시적으로 예수 한번 믿어 볼까 하고 생각하지만 바깥에 나가보세요. 대다수는 예수 생각 안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대세에 편승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따돌림 받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다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어른에게 본 것, 가정 교육 받은 것과는 전혀 딴 판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도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아들 예수의 말만 들으라"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실상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미 들어날 데로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 실험을 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자신의 속마음 조차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는데 하나님이 하지말라는 것만 꼭 저질려서 우리 자신에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 마저 이긴 우리 자신이 곧 승리자이요 세상의 절대자임을 확인해주는 즐거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기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손을 놔버려야 합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또 자기 외의 타인을 의지한단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낙담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아닌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극도로 나오게 됩니다. 11:40에 보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나 내심은, "좋기는 뭐가 좋아 나는 월드컵 4강이 좋더라"라는 조로 나옵니다.
또 12:1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라고 되어 있더라도, 속으로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죄를 벗지 않을꺼야. 몰래 죄짓는 재미가 얼마나 큰데 이것 버리면 나는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냐?"라는 반발심이 나올 것입니다.
또 12:2에 보면,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더라도 내심은, "지금 안그래도 세상에 바쁜데 한가하게 예수나 바라보고 생각한 짬이 어딨어. 그리고 나는 남들 앞에서 놀림받을 짓은 죽어도 못한다. 차라리 그들에게 아부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의 눈 밖에 벗어나는 식으로 살지 않을거야.
또 죽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이 뭐 성공이라고. 살아서 이 세상에서 빛보는 것이 더 영광스러울 걸"라는 반발심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들이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내부에서 나오는 어떤 강렬한 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되 받아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이처럼 대결하게 됩니다.
왜 메시야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살해 당하도록 했습니까? 그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진 말씀의 돌판까지 받은 민족입니다. 다른 민족 다 망해도 우리 민족은 안망한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민족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속에 있는 것을 인간의 겉 행동이 자제 시킬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정체 모를 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체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6:1-12에 보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와 악한 영의 사고방식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살아왔던 모든 사상입니다. 에베소서 2:2에 보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참으로 이들이 악마냐 아니냐는 이쪽 하늘 편에서 누군가 내려와 주어서 서로 대결 구조가 갖추어질 때 다 드러납니다. 인간들이 지혜와 양심 가지고서는 악마과 과연 자신들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아십니다. 악마의 영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더라도 거기에 합세해서는 안된다고 그 정체를 밝혀 주시는 겁니다. 지금 우리 인간들에게 허다한 악마의 증인들로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해서는 비증인들이지요. 하늘 나라를 무시하라고 독촉하는 숱한 세상의 증인들만 눈에 띄는 실정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금 거론하겠습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그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말을 내가 할 것이며 그들에게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할 말을 내가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떠한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인간 세계는 어떤 말을 해도 배후에서 악마가 조정하는대로 해석할 수 밖에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하십니다. "구원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비증인들, 즉 세상만을 쳐다보고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게 됩니까? 이들은 비온전한 것에 자족하고 만족하고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온전한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으며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간주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누구를 쳐다보고 믿고 바라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40에 보면 참된 하늘 나라의 증인들은 이들과 차이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더 좋은 것'과 '온전함'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좋은 것과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 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이고 예수고 나를 좀 놔 주세요. 다 귀찮아요. 지옥 있으면 내가 제일 먼저 갈테니까 신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날 일방적으로 눌려르고 하지 마세요"라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빈틈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니, 천지 창조를 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원래 창조한 그 인간, 원래 창조한 그 피조세계가 아니라 언제라도 불로 태워 버립니다. 여기에 반발하면 토기가 토기장기에게 달려드는 식입니다.
인간 세계는 이것이 도발인 줄 모르고 대세로 봐서 자연스러운 일상적 태도라고 간주합니다. 비록 이러한 태도가 온전치 못하더라도 상호 봐주기를 약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들어 있습니다. 육과 영이 이 지구에 같이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진짜 온전한 분입니다. 그리고 타락 자체를 정당화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가는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특별한 것도 싫어합니다. 민중 속에 조용히 숨어 있기를 원합니다. 대세에 휩싸이는 것으로 안심을 얻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온전한 주를 바라볼 수 없겠지요.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8에 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의 등장을 '기적이다!'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예수이 기적적인 증인이 된 것을 오히려 반기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극구 자신의 부족을 변명이나 옹호로 일관하지 마시고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로지 온전케 하시는 주만 바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1. 예수님을 바라보자(히 11:39-12:2)
--------------------------------- (히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물론 우리 생각에는, 귀찮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실 필요도 없이, 그저 귀하신 말씀이나 듬뿍 내려주시면,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고 순종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만해지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순리라고 여겨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대인처럼 되고 말아요. 우리는 자기 딴에는 의롭다고 여길 것이고, 우리 자신의 순결한 신앙심으로도 너끈하게 구원도 달성해 낸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아시는데, 겉과 속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말이죠. 그들이 하나님을 논하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성전을 지키고, 예배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도, 그 모든 것이 자기의 어두운 면을 스스로 덮어씌우기 위한 위장술이란 겁니다. 인간들의 정신상태가 전혀 엉뚱한데 가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잔소리용으로 말씀을 주셔서, 즉 “애들아, 십계명을 지켜라. 먹고 사는 것이 힘이 들어도 좀 지켜라. 부탁한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된 온전하신 분,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지를 진솔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연히 우리 인간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허술하며 제멋대로인가를 분명히 드러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신을 향해서 하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것이고,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분문 12장 2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한다는 겁니다. 딴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는데,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였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겠습니까? 온전케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인데, 즉 그분이 바로 ‘구원의 주’ 라는 말이죠.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 !!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보조를 맞추어서 어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만약 별나게 달리 자기 혼자서 특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미워하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사람을 못살게 구는데, 가만히 두는 정도가 아니라 구박을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학생들은 모두가 다 데모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혼자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면,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만 학생이가? 니만 잘났나?” 라고 할 것이 뻔하다는 겁니다. 물론 싸가지가 없기는 없는데, 자기만 교수에게 잘 보여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하니 말이죠.
그러니 남들이 죄를 지을 때도 같이 보조를 맞추어서 썩어가고 타락해 주어야, 그래야만 이 사회의 한 구석에서라도 버림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점차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대세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나만 뇌물을 받나? 다른 사람들도 다 받는데, 그렇지 않아?”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런 식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게 팔짱이나 끼고 아무 대책도 없이 지켜보시면서, 그냥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상은 심판주를 몰라 !!
하늘에서 누가 오셨는데, 그분은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르는데,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3명이 온 이유를 모르듯이 말이죠. 예수님이 심판주라고 해도, 믿음의 주고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데, 대다수가 예수를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 무지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한데, 하늘에서 누가 오셨다는 사실을 귀담아 듣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대다수가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밥을 먹으면서 살다가 그냥 늙어 죽는다는 사실인데, 이것을 대다수가 진리라고 믿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불렀던 찬송가 253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주의 공로 힘입어 주저 말고 들어가서 생명길로 갑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간다면 대다수가 납득을 하겠지만, 그런데 “주의 공로 힘입어 생명길로 갑시다” 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아해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데 ‘주’가 꼭 필요하냐는 겁니다. 그분을 단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괴롭습니까? 대다수가 과연 그렇게 살아갑니까? 물론 목사가 협박조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니, 일시적으로 예수를 한 번 믿어보려는 생각도 하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바깥에 나가보세요. 대다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데, 전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좀비처럼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대세에 편승하지 아니하면, 이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대다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어른에게서 본 것, 그리고 가정교육을 받은 것과는 전혀 딴 판인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데,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이죠.
내 아들만 봐라봐 !!
이것은 하나님도 똑같은데,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너희는 내 아들인 예수의 말만 들어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다수가 이야기하는 것에 휩싸이지 말라는 것이죠. 즉 “그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라는 겁니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러면 우리는 왜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겁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통해서 실험을 했는데,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를 말이죠. 그러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정성을 다한다고 해도, 자신의 속마음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나와있는 말씀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또 다른 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만을 꼭 저질러서, 자기 자신에게 기쁨을 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마저 이긴 나 자신이 곧 승리자이요, 이 세상의 절대자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즐거움을 말이죠.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마음을 믿어서는 안 되는데,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볼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전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손을 놔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자기 외에 다른 타인을 의지한다는 겁니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자기가 허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괜찮은 놈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을 의지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먼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낙담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월드컵 4강이 더 좋아 !!
하지만 그런 마음이 아닌 상태에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극도로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라고 하는데, 그러나 우리의 내심은 무엇입니까? “좋기는 뭐가 좋아? 나는 월드컵 4강이 더 좋더라” 라고,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어떤 경우라도 죄를 벗지 않을 거야. 몰래 죄를 짓는 재미가 얼마나 큰데,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나는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지?” 라고 하는, 그러한 반발심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또한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한가하게 예수나 바라보고 있을 짬이 어디에 있어. 그리고 나는 남들 앞에서 놀림을 받을 짓은 죽어도 못한다. 차라리 그들에게 아부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의 눈 밖에 벗어나는 식으로 살지 않을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뭐 참으라고? 내가 왜 참아야하지? 그리고 죽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웃기지 마라. 나는 살아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더 좋고 영광스러워” 라고 하는, 그런 반발심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것은 그 어떤 성경구절을 들이대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사랑도 없이 해대는 잔소리와 같다는 말이죠. 우리 내부에서 나오는 어떤 강렬한 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친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인간은 이렇게 대결구조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메시야는 왜 유대인들에게 오셨는가?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메시야가 유대인들에게 왔고, 또한 그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게 되었습니까? 착하고 착한 백의민족에게 오셔도 되는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그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았기 때문인데, 즉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새겨진 말씀의 돌판을 받은 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민족은 모두 망해도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민족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분을 완강하게 거부했다는 말이죠.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것을, 인간의 겉 행동이 자제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데, 즉 인간 내부에는 이름 모를 세력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6장 11절과 1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나는 붉은 악마는 알아도, 하늘의 악마는 몰라요 !!
여기에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은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어. 붉은 악마는 알아도, 하늘의 악한 영은 무엇이지?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몰라” 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즉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 붉은 악마는 뿔이 있을지 몰라도 악한 영은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와 하늘의 악한 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방식인데, 그래서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악마란, 이 세상의 사고방식 그 자체 !!
한 마디로 말해서, 악마는 이 세상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사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들이 과연 악마냐 아니냐는 것은, 이쪽 하늘 편에서 누군가 내려와서 서로 대결 구조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그 정체가 궁극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죠. 인간들이 지혜와 양심을 가지고서는, 악마가 자신들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누군가가 내려오지를 않으면 악마의 정체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이러한 점을 잘 아시는데, 그래서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악마의 영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더라도 너희들은 거기에는 합세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서 그 정체를 밝혀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12장 1절을 주목하고 싶다는 겁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여기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 인간들은 허다한 악마의 증인들로 둘러싸여져 있다는 말이죠. 물론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비증인들인데, 즉 하늘나라를 무시하라고 독촉하는 허다한 세상의 증인들만 눈에 띄는 실정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 완전히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러한 와중에 누가 하늘의 악한 영을 생각하고, 어둠의 세상 주관자를 생각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 자기가 철저하게 예속되어서 살아가고 있다고,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런 생각이 도저히 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
예수님께서는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 즉 “너희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말을 내가 할 것이며, 너희들에게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할 말을 내가 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시겠다니,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맞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그 어떠한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기존의 인간세계는 그들이 그 어떤 말을 하고 그 어떤 과학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해도, 그것은 모두 배후에서 악마가 조정하는 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란 겁니다. 우리는 악마의 그런 분위기 속에 눅눅히 젖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말이죠.
(마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래놓고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자” 라고 하는데, 즉 다른 것은 다 치우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알아야 하는데, 하늘의 비증인들, 즉 이 세상만 쳐다보고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그리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느냐는 말이죠.
그들은 비온전한 것에 자족하고 만족하고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온전한 것을 바라보지 않는데, 물론 그들은 스스로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으며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 하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간주하면서 살아가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를 쳐다보고 믿고 바라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데,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참된 하늘나라의 증인들은 그들은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39절과 40절을 보겠습니다.
(히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더 좋은 것, 온전함 !!
여기에 보면 ‘더 좋은 것’과 ‘온전함’이 나오는데,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것과 이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온전치 못한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나를 좀 놔주세요. 다 귀찮아요. 내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지옥이 있으면 내가 제일 먼저 갈 테니까, 신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나를 일방적으로 누르지 마세요” 라고, 그렇게 항변을 한다는 겁니다.
이번에 월드컵에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기고 스페인을 이겼는데, 그런데 그때 상대방 나라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을 해보았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하지만 그렇게 온전치 못해도 놔달라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도록 해달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오기를 부리는데, 그런 온전치 못한 것을 옹호하고 변명해주는 것이 이 세상의 허다한 증인들인데, 물론 예수의 증인이 아니라 악마의 증인들이라는 겁니다. 마귀가 박수를 치면서 사람들에게 독려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만하면 되었다. 이 정도로 잘 사는 것도 너희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과학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참 수고했다. 그러니 이 정도로 하고 그냥 넘어가자”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빈틈이 없는데, 인간들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창세기 1장에 보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해놓으시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토를 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래 창조한 그 인간, 원래 창조한 그 피조세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듯이, 그런 것들은 언제든지 불로서 태워버리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에 반발하면, 그것은 토기가 토기장기에게 달려드는 식이라는 말이죠. 즉 “너는 어디서 나왔지? 내가 만들었는데, 그런데 왜 까불어?” 라는 겁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하지만 인간 세계는 이것이 도발인 줄도 모르고, 그것을 오히려 대세로 판단해서 자연스러운 일상적 태도라고 간주한다는 말이죠. 비록 이러한 태도가 온전치 못하더라도 상호 봐주기로, 그렇게 서로가 마음속으로 약속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 세계의 일상이고 대세라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 인간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육에서 와서 육으로 끝이 나지만, 그러나 그분은 영에서 와서 영으로 끝난다는 겁니다.
뭐, 당신이 하나님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육과 영이 이 지구에서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이 인간과 더불어서 함께 사신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인간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뭐, 당신이 하나님이야? 어디 내 손에 죽어볼래. 뭐, 진짜로 내 손에 죽는다고? 그러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이고? 뭐, 부활을 한다고? 웃기고 있네. 구라도 무슨 그런 구라가 다 있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예수가 진짜 부활을 했다면 정말로 놀라운 일인데,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다 부활을 할 것이니 말이야. 하지만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의 재산을 다 팔고 예수를 따라다니던 자들이 자기의 것을 조금이라도 보상받기 위해서, 그래서 종교를 하나 만들려고 하는 짓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사도바울도 역시 그런 인물인데, 길을 가다가 그만 번개를 맞아서 맛이 간 사람이야. 그런 그가 뭐라고 하는가? 뭐, 예수 이름이 아니면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고? 뭐, 예수님이 심판주로 천사와 함께 재림을 해서 이 세상을 불태운다고? 그런 거짓말도 한 두 번이지,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누가 그런 성경을 믿겠어?”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이것이 온전치 못한 주장이라는 것을 아는데, 하지만 이게 우리 인간이 끄집어낸 최고의 수준이고, 그리고 그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 더욱 더 인간답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에 정이 들어서 그만 온전치 못한 것을 감싸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또한 그게 자기 변명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온전히 못한 것이라도 눈감아주세요” 라는 것이 대세가 된 이 세상에, 진짜 온전한 분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오히려 타락한 것을 정당화해달라고 요구하는, 그것이 대세인 이 세상 사람들과 마주쳤다는 겁니다. 물론 이 세상은 마귀가 배후에서 그렇게 조정을 했는데 말이죠.
왜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가?
지금 제가 계속해서 “왜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겁니까?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고 싶은데, 특별한 것도 싫어합니다. 튀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데, 그냥 무리 속에 조용히 숨어있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대세에 휩싸이는 것으로 안심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큰 교회에 가서는, 교회에 왔는지도 잘 모르는, 몰래 와서 몰래 나가도 목사에게 들키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선호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게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태도가 맞느냐는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온전한 주님을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허다한 증인들’ 이라는 것은, 지난 시간에 했는데, 11장 3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들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라고 하는데, 즉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무지 이 세상에 대해서는 두려운 것이 없는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임을 당해도 말이죠.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저는 이러한 사람들의 등장을 두고 간단하게, ‘기적’ 이라고 묘사하고 싶은데,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감히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아부를 해도 살아남기가 힘든 세상인데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오늘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라고 하는데, 이것을 보고 “주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구나. 나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아야지” 라고 한다면, 과연 그렇게 부끄러움을 개의치 있는 것이 인간입니까? 사람이 수치스러운 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자기 수치심 때문에 자살을 하는 선택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는 것에 훨씬 급급해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기에 보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라고 하는데, 그런 예수님을 과연 그리워하고 사모할 마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대세를 이탈하는 용기라는 말이죠.
오, 필승 코리아 !!
십자가 마을을 사이트에 보면, 어떤 분이 사람들이 월드컵에 너무 빠지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안타깝다는 식으로 반박하는 글을 또한 올렸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이영표와 송종국 선수가 얼마나 기도하면서 경기는 하고, 또한 한국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기도하면서 경기를 보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지 않고, 왜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것이죠.
여러분, 월드컵이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까? 한국이 4강에 들어가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붉은 악마의 모습으로 이 땅에 한국을 응원하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완전히 내버려짐을 당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버림을 당해서 내버려진 쓰레기를, 그런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금 4강에 올라가서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 자랑스러운데, 그런데 그런 내버려진 쓰레기를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식으로 심판주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누가 대세에서 이탈해서 살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라는 말이죠.
우리는 온전치 못한데, 이것을 우리도 알고 그들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다같이 온전치 못한데, 그러니 그냥 대충하고 넘어가자. 잘난 것을 가지고 부끄러운 것을 좀 덮겠다고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이상해? 그냥 그렇게 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요즘 가정파탄이 일어나서 이혼직전에 있는 가정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데 이번 월드컵을 같이 응원하면서 다시 합치기로 한 가정들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도 풀고 말이죠. 도대체 이런 사랑의 역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이, 그게 큰 사건이 일어남으로서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가정을 다시 하나로 묶은 것은 월드컵인데, 예수가 아니라는 말이죠. 바로 이것이 온전치 못한 것인데,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온전치 못한 것이 정당화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즉 온전치 못한 것이 진리로 통용되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도 이런 세상에서 떠밀리고 뺨까지 맞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탈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삐딱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월드컵 16강, 8강, 4강, 이렇게 올라갈 때마다 환호소리는 커지지만 예수는 점점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죠.
이제는 벗어버리고 !!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벗어버린다’ 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러니 이제 쓸데없는 것들은 좀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자는 겁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그런 것은 얼마든지 벗어버려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이미 온전하신 분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말이죠. 온전한 것이 있는데, 그러면 다 되었는데, 그런데도 왜 자꾸만 엉뚱한 것을 바라보려고 하고, 대세에 편승해서 살아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도 없고 수치스러운 것도 없는데,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로 마귀가 하는 짓이 교묘합니다. 온갖 화려한 것들을 다 동원해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휩쓸리지 말게 하시고, 오직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2 오전 2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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