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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35-38) 믿음과 시련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35-38) 믿음과 시련

정인순 2010. 9. 5. 13:42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50강-히11장,35-38(믿음과,시련)-heb020616.mp3

 

 

이근호

 

믿음과 시련

 

2002년 6월 16일 50강

 

본문 말씀 : 히 11:35-38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입니다. 남이 죽는 것만 현실이 아니라 곧 내가 죽는다는 것이 차가운 현실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현실이 있고 그것들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정작 내가 죽는 현실이 찾아오면 그런 현실들은 모두 파묻혀 버릴 것입니다.

 

남에게 실수를 했다든지, 사고를 쳤다든지, 실수를 했다든지 하는 그런 현실들도 내가 죽는 마당에 별반 중요한 심각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3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죽인다는 사실을 미리 진정한 현실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자세가 못된 사람은 곧 반대로 세상에 매여 사는 신세가 됩니다.

 

세상이 이 사람을 감당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사람이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면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참된 현실이 시시각각으로 자기에게 찾아오는 것도 모르고 부질없는 꿈과 야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이란?"라는 것을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흔히 믿음이란 사람의 얼굴 다르듯이 다 다르다고 여겨지겠지만 실은 각가지 다른 삶의 상황이 있을 뿐이고 거기에 대응하는 동일한 믿음이 나옵니다. 그 믿음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상이 감당치 못할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 위에서 노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런 믿음과 무관한 자라면 그 사람은 세상과 한패거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결국 죽는다는 실제 현실을 미리 순순히 인정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신을 살기 위하여 무슨 수를 다 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계속해서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꿈이 늘 현실이 된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현실은 하나님의 뜻 뿐입니다. 그것으로만 가득 채워지고 나머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비정하고 차가운 현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죽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은 보편적 진리를 말씀합니다.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쉬운 예를 들면, 축구 경기장에서 다들 축구를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나는 어제 치과에 가서 금이빨 했다. 정말이다. 진짜로 했다. 제발 나의 체험을 믿어다오!"하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진짜로 금 이빨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축구경기장에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두들 경기 관람에 몰두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체험이나 경험은 보편적 진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게 무슨 차가운 현실입니까? 모두 다 목숨걸고 뛰어들 진리가 아니라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 각자의 자랑거리에 신주단지 모시듯이 남에게 과시하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거기서 찾으려고 합니다. 또 다들 지방 선거 투표하는 장소에서, "나는 발에 무좀 걸렸다!"고 외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본인은 정말 무좀 걸렸겠지요. 그래서 간지럽겠지요. 그렇다고해서 모두 다 그 사람처럼 무좀 다 걸리라는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자기 의' 갖기 시도입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갖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남과 차이나는 재미, 남과 구별되어 나만이 간직할 것이 있다는 점에서 오는 재미입니다. 이것은 다 차가운 현실, 곧 보편적 죽음 앞에서 기껏 꿈이요 환상에 불과함이 드러납니다.

 

이런 환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볼 때에 오늘 본문 37-38절에 나오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자기 자존심과 자기 손해 안보기 식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이 사람들은 무조건 무모하고 바보짓을 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꿈을 안 놓치기 위하여 온갖 아부와 배신과 변질을 서슴치 않을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독한 최후의 현실, 즉 내가 죽어 사라진다는 차가운 현실을 미리 받아들린다면 세상에 고개숙이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떤 식으로 죽이는가에 대한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하나님은 나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현실이 더 확실해 질 뿐입니다. 톱에 의해 죽든 웅덩이이 빠져 죽든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잠시 더 살아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간단합니다. "당연히 일어날 현실이 뭐지?"입니다. 별나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학대하며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금이빨 안한 사람도 있고 무좀 안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보편적 진리란 남녀노소를 막론하게 동일하게 하늘에서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들이 아주 자연스럽고 술술 터져나오게 됩니다. 술술 나온다는 말은 용을 안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져보면 용을 쓰며 산 것이 손해요 헛수고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보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온갖 시련을 받게 되는 그 상황에서 갖는 신자의 심정이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들의 심정과 지금 우리들의 심정과 동일한지를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사람들과 36-37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뭘 믿고 대범하게 자기 목숨마져 버릴 수가 있습니까?

 

이점을 알기 위해 요한계시록 20:4-5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냥 '부활'이 아니라 '첫째 부활'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6절에 보면 '둘 째 사망'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둘 째 사망이란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부활에 참여된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둘 째 부활에 들어가고, 첫 째 사망에 참여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둘 째 사망에 들어갑니다.

 

첫 째 부활이란 곧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노선 외에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시는 보편적인 이 진리를 미리 믿었기에 신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사망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첫째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에 나오는 식대로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구차히 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체로서 저주요 첫째 사람이요 반드시 둘째 사망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복입니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사적인 축복에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개인적인 축복에 연연하면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을 시도할 것이 뻔 합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 목사가 무슨 짓이라도 하는 행위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개인적인 야심은 본인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죽여버립니다. 우리의 자존심은 마지막 차가운 현실을 교체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힘으로 순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교조차 자기 의가 됩니다. 핍박을 이겼다는 자부심은 차가운 현실이 아닙니다. 또 다른 자존심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벌리시는 현실을 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대로 진행되는 그 일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이 폼으로 있습니까? 사람은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누가 뭐래도 엄연히 차가운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새를 키우고 죽이듯이 말입니다. 내일 잘릴 들풀도 오늘까지는 하나님께서 키우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원대하고 웅장하고 엄청납니다. 이 원대한 계획은 35절에서 '부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시절에 두 선지자에게 각각 잘해주었던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의 가정에서 한결 같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맙니다.

뒤늦게 선지자는 이미 죽은 아들 위에 자기 몸을 덮어서 그 아들을 도로 살려 냅니다

 

하나님은 왜 그 아들들을 죽게 하십니까? 그것은 부활이 분명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선지자는 개별적인 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늘에서 파견된 분들이 아닙니다. 보편적 진리를 전달하려 오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보편적 진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당시의 예수님입니다. 이들의 행하는 일을 통해 죽음과 그리거 부활이라는 보편적 진리성을 그들 가정에 보여줍니다. 단지 아들이 죽었다고 소생한 것이 복이 아니라 부활의 세계, 첫째 부할, 둘째 부활의 세계를 엿보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복입니다.

 

아들이 죽는 수모는 뒤이어 나오는 선지자들의 수모와 같습니다. 이사야 20:2-3에 보면, 이사야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가 나옵니다.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찌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찌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벗은 몸과 발로 3년 동안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의 미래상이 자기 꼴이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에스겔 4:4-5에 보면,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찌니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 구십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390일 동안 모로 눕는 편치 못할 밤잠을 자야하는 것은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이 이처럼 편치 못할 것이라고 겁니다. 또한 그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의 죽음은 에스겔 개인적인 가정의 일에 머물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슬픔의 날이 곧 이스라엘에게 찾아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하나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긴 것도 모두 오늘날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럴 것입니다. "그들의 고생으로 우리가 편하게 되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나 자식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의 세계의 엿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과 수모를 억지로 하지 마시고 솔솔, 용쓰지 않은채 나오는 자가 신자일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실한 현실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죽어야 될 자이기에 마땅히 죽고자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둘째 부활의 세계를 눈치 채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0. 믿음과 시련(히 11: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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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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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 !!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기 마련인데, 그런데 남들이 죽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죽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성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현실들이 있고, 그것들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자기가 죽는 현실이 찾아오면, 그리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면,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죠.

다른 것들은 여기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그런 것들은 자기의 죽음 앞에서 모두 파묻히고 만다는 겁니다. 비록 자기가 남들에게 실수를 하고 사고를 치고 했더라도, 그런 것들은 자기가 죽는 마당에는 그렇게 심각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죽인다는 사실, 그것을 진정한 현실로 미리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이미 죽은 존재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런데 만약에 그런 자세가 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매여서 사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 자들은 세상이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이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면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현실이 시시각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부질없는 꿈과 야망의 노예가 되어서 슬픔 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이죠.

믿음이란?

우리가 지금 히브리서 11장을 보고 있는데, 이 히브리서 11장의 대주제가 “믿음이란?” 라는 것인데, 그것을 계속 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흔히 이 믿음을 마치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 모두들 다르다고 여겨지겠지만, 사실은 각가지 다른 삶의 상황만이 있을 뿐이고, 그런 상황에 대응하면서 동일한 형태로서 믿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놀랍게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모습으로 나오고 있더라는 말이죠.

이런 일이 터져도 너끈하게 이겨내고, 저런 일이 터져도 너끈하게 이겨내고, 그러니 분명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세상 위에서 노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과 상관이 없는 자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과 한패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면, 즉 “나는 결국 죽는다” 라고 하는 참된 현실을 미리 순순히 인정치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무슨 방법이든지 다 동원할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계속해서 핍박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의 종도 핍박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즉 있으나마한 존재로 여긴다는 말이죠.

보편적 진리는, ‘죽는다’ 라는 것 !!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인데, 그런데 이 세상은 오히려 꿈을 현실이라고 호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꿈이 늘 현실이 된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참된 현실은 하나님의 뜻뿐인데, 그것으로만 가득 채워지고 나머지는 다 사라지는데, 그러니 누가 뭐라도 해도 비정하고 차가운 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죽인다는 사실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짜 현실은 무엇인지,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렇게 성경말씀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보편적 진리’ 라고 하는데, 성경은 이런 보편적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편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쉬운 예를 들면, 축구 경기장에서 다들 축구를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나는 어제 치과에 가서 금이빨을 했다. 정말로 했다. 제발 나의 체험을 믿어다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물론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진짜로 금이빨을 했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축구 경기장에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모두가 경기를 관람하는데 몰두하고 있는데 말이죠.

개인적인 경험은 보편적 진리가 되지 못해 !!

이와 같이 개인적인 체험이나 경험은 보편적 진리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나는 어제 치과에 가서 금이빨을 했다. 제발 내 말을 믿어다오”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우리교회가 부흥을 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부흥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게 무슨 차가운 현실입니까? 모두가 다 목숨을 걸고 뛰어들 진리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 각자의 자랑거리를 마치 신주단지를 모시듯 하면서 남들에게 과시를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존재의 의미’ 라고 하니, 김종환의 노래가 생각나는데 말이죠.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가 달려 갈테니”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김종환의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인데,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모두가 지방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데, 그 장소에 가서 “나는 발에 무좀이 걸렸다” 라고 외치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는 정말로 무좀에 걸려서, 그래서 간지러워서 환장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자기처럼 무좀에 걸려달라는 겁니까?

‘자기 의’ 가지기 !!

이것이 바로 ‘자기 의’ 라는 것인데, 인간은 이렇게 자기 의를 가지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남과 차이가 나는 재미, 남들과 구별이 되어서 자기만이 간직할 것이 있다는 점에서 오는 재미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차가운 현실, 즉 보편적 죽음 앞에서 기껏해야 꿈이고 환상에 불과함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이런 환상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자기 자존심과 손해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무모하고 바보짓으로 보일 겁니다. 37절에 나오듯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느냐는 말이죠.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아부와 배신과 변질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독한 최후현실, 즉 “내가 죽어서 사라진다” 라는 차가운 현실을 미리 받아드린다면, 더 이상 비굴하게 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자기야, 미안해 !!

예를 들어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으슥한 골목길로 가게 되었는데, 왜 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ㅋㅋ). 그런데 거기서 그만 깡패를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남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가 나섰다가는 괜히 코피만 나고 손해를 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만 그 자리에 여자 친구만 남겨두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겁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너를 지켜주겠어. 정말 사랑해” 라고 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하다면 배신과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데, 시류에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정치인들이 제 아무리 “국민을 위해서!” 라고 해도, 결국 자기를 위해서 살아갈 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위한다는 것이 결국 자기 꿈을 위해서 사는 것인데,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진짜 현실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현실은 무엇입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나를 죽이도록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 현실이 더욱 확실해질 뿐이라는 말이죠. 이것만 받아들이게 된다면, 톱에 의해서 죽든 웅덩이에 빠져서 죽든,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도 현실이지만, 그게 궁극적인 현실은 아니라는 겁니다. 톱으로 죽지 않아도 결국 나이가 들어서라도 죽는다는 말이죠.

당연히 일어날 현실이 뭐지?

그러니 “나는 결국 죽는다” 라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말이죠. 굳이 잠시라도 더 살아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믿음이란 간단합니다. “당연히 일어날 현실이 뭐지?” 라고 하는 것인데, 유별나게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학대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금이빨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금이빨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무좀에 걸린 사람도 있지만 무좀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데, 그러니 그런 것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하늘에서 적용시키는 것인데, 그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말이죠. 바로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앞당겨서 받아들인다는 말이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게 됩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과 같은 것들이 말이죠. 술술 나온다는 말은, 굳이 용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데, 용을 쓰며 사는 것이 오히려 손해이고 헛수고라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어떤 형태로든 말이죠. 그러니 무엇이 두렵고 무섭겠느냐는 겁니다. 5년 동안 암과 싸워서 이겼더라도, 다음날 방바닥에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탁자 모서리에 부딪쳐서 죽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용을 쓰면서 살았다는 것이 오히려 억울한데, 그러면 괜히 변비도 걸리고 또한 혈압에도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지 않으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댄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죠. 믿음이 있는 자는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와 바울을 아는데 너는 누구지?” 라고 하는 마귀의 소리처럼 말이죠.

성도의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배짱을 부립니까? 뒤에 무슨 청와대라도 있는 겁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35절을 보겠습니다.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이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했을까요? 온갖 시련을 다 받게 되는 상황에서 가지는 성도의 심정이 궁금한데, 왜냐하면 그때 그들의 심정과 지금 우리의 심정이 동일한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이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대범하게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버릴 수가 있었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알기 위해서, 여기 히브리서보다 더 적나라한 것이 뒤에 나오는데, 앞보다는 뒤로 가면 갈수록 정답이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6절을 보겠습니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은 둘째 부활로, 첫째 사망은 둘째 사망으로 !!

여기 5절에 보면, 그냥 부활이 아니라 ‘첫째 부활’ 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이 나오는 것은 ‘둘째 부활’ 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앞에 악마들이 죽는 것은 ‘첫째 사망’ 인데, 여기 6절에 보면 ‘둘째 사망’ 이라는 표현이 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는 자들이 통뼈처럼 무엇을 믿고 죽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였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보편적인 일을 눈치를 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똑같이 적용시키는 일을 미리 알았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물론 당장에 자기가 사는 것이 다급한 문제인데,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보자면, 사람에게는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고, 그리고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둘째 사망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니 첫째 부활에 참여된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둘째 부활에 들어가고, 즉 천국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첫째 사망에 참여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데,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당연히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갈라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즉 “첫째 부활에 참여하다니, 너는 참으로 복되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니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별 볼이 없는데, 제 아무리 부자이고 자식이 똑똑해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저주인데, 이미 저주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이죠.

그러니 첫째 부활이란,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 노선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시는 보편적인 진리를 미리 믿었기에, 그래서 신자들은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죽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사망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35절에 나오는 대로,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구차히 면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체로서 저주이고, 그게 첫째 사망이고, 또한 반드시 둘째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성경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셨던 것과 지금 하시는 것과 앞으로 할 것을 기록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을 인간을 구원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생명책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죠.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는데, 자기가 금이빨을 하고 무좀에서 낫는 것이 더 큰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축복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한 개인적인 축복에 연연하게 되면, 그것을 자기가 지키지 위해서 이 세상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데, 즉 죽기를 무서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경이고 모두 버리겠습니다” 라고 나올 가능성이 매우 많다는 말이죠. 그리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목사가 무슨 짓이라도 하는 행위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결코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야심이 자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영혼을 그만 유린하고 짓밟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지막 자존심은 무엇입니까? 차가운 현실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소유입니까?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죠.

여러분, ‘O, X’로 해주세요 !!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이 히브리서 11장 38절의 말씀을 가지고 세례문답시간에 ‘O, X’로 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에 동의하시면 O표, 동의하지 않으면 X를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받아보니 전부가 다 O표라는 겁니다. 무슨 그런 기적이 다 있느냐는 말이죠(ㅋㅋ).

물론 내일 세례를 받으려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반대를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겁니다. 보통 하루 전날인 토요일에 문답을 한다는 말이죠. 자기도 나이가 15살이 되었다고 하면서 세례를 받으려고 온 고등부 학생도 다 O표라는 말이죠. 그런데 3년이 지나니 그만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자기 힘으로 순교하라는 것이 전혀 아닌데, 만약 자기 행위로 순교하면 그 순교도 자기 의가 된다는 말이죠. 즉 “내가 핍박을 이겼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핍박을 이긴 것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존심이지, 결코 믿음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차가운 현실을 바라보고, 주님이 하신 일을 바라봐야 하는데, 즉 요한계시록 20장을 보라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가 금이빨을 하던 무좀에 걸리던, 그것은 개의치 않고 일관되게 밀어 부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은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죽던 교통사고가 나서 죽던 간에 말이죠. 이것이야말로 누가 뭐라고 해도 차가운 현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한 마리의 참새도 키우시고, 내일 사라질 들풀이라도 오늘까지는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다해서 키우시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고 엄청나다는 말이죠. 믿음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그런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소해도 자기의 개인적인 것을 믿는데, 하지만 믿음이 있는 자는 그런 것은 발로 차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그 원대한 계획을 자기의 계획으로 시원하게 받아들여서,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오늘 본문 35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부활’로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죠.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여자들에게는 자식이 전부인데, 그래서 자기 자식을 건드리면 자기를 건드리는 것 이상으로 흥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미친다는 말이죠.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당시의 예수님 !!

그런 경우가 엘리야와 엘리사 시절에 있었는데, 두 선지자에게 잘해주었던 여인들이 있었는데, 엘리야도 있었고 엘리사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하나같이 그녀의 가정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미 죽은 아들 위에 자기 몸을 덮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도로 살려낸다는 것이죠. 둘 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말이죠.

(왕상 17: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왕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녀의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그것은 부활이 분명히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선지자는 개별적인 복을 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파견된 분들이 전혀 아닌데, 그들은 보편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이란 겁니다. 그리고 그 보편적 진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당시의 예수님인데, 이들이 행하는 일을 통해서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단지 자기 아들이 죽어서 다시 살아난 것이 복이 아니라, 부활의 세계, 즉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의 세계를 엿보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단순한 소생이 아닌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봐야 역시 더러운 세상인데, 그게 무엇이 그리 좋겠느냐는 말이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망이 아닌데, 믿는 자에게는 첫째 부활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엄연히 둘째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변비에 걸릴 일이 있습니까? 왜 용을 쓰느냐는 겁니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서 !!

교회에 왜 나옵니까? 무엇을 얻어야 하는데, 무엇을 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처세술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까? “하면 된다” 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나옵니까? 그런 것은 분리수거를 잘 해서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고개를 숙인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담아서 버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는 부활의 소식을 가득히 채워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도 좋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가 되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아들이 죽는 수모는 뒤이어 나오는 선지자들이 당했던 수모와도 동일한 것인데, 이사야서 20장에 보면,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가 나옵니다. 히브리서의 경우에는 압축적으로 나와있는데, 보편적이니 말이죠. 그런데 선지서는 아주 구체적인데,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사 20: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사 20: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발가벗고 3년을 살아야 하느니라 !!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가 벗은 몸으로 3년 동안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는 무엇이 기적인고 하니,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자기가 벗은 몸으로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죠. 즉 “지금 너희들이 대단한 줄 알지만, 너희들은 현실을 모른다. 그것이 궁금하지? 내가 미리 보여주겠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나처럼 발가벗기게 된다. 그 좋은 것들은 다 빼앗기고 만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애굽과 구스의 미래상이 결국은 자기 꼴이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말이 3년이지 그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이사야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군에 가본 사람들은 다 아는데, 3년이 얼마나 긴지 모른다는 말이죠. 조폭의 세계에서 3년을 견디려고 하니, 그게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는 겁니다. 군대는 모든 조직원들이 폭력배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그야말로 지옥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에는 한 수 더 뜨는데,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낮에 제대로 잤겠습니까? 여기서 에스겔서 4장을 보겠는데, 4절과 5절입니다.

(겔 4:4)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 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겔 4:5)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울지마, 에스겔 !!

그러니 자기는 자는데, 390일 동안 바로 눕지 못하고 모로 눕는, 그야말로 편치 못할 밤잠을 자야만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이, 앞으로 이처럼 편치 못할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또한 그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울지도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의 아내의 죽음은 에스겔의 개인적인 가정의 일에 머물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극도의 슬픔의 날이 곧 이스라엘에게 찾아든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왜 울면 안 됩니까? 그것은 바로 당연히 벌을 받아야할 자들이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억울해야 울든지 말든지 하는데, 그리고 이것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말은 쉬운데, 즉 “내 아내가 죽은 것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자기 아내와 있었던 추억들이 자기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결혼을 해서 피지에 신혼여행을 갔고,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던, 그런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고 울지 말라고 하시는데, 즉 “에스겔아, 너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데, 너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부활의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임을 지고서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힘든 삶이냐는 말이죠.

예레미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예레미야서 20장 7절에서 9절입니다.

(렘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 20: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여기 9절에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데, 즉 예레미야는 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욕만 바가지로 들으니 말이죠. “이 미친놈아, 니가 돌았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여기에는 예외가 없는데, 그래서 너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물론 홍길동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무좀에 걸린 것과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경우라는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들이 당했던 그 고통과 아픔은, 그것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살려주기 위해서인데, 그래서 그들은 그런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다는 겁니다. 즉 “그들이 고생함으로 우리가 편하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러분,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무슨 개인적인 이익을 챙겼습니까? 믿음으로 살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엇을 얻었느냐는 말이죠.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렇게도 얻은 것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챙겼느냐는 겁니다.

모세가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하나님 백성과 고난을 받기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긴 것도, 그것은 바로 부활, 그게 둘째 부활이라는 말이죠. 모세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길을 갔고,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자 !!

그러니 우리가 속으면 안 되는데, 성경말씀을 봐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남들에게 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에 속는데, 그것을 현실이라고 하면서 억지로 전환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주님이 살려주시는 대로 감사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러면 둘째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나 자식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과 수모를 억지로 하지 마시고, 솔솔, 그야말로 용쓰지 않은 채로 나오는 자가 바로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차가운 현실을 바로 알기를 소원합니다. 목사에게 속았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그 원대한 계획 앞에서 마치 한 마리의 참새처럼, 감사하면서 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21 오전 10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