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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11:32-34) 사사의 믿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32-34) 사사의 믿음

정인순 2010. 9. 5. 12:00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9강-히11장,32-34(사사의,믿음)-heb020609.mp3

 

 

사사의 믿음

 

2002년 6월 9일 49강

 

본문 말씀 : 히 11:32-34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려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죽고 사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최종적인 관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봤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 문제될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60억 인류가 달려들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예수님이 단번에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가 뭐래도 결국 승리자입니다. 사람들은 실패할까봐 지레짐작 걱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실패라는 말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라 할지라도 수시로 걱정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욕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욕심이란, 없는 걱정거리를 새삼스레 따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실패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도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실패의 경우를 일부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흔히 욕심을 채우는데 돈을 많이 투자하시는데 사실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반대로 사세요. 욕심을 없에는데 돈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투자해도 그것은 결코 손해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패라고 간주되는 곳에서도 아름다움이 얻어진다면 더 이상 무슨 실패가 남아 있겠습니까! 이미 영생을 얻은 자에게는 욕심이란 병처럼 남아 있는 겁니다. 일부로 병걸리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해방해 주었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더라도 너는 좋은 상태야!"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욕심같은 것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우깁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답답할 일입니다. 우리는 생기는 욕심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성도를 아예 욕심과 싸울 필요도 없고 싸울 이유도 없는 사람으로 바뀌어 놓았습니다. 욕심은 자꾸만 생깁니다.

 

따라서 다 해결해서 행복할 생각을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면, "아 내가 쓸데없는 것과 싸웠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똑바로 봅시다. 허황된 자기 자신을 연상하지 맙시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자신을 똑바로 알기 위해서 있습니다. 엉뚱한 초상화를 염두에 놓지 마세요. 우리 자신은 죄인이며 예수님을 알아서 영생의 사람이 된 것을 깔끔하게 알면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성공된 미래만 남아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여러 가지 사람들이 나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처럼 말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등장됩니까? 왜 과거의 위대한 영웅들이 안나오고 이들이 나와야만 합니까?

 

인류사에 나오는 영웅들은 흔히 온 인류가 흠모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흠모한다는 것은 각자 각자의 욕심이 그들 속에서 구체화되고 발견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미처 달성하지 못한 것을 저 쪽에서 해내니까 부럽고 흠모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등장 하는 인물들은 하등 흠모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3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누군가와 싸웠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싸움은 자신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싸움은 생명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가장 소중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세상적인 것을 찾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기드온의 경우부터 봅시다. 이 분의 싸움은 자신이 원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서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단은 다름아닌 바알의 제단입니다. 그 당시의 바알 종교한 오늘날 한국 교회와 같습니다. 평소에 자신의 뜻대로 잘 안되고 걱정되는 사항을 골라서 그것을 들고 제단 앞에 나아와 신에게 비는 그런 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 제단을 부수고 그 부서진 제단 위에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려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 그 바알의 제단을 부숩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바알 집단과 세상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원치 않는 싸움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과 자신이 함께 하심의 증거을 얻기 위해 솜뭉치에만 이슬이 맺히고 주변 땅은 마짝 마른 기적을 요구하고 또한 반대되는 경우도 요구합니다만 하나님께서 둘 다 이루어주어서 결국 기드온으로 하여금 미디안 나라와 싸움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32,000명이 몰려 왔지만 하나님이 돌려보내라 해서 무려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도 많다면서 결국 300명만 남깁니다. 그 남은 300명은 다른 무기는 없이 횃불과 나팔와 항아리를 들게 합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메뚜기 같은 미디안 대군을 이길 수 있을까요? 사실 미디안 진영에서는 자기네들 끼리 기분나쁜 꿈 이야기가 돌아다녔습니다. 보리떡이 이스라엘 진영에서 굴러와서 자신의 진영을 다 부순다는 꿈입니다. 정말 그 꿈이 현실처럼 될까봐 걱정하는 차에 한 밤 중에 갑자기 횃불이 비치고 나팔소리가 들려오니 미디안 군대는 자기네들 끼리 찌르고 찔려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입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적들만을 상대로 전쟁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전쟁에 참여케 하셔서 진정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있어 어떠한 인간인가를 또다시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이미 생명의 하나님이 함께 있는 자기 자신들임을 바로 파악하게 하는 목적의 전쟁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믿음의 요소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바락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은 이스라엘에게 많은 조공을 요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락에게 그 가나안 왕을 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겁쟁이 바락은, 자기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믿지를 못하고 더 훌륭한 선지자로 간주되는 여자 사사 드보라에게 함께 가기를 요구합니다.

 

이로 인해 바락 전쟁은 여인의 전쟁이 되어 버립니다. 즉 시스라 라는 적장의 목숨은 군대장관 바락에 의해 처단되는 것이 아니라 야엘이라는 어떤 시골 여인의 손에 의해 제거됩니다. 전쟁에 패배하고 쫓긴 시스라 장군은 목이 말라서 어떤 시골 여인에게 물을 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숨겨줄 것을 당부하고 곧장 잠을 잤습니다.

 

야엘이라는 시골 여인은 천막 말뚝으로 그 적장의 배에다 꽂아버립니다. 뒤늦게 바락, 장군이 현장을 덮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신 전쟁이라면 연약한 시골 여인이라고 적의 장군을 치고 승리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락 장군은 이 사실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이 없을 때는 믿음 있는 타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한결 같은 자기 일을 이루어간다는 사실말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깨닫게 하신 겁니다.

 

세 번째 경우는 삼손입니다. 삼손은 3명의 여인을 거쳐오면서 망해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주신 힘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해 버립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힘은 아름다움의 여인의 유혹에 패배하여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마저 잘리고 두 눈 알마저 뽑히는 수모를 당합니다.

 

세속적인 힘 사용으로 세상적인 힘을 이기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자라난 그 머리카락의 힘을 가지고 삼손은 진정 이스라엘을 위한 힘 사용에 나섭니다. 물론 그 자신도 적들과 함께 죽게된다는 것을 각오한 최후입니다. 이처럼 삼손에게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힘은 결코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네 번째 경우는 입다입니다. 암몬 종족들이 이스라엘 땅을 괴롭히니 평소에 남들로부터 미움받은 입다를 사람들이 찾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깡패같은 기질이나 거친 힘 사용이 적을 막는데 도움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입다는 일단 거부합니다. 그래서 지역 장로들은 그에게 약속하기를 승리하면 그 지역의 장이 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이 제안에 기분이 좋아진 입다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허세를 부립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셔서 승리케 해주신다면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 그 집에 있는 종이나 아니면 개나 가축 종류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런 세상에 무남독녀 딸이 자기를 마중 나오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입다는 하나님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전환하려고 거만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가 자기 집안의 대대로 슬픔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분입니다. 입다의 딸은 도리어 아버지에게 당부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약속대로 자신을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처녀로 죽는 것이 안타까와서 두 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를 요청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이 입다 딸의 죽음을 연레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입다는 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입다의 믿음입니다.

 

 

다섯 번 째로 다윗입니다. 소년 다윗은 장정들 틈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무장한 이스라엘 장군들은, 자신들다 더 덩치가 큰 골리앗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을 때, 진정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참된 현실인가를 소년 다윗이 보여주었습니다. 짐승들을 쫓아내는 조그마한 돌멩이 가지고서도 거인 골리앗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결코 힘의 우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사무엘의 경우입니다.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의 한이 맺혀 있는 인물입니다. 자식이 없기에 주위로부터 당하는 수모를 한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이겼습니다. 즉 세상적인 자식 유무가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결정해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늘 등장하는 이들은 세상적으로 대환영받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이들을 소개합니까? 그것은 그들은 하늘 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 나서서, 세상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성공이 아님을 그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가르쳐주는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말게 해주시고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우리 자신을 똑바로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9. 사사의 믿음(히 11: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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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 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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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신 영생 !!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죽고 사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인데, 우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그 바깥에 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말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만약에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문제될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겠죠.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는데, 60억의 인류가 달려들어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류의 그 마지막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해결을 해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은 승리자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면 실패를 할까 싶어서 미리 걱정들을 많이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실패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실패와 그로 인한 공포는 예수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또한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미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말이죠. 그게 바로 ‘영생’ 이라는 겁니다.

‘욕심’ 이라는 병 !!

물론 성도라고 해도 수시로 걱정을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에게 은근히 다른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것을 ‘욕심’ 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욕심이란 없는 걱정거리를 새삼 따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인데, 정말로 어리석다는 말이죠. 믿는 자에게는 실패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욕심으로 인해서 실패를 일부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돈들을 많이 투자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오히려 그 반대로 해야하는데, 욕심을 없애는데는 아무리 투자해도, 그게 돈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결코 손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실패라고 간주하는 곳에서도 아름다움이 얻어진다면, 더 이상 무슨 실패가 남아있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영생을 얻은 자에게도 욕심이 마치 병처럼 남아있는데, 그렇다고 일부로 병에 걸리려고 하지는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방시켜 주셨는데, 즉 “욕심을 부리지 않더라도 너는 좋은 상태야!” 라고 말이죠. 그래도 우리는 욕심을 부리는데, 그래서 “내가 실패한 것은 아닌가?” 라고 나오는데, 참으로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겁니다.

왜 그러한 일들이 생깁니까? 우리는 생기는 욕심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말이죠.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것이 또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면 또 다른 것이 생긴다는 말이죠. 이 욕심이 원인이 되어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것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욕심을 부릴 자격도 되지 않는데, 굳이 욕심을 부릴 이유도 없고 말이죠. 그런데 그만 착각을 해서 “나는 욕심을 부릴 수 있어. 반드시 쟁취해야해. 거기에 사는 즐거움이 있어” 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패가 없는 인생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아예 욕심과 싸울 필요도 없고, 싸울 이유도 없는 사람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죠. 물론 그래도 욕심은 자꾸만 생기지만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바로 자기가 만든 욕심과 싸운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이겨도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모두 다 해결해서 행복해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똑바로 알면 되는데, 그러면 “내가 쓸데없는 것과 싸웠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자신을 똑바로 봐야하는데, 허황된 자기 자신을 연상하지 말자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자신을 똑바로 알기 위해서 있는데, 그러니 엉뚱한 초상화를 염두에 두지를 마세요. 자기 자신은 죄인이며,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깔끔하게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실패는 없는데, 성공된 미래만 남아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본문 32절을 보겠습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이 말이죠. 그러면 왜 이런 사람들이 등장됩니까? 역사의 위대한 영웅들이 나오지 않고, 왜 이러한 자들이 나오느냐는 겁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런 사람들 말고, 이순신, 세종대왕, 그리고 징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 에디슨, 아인쉬타인 등등,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히틀러는 좀 그렇지만 말이죠. 아무튼 우리가 흠모하는 사람들은 없고, 별 볼이 없어 보이는 자들만 이렇게 성경에 나오느냐는 말이죠.

인류의 역사에 나오는 영웅들은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자들인데, 하지만 흠모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각자 각자의 욕심이 그들 속에서 구체화되고 발견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미처 달성하지 못한 것을 저쪽에서 해내니까 부럽고, 그래서 흠모한다는 말이죠.

밋밋한 싸움꾼들 !!

거기에 비해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밋밋한 자들인데,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34절을 보겠습니다.

(히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들은 누군가와 싸웠던 자들인데, 그런데 이들이 싸웠던 그 대상과,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싸우는 대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웠던 목표, 즉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싸우는데,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너희는 누구다” 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이 있음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드러내는, 그런 싸움을 했다는 겁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싸움이 아니고 말이죠. 이미 우리 자신에게 접촉한 하나님의 영생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것을 남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한 싸움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것은 이들에게 없는데, 우리가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오페라 ‘투란도트’ !!

지난 금요일에 두류공원에서 ‘투란도트’ 라는 오페라가 있어서 구경을 갔는데, 공짜라서 가볍게 갔다는 겁니다(ㅋㅋ). 대구지역의 성악과 교수들이 모여서 한 공연인데,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라고 하는 유명한 아리아도 있고 말이죠. 조금 과장을 하면 약 3만명 정도가 왔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고 하니, ‘투란도트’ 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있는데, 그런데 성격이 매우 고약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우자는 구하는데, 어떻게 하는고 하니, 수수께끼를 3가지 내어서 맞추지를 못하면 그만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죽을 각오가 없으면 자기에게 결혼을 신청하지 말라는 것인데, 즉 일종의 공주병인데, 물론 실제로 공주니까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페르시아의 왕자가 지나가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마음가짐으로 3가지 수수께끼를 풀고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데, 하지만 공주는 여전히 콧대가 높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 하녀의 죽음을 통해서 공주는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결혼에 성공하는데,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친다는 것이죠.

저는 그것을 보면서 참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죠. 왜 잠언서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여자의 이름다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이것이 잠언서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데, 과연 이것이 오늘날 성형외과 의사나 젊은 아가씨들에게 얼마나 어필이 되겠냐는 겁니다. 그러니 전체가 욕심으로 가득한데, 오페라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아가씨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성형수술을 한다고 하는데,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인데, 그러니 당연히 지옥에 갈만한 사람들만 완전히 득세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줘도 전혀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제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봐야, “삼손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는데? 바락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는데?” 라고 하면서, 자기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욕심을 달성하려고 나온다는 말이죠. 심지어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과 성경까지도 동원한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잠시 야구경기를 !!

이제부터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저는 전혀 시간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을 일일이 다 해드리겠다는 말이죠(ㅋㅋ).

이들이 싸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신들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터 싸움을 거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준 사람을, 천국에 보내주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조금 전에 지옥과 같은 세상이라고 했는데, 이 세상이 곧 지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뽑힌 자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만든다는 말이죠.

1번 타자, 기드온 !!

첫 번째로 ‘기드온’의 경우부터 봅시다. 이 양반은 방앗간 주인인데, 그러니 방앗간이 잘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뿐이라는 겁니다. 싸울 마음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싸움이 자기가 원해서 시작된 것이 전혀 아닌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단은 다름이 아닌 바알의 제단인데, 그 당시의 분위기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와도 같은데 말이죠. 평소에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고 걱정되는 사항만 골라서, 그것을 가지고 제단 앞에 가서 신에게 비는, 그런 식의 종교가 바로 바알 종교라는 겁니다. 갓바위라고 보셔도 되고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사업이 안 되는 사람은 사업문제를,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은 건강문제를,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식문제를, 그런 것들을 교회에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에게 빈다는 겁니다. 설교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죠. 그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현주소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고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즉 실패자가 아님을 확인하고자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 제단을 부수고, 그 부서진 제단 위에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부수는데, 그러니 당연히 바알의 집단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살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기드온은 졸지에 원치 않는 싸움에 돌입하게 된다는 말이죠.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부수는 것이 취미가 아닌데, 그냥 포도나 잘 수확해서 그것을 타작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전쟁에는 덜렁 나설 수가 없는데, 자기 주특기가 아니니 말이죠. 그래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버티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겠다고 하면서 하라고 부추긴다는 말이죠.

그러자 기드온이 조건을 걸었는데, 건방지게도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솜뭉치에만 이슬이 맺히고 주변의 땅은 바짝 마르는 기적을 요구하는데, 그러자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이죠. 만약에 우리라고 하면 “하나님, 잘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기드온이 그게 아닌데, 왜냐하면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원래 솜이라는 것이 습기를 잘 빨아 당기는 성질이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그와 반대되는 경우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래서 솜뭉치는 바짝 마르고 그 주변의 땅은 촉촉하게 젖게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태도이기도 한데 말이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것도 역시 들어주심으로서, 결국 기드온으로 하여금 미디안 나라와 전쟁에 나서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때 기드온의 마음가짐은 “내가 하나? 하나님이 하시지”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일상이 전혀 없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현장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 !!

그래서 기드온이 군사를 모으는데, 처음에는 32,000명이 몰려왔지만 하나님이 돌려보내라고 해서 무려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32,000명도 모자라는데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것도 많다면서 개울가에 가서 물을 떠먹게 해서, 손으로 떠먹은 자들을 택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결국 300명만 남기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숫자가 적은 쪽을 남기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은 300명은 소수정예 부대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들은 무기도 전혀 없이, 횃불과 나팔과 항아리를 들고 전쟁에 나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식으로 해서 메뚜기와 같은 미디안의 대군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워낙 이방 나라들과 하는 짓이 똑같으니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좀 알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세월을 따라 바람을 따라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이 살지 말고, 특이한 자로서 좀 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기드온은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몰래 적의 진영을 가보았는데, 당연히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보니 자기들끼리 난리라는 말이죠. 그때 미디안 진영에서는 매우 기분이 나쁜 꿈 이야기가 돌아다녔는데, 보리떡이 이스라엘 진영에서 굴러와서 자기들 진영을 그만 다 부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말 그 꿈이 현실이 될까봐 걱정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밤중에 횃불이 비치고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하니까, 미디안 진영에서는 “야, 꿈이 현실이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겁에 질려서, 그만 자기들끼리 찌르고 찔려서 모두가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축구에서는 ‘자책골’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전쟁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이 아무리 갓바위를 선호하고 돈을 좋아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최종적인 승리인데, 이미 확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욕심을 낼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토록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러면서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하는, 그런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다는 말이죠.

2번 타자, 바락 !!

두 번째 경우는 ‘바락’ 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이 이스라엘에게 많은 조공을 요청했는데,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바락에게 가나안 왕을 칠 것을 명령하시는데, 그러나 겁쟁이 바락은 자기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여자 사사인 ‘드보라’를 찾아간다는 말이죠.

찾아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자의 치마를 붙들게 되는데, 제발 같이 좀 싸워달라고 말이죠. 그러자 드보라가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슨 걱정이고?” 라고 하는데, 그래도 바락이 벌벌 떨자, “그래, 알았겠습니다. 제가 가기는 가는데, 이번 전쟁은 당신의 승리가 되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전쟁은 그야말로 여인의 전쟁이 되어버리는데, ‘시스라’ 라는 적장의 목숨이 총사령관인 바락 장군에 의해서 장렬하게 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야엘’ 이라고 하는 시골 여인의 손에 의해서 제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전쟁에서 패배하고 쫓긴 시스라 장군이 목이 말라서 어떤 시골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데, 그리고 자신을 숨겨줄 것을 당부하고 곧장 잠을 잤다는 겁니다. 그러자 이 ‘야엘’ 이라는 아줌마는 천막의 말뚝을 적장의 관자놀이에 그만 박아버리는데, 그야말로 엽기적인데 말이죠. 뒤늦게 바락 장군이 그 현장을 덮치게 된다는 겁니다.

여인천하 !!

하나님의 명령은 바락에게 떨어졌는데, 정작 그 일은 시골 아줌마가 다 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어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신 전쟁이라고 하면, 아무리 연약한 여인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적장의 목을 벨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락 장군은 이 사실을 보았고 또한 믿었는데, 즉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았다는 말이죠. 자신이 믿음이 없을 때는, 믿음이 있는 타인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기어이 한결 같이 자기 일을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능함을 여인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다는 겁니다.

3번 타자, 삼손 !!

세 번째 경우는 ‘삼손’ 입니다. 삼손은 여자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물론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지만 말이죠. 3명의 여인을 거쳐오면서 그만 망해버린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3명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지 싶은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주신 힘을, 그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을 차지하는데 그만 사용해버린다는 겁니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용도로 말이죠.

블레셋을 공격하는 이유도 무엇인고 하니, “내 여자를 왜 건드려?” 라고 하면서 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귀뼈를 가지고 수 천명이나 죽인다는 말이죠.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나?” 라고 하면서 수수께끼를 내는데, 하지만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만약에 맞추지를 못하면 그 대가를 요구하는데, 완전히 깡패라는 겁니다. 아니 아침에 자기가 무엇을 먹었는지, 가족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망나니짓이 세 번째로 넘어오면서, ‘들릴라’ 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만 그 미모에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힘은 아름다움의 여인의 유혹에 패배해서, 그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마저 잘리고, 그리고 두 개의 눈알마저 뽑히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힘보다 세속적인 힘이 더 큰 유혹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그러니 누가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느냐는 말이죠. 인간은 결코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비단 삼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잘렸든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나게 되는데, 이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삼손은 그 조금 자라난 머리카락의 힘을 가지고서, 진정 이스라엘을 위한 힘 사용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그 자신도 적들과 함께 죽겠다는 것을 각오한 그의 최후이기도 한데 말이죠.

그래서 삼손은 기둥을 끌어안고서 자폭을, 아니 순교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삼손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힘은 결코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아는데 있었다는 말이죠.

4번 타자, 입다 !!

네 번째 경우는 ‘입다’ 입니다. 이 사람은 진짜로 깡패두목인데, 집안에서 그만 쫓겨나서는 깡패들과 함께 살았다는 겁니다. 힘에 세서 두목이 되었는데, 그러니 동네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누가 깡패두목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니, 평소에 남들로부터 미움을 받던 입다를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아무래도 깡패와 같은 기질과 힘이 적을 막는데 도움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하지만 입다는 일단 거부하죠. 미워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왜 찾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제안을 하기를, “당신이 승리하면 길르앗 동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해주겠소” 라고 하는데, 깡패들의 두목이 아니고 말이죠.

이 제안에 기분이 좋아진 입다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허세를 부리는데, “만약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을 번제로 바치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는 그 집에 키우던 개와 같은 가축 종류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서 드디어 전쟁에 승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무남독녀 딸이 자기 아버지를 그만 마중을 나온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죠. 입다는 하나님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전환하려고 거만을 떨었는데, 그러나 그런 전쟁의 승리가 자기 집안에 대대로 슬픔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영광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분인데, 그래서 입다의 딸은 도리어 아버지에게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가 주저주저하자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저를 번제로 드리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죽고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딸이 아버지를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처녀로 죽는 것이 안타까워서 두 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를 요청하는데,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입다의 딸의 죽음을 연례적으로 슬퍼하면서 기념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입다는 자기 딸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입다의 믿음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세상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비록 깡패의 두목이라고 해도, 그 주위에 깔려있는 희생자를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러한 분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5번 타자, 다윗 !!

다섯 번째로 ‘다윗’ 입니다. 다윗의 하이라이트는 ‘소년 다윗’에 있는데, 그는 어른들 틈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증거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완전 무장한 이스라엘 장군들이, 자신들보다 더 덩치가 큰 골리앗 앞에서 주눅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힘으로 이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더 힘이 센 ‘골리앗’ 이라는 적을 등장시킨다는 말이죠.

그래서 진정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참된 현실인지를,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를, 그것을 전혀 무장이 되지 아니한 소년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년 다윗은 짐승들을 쫓아내는 그 조그마한 돌멩이 가지고서,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으로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것은 다윗의 힘이 아니라, 다윗은 소년이지 박찬호가 아니라는 겁니다. 돌멩이가 알아서 골리앗의 약점을 찾아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던지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왜 그렇습니까? 힘을 우선하는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결코 힘의 우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무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심지어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전세는 고사하고 달세방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도 부활하셔서 천국에 가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이죠. 그러니 이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6번 타자, 사무엘 !!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로 ‘사무엘’ 입니다. 사무엘은 그 어머니인 한나는 한이 맺혀있는 인물입니다. 자식이 없기에 주위로부터 당하는 수모를, 그것을 한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이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의 이름을 ‘한나’ 라고 지으려면 이런 각오를 하고 지으라는 것이죠. 무늬만 한나로 하지 말고 말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지을 마음이 전혀 없는데, 진주가 얼마나 좋으냐는 겁니다(ㅋㅋ).

‘서편제’ 라는 영화를 보면, 여자 주인공이 창을 배우는데, 그런데 한이 맺히지 않으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는고 하니까, 그만 독약을 먹여서 자기 딸을 장님으로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참으로 지독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도 이에 못지 않게 지독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자식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녀가 정실 부인인데도 말이죠. 그러니 다른 첩들이 얼마나 놀리는지 모릅니다. 신랑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자식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그래서 한나가 한이 맺혀서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이 맺혀서 나은 자식이 바로 ‘사무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자식은 제가 낳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수소 세 마리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겁니다. 그런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고 이웃을 어떻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사용을 하신다는 말이죠. 가족을 떠나서 쓸쓸하게 자기 길을 간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인물들, 그들이 무슨 위인입니까? 세상적으로 환영을 받을 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이들을 소개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이 세상의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그런데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인데, 그러니 이 세상에 주눅이 들지 않고 넘치는 자신감으로 남은 생애를 감사함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8 오후 8시에 마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