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11:29-31) 라합의 믿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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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라합의 믿음
2002년 6월 2일 48강
본문 말씀 : 히 11:29-31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교회는 구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 안착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원되지 못하는 교회는 친목 모임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천국 갈 수 있는 교회인지 아닌지가 어떻게 구분됩니까?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미 천국에 간 분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거기에 갔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원리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형식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인간들이 형식에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이란 그 때 뿐입니다. 지나가면 소용없는 형식이 됩니다. 형식 말고 다른 원리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찬송가 233장에 보면,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황무지에서 어떻게 장미꽃이 핍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원리로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기적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길 가에 피어 난 이름 모를 들풀이 솔로몬의 입은 옷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행함에 나온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입혀진 그 상태 자체가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원리만이 교회를 구원시키는 원리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보쌈을 하듯이 우리를 감싸는 겁니다. 31절에 보면 기생 라합에게 있어 그 사랑이란 자기를 찾아온 두 정탐꾼으로 본 것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형식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냥 영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말입니다.
기생 라합은 어떻게해서 무작정 이 두 사람을 숨겨주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영접이 과연 쉬운 일이라고 여기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에 관해서 세 가지 경우가 나와 있습니다. 첫 번 째 경우는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다는 대목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가장 어려운 기적이라고 보십니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홍해 물이 둘로 짜개지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로 보일 것입니다. 지각 대 변동입니다. 세상에 흐르던 바닷 물이 졸지에 갈라서서 서로 마주보며 벽을 이루다니요! 정말 대단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여리고성의 무너짐은 아무래도 보다 작은 기적처럼 느끼겠지요. 기껏해서 인공 구조물의 붕괴에 지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정탐꾼을 숨겨주는 기생 라합의 행동은 전혀 기적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서로 위해주고 돕고 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깥 상황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은 사실 큰 믿음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놀랍게도 바닷물이 갈라져도 그러나 그렇게해서 드러난 바닥은 평범한 땅입니다. 다리가 성한 자가 단단한 땅을 못 걷겠습니까? 당당하게 그 바다 물 한가운데로 걸어가면 됩니다. 결코 마음이 달라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실제로 이들 홍해 바다를 건너온 자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과연 이래도 큰 기적입니까?
두 번째 여리고성을 도는 일도 큰 믿음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전혀 군사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이것이 보통 큰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마음이 달라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성을 돌면 그만입니다. 무너지고 아니 무너지고는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기적인 정탐꾼을 영접하는 일은 참으로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그 정탐꾼을 영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은 자기 집에 들어온 정탐꾼을 자신과 그 가족이 구원받는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기존에 자신이 누리고 왔던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홍해 바다 속으로 걸어가고 여리고성을 도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기적입니다. 그리고 정탐꾼은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킬 나라에서 파견된 자입니다. 애국심을 발휘해서 그 사람을 신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생 라합은 오히려 그 두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 나라를 포기했다는 것이 됩니다. 도대체 기생 라합은 무얼 믿고 자기 나라를 버립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나라는 멸망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즉 나와 내 가족을 이 나라에서 빼내어 달라는 차원에서 두 정탐꾼을 숨겨준 것입니다.
정탐꾼 보낸 나라는 단순히 이웃의 낯선 나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심판하실 분이 만드신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렇다고해서 홍해 기적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교회라는 것은 구원의 원리를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 구원의 원리 안에 홍해 기적을 통해서도 주어지는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뒷 부분입니다. 즉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 가운데로 난 그 땅을 결코 애굽 사람에게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시켜서 구원하신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도 구원의 원리에 포함되는 요소입니다.
같은 바다 속의 땅인데 왜 히브리인은 그 땅을 밟으면 되고 왜 애굽 사람들은 그 땅을 밟으면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따르는 원리는 두 번째 기적인 여리고성의 함락에서 보여집니다. 여리고성을 함락 시키는데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언약 궤였으며 다른 하나는 나팔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앞장 서 나가는데 있어 여리고 성은 결코 막아설 수도 없고 또한 멸망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란 언약에 따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팔이란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심판하실 때 하늘에 나팔소리가 들려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고 손수 일하신다는 선언이 곧 나팔을 부는 일입니다. 사람은 손 대지 말라는 것입나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한다는 겁니다. 여리고성의 무너짐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리고성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야 합니까? 그것은 제사장의 존재를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제사장처럼 거룩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멸망받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온통 거룩으로 뒤집어 쓴 사람입니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내의까지 모두 거룩한 옷이요 그리고 신체에도 기름과 피를 직접 발라서 죄를 씻고 거룩이 유지되게 한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성의 함락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않는 모든 것은 무너진다는 점을 앞 당겨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고 이러한 여리고성의 함락은 약속의 땅에서 무너져야 될 모든 성들의 운명을 대변해 주는 일입니다. 거룩하지 않는 것은 다 무너져야 한다는 요소가 구원의 요소에 역시 포함됩니다.
세 번째로, 기생 라합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마음 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정탐꾼을 마치 구원자 모시듯이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생 라합은 그 정탐꾼과 약조를 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은 창문에서 줄을 풀어서 생명을 건져준 것처럼 곧 이어 이스라엘이 쳐들어 욌을 때도 자신과 그 가족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그 증표가 바로 창문에 붉은 줄을 늘어뜨리는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 자신과 정탐꾼처럼 생명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이 기생 라합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휴유 살았다. 이제 안심이다"라는 마음가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파견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도 이런 마음 가짐이어야 합니다. "휴우, 살았다. 이제는 살았단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이런 마음 가짐과 믿음 갖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온 국민이 월드컵에 관심이 있는데 경기가 벌어지는 거대한 경기장 뒤편에서 어떤 술집 여자가 줄을 잡고 있고 어떤 하늘의 종, 두 사람이 줄을 타고 몰래 탈출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우리가 이런 이상한 현상에 마음이나 두겠습니꺼? 정말 대수롭지 않는 일로 여길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의 관심사가 거대한 환경의 변화, 즉 홍해가 갈라진다든지 아니면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데 관심을 두지 있지 과연 우리 자신들의 마음 가짐이 바꿔서 메시야를 반갑게 쉽게 영접하는데 두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볼 때 기생 라합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남들이 관심두지 않는 일에 관심두고 또한 그것을 위해 국가 민족마저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미리 항복해 버리는 이 현실성은, 종교적인 모든 형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우리들도 "정말 다행스럽다"는 감격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갈수록 자신의 마음 변화에는 관심없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행운만 잡으려는 패역한 이 사회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감사하는 이름없는 들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8. 라합의 믿음(히 1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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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인가? 친목단체인가?
교회라고 하면 구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천국에 안착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 믿음과 일치가 될 때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도 넣어주지 못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친목단체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교회인지 아닌지, 그것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우리교회가 최고다. 우리교회에 오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은 성경에 보면 먼저 천국에 간 분들이 나오는데, 즉 이미 천국에 간 사람들이 어떤 원리로 갔는지를 알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원칙과 규칙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증거하면, 그게 교회다운 교회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자체를 자랑하면 안 되고, 성경에 어떤 원리와 원칙이 있는지, 그게 왜곡됨이 없이 낱낱이 펼쳐질 때, 그런 사람은 교회를 믿는 게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성경에 나와있는 구원의 길, 그 원리원칙을 인수인계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개인의 교회고 그 마음이 곧 교회인데, 그런 자들이 모이게 될 때 그게 진정한 ‘교회’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구약 때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어떤 원리원칙에 의해서 받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에는 형식이 없다는 겁니다. 즉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형식에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구원과 그 형식, 그리고 사랑 !!
방금 이것을 이상하다고 했는데, 이것이 왜 이상합니까? 우리 인간은 어떤 형식이 주어질 때 비로소 안심을 하는, 그런 나쁜 버릇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나쁩니까? “형식도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형식도 없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저는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도 아는데, 하지만 서로 사랑을 하면서 주고받고 하는 것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야말로 우리를 보쌈해서 데리고 가시는데, 그러니 우리가 내민 사랑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게 어떤 반응인고 하니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한데, 즉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임했단다. 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또 어떻게 오해를 하는고 하니까, “예수의 증인이 되어라” 라고 하면, 그러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방법을 나열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첫째는 세례를 받아야하고, 둘째는 집사가 되어야하고, 셋째는 장로나 권사가 되면 더욱 좋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을 모델화를 시키면 안 돼 !!
그러니 예수의 증인을 마치 마네킹처럼 모델화를 시키려고 하는데, 어떤 특정인을 예수의 증인으로 삼아서, 그렇게 시범조교로 여기는 실수를 우리가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되어야지. 한경직 목사님처럼 되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이 세 분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놀라지 마세요.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증인다운 면모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 증인이고 자기 교회의 증인이었는데, 즉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나 같은 인간도 구원을 시켜주었습니다” 라는 것을 옹골스럽게 증거하는, 그런 분들은 전혀 아니더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증인은 오늘도 잡초처럼, 나훈아의 ‘잡초’ 라는 노래도 있는데, 그야말로 이름도 없이 사람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 속에 주님의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데, 29절과 30절을 보겠습니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간단하게 말하면,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풀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낫다” 라는 것인데, 과연 이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행함에 나온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입혀진 상태,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께 영광이란 겁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원리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보쌈을 하듯이 우리를 감싸서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죠.
보쌈구원 !!
이런 것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 그 사랑으로 키워지는 그 무엇, 그리고 그 무엇이 되는 우리, 그럴 때 그게 가장 하나님다움이고 또한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자기가 영업하는 자기 교회의 증인이 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증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형식은 없는데, 형식은 그때뿐이고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형식이 아닌 다른 원리로 구원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형식이 없이 구원받은 것을 구약에서는 ‘황무지’ 라고 하는데, 마침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233장에 보면,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말이죠. 그런데 황무지에서 어떻게 장미꽃이 핍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황무지로 데리고 가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핀다” 라고 하는 원리로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데리고 가셨다는 겁니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그런 기적으로 말이죠. 그러니 형식이나 행함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황무지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황무지에서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오, 놀라워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자기가 교회에 나와서 주특기를 발휘했다고 하는, 그런 것을 계속 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형식은 아냐. 남들이 다 형식을 내세워도 나는 내세우지 않을 거야. 나는 황무지로 남을 거야. 물론 솔로몬의 옷도 좋지만, 하지만 나는 하나의 들풀로 만족하겠어” 라고 하는, 이게 바로 신자라는 겁니다. 자기는 황무지이고 잡초인데, 그러니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냐는 말이죠. 아무런 형식이 없는데, 그런데도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설명해주어야 교회이고, 그리고 교회에 왔으면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반드시 천국에 도착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말하는 원리원칙이 성경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과 일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자들을 보니, 그들은 황무지에서 약속의 땅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원리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로 하여금 힘을 다 빼게 하시는데, 의롭게 되려는, 즉 자기가 잘났다고 내세울만한 요소를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밀어 부친다면 불교가 되고 마는데, 그것은 해봐야 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31절입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기생 라합과 정탐꾼 !!
여기에 ‘기생 라합’이 나오는데, 그녀는 정탐꾼을 영접함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았는데, 즉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정탐꾼을 영접해주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마 “목사님, 참 쉽네요. 정탐꾼이 두 사람이죠? 저도 얼마든지 영접하겠습니다” 라고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기생 라합은 모든 것을 다 포기했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파송한 정탐꾼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고 이미 자기 것이 만족스럽게 구축된 상태라고 하면, 비록 천사가 온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영접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경상도 말로, 그것은 택도 없는 소리라는 말이죠(ㅋㅋ).
그녀에 있어서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찾아온 두 정탐꾼이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형식도 성립되지 않는데, 그냥 영접하는 겁니다. 심지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말이죠. 기생 라합은 어떻게 무작정 두 사람을 숨겨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영접이 쉬운 일이라고 여겨집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왔을 때 롯이 천사를 영접했는데, 그러면 그의 식구들이 다 영접을 했습니까? 롯은 천사가 전한 소식에 의미를 두고, 그게 자기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영접을 했는데, 하지만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창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것은 롯의 사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다들 농담으로 여겼다는 말이죠. 그러니 롯만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농담으로 여기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드릴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생각처럼 쉽게 영접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것으로, 자기가 전도하고 봉사하고 기도한 것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몰라도, 자기가 평생을 교회에 봉사한 것을 일체 묻지 않고 전혀 엉뚱한 것을 들이민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그것은 안 된다는 말이죠.
첫째, 둘째, 셋째 !!
오늘 본문도 그러한데, 역시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는 겁니다. 첫 번째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다는 대목이고, 두 번째는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다는 대목이고, 그리고 세 번째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어려운 기적이라고 여겨집니까? 홍해가 둘로 갈라지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로 보이겠죠. 그야말로 엄청난 지각의 대변동인데, 흐르던 바닷물이 졸지에 갈라지면서 서로 마주보며 벽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여리고 성을 도는데, 처음에는 6일 동안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는 것이죠. 마지막 7일에는 일곱 바퀴를 도는데, 아마 다들 어지러웠지 싶은데 말이죠. 그래도 돌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너지라고 외치니, 그만 성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홍해바다가 갈라진 것에 비하자면 비교적 작은 기적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도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만든 구조물이 무너진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연물이 어떻게 되는 것이 제일 힘들고, 그 다음은 사람이 만든 인공 구조물이 힘들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죠.
기생 라합의 디테일한 거짓말 !!
그러면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만나서 영접하는 문제인데, 그러면 나름대로 생각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저 놈이 정말 정탐꾼인가? 아니면 사기꾼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진짜 정탐꾼이라고 해도 숨겨놓았다가, 국정원 요원들이 찾아와서는 집을 낱낱이 수색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국정원에서 그들을 찾으러 왔다는 말이죠. 그러자 기생 라합은 뭐라고 합니까? “왔기는 왔는데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교인들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라합은 어떻습니까?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다는 말이죠. 그들이 가기는 어디로 갔다는 겁니까? 여전히 자기 집에 숨어있는데 말이죠.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여리고 성의 국정원 요원들도 우리나라의 요원들처럼 참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왔으면 당연히 집안을 조사해야지, 그게 뭐냐는 겁니다. 말만 듣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물론 라합이 일단 왔다고 인정을 하니, 그래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라합의 거짓말이 너무나 구체적이라는 겁니다.
여호수아서 2장 5절을 보면, 그녀가 뭐라고 합니까?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수 2: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수 2: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수 2: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돌아가자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가서 뭐라고 합니까? “이제 그들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대문으로 나가면 안 되니 끈을 달아서 창문으로 해서 나가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방법인데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끈’이 문제가 되는데, 여기서 기생 라합이 말하기를, “앞으로 당신들의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박살을 내는데, 그때 이 끈을 기억해서, 오늘 내가 목숨을 걸고 이 끈으로 여러분을 살려준 것처럼, 우리 가족도 그렇게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이 하나님이 없는 이 더러운 나라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가듯이, 비록 우리나라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엉터리이고, 당신들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데, 그러니 당신들이 줄에 매달려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당신들도 우리는 그렇게 건져줄 것은 맹세할 수 있습니까?” 라는 겁니다. 그러자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맹세의 의미로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수 2:17)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수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그렇다고 하면, 과연 이 세 가지 사건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큰 기적처럼 보입니까? 홍해가 갈라진 것이 제일 큰 기적이고, 그 다음이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고, 그리고 그 다음이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영접한 것인가요? 정말 그런 것입니까? 하지만 믿음의 차원에서 보면, 바깥 상황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것은 큰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이죠.
월드컵과 정탐꾼 !!
그렇다고 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지금 우리나라는 월드컵으로 난리인데, 그런데 이 기생 라합과 정탐꾼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국민들의 관심이 모두들 월드컵에 관심이 있는데, 그런데 경기가 벌어지는 상암 경기장 뒤편에서, 어떤 술집 여자가 줄을 붙잡고 있고, 그리고 하늘에서 파견된 두 사람이 줄을 타고 몰래 탈출한다고 생각을 해보자는 겁니다.
예를 들고 보니 조금 이상하기도 한데, 도대체 그들이 지금 무슨 희한한 짓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지금 사람들이 이런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겠냐는 겁니다. 지금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나라가 16강에 가고 8강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거기서 줄을 매달아서 내려오고 말고 하는 것은 전혀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연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이 바꿔져서 메시야를 반갑게 영접하는, 그런 것에다가 관심을 두겠느냐는 겁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기생 라합의 행동은 전혀 기적처럼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무슨 그런 일을 그렇게 대단한 일로 여기겠느냐는 겁니다.
문제는 관심사 !!
그러니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생각해볼 때 오히려 우리는 기생 라합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일에 관심을 두고, 또한 그것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마저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미리 항복을 해버리는 참된 현실감각, 이것은 종교적인 모든 형식을 뛰어넘는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말이죠.
문제는 관심사인데, 과연 어디에 관심을 두고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이 기생 라합은 무엇을 무엇을 보았느냐는 말이죠. 남들은 월드컵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그런데 왜 밧줄을 내려서 정탐꾼들을 살려주었느냐는 겁니다.
믿음으로, 첫째, 둘째, 셋째 !!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진 것이, 물론 신문에 톱기사로 실릴만한 일인데, 만약에 여기서 일본까지 동해바다가 갈라져서 길이 나면 난리가 나겠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면, 아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오해인데, 자기 내면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환경이 변하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신앙의 황홀감을 맛보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과연 믿음일까요? 그렇게 해서 드러난 바닥은 평범한 땅인데, 다리가 성한 자가 그 땅을 걷지 못합니까? 특별히 헤엄을 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당당하게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가면 되는데, 굳이 마음까지 달라질 필요는 없어요. 실제로 홍해를 건너온 그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까? 그렇지요? 틈만 나면 원망을 했는데,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데, 과연 이래도 큰 기적이라고 할 수 있냐는 말이죠.
두 번째로 여리고 성을 도는 일은 큰 믿음처럼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전혀 군사력이 없음에 불구하고 엄청난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큰 믿음이 아니란 말이죠. 하지만 이것도 역시 개인적인 마음이 달라질 필요는 없는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성을 돌면 된다는 겁니다. 무너지고 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세 번째 기적인 정탐꾼을 영접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보통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 그 정탐꾼을 영접해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만약에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지만 기생 라합은 자기 집에 숨어서 들어온 정탐꾼들을, 그들을 자기와 자기 가족이 구원받는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과연 무엇이 진짜 기적인가?
그렇게 스스로 기존의 자기들이 누리고 왔던 것을 완전히 다 포기하고 버린다는 것은, 그것은 결코 홍해 바다 속으로 걸어가고, 여리고 성을 도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기적이라는 말이죠. 이 정탐꾼들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나라에서 파견된 자들인데, 그러니 애국심을 발휘해서 얼마든지 그들을 신고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기생 라합은 오히려 그 두 사람을 숨겨주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기 나라를 포기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기생 라합은 무엇을 믿고 자기 나라를 버립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나라는 멸망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 내 가족을 이 나라에서 빼내어 달라” 라는 차원에서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는데, 즉 “정탐꾼들을 보낸 이 나라는 단순히 이웃의 낯선 나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심판하실 분이 만드신 나라다” 라는 것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홍해 기적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고 말이죠.
교회는, 구원의 원리를 소개해 주어야 !!
설교 처음에 말씀을 드렸듯이, 교회라는 것은 구원의 원리를 소개해 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구원의 원리 안에는 홍해의 기적을 통해서도 주어지는 원리가 담겨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도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데, 여리고 성이 추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 여리고 성을 돌게 함으로서 배우게 되는 원리가 또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도 전부가 아닌데, 하나님이 보내신 정탐꾼들을 자기 국가와 민족을 버리고 숨겨준, 그런 놀라운 내부적인 변화, 이것이 또 구원의 원리로서 추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그리고 감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여기 히브리서 11장 36절과 37절에도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러면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질질 끌지 말고 결론부터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자기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원리의 끝이고 전부라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나는 또 뭐라고? 괜히 쫄았네. 진작에 그렇게 말씀을 좀 해주시지. 나는 또 내가 매일 같이 굶고 감옥에 가고 돌에 맞아서 죽어야하는 줄로만 알았잖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것은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도 구원을 받았네. 그러면 다 되었네”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관심사가, 마치 기생 라합이 자기 가족이 멸망을 당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정탐꾼들을 자기 목숨을 걸고 반갑게 영접하는,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겁니다. “휴, 살았다. 이제는 살았단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 이전에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그리고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동해바다는 갈라질 수밖에 없고, 저 높은 빌딩들은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보내신 정탐꾼들을 영접해서 모실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29절을 보겠습니다.
(히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차이성 !!
여기에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여러분도 잘 알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면 믿음은 없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뒷부분에 보면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의 한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놓으시고, 자기 백성이 아닌 애굽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길이 나있더라도, 그 길로 통과를 할 수 있는 인간들이 있고, 반면에 가서는 안 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인간이면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밟고 지나간 그 길을 애굽의 군사들이 밟으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그 바다가 도로 합쳐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그만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는데, 도대체 왜 이런 차이성이 발생하는 겁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바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차별화를 시켜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이 원리도 역시 구원의 원리에 포함되는 요소인데 말이죠. 같은 바다 속의 땅이고 길인데,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을 밟아도 되고, 왜 애굽 사람들은 그 땅을 밟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죠.
거룩하지 않는 것은 다 무너져라 !!
여기에 따르는 원리는, 두 번째 기적인 여리고 성의 함락에서 보여집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데 있어서 세 가지의 핵심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하나는 ‘언약궤’고, 다른 하나는 ‘나팔’이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제사장’ 이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앞장서서 나가는데 있어서, 여리고 성은 결코 막아설 수도 없는 멸망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언약궤가 가지고 있는 거룩을 여리고 성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거룩이 없다면 모두 다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하면, 그런 민족과 도시와 문화는 다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나팔이란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하늘에 나팔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바로 그 원리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유월절이나 맥추절과 같은 큰 절기 때는 나팔을 불었는데, 그리고 희년의 경우에도 나팔을 불었다는 것이죠. 50년째가 되는 해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고 손수 일하신다는 선언이 바로 나팔을 부는 일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개시인데, 그러니 사람은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인데, 물론 택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인데, 그러니 여리고 성의 무너짐은 하나님이 친히 개입한 결과라는 것이죠.
앞장서는 ‘제사장’ !!
그런데 왜 제사장을 앞장세웁니까? 모든 사람은 다 거룩하지 않은데, 제사장만은 거룩하다는 겁니다. 그들이 잘나서 거룩한 것이 아니고, 제사장은 온통 거룩으로 뒤집어 쓴 사람인데, 복장부터 시작해서 내의까지가 모두 거룩한 옷이고, 그리고 신체에도 기름과 피를 직접 발라서 죄를 씻어서 거룩이 유지되도록 한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라는 말이죠. 그런 제사장을 앞장세운다는 것은, “거룩한 존재만 남고 나머지는 다 사라져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리고 성의 함락은, 그들이 뱅뱅 돈다고 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무너진다는 것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여리고 성의 함락은, 약속의 땅에서 무너져야하는 모든 성들의 운명을 대변해주는 일이란 말이죠. 즉 “거룩하지 않는 것은 다 무너져야 한다” 라는 것이 구원요소에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들이 만든 성은 무너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첫 번째로 보여주는 증거물이 곧 여리고 성이라는 겁니다. 여리고 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감에 있어서 제일 앞에 있는 성인데, 그러니 뒤에 나오는 성들은 이런 원칙에 의해서 다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거룩의 요소가 덧입혀짐으로서 !!
물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이 아니라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여리고 성은 왜 무너져야 하고, 그리고 그들은 왜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하는 신분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의 나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인해서 그러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원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나의 자질이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덧입혀지는 거룩한 요소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는 어린양의 피라고 했는데, 그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라는 말이죠. 그러니 형식은 필요치가 않다는 겁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절망 가운데 사랑을 느끼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참된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무너져야 하는데,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구나” 라고, 그것이 느껴져야 한다는 겁니다. 뿐만이 아니라, 기생 라합이 악착같이 구원을 받으려고 남의 나라의 정탐꾼까지 숨겨주는 것을 통해서, 그것도 거짓말까지 둘러대면서 말이죠. 우리도 역시 그러한 자세와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무엇이 참된 현실인가?
지금 눈앞에 펼치는 이 월드컵 경기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 끝나는데, 결국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무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기생 라합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 그것이 참된 현실임을 깨닫는 것,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겁니다.
홍해를 모두 다 건넌 것이 아닌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넜지만 애굽의 군사들은 물에 빠져죽었다는 말이죠. 왜 그들은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는데, 그들은 왜 죽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제사장아 앞장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기생 라합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라고 한다는 겁니다.
형식이 아닌, 믿음으로 !!
그러니 형식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자꾸 외곽에서 일을 일으키시는데, 그게 무슨 일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에는 홍해바다이고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따라오고 있어서, 그래서 겁이 나서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여리고 성과 같은 거대한 성이 버티고 있어서 기가 죽기도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이런 큰 성을 짓고 잘 살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거룩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있어도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 여인을 알았는데, 비록 직업이 기생이지만,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여자이었지만, 그 마음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 이라는 겁니다.
기생 라합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데,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정탐꾼들을, 마치 구원자를 모시듯이 모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기생 라합은 그 정탐꾼들과 약조를 했는데, 즉 “내가 당신들을 창문에서 줄을 내려서 생명을 건져준 것처럼, 당신들이 쳐들어 왔을 때도 나와 나의 가족을 구원해달라” 라고 말이죠.
믿음으로, 매달려진 ‘붉은 줄’ !!
그 증표가 바로 창문에 ‘붉은 줄’을 늘어뜨리는 일인데,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정탐꾼들을 구해준 것처럼 자기들의 생명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이때 기생 라합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휴, 살았다. 이제 안심이다!” 라는 마음가짐이란 말이죠. 남들이 보면 붉은 줄을 매달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무슨 아이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그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배팅을 한 것인데, 자기와 자기 가족의 목숨까지 말이죠. 바로 그것이 구원의 기쁨이고 믿음이라고 성경말씀은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도 이런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정말로 살았구나!” 라고 하는 감격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만 내세울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데, 전혀 관심을 둘 만한 일이 아닌 줄 압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이것이 자기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인 줄로 압니다. 그러니 형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7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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