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 11:27-29) 모세와 유월절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11:27-29) 모세와 유월절

정인순 2010. 9. 5. 11:56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47강-히11장,27-29(모세의,믿음)-heb020526.mp3

 

 

이근호

 

모세와 유월절

 

2002년 5월 26일 47강

 

본문 말씀 : 히 11:27-29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어디에서 끄집어 내어 건져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끄집어 내는 것'이 성립이 되려면 그 전에 우리 자신들이 꼼짝없이 갇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비닐 랩으로 얼굴을 감싸게 되면 정말 답답하기 이를데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바늘 구멍만한 숨통이라도 아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질식할 지경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한다할지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못 떠납니다. 알 수 없는 공포에 놓여있습니다.

 

이런 답답한 이 세상의 현황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해서 구원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알 수 없는 눌림과 압력에 인간들이 처하도록 하시고 여기서 전혀 탈출구가 없음에서 오는 절망감도 또한 절실하게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여기서 소위 '끄집어 내어 주심'의 은혜가 비로소 성립합니다. 물론 알 수 없는 공포는 외부에서 옵니다마는 그러나 각자 내부에 있는 우리 마음도 은근히 그 힘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사모하고 반기고 고대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내외적으로 죽이 맞습니다. 한 통속입니다. 이 세상의 세력은 끈끈한 젤리처럼 자꾸만 우리에게 달라 붙습니다. 한평생 인간이 하는 일이란 곧 자기 몸에 달라 붙어 있어 무서운 세력들을 떼내는 데 다 소비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기껏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지만 자신의 최선이 남들에게 최소한이라 할지라도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왜 모릅니까? 자신의 복권 당첨은 수많은 허비된 타인의 돈의 집합인 것입니다.

 

흔히 교육계에서는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저 평범한 존재가 될 뿐입니다. 그 와중에서 무작정 남이 뛰니까 덩달아 뛰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갑부인 정주영 회장도 죽을 때까지 하루 세끼씩 밖에 먹지 않았으며 그 메뉴도 된장찌개였습니다.

 

하루 세끼 된장찌개 먹는 사람이 그토록 부러워서 그 사람 뒤를 따라가기 위해 맹목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겁니까? 어쨌든 이 세상은 알수 없는 세력에 의해 꼼짝 달싹 못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과감이 이 세계에 대해서 전쟁을 벌린 자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나오는 모세라는 분이 그런 분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전쟁에서 이미 자신은 승리했다는 자신만만에서 나온 태도입니다. "너는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도대체 모세가 무엇을 보았기에 여유만만했습니까? 모세는 사람들이 현 상황에서 못빠져 나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도 또한 보았습니다. 이 점이 다른 사람과의 다른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가 처해 있던 상황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성급하게 모세와 한편이라고 간주하지 마시고 모세에게 압박을 가하는 세력쪽에 있음을 사실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은 모세에게 어떻게 압박을 가했습니까? 출애굽기 5: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왕의 이 대꾸가 어쩌면 이 현실세계를 살면서 하나님을 나중으로 돌리는 우리들의 습성을 대변해주고 있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고대 국가에서는 노예들이란 일종의 기계와 같습니다. 국가 내에 모든 힘든 육체 노동은 이들이 담당하고, 예술이나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학문생활이나 종교생활은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 귀족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 같으면 그 노예들을 손쉽게 나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집에 있는 세탁기나 전기밥솥을 덜렁 내놓겠습니까? 그래서 그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인 바로왕은 아주 당연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들을 내놓아야 된단 말이야"

 

더구나 출애굽기 5:17에 보면 보다 바로왕이 인간의 보편적 심상에 합당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자... 여러분 이러한 바로왕의 말에 우리가 격분하고 감히 나설 수 있다고 보십니까? 왜냐하면 소위 신자라고 자처하면서도 평소의 우리들의 생활 태도가 꼭 이런 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얼마나 많은 우선되는 관심사들이 산더미처럼 우리 위에 쌓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우선 순위가 돈버는 것이고 그 다음 순위는 가정이 화목하는 것이고 그 다음 순위가 친구만나는 것이 그 다음 순위는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시간이고 그 다음 순위가 자기 취미생활하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따져도 하나님께 관심두는 것이 저 멀리 떨어진 나중 일이 되고 있습니다. 즉 정 할 일이 없고 심심할 때 그때나 장차 지옥 안가기 위해서 하나님 찾는 식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런 마음 가짐이나 바로왕의 이런 대답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도 없이 일치되는 사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한가하니까 하나님이나 찾는 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평소에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제대로 대변해주고 있는 바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들이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익혀왔고 배워왔던 그 태도입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출애굽기 5:20-21에 보면 이런 사태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솔직한 태도가 나옵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보면 소위 여호와를 찾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오히려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고 모세와 아론에게 벌주기라도 기대하는 것 같은 기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처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보니 인간이 그동안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 세력에서 떼어진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현 세력에 의해서 초죽음되도록 핍박은 받고 있지만 그 세력 자체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는 것이 또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바로왕처럼 "여호와가 뭔데, 혹은 예수가 뭔가 나를 힘들게 하느냐?"하는 식으로 되어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신의 호칭은 사용하면서 신의 뜻과는 정반대적인 행동으로 나옵니다. 자신들을 힘들게 하면 무조건적으로 진리도 아니요 신의 뜻도 아니라는 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일방적인 오해입니까? 이것인 마귀와 똑같은 하나님 개념입니다.

 

이런 개념을 갖고 있는 자들이 과연 이 세상에서 스스로 박차고 탈출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자진해서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세상이 주는 압박감과 힘, 자체를 거부해 버렸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었던 것입니까? 오늘 본문 28절에 보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피'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피가 아닙니다. 타인의 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한 그 피가 유일한 숨톰이요 탈출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라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왜 하나님은 피를 구원의 방법으로 사용했을까요? 기존의 인간 세력권에 그대로 눌러 앉아있으면서 "여호와가 누구관데"라고 하면서 버티던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징벌과 재앙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열가지 재앙'입니다.

 

여기에 모세와 아론이 동원되었는데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무슨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그저 지시용일 뿐입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첫 번째 재앙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표적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술객들도 이 일을 하니 바로왕은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재앙은 나일강 물이 피가 되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애굽의 술객들이 해내었습니다. 세 번째 재앙은 개구리가 온 집안까지 덤치는 재앙입니다. 하지만 애굽의 술객들도 이 일을 행하니 바로왕의 마음은 강퍅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 재앙는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 재앙부터는 애굽의 술객들이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재앙 현상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사는 지역과 애굽 사는 지역에 구별되어 재앙은 전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섯째 재앙은 파리재앙입니다. 여섯째 재앙은 재가 독종으로 변하는 재앙입니다. 일곱째 재앙은 우박이 내리는 재앙입니다. 수확기에 있는 애굽 사람들의 모든 작물들은 튼 타격을 입었습니다. 여덟째 재앙은 메뚜기 재앙입니다. 우박 재앙이 내릴 때 미쳐 다 싹이 나지 않았던 작물들이 메뚜기 재앙으로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의 재앙입니다. 3일 동안이나 애굽 사람의 동네에 깜깜함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입니다. 죽음을 당하는 이 장자 죽음의 자리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서서 여호와를 맞이하게 되면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는 분임이 알게 됩니다. 세상을 질식케 하기 위해 덮힌 그 무서움에 대해서 하나님은 더 큰 무서움으로 대처하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는 것이 많고 배후의 권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인간을 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소용없습니다. 이 무서운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 장자가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하나, 어린 양의 피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의 숨통은 '약속의 피' 뿐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피 바름은 단순히 그 당시에게만 해당되는 일회성 처방일 뿐이고 지금은

소용없다고 주장할련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피 뿌리는 예'라고 되어 있

습니다. 즉 이 '피 뿌림'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것으로 확정짓기 위해 아예 유월절 예식으로 고정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례 요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 분은 성령에 의해서 선지자된 자입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라고 합니다. 도대체 세례 요한이 무엇을 알고 있기에 과감하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세상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종교적 노력과 열성으로 이 세상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신선한 생명의 바람이 들어오는 숨통은 오로지 십자가의 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이 곧 믿는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위선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결코 자신의 힘이나 능력과 희생적 노력으로 구원받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오로지 끝까지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7. 모세와 유월절(히 11:27-29)

---------------------------------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히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구원의 하나님 !!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이라는 용어는, 어디에서 끄집어내어서 건져주시는 분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하나님인데, 그런데 이렇게 ‘끄집어내는 것’이 성립되려고 하면, 그 이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꼼짝없이 갇혀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비닐이나 랩으로 얼굴을 감싸게 되면, 정말로 답답하기가 이를 데가 없겠죠. 참으로 바늘구멍 만한 숨통이라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질식할 지경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 어디서 구멍이 나서 바람이 들어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시원하다는 겁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이렇게 인간들을 질식시키고 있는데,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떠날 수 없는데, 즉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답답한 세상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데, 그러니 당연히 이런 비닐 랩과도 같은 이 세상의 실체를 전제로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알 수 없는 짓눌림에 인간들이 처하도록 하시고, 거기서 전혀 탈출구를 발견할 수 없음으로, 거기서 오는 절망감도 또한 절실하게 느끼게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마치 비닐에 구멍이 생겨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듯이 구원의 손길이 들어오는데, 그러니 여기에서 소위 ‘끄집어 내어주심’의 은혜가 성립하게 된다는 말이죠.

아, 숨이 막혀죽겠다 !!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려고 하면, 먼저 무엇부터 알아야 하는고 하니, 무엇이 우리를 억압하고 눌리고 있는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우리를 그야말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죠. 또한 우리는 그것을 피하면 안 되고, 물론 피할 수도 없지만 제대로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알 수 없는 공포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맞지만, 그러나 우리 내부에 있는 우리 마음도 은근히 그 힘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사모하고 반기고 고대하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외적으로 서로 죽이 맞는데, 서로가 한 통속이라는 말이죠.

제가 언젠가 만화영화를 보니, 풀장이 물이 아니라 젤리로 가득한 것을 보았는데, 그 풀장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젤리가 몸에 달라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의 세력은 끈끈한 젤리처럼 자꾸만 우리에게 달라붙는다는 말이죠.

죽을 때까지 자유롭지 못한 인간 !!

그러니 한 평생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기 몸에 달라 붙어있어는 젤리와 같은 세력들을 떼 내는데 다 소비를 한다는 겁니다. 가정에서는 가정에서 떼고, 직장에서는 직장에서 떼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이처럼 인간은 죽을 때까지 전혀 자유롭지가 못한데, 그런데 이런 인간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해 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죠.

인간들은 자기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런데 자신의 그 최선이 남들에게 최소한이라고 할지라도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누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하면,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복권에 당첨이 되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허공에 날려버린 돈의 집합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성공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운이 따랐다는 것을 부모는 잘 아는데, 그런데 학교나 이 사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합니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저 평범한 존재가 되어서 살아갈 뿐인데,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남들이 날뛰니까 같이 덩달아서 날뛰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왜 명절이 되고 해서 길이 막히면, 어떤 차가 한 대 옆으로 빠져나가면 같이 따라가는 차들이 있는데, 그러면 또 다들 차들도 뒤따라가고 말이죠. 앞차가 같은 목적지로 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냥 앞차를 따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차는 산길로 들어가서 자기 집에서 도착해서 서버리면, 그러면 뒤따라온 다른 차들은 어떻게 됩니까?

혹시 우리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나 않느냐는 말이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자기도 덩달아서 그렇게 따라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러니 모두가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재벌인 정주영 회장도 죽을 때까지 하루 세끼씩 밖에 먹지 않았고, 그 메뉴도 된장찌개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하루 세끼를 된장찌개를 먹는 사람이 부러워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겁니까? 도대체 이런 어리석음은 누구에게 전염이 되었느냐는 말이죠.

어쨌든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지경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감히 이러한 세력에 대해서 전쟁을 벌린 자가 나오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 라는 분입니다. 여기서 27절을 보겠습니다.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는 믿음으로 !!

여기에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전쟁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자신만만함에서 나온 태도인데, 즉 “너는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자신이 있었습니까? 남들은 모두가 다 포기해버린 이 세상에 대해서, 모세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감이 넘쳤느냐는 말이죠. 이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현 상황에서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또한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이고, 그것이 곧 ‘믿음’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닌데, 자기 꿈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그런 것을 부수는 것이 믿음인데, 왜냐하면 그런 것은 일종의 비닐이고 랩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코를 막고 입을 막아서 숨도 쉬지를 못하게 하는데, 그렇게 공포를 주는 세력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비닐을 벗겨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모세가 처해있던 상황은 지금도 역시 동일한데, 우리는 성급하게 “나는 모세와 같은 편이다” 이라고 간주하지 마시고, 모세에게 압박을 가하는 세력 쪽에 있음을 사실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 세상은 모세에게 어떻게 압박을 가했습니까?

여기서 출애굽기 5장을 보겠는데, 2절입니다.

(출 5:2)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가 누구관대?

바로 왕의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라고 하는데, 이러한 대꾸가 어쩌면 이 현실세계를 살면서 하나님을 나중으로 돌리는 우리의 습성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어쩌면이 아니라 이런 바로 왕의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모세 편에 서려고 하지 말고, 바로 왕의 편에 서달라는 말이죠.

‘루이스 멈버스(?)’ 라는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고대국가에서는 기계가 없고, 인간의 몸이 곧 기계다” 라고 했는데, 고대의 기계나 현대의 기계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유기체인지 아니면 쇳덩어리인지, 그러한 차이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당시의 노예들은 일종의 기계와도 같은데, 국가에서 모든 힘든 육체적 노동은 이들이 담당하는 겁니다. 반면에 예술이나 학문생활, 그리고 종교생활과 같은 것들은 당연히 귀족들의 몫이었다는 말이죠. 기계에 불과한 것들에게 그런 것을 누리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로 왕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런 노예들을 달라고 하면 어디 주겠습니까? 집에 있는 세탁기나 전기밥솥을 누가 달란다고 해서, 그것을 덜렁 내놓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바로 왕은 아주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데, 즉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들을 내놓아야 된단 말인가?” 라고 말이죠.

이것이 곧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나서 한 평생을 배우고 익혀서 정착된 사고방식인데, 즉 “하나님이 무엇이기에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는 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가?” 라는 겁니다. 교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무엇이기에 내 것을 달라고 합니까?”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성경해석을 하면서 하나님 편이 아닌 바로 왕의 편에 서야하는데, 바로 왕이 바보가 아닌데,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합리성과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국가를 부흥시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즉 “내 백성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훼방꾼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여호와’ 라는 겁니다. 그러니 바로 왕이 하는 말이, “여호와가 무엇이기에 나의 일을 방해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본분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바로 왕이 아주 의미 심장한 말을 하는데, 출애굽기 5장 17절입니다.

(출 5:17)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출 5:17)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새번역)

너희들,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

성경에서 우리의 본심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많이 있지만, 이 출애굽기 5장 17절은, 바로 왕이 대신해서 우리의 본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해준다는 말이죠. 바로 왕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데, 히브리인들을 보고 “너희들이 시간이 남아서 돌아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고 하는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로 왕은 일을 더욱 더 심하게 시킨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바로 왕의 말에 과연 우리가 격분하고 나설 수 있습니까? 소위 신자라고 하면서도, 평소 우리의 생활태도도 역시 이렇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왕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도,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우리의 우선 순위가 먼저는 돈을 버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가정의 화목이고, 그 다음은 자기 건강을 챙기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자기 취미생활이고, 그 다음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것은 가장 나중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할 일이 없고 심심할 때, 그때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식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래서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냐는 겁니다.

바로 왕이 바보가 아닌데, 전형적인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고, 그런 가운데는 우리도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이런 마음가짐이나, 바로 왕의 이런 식의 대답은 서로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는 겁니다. 한가하면 하나님을 찾겠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평소 우리의 생활방식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는 말이죠.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익혀왔고 배워왔던 태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연 어느 누가 이런 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인간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데,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안 된다는 말이죠. 제 아무리 성경을 백 독을 하고 철야기도를 해도 안 되는데, 돌아서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런 인간이 있다고 하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지, 예배에 참석한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자위하고 칭찬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매우 기쁘게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성령의 역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오죽이나 상식에서 벗어났으면 성령의 역사라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몸이 따라가는 데로 하게 된다면 예배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성령이 역사하시면 강제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인데, 돌아서면 역시 이 세상이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중요한데, 이런 당연한 것을 애써서 아니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대는 위선자 !!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가 나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들을 위선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위선자로 만든다는 말이죠. 본심은 콩밭에 가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가를 불러도, 그래도 1절을 잘 부르는데, 2절에 들어가면 점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3절은 건성으로 부른다는 말이죠. 그것이 너무나 뻔한데, 그런데 왜 자꾸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 출애굽기 5장 21절에 보면, 히브리인들의 솔직한 태도가 나오는데,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20절과 21절입니다.

(출 5: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출 5: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보면,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들이 오히려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참견해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모세와 아론에게 벌을 주기라도 기대하는 것만 같은 기세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적반하장(賊反荷杖) !!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을 혼내주세요” 라고 하는데, 바로 이럴 때 딱 맞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적반하장’ 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서 “그놈들, 참으로 웃기는구나.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온 구원자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대접하다니?” 라고 하신다면, 정말 믿음이 좋은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성경해석에 있어서 항상 좋은 쪽이 아니라 악역을 맡은 쪽에 서라는 겁니다.

그렇게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쪽의 심정을 먼저 헤아려야만 하는데, “바로 내 모습이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모세와 아론의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저는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예수님은 저에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지금 구출이 되어야하는 자들이, 물론 몸은 힘들어서 빠져 나오고 싶어하지만, 하지만 그 생각과 사고방식은 비닐이나 랩으로 둘둘 말려 있기 때문에 도저히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애굽의 것을 그대로 익히고 배워왔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철야를 하고 무엇을 해도, 그렇게 구하는 것은 애굽적인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다른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자기가 익혀왔던 것을 가지고 남들에게 이기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 저 사람에게 없는 것을 저에게 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보니, 인간들이 그동안 자신이 속해있던 세상 세력에서 떼어진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비록 현재의 세력에 의해서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지만, 그런 세력 자체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바로 왕처럼 “여호와가 뭔데?” 라고, 즉 “예수가 뭔데 나를 힘들게 하느냐?” 라고 나오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들은 ‘여호와’ 라는 호칭은 사용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나오는데, 즉 자신들을 힘들게 하면 진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마귀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하나님 개념이라는 말이죠.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과연 이 세상에서 스스로 그 자리를 박차고 탈출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만약에 거기서 스스로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구태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 !!

그런데 모세는 이 세상이 주는 압박감과 힘, 그 자체를 그만 거부를 해버렸는데, 그것을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그가 믿는 그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8절에 보니까, 그 믿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이 ‘믿음’ 이라는 것은, 마치 돈키호테가 칼을 들고 풍차를 보고 적인 줄로 알고 돌진하듯이, 그렇게 달려들어야 합니까? 그게 아니면 지하철에서 “주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하면서 돌아다녀야 합니까? 저기 부산역에 가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메가폰을 들고 전도를 하는 아줌마가 있는데, 그렇게 해야하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죠.

모세는 다른 것을 보았는데, 물론 이런 것도 매일 보았고, 충분히 보았고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다른 것도 보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둘러싸고 비닐이 찢어져서 그만 틈이 생겼는데, 그 틈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바람이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찢어진 틈을 통해서 말이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그 사랑의 뭉치가 흘러들어 오더라는 말이죠.

비닐이나 랩으로 양 사방이 다 싸여있기 때문에 답답한 가운데서도, 하지만 모세는 그런 가운데서도 신선한 하늘의 공기를 맛보았다는 겁니다. 물론 몸에서는 땀이 나지만 코는 벌렁벌렁하면서 하늘의 것으로 숨을 쉬었는데, 즉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껏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세는 두 가지를 보았는데, 이 세상의 담담함과, 그리고 하늘의 신선함을 맛보았다는 겁니다. 그 두 번째를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마지막에 ‘참았으며’ 라고 하는데, 모세는 먼저 참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 28절에 보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라 하는데, 즉 모세는 ‘피’를 알았다는 겁니다.

‘피’ 맛을 본 모세 !!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자발적으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데, 물론 이 세상이 그것을 허용치 않는 것도 있지만, 자기도 그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몸에 익숙한 것이 좋은데, 달리 특별히 무엇을 하다가는 광신도가 되고 마는데, 그런 것은 싫고, 그냥 대중 속에서 묻혀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구원을 해주시는데 어떻게 하십니까? “이 놈들아, 나가자!” 라고 하시면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폭력은 애굽 사람들에게 행사하셨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유월절 피’로서 숨통을 터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답답한 세상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 바로 ‘피’ 라는 말이죠. 자신의 피가 아닌데, 물론 공자나 석가모니의 피도 아니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라는 겁니다. 그 피가 구원을 시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지정한 그 피가 유일한 숨통인데, 즉 탈출구라는 것이죠.

그러면 왜 하필이면 피일까요? 왜 하나님은 피를 구원의 방법으로 사용했을까요? 기존의 인간 세력에 그대로 눌러 앉아있으면서,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하면서 버티던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징벌과 재앙을 내렸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10가지 재앙’ 이라는 겁니다.

10가지 재앙 !!

여기에 모세와 아론이 동원되었는데,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무슨 특별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서 레이저빔이나 미사일이 발사되고 하는 것이 아닌데, 모세의 지팡이는 그저 ‘지시용’ 이라는 말이죠.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표적인데, 그러나 애굽의 술객들도 하니, 바로 왕은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인데, 그러나 이것도 애굽의 술객들이 해내었습니다. 세 번째는 개구리가 온 집안까지 덮치는 재앙인데, 하지만 애굽의 술객들도 이 일을 하니, 바로 왕의 마음은 강퍅해 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술객들이 자기들이 똑같이 하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왕이시여, 이런 것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저 모세와 아론은 별 것이 아닙니다. 왕의 눈이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왕은 그것만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니 우리만 믿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네 번째는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인데, 그런데 이 재앙부터는 애굽의 술객들이 해내지를 못합니다. 동시에 이 재앙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애굽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그만 구별이 되어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을에는 재앙이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잘못했다고 하면서 원상복귀만 시켜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니까, 왕은 그만 입을 닦고 만다는 겁니다.

다섯째는 파리재앙입니다. 여섯째는 재가 독종으로 변하는 재앙입니다. 일곱째는 우박이 내리는 재앙입니다. 수확기에 있는 애굽 사람들의 모든 농작물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겁니다. 여덟째는 메뚜기 재앙인데, 우박재앙으로 이미 피해를 보았는데, 미쳐 싹이 나지 않았던 작물들이 이 재앙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아홉 번째는 흑암의 재앙인데, 3일 동안이나 애굽 사람의 동네에 어둠이 떠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죽음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는,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입니다. 바로 이 장자의 죽음자리에 우리가 서있어야 하는데, 그 죽음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맞이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는 분임이 알게 된다는 것이죠.

이 세상을 질식케 하기 위해서 덮인 그 무서움에 대해서, 하나님은 더 큰 무서움으로 대처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는 것이 많고, 또한 배후의 권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인간을 죽이신다는 말이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했는데, 그분이 바로 죽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무서운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장자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뿐인데, 어린양의 피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이 없는데, 그러니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의 숨통은 ‘약속의 피’ 뿐이라는 말이죠. 모세는 바로 이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죽음의 자리에서 서서,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어린양의 피를 바라보자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자기 자리를 고수한다고 하면 우리는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를 내놓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피 뿌리는 예(禮) !!

어떤 사람들은 이 ‘피 바름’을, 단순히 그 당시에게만 해당되는 일회성 처방일 뿐이고 지금은 소용이 없다고 할지 모르는데,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피 뿌리는 예’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피 뿌림’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것으로 확정짓기 위해서, 아예 ‘유월절 예식’으로 고정을 시켜버렸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유월절의 피를 믿는 것을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누구신고 하니, 하나님은 구출하시는 분인데, 그렇게 되려면 먼저 우리가 어디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있다고 여기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데 막상 바로 왕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빠져 나올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굳이 빠져 나올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이여, 저 모세를 혼내주세요” 라고, 혹은 “하나님이여, 저를 그만 괴롭히세요” 하게 되는데, 솔직하게 기도하면 말이죠. 즉 “목사 말고, 어디 다른 직업은 없습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말도 좀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의 생활인데, 모두들 그렇게 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바로 왕의 부럽고, 애굽 사람들의 생활이 부럽다는 말이죠. 그런데 모세는 그런 애굽의 왕자자리를 거절하고, 찢어진 비닐의 틈 사이에서 불어오는 하늘의 신선한 바람을 맛보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8절에서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을 우리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를 더 본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유월절의 피가, 약속의 피가 우리를 너끈하게 구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믿음’ 이라는 겁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는데,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이 나타났는데, 그분은 성령에 의해서 선지자가 된 자입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도대체 세례요한이 무엇을 알고 있기에 과감하게 이런 발언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먼저 이 세상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는데, 그리고 어느 누구도 종교적 노력과 열성으로 이 세상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신선한 생명의 바람이 들어오는 숨통은 오직 십자가의 피 뿐인데, 이것을 믿는 자들이 곧 ‘신자’ 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더 이상 위선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을 제대로 파악해서, 결코 우리 자신의 힘이나 능력과 희생적 노력으로 구원받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오직 끝까지 예수님의 피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3,14 오전 11시에 마침. - 녹취 구